수필의 가치, 인간적 향내
한국산문 5월호를 읽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삶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스스로를 향상시킨다. 그런 고로 삶의 자기 표현은 가장 뜻 깊은 삶의 창조다. 이 표현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풍부하게 한다. 한국산문 5월호의 수필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는 특성은 인간적 향내다.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이 인간애라는 측면에서 이들 작품에 주목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수필의 인간적 향내는 김옥남의 <5월의 파마>, 조병옥의 <기도 당번>, 주기영의 <산 사람은 산다>에서 죽음과 관련해서 드러나며, 설영신의 <오래오래 나를 품어다오>, 이경희의 <청라언덕 위에 백합>, 백임현의 <텃밭에 머무는 사계>에서 토포필리아로 나타나며, 홍도숙의 <보리 바다>, 조정숙의 <칼의 귀환>, 강혜란의 <우리 가족의 패션쇼>, 김인숙의 <나는 팥이다>에서 가족애로 비쳐진 바 있다. 수필은 체험을 문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해서 그 모습이 완성되고, 인생의 한 단면을 진통과 고뇌로 감싸 안았다고 해서 문학적 가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 열거한 수필에서와 같이 무엇보다도 진솔하게 자기의 심중을 수채화처럼 엷게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산문 5월호 신작은 죽음, 가족애, 그리고 토포필리아라는 주제덕목 위에 수필의 본질적 특성에 부합하는 진솔한 자기고백이 녹아 있어서 인간의 향내를 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작가의 숨결과 체취가 드러나기에 수필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구원에 있다. 허드슨의 정의처럼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어떤 정념이나 어떤 미덕이나 어떤 악덕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대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제재의 다양성을 한 특성으로 하는 5월호 수필이 그려내는 세계는 주로 일상이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김옥남의 <5월의 파마>는 대장암으로 죽은 사위를, 조병옥의 <기도 당번>은 친구의 부친을, 주기영의 <산 사람은 산다>는 아버지를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글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을 기억해 문학적 사건으로 치환시켜 놓는다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 수필이 주는 첫인상은 인간적 따스함이다. 이 중에서도 김인숙의 <나는 팥이다>는 가장 수필적인 글이다. 자아인 ‘나’를 ‘팥’을 제재로 해서 철저히 탐색하고, 규명함으로써 그 ‘나’를 그려내고 ‘나’를 초월하여 자기 긍정을 매개로 해서 ‘나’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팥’을 자화상으로 승화시켜서 패밀리스트로서의 건강하고 맑은 모성원리를 잘 구축하였다.
김옥남의 <오월의 파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소중히 감싸 안으려는 다소곳한 인간적 면모와 함께 인연의 끈을 자기 손으로 영원화시켜 내려는 의지가 드러나 있다. ‘아들보다도 가까워졌던 사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마지막 결말부 “파마하기가 싫다.”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수필이 자기 삶의 한 가운데 녹아 있는 삶을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때, 인연과 가족을 화소로 하는 김옥남, 조병옥, 주기영의 수필들은 그 역할에 충분히 값하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때문에 어떠한 방법과 수단으로든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 줄 둥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둥지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수필의 길에는 혈육과 인연이 남긴 무수한 체취가 서려 있다. 인간의 정 끝에 묻어나는 그리움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좀더 순수로, 향기로 감싸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추모와 향기가 나는 인정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생활이라는 창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사회로 나와 직업을 가지면서 비로소 자아를 실현해간다. 고상한 취미와 이상을 가지고 산다고 해서 삶의 모습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삶은 고상함만 가지고 영위되는 것 또한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나보다도 남을 위해 나를 낮추는 거룩한 인간의 본성을 작품 속에 용해시킴으로서 작가의 이상을 인간적 체취로 승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일상을 윤기있는 터치로 그려낸 수필에서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켜 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상성의 승화 여부는 작가가 인생의 가치나 의미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갖느냐 안 갖느냐에서 판가름 난다. 자식들과 그들의 자아를 실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부모의 헌신적 삶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보리 바다>의 홍도숙, <칼의 귀환>의 조정숙, <우리 가족의 패션쇼>의 강혜란, <나는 팥이다>의 김인숙 작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수필이 형식보다는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말해 주고자 한다.
수필을 형식보다는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중시하는 문학이라고 볼 때,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 무엇을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백임현의 <텃밭에 머무는 사계>는 배반하지 않는 자연의 속성을 그려낸 수필로서, 생태적 상상력과 토포필리아적 세계관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했다고 하겠다. 이들 열 분의 작가가 죽음을 비롯하여 가족과의 인연 그리고 토포필리아를 화소로 수필을 썼다는 데 대한 의미는 크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의 본령은 인간구원에 있다고 하였다. 가족과 자연, 그리고 고향이 가슴 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싱싱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위기에 빠진 현대인 곁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 놓고 있는 이들 작가들은 그 역할, 즉 인간구원을 잘 해낼 수 있는 기본적 자질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