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하고픈 시인>방에 온통 안도현님의 시만 가득 차 있고, 저도 개인적으로 그 분의 시를 관심있게 보고 있어서
여기 그분의 시에 관한 간단한 비평 한 편을 퍼와서 올립니다. 시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격의 글은 여기다 올려도 되는지 몰라 자꾸 두리번 거리게 되네요. (에피고넨)
[진정성이라는 가치 덕목]
-안도현론-
김재홍(경희대 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70년대 시인으로 우리가 정호승에 관심을 가졌다면 마찬가지로 80년대 시인으로는 안도현에 주목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안도현 또한 사랑의 철학을 바탕으로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전개하고 있으며, 진정성을 최대의 시적 덕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진실성, 성실성, 일관성'으로서 '진정성'의 덕목을 가장 소중한 시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러한 진정성이야말로 한용운과 백석, 윤동주 들의 시와 삶을 관류하는 가치덕목이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시와 시인의 길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안도현은 1984년 등단한 이래 첫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하여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이어 이번에 시집 『그리운 여우』를 상재하였다. 정호승이 20여년 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낸 것에 비교해 본다면 10여년 동안 안도현이 다섯 권의 시집을 간행한 것이 우선 눈에 띈다. 그만큼 안도현이 시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을 것인가?
먼저 안도현의 시는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사랑」
아마도 그러하리라. 시인의 말대로 '매미가 울어서/여름이 뜨거운 것'이고, 그러기에 '사랑이란, 이렇게/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뜨겁게 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매미 하나의 울음, 매미 한 마리가 온몸으로 울어대는 사랑의 몸부림 속에서 시인은 세계의, 우주의 순환원리와 이법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 하나의 살아있음을 찬탄하고 그것이 우주의 중심으로서 생명우주. 우주생명을 이루며, 그것을 세상의 제 1가치로 여기는 생각의 체계를 우리는 생명사상이라고 불러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일찍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전문)고 물어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랑과 생명을 자라게 하고 키워가는 힘으로서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절규하지 않았겠는가? 매미 한 마리를 통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으로서 생명의 가치를 읽어내고, 그 생명의 근원과 이법으로서 사랑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상 안도현의 시집 도처에는 이러한 생명우주. 우주생명을 강조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잠자리가 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곳까지가
잠자리의
우주다
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 앉아 조는 동안은
잠자리 한 마리가
우주다
- 「우주」
잠자리 한 마리의 우주 속에서 시인은 우주만물을 운행하는 생명의 원리를 읽어내고 그 생명가치를 찬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생명의 근원적 속성과 어법으로서 시인은 사랑을 지속적으로 노래한다.
①
내 몸 바깥에는
바람이 불고요
겨드랑이 아래로 낙엽지는 소리나고요
이 가을에는
그래야
안쪽이 따뜻해지는가 봅니다
- 「이 가을에는」
②
시냇물의 힘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송사리는 송사리는 거슬러오르고
그때
시냇물이 감추어 둔 손가락지 하나가
물 속에서 반짝하고 빛나네
-「여울가에서」부분
이 두 편의 시에서 '따뜻함과 '빛남'은 바로 생명과 사랑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명과 사랑은 마치 태양이 그러한 것처럼 '빛'과 '열'을 그 근본속성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빛과 열이 바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다면/아, 이것마저 없다면(「퇴근길」전문)에서 '술'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者하고는/인생을 논하지 말라'(「인생」전문)처럼 '밤', '어둠'의 표상으로 제시되기도 하는 것이다. 생명과 사랑은 빛과 열을 속성으로 하기에 '어둠(차가움)/밝음(따뜻함)'과 '외로움/그리움' 이라는 상대축을 지니면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술과 밤차의 상징 속에는 이러한 두 가지의 모순 속성이 잘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생명사상 또는 사랑시학은 안도현 시집의 중심 골격이자 근본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실상 시집을 관류하는 그리움과 외로움의 정서야말로 이러한 생명사상과 사랑시학의 반영이자 표상임은 물론이다.
두 번 째로 안도현의 시집에는 식물적 상상력이 지속적으로 표출되어 관심을 끈다.
그의 시집에는 '왕벚나무/측백나무/사과나무/오동나무/단풍나무/미루나무/홍매화/산수유'는 물론 '애기똥풀/제비꽃/호박덩쿨/수숫대/떡잎/나뭇잎/고구마./낙엽'등 무수한 식물적 심상이 시의 소재, 제재로서 활용되는 것이 그 증좌이다.
①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 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 「봄비」
②
측백나무 울타리에 내려 앉는 참새떼,
가까이 가도 날아가지 않는다
고마워라
나를 측백나무 한 그루 쯤으로 여기는
-「측백나무가 되어」
③
너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 「단풍나무 한 그루」
인용 시편들에는 왕벚나무, 측백나무, 단풍나무들이 주요 심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들이 단순한 식물심상이 아니라 생명적인 교감, 또는 인간과의 조응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①에서 봄비와 왕벚나무는 서로 생명의 교감을 나눔으로써 생명현상과 사랑의 정감을 동시에 드러내 준다. 시②에서도 '새 -측백나무-나'의 호응에 의해 식물, 동물, 인간이 하나로 화응을 이룬다. 또한 시③에서는 '비 -단풍나무-나'가 그리움이라는 촉매로 하나의 근원적 동일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근원적 동일성은 바로 생명현상이며 그 원동력으로서 사랑의 마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생명과 사랑의 표상으로서 식물심상은 그대로 인간과 자연, 자아와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조화를 이루는 근원적 촉매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바로 이 점에서 안도현 시에서 식물적 상상력이 시상을 전개하는 상상력의 중요한 동인이자, 바로 그 자체가 생명사상을 형상화하는 방법론적 실체가 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애기똥풀 하나, 작은 새 한 마리, 그리고 속삭이는 빗방울 하나에서 인간이 인간 자체만일 수 없는 생명공동체의 원리를 섬세하고 따뜻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실상 이러한 시인의 시가 시의 최대 가치덕목으로서 진정성을 형성하는 실질적 기반이 됨은 물론이다. 아울러 80년대 그가 전개해온 바람직한 인간공동체 실현의 노력으로서 민족문학운동이 90년대에 이르러 생명공동체운동으로 확대. 심화되면서 마침내 우주공동체운동으로서 생명사상의 지평을 열어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하겠다. 그만큼 그의 시가 포괄성과 보편성의 세계로 확대되고, 진정성의 내면세계로 심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식물적 상상력은 그의 시에 상상력의 운동성을 강화하고 시가 서정적 실체를 확보함으로써 내용성과 표현성, 사상성과 예술성을 확보하게 해주는 원천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세 번째 그의 시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자책과 내성이 제시되는 것과 함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나뭇잎 하나가
벌레 먹어 혈관이 다 보이는 나뭇잎 하나가
물 속이 얼마나 깊은지 들여다보려고
저 혼자 물 위에 내려앉는다
나뭇잎 하나를
이렇게 오도마니 혼자서 오래오래 바라볼 시간을 갖게된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 「나뭇잎 하나」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 「무식한 놈」
내 키 만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한 달에 3만원 내는 방 한 칸을 얻다
외로움도 오래 껴안고 자다보면
애첩이 되리
- 「지상의 방 한 칸」
이 세 편의 짧은 시를 관류하는 것은 자책과 내성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백석 시인의 「흰 바람벽이 있어」나「남산의주유동박시봉방」에 보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들여다봄과 자책 및 외로움으로서 생의 본질에 대한 응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세계를 뜨겁게 껴안으려 노력하면서도 거기에서 시선을 거두어 자기 자신의 안으로 향하려는 내성의 자세 또는 내면화의 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또 어쩌면 '미움-그리움- 가엾음'으로 이어지는 윤동주의 「자회상」이나 「서시」로 연결되는 마음자세이며, 이 점에서 앞에서 논의한 정호승의 시세계와도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자질이 된다.
바로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반성하면서 자책하고 회의하면서 과연 어느 것이 바람직한 삶의 길이고 시의 길인가를 묻는 내면화의 의지 또는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시인은 비로소, 뜨겁게 진정성의 세계로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실상 그의 공동체 의식이나 역사의식이 빛을 발하고 생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처럼 진지한 내면 탐구와 준열한 자기 성찰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내면화의 의지와 비판적 자기성찰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또한 투명하게 하려는 자유에의 지향성을 보여줌으로써 시적 설득력을 강화한다.
이 세상을 점점이 묘사하며 내리는 눈송이
이 풍경 한쪽 구석에다 내 이름 석자 쓰고
붉은 낙관이나 하나 꽝, 찍어 버려?
너, 이도둑노옴!
무엇을 더 가지겠다는 거냐?
내 이름을 후려치고 가는 눈발의 회초리
내 마음 문득 더워
산수유 열매 붉어라
-「겨울산에서 뉘우치다」
사실 아름다운 풍경 하나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욕심이 뭐 그리 대단한 탐욕이겠는가? 그렇지만 이 시에서 그것은 '너, 이 도둑노옴!/무엇을 더 가지겠다는 거냐?//내 이마를 후려치고 가는 눈발의 회초리'와 같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솟구치는 욕망의 한 상관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기에 ' 내 이마를 후려치고'처럼 탐욕을 덜어내고 가볍고 투명함으로써 스스로 따뜻해질 수 있는 '텅빈 충만'으로 진정한 깨침의 세계, 자유에의 길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인의 80년대에 있어서 인간공동체운동이나 90년대 들어서의 생명공동체사상도 기실은 생명의 본성으로서의 사랑, 생명과 사랑의 본질로서 자유에의 길에 다름아닌 것이라 하겠다. 생명을 있게 하고 그것을 키워주는 원동력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그러한 생명과 사랑의 본성으로서 자유야말로 안도현 시의 주제이자 이상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상 그의 시집에서 시상 전개의 주요한 견인력이 되는 견자(見者)의 정신이나 역설도 실은 뒤집어보기, 새롭기 보기, 주인이 돼서 바라보기로서 주체의 정신, 자유의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