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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그리고 다뉴브강의 죽음의 물결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비행기로 날아들면 내리는 공항이름이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Liszt Ferenc International Airport)이다. 인천 공항이나 김포 공항과 같은 지역 이름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은 리스트 페렌츠가 무슨 뜻일까 하고 의아할 수도 있다.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 는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t 독일어 이름)의 헝가리 식 이름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우리처럼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나중에 쓴다. 헝가리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국제공항의 이름을 리스트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그들의 음악가 리스트를 사랑하고 또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 Emlékmúzeum) 기념박물관
3박4일의 부다페스트 여정의 마지막 날 우리는 시내에 있는 리스트 페렌츠 기념박물관(Liszt Ferenc Emlékmúzeum)을 방문했다. 리스트를 사랑하는 헝가리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원래 음악원이었던 장소를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으로 1986년 9월에 개관한 곳이다. 내부에 리스트가 평소에 사용했던 악기와 악보 등이 전시돼 있는 곳에서 그의 음악 생활의 자취를 보고 싶었다. 메트로 1호선을 타고 Vörösmarty utca 역에서 내려 조금 걷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리스트 박물관
이층의 박물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리스트가 작곡할 때 사용했던 피아노를 비롯해서 평소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보며 리스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이 다르겠지만 리스트의 박물관에서 나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 것은 그의 초상화와 그의 손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은 조각이었다.
리스트의 손
실신하는 귀부인들, 하이네도 놀란 리스트 열풍(Lisztomania)
아홉 살 나이에 공개 연주를 갖고 십대 초반에 유럽 각지에서 명성을 날렸던 당대 최고의 피아노 비르투오조였던 리스트는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사를 화려하게 빛냈던 전설적 인물이다.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12 도의 음정을 보통 사람이 옥타브를 치듯 편히 쳤다고 하는 그의 손을 보며 나는 그가 피아노에 앉아 저 손을 건반 위에 내려놓으면 그의 현란한 기교와 제스처 그리고 뛰어난 용모에 유럽의 귀부인들이 소리를 지르다 실신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연주회에서 실제로 이 광경을 목도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만들어낸 단어가 리스트 열풍(Lisztomania)이다.
그의 곁에는 항시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들이 있었다. 여러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살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삶에 대한 고독한 성찰이 있었고 언젠가는 가야 할 성직자의 길이 있었다. 숱한 방황 끝에 마지막 연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난 뒤 그는 순회연주보다는 작곡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열매로 주옥 같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녀와의 결혼이 불발로 끝나자 그는 표표히 사교계를 떠나 남은 생애를 성직자로 살았다. 그의 박물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에서 내가 만난 리스트는 사제(司祭) 리스트였다.
리스트의 초상화
사제(司祭)로 마감한 리스트의 생애
그의 초상화를 보면서 나는 그가 평소에 스스로를 가리켜 ‘나의 절반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이고 나머지 절반은 헝가리의 집시’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의 말과 함께 그의 작품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aphsody)’도 떠올랐다.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서유럽에서 주로 활약했던 그는 만년에 헝가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헝가리 집시들의 민속곡을 모으고 정리하며 작곡한 곡이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aphsody)’이다. 거의 삼십 년에 걸쳐 완성된 19곡으로 된 이 곡은 리스트의 헝가리 사랑을 보여준다. 리스트의 초상화 앞에서 내게 떠오른 곡은 광시곡 5번이었다. 19곡 중에서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이 곡이 무겁게 내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유는 ‘영웅 엘레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이 삶의 마지막을 사제(司祭)로 마감한 리스트의 생애와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생각을 아는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그의 초상화에 눈인사를 하고 아내와 나는 박물관을 나왔다.
다뉴브강의 야경 크루즈
그날 밤엔 다뉴브강 야경 크루즈를 했다. 유럽 제일의 야경이라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유람선을 타고 감상하는 다뉴브강 야경 크루즈는 부다페스트 관광에서 ‘이것만은 꼭’에 반드시 들어가는 필수 코스의 하나였다.
부다페스트 야경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던 그날은 유람선타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고 유람선 운행이 중지될 정도는 아니어서 우리는 시간 맞추어 가서 배를 탔다. 배 안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보통 때는 활짝 열려있을 배 양편이 비를 막기 위해 비닐 막으로 덮여있었다. 배가 중요한 야경 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우루루 이편 저편으로 몰리면서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고 손으로 비닐 막을 닦아냈다. 드디어 야경 크루즈의 정점이라는 국회의사당 가까이에 오자 사람들은 거의 다 일어섰고 비닐을 통해서라도 사진을 찍느라고 모두의 스마트 폰과 카메라가 바삐 움직였다.
그날 유람선에서 찍은 국회의사당 야경
우리가 탔던 유람선 선착장 삶과 죽음은 강물 위에서 갈리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거칠게 흐르는 다뉴브강의 물결은 더욱 검고 탁해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선착장에서 가까운 트램 정거장을 향했다. 이상하게도 사방에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조용하기만 하던 부다페스트의 밤이었기에 앰뷸런스 소리는 시끄러우면서 공연한 공포감까지 가져왔다. ‘이상하네요, 웬 앰뷸런스 소리가 이렇게도 요란하지요?’하고 아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드르륵거리는 스마트 폰 소리에 잠이 깨었다. 스마트 폰엔 수 십 통의 카톡이 와있었다. ‘웬 카톡이 이렇게……’하며 카톡을 열자 한국의 딸로부터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이 모두 우리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특히 딸의 카톡은 ‘아빠 엄마 괜찮지요, 괜찮은 거지요, 제발 답 좀 해줘요,’라고 거의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다 어느 친구의 카톡에서 ‘어제 부다페스트에서 유람선이 침몰해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고를 당했다는데 자네는 괜찮겠지? 연락 좀 주게,’라는 비교적 침착한 안부 메시지에서 비로소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궁금해 할 딸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무사하다는 답 글을 대충 보내고 뉴스를 보았다.
무서운 소식
무서운 소식이었다. 어젯밤(5월29일) 9시께 한국인 관광객이 탄 유람선 ‘허블레아니(헝가리어로 인어)호가 다뉴브강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침몰하여 배에 탔던 한국인 33명과 현지 승무원 2명중 7명이 사망하고 7명이 구조됐으나 21명이 행방불명이란 소식이었다. 허블레니아호는 아주 소형 유람선인데 뒤에 오던 대형 유람선 바이킹 시긴호에 받혀 불과 몇 초 만에 가라앉았고 현재 다뉴브강의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어져 구조작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뉴스였다.
나는 가슴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느새 옆에 와있던 아내도 거의 울상이었다. 배가 침몰한 시간이 9시께였으면 우리가 탄 배가 떠나던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을 때 우리는 야경을 보겠다고 배를 타고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침몰한 곳이 국회의사당 근처였으면 우리 배는 불과 30분 정도 뒤에 그곳에 도착했다. 우리 배 밑에는 침몰한 허블레니아호가 있었을 터이고 그 속에는 탈출을 시도하다 뱃전을 붙잡고 죽어간 사람들이 물위를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자 그만 울음이 복받쳤다. 그 와중에 야경을 보겠다고 설쳤던 내 자신이 너무도 미워졌다. 사고가 난지 불과 얼마 안되었기에 부다페스트 당국의 별다른 조치가 아직 안 취해졌기에 계속 그곳으로 밀려오는 유람선들이 무심하게 침몰지역 위를 지나갔을 생각을 하니 더더욱 희생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숙소주인(Airbnb Host)인 카타(Kata)였다. Are you okay? 라고 묻는 그녀의 물음은 거의 신음이었다. 우리가 유람선을 탄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사고 소식을 들은 자정부터 계속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밤새 전화를 안받았으니 그녀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짐작이 갔다. 괜찮다라고 하는 나의 대답에 ‘Thank you God, thank you God,’을 연발하며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하나님, 왜입니까? ? ?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하겠지만 내 입에선 ‘하나님, 왜입니까?’라는 절규가 먼저 터져 나왔다. ‘참새 한 마리도 당신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들이 참새보다 못합니까?’ 나는 다시 허공을 향해 외쳤다. 죽은 사람 중에는 평생을 벼르다가 처음으로 외국 나들이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엄마 손 붙잡고 나온 어린 아이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가슴이 아팠다. 옆으로 다가온 아내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같이 기도해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유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어요.’ 아내의 말이 맞았다. 어떤 땐 도무지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고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놓아두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아내와 같이 눈을 감았지만 기도는 잘 나오지 않았다.
‘사(死)의 찬미(讚美)’
눈을 감은 내 머릿속에서는 어둔 밤 비 내리는 다뉴브강의 검은 물결 속에서 죽어갔을 사람들의 고통과 비명소리가 큰 아픔으로 출렁거렸다. 기도에 집중하려 할수록 머릿속으로는 다뉴브강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물결과 더불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절규와 그들을 향해 애타게 부르짖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들의 애끓는 목소리에는 물결 따라 넘나드는 슬픈 가락이 있었다. 귀에 익은 가락이었다. 그랬다. 그 구슬픈 가락은 오래 전에 들었던 ‘사(死)의 찬미(讚美)’였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윤심덕(尹心悳)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Ivanovich)의 곡 ‘다뉴브강의 잔 물결’의 선율에 가사를 붙인 노래이다. 윤심덕이 왜 하필이면 다뉴브강 왈츠의 선율을 죽음의 찬가로 바꾸어 불렀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한 번 와보지도 못한 다뉴브강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그녀는 이 강을 주제로 ‘사의 찬미’를 노래했을까? 그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결국 연인과 같이 현해탄에 몸을 던져 죽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뉴브강은 요한 슈트라우스나 이바노비치가 노래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물결의 강이 아니었다. 다뉴브강의 물결은 죽음을 품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그 죽음을 깨달았기에 시인 김춘수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시(詩)로 노래했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은 ‘다뉴브강의 잔 물결의 선율’에 이끌려 죽음을 찬미하다 죽었다. 그리고 어젯밤 다뉴브강의 큰 물결은 한국 관광객을 죽음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그때까지 내가 다뉴브강에 대해 품어왔던 모든 감정을 내려놓았다.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3박4일의 일정을 마치고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그날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서는 ‘사의 찬미’의 허무한 가락이 흘렀다.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2019. 6월 석운 씀
첫댓글 단 30분 차이로 삶과 죽음의 교차를 경험하셨군요. 그것도 머나먼 이국 땅에서 여행 도중에.
석운님께서 평소에 즐기고 사랑한 음악가들을 찾아 나선 여행의 마무리치고는 너무 무겁네요.
다뉴브강의 경쾌한 왈츠가 우울하고 어두운 장송곡이 되어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