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참혹(慘酷)한 상처
- 영화 국제시장 관람기 -
행촌수필, 안골은빛수필 이윤상
주인공 윤덕수(황정민 분)는 여동생을 엎고 군함의 외벽에 매인 동아줄을 붙잡고
죽을힘을 다하여 갑판에 올랐으나, 등에 엎인 동생 막순이는 떨어지고 없었다. 덕수의 손에는 동생의 찢어진 옷소매 한 자락뿐이었다. 덕수 아버지는 동생을 찾으러 배에서 내리면서 덕수에게,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다. 가장은 가정을 굳게 지켜 일으켜야 한다. 나는 내려가서 네 동생 막순이를 찾아야 한다.”
흥남부두 피난민 수송함에서 내리는 아버지와 가족이 생이별하는 장면은 관람객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밧줄에 매달리며 울부짖는 북한 피난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싣기 위해 무기를 배에서 내려놓는, 미국 해군함장의 인간애가 감동을 자아냈다.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23일 흥남부두에서 철수하는 미군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였다. 6‧25 전쟁사에는 미군 10군단장 아먼드 소장은 참모장 에드워드 포니대령의 간청을 받아들여, 북한양민을 구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먼드 소장은 인간애를 발휘한 민족의 은인이었다. 흥남부두 철수작전 영상을 나는 통일교육원 교육을 받으면서 본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 피난민 수송선이 출발한 뒤 바로 미 공군은 흥남비료공장과 군사시설에 융단 폭격을 했다. 그 배를 타지 못한 양민들은 폭격의 화염(火焰)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흥남 부두에서 군함을 탄 피난민은 약 10만 명으로 거제도에 정착했다가 부산국제시장 등 여러 곳으로 흩어져 생계를 이어갔다.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나온 덕수네 가족은 아버지가 가르쳐준 국제시장 피난민촌『꽃분이네』라는 고모네 가게를 찾아가서 정착한다. 덕수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길거리에서 꿀꿀이죽을 빌어먹으며, 구두 닦기, 막노동, 생선궤짝 짜기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남동생은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은 막막했다. 덕수는 청년으로 성장했으나, 동생 학비를 댈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1963년 백영훈 박사가 이끈 경제사절단의 외교로 서독광부를 모집했다. 파독광부 모집에 응모하여 덕수는 쌀가마니(60kg)를 들어 올리는 체력평가에 당당히 합격하여 서독광부로 간다. 탄광에서 100m 지하터널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데, 땀으로 멱을 감고 탄광이 무너지거나 가스폭발사고로 사망자나 부상자가 많이 생겼다. 덕수는 3년에서 5년으로 기간을 연장하며, 광부 노임을 집으로 보내서 동생 학비도 대고 작은 집도 마련했다. 독일에서 파독간호사와 사귀게 되었는데, 간호사 영자는 독일에 머물고 덕수만 귀국하는 이별의 장면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별이 서러워 영자(김윤진 분)는 성실한 청년 덕수를 용감하게 끌어안고,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덕수는 귀국하여 고모네 가게 꽃분이네 집 간판도 광고사에서 산뜻하게 제작하여달고, 수입상품 잡화상가게를 하면서 알뜰하게 생계를 이어간다. 흥남부두에서 생이별하면서 마지막 당부한 아버지의 유언을 잘 지켜 가장 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시체를 닦고, 중환자들 대소변을 받아내는 피눈물 나는 간호사를 더 하겠다고 했던 영자는 3개월 뒤 어느 날, 갑자기 국제시장 꽃분이네 가게로 덕수를 찾아왔다. 영자 뱃속에 3개월 된 덕수의 아이를 품고 왔다. 덕수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를 기르면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기반이 없는 덕수는 생계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덕수는 주경야독으로 독학을 하여 검정고시로 평생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산해양대학교에 합격한다. 그러나 가난의 끈을 놓지 못하고 여동생의 결혼비용을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를 돌봐야 했다. 선장이 되겠다는 꿈은 접어야 했다. 그 무렵 베트남 10년 전쟁이 끝나가고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할 노동자를 모집했다. 덕수는 베트남 전후복구사업 노동자로 다시 출국한다. 그때도 베트남은 게릴라 전투가 도처에서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덕수는 어느 날 베트남의 밀림 속에서 지뢰의 포탄에 맞아 다리를 잃는 불행한 사고를 당한다. 2년 뒤 의족을(義足)을 하고 돌아온 덕수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아내, 영자와 덕수네 가족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나누는 장면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마침내 덕수의 고모도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다. 덕수는 고희를 넘긴 노인으로 부인과 함께 아버지 제사를 정성껏 모시면서 65년 전의 참혹한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안정되게 살아가는 노후의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1983년 KBS의 남북이산가족 찾기 영상에서 미국에 입양되었던 막순이가 나와서 덕수와 상봉하는 장면은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나라에는 덕수네 가족처럼 흥남부두에서 피난해서 남하한 동포들이 10만이 넘는다. 누가 그런 비참한 전쟁을 일으켰는가? 북괴 김일성이 남조선해방이라는 허상을 갖고, 소련의 탱크와 무기를 지원받아 불법 남침한 전쟁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국군과 양민이 300만 명, 미군(3만 명), 유엔군이 30만 명이나 사망했고 1천만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런데도 남한의 친북좌파들은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최근에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심판에 반대하는 데모를 일삼고 있으니,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란 말인가. 65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흥남철수작전을 하면서 북한피난민을 구출해 낸, 에드워드 포니대령의 손자가 현재 서울대학교에 유학하고 있다. 그 학생이 서울대생들에게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와서 흥남부두 철수할 때, 10만의 북한동포를 구출했다고 설명하니, 서울대 학생들은 전연 모른다고 하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깜작 놀랐다. 국제시장 영화는 개봉한지 2주 만에 관객 500만을 돌파했다니 다행이다. 6‧25전후세대들이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올바른 국가관과 역사관을 갖게 되기 바란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는 눈물을 닦으면서 극장을 나왔다.
-2014. 12. 28.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