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소니
#이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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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순은 실수로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 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 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별명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였다. 이는 야인시대 1부에서 장도리가
언급한 바 있다.
부농 이기정(1878~1943년)과 그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위인 형 이성덕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와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
그에 반해 이성순은 어릴 적부터 일본제국 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골목대장 노릇을 했었다.
보증을 잘못 들어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성순은 1932년부터 밀무역인
도비노리에 뛰어든다.
그의 특기는 공중걸이 박치기 즉, 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와 무릎치기 즉, 니킥기술과, 팔꿈치 공격이었고
단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대중매체에서 이성순이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은 싸움의 달인으로 그려지지만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았고 1934년도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 무슨 태생이 싸움에
귀재이고 하던 건 아니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 이북 출신 조폭들의
큰형님 격으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과 정팔의 압록강동지회와
대동강동지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
단합하는 성격이었다. 이 가운데에 이성순이 옵저버
역할을 하면서 중재를 담당했다.
정식 직함은 압록강동지회 감찰부장.
6.25전쟁 시기에는 서북청년단 인원으로 구성된 KLO부대원으로 전쟁에 참가했고 3.1공수유격단의
부부대장 자격으로 한국군 최초 공수 강하훈련을 교육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의 아들이 공개한 증거 자료. 당시 아들이 사이트에 남겼던 설명에 따르면,
사진에 적힌 글씨는 사진을 보는 이들 기준이 아닌
사진에 찍힌 병사들 기준이다. 즉, 사진에서 이성순은
우측 하단의 키 큰 사람이며 그 오른쪽이 소대장이다.
이성순의 큰 키를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 서울의 조폭세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와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되었는데,
시라소니는 1.4 후퇴 당시에 부산에서 수많은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의
사무실에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순은 돈을 뜯어가며 동대문시장의
점포 양도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였다.
처음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서
돈을 두 번 빌리고 점포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은 50만 환(5억 원)에 달한 거금을 내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 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좀 내달라'는 요구였지만,
사실 그전에도 이성순은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었다. 이때문에 동대문패의 간부인 김사범, 조열승, 임화수 등 간부들이
이성순에게 분노하고 이정재도 자존심이 워낙 상했다.
그래서 이권분산과 조직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몽둥이,
둔기, 손도끼 같은 흉기로 이성순을 잔혹하게 린치했는데, 이 사건이 '시라소니 동대문 린치사건'이다.
린치 당시의 정황도 인물 사이의 주장이 상당히 엇갈렸는데, 이성순은 당시에 종로 5가의 반도 병원으로 옮겨졌고,
얼마 뒤에 백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사건 이후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됐다.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이고, 후유증 또한 심각했다.
지식백과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