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평면
행정리구역 : 법정리 19개 / 행정리 32개 |
인구수 : 2,452명(남 1,178명/ 여 1,274명) |
가구수 : 1,393호 |
면 적 : 77.86㎢ |
면 장 :김이문 |
주 소 :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장평중앙길 42 |
◆ 장평면 용강리 1구마을
0.용강1구는 면소재지와 인접해 있는 마을로 군청소재지와는 20Km 지점에 있는 해발 약160m의 평야 마을이다0.수자원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0.등촌과양촌.창몰.탑동이 거의 한 마을처럼 생활하고 있다.0.여의저수지와 용강저수지의 물이 마을을 관류하고, 마을앞으로는 보성강 지류인 광대천이 흐르고 있어 영농은 물론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37세대,62명(남:27명.여:35명).2015년7월1일 현재.0.마을이장 : 정을식(862 - 3417, 010 - 8900 - 3417) 0.풍수자리설 : 용두산 우안의 낙맥이 뻗어 내려 지형이 용머리와 같다하여 용강 이라 하다 함.0.마을의 연혁.마을 앞의 支石苗나 솔대(솟대) 거리 등으로 미루어 삼한시대부터 마을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자작골에서는 장택 高氏들이 살아다는 口傳도 있다..본래 장택현 지역으로 고려 때 장흥부에 편입되고 조선조 때는 정서면에 속해었다. 자작공에서 장택고씨들이,조선후기에 長東 朝陽에서 韓四文이 이거해와移舍洞이라 부르기도 한다..구 읍지에 龍岡이라는 지명이 없는 것을 보면 倉村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평촌리 탑동 1부를 분리하여 龍岡이라 하였고, 1926년 日人이 들어와 松岡이라 하기도 했다.1986.7.1일 용강1구로 개칭.현재의 창몰,사창,장택,용강 등이 옛날에는 한 구역으로 古社里 移舍洞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상촌과 하촌은 본래 한 마을이였는데 마을의 규모가 커지자 웃마을을 상촌아랫마을을 하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 : 6.25사변후 장평면의 대부분의 마을이 소개되다시 피 하였으나 용강은 피난지 가 되어 많은 사람이 경찰의 보호아래 수복이 될때 까지 함께 살았었다.0.문화유적.유물.悅樂齊 : 용강리 청용등에 있다. 장흥 임씨 挻정英의 묘각, 후손 奭鉉, 圭鉉이 중건 하고 誠齊 任態柱가 記하다. 용강리 강학소로 幕山 曺炳振씨가 강학하였으며 임태일씨가 6.25후까지 강학 하였다..상촌 고인돌군 : .솟 대 : 솔대배미에 솔대(솟대)가 섰었음..府使 朴候京壽善政碑 : 철종 5년(1854년)부터 이듬해인 1855.12월까지 장흥부사 박경수가 재임하는동안 쌀 거두는 창고를 폐하여 지역민의 근심을덜어주었다 하여 장동.장서.부평사람들이 그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1857.12월에 세웠다.0.민속놀이 .당산제(동제) : 삼추정이 당산나무 아래서 당산재를 지냈다고 전함..농악 : 정월 보름, 유두, 칠석에 농악을 함..정월보름에 불싸움을, 돌싸움을 함. 오곡밥을 지어 먹음..팔월 주석절에는 둥촌과 종로보기를 함.
◆ 장평면 용강리 2구마을
0.용강 2구 창몰마을은 장평면소재지가 위치 해 있는 마을로 군청소재지와20km 지점에 있는 해발 약 160m의 평야 마을이다. 원래 용강1구와 한 마을이었으나 198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새로운 행정리로 분리된 마을이다.0.동남으로 장동에서 흐르는 보성강 상류(옛날 이름으로는 양자강)의 하천이 있으며, 동으로 장택마을과 인접해 있다0.마을은 대부분 상가로 형성되어 있고 따라서 주민의 대다수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0.주민의 유입이 활발하여 인구의 이동이 잦고 마을의 전통은 아직 확립되지 않고 있다.0.1977년 소도읍 가꾸기로 시가지는 깨끗한 편이며, 도로도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91세대.150명(남 75명, 여 75명) 2015년 7월 1일 현재0.마을이장 : 박주식(862-3379, 010-6604-0664) 0.풍수지리설 : 용강 1구 참조.0.고씨가 처음 입주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고증하기는 어렵고 조선 중엽 국세수납창고가 있어 장평,장동,유치,화순 이양 등 4개면에서 양곡을 거두어 보관하다가 수로로 양곡을 운반하는 역활울 했던 창고가 있어 사창 또는 창몰로 불리어 졌다 한다.0.1947년(정묘지)에는 용강1구외 함께 창촌으로 불이워 졌고, 1979년(호구총수)에는 사동으로, 1910년(경술지) 이후에는 용강으로 불리워졌으나, 1977년소도읍 가꾸기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1986년7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용강2구로 분할 개편 되었다.
◆ 장평면 용강리 탑동마을
0.장평면 소재지에서 다시 장동면쬭으로 거슬러 500m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160m의 평야 마을이다.0.서쪽으로는 용강리와 접해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장동면 북교리와 경계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웅치에서 흐르는 보성강 지류를 끼고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30세대 52명(남:27명, 여:25명) 2015년 7월 1일 현재.0.마을이장 : 남지현(862-3129, 010-3619-3129) 0.풍수지리설 : 용두산에서 내려 뻗은 산맥이 지네가 하늘로 날으는 형국이다 하여 飛天蜈蚣 이라 하고 吉志라 일컬어져 있다.0.마을의 연혁.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高山寺터가 있고 塔의 터가 마을 곳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1950년경 강원도 감찰사 宣寧南氏 南洽이 전남 진도에서 유배생활 둥 풀려나현재의 光平里로 돌아와 사망함에 따라 그 후손 南相參이 남흡을 사모하는 마음에 代墓奉祀를 하기 위해 탑동으로 이주, 정착하였고 그 후손이 펴져 동족마을을 이루었다.0.하탑동 역시 光平에서 南允祐가 이주하였고, 아들 秋煥씨의 자손이 마을을이루었다.0.탑이 많이 있다하여 탑골 또는 탑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 : 옛날에는 60여호가 살면서 동규를 엄정히 하여 과실을 엄격 히 다스리고 선업을 권장하여 모범마을로 일컬어져 왔다. 6.25를 전후해서도 마을에 불행힌 일이 없었다.0.고산사 : 장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2km 지점에 위치.(용강리 산29번지).고산사석불입상 :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데 제161호.이석불은 정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2km 떨어진 곳인데 근년에 새로지은대웅전 안에 동남향으로 봉안되어 있다.총높이 268cm, 머리높이 86cm, 눈너비 86cm, 어깨너비 128cm, 몸높이 200cm, 광배너비 195cm 이다.
◆ 장평면 등촌리 등촌마을
0.등촌마을은 용두산맥의 능선 중앙부에 위치하여 장흥읍에서 북쪽으로 21km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km 거리에 자리한 해발 180m의 중산간마을이다.0.남쪽으로 용강리,서쪽으로 여의동과축내리,북쪽으로 선정리,동으로는 양촌리 와 인 접해 있으며 능선지대이므로 산지와 밭이 많다.0.소재지와 가까워서 교통은 좋은 편이다.0.1906년 양강영당이 건립되어 선비들의 출입이 빈번하고 제례를 본받게 되어숭조정신과 충효정신이 높다.0.세대 및 인구 : 42세대 인구76명(남 : 31명,여자 : 45명),2015년 7월1일 현재.0.마을이장 : 허광회(862-5858, 010-3649-4836) 0.풍수지리설 : 용두산맥이 내려 뻗은 4개 마을(양촌,등촌,용강,창몰)을 萬人之地라 하여 사람 이 운집할 형국.0.유원수라는 풍수가 지력을 보존하려면 수구맥이므로 탑을 세우라하여 3개의탑둥 1개의 6층 석탑이 마을 앞에 서 있다.0.마을의 연혁.고려말 白,文,任씨 3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柏洞(잣골)이라 하였다 하나 지석묘13기가 집단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전부터 성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 후 白榮三이 거주하면서 富谷이라 하였고 文浚洙가 거주하면서 월평이라하였으며 金天基가 거주하면서 旋洞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이곳지형에 따라 登村(嶝)이라 하였다..1747년 정묘지에는 부곡과 등촌으로, 1789년 호구총수에는 등촌으로 1910년경술지에는 등촌과 부곡으로 기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부곡은 양촌을 지칭한것이 아닌가 한다..1959년 洞案의 서예문 木洞元是 長澤龜玆 冠山 아라 서술한 점으로 보아 장택현 구자마을로 불리어 지기도 했던 것 같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때 여덟가구가 전소되고 양강영당 일부와 초등학교가 불에 땄다..자랑 : 동규가 정연하고 교육수준이 높아서 사회요로에 공헌하는 인물이 배출.0.문화유적.유물.등촌 고인돌 가군 : 면소재지에서 화순행 지방도를 따라 500m쯤 가면 농협창 고 뒷편에 14기가 북서 - 남동 타원형으로 군집되어 있다. (보존상태 양호).등촌 고인돌 나군 : 마을에서 여의마을로 가는길을 따라 300여m 가면 마을 끝숲속에 2기가 있다..등촌 고인돌 다군 : 고인돌 가군에서 여의마을로 150여m 남동쪽으로 70여m떨어진 산 기슭에 6기가 남 - 북으로 2열로 있다..3층 석탑 : 등촌리와 용강리의 경계지점인 장안등 이라 불리운는 곳에 세워졌으나,장평우회도로 공사시 도로변으로이동.(조성 년대는 확실하지않으나 양식등으로 보아 고려추기로 추정하고 있다.).思齊 光山 金再鼎 효행비 : 1902년 6대손 채현이 세움..양강영당 : 장안들에 위치. 야은 길재와 포은 정몽주를 배향.1906 김성돈씨 가건립.0.민속놀이.입석 : 마을 앞과 뒷 능선 정상에 각각 1기씩 2개 서 있으며, 수구맥이 볼 뿐전설이나 행사는 없다..당산제(신신제) : 정월 보름에 짓등에서 지내오다 6.25후에 폐지.망곡제 : 국상이 나면 선비들이 칠성바위에 모여 망곡하였다 한다..가정신앙 : 기독교 가정을 제외하고는 전세대가 아직도 제사 후나 명철 때 제수일부를 대분 밖 길가에 짚을 깔고 사자밥이라 하여 부어 놓는다.고수레 풍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세시풍속 : 2월 초하루 하드렛날은 콩을 볶아 먹는데 달달 볶아라, 새알알 볶아라, 쥐알볶아라, 콩 볶아라, 하면서 볶는다.이 콩을 볶아 먹는 풍습은 쥐와 새가 곡식을 축내지 않도록 하고 또 노래기가없어지도록 한다.0.노거수(밥티나무) : 등촌리197번지에 있으며 흉고 둘례 2m에 수령은 300여년이라 한다.
◆ 장평면 등촌리 여의마을
0.군정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3.6km.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km지점에 있는해발 약200m의 중산간 마을이다.0.서쪽은 용두산과 금장재를 경계로 하여 부산면과 인접해 있고,북쪽은 축내리와경계하고 있다.0.용두산(551m)의 산맥과 주변의 산악이 애워싸고 있고, 산악 사이의 계곡이 마을을 향하여 뻗어 있어 剩水地形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0.세대수 및 인구 : 16세대 인구24명(남:10명, 여:14명)0.마을이장 : 백정석(862 - 0560, 010-9882-2850) 0.풍수지리설 : 서쪽산이 용두산이고, 마을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如意洞 이라 오래전 부터 불리어 왔다. 또 이곳은 兵禍에 蔣風之處라 하여 6.25동란 때에도 피해가 없어으며 수복후 산간지방 소개령에도 화를 입지않은 곳으로 명당지라 전해지고 있다.0.마을을의 연혁.1600년경 수원백씨 白漢杓(1627~1687)가 장흥에서 살다가 아거 정착하면서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魏澱(1527~1609)의 총묘로만 보아도훨씬 이전부터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47년(정묘지),1989(호구총수),1910년(경술지)에는 여의동으로 나타나 있으나1938녀(무인지),1966(병오지)에는 등촌리의 한마을로 속해 있다..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등촌리에서 분리되어 다시 여의리가 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병화에 藏風之處라은 풍수지리설이 적중했던지 산간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난리를 겪으면서도 인명이나 가옥의 손실이 전혀 없었다..자랑 : 1974년 퇴비증산에 장흥군 1등을 해서 수상 했는데, 이는 마을사람들의단합된 의지와 근면함을 말해 주는 것으로 자랑으로 꼽을 수 있다.0.문화유적.유물.사딩터 : 1647년 개설한 이견제 서당터가 있다..如意薺 : 1958년 건립된 여의동 백씨 문중의 제실.0.민속놀이.당산제 : 정월 대보름날 짓등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나 6.25후 폐지되었다..가정신앙 : 가정에서 제사 지낸 후 사자밥 거래밥 을 대문밖에 짚을 깔고 놓아둔다. 야외에서 식사를 할 때 멱기전에 고시례 를 한다..세시풍속 : 2월 초하루 하드렛날 하늘에서 영등할머니가 내려 왔다가 20일에승천한다 하여 2월을 영등달이라 한다. 영등할머니는 바람신이기 때문에 바람을 몰고 온다고 하여 농어촌에서는 풍재를 면하기 위해 영등할며니와 며느리에게 고사를 지낸다. 영등할며니가 딸을 데리고 오면 별 탈이 없지만 며느리와함께오면 농가에서는 재앙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 바람이 불면 바람영등,햇빛이 나면 불영등,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면 물영등이라 하고 바람영등이 내리면 가물고, 물영등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0.구비전승.남매정을도 담도 없는 집에 시누 올케 빨래가니소낙비가 쏟아지니 물보라가 닥치더라시누 올케 한물에 쓸어가니그 오빠의 거동보소 물속으로 뛰어가서이리저리 헤맬적에 올케손과 동생손이 만져지니동생손은 얼른 놓고 새댁손을 잡아내네이꼴되니 그네 동생 하는 말이오빠오빠 우리오빠 남매정은 어따(어디)두고부부정이 더 하던가 오빠죽어 개구리되고나는 죽어 뱀이 되어 삼사월 긴긴해에방아간 뒤뚝에서 만납시다.. 호식총 이야기(?)虎食 당한 자는 해골만 남게 되므로 시루를 씌워 둔다. 시루구멍이 아홉개이므로 그중 중앙에 가락(옛날 물레에서 실을 뽑아 내던 쇠꼬치)을 꼽아 놓는데이는 흔이 구천을 헤멘다는 뜻으로 가락을 꼽는 것은 다시 호식을 못하도록한다는 뜻이다.(제보 전삼봉)
◆ 장평면 양촌리 양촌마을
0.양촌마을은 장흥읍에서 동북쪽으로 20km. 면소재지와는 50m 거리에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는 장동면 봉동리, 남으로는 용강리,서쪽으로는 등촌리,북으로는선정리와 접해 있다.0.마을 앞으로는 용강천이 흐르며,동에서 흐르는 정자천과 합하여 수리조건이좋으며 평야지는 비옥한 옥토를 이루고 있다.0.장평면의 중심지로 고려초부터 치소로 기록되고 있고, 일제시 왜군현병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며 옛부터 인구의 전출입이 잦은 곳이다.0.세대수 및 인구수 : 68세대 인구125명(남:60명,여:65명) 2015년 7월 1일 현재0.마을이장 : 문경복(862 - 6926, 010-3647-3434) 0.풍수지리설 : 특별히 전해 오는 것은 없으나 유수원이라는 사람이 장평에 들어가 文千武萬의 吉地(현 장평초등학교자리)라 하고 장평터를 보존하려면 세 개의 탑을 세우고 용두산 락맥의 하나인 卵山巢의 잘린 능선을 이어야 지기가 바로 보존 될 것이 라 하였다.유수원이 여기는 무서운 자리라 하여 피한 곳은 그후 일본 현병대가 주재하여애국지사와 양민을 학살한하는 곳이 되었다 한다.0.마을의 연혁.골안(谷內)마을 : 고려말 길씨가 입주하여 취락을 조성하였다고 하며 그후 조선조 때 장흥에서 거주하였던 竹山人安의(1574~1629),安就珏(1786~1842)가이 주 정착 하였다고 한다. 장택00의 안쪽이 되므로 골안이라 하였다..새재등 마을 : 鳥재, 혹은 巳峙嶝이라고도 부른다. 지형이 새의 등 또는 뱀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말 밀양 박씨인 浚洙가 강진에서 이주 해 와 삶면서 성촌되었다고 한다..枾木마을 : 양촌리의 골안에 살던 주민들이 옮겨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18세기 중엽 유치면 조양리에서 거주하던 文鳳默(1820~1895)이 임리의 선산을관리하다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감나무가 많아서 감나무골 또는 시목이라 한다..西便마을 : 조선 중엽(1676년 전후) 文受白이 노년을 보내기 위하여 이곳이文千武萬地라는 말을 듣고 이주해 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안골의 서쪽이라 하여 서편마을이라 하는데 옛날에 馬富者가 이곳에 살았다 하여 마부자터라고 도 한다..1747(정묘지)에는 副谷으로,1789년(호구총수)에눈 良村으로,1910년(경술지)에는 陽村, 富谷으로,1938년(무인지) 이후에는 陽村으로 나타나 있다. 0.주요사건.1372년(공민왕 21년) 임자 6월에 왜구의 침입으로 倉米를 약탈 당함..1910년8월5읿부터 1925년5월10일 경찰지서로 변경될 때까지 일본헌병 분견대가 주둔하면서 많은 항일의병과 항일투사를 투옥,고문,햑살,폭행,노략질을하였다..당시 투옥된 자사들을 살펴보면 : 尹一三,孫武景,宣道明,嚴大萬,鄭士欽,朱태경,尹洪八,周근신浩,權澤,朱文才,文乃鉉, 金益洙,朱亨五,李世昌,朱在浩,高光信,尹一, 金有根,白仲基,(鄭士欽은 1909.4.26.오전6시 사창장터에서 총살당함).자랑 : 양촌농악은 장평농악을 대표 할 만큼 유서가 깊고 조에가 있어 보림문화제 행사에는 장평을 대표해서 출전한다.0.문화유적.유물.시목 고인돌 군 :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00m 쯤에 있는 구릉 정상부 밭에3가있다. 2개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1개는 상석이 옮겨져 있다..양촌 고인돌 군 : 마을 뒷편 구릉에 있는 안종철씨 밭에 북동 - 남서의 타원 으 로 군집되어 있다. 칠성바위라 불리우며 옛날에는 제릉 올렸다..節義碑 : 죽산인 안의(1574~1629)의 충절울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10대손 종埰가 세움).忠熱閣 : 前章陵參봉陞嘉善大夫戶曹參判 田公在平記念碑. 전재평1863~1922) 이 1903년에 재산 20석을 마을의 구휼사업에 희사하였으며 그의 며느리 수원 백씨도 남편을 잃고 노부모를 봉양하고 가솔,선영을 돌봄에 그 효열을 기리기위하여 향민들이 세웠다..施惠碑 : 前通政大夫 敦寧部都正張公致明 施惠碑.1855년4월 장평,장둉면민이세웠다..善積碑 : 면장 문재봉 선적 부망비. 1931년12월에 세움..施績碑 : 유인 김해김씨 시혜비. 회관부지를 희사함으로써 1973년 양촌리민이세움..紀積裨 : 墓山 曺炳振 선생 기적비.1976녀 세움..親善契鎚模墓碑: 선비추모정신과 선조유업을 계승하고 친목을 도모하고자 1988년 12월에 세움..紀念碑 : 寶林洑監 安鐘埰 기념비. 1906년 장서면민이 세움..紀念碑 : 면장 임유춘 기념비. 1917년 장평면민이 세움. 비면의 마모로 1991년3월 재건.0.민속놀이.가정신앙 : 각 가정에서는 기제사나 명절 때 차례를 지낸후 사자밥 을 대문밖에 짚을 깔고 놓아두며,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때 먼저 조금씩 떼어 주위에버리면서 구수레 를 한다..세시풍속 : 경칩에는 논이나 들, 계곡에 가서 개구리 알을 먹는다.이를 용알 먹으러 간다고 하며 허리 아흔 이에게는 약이 된다고 믿는다.또한 벽을 바르면 빈대다 고 하며 허리 아픈 이에게는 약이 된다고 믿는다.또한 벽을 바르면 빈대가 없어지고, 물에 재를 타서 그릇에 담아 집안 네 귀퉁이에 놓아 두는 것도 빈대를 없애는 방법이기도 하였다..민속놀이 : 6월 유두나 7월 백중날에는 농주를 마시며 윷놀이와 농악놀이를 면서 즐겼다.부녀자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손수건을 몰래 옆 사람의 손에 건네주며 술래가 찾지 못하도록 하는 사발통문놀이를 한다.이는 원래 갑오동학농민혁명이후 연락문서를 전달하는 방법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씸김굿 : 3 ~ 4인의 무당을 초빙하여 무덤이나 집안에서 초저녘부터 새벽까지밤새워가며 씻김굿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당제 : 당산나무에서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냈으나 6.25이후 없어졌다..굿배미당제 : 거북알 당 앞엣 장씨 부자가 년 2회 농신제를 지냈으나 지금은없어졌다.0.전승노래(쌍가락지 노래/제보자 : 임홍종)쌍금 쌍금 쌍가락지 호적질로 닦아내서먼데보니 천일러니 저해보니 다리로다저-처녀 자는방에 숨소리가 둘이로다오라버니 오라버니 옹달복송 오라버니거짓말씀 말으시오 동지섣달 설한풍에문풍지가 떠는소리 거짓말씀 말으세요물명제라 석다수건 묵을메어 죽었으니앞동산도 묻지말고 뒷동산도 묻지말고연대밑에 뭍어주소가랑비가 오거들랑 삿갓으로 덮어주고소나기가 오거들랑 거적대기 덮어주고우리친구 날찿거든 앞동산도 없다하고뒷동산도 없다하고 연꽃속에 보라하소
◆ 장평면 양촌리 운수마을
1. 운수리는 용두산 낙맥의 중간인 북부변에 있으며 양촌리의 서북부가 된다. 서쪽으로는 축내리와, 북쪽으로는 선리정, 동으로는 양촌리,남으로는 등촌리와 접한 170m의 중산간 마을이다.2. 마을이 구릉을 이루고 있으며 사질양토의 비옥한 전작지대이다.3. 세대수 및 인구수 : 17세대, 인구34명(남:17명,여:17명),2015년 7월 1일 현재.4. 마을이장 : 한화근(862-6735, 010-4613-4479) 1.풍수지리설.운수마을 : 마을 앞산에 소나무와 대를 심으면 文武가 많이 배출된다하여 松竹을 심고 솔대거리로 일컬어 오다가 물이 좋아 雲水라 하였다 한다..漢磨地마을 : 일명 含花地라 하는데 풍수에 밝은 보림사의 스님 박산이 전국을돌아다니다 이곳이 文千武萬地(一名 漢磨地)라 하였으며 남으로 降星嶝이 있고북이 獨箱고개가 되어 蓮花到水라 칭한데서 含花地라 하였다 한다.2.마을의 연혁.운수마을 : 1600년경 장평면 임리 백동총에서 거주하던 文字侄이란 분이 명당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산수가 좋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가장골은 조선시대 軍丁이 주둔하였다 한다.병자호란 때 崔判乭이 난을 피하기 위해 입촌하였다 하며 청주 韓씨 在祿이 충남 서산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이곳에 이주하여 청착 하였다고 한다..1747(정묘지), 1989년(총구호수)에는 운수나 함화지의 지명이 기록되지 않았고 1910년(경술지)에 장변으로 표기되었으며 1966(병오지)에 양촌,운수, 장변이 합하여 양촌리가 된 것을 보면 단일 마을로 명명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그러나 함화지 마을 집 뒤에 고인돌 3기가 있고 40년전 가옥 건축시 고인돌 밑에서 돌화살(曲玉),고려청자,회관이 발견되었던 점을 미루어 보면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주요사건 과 자랑 : 6.25동란 중에도 마을에 피해가 없었다2.문화유적.군정돌(병사촌) : 현재는 박기태씨 밭이며 유물이 출토되었다.구전에 의하면 장서방의 군정이 주둔하였다함..운수 고인돌군 : 도로변에 있는 마을 입구의 북서쪽 구릉정상부 김점용씨 밭에3기가 있다. 여기서 曲玉과 炭棺이 출토되었다.3.세시풍속 : 음력 2월6일 저녁이면 집마당이나 높은 동산에 올라가 좀생이 별을 본다. 좀생이 별의 색깔과 거리로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게 되는데 별이 달 앞에서고삐를 끄는 것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풍년이 들고 평행으로 가면평년작, 달에 뒤떨어져 가면 흉년이 된다. 또한 좀생이 별빛이 붉으면 가뭄이심하고, 물먹은 것과 같이 보이면 비가 많이 내려 풍년이다.좀생이 별이란 28수 중 18번째 별로 작은 별이 한데 모여 하나의 군성을 이루고 있다.4.구비전승.밤에 머리 빗으면 귀신이 나온다..밤에 손톱깍으면 손가락이 에린다..밤에 거미가 내리면 도둑이 들고, 낮에 거미가 내려오면 손님이 온다..불장난을 하면 밤에 오줌 싼다..머리을 때리면 미련해 진다..문 바로는 눕지 않는다..떡을 찌다 소변을 보면 떡이 설 익는다..새벽에 복이 하늘에 떠 있다가 제일먼저 대문을 여는 집으로 들어간다..방 위에 쪽박을 놓으면 가난해진다..젖가락,숫가락을 멀리 잡으면 시집 장가를 멀리간다..복이 샘에 떠 있으니, 제일 먼저 물을 긷는 사람이 떠 간다..문을 등지고 앉지 않는다..장농서랍에 남자옷은 윗서랍, 여자 옷은 아래 서랍에 넣어둔다..화로불을 꺼지면 집이 망한다..밥을 뒤에서 부터 먹으면 도둑이 된다..상 모서리에서 밥을 먹으면 모난소리 듣는다..이를 잡아버리면 거지된다..큰 나무를 베면 재목은 집 짓는데 쓰지 않으면 부엌에서 땔감으로 쓰지 않는다..이빨을 빼면 지붕위에 던진다. 이때 까치야 까지야 헌 이빨 가져가고 새 이빨 갖다주라 고 외친다..여치(곤충)를 먹으면 베를 잘 짠다..새벽에 엎드려자면 말년이 가난해진다..발을 떨면 복을 턴다..젓가락아니 숫가락 잡은 손을 떨거나 젖가락으로 상을 자주 찍으면 복이 달아 난다.5.노거수 : 赤松 1그루와 陸松2구루가 있는데 수령은 약 300년이라고 전하며 칠성바위와 마을사이를 견격을 두고 싸고 있다.
◆ 장평면 양촌리 장택마을
1. 장택마을은 군청에서 북쪽으로 21km, 면소재지에서 동으로 200m 거리에 위치한 해발160m의 평야지대이다.2. 북으로는 장평천을 건너 마산과 경계하고, 용강리와 등촌리마을과 인접해 있다.일제 초에 용강천 호안공사로 시장을 형성,1일과 6일 정기시장이 서고 있다.3. 세대수 및 인구수 : 95세대 인구95명(남:45명,여:50명),2015년 7월 1일 현재.4. 마을이장 : 임재규(862 - 3054, 010-3616- 9550) 1. 풍수지리설(주요지명).사창 - 장 : 사창장,장평장.탑 - 거리 : 장터 남쪽에 있는 마을. 석탑이 있었다..도내기 시암 : 장터 남쪽에 있는 우물. 매우 깊었다 함..주요지명의 상세한 기록은 용강1,용강2,양촌리 참조2. 마을의 연혁.옛날 장택현이 용강마을에 있을 당시 사창에서 곡물을 운송한 곳이라 전한다.당시 용강마을은 큰 강이여서 곡물은 강물을 이용 운반되었다 함..본래 양촌리의 한개 자연마을이며 이곳에 5일 시장이 들어서면서 장터라 불리우다1970년 분구되어 옛 장택현터라 하여 장택마을로 이름하게 되었다..이곳의 시장은 1967년 개설 되었다고 전한다..1747년(정묘지)에는 倉村으로 나타나 있으며 1780년(호구총수)에는 社洞,平村,良村으로. 1910(경술지)에는 倉村으로, 1938년(무인지),1966(병오지)에는 양촌리 장변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주요사건과 자랑 .주요사건 : 동학혁명 때 장흥부 공략을 목적으로 대규모 동학군이 집결한 곳..자랑 : 국가 환곡을 쥐급한 사창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며 상인의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2. 문화유적.유물.탑거리 : 장평 수거맥으로 세운 탑3기 중에서 1기가 있었다고 하나 호안공사로 매립도었다고 한다..사창 : 사창 色掌 社環穀 3월과 7월에 개창3. 민속놀이.사자밥 : 제사 지낸 뒤에 길가에 사자밥을 놓아둔다..고수례 : 들에서 음식 먹기전에 고수레를 한다..상가에서 가끔 씻김굿을 하며 수공업이나 개나공업을 하는 집에서는 매월초3일에 성주신에게 간단한 안택고사를 지낸다. 그리고 부적을 부쳐놓은 세대가 많다.. 세시풍속 : 2월 하들렛날은 머슴날이라 하여 농악을 울리며 즐기고 스무살 되는 사람은 성인대접을 받기위해 일꾼들이 모여 노는 곳에 술을 내기도 한다.
◆ 장평면 축내리 축내마을
1. 면소재지에서 광주행 지방도 839호선을 따라 1.2km지정에 위치한다.해발 약 180m의 중산지 마을로써 남쪽 축내 저수지를 따라 장평천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를 따라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남쪽은 산악이며 북쪽은 장평천을 사이에 두고 선정리와 경계하고 있으며 .동은 양촌, 서는 용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2. 세대수 및 인구수 : 50세대 인구93명(남:39명, 여:54명),2015년 7월 1일 현재.3. 마을이장 : 손덕진(862-3260, 010-3626-3418) 1. 풍수지리설.축내마을 : 마을 뒷등의 형국이 소와 같이 생겼다 하여 丑內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동편은 東臥室, 중앙은 안마실, 서편은 목넘기라 한다..반송정 : 마을 입구에 4구르의 소나무가 있고 그곳에 정자가 있어 盤松亭이라 하였다 한다.2. 마을의 연혁.축내마을 : 고려 말경 한양조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고 구전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40대 이전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므로 살 터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약 5대 정도 살다가 떠나고, 그 후 마을이 폐촌되었다가 .조선조 중기에 인천이씨, 장흥임씨가 입주하면서부터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성촌되었다 한다. 1783년(호구총수)에는 築內里로 표기되어 있으나 1910년(경술지)부터 丑內里로 불리워지고 있다..반송마을 : 일명 반송정마을이라 한다. 고려시대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나 확살하지 않고 지금도 밭에서 오래된 기왓장이 출토된점으로보아 옛날에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말경 영양천씨가 터를 잡아성촌 한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입구에 4구르의 소나무가 있고 그곳에 정자가 있어 般松亭이라 하였다 한다. 1. 주요사건과 자랑 : 마을에 초상이 나면 전 상포계원은 물론, 부녀회원들까지 모두 나서서 서로 협조한다.2. 문화유적.유물.石鏡山 : 婉女가 돌거울을 보고 화장을 했다 함(축내마을 앞산).제 - 터 : 젯등.요지 : 상천골. 분토가 남.철점 : 쇠판잇골. 쇠를 팠다 함.
◆ 장평면 축내리 용산마을
1. 군청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20km. 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2km 지정에 삼마정마을 있고, 삼마정과 이웃하여 남쪽으로 용산마을이 있다. 금산마을은 삼마정에서 광주행 도로를 따라 1km 지점에 위치한다.2. 용산마을과 금산마을은 해발 약 200m. 삼마정마을은 170m에 위치하고 있으나 장평천 주변으로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는 평야지대라 할 수 있다.동쪽으로는 축내. 서쪽으로는 제산과 인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평야를 가로질러 선정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용두산맥이 뻗어 있다.3. 세대수 및 인구수 : 47세대 인구80명(남:40명,여:40명),2015년 7월 1일현재.4. 마을이장 : 이만홍(862 - 3708, 010 - 4845 - 3708) 1. 풍수지리설.용산마을 : 용의 형국으로 용이 누워서 알을 낳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 뒤에 백토산이 있는데 이 백토산의 흙이 백색이어서 이 산을 용의 알로 여겼다 한다..금산마을 : 선녀가 비단 베를 짜는 형국이라 하여 금산이라 불라었더 한다.2. 마을의 연혁.龍山 : 1700녀경 魏在奎가 피난처라 하여 입주하면서 성촌되었다고 전한다.처음에는 氷藏洞이라 하여 縣의 氷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747년(정묘지), 1783년(호구총수) 이래 용산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담양 전씨가 150여년 전에 입촌하였다 한다.1970년 축내리에서 분리, 용산리로 행정마을이 바뀌었다..三馬亭 : 벽사역에속한 院이 있어 말을 먹이고 관리하는 곳이라 馬亭이라 했다.원촌으로 발전된 촌락이었으나 폐원이후 축내에서 이주한 사람이 많아 농촌마을로 성촌되었다. 馬亭,駟馬亭,司馬亭이라 불리우기도 한다..金山 : 마정과 이웃하여 어사출두시 역졸들이 나서고 역졸이 부족할 때는 원졸이 합세하였는데 금산은 東垈라 해서 장졸들이 생활했었다.원역이 폐지된 후로 비옥한 농토를 따라 입주자가 늘면서 성촌되었다. 1. 문화유적.유물.선돌 : 선독골에 2개가 있엇으나 지금은 없다. 마을의 재앙을 막는 제를 지냈다한다..석탑 : 축내리 590번지에 석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2. 민속놀이.농악놀이 : 1960년대까지는 농악이 성행하였으며, 정월 대보름이면 선정리와 불싸움을 많이 하였다..세시풍속 :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 찰밥을 먹고 더위 팔기를 한다.2월 하드렛날에는 콩을 볶아 먹는다.5월 단오에는 떡을 해 먹는다.6월 유두에는 밀게떡을 해 먹는다.7월 칠석과 백중날에는 일꾼의 날이라 하여 농사를 잘 지은 일꾼을 장원으로 뽐아 소를 타고 농악놀이를 즐긴다.8월 추석에는 햇곡식으로 조상님께 제사를 올린다.9월 9일에는 귀일이라 하여 혹 철이 늦었을 경우 조상님께 새 곡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10월은 상달이라 아여 각 성씨마다 시제를 모신다.11월 동짓날 팥죽을 끓여 먹고 집안에 팥죽을 뿌려서 잡귀를 몰아냄
◆ 장평면 제산리 제산마을
0.면소재지에서 광주행 지방도(839호선)를 따라 4km 지점에 중구마을이 있고,중구마을에서 남쪽으로 저수지를 안고 있는 마을이 제산마을이다.0.해발 약 200m의 중산간 마을이나 제산저수지 밑으로 넓은 평야가 있어 미. 맥농사의 적지이다.0.동으로 축내리, 서로 봉림리와 인접해 있으며 남은 산악지대로 금장제를 경계로하여 부산면 금자리와 접해 있고 북은 장평천을 사이에두고 청용리와 경계를이루고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49세대, 97명(남:47명,여:50명),2009년9월1잃현재.0.마을이장 : 백 찬 인(862 - 6730, 010 - 8667 - 6720) 0.풍수지리설.제산마을 : 마을 위에 에워싸고 있는 산의 지형이 돼지형국아라 하여 猪山이라고 불리어 졌다고 한다. 저산을 제산이라고 부른 것은 오래된 관행으로 장평에서는 보편화되어 있다. 뒷산을 일면 누에머리 형국이라고도 한다..중구마을 :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에 기거하던 중이 시주를 구하려 제산마을에올라가다 쉬어 갔던 곳이라 하여 僧區라 부르다가 뒤에 中區로 개칭되었다.0.마을의 연혁.제산마을 : 조선조 초인 1500년경 長淵邊와 成陽呂씨가 입촌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그후 변씨와 여씨는 떠나고 변씨의 외손인 昌寧曺氏가 정착하여 현재에 으르고 있다.戊寅誌1910년에는 猪山, 甕店, 梨木洞 등으로 나뉘어 있으나 戊寅志1938년에는 제산, 옹점, 이목동이 합하여 제산으로 나타나 있다..중구마을 : 보림사 중이 시주하러 나왔다가 쉬어 갔던 곳이라 하여 僧區라 불리우다가 1800년경 제산의 曺憲永이 이주하여 仲區라 부르다가 후에 中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많은 군사가 주둔하였다 하여 衆軍마을로 불리어 오고 있다.제산, 옹점, 이목동이 합하여 제산으로 나타나 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1921년 6월 중구에 살고 있던 부인이 일본인 紳原의 뽕밭에 등어갔다가 총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격분한 마을의 젊은이들이 장흥경찰서에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찾아간마을 사람들을 구속하고 재판에 회부했다.그래서 백만흠, 조문환, 조공수, 조욱환 등이 목포나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복역을 하였고 최병환은 피신 중에 사망하였다.1950년 9월 6.25 수복후 유치와 장평지역에서 활약한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중구마을을 중심으로 장평지구 작전본부가 5년동안 주둔하였다..자랑 : 1921년 일본인과의 사건으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잡혀갔으나 혹은 피신하여 마을에는 농사지을 사람이 없었다.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농사일은 물론, 모든일을 합심협력하였다.당시 14세였던 李桂浩옹도 어린아이로 쟁기질을 하고 농사일을 거들었다.그때부터 마을이 상부상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0.문화유적.유물.烏山齎 : 인천 李氏 제각으로 최근에 중건하였다..제산 고인돌군 : 마을 입구의 지방도변 동쪽에 있는 염정근씨 밭고 밭둑에 3기가 있으며, 타원형 1기는 도로확장시 옮겨졌다. 나머지 2기는 하부를 확인 할수 없다.0.민속놀이(당산제) :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앞 당산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 장평면 봉림리 봉림마을
0.봉림리는 군청에서 서북쪽으로 24km.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6km 지점에 위 치한 해발 약 190m의 중산간 마을이다.0.원봉림과 오산, 흑석의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으며, 병동 우산에서 흐르는장평천이 마을 중심부를 흐르고, 토질이 비옥하여 농경지로써 좋은 조건을갖추고있다. 북쪽은 화순 청풍면과 경계하며, 서쪽은 피제를 사이에 두고 유치면과 인접해 있다. 남쪽은 데산, 동쪽은 청룡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0.세대수 및 이구수 : 65세대.131명(남:66명,여:65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문 주 석(862 - 3391,010 - 5693 - 3394) 0.풍수지리설.봉림마을 : 유치면 가지산(일명 니바우산)이 청용의 봉미산과 한맥을 이루어 이일대가 숲이 울창하다 하여 봉림이라 하였다 한다. 주산은 鳳尾山이요, 안산은泰山峯이며, 得水는 西北問方이다..오산마을 : 뒷산이 까막산 또는 烏山이라 하는데 산 이름을 따다가 烏山이라 하다가 梧山으로 개명하였다..흑석마을 : 검은 돌이 나욌다 하여 흑석리라 부르게 되었다.0.마을의 연혁.봉림마을 : 조선조 김해 김씨 金大和가 장흥 부동면에서 거주하다가 관내 각처를 유람중 이곳에 이르러 봉미산과 가지산의 웅자수려한 숲을 따라 봉림리라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산,흑석,강변,대평 등을 합하여 봉림리라 했다..오산마을 : 봉림에 거주하던 김해 김씨가 분가하여 정착하면서 성촌되었다 전한다. 뒷산이 까막산이라 하여 烏山으로 부르다가 梧山 으로개명하였다..흑석마을 : 조선시대 金三得이 봉림에서 분가하면서 碑石谷에 집을 짖고 살았다 한다. 검은 돌이 나왔다 하여 黑石이라 하였으며 흑석 서쪽 골짜기에 텃골이란 옛 터가 남아 있다.0.봉림리는 1947년 정묘지에는 大平으로, 1787년 호구총수에는 대평.봉림동.흑석.신대평리로, 1910년 경술지에는 대평.봉림.오산.교동으로,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들 자연부락이 봉림리로 변천과정을 거쳤다. 0.주요사건.1894년 11월 7일 동학혁명 때 흑석 장터거리에서 金溝의 金方瑞와 화순의金秀根, 능주의 趙種純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들어와 주둔하면서 장흥부 습격 을 준비하였다. 이때 이곳은 수 많은 동학군의 집결로 온 마을이 일대 혼란을겪었다..6.25사변이후 1950년 마을전체가 소각. 참살0.문화유적.유물.흑석고인돌군 : 마을 뒤 장흥~광주간 도로변에 대숲에 5기가 동서로 1열로 군집되었 으나 1,2호는 도로확장공사로 상석이 옮겨졌으며 4,5호는 이둥개석식이다. 마을 앞 이성봉씨 논에 3기가 있었으나 1985년 경작지에 불편을 느껴 2기를 파괴하고 1기는 논 가운데 매장하였다..孝子 李公 相舜遺墟碑 : 1932년 건립.司果 李公 基洪德惠忘不碑 : 1932년 건립.原州李氏烈行碑 : 李華順(1906) 열행. 1988년 건립.孝婦原州李氏 實적碑 : 李貴任(1906), 김배 모친 1988년 건립.敬墓薺 : 남평문씨 백동파 제각.흑석당터 : 옛날에 장이섰다고 함.0.고문서(용담유사) : 천도교 최제우(1824~1864)가 저술한 전도교 경전으로 문기홍씨가 소유하고 있다. 1902년 2월에 간행된 한글판으로 원래의 용담유사는 904구로 되어 있어 있다고 하나 이 책에는 安心歌, 劒訣이 없고 59구만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룡담가, 교훈가,도수가,전학가,몽중노소문답가,도덕가,흥비가 등이다.0.노거수 : 수령 400년. 임진왜란시 피난 온 사람이 섬었다 전한다.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군 나무로 지정되었다
◆ 장평면 봉림리 대림마을
0.대림리는 장흥읍에서 서북쪽으로 26km,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약 240m의 산간 마을이다.0.봉림에서 피재쪽으로 약 1km 쯤 가면 경림마을이 나오고, 경림에서 산골로 1km 쯤 가면 대평마을이 있다.0.북으로는 우산리와 접해 있으며, 서로는 유치면 용문리, 동으로는 제산, 남으로는 부산면. 산을 넘어 부산면 용반리도 접해 있다. 지대가 높아서 상강 이전 에 서리가 내리는 일이 허다 하다.0.가구수 및 인구수 : 22세대.49명(남:25명,여:24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이 오 님(862 - 2526,010 - 8600 - 2526) 0.풍수지리설 : 마을이 조리 형국으로 생겨서 주기적으로 흉했다 망했다는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0.마을의 연혁.大平마을 : 장흥군 안양면에 살던 馬尙太가 1500년경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전의 유래는 알 수 없다.임진왜란 때 관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대밭에서 베를 짜는 부인을 보고 난세에태평하게 베를 짜고 있다 하여 태평이라 부르다가 후에 太平으로 고쳐 부르게조었다 한다. 이 밖에도 대판굴, 대판골 그리고 동남쪽에는 큰까끔이란 지명도남아 전한다..京林마을 : 봉림 서쪽에 있는 마을로 정부의 이주 대책에 따라 1964년 韓駱敎등 50세대가 정부지원으로 양잠을 하면서 마을을 이루었으나 1966년 35세대가 간척지로 이주하고 지금은 10세대가 거주한다.1986년7월 행정 구역 조졍에 따라 대평과 경림을 합하여 대림으로 개편했다..1947(정묘지)에는 大平洞,1789년 호구총수에는 대평리,1910년(경술지) 이후에는大平으로 불리어 왔다. 0.중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때 마을이 전소되었다.0.문화유물.유적.불당사터 : 옛 절터라는 것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며, 우물이 있고 기와징이나온다..입석 : 대평마을 입구 도로변 논둑에 높이 1m 정도의 선돌이 3개 있다.원래는 4개가 있었다고 하며 이 돌이 높이 서 있으면 이웃의 부산면 용반리 처녀들이 바람기가 생긴다 하여 용반 사람들이 자주와서 이 돌을 뉘어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대정암 : 대평리에 문병열씨가 1993년 개창. 대웅전 22평, 요사체 20평0.민속놀이.당산제(당산목신제) :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에서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20여년 전부터 사라져 버리고, 정동인씨가 당산나무 밑 조작 방앗간에 살 때에 마침 백중날에 아들을 출산하게 되어 그 아들의 생일과 겸해서음식을 차려놓고 축수하고 있을 뿐이다..가정신앙 : 음력 정월 대보름께면 신수점이나 토정비결을 많이 보고 몸이 아파약을 먹어도 낮지 않을 경우 점을 쳐서 비손하는 풍습이 아직도 더러 남아 있다.세시풍속 :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는 오곡 밥을 지어먹고 2월 하드렛날에는 콩을 볶아 먹으며 유두날고 백중날에는 음식을 준비해 나누어 먹으며 동짓날에는팥죽을 쑤어 먹는다.0.노거수(당산목): 군 나무로 지정되어 있는 느티나무로 높이는 16m, 둘레는4m 정도 이다. 약 500년의 수령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 때 피난온 사람이 심었다고 전하는데 이 나무를 심은 후로 도둑이 침입을 못 하였다고 한다.
◆ 장평면 우산리 우산마을
0.우산리는 용강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연동과 우산마을이 합쳐 이룩괸 마을로써 해발 약 220m의 산간마을이다.0.동쪽은 봉림, 서쪽은 병동, 북쪽은 장항과 접해 있으며 남쪽은 산으로 둘러 있 다. 장평천의 상류로써 월곡과 운곡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앞들을 가로 질러있기 때문에 수원은 좋은편이다.0.세대수 및 인구수 : 82세대.142명(남:63명,여:79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유 금 열(862 - 4947,011 - 607 -4947) 0.풍수지리설.蓮花倒水形 : 연동마을이 연꽃이 물에 기우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蝸牛형국 : 우산마을이 달팽이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金龜沒泥형 : 금구 등. 중멧등. 장항에 있음.猛虎出林 : 한배미들녁을 이렇게 말한다..渴馬飮水 : 마초골을 이렇게 말한다.0.마을의 연혁.연동마을은 화순군 춘양에 거주하뎐 안동 김씨 炳淑이 심산유곡을 유람하던중蓮花倒水의 명당이 있어 이곳에 정착하였고, 마을 뒤에 연꽃모양의 바위가 있어 蓮洞이라 하였다 한다. 金炳淑의 3대손인 金權鎭이 매년 가을 연바위에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우산마을은 서기 1500년경 남양홍씨가 정착하여 성촌했다 한다. 그래서 일명홍골아라고도 하며 한창 번창했을 때는 한배미에서 홍거리까지 기와집이 즓비했다고 한다..강릉 유씨의 劉仁聖이 약 400년전 이곳 형국이 臥牛形이어서 터가 총하 입촌한후 세거하여 지금 13대손인 劉德鍾씨가 살고 있다..1974(정묘지)에는 上大夜로 나타나 있으며, 이곳에 옛날 加在所가 있었고 縣址가 잇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1910(경술지)에는 石水와 道處, 牛山, 獐山, 大夜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1938년(무인지)에도 석수, 두처, 우산, 장산, 대야가 합쳐 우산리로 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1950년11월20일(음 10월11일) 공비들이 산에서 내려와 마을사람들을 전부모아놓고 그 중47명을 불러내어 학살하고 가옥 7채를 소걱하는 대 사건이있었다..1950년11월27일(음 10월18일) 마을전체가 한 집도 남김 없이 불에 탓다.0.묺화유적.유물.도성암터 : 도처골에 옛날 도성암이 있었다 함.보광사 : 석수동 아래에 있는절. 지금은 안양사로 바뀌었음.도요지 : 석수동 보광사에서 100m 서북쪽에 옛날 사그점골이라 하여 도요지가있었음..솟대 : 해남 尹씨와 함평 李씨 솟대가 우산리 앞 솔대거리에 있었다 함..입석 : 한배미에 옛날 큰 입석이 두 개 서 있었다 한다..1947년 정묘지에는 장평면 古跡에 加佐所가 있었는데 古加佐縣祉는 上大夜에있다고 하였다.상대야는 우산리에 있는 들 이름으로 옷한배미라고 하는데 이곳이 가좌향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0.민속놀이(농악) : 옛날부터 농악이 성행하였으며 1993년에는 남도문화재에 장흥군 대표로 출전 하였다.0.전설 : 옛날 한배미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시주승이 찾아와시주를 하엿으나 구박이 심하여 서쪽으로 뻗은 산맥을 잘라버렸다.그 이후 홍씨들이 쇠락하였다 한다.
◆ 장평면 우산리 장항마을
0.장평면소재지에서 광주행 지방도(839호선)를 따라 서쪽으로 약7km쯤에 위치 하며, 곰치재와는 1km남쪽에 있다.0.마을 앞에는 금구등이 있고 좌, 우에 농경지가 있으며, 마을 뒤는 산악이다. 마을 앞 동산을 금구등이라 하는데, 이곳을 금거북이라 하여 옛날부터 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26세대,50명(남:29명,여:21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이 연 옥(862- 9688, 010 - 6796 - 9688) 0.풍수지리설 : 金龜沒泥형이라 하여 금거북이가 진흙에 잠겨있는 그런 형국이라한다. 마을 앞 동산을 금구등이라 하는데, 이곳을 금거북이라 하여 옛날부터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0.마을의 연혁.조선조 중엽 낭주崔씨가 청용리(화동)에서 이주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1747년(정묘지)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1910년(경술지)에는 獐山으로남평文씨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38년에는 牛山에 속해 있다가1986년7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항리로 분리 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 : 해당없음.0.문회유적.유물 및 민속놀이 우산리편 참조.0.민속놀이 : 우산리편 참조.
◆ 장평면 병동리 병동마을
0.장평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9km지점에 위치한 해발230m의 산간마을이다.월곡은 병동마을에서도 1km 떨어진 해발 250m에 위치하며, 운곡은 1.3km떨어진 해발 260m에 위치하여 장평에서도 가장 고지대에 속한다.0.병동은 우산리을 경유하여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우산에서도 약2km 쯤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0.운곡이나 월곡은 장평천의 발원지로써 지대가 높기 때문에 고냉지 채소를 경작하고 있다. 월곡은 남으로 장고목재를 경계하여 유치면 암천리와 인접해 있고, 운곡은 백토재를 경계로 화순군 청풍면 이목동과 인접해 있다. 마을의 서북쪽으로 삼계봉(504m), 깃대봉(448m), 국사봉(490m) 등의 높은 산이 둘러 있다.월곡마을 앞에 병동저수지가 있어 앞들의 수리시설은 좋은 편이다.0.세대수 및 인구수 : 42세대.83명(남:43명,여:40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노 전 순(862 - 3518,010 - 4877 - 3518) 0.풍수지리설 : 월골마을과 운곡마을은 雲中半月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아라 하며깃대봉에서 내려다 보면 구름속에 묻혀 있는 것처람 보여 운중반월형국이라 하였다고 한다. 병동은 주위에 산이 병풍을 진 것처럼 둘러있어 붙여진 이름이다.0.마을의 연혁.병동마을은 지금부터 200여넌전 해남에서 靑松沁氏 沈東燦이 과거를 보고 귀향하던 중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의 산이 병풍을 쳐 놓은 것처럼 수려하여 이곳을 병풍골이라 이름짓고 성촌하게 되었다고 전한다.1747년(정묘지)에는 마을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경술디에는 월곡,운곡과 함께등재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곡,운곡이 병동으로 통합 되었다..월곡마을은 심계봉 밑에 있는 마을로 장흥에서 광산노씨 盧熙台가 이주하여 배나무를 심고 살던 중 평펑 여의마을 담양전씨 딸과 결혼, 두 아들을 낳고 정착히였디 힌디. 마을이 번창하여 한때 인구가 500명까지 세거하였다 히며 서북쪽에 흥복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한다..운곡마을은 진주강씨 姜西東이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기 위하여 화순 청풍면신석골에 거주하면서 유람삼아 운곡리 고개에 오르던 중 눈 아래 안개구름이 길게 뻗어 계곡이 있어 길지라 생각하고 마을이름을 雲谷이라 하고 정착하게되었다 한다. 강씨는 화전을 일구며 살다가 자손이 없어 대가 끊기고 이후 죽산안씨, 평강채씨 등이 살고 있다. 0.주요사건과 자랑 : 해당없음.0.문화유적.유물.흥복사터 : 옛날 흥복사란 절이 있었다 함..팽나무 : 수령 300년으로 면나무로 지정 됨..제터 : 웅샘.도요지 : 백토재. 솔밭 등이 옛날 도요지라 함..제철지 : 불무동에서 옛날에 쇠를 녹였다 함.
◆ 장평면 청용리 청용마을
0.청룡마을은 군청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면소재지에서 약 5km의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190m의 중산간 마을이다.0.마을뒤의 봉미산(506m)은 이 마을의 주산으로 청룡리는 봉미산맥이 타고 내려와 완만한 등성을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작은 음당골을 사이에 두고 안산 등이이어져 내려오고, 서로는 큰 음당골을 사이에 두고 부어등이 에워싸고 있다.남으로는 보하등이(교촌) 내려다 보인다. 마을 위의 동쪽에는 정룡저수지가. 서 쪽에는 화동저수지가 있어 마을의 농경지에 수리를 편리하게 해주고 있다.북은 봉미산을 경계로 하여 화순군 청풍면과 경계하며, 동은 기동리와. 서는 우산리와 경계하고 남은 장평천을 건너 제산평야와 인접 해있다.마을 앞을 흐르는 내를 죽천이라 하였다.0.세대수 및 인구수 : 80세대.146명(남:70명,여:76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마 경환(862 - 3210,011 - 9432 - 3210) 0.풍수지리설 .마을이 청룡이라 이름하게 된 것은 뒷산이 봉미산으로 봉과 용이 짝을 이룬다하여 붙여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또한 일설에 따르면 옛날 신라 때 元表大德이 보림사를 개창할 때 용소의 청용이 피재에서 피를 토하고 이 마을에서 죽었다 하여 청용리라 하였다고도 한다..마을 형국이 배형국이라 하여 舟里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앞, 뒤로 船旗에 해당하는 덕석기를 세워놓았으며, 마을의 동쪽과서쪽에는 고동우물이 있어 마을 전체가 사용하고 마을 안에는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하였다.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배 밑창에 구멍을 내게 되어 배가 침몰하듯이 마을이 좋지 않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0.마을의 연혁.마을이 성촌된지는 퍽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현재의 마을이 형성된 것은 1900년대로 추정 된다. 청룡리는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1789년에 발간 된 戶口총數이며 그 이전 정묘지(1749)에는 청롱리라는 이름은 없고 下大夜가 閭里에나오는데 이곳에 安由哲 총묘가 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지금 청룡리 새비등에 이 묙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하대야로 이름 했던 것으로 보인다..경술지(1910)에 禾洞, 鳳舞, 靑龍 등이 여리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마을은 이상의 곳에 산재해 있었고 이 밖에 草場銅, 안산, 중리로 분산되어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현재 청룡마을을 둥리, 도는 죽리로 부른 이유도 주변마을의 중심마을이었던 것같다..지금의 정룡이 크게 성촌한 것은 6.25이후 화동, 초장동 그 밖에 작은 마을이없어지고 1972년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마을이 크게 번창한 것으로 마을유래지에는 인천이씨 이록수가 산세가 좋아 입주하였고 그후 광산 노씨가 입주하면서 성촌되었다고 하나 근거는 희박하다..진주정씨 鄭赫忠이 정조(1780)에 입촌. 장흥마씨 馬延讚이 1823년에 입촌하였다..진주강씨 1810년경에 입촌.입촌 순서는 인천이씨, 장흥임씨, 수원백씨, 진주정씨, 진주강씨, 장흥마씨 순이다. 0.마을의 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동란 때 전마을 150호가 2호를 남기고 잔비소탕을 위해 전부소실도었다.(1950년11월27일), 6.25때 이 마을 합동작전에서 마을 사람7명이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자랑 : 일제 초기 일본경찰에 의하여 단발령이 강제로 추진되었을 때 馬錫斗,姜基善, 魏聖浩 등은 일제에 항거하여 끝까지 단발을 하지 않았다.姜大吉(字基善)은 의병장으로서 기선이 부대라 할 만큼 큰 활약을 벌여 의병활동을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0.문화유적.유물.永募齊 : 노유성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추모의 뜻으로 세움. 그후 손자 한진이 개축하고 강학하니 송사 기우만이 찬기핟..진시齊 : 광산노씨 형식이 세우고 강학하다..不忘碑 : 사인 노선식의 비..功績碑 : 강내회의 공적비. 마을에 논 800평을희사.0.민속놀이.당산제 : 음력 정월 14일 밤 제를 지낸다. 제관은 송년계에서 미리 정해두는데초헌, 아헌, 종헌, 축관 등 네사람이다. 청룡안 우물에서 목욕제계한다.제물은 닭과 생선, 오곡 떡 등인데 닭고 생선은 익히지 않는다.여기 당신은 당할머니다..거북바위 : 원래 숫거북바위가 있었는데 서봉마을이 저수지로 목욕제계한다.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이다..옛날에는 날마다 마을 앞에다 덕석기를 게양했는데 이는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서 돛대에매단 기를 상징하는 뜻이었다..농악 : 정월 보름에 농악과 함께 마을을 동서로 갈라서 줄다리기를 하였다.그리고 제산과 봉림을 상대로 불싸움을 하였다..중로보기 : 팔월 추석에는 부녀자들이 서봉이나 석정, 기동, 선정과 중로보기를하였다.
◆ 장평면 청용리 교촌마을
0.청룡2구 교촌마을은 군청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2km, 면소지에서 5km의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180m의 평야마을이다. 마을뒤의 봉미산 1506m의 낙맥이 뻗은 청룡1구의 관문이다. 마을 앞은 병동에서 발원한 장평천이 흐르고 있고 장평천을 가로지르는 청룡교가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청룡리의 일부분이었는데1986년 청룡리와 분구가 되어 청룡2구 교촌마을로 독립하게 되었다.그러나 모든 역사성이 청룡과 같이 하기 때문에 특별히 내세울 것은 없다.지금도 각종 계나 모임은 청룡 본마을과 같이 하고 있다.농사짓기에 입지조건이 좋아서 일제시대에는 일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거주하였고, 특히 1946년4월1일 장평서초등학교가 이곳에 세워짐에 따라 교촌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13세대,24명(남:10명,여:14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최 창 용(862 -3786, 010 - 3997 - 3786) 0.풍수지리설 : 청룡1구 참조.0.마을의 연혁.조선 중엽에 田하숙이 진도에서 유배가 풀려난 뒤 귀향길에 지나다가 산세가 좋아 정착하여 장서당이란 글방을 설립, 후진을 양성하면서 부락이 형성되었다한다. 그후 1933년 일본인 7인이 황무지 개간을 목적으로 정착, 전답을 개간,잠업과 농사에 주력한 후 장평서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규모가 커졌다.0.장평면 쳥룡리는 바깥에 있다하여 밭등(밭깥등)이라고도 하였고 竹림이 있어竹林이라 하다다 1945년 장평서초등학교가 설립 되면서 校村리라 하였으며1986년7월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校村里로 승격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때 마을이 전소되었다.0.문화유적.유물 : 청룡 1구 참조0.민속놀이 : 청룡 1구 참조
◆ 장평면 기동리 기동마을
0.면소재지에서 광주행 지방도(839호선)를 따라 약 3km쯤 가다 금산마을에서 북쪽으로 3km쯤 가면 기동마을이 있고, 기동마을에서 약1km 지점에 작산이 있다0.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해발 200여m의 산간마을이다. 동으로 임리, 서로 청룡, 남으로 선정, 북으로 어곡광 경계하고 있다. 0.서북쪽의 서봉마을은 1986년 저수지 설치로 수몰되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36세대,74명(남:37명,여37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박 래 심(862 - 3093,011 - 9620 - 3093) 0.풍수지리설 .기동마을 : 봉미산 기슭에 위치하여 봉은 원래 岐山에서 살았다는 중극의 전설에 따라 기동이라 하였다 한다..芍山마을 : 마을 뒤에 있는 산이 함박꽃(芍藥)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0.마을연혁.기동마을 : 조선 중기 具씨가 살았다고 전하나 정확한 고증은 없고 100년경주김씨가 충북 충주시 품곡면에서 분가하여 이거하면서 촌락을 형성한 후 진원박씨가 이주 정착하여 성촌이되었다. 본래 기와를 굽던 곳으로 지사릿고랑,또는 재시리고랑, 지실, 지시랫골, 또는 瓦里라 하다 지금부터 150년 전 영광김씨성을 가진 분이 마을이 봉미산 기슭에 있다 하여 봉이 사는 岐山의 이름을따서 岐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작산마을 : 죽산 안씨 安炯洙가 장흥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에 마을 북쪽에는 봉미산 줄기인 채일봉이 있고 동쪽 芍藥山 정상이 瑞雲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길조라 생각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마을 뒷산의 모양을 따서 작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자랑) : 6.25당시 인근 마을은 전소되었으나 기동마을은 한가구도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전해 온바로는 마을 앞 정자나무 신이 보호했기때문이라 한다. 이 나무는 나라에 큰 변란이 있으면 운다고 하는데 6.25나5.18민주화 항쟁때에도 웅~웅 소리내며 울었다고 한다.0.문화유적.유물.永慕齊 : 경주김씨 제실. 1070년에 건립.孝子 金俊甲 孝行碑 : 정려를 내려 정려각이 있음.김천주 실적비 : 김천주의 공적비0.전설: 차일봉 밑 물통골에서 나오는 지하수가 한때 약수로 이름이 나면서 많은사람이 찾았으나 개고기를 씻은 후부터 물의 약효도 없어지고 수량도 줄어 들어 폐수가 되었다.0.노거수 : 군나무, 수령425년, 둘레4.5m, 높이15m, 경주김씨 김관주가 이 마을에 입주당시 심었다고 한다. 매년 음력 대보름날이면 동제를 지낸다.
◆ 장평면 기동리 석정마을
0.면소재지에서 광주행 지방동(839호선)을 따라 3.5km 지점에 북쪽으로 700m 쯤에 위치 한다.0.마을 앞을 장평천이 흐르고 있는 평야지대로 해발 170m이다. 남쪽에 제산저수 지와 북쪽에 서봉저수지가 있어 수리가 좋은 편이다.0.동쪽에 기동리, 서쪽에 청룡리, 남쪽에 제산리, 북쪽에 서봉저수지 위로 산이 둘러싸고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37세대,88명(남:42명,여:46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강 봉 민(862 - 3381,011 -9443 - 3381) 0.풍수지리설 : 풍수지리상 특별한 것은 없으나 1500년경 이씨가 정착하여 성촌되면서 바위 위에 정자가 있다 하여 石亭이라 했다 한다.0.마을연혁.石亭마을 : 조선 초기에 청주한씨 韓安采가 화순 청풍에서 이곳을 지나다가 부귀를 누릴수 있는 곳이라 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후1500년경 이씨가 정착하여 성촌되면서 바위 위에 정자가 있다 하여 석정리라 이름하게 되었다.1747(정묘지)에는 石井아라 하였고, 1973년(호구총수)에는 石亭里, 다시1910년(경술지)에는 石井, 그리고1938년(무인지)과1966년(병오지)에는 石丁이라표기기된 바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石亭으로 불리워 왔다..瑞鳳마을 : 봉미산 기슭에 말고 깨끗한 물이 솟아오르는 뭁통고골이란 곳이 있있는데 이곳에 건축년대 미사의 沼岩寺라는 절이 있어 고흥에서 경주시 김씨가불공을 드리러 다니다가 봉미산 줄기인 이곳이 경치가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생각되어 청착 하였다고 전한다.西峰으로 징하다가 후에 瑞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1986년 瑞峰堤 축조로 마을이 수몰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옛부터 제산, 청룡과 더블어 농사의 최적지로 알려져 일제 때는 일본인 山朴, 山田俊可, 山田二次郞 등 세 사람이 들어와 온갖 횡포를 부리고 농토를 약탈하는 만행을 일삼아 온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자랑 : 석정 출신 주석호 의사는 3.1운동 때 양민을 괴롭히고 매질하여 살상을 일삼는 일본헌병과 경찰을 암살하기 위한 지하조직을 하였다.보림사를 근거로 활약했던 周議士는 왜경을 살해하고 다시 金泉에서 왜경과접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 끝에 순국했다.0.문화유적.유물.석정 고인돌군 : 마을 창고에서 골목 길을따라 100m 가면 김지현씨 집 뒤편과강수복씨 집 뒤편에 모두 7기의 고인돌이 동 - 서열로 군집되어 있다;1호는 상석이 3개로 깨어져 강수복씨 집안에 있으며 3호와4호는 김지현씨 집뒷단에 걸쳐져 상석이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다.주민들에 의하면 이 고인돌군은 말바우 라 불리우며 및 해 전 까지만 하여도제를 올렸다고 한다..鄭氏紀績碑 : 석정 앞에 있는 마대성의 아내 진주정씨의 공적비. 자신의 밭 880평을 동중에 희사..望鄕碑 : 1896년瑞峰堤築造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수몰되어 마을 사람들이 世居地를 버리고 각곳으로 흩어지자 망향의 정을 못이겨 1992년5월 고향을 떠난마을 사람 모두가 뜻을 모아 망향비를 세우게 되었다..金佛坐像 : 1943년경 마을사람 崔五岩씨가 들골떠에서 밭을 일구다가 금불좌 상을 발견하였다. 이 금불상은 왜경이 가져갔다 한다.0.노거수.팽나무 : 군나무, 수령이 420년, 높이15m, 흉고둘레4.5m, 정자목, 지사으로 부터 약2.5m 부근에 여러 가지가 뻗어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경주김씨 김관주가이 마을에 입주 당시 심었다고함. 매년 음력 대보름날 동제를 지냄..느티나무 : 마을나무, 수령140년, 높이15m, 흉고둘레1.8m, 당산목, 지상2m부위에서 가지가 뻗어 수관이 우산형이고 년대는 알 수 없으나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지냄.0.望 鄕 碑이곳에 瑞鳳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니 평화롭고 축복받은 마을이었다.언제부터 촌락이 형성되어 마을 이름이 불리워 졌는지는 洞史나 고증이 없어 알길이 없으나 미루어 보건대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상류의 발원지이자 명산으로이름난 봉미산 영봉의 서기가 화충을 이루어 산세수명함에서 서봉이라 이름 지어졌을 것이다.마을 안 깊은 곳에 절터골이라 전해지는 방터 자리에 소암사란 사찰이 있었으니(년대미상이나 寺址等은 尙存함) 부근에 크고 작은 암자가 산재했던 것으로 보아절이 세워지고 소암골이라 불리워지다가 산수가 좋고 공기 맑아 흉년의 饑饉이나難世의 兵禍에도 안주할 장풍처로 알려졔 점차 인가가 형성되고 가구가 번성함에성촌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절터골 계곡에는 소문난 물통골 천연비룡폭포가 있었는바, 물맞이 피서인과 춘하추동 산나물, 약초 캐는 촌노들의 발길이 붐벼었으며, 또한 음력 섣달과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놋그릇 닦는 아낙네들이 절터골 기왓장 구하기위에 발길이 끊이지아니하였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1943년경 이 마을 최오암이 드터골 암자터에서 밭을 일구다가 문화재급의 금불좌상을 발견하였으나, 왜경에 의하여 회수된 바 있거니와 갑오(동학), 무신(의병)의 양난 때는 피난처가 된 마을이었으나 6.25사변의 격동기에는 한때 폐촌이 되는傷悽을 남기기도 하였다.이러한 환경과 정속에서 성장해온 서봉촌의 後裔들은 도시화의 물결과 산업화의과정에서 비록 이곳을 떠났으나 1988년경 국토의 효율적인 개발정책으로 급기야마을이 수몰되고 저수지로 변하였으니 胎자리의 정서와 어린시절 노닐었던 절터골, 오가리정골, 여시골, 도둑골, 새암골, 황새봉 등 그 옛 추억의 이름조차 되뇌일 수 없는 夢遊속의 애환마저 사라져 버리니,도시로 흩어진 뜻있는 서봉인의 후손들이 여기의 서봉인과 얼고 넋을 심고 망향의 한을 세겨 두논니 바라건대 서봉인은 한결같이 건강하고 총명하였으며 남보다부지런하고 씩씩하였기에 효심도 지극하였다라고 먼 후살으 낚시터 길손이나 나물 캐는 촌부들의 歡談할 쉬움터가 되어주기를 갈구하년서 멀리서 바라보는 望鄕의 碑를 세워둔다.(1999년5월)瑞 峰 人 : 李 明 植 지음全國 瑞峰 出身 : 男 女 一 同 후원發 起 人 代 表 : 金 在 奎 세움
◆ 장평면 선정리 2구마을
0.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2km 지점의 도로변에 마산마을이 있고, 이 마을 뒷산고개 너머로 종정마을이 있어 행정구역 상 선정2구에 속한다.0.해발 약200m의 산골마을로, 특히 종정마을은 주변이 산으로 둘려있다. 서북쪽으로 선정마을과 동남쪽으로 광평리가 인접해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49세대.97명(남:44명,여:53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윤 재 일(862 - 4134,011 - 9605 - 4134) 0.풍수지리설.馬山 : 말이 터진 방죽물을 먹으러 내려 우는 형국이라 하여 葛馬飮水形이라고하며 馬山이란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다고 한다..鍾亭 : 봉미산 줄기에 자리한 마을 뒷산이 鍾의 형국이고 앞산이 당금채 형이라해서 種亭이라 했다 한다.0.마을의 연혁.마산마을은 조선조 초기 德水長氏 張壽吉이 長興府 東에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피로하여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 이곳에 정착하면 자손이 번창하고 영세 부귀를 누릴 것이다 하여 이거한 후 성촌하였고, 그후 남평문씨 등이 입촌하였다..종정마을은 1700년경 보성군 회천에서 營光丁氏가 입주하면서 성촌되었다가 1800년경 보성선씨, 밀양박씨 등이 이주하여 현재의 마을규모를 이루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자랑) : 약 100여년 동안을(모시, 삼베, 목화)에 종사하는 농가가 많았다.근대 나이론의 등장으로 점차 사라져 갔으나 아직까지도 삼베만은 그 명맥을이어오고 있다. 참여농가 8호, 년간150필 생산(소득 1,900만원)0.문화유적.유물.永墓門 : 장세홍의 처, 장흥임씨의 효열비각.掌藥院正碑 : 장씨가 마산마을에 들어와 성촌하여 지내온 과정을 기록한 비.孝烈碑 : 문선흠씨의 증조모로 함양박씨의 기행비0.민속놀이.농악놀이 : 유두, 칠석, 백중이면 농주를 마시면서 농악놀이를 하고 하루를 즐겼다..씨름 : 추석명절에 편을 나누어 한다..중로보기, 강강술래 : 추석명절에 부녀자들이 즐긴다.
◆ 장평면 선정리 1구마을
0.장평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3km 지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장평천이 흐르고 있어 선정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간다.0.북으로는 산이 둘러 있으나 동남서로 평야지대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0.마을앞에 정자나무 3그루가 있다. 동으로는 마산마을, 산 너며로는 종정마을이있고, 북으로는 기동마을이 인접해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24세대,56명(남:30명,여:26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고 성 근(862 - 3028, 011 - 9536 - 3028) 0.풍수지리설 ; 자라가 두루봉 줄기에서 흐르는 골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형국이라 하여 金鱉飮水形 이라 한다.0.마을의 연혁.본래는 장흥군 장서면 지역으로 배가 닿는 선창이 있었다 하여 船艙 또는 선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船亭이라 하였다..신라 제 7747대 헌안왕 4년(860)에 보조선사가 유치 가지산에 보림사를 개창할 때 배를 이용하여 이곳으로 재목을 운반하였다고 하나 보림사 사적기에는 1692년(숙종18년)에 보림사 대웅보전을 중창할때 재목 25주를 승주군 주암면신교동 조씨 산에서 구해 보성강을 따라 운반하던 중 4월부터 7월까지 가뭍이들어 강물이 말라 중지했다가 이듬해 1693년(癸酉) 장마비로 강물이 불자 역류시켜 이곳 船艙천변까지 운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전주崔씨가 보림사 건립에 참여하기위해 이곳을 자나다가 산수가 좋아 정착했다고 전한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를 전후해서 140호가구 중 32명이 희생당하고 마을이 전소되는 화를 입었다.0.문화유적.유물.선정 고인돌 가군 : 마을에서 석정마을로 가는 쪽의 농로와 밭, 구릉에 50m의거리를 두고 6기의 고인돌이 군집되어 있다..선정 고인돌 나군 : 산 기슭에 4기의 고인돌이 동 - 서 1렬로 둔집도어 있다.예전에 민가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밭으로 경작하고 있다..선정 고인돌 다군 : 마을에서 북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13기의 고인돌이 민묘를 중심으로 동 - 서 타원형으로 군집되어 있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11,12호는 밭에 있었던 것을 경작에 불편하여 상석을 민묘 주위로 옮긴 듯 하다..선정 고인돌 라군 : 마을 입구 앞의 가운데 민묘를 중심으로 8기가 동 - 서 타원형으로 분포되어 있다. 1호는 조중철씨 뒷담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8호는 김재순씨 집 담 밑에 있다. 2호는 하부가 노출되어 있다..문재성씨 공덕비 : 장평진흥회장 재직시 공로가 지대하여 세웠다..서당터 : 서당골 사장터에 서당이 있어 한문수학을 했다..진원박씨 문중 제각이 있다.0.민속놀이.농악놀이 : 정월 초나 유두, 칠월칠석, 백중날에 농주를 마시면서 농악을 즐김.한가위 : 씨름을 즐겼으며 개바우 물에서 목욕을 하고 씨름을 하면 꼭 이기고돌아왔다. 특히, 조길승씨나 문병하씨는 장사로써 이름이 났다..중로보기 : 부녀자들이 종정마을 부녀자와 중로보기로 힘을 겨루었다.
◆ 장평면 광평리 광평마을
0.광평리는 光平마을과 日院마을이 합쳐 구성되었으며,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2km, 군청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20km에 위치한 해발 160m의 평야마을 이다.0.동쪽은 장동면 봉동리, 서쪽은 선정.양촌리, 북쪽은 녹양리 죽동마을고 접경하며, 마을 앞을 보성강 상류가 동서로 흐르고 있다. 0.면소재지까지 넓은 평야가 펼쳐저 훤히 틔어 있는 양지바른 마을이다.0.세대수 및 가구수 :34세대.56명(남:30명,여:26명),2009넌9월1일현재.0.마을이장 : 김 경 렬(862 - 4346,011 - 625 - 4346) 0.풍수지리설 : 마을의 주산인 뒷산이 범의 형국이라 하여 虎岩골이라 불이었고,그를 중심으로 동쪽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의 형체라 하여 鶴장골, 바른쪽은 흡사 자라와 같아서 鰲峰이라 하고 북쪽은 함박꽃처럼 탐스런 형이어서함박골이라 불이어 왔다.0.마을연혁.광평마을은 본래 장동면 지역으로 마을 유래지에는 조선초기에 김해 金씨 金新海가 경남 김해에서 장동면 봉동리로 이주하였고 일부가 이곳에 분거하여 정착하였다고 하나 보다 확실하게 정착하게 된 것은 조선조 선조 때 김해인 翰林公琯의 後인 松汀 金景秋가 장동면 栗谷에서 이거하여 개촌. 김씨의 세거촌을 이루었고 그후 정조 때 죽산인 安東楹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일원마을은 조선조 중엽 추계인 秋松雄이 관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람하다가 산수 좋은 한적한 곳이라 하여 이곳에 정착 세거촌을 이루었다. 본래는 송웅의 호를 따라 逸院아라 하였으나 후일 日院으로 개칭하였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평과 일원, 장변리 일부를 합하여 광평리라 하였고1973년 장평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마을 앞에 아홉정자가 있어 九亭이라 하고 또 비둘기가 많이 깃들어 鳩亭터라하였다. 또 넓은 들판이 있다하여 廣坪이라 하다가 光平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1950년 6.25당시 좌익의 장동 책임다였던 文모가 장동면민의 호적을 휴대하고 광평마을에 은닉하였다는 정보를 접하고 출동한 경찰과 때마침 마을에 침입한 공산 유격대가 격돌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쌍방간에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전소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0.문화유적.유물.楊子橋 : 觀水軒아래 있었음. 松汀 金京秋 선생이 조석으로 부모를 살피기 위하여 왕래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효자교라 함.觀水軒 : 송정 김경충의 장구지소, 丁緞谷, 林白湖, 梁松川과 함께 교유하며, 시를 짓던곳. 楊江祠터가 되다..賢德濟 : 金光年이 세웠으며, 후손들을 가르치던 곳.鳳山齊 : 1915년 세운 송정 김경추의 후손들의 강학소.楊江詞 : 肅宗 庚辰(1700)에 옛 觀水軒터에 세우고 송정 김경추르 배향하였다.풍우에 훼손이 심해서 1724년 원터골로 사우를 이건하였으나. 다시 1772년 고터인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67년 사우를 중건, 송정 선생 과 아를 如庵 金起西를 배향하고 있다..酒隱堂 : 金得弼이 세우다.0.민속놀이 : 이마을 출진으로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청년 향우회를 조직하여 해마다 추석을 기해 농악놀이와 더불어 노래자랑을 펼친다.이 청년 향우회에서 차일과 농악기를 마을에 기증 하였다.
◆ 장평면 녹양리 녹양마을
0.녹양과 외갈, 내갈, 죽동, 섬안의 5개 자연마을이 산재해 있다.0.장흥읍에서 북북동쪽으로 20km, 장평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4km에 윈치한해발150m의 중산간 마을이다.0.북으로는 임리, 동으로는 두봉, 서로는 광평, 남으로 보성군 노동면과 경계하고있다. 林川이 보성강과 맞닿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장평면에서는 비교적 낮은 지대에 속한다.0.세대수 및 인구수 : 58세대.104명(남:48명,여:56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박 평 규(862 - 4212,010 - 3804 - 4212) 0.풍수지리설 : 없음0.마을의 연혁.녹양리는 5개의 자연마을이 합해서 1개의 행정리로 된 마을이지만 1947년(정묘지)에는 葛嶺만 나타나 있고. 1910년(경술지)에는 갈령과 녹양 두 마을이 나타나 있다..원 錄楊은 1300녀경 文化柳氏 奇春이 낙향하여 개촌. 처음에는 西面아라 부르다가 오후에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老陽아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푸른 숲이우거진 곳이라 하여 錄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갈령마을은 칡넝쿨이 얽혀젔다하여 덩툴쟤 혹은 갈고개라고 불렀으며 갈고개안쪽마을을 內葛 그 밖에 형성된 마을을 外葛이라 한다. 1640년경 용산면 어산에서 珍原人 朴世番이 보성으로 가다가 산세가 종하서이곳에 정착하여 진원박씨 세거촌을 이루었다..죽동마을은 1700년경 나주에서 秋溪人 秋鳳甲이 입주하여 개촌 하였다 한다..섬안마을은 1918년 珍原人 朴泰榮이 분가하여 개촌하였다고 한다. 일명 島內라고도 한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여순사건 때 갈령마을 유지 3명이 피살되었다. 1951년에는 죽동마을 사람 3명과 갈령마을 5명이 집단 살해되었다..자랑 : 1977년부터 리민의 날을 책정하여 년례행사로 마을주민과 출향인사들이 한데 모여 효.열부 선행자 등을 표창하고 노래와 장기자랑 등 리민 화합을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하고 있다.1980년에 군내 경노효친 시범마을로 지정된 바 있고, 1984년에는 전라남도시범마을로 선정된 바 있어서 마을사람 모두가 경노효친과 도의심 햠양을 위해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하고 있다.앞으로 저월 대보름과 8월 한가위에는 강강수월래, 마당밟기, 줄다리기 등 사라져 가는 민속놀이를 부활.계승 시킬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다.0.문화유적.유물.외갈 고인돌군 : 갈령마을 돌 바우등에 6기의 고인돌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절터 : 죽동 마을에 옛 절터가 있어 지금도 기와자이 나온다. 구전에 의하면 빈대가 극심하여 폐사되었다고 한다..황산사 : 죽동마을에 있는 추계秋氏의 사당으로 露堂秋適과 洗心堂 秋水鏡을배향하고 있다. 1956년에 건립하였다..遺庄碑 : 갈령에 있으며 고암 박세번 이래 진원 박씨의 집성촌으로 세거 사살을기록하고 있다..孝烈碑 : 임리에 있으며 慶州金氏로 鄕中에서 세웠다..敎恩碑 : 갈령에 있으며 월암 박형관의 제자가 1984년7월 스승의 뜻을 기리기위해 세웠다..講學碑 : 갈령에 있으며 월전 박인주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3년12월에 세웠다..記績碑 : 임리에 있으며 竹灘 秋鏞禧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향인들이 세웠다..孝子碑 : 임리에 있으며 죄진석의 효행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이 세웠다..行蹟碑 : 松隱 朴種一 義士의 의병활동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 5월에 세움..遺蹟碑 : 强濟 朴琪鉉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7년 1월 세웠다..정려효자문 : 임이에 있으며 全采奎 박사의 효행정려문..효열비 : 갈령에 있으며 박형규의 처 김한열의 女 열녀비..행적비 : 임리에 있으며 葛隱 朴奉柱의 제자가 세우다..廟庭碑 : 황산사에 있다.0.민속놀이 : 정월 대보름남 마을의 남자들이 농악놀이를 즐기는 한편 남몰래 남의집 디딜방아를 빼어다가 마을 입구에 뒤집어 세워놓고 아낙네의 속옷을 훔처다가 씌워놓는 풍습이 일제말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전염병이나 마귀를 쫓고 마을의 태평과 안녕을 기원하는 액막이의 일종이었다..세시풍속 : 팔월한가위 - 마을의 처녀와 젊은 아낙네들이 한데 모여 강강술레와널뛰기를 하였다.정월대보름 - 아이들은 불싸움과 자치기놀이를, 어른들은 농악과 윶놀이를하였으며 특히 이웃마을 임리와 불싸움놀이를 격렬하게 하였다.
◆ 장평면 임리 임리마을
0.임리 본마을과 上江, 下江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0.장평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4km 지점에 진산가는 길목에 위치한 해발 165m의 평야마을이다.0.북으로 진산, 서로 어곡, 동남으로 녹얄리와 인접해 있다. 林川을 사이에 두고 상강과 하강의 자연마을과 숲들이 펼처져 있다. 수자원이 좋아 옛부터 농사짓기에 불편하지 않은 마을이다.0.세대수 및 인구수 : 43세대,72명(남:37명,여:35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염 태 규(862 - 4357, 011 - 622 - 4357) 0.풍수지리설 : 원래 林理는 猛虎出林形이라 하여 호랑이와 관련되는 전설이 있어 왔다. 마을 앞 행정(은행나무정자, 지금은 은행나무대신 느티나무가 있다)부근에 커다란 입석(선돌)이 있었는데 이 선돌을 물레방아 연자매로 썼더니호랑이가 출몰하여 가축에 피해를 주었다. 그 피해가 너무 심하여 점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선돌을 업신여겨 그런것 같으니 다시 선돌을 세우면 그런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이 강 건너 하강마을 정부잣집 산에서 큰 돌을날리다 다시 선돌을 세워더니 호랑이 피해강 없었다고 한다.맹호출림형국이어서 부근에 나무를 많이 심어 터를 보호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이곳 호랑이는 宿虎形이라 하여 사납지 않다고 전한다.마을 서편은 銀河七星形이라 한다.0.마을의 연혁.林里 본 마을은 조선조 초엽 晋州鄭氏가 거주 하였다고 하나 조선조 세종때 남평문씨가 화순에서 이거해 와 지금까지 세거한 곳으로 매우 역사가 깊다.富坪坊治所가 이곳에 있는데 부평방이 정서방과 합하여 장평면으로 변경됨에1936년 그 치소는 書齋가 되었다고 한다.(篁齋).上江마을은 조선조 중엽 수원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하였으나 후에 파주염씨가 거주 하다가 조선조 말엽 몇몇 성씨가 함께 어울려 살았으나 후에 진주정씨가 마을을 이루었다. 강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강이라 한다..下江 마을은 고려시대에는 晋州鄭氏의 세거촌이었으나 조선조 중엽부터 河東鄭氏가 이곳에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강 아래쪽에 있는마을이라 하여 하강마을이라 한다. 0.주요사건과 자랑(자랑) : 마을사람들이 예의바르고 순박하며 협동심이 강하다.매년 8.15행사에는 출타한 재경,재광 향우들이 모여 리민의 날 행사를 갖는데 40 ~ 50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룬다.0.문화유적.유물.白洞詞 : 이 원사는 전라도 유림들이 友谷 文壁, 白草堂 文參, 磊村 文成質 등南平 文氏三公의 학적, 절의를 흠모.향사하기 위하여 1851년에 건립한 원사.처음에는 三賢祠라 하였다. 현재 건물은 1895년에 재건축하였다..講學碑 : 한학자 文在禧 선생의 강학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비..孝子門 : 효자 全相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 고종때 참정대신을지냈던 충정공 민영환이 천장을 썼다..孝烈碑 : 염두봉의 처. 경주이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施惠不忘碑 : 全采圭의 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부평 노인당(龜蓮堂) : 1991년 주민의 성금과 출향인사의 희사금으로 건립.(4간접집,와가) 부평 향약소를 겸하고 있다..정석진씨 한옥 : 건립연대는 1880년경 한옥 6칸집..옛 서당터 : 함박산 중턱에 서재가 있는데 이서재가 현 篁齋터로 이설.0.전설 .白草洞의 유래 : 백동사가 있는 곳은 원래 叩馬谷 이었는데 효자 文壁, 文參형제분이 侍墓 3년을 초려에서 지내고 나자 부근에 풀이 말라 죽었다해서 백초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 유래되었다 한다..시누대 전설 : 장평면 임리 남평문씨 제각 白洞祠입구 우측에 남평문씨 묘역이잘 정돈되어 있다. 이 묘역은 세종 때 통훈대부 寧海부사를 지낸 文蘊과 아드님신 文昌 그리고 후손이 안장된 곳이다. 그런데 맨 위 무 온의 묘 위에 시누대(설대)의 총죽이 옛날부터더 이상 뻦어나지 않고 한 다발 쯤 그대로 자라고 있다. 여기에 대한 전설이다.문 창이 아버님이신 문 온의 마땅한 묘소를 찾느라 지리산 일대를 헤메고 돌아다녔다. 이렇게 지리산을 돌아 다니던 어느날 날이 저물어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근처에 쉬어 갈 만한 인가를 찾고 있었다. 마침내 어두운 산 기슭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하루밤 자리를 청하려고 다가갔다. 그 곳에 가서보니 다 쓰러져 가는 오막에 머리가 하얗게샌 노인 한 분이 살고 있었다.숨을 돌리고 하루밤 묵어 가기를 청하자 노인은 허락하고 방으로 들어 오라고하였다. 마주 앉아 여기까지 오게된 내력을 물었다.문 창은 자초지종을 애기를 하였다. 문 창의 말을 듣고 난 노인은 당신이 처음 봐 둔 장평 밈리의 묘소가 괜찮은 것 같다 고 하며 그곳에 묘소를 정하되 깊이를 열두자 정도 깊이파고 안장을 하면 훗날 그 묘 위에서 대나무가 나올 것이 다. 그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그리 알라 고 하였다. 피곤하여 비몽사몽간에 이런 말을 듣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노인은 온간데가 없었다.신기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 길로 돌아와 노인이 일러 준 대로 안장을 하였다.그 이듬해에 묘 위에서 시누대 세 개가 돋아나고 아들 삼형제가 태어 낳는데堅, 緊, 賢으로써 그 후손이 지금 장평과 보성, 유치에 널리 번창하고 있다.지금도 이 지누대는 옛날처럼 자라고 있는데 靈竹으로 여겨 없애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이는 이 묘소의 형국이 꿩이 엎드려 있는 형국으로 위에 매바우가있어 시누대가 꿩을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장평면 내동리 내동마을
0.군청소재지에서 26km, 면소재지에서 약 6km에 위치한 해발 약200m의 산간 마을이다.0.남으로는 임리와 접해있고, 동.북.서는 산과 접해 있다. 임리와 장평동초등학교(폐교) 사이의 도로로 약 1km 북쪽으로 가서 마을이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27세대.53명(남:23명,여:30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문 봉 호(862 - 4014,018 - 413 - 4014) 0.풍수지리설 : 마을이 반월형국을 하고 있어 농로나 소로가 반달 모양이었다.새마을사업으로 마을 중앙으로 농로를 개설하여 현재는 반달응 반으로 놓은모양이 되었다.한편 船內形이라 하여 마을 안에는 우물을 파지 않았으며 동구밖에 5개의 공동우물로 식수를 하였다 한다.0.마을의 연혁 : 조선조 초엽 전주이씨인 李植이 화순 능주에서 이곳으로 입주하여 촌락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다.남씨 와 문씨 등이 거주하였다고도 하며 조씨가 살았다고도 한다.그래서 지금은 거주하지 않지만 종전에 살았던 씨족으로 南氏, 趙氏, 광산金氏등이 있다. 삼정이 내동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 분리가 되었다. 0.주요사건고 자랑(자랑) : 1974년 장평면 농악이 남도문화제에 출연할 때 내동의 문재량씨가 설장고로 출연하여 장평농악이 준 우승을 치지하였다.0.문화유적.유물.당산제 : 정월 보름에 마을 앞 당산에서 익히지 않은 제수를 장만하여 동중 최고령자가 제관이 되어 당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시행되지 않음..솔대 : 마을 입구에 두 개의 솔대가 서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문과에 등제한 김성후, 박정옥 두 분의 등과를 나타낸 것아었다고 한다..장승 : 옛날에는 마을 어귀에 두 개의 장승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다..입석 : 마을 앞에 두 개의 입석이 있다..오래된 가옥 : 임태주씨 가옥으로 160년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한옥으로 5칸집이며 지금은 스레트로 지붕을 덮었다.
◆ 장평면 내동리 삼정마을
0.군소재지에서 약24km,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4km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180 m의 중산간 마을이다.0.임리에서 서쪽으로 임천을 딸 약2km가면 임천 남쪽에 위치해 있다.임리 ~ 어곡간 폭 8m의 도로가 개설되면 교통이 훨씬 편리해 질 것이다.0.서쪽으로 율정, 동쪽으로 임리, 내동과 인접해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18새대,44명(남:23명,여:21명),2009년9월1일 현재.0.마을이장 : 김 영 옥(862 - 4165, 011 - 613 - 4165) 0.풍수지리설 : 없음.0.마을의 연혁.내동 북쪽에 石亭洞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하나 구전에 그치고 금을 캐러 모여든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을이 형성된었다고 한다..西亭, 村亭, 小亭 둥 정자나무가 세군데 있어서 삼정이라 불렸다 한다..연대 미사의 마을 뒷산ㅇ에 서당터가 있는데 鳳嗚濟라 불리었고, 이 봉명재에서 文左郞과 함안 군수가 배출되었다고 해서 鳳亭里라 하였다 한다..150여년 전에 金海人 金鎭鼎이 나주 금천에서 이곳으로 세거하였으며 진주鄭氏는 6.25때 임리 하강마을에서 선산을 찾아 이곳으로 이거 하였다 함..옛날에는 文氏, 李氏, 曺氏, 崔氏, 梁氏, 廉氏, 黃氏 등이 살았다 함..내동과 본래 한 마을이었으나 196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정리로 분구.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사변 때 이데오르디의 대립으로 무고한 마을사람 5명이 하루 저녁에 피살 당하여 마을 전체 주민이 한동한 크게 고통을 당하였음0.문화유적.유물.서당터 : 임리 산 95번지 서당골. 옛날에 서재가 있었음..주낙용 가옥 : 건축년대 200년전 4칸 목조. 현재는 합석으로 지붕개량이 되어있으며 부엌을 개조함.
◆ 장평면 어곡리 어곡마을
0.어곡리는 어곡, 율정, 송정, 암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된 대단히 광범위한 마을이다.0.장흥읍에서 북으로 약29km, 장평소재지에서는 9km의 거리에 있는 해발 230m의 산간 마을이다.0.북으로는 화순군 청풍면과 인접해 있고, 남으로는 기동리와 인접해 있다.동과 서는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0.암동에서 새목골재를 넘으면 바로 화순군 청풍면 신석리로 통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 길을 통래 화순 이양장을 이용하였다.0.세대수 및 인구수 : 38세대.67명(남:28명,여:39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정 종 호(862 - 9925, 011 - 617 - 9925) 0.풍수지리설 : 漁谷은 마을의 주맥이 魚形이라 해서 어실 또는 어곡 이라 하다가한말에 魚자를 漁자로 바꾸었다.이는 마을의 주산 숫개봉을 둘러 싸고 있는 산새와 지형이 고기잡이 늙은이가낚시를 드리운형(漁翁垂約形)이라는데서 유래한다고 말한다.0.마을의 연혁.어곡리는 漁谷, 栗亭, 松亭, 岩洞 등 4개의 자연마을이 합해서 하나의 행정리를이루고 있지만 1947년(정묘지)에는 魚谷마을로 나타나 있고, 1910년(경술지)에는 魚谷과 松亭등 2개리로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世居姓氏는 진원박씨, 해남윤씨, 수워벡씨, 밀양박씨, 제주양씨, 하동정씨, 김해김씨, 완산이씨 등이다..岩洞마을은 조선 중기 진원朴氏 進相이 어곡에서 살다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좋은 물과 비옥한 토지가 있어 이주 정착하였다고 하며 왜구들이 침입시에는좋은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암동이란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漁谷마을은 조선초기 長興魏氏 壽長이 冠山 桂洞에서 살다가 왜구이 잦은 침입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이주 정착하였다.그 뒤 청주 한씨가 그릇을 굽기위해 정착하였으나 후에 이주해온 진주강씨와진원박씨들의 학대레 못이겨 5리쯤 떨어진 지금의 율정으로 이사를 갔다..栗亭마을은 조선 중옆 어곡에서 살던 土器工 청주한씨 柱善이 이곳으로 이거해서 토기를 굽고 살며 栗店이라 하였고 한씨 손은 이곳에서 100여년 동안 살다가 화순군 능주로 옮겨갔고, 장흥 부산면 내안리 청풍김씨 永植이 7대조 聖厚의 선산을 수호하기 위해 입주하면서 밤나무를 가꾸었다. 그래서 栗亭이라는이름이 붙게 되었다..松亭마을은 300년전 富亭에 살던 장흥임씨 處元이 처음 입주하고 그후 영광정씨, 전주이씨가 입주하면서 성촌되었다. 입촌한 남평문씨가 마을 앞에 소나무를 심은 것이 연유되어 송정이라 하였다한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6.25때 전 가구 96호가 불탔다.(율정마을 뒤에 경찰분초가 있었다.1957년에 철수).자랑 : 1981년과 1988년 2회에 걸쳐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 받은 것을 온 마을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긴다.이는 남녀노소가 할 것없이 모두가 예속을 바르게 해서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울 사랑하는 마음이 한결 같기 때문으로 이 보다 더 큰 자량이 없다.범죄없는마을로 지정되어 마을회관 건립과 안길 포장을 하였다.0.문화유적.유물.도요지 : 이 窯址는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편에 걸쳐 3곳에서 그 흔적을 찾울 수 있다.1호는 마을 동편의 자작골 입구에 자리한 큰 샘 주변에 위치하며 그 주위에 대나무 밭에 陶片과 窯壁片들이 집중적으로 산재해 있다.그러나 가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수습된 유물은 대부분 일상용기로 사용된 鉢.접시류이며 기타 백자항아리 동체부 등이 발견되었다.2호는 마을회관 뒷편 대나무 반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가마터 1기가 확인되었으며, 주변에 많은 도편과 갑발,요벽편 등이 산재해 있다. 수습된 도편들은 발.접시등으로 1호에서 수습한 편들과 같은 종류의 것들잉다.3호는 마을 입구로부터 약 500m 정도 벗어난 도로 옆에 위치한다.요지가 위치한 이곳은 속칭 조라강등 이라 부리우는 곳으로 주위에는 소나무와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登窯형의 가마로 추정되는 폭 5m, 길이 20m 정도의 돌출부분이 형성된 이곳은 일부가 파혜체진 윗부분에서 도편과 요벽편 등이 수습되었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 또한 1,2호와 유사한 것으로 鉢.접시류가 대부분이다. 이상 3기의 요지가 분포된 漁谷里窯祉는 대부분 생활용기를 제작한 곳으로 제작수법이 조잡한 미수용요지로 추정된다.어곡이나 율정은 그릇 굽기에 흙이 좋아 청주한씨가 이곳에서 토기를 구웠다고한다.0.민속(당산제) ; 마을 중간 주혈에 해당하는 곳에 당산나무가 있어 그중 가장 오래된 나무의 그루터기에 단을 묘셔 음력정월 14일 밤에 당산제를 지내오고 있는데 6.25때 온 마을이 피난을 했을 때 에도 경찰의 보호아래 제행을 해서 지금까지 결행한 적이 없다고 한다. 3년전부터 날짜를 변경해서 15일 낮에 행사한다. 이 제에 딸린 제위토는 논이 4두락, 산이 14정 년3석으로 제행한다.유사로 지명 받은 사람은 7일간 목욕 근신한다.(제관, 추관 각1명.박남규소장)0.구비전승 : 봉미산 중턱에는 지금도 한양 다닌 길이 있는데 옛날 원님이 이 봉미산 고개를 넘다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베틀소리에 귀를 기우렸다고 한다.0.노거수 : 4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송정마을 앞에 있다. 보호수로 지정.
◆ 장평면 복흥리 복흥마을
0.복흥리는 복흥과 압곡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0.장흥읍에서 약30km, 장평소재제에서 약9km 북쪽에 위치한 해발 약250m의산간마을이다.0.북으로는 해발 412m의 군치산을 경계로하여 화순군 이양면과 경계하고. 동으로는 진산리, 서로는 어곡과 경계하고 남으로는 내동리와 경계한다.0.복흥리에서 발원한 林川은 6.754m를 흘러 보성강에 합류한다.옛날에는 뗏대와 큰덕골재를 넘어 화순 이양과 왕래를 빈번히 하였다.0.세대수 및 인구수 : 17세대.33명(남:16명,여:17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황 한 익(862- 2256,010 - 9368 - 1177) 0.풍수지리설 : 없음.0.마을의 연혁.1947년(丁卯誌)에는 鴨谷에 하동정씨와 강씨, 손씨손들이 세거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1910년(庚戌誌)에는 압곡에 청풍김씨와 진원박씨, 그리고 복흥에창원황씨, 평택임씨, 진주정씨, 남평문씨, 진주강씨, 남평문씨, 진주강씨가 富亭에 임씨, 문씨, 정씨(진주), 김씨(영광), 鶴洞에는 전주정씨와 안동권씨, 남평문씨가 세거한것으로 전하고 있다..복흥마을은 조선조 중기 하동정씨가 長東 배산에서 거주하다가 이곳에 이주 정착하여 50여년간 번창한후 가세가 기울게 되자 정골에서 주막을 하다 살다 20여년 후 다시 가세가 회복되어 이곳으로 돌아와 마을을 이루고 번성하였다고한다.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復興이라 부르게 도었다고 한다. 1914년 부정, 압곡, 학동을 병합하여 복흥 이라 하였다..압곡마을은 마을을 싸고 있는 낮은 산들이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조선조 중엽 장흥에서 살던 장흥임씨 命彦, 命玉 형제가 任老世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이곳에 입주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당시 이곳은 워낙 산중이라서 마을사람들이 눌러 살지를 못하고 인근 화순지방으로 모두 피난을 하였다..자랑 : 1984년, 1985년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되어 법무부장관의 표창을 받아이것은 마을이 인심이 순후하고 법고 도덕질서를 잘 지켜 나감을 뜻하는 것으로 큰 자랑으로 여긴다.0.문화유적.유물.永思齊 : 마을뒤에 있는 여흥민씨의 제각..도요지( 소재지 : 장평면 복흥리 복흥)1호요지는 복흥마을 북서편 300m 지점의 산길에 위치한다.仙岩山을 등지고 위치한 이곳은 속칭 언덕골(언터골)리아 불리워지는 곳으로 현재 일부는 밭으로 개간하여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陶片과 窯壁片들은 양순승(473버지)와 문홍규씨(475번지) 소유의 밭에서 주로수습도며, 좌측으로 흐르는 개천변에도 도편들이 약 100m가량 흩어져 있다.이 요지는 考古學地圖, (韓國考古學會, 1984)에서 17c白磁窯祉로 비정하고 4개소가 남아있는 것 으로 조사.보고 되어 있다.수습된 기종은 盞, 鉢, 접시류 등의 백자편들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 문양이 없고 둠벙수법에 의해 제작되었다..2호기 窯址는仙岩山 줄기를 사이로 1호요지 반대편에 위치한다. 일명 척동골이라 불리은 곳으로 마을 앞에 위치한 복흥저수지에서 북서편 으로소로를 따라 약300m 가량 들어가 있다.현재는 문동현씨 소유의 밭에 陶片과 窯壁片들이 집중 분포되어 있다.대부분이 粉靑沙器片으로 기벽이 얇고 문양이 없는 거이며, 주로 접시류와 잔등이 수습된다.한편 도자기의 주원료인 고령토가 주변에서 발견되나 가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과거 이곳은 도공들에 의해 이룩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현재는 폐촌되고 그 터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 장평면 복흥리 부정마을
0.1947년(丁卯誌) 기록에도 부정은 나오지 않고 1910년(庚戌誌)에 부정에 장흥임씨, 남평문씨, 진주정씨, 영광김씨 등이 세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0.부정은 장흥읍에서 약25km, 장평소재지에서 9km 지점에 위치하여 해발 약 230m의 산간마을이다.0.復興堤 밑에 있어 수리가 안전하며 토질이 비옥하다..0.북으로는 복흥마을이 있고 주변에 학동, 송정마을이 있다.0.마을 앞으로 흐르는 임천은 남으로 두봉에 이른다.0.세대수 및 인구수 : 19세대.31명(남:17명,여:14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정 창 곤(862 - 4343,011 - 8629 -4343) 0.풍수지리설 : 오리가 물가에 앉은 형국이라 해서 鳧汀 또는 鳧亭아리 해 오다가副亭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앞산이 조적봉이라서 연결디어 지어진 이름이다일제 때는 芙汀이라 불리었다.0.마을의 연혁 : 윈래 개촌은 진주강씨가 입촌하면서 부터였다고 하나 그 후로 하동정씨가 세를 이루었고 조선조 중엽 복흥리 압곡에서 살던 장흥임씨, 命彦, 命玉 형제가 선조 光世 형제가 선조 光世의 묘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곳에 입촌한이후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때 60여호 전 호가 소실되어 주민 모두가 피난 하였다..자랑 : 범죄 없는 마을(1994년도 선정), 포상금 1,400마원, 하사금 600만원으로 마을 하수도 사업을 시행하였다.0.문화유적.유물.부정고인돌 가군 : 마을에서 복흥마을을 가는 도로를 따라 200여m 가면 김덕배씨 소유 밭에 2기가 있고, 다시 서북쪽으로 300여m 떨어진 곳에 8기가 있어모두 10기의 고인돌군이 동 - 서로 1열로 군집 되어 있다..부정고인돌 나군 : 머울로 들어가는 입구의 말구쟁이 라 불리는 곳에 7기의 고인돌이 북서 - 남동 방향과 동 - 서 뱡향의 2열로 군집되어 있으며 남쪽으로 농로을 따라 300여m 떨어진 임창헌씨 소유의 논에 4기가 더 있다..任光 世 묘비 : 임광세(1469~1541) 자는 縣叔 성종때 忠順衛을 거쳐 通禮院左通禮에 이르렀다. 뒤에 손자 任發英의 공으로 刑曹判書에 추증 됨..追遠齊 : 장흥임씨 제각.
◆ 장평면 진산리 진산마을
0.진산리는 원진산과 신덕, 옥련마을이 합해진 행정마을로 장흥읍에서 약28km장평면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12km에 위치한 산간 마을이다.0.평균 해발250m 이상의 고지대이다.0.북으로 가위재를 넘어 화순군 이양면과 경계하고 동으로 진전제를 사이에 두고보성군 노동면고 경계하고 있다.0.명동천의 시원지로써 명동천은 진산과 두봉을 거쳐 보성강에 이르는 1,650m의하천이다.0.원진산과 신덕, 옥련마을이 1km씩 떨어져 있고, 조성년대와 집성연원이 달라연대감이 다소 희박하다.0.세대수 및 인구수 :41세대.68명(남:33명,여:35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양 찬 승(862 - 4207,010 - 4522 - 4207) 0.풍수지리설 : 玉蓮의 마을이름은 옥련이란 각시가 살았다해서 각시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옥연각시 이름 그대로 옥연이라 부른다.또 일설에는 蓮방죽에서 처녀가 빠져 죽었다혀여 각시골이라 부르다가 그후玉女峰의 玉자와 蓮방죽의 蓮자를 따서 옥연이라 불렀다고 한다.0.마을의 연혁.1747년(정묘지)에는 陳田으로 나타나 있고 陳田에는 고씨가 세거하였다고 전하며, 1910(경술지)에는 明洞에 황씨와 문씨, 손씨, 珍田에 문씨, 선씨, 안씨,김씨, 전씨가, 唐谷,玉蓮에 고씨, 서씨 등이 세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珍山里 : 碧玉山 밑에 있으므로 珍山(珍田, 陳田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련, 명동, 호동을 병합하여 珍山里라 하였다.임진왜란때 남평문씨인 景福이 이거해와 성촌아였다고 한다..新德 :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해김씨, 洙鏡이 어곡에서 선조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이주하여 성촌하였다고 한다..玉蓮 : 조선후기 이천서씨 濚鉉이 화순능주에서 이곳 壁玉山 절경에 도취되어이주 하였다고 함.옥련이란 마을이름은 처녀가 蓮방죽에서 빠져죽었다 하여 각시골로 부르다가그후 玉女峰의 玉자와 蓮방죽의 蓮자를 따라서 부르게 되었다 한다..虎洞 : 제주양씨가 120년전에 입촌하였고, 호동에는 옛날에 광산김씨가 세거하였으나 이거후 마을이 없어졌다가 하동정씨 織柱가 20년 전부터 살고 있다. 0.주요사건과 자랑.주요사건 : 6.25때93호 전 가구가 소실되었다.(마을 서재인 열락재는 불에 타지 않음) 그후 일월곡과 당곡의 마을은 폐촌되었다.진산, 두봉마을을 합해서 90명 가량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자랑 : 없음.0.문화유적.유물.열락제 : 1628년에 건립하여 강학소로 전해오다가 1985년에 철거되었다..일월사 : 명동에 있는 절터..문수암 : 벽옥산 문수암이 있었다고 전한다..옛샘터 : 바랑골에 있는 샘터로 1976년 상수도 개설시 굴찰하던 중에 이 샘터가 발견 되었다.0.민속놀이(당산제) : 1970년도까지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없어젔다.0.노거수(느티나무) : 수령 300년, 높이 17m, 둘레 3.1m 당산목으로 옛날에는 이나무밑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 장평면 두봉리 두봉마을
0.두봉리는 元斗峯과, 玉山, 鷹岩, 金洞, 固亭 등 5개 자연마을이 산재해 있는 것 을 통합하여 1개 행정마을로 구성하였다.0.장흥읍에서 약25km, 장평소재지에서 약7km 북동쪽에 위치한 해발 평균 150m의 산간마을이다.0.북으로는 진산리가 있고 진산에서 흐르는 명동천이 관류하고 있으며, 남으로 명동천이 보성강과 합류하고, 보성군 노동면과 경계하고 있다.동북서가 산으로 에워쌓여있고 명동천 주변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조성되어 있다. 5개 자연마을이 통합해서 이루어진 관계로 아직도 각 마을마다 고유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0.세대수 및 인구수 : 54세대(남:58명,여:52명),2009년9월1일현재.0.마을이장 : 장 외 수(862 - 4088,011 - 616 - 4077) 0.풍수지리설 : 玉山마을은 옛날에 이곳에 감옥이 있었다 하여 獄山이라 불리었다 하나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 사건이 있은 후로는 한 도승이 찾아와 마을을 玉山으로 부르면 마을 전체가 천년은 족히 흥할 것이라 하여 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그 후로는 감옥이 없어지고 100호 이상의 큰 마을로 번창하였으나 현재는 겨우명맥을 이어 갈 뿐이다.0.마을의 연혁.1747년(丁卯志)에는 叩馬谷, 金谷, 長水洞으로 나타나 있는데 叩馬谷에는 황씨장씨, 공씨, 金谷에는 전씨, 오씨가, 長水洞에는 차씨, 김씨, 강씨가 세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1910년(庚戌誌)에는 斗峯, 金洞, 叩亭으로 나타나 있는데 斗峯에는 연안차씨,여산송씨, 장택고씨, 완산이씨가, 金洞에는 광산김씨, 진주정씨, 수원백씨가.叩亭에는 김해김씨가 세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두봉마을 : 조선조 초기에 이웃 보성군 노동면 옥마리에서 거주하던 수원백씨가 이곳 장수동에 많은 농토을 갖고 있다가 큰 홍수로 마을과 농경지가 유실되자 지금의 斗峯(맓봉산)에 살면서 마을을 일구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정, 금동, 옥산, 응암을 합하고 마을 이름을斗峯里라 하였다..옥산마을 : 獄山아라 불리우던 것을 도승의 말에 따라 玉山이라 부르게 되니마을이 크게 번창하여 한때는 100여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 되었다 한다..응암마을 : 100여년 전 하동정씨가 燦久가 보성군 노동면 玉馬里에서 이곳에농사를 짓기위해 터를 닦았다고 한다.마을 앞에 매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매바우골이라 부르다가 한자음으로 응암이라 하였다..금동마을 : 조선조말 장흥읍 평화리에 살던 김金禹擇이 금을 캐러고 이곳에 머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후 김씨들이 一村을 이루면서 마을을 일구었다..고정마을 : 먼 옛날의 성촌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후 金祥先이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옛 부평면의 끝으로 옹기점이 있어 叩店, 叩亭, 叩馬谷, 고맛골이란 이름이 남아 있다. 0.주요사건과 자량.주요사건 : 6.25를 전후하여 공비들이 출몰하여 주민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다..자량 : 마을에서 두산 장학회를 조직하여 매년 학업성적이 우수한 고등학생2명과 중학생 3명을 선발하여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0.문화유적.유물(응암고인돌 유적) : 두봉리 응암마을 동쪽 끝부분의 밭에 1기가있고, 마을입구에 남쪽으로 50m 떨어진 논과 논둑에 18기가 동 ~ 서 타원형으로 있다. 대부분이 묻혀 있어 하부를 확인 할 수 없다.0.민속놀이(당산제) : 고정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보름날 행해지는 동제다.경비는 마을 공동자산에서 갹출한다.과거에는 당산제와 더블어 농악을 곁들었으니 1987년 부터는 상주세대가 줄어농악 시연을 못한다. 마을의 무사안녕과 무병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