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맘편한교회? 아니, 가난한 마음! >
2019. 3. 19 김길로
“마음이 편한 것이 최고야!” 며칠 전, 개척교회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나에게 교회 개척을 권유하면서 한 말이다. 자립교회(기성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변화되지 않는 성도들 눈치 보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교회를 개척하라고 한다. 마음이 편한 것이 최고라는 친구의 조언이 귓가에 맴돈다. “교회만이라도 예배드리러 오면 마음이 편하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던 한 성도님의 하소연이 생각났다.
그렇다. 교회는 마음이 편해야 한다. 앞으로 교회를 개척하면 ‘맘편한교회’라고 해야겠다며 친구와 함께 웃었다. 어느 아파트 브랜드 이름과 비슷한 걸 보면 ‘마음의 평안’을 원하는 마음은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찬송가 408장)” 이렇게 늘 노래하는 교회를 개척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교회가 시편 23편에서 노래하는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와 같은 곳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맘편한교회’ 이름을 지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마음의 평안’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교회는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마음이 편하도록 치유하는 상담기관이 아니다. ‘마음의 평안’이 목적이 되면 가시적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성도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나는 자연인이다’ TV 프로그램에 나온 자연인은 대부분 혼자 산으로 갔다.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산으로 가서 사는 자연인은 거의 없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산으로 간 것이다. 두 사람 이상 사람이 모인 곳에는 항상 갈등과 불편함이 있다. ‘맘편한교회’는 혼자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찾으신다. ‘가난한 마음’이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된 마음이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과 가치를 아는 마음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즉,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맘편한교회’라는 이름은 지웠지만 ‘마음의 평안’에 대한 욕구는 그대로 남는다. ‘가난한 마음’만으로 충분할까? 시편 23편에서 노래하는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에 가서 안식을 누리고 싶은 성도의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 그 답은 찬송가 470장에서 발견한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가난한 마음’은 내 주 예수 모신 곳이며, 주 예수와 동행하는 삶이다. ‘마음의 평안’은 이 찬송이 주는 확신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는 문자 그대로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딘가로 옮겨가야 할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어느 곳이나 누울 수 있고 쉴 수 있는 안식처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마음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하는 곳이 된다. 예수 믿는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직장, 교회 등, 어느 곳이나 ‘가난한 마음’으로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라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삶의 모든 장소와 시간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예배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신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은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쉬운성경 시 23:3)”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에서 우리는 새 힘을 얻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일한다.
‘마음의 평안’이 최고라고 말하는 친구가 크게 내쉬는 한 숨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 앞에서 몸부림치는 신음과 성도에게 받은 상처, 불편한 마음, 외로움, 십자가를 느낀다. ‘가난한 마음’이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친구여, 우리 예수님 명령 따라 살자. 친구여, 우리 주를 위해 이 몸을 바치자(하스테반, All Nations Worship&Pra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