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와 예(禮)를 인지함은 사람들은 슬기와 지혜를 모아 도리(道理)를 다하며 살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환경들은 한마디로 뒤범벅이다.
변화된 생활의 모습들에 이어 세대 간의 격벽(隔壁)은 그저 황망할 뿐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소양들마저 실종되어 가는듯한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본연의 윤리적 가치관은 도덕적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영원장생(永遠長生)의 꿈과 기개들은 일상의 타락들에 묻힌 듯 미래로의 정도를 가늠키도 어려워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또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란 무엇일까?
하기 싫은 것 하지 않고
먹기 싫은 것 먹지 않고
귀찮은 건 외면해 버리고
불편해 보일 이해충돌은 가급적 기만하면서
오로지 독불장군처럼 나 자신만을 위한 쾌락과 상응할 이치들만 쫓아서 안주하려 하기에 급급해 보인다.
마치 독보적 자태로 천성(天性)을 가장한 성격, 성향을 앞세워 고집함만 내세워 보이는 건 중병적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랴 개탄해 본다.
세상의 모듬은 웃어른을 공경하고 무엇이든 나누고 배려하는 존중감(尊重感)감으로 살아야 하는데 짧은 삶과 알량한 전공지식의 배움으로 무장한 똘들은 적성(適性)도 적응(適應)도 경륜에는 미치지 못하는 미숙함으로 반성에 앞서 배신(背信)과 반칙(反則)함에만 길들여져 있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류(世流)의 정도야 누구나 예측할 순 있다지만
자신을 비롯한 주위 주변의 동정과 예운(豫運)들에 있어 생사 불변의 원칙하에서 그 누군들 가늠치 못할 기박(奇薄)한 운명이나 운수를 염려하고 이끌어내는 사이클의 신법(神法)은 역리적 철학과 경험에 익숙한 혜안(慧眼)의 어른들만이 갖고 나누는 힘의 원천(源泉)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만남과 이별은 추억과 관심의 대상으로서 지켜봄 아닐까 싶다
삶의 실천적 도덕과 양심으로 베풀고 사랑하며 봉사하고 헌신해보는 갸륵한 성정(性情)의 인간성들은 자취를 감춘 채 이별함의 목전(目前)은 나 몰라라 하는 비굴함들은 매우 상징적들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건강을 이끌어내는 수단과 방법은 각자의 도량적 판단에 의해서라지만 상생(相生)의 법칙은 공존(共存)의 믿음에서 시작되어 진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찾고 따르듯이 아낌을 나눠보는 지혜(智慧)를 계승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