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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해설
1971.08.14. 유영모 선생
일어나서 십자가 하나 걸고 그렇게, 나는 한문자 열십자로 일으켜 세운 막대기라면 그걸 인제 떼어버리고 우리말로 뭣이라고 할까? ㅡ, ㅣ, ㅏㅜ, 인제 그렇게 할 날이 있을 거라. 꼭 이것이 이걸로만 쓰여 질지 그건 몰라요. 어찌되었든지 십자가라는 그 말 떼어두고, 우리말로 이름 석 자 지은 것도, 저녁 석(夕)자 컴컴한 때, 말해서 서로 알자고 지은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적십자사에서 무슨 말할 일이 있어서 말들을 하는데 거기서 역시 십자라는 거, 한문 글자 열십자 글자지요. 그거 그만두고 우리말로 혹 할 수 없을까? 그런 의문이 나는데, 거기 그날 연사로 온 사람이 근원이 나니까, 고추 가루라고 하면 어떻겠냐? 그 무슨 소리냐? 십자라는 건 꼿꼿이 일으켜 세우고 가로지르고 그러니까, 고추 가루, 그래 십자라는 걸 고추 가루 로 하면 어떻겠냐? 이 사람 십자가를 갖다가 ㅡ, ㅣ, 이렇게 가운데 뭐이라고 전(田)이 되겠지요? ㅡ ㅣ 앞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있는데 적십자사 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 간사니까, 내 말 들었는지, 그 어떤 분이 적십자사에 와서 말 하는데 우리말로 고추 가루 하면 어떻겠냐? 십자가 기둥은 고추 올라가서 또 가로 건너가서 가로지른 거니까 고추 가루, 그거 좋지 않아요?
그 즉흥적으로 나와. 이 뒤에 또 뭐 이 나올 런지 모르지. 나올 대로 나와 가지고 그 중에 여럿이 공론해서 그 중에 하나를 뽑아서 쓰는 거지. 고추 가루가 뽑힐 려는지? ㅡ ㅣ ㅏㅜ가 될 라는지, 또 그 후에 좋은 게 나와서 그게 당선이 될라는지. 어제는 세 사람이 나와서 고쳐야 할 데는 고쳐야 해요. 그게 궁리하고 생각하면 별게 나오지요? 실상으로 이 두 가지는 즉흥적으로 나온 겁니다. 그럼 즉흥적으로 나오거나 아주 머리를 짜고 마음을 다해서 만들어 쓰거나 종당 고쳐지는 게 세상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이 애초에 왜 생겼냐하니 저녁에 말할 필요가 있어서 생겼어. 그래서 저녁 석(夕) 밑에 입구(口)를 해 가지고 이름 명 (名)자 라는 게 된 거예요. 세상 모든 게 까닭이 있어. 생각해서 만들어서 쓰는 거지. 까닭 없이 생각 없이 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런 게 그 갖고 쓰는 대로, 왜? 그렇게 말이 그렇게 되었나? 글자가 왜 그렇게 되었나? 그 생각해서 써야지 바로 써져요.
이게 뭡니까? 우리는 기도 시간이라는데 기도 해야지요. 고요하게 생각하고 고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다 생각 해가지고 일어난 겁니다. 옛날에 다 생각해서 말 한마디라도 만들어 써져 내려온 거예요. 그럼 사는 게 뭐냐? 생각이 사는 겁니다. 생각이, 생각이 떡 나가고 없으면, 멀쩡하게 사는데 사상이라는 게 생각이라는 게 그대로 한다면 생각이 바로 안 되어요. 그러면 그건 성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서 ㅡㅣㅏㅜ 하자고 그런 생각이, 그렇게 고쳐가지고 쓰자는 게 아닙니다. 나부 터 십자가, 그거 모양, 우리 생각이 우러나서 그것을 말하는 게, ㅡ ㅣ ㅏㅜ 이렇게 하면 좋겠다. 으 이 아우, 그러면 저절로 하면 어찌 되지? 거기 점찍은 걸, 아래 아자(ᄋᆞ) 이렇게 둥(ㅇ) 그리고 점(·)하나 찍은 거, 그것은 무슨 자냐? 아(ᄋᆞ) 자에요. 아 자인데 그건 ᄋᆞ, 아 아자는 아니에요. 아래 아자는 ᄋᆞ자 이지, 그렇게 된 건데, 그걸 여기서 우리나라말 연구하신 이가 아 자가 왜 둘씩이냐? 그 둘씩 할 것 없다. 하나만두고 하나만 쓰자. 지금 그러고 나왔어요. 아래 점찍는 거, 다 필요 없다고, 실상 그게 어머니입니다. 모음에 어머니, 어머니에요. 그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ᄋᆞ 는 이건 어머니고, 아는 그건 아들이에요.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에요.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보고 둘씩이라고 그래요? 뭐가 두 개야? 어머니가 먼저 낳았어. 아들 딸 다 낳아야지요? 둘이 어디가든 둘입니다. 그래 한글 연구 대단히 좋아요. 그러나 그걸 모르고 어머니를 가두어 놨어요. 일전에도 잠깐 이야기 했었지만 어머니를 가두어 놓고, 어떻게 살림이 됩니까? 황천에 가기 전에는 어머니 안 만나겠소? 맹세한 까닭에, 할 수 없어. 서러워 하니까, 나가서 내가 어머니 모시도록 한다. 황천에 가서 만나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파가지고 누런 진흙물이 보이도록 팠어. 그렇게 해놓고 어머니 모셔다가 요렇게 황천, 그 옆에다가 모시고 아들 된 임이 거기 들어갔어. 어머니, 이제 모시고 산다고 그 맹세하고 그대로 했지. 하나도 맹세한 걸 저버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 십자가도 으 이 아 우로해서 우리에게 깊은 느낌을 더 얻게 될 런지 몰라요. 그렇다고 으 이 아 우만이 꼭 옳다. 그런 건 아닙니다. 더 나은 것이 나올 런지 몰라.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적십자에 가서 무슨 말 하는 때가 있는데 거기서 내가 으 이 아우를 이야기 했더니 거기 일 보는 이가 나더러 이야기가 여기 어떤 분이 이야기하다 우리 적십자를 다른 말로 한다면 담 박에 고춧가루가 어떠냐고? 고추 올라가서 가로 또 한 선이, 그래도 나 적십자 이야기니까, 그럼 우리 적십자 못쓰지 않아요?
적십자 독점되었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희게도 그리고 푸르게도 그리고 그런데 이제 적십자는 적십자사에서 독점 했어. 거기 알맞은 빨간 십자가를 쓰니까. 그러니까 거기 어떤 이가 고추 세우고 가로 획이 건너가는데 그래 고추 가루인데, 또 적(赤)이니까 빨간 익은 고추, 매운 고추, 그것을 인제 적십자사에서 독차지해서 고추 가루가 돼. 어떤 의미든, 이런 생각하고 이런 말하는 건 장난하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자는 거 장난하자는 거 같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때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뭘 생각하고 말씀하고 아버지 우러러보고 장로님 80되었지요? 눈치코치 뭘 봐? 아버지가 보시고 옳다. 놀아라. 잘 놀아라. 그렇습니다. 본디 음악도 춤도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기쁘시라고 손짓 발짓 팔짓 배 짓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래 으쓱으쓱하고 흥이 나오는 거고. 그거다 어린애들이 어른 앞에서 노는 거예요. 그렇게 그대로 하는 겁니다. 으쓱으쓱 좋아요. 장로회도 해가지요. 감리교에서는 그런 거 도무지 없어. 그러나 구세군 이라든지 성결교회도 얼마큼 이게 있지요. 그게 있는 게 좋습니다. 잇잇 잇 하는 건 수(手)짓 자지, 손 수(手)자, 춤추는 모양 무도 하는 건 도(蹈)자지. 바를 도(蹈)자, 이거 조금은 무도지 이렇게 하면 무(舞)야. 발도 이렇게, 이렇게 뛰는 것, 벌쩍벌쩍 뛰는 게 무도(舞蹈)[야. 수(手) 짓, 손짓, 무(舞)지 족 짓, 발짓, 그렇다면 바를 도(蹈)지. 수(手)지 족(足)지 무(舞)지 도(蹈)지. 산 사람은 그것이 나와야 하는데, 우리가 잘못된 것은 너무 얌전해서 점잖아서 손가락질 하나 까딱 안 하는 거야. 그러면 모두 재주들, 그런 거야.
공자의 제자가 3천인데 일곱까지 재주를 통하는 선비는 70명이 있었다. 70명, 그래 우리나라 선비들이 아주 유교 그대로 한다고 공자의 제자가 70이라. 70제자 되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 사람 그게 없어요. 혹 지방에는 조금 있었어. 서울 장안에 있는 사람은 점잖지 만하지, 노래나 춤 불러다가 하라고 하면 구경하고 앉아있어. 자기는 하지 않아요. 점잖지 못하다고 아니 하니 그러지. 그러니 정말 유교 도는 실제로 했습니까? 걱정입니다. 그렇게 얌전히만 하다가는 예수 믿는데도 아마 그런 것이 생길지 몰라요. 그렇다고 뛰고 소리하고 그걸 굉장히 하는 사람이 또 있어요. 그런 교파가 있지 않아요? 다른 거는 발달이 안 되도 그런 쪽은 발달이 되는 가 봅니다. 이 사람 다른 거 문제가 아니야. 열여섯 살부터 이때까지 성경보고 믿는 거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데 전에는 어디가 그런 게 있어? 요즘에 말씀 방언, 이런 게 있어. 사도시대에는 방언이라는 게 있었거든. 그러나 사도바울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방언은 할 게 아니라고는 그렇게는 안 해요. 그 방언 예언이라는 건 고요하게 해라. 사람 많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아. 하다가도 사람이 많이 있을 때는 그쳐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기도를 긴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혼자 하는 거지. 그 외에 손뼉을 친다든지 뛴다든지 춤을 춘다든지 그럼 자기 따로 혼자 할 거지, 왜 사람 많은데서 뭐하는 거야.
그래 사도바울은 똑똑히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 방언을 하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여러 사람에게 같이 터놓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을 하겠거든 먼저 방언하던 일을 그쳐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때는 어떻게 된 건지 누가 방언을 하던지 그것만 하거든. 또 그걸 하고, 으이아우 라는 것이 그것이 제일 적당한 우리말로 십자가를 정하는 게 그게 아닐 런지 몰라요. 이 후에 그거보다 더 좋은 뜻으로 되는 말로 정해질 런지 몰라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세상 사물에 물론 그렇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은 이건 울이 있어서 올에 맞도록 하는 생각과 올에 맞는 생각을 발표하는 말씀과 이런 걸로 되어야 합니다. 일찍이 ㅡㅣㅏㅜ를 십자가라고 하는 뜻으로 나 혼자는 그렇게 많이 해요. 으이아우, 우리 글로 으이아우, 이게 나와서 십자가가 되고 보니 으이아우 이게 나옵니다. 아래 점찍은 거 아래 아자에요. 아, 그건 동그라미하고 내려 긋고 점찍고 그건 아 에요. 그런데 그 자는 아 지, ᄋᆞ가 아니에요. 그럼 아래 점찍은 데가 아 그랬으면 그것도 아니에요. 그 관계가 있으니까 세종대왕이 할 적에 두 가지를 한 거지. 두 자를 만든 게 아니에요. 제일 아까운 것이 아아, 참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말 할 수 있게 은혜를 받아서 우리가 말 하려고 할 적에 맨 먼저 나오는 은혜. 입 벌리고 막아요. 맨 먼저 나오는 게 ᄋᆞ, 조금 벌리고 김나고 ᄋᆞ, 그걸 ᄋᆞ 는 아니에요.
아 그겁니다. 그래 그 어머니 그래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나와서 이렇게 ᄋᆞ 그러고 나 앉았어. 그럼 ᄋᆞ 는 대개 맨 먼저 입을 벌리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오는 의미 ᄋᆞ, 아 는 그게 아니에요. 입을 조금 벌리는 게 아닙니다. 큼직하게 벌리고 아아 길게 나오는 음은, 한글 나온 차례가 ᄋᆞ자 먼저 나왔어요. 세종대왕이 ᄋᆞ 자 먼저 만든 거예요. 어느 나라 말이거나 글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점찍는 거 맨 먼저 나오는 게 이치에요. 또 우리가 생각건대 맨 먼저 나오는 게 알자는 거야. 알자는 거니까 ᄋᆞ 가 먼저 나와요. 그래 어머니에요. 어머니 나오는 데는 어머니 만일 먼저 그러니까 어머니가 생명시대에 어머니가 근원이니 중대한데 땅이 중대할 수가 없다. 땅은 글자에요. 나와서 보니까 이건 하늘을 보니까 동그라미가 동그랗게 했다는데 그 다음에 세상을, 땅을 세상으로 해요. 내다 마주 건너다보면 얼마 못 봐요. 내다보면 환하게 보이는데 시원해. 이쪽도 시원해. 확 뚫리는 게 그게 부족해요. 그럴 때 마음이 이렇게 고요하게 널찍하게 가라앉는 게 으 인데 으라는 뜻을 발표할 때 음이 나올 때 으 으 입이 어떻게? 벌어지는데 많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음이 나오는 걸 그리니까 한 일자를 그어가지고 으 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나신 걸 그대로 그렇게 한 거예요. 아 으 그래 동그라미가 적어도 동그라미가 하늘이야. 이쪽, 이쪽 환히 뚫렸어.
그래 으 인제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겼습니다. 사람, 사람이 났어요. 사람은 어떻게 하늘이 먼저고 땅도 있고 선 게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 라는 건 뭐야? 이 생명 이라는 말이야. 이 생명 맨 먼저 생명을 가진 사람이 떡 서야지. 그게 이 이게 생명이지. 이다 머리는 하늘을 보고 발은 땅으로 섰다. 이다 그 이 라는 것이 항상 생명을 붙잡아 가지고 이다. 이것이 산 생명이다. 그런데 산 생명인데 우리말 아니요? 한문 자 생명 이라는 글자를 보기 전에 우리도 살았고 우리도 생각했고 우리도 말했어. 우리는 글이 없이 지내왔다. 글이 생기는 데는 하늘 뚫었고 세상이 이리 환해. 저리 환해. 넒은 세상에 생겼고, 그 다음 세 생명이 있고 셋째 번으로 나오지요? 나오니까 세종대왕도 저것만 만든 거 아니에요. 하늘이 나오도록 해 놓은 거야. 아 으 이, 요 그런데 말을 더 하려니까 이렇게 생명을 이 자를 써놓고 하늘이 맨 처음에 나온 어머니가 여기와 이렇게 해요. 그럼 아, 온종일해도 괜찮은 아 어머니가 지시한대로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이 에다가 점을 찍어. 아 또 어머니가 이쪽으로 가서 해요. 대개 이것은 북쪽이요. 뒤쪽이요. 이것은 앞이요. 남쪽이에요. (끊김)
그러면 어떤 때 그 소리가 나오느냐? 합한 거예요. 나 혼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이 앞에 나타나요. 어, 어 오세요. 그래 종당 부르는데도 어머니하고 그럼 점이야 앞으로 와요. 어, 아무씨 오십니까? 어, 반가울 때, 어, 어버이 어머니, 그이를 만나서 어, 그래 어머니라. 어머니라는 글자를 쓰게 되는 거예요. 어 는 반가울 때 나오는 소리고, 아는 출발입니다. 출발할 때 아, 그래 말이란 생각할 때 쓰자는 거니까 그러니까 알자는 거예요. 아는 게 맨 먼저 필요하니까 아 하는 건 알자고 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 그 다음에 가서 으 하니 땅, 거기에 대해서 어머니가 지시를 해요. 으 으, 그거 할 적에 오, 온다. 이 말이에요. 또 아래다가 이렇게 땅 아래 어머니가 계시대요. 우 그래요. 그럼 그 우에 땅 우에, 이걸 가르켜요. 땅 위를 가르키는데 이상하게, 옛날에는 땅이 둥근 거 모르고 땅은 어디가 달라붙은 줄 알았어요. 어떻게 이 사상이 나왔습니까? 세상 아래 가서 어머니가 계셔서 떠받듭니다. 이게 한문자는 이렇게 하면 아래 하(下)자입니다. 간략하게 아래하자 쓸 때 이렇게 하면 되요. 그런데 모든 게 한문에서 우러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를 세종대왕이 볼 때는 한문에 끌려가지 않았어요. 그 아래 하자는 언문이에요. 세종대왕이 우를 또 자세히 땅이라고 그러는데 밑에 어머니가 가서 바쳐, 그 놀라운 일입니다.
천은 지붕이요. 땅이 둥그렇게 움직이는 줄 모른 거예요. 땅은 평면이 붙은 건 줄 알았지, 움직이는 걸 모른 게 그 시대에 어떻게 이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거 하나님의 계시에요. 계시를 그대로 받은 거예요. 오늘날 이거 알아듣게 아주 쉽지 않아요? 지구가 공중에 떠있다. 둥둥 떠 있다. 이 떠있는 건 밑에도 하늘이 떠 바치고 있는 거예요. 이 아 우 는 하늘인데 하늘이 이렇게 우에다 모든 게 하늘로부터 오는 걸 가지고 우리가 사는 거예요. 그래 우리가 이렇게 우리 세상 밑에 하늘이 이게 우야. 중상천하사대 걱정 하더니 세상이 어디가 있는지도 몰라요. 천원지가 꼼짝 안하는 세상에 나라도 배포에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거 같은데 우리는 세상이야.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어디가 들러붙어있는 거 아니야. 공중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공중에 떠서 돌아가는 것도 몰랐는데 그때는 직감적으로 어떻게 하다 보니 세상이라. 무슨 꼭대기에 가서 있는 세상이야. 지극히 묘한 겁니다. 그런데 이 글이 만들어졌거든. 하늘 천, 이 으라는 땅, 밑에서 바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 됐어. 이 위에 생명이 나타나라고 이렇게 된 거라고, 한문자는 아래 하 자에요. 천지와 사람의 관계를 중국 사람의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게 다르게 되어있어요.
그럼 지금 어떤 게 옳은가? 우리가 옳지 가로 건너가고 점찍는 게 우 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 것이 옳은 거야. 이걸 아래 하자로 중국 사람은 썼어. 무슨 아래야? 무엇이 아래야? 아주 안 된 겁니다. 우 자를 본다는 거는 온다는 거 모든 것이 하늘 위에서 온다는 거예요. 오기를 바래요. 오너라. 오라고 한마디 했더니 뭉텅이, 뭉텅이 아주 사방에서 모두들 집단 몰려와요. 또 아래서도 사방에서 몰려와요. 몰려온 펴게 미음(ㅁ)인데 있을게 다 있는 게 미음인데 오라고 하니까 아래 위서 죄다 몰려와요. 다 모였어 몸통이 하나가 되요. 그래 우리말로 몸통이가 된 거지. 저게 오묘하게 성신이 임하시는 그 길이 그려진 것 아닙니까? 그래 생명이 되요. 생명이 앉을 성전으로 마련된 이 몸통이가 된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해석을, 지극히 묘한 거야. 하늘 진리가 세종대왕의 손을 써서 이렇게 되도록 나타나게 된 것이 한글이에요. 이 못난 게 어떻게 귀합니까? 이걸 이식으로 보면 참 재미난 게 많습니다. 모든 게 모여서 몸통이가 되었는데 거기 변화가 생기면 여기도 위에 펴져요. 그럼 복을 드린다. 그리고 사는데 겨울에 춥던 거 다가고 또 봄이에요. 그때가 봄이야. 그건 왜 봄이야. 잠자고 쉬던 눈을 떠가지고 양지바른 곳에서 내다보라는 거야. 봄이라는 말에 그렇게 거기 죄다 나타납니다. 걸 깨달으라는 그게 사는 거 아닙니까? 올되고 주인 되고 거기 생명이 약동을 합니다. 그게 사람이야.
이렇게 다 오묘한 거야. 몸이 하는 게 따뜻해지면 봐요. 봄, 그런데 한글 연구하는 이가 참 뜯어도 보고 맞춰도 보고 굉장하게 수고를 많이 해가지고 참 밝혀 둔 게, 해 놓은 게 많지요. 그러나 이렇게 각각 음 나온 거부터 가지고 해서 생각을 고루 고루 하는 그건 아니 했어요. 그걸 할 거 같으면 철학하는 겁니다. 음이 나오는 거, 글자 조직 되는 거, 그걸 생각을 엎치락뒤치락해서 골고루 그렇게 하는 게,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 그걸 소위 철학이라 그래. 지금 한글 학자 되는 친구 한분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하면, 껄껄 웃습니다. 당신네 그 맞춤법은 그렇게,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철학을 하지 않지 않우? 그 한시를 짓는데 아 한시는 왜 남의 것 가지고 짓는 거고. 내 것 가지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지 못하냐? 이 철학이다. 당신네 문법 맞추는 그거하고 달라. 당신네 바쁜 거, 세어서 우리글에 문법까지 딱 정해서 출판해야 한시를 잘 읽는 이니까 우리글을 가지고 생각을 많이 해 철학으로 하시오. 내가 하는 이 혼자 우스운 생각이지, 내가 철학은 무슨 철학을 해? 더더구나 우리글을 가지고 철학은 무슨 사실 이건 철학이라고 생각을 할거 다 해서 엎치락뒤치락 뜯어보고 다시 맞춰보고 그것이 철학이니까 그래서 그 어머니가 다니며 죄다 지시한다면 그렇게 되요. 열한자지만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ᄋᆞ) 그렇게 많은 것 아니에요. 아 으 이 그 석자 밖에 안 돼.
그 어머니가 이리 다니고 저리 다니고 지시해. 그 외의 모두 나온 거야. 그럼 하늘이 나타나고 그걸 죄다 스케치하고 간단히 한 거야. 그렇게 된 거니까 그러게 기가 막혀요. 그때 제자학에 보면 신하들이 열한 명 신하가 모여서 그 해석을 했는데 그 제자학이라는 책인데 정인지라는 이가 그 연구를 해서 그 글을 갖다가 쓴 것도 사진판으로 한 건데 그래 정인지의 글씨로 되어졌다는 겁니다. 제자학이라는 책이, 그런데 그 들이 아주 자세히 안거에요. 그래서 아주 시 들을 쓰고 자세한 거예요. 그래 종당에는 어림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제 한글 우리의 옛글이 된 게 그때 정음이라 그랬어요. 바른 소리, 이 정음이 만들어 진건 머리를 죄 짜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그리고 힘을 들여서 땀을 빼가지고 찾아낸 거라. 아주 어려워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려운 말 한 겁니다. 임금이 한 걸 신하가 한다는데 이걸 왜 안 쓰고 힘 안 쓰고 중국말이 쑥 나오는 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께 나온 진리를 고대로 스케치해서 잡은 거지 결코 지어낸 역사가 아니야. 지혜를 쥐어짜고 신기한 걸 찾아낸 게 아니야. 보통 친구가 한 거도 그렇게 했다고 친구를 오해할 테지. 그렇게 할 만한 게 그렇게 해 놓고, 하늘이 나타나신 음성을 따라서 올이 이치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이 나타난 이치를 그대로 붙잡았다는 겁니다.
붙잡아서 나타내 쓴 것 뿐 이니까 애를 쓰고 궁리궁리를 해서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이상한 말이 그럼 결론은 맨 끝에 이것은 사람이 만든 거지만 하나 만들었는데 모두 신통해. 너무도 신통하니까 이것은 하느님이 이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서 이 나타난 이것을 하늘 둥그런 것도 보고 양쪽이 다 뚫린 이 세상도 보게 하고 사람이 하늘로 머리 두고 땅 딛고 선 것도 있게 하고 그래서 그걸 다른 사람이 이렇게 다 간단히 하는데 이 이는 그걸 속히 취했다고 그래서 맨 끝에 뭐라고 하는 고 하니 이것은 세종대왕의 눈을 끌어다가 이걸 보게 하고 세종대왕의 팔을 끌어다가 쓰게 하고 그럼 성경은 성신이 그를 끌어다가 이렇게 쓰게 했다는 말과 똑같아요. 그럼 유교사상에 성신을 믿을 만 한 게 뭐 그런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을 알기는 알 어? 아는데 죄의 문제란 말이야. 동정은 하는데 모두 떨어져가는데 그거 이상한 겁니다. 세상에 글이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 세종대왕만은 글을 내는데도 그대로 하늘이 나타나는 그대로 간단하게 집어서 나타내요.
그게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언제 이게 머리를 쥐어짜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이건 하늘이 이 손을 끌어잡아당겨서 이렇게 받아쓰게 한 거라. 이런 소리가 어떻게 나와? 그 된 걸 보면 꼭 그렇거든. 그렇지 않다고 할 수가 없거든. 그럼 이건 정말 감사하며 쓸 사람은 성경 본사람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 창조주를 제일 꼭대기로 모시는 사람, 그 사람들이 이걸 환히 풀어야 합니다. 종당 그걸 해석도 못하는 그들이 이걸 보고, 이건 사람의 지식으로 한 것이 아니에요. 하늘이 이 마음을 열어서 이렇게 그걸 보게 했다. 그리고 손을 끌어서 이걸 쓰게 했다. 이런 소리가 나오게 했거든요. 그래 그렇게 써 놓은걸 봤을 텐데. 많이 그걸 봤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도 봤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그렇게 해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어요. 나는 역설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한글은 이렇게 된 거요. 하고 역설을 하려고,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한글이 있는 건 하늘이 계시를 한 겁니다. 이 계시를 우리가 전에 민족이 받은 건데 이 계시 받은걸 이야기 하는데 그 자세히 안 들어 두었습니다. 자식이 들어야 부모의 참여를 바로하는거지.
‘하느님 계 계셔서 날 내셨으니 내 날 가져 계 받들어 섬기시도록 이제 내 속 알과 삶의 목숨과 내 나위 힘과 얼 되 받들어 들어 하느님 뜻 맞고 하느님 말 숨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 알라 외 이 내 더욱 되기만 가장 비나이다. 하느님 우리 주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지 무거워 모아 드리지 못되오나 되 불쌍히 바라며 제 섬기 울 기대어 비오니 나들이 되게 비나이다. 아멘’
이 사람의 기도라는 거. 이 기도를 많이 합니다. 또 이 기도에 한 구절에 똑 나오면 그럼 나는 그걸 기도라고 해요. 주기도문에 뜻이 된 것도 그렇게 되고 이 사람 기도 그렇게 합니다. 무슨 기도이든지 이 정신이 연결되어 가지고 간단하거나 길게 하거나 하는 것뿐입니다. 그건 그 임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거예요.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기도를 한없이 끝없이 하라고는 하셨는데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늘 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힐 참 말씀 임이니이다. 이에 숨 쉬는 우리 밝는 속 알에 더욱 나라 찾음 이어 지이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었고 진 짐에 짓눌림을 되지 말아 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며 고루 사랑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다 하나이 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 갈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된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아멘.
이런 말씀 하나 써 놓은걸 읽습니다. 육이오 말씀. 육이오 사변 그걸 생각하지요. 육이오 말씀. 6월 스무 닷샛날, 우리가 우리를 쳐오는걸 받아서 서울 사람들이 죄다 남쪽으로 쫓겨 가고 부산까지 쫓겨 갔던 그걸, 그걸 생각하니까 육이오 말씀을 그럼 육이오는 언제 된 거냐? 20세기 정 한가 온 이요. 20세기 정 한가운데야. 1세기는 백년인데 1900년 지내고 1900 일 년, 이년해서 50년 1950년에 6월 스무 닷샛날, 육이오 말씀인데 20세기 한 가온이야. 아주 한 가운데야. 세기라는 건 백년인데 한 가운데니까 50년 아닙니까? 19세기 다 지난 후에 1900 가운데니까, 세기라는 것은 100년이니 50년은 가운데, 그 1950년은 20세기 한 가운데, 그런데 가운데 중에도 가운데라. 1년에 6월 이라는 거, 한 가운데 아닙니까? 속에 속이 있다는 식으로, 한 가운데 한 가운데 에요. 그럼 그렇게 한번 생각해 봐요. 그럼 육이오 사변은 20세기 한 가운데 된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되었는데 그 후에 다시 열세해가 지나갑니다. 1950년 뒤에 13년, 13해가 다시 지나갑니다. 이 사람은 열셋을 세면, 이 사람 생일이 열 사흣 날 이에요. 그럼 13이 서양 사람은 싫다고 하는 수 에요. 그 난 생일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나는 13을 좋다고 나는 생각을 해요.
13해를 지났습니다. 13해를 지나면 20세기 한 가운데가 1950년 인데, 거기 13해가 되면 63년 아닙니까? 13해를 지내서 10월 달에 갑니다. 또 십 월을 갖다가 시월 이라고 하는데, 시월 달에 가서 동양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은 시 월 상달이에요. 아주 시월 상 달이예요. 그럼 왜 그렇게 되었냐? 옛날에 하늘을 섬기고 부모 조상을 섬기는 게 10월 상달이에요. 그래 상달 이라고 그래요. 열째달이 왜 상이 됩니까? 부모조상 생각하고 하느님을 생각 하니까 상달 이라고 합니다. 다시 13해 가서, 10월이요. 10월에 가서 거기 시월이요. 그래, 육이오 그래, 이오가 스무닷새에요. 그 시월 스무닷새 날 가운데, 가운데 이 사람 아는 친구가 세상 떠났어요. 그럼 살다가 죽는데 어느 해 어느 달 죽었든가? 그걸 알고 싶으면 육이오를 생각하지요. 육이오는 20세기 한 가운데 50년 6월 스무닷새 날, 서울서 당한 거, 그 다음, 열세 해를 지나 지난 뒤에 10월 달에 가서 또 25날, 거기서 세상을 떠나 아는 사람은 그게 현 동완 이야.
이듬해, 그 이듬해, 현 동완이 세상 떠난 그 이듬해 88이 64, 현 동완이 가던 해는 63년이야. 그 이듬해, 이듬해면 88이 64, 64년 1월 1일이 어떤 날 인고 하니 이백사십삼만 팔천칠백예순 하루 되던 날이야. 이 땅 숫자가 한데 이렇게 엮어놓고 외워 놓으면 뭐하냐? 쓸데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육이오 사변 당한 날이 통일로 육십사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