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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민족관
信天함석헌
주어진 제목이 역사에 나타난 민족관이라고 그랬으니 단군시대로부터 시작해서 각 시대 시대, 될 수 있으면 우리 민족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해 왔나 그런 것을 실예를 들면서 말을 해가야 옳은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아니하겠습니다. 할래도 내 준비도 못됐고, 또 그 뿐 아니라 내 생각이 조금 다른 것이 있기도 하므로, 여러분이 그런 문제를 생각해 가시는데 준비될만한 조건만 내 생각 있는대로 말해 볼렵니다.
보라 ! 보지못하면 죽는다!
우선「觀」字부터 입니다. 民族觀 이라고 하는「觀」字인데, 물론 말하지 않아도「觀」이라는건 눈으로 보는건 아닌 것을 아실 줄 압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람만 아니라 도대체 생명에 있어서,「본다」는 건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샤르댕의 (Pierre Teilhard De Chardin) 「인간현상」을 읽으셨기를 바라고, 못하셨거든 반드시 한번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이효상씨가 번역을 해시 내셨답니다. 나는 영어본으로 읽어봤고, 벌써 읽은지도 오랬습니다.
그런데 거기 맨처음에 그이가 “see”,본다는 걸 대단히 중요시해서 얘길합니다. 다른 것도 있지만 사람이 본다니, 본다는 건 어떡하는거냐? 성경을 읽으시는 분들은 곧 생각이 날것입니다. 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seer” 보는 사람, 그래서 한문으로는 “先見者”라고 그렇게 번역을 했지요. 본래는 먼저라는 말은 없이 그저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문으로는 그것을 先見者, 흑은 先知者(먼저안 이)라 하기도 합니다. 앞서본다 prophet이라는 말은 본래 원 뜻으로 하면 “代言”이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여간 많이 번역된 말이 “seer” 보는 사람입니다.
「觀」字는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샤르댕은 “보라! 보지못하면 죽는다!” 그랬어요. 보지못하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개인으로도 그렇지만 민족으로는 더구나 그렇습니다.
본래 글자도 「觀」 왼편에 있는 거는 올빼미인데, 그 위에 있는 그 립은 올빼미 눈이예요. 아래 있는 거는 새초니까 새를 표시하고, 올빼미는 낮에는 못보고 어두운데서 본다. 그래서 觀이라는 거는 나타나 보이는 거를 보는 거 아니라 나타나지 않는 거를 보는 거, 그래 見이 아니고 觀입니다. 인생이 뭐냐 인생의 속을 보는 거, 인생을 이해 한 것이 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의식(意識)이라든지 이해(理解)라든지 그래야 할꺼예요.
민족관이라 그러면 말하자면 우리 민족으로서의 자아의식, 혹은 자기이해,자성(自省)이라고 그래도 좋고, 그런 의미로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자신들을 어떻게 알아왔나?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를 봐야합니다. 정말, 나 자신을 봐야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역사를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일은 역사를 창조하는데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를 알지 않고는, 이해하지 않고는, 즉 민족을 보지 못하고는 아니 됩니다.
지금 샤르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을 조금 더 하겠습니다. 한마다로 한다면 그의 목적은 새로운 종합을 하려는데 있습니다. 종합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을 주장한 것이 그 책에 처음으로부터 죽 관동해서 하는 말입니다. 보시면 자연히 알겠지만 제수이트파의 신부면서 또 아 주 과학자, 그래서 줄리안 헉슬리가 거기다 서문을 쓰면서, “아주 놀라운 사람에게서 놀라운 책이 나왔다”고. 그러고 첫머리에 시작을 하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읽어보시면 그 말이 참인 것을 알 것입니다. 저서는 다른 책도 있는데, 사람이 아주 참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고상한 인격의 사람입니다.
제일로 그 사진을 보면 어찌 얼굴이 그렇게 맑을까? 신부로 늙었으니까 그럴는지 모르지요, 나는 읽은지 오랩니다. 이건 여담인데 딴 얘기가 됩니다마는,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제일 처음 읽었는지 몰라, 알 수는 없지만, 언제 읽었는고 하니 6.25 때 부산 피난 가있는 때에 타임지에 소개가 났어요. 내가 뭐 샤르댕이 누군지 알 수 있어요, 또 타임지를 보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그 사람 소개가 났는데 대번에 보통사람 아닌 것을 알겠어요, 그래서 그의「인간현상」을 잃었는데, 참으로 놀랍다 느꼈고, 그 사람의 영향 받은 거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본래 첫째다 둘째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확실히 그는 근래에 있었던 위대한 사상가 중의 하나입니다. 물몬 전문적으로 사상가라고 할 수 없지, 그러나 하여간 놀라운 사상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것들에게 알게 하신다
이것도 또 여담이 되지만, 제2차 대전이 났을 때에 나는 40대였는데 그때부터 내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생각이 있습니다. 감히 종교적인 계시라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더러 그 기분을 말하라면 거의 계서라고,revelation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한마디로, 이 전쟁으로 인간 사회는 그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질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난 여러분 보다 한세대 앞서서 산사람입니다. 인생은 릴레이 경주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는 바통을 넘겨주고 죽어야 합니다. 지금 하려는 말은 나의 바통 넘겨주는 것입니다. 시원치 못한 넘겨줌일런지 모르지만 잘났건 못났건 먼저 뛰었으니까 마땅히 바통 넘겨주어야 할 것이고,여러분도 이 바통 안 받아 쥐면 뛰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서울대학 문리대에서 했던 말 다시 합니다만, 여러분들은 우리나라에선 수재로 뽑혀 온 사람들이지만 아주 불쌍한 사람이다. 왠고하니 수재기 때문에 일류대학에 들어왔는데 일류대학을 졸업하기 때문에 관청으로 취직하던지 회사로 취직하던지 아주 높은 자리로 취직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인간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실지 접촉을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탄탄대로를 밟아서 인생의 길을 올라가서 잘 살고 말꺼니까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뭔지 사회가, 역사가 뭔지 모르고 말꺼니까, 재주 있는 놈을 골라서 골라서 못쓰게 만들고 마니까, 참 아깝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일류대학에 못 들어갔기 때문에 변자리로 돌던 것들, 찌꺼기로 났던 것들은 그 때문에 도리어 생각을 하게 되어 혁명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만 프로레타리아가 새시대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라, 정신적으로 더구나, 정신적 프로레타리아가 역사의 주인 되는 법입니다.
나는 그래서 씨알을 자주 강조하는 것입니다.
씨알이란 뭐냐? 말 그대로 지위도 없이 권력도 없이 그저 땅을 디디고 서서 전체를 위해서, 전체라는 걸 의식도 못하면서 전체를 위해서 봉사하다 봉사하다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난대로 있는 사람, 못났기 때문에 하느님이 만들어준 그 본성을, 그 바탈을, 비교적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라의 주인 노릇 할 수 있는거지만,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지위가 있는 대신에 그 바탈을 다 팔아먹었어. 지위라는 건 자기 육신이 살아있을 동안밖에 못 갖는 건데 그게 있기 때문에 바탈 다 팔아먹었어. 높아가면 갈수록 그길 팔아먹어. 이런 말 왜 해요? 요새는 그런 사람이 차차 많아가잖아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됐어. 이치대로 이론대로 한다면야 학문도 있고 재주도 있는 사람들이 중요한 지위에 올라서서 나라를 맡아서 하면 좋겠지만, 실지로는 그렇게 안됩니다. 그러니 슬프고 분한 일입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예수께서
“그렇습니다 이거 좋습니다. 지혜 있고 잘난 사람에게는 가리워서 모르게 하시고 세상에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에게, 어리석은 것들에게 알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했겠습니까? 예수님도 처음에는 아마 안 그리셨을는지 몰라. 예수님도 사람이니까.
孟子가 뭐라고 그랬어요? 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이라, 세상의 즐거움 중에 가장 즐거운 하나가 재주 있는 사람 모아가지고 가르치는 것 보다 좋은 것 없다 했지요. 여기 이런데 와서 강연이라도 하면 신납니다. 말 들으려 오는 사람 많으니까. 세상에 났다가 뭘 하겠어요. 아무 지위 못 얻더라도 뭘 좀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놓고 얘기라도 해보면 그렇게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나라를 쥐고 한다는 사람들은 취미가 그것보다도 권력을 누리는데 있기 때문에 그만 사람된 바탈이 마사지고 만단말이야. 하나님이 공평해 그런가, 공평도 불공평도 없지. 인간이 그렇게 하는 거지요. 하여간 역사는. 그렇게 역리적으로 진행이 돼갑니다. 사람의 마음에 역리적인 것 같지, 그게 본래 진리인 걸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自由思想家가 나와야 한다
그 애기는 이제 그만하고, 본다는 얘긴데, 이스라엘의 先見者라고 하던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던 사람 별로 없습니다. 이사야 같은 사람은 나기는 귀족집안에 나고, 아마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가로서의 생애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같은 사람 청년시대부터 일생을 비분강개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입니다. 그다음 위대한 예언자들, 인생을 보고, 역사를 보고 우주를 본 사람들, 모두 다 사회 바닥의 씨알과 더불어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인간으로 살아야 하니 정부요, 교회요, 제도요, 규칙이요, 그런 것도 없을 수 없으니 임금, 귀족, 법왕, 감독하는 직업 정치가, 종교가도 있기는 있지만 사실 세상이 돼가는 것이 그 사람 때문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설명할 것도 없이 신학하시는 선생님들에게 물어 보시면 잘 알꺼지만 두 갈래가 있지 않아요? priest냐? 또 prophet이냐? 이스라엘
역사의 등뼈가 예언자인 것을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정치가, 지도자, 경륜가, 학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문화인조차 아니었습니다. 야인생활을 하면서 자꾸 말과 글로 문명을 비판한 사람들 입니다. 요새말로 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유사상가라고 그래야 할겁니다.
free thinker 아무데도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역사가 발달해 나가는 단 하나의 좁은 길입니다.
自由思想家가 못나게 하는 국가는 망하고 맙니다. 그건 나도 확신을 가지고 예언하겠어요. 망하고 말겁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해 보면 압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자유로 사상할 수 있는 시대인가. 그것을 인위적으로 자꾸 막으려고 하는건가. 그거는 뭐 내가 판단내리지 않아도 여러분도 잘 알거고, 그 일을 하는 사람 자신들도 잘 알건데, 결과는 역사에 비취보면 환합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민족, 망한다! 왜 그런고 하니 표면에 선 사람들은 참의미로 나라에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라에서 뜯어먹는 사람들입니다. 섬김 받으려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두 세계에 삽니다. 속세계나, 겉세계냐? 속으로 사는 사람은 전체를 섬기며 사는 것이고 겉 세계에 주인 노릇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섬김 받자는 것이니 자연 생각 같은 것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본래, 생명이 본래, 그렇게 생겼어. 동물에도 그렇고 식물에도 그렇고 물론 사람과 같이 정도가 높지는 않지만….'
보는 놈은 살고 보지 못하는 놈은 망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 가실라면 진화의 과정을 주의해 잘 보세요. 뭐 반드시 학자로 전문적으로 아니더라도 상식으로라도 거기 대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현대에 목사노릇을 한다. 교사노릇을 한다, 정치를 한다면서 이 우주의 진화가 어떻게 되는지 거기대해 모른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작게 보면 정치요. 학교요, 이러지만, 그것이 다 진화의 한 현상이요, 귀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샤르댕이 책의 제목을 “phenomenon”이라, 현상이라, 그랬어. 현상, 순전히 과학적인 말입니다. 예수회의 신부노릇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개인으로는 얼마나 온건한 믿음을 가졌던지 아세요? 놀라운 그런 사실을 가졌지만 법왕청에서 금했기 때문에 본래는 카이로에 가서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 고, 북경에는 와서 20년씩이나 있으면서, 지질학회회장으로 근무했던 사람이요, 호모 베기 넨시스(北京人)파내는데 공로도 많았던 사람인데, 그 사상이 위험하다고 해서 교수도, 저술도 못하게 금지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저 겸손히, 고스란히 생전에 책내지도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비밀 인쇄를 해서라도 내라고 그럴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돌아간 다음에 친구들이 “이런 말을 묻어둘 수가 없지” 그래 출판을 하게 됐고 일단 나오니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한국의 한구석에 있는 나같은 사람도 보게 됐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요, 당연한 일입니다. 사상은 묻혀 썩는 법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은 모르나, 서남동 교수는 많이 말씀한 줄을 내가 압니다. 처음의 제목과는 너무 딴 얘기가 돼 버렸습니다. 너무 샤르댕 광고만 하는 것 같군요. 그러나 여러분이 이민족을 봐 가는데 준비는 많이 될 겁니다. 눈이 좀 밝아질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면 돼 ! 이래라, 저래라 나는 그런 건 아니합니다. 밥 다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제가 만들어서 먹도록 하지. 더구나 먹기도. 싫다는 걸 강제로 속여서 넣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걸 보고 생각에 많이 계발된 것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또 본래 있던 내 생각에 공통한 것도 있고, 그래 그길 보면서 좋아서 한 시비가 “신학한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이것도 우리나라에 소개 안해줄까?” 했던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늘 공부떨어지고는 남을 잘 나무라기 잘해요.
그 후 미국에 가서 퀘이커의 수양처의 하나인 펜들힐에 갔더니 60이 넘은 할머니들이 거기 많이 와 있는데 말끝마다 뭐 마르틴 부버가 어드렇고 삐에르 테하르트 샤르댕이 어드렇고 그래요. 도대체 지식 정도가 이렇게 됐나? 놀랐습니다. 그다음 3년 지나서 거기를 다시 갔는데 그때는 “인간현상”(phenomenon of man)이란 그 책이 펜들힐에서 교과서처럼 쓰이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비밀을 안 현대종교
세상에서 쓸데없는 일은 독점주의입니다. 무엇을 얻으면 홀로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 버릇이지만, 그 사람이 독점을 하고 나한테 알려주려고 하지 않거든 구태여 보려고 하지 마시요. 소용없습니다. 독점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참으로 귀한 것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미술품이라도 제 집에만 가둬두고 안뵈줄려고 하면 안 봐도 돼. 그까짓 것 괜찮아요. 정말 좋은 것은 가둬두지 못해서 이 사람에게 자랑하고 저 사람에게 자랑하고, 그러는 것이 정말 귀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가서 보고 들으세요. 참 진리에 관한 건 감춰두는 놈 없지 않아요. 보고 나서 좋으면 난 요새 이런 책 봤다 참 좋다 합니다. 좋은 책을 보고도 친구에다 말도 안하는 사람 친구 아닙니다. 그 대신에 돈 많은 사람이 자기 집에 비장품으로 해두고 그러고 이것이 우리집의 보물이라 할 때, 그건 안봐도 괜찮아. 쓰면 쓸수록 늘어가는 것이 참 보배 입니다. 사랑도, 진리도, 자유도, 양심도, 다다 그렇습니다.
그래 어느 것이 하늘에서 나온 것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것인지, 자연히 그렇게 되어서 누가 간섭할 수없이 판명이 되는 겁니다. 자연히 그렇게 알게 되지 않아요?
왜 그렇게 본다는 걸 강조하나? 그 말하기 전에, 역사에 왜 종합이 필요하냐, 그것을 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19세기까지는 사람들이 아주 낙관해 왔습니다. 잘된다, 잘된다, 발달이다, 진보다 하면서 문명은 자동적으로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을 지나고 난 담부터 아주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말했다가 그만 잊어버렸습니다마는 2차 대전부터, 그때는 샤르댕의 이름 알지도 못하던 땐데, 나는 내 나름대로 한 생각이 뭐냐하면, 이번 전쟁이 끝나는 날이면 그전처럼 단순히 국경선의 변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구조가 아주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할꺼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는 종교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당연히 따라 일어난 의문이 종교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는 어떤 형태를 취할까? 시대에 앞설 것인가? 뒤따라 갈 것인가? 종교라는 건 본래 시대에 앞에 가는 건가? 뒤따라가는 건가? 모든 종교는 공동으로 인류구원을 내세우는데, 종교가 정말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생산기구의 기초 위에서는 상부건축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믿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대의 앞장을 서는 것이어야만 참 종교라고 단안을 내렸습니다. 그러고나니 그 다음 당연히 일어나는 문제가, 그럼 이번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인류의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때 기성종교들이 과연 제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대해 감히 깊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좀 생각했습니다. 어려웠습니다. 제일에 그 문제 대답하려면 인류문화의 각 분야에 대해 넓고도 깊은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잘 알면서도 그저 그만두고 싶지 않은 일종의 압력을 느꼈습니다. 문제의 제출부터가 학문적인 열심에서라기보다는 신앙적인 긴장에서 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지식의 부족을 알면서도 대답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일반 씨을 상대로 하는 말은 학문적인 것보다 도리어 통속적일 때에 판단도 더 정확할 수 있고 호소력도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대답을 내려보기로 했습니다. 생각한 끝에, 대답은 부정적으로 나왔습니다. 기성 종교는,기독교까지 포함해서, 격변하는 역사에 앞장을 서서 인류를 구원하는 그 사명을 능히 다하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러냐고 누가 질문한다면 대답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태여 대답을 한다면 다만 이렇게 말할 것밖에 없었습니다. 즉, 오늘의 기성종교들은 다 국가주의와 붙어먹고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에 있는 말로 한다면, 그들은 사탄의 깊은데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남녀간의 비밀 정교 관계를 “본다, 안다”하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아무 남자가 어떤 여자를 보아다닌다”, “아무 여자가 누구누구를 알아서…”그런식으로 말을 했는데, 여기서 내가 사탄의 깊은데를 알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정교는 사람의 겉의 행동만이 아닙니다. 인격의 내부 핵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관계하고 나면 결코 전의 나대로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종교들은 다 국가주의와 그런 관계에까지 들어가 있다 그 말입니다. 오늘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서 인류의 장래를 위협하는 것은 나는 국가지상주의라고 단정하는 사람입니다. 국가가 인류의 소년기에는 그것을 돌봐준 후견인의 공로가 없지 않았지만 이제 이미 성인기에 든 오늘에 와서까지 후견인의 옛 버릇을 놓지 못하고 간섭한다면 이제는 은인이 아니라 망쳐주는 원수입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인간은 이미 소년기 이후부터 하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상 행위의 완전 자유가 있고, 그래야 정신적 존재로서 성인노릇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까지의 역사에서 국가가 후견인으로서의 자격을 넘어서 간교하게 인간을 제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폐해가 오늘의 세계의 고민입니다. 이제라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그 잘못을 크게 깨닫고 그 국가주의의 이빨과 발톱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는 이유는 너무 깊이 관계하여 혼의 핵심에까지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탄의 비밀이라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 종교가 나와야 한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물론 위험한 생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생각입니다. 나 자신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점에 관해서만은 나는 자신이 있습니다. 다른 여러 면에서 나는 형편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 스스로 그것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점에 있어서만은 나는 조금도 흐리터분한 사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물론 예언자는 아닙니다. 나나, 누구만 아니라, 도대체 이 시대에 예언자는 없습니다. 지금은 “말씀의 가뭄?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오지 않는다고 가만, 멍청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못되더라도 될수록 마음을 고요 정결히 하여 귀를 기우리고 서로 토론을 하는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임갈굴정이라지만, 늦게나마라도, 늦었을수록, 파다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우물 파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원한 구원의 말씀을 못 받고 죽더라도, 우리 뒤에 오는 사람은 예언을 받는 기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살면, 그속에 나도 살아난 것입니다. 사람은 나만이 아닙니다. 전체에 삽니다. 사람은 역사적입니다. 어떤 위대한 예언자도, 그래요 예수, 석가도 역사적 배경 없이는 없습니다. 반대로 나는 예언자가 못되더라도 예언을 기대려 귀를 기우리고 입을 여노라면 나의 하다가 말라 쓰러진 죽음이 예언의 자궁은 될 주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식하다, 건방지다 하는 비난을 들을 줄 알면서도 감히 해오는 소리가 사탄의 비밀을 이미 안 현대 종교는 아마 그 불의의 연인 국가지상주의와 운명을 같이하여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거다 했습니다. 종교는 일단 죽어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담에 당연히 나오는 결론은 새 종교가 나와야 한다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2차 대전이 일어나던 때부터 새 종교를 찾아오는 시민입니다. 새 종교란 말을 하면 사람들은 곧 그것은 어면 것이냐, 그 특징은 무엇이냐 묻습니다. 당연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너무 성 급한,너무 겉으로 도는 말입니다.
아들을 낳고 싶으면 속깊이 가만히 기도하는 것이고, 아기를 뱄다 느껴지면 먹는 것, 입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생각하는 것, 몸가지는 것, 행동하는 것을 하나하나 조심 조심,기뻐도 기쁜 빛을 아니 나타내며, 두려워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감추며, 참고 아기가 자라서 저절로 나오기를 기다리지, 누가 첫날부터 그 어떻게 생긴 것을 그리고 그 어떻게 나올 것을 알려고 서둘겠습니까? 그것은 반듯이 제 부모는 아닌 남, 점장이, 관상장이, 그것을 팔아먹으려는 것들만이 하는 짓입니다. 아기 하나도 그렇거던 전 인류역사를 건질 새 종교는 더구나도 그럴 것입니다. 종교는 되어 나오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지, 누가 생각해서 지어내고 짜내는 것 아닙니다. 소위 신흥종교라는 것들을 보면 환합니다. 환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잘못을 해본 일은 없습니다. 박태선이고, 문선명이고, 그외에 또 무엇이고 나는 언제 기웃해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럴 필요를 터럭만큼도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목사라는 사람, 학자라는 사람들이 거기를 기웃거립니까? 호기심은 진정한 바람이 없는데서 나옵니다. 장터 한 모퉁이에서 이제 선 자리에서 옥동자를 낳아 보여준다 한다면 어린애가 아니고야 누가 기웃해 볼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선 자리에서 새 종교를 보여준다는 데는 어찌 그리 속는 사람이 많습니까? 속는 것은 속에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욕심으로는 낳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애기 하나가 누구가 아닌 생명 자체가 낳는 것이듯이, 그리고 그것을 받으려면 적어도 한 남자 한 여자가 몸과 마음과 혼 전체가 합하여 격동을 통해 하나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듯이, 종교도 그렇습니다. 우주 전체의 물질적 정신적 이루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힘이 합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 종교는 간절히 바랄지언정, 절대로 만들어보려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을 하는 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지금 세계는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반드시 금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큰 일이 일어나려 할 때는 반드시 눈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예수님도 “하늘의 얼굴은 볼 줄 알면서 왜 시대의 금새는 보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또 금새는 움직이는 금새지 결코 죽어서 가만있는 금새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또 “사람의 아들의 날을 찾아도 보지 못한다” 했고, 그것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고 번개가 동에서 번쩍하면 동시에 서에서도 번쩍하는 것 같다 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그것은 보지 못하면서도 볼 수 있고,볼 수 있으면서도 못 본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에 초월해서 있는 것이지만, 또 우리 믿음에 달리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자라는 것이고, 자라기 때문에 변하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새가 나타나는 것인데, 금새가 보이면 말씀이 옵니다. 모든 시대는 제 말씀을 가졌습니다.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봤다, 먼저 알았다, 먼저 말한다, 혹은 대신 말한다 합니다. 대신은 누구 대신입니까? 물론 하나님 대신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옮기는 입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또 그는 하나님만 아니라 씨 곧 민중을 대신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세잡은 자에게 있지 않고 씨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해가 올라올 때 그 영광을 먼저 보는 것은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나와 강도질을 하는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고 처마 끝에 둥지를 트는 참새듯이, 시대가 갈리려 할 때 그 새벽을 먼저 보는 것은 지배자가 아니고 지붕위에 지저귀는 참새 같은 씨들입니다. 그 지지귐 속에 새시대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대신 통역해 주는 자가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지치다 남은 씨의 눈동자에서 희망의 빛을 본 이사야는 “기쁜 소식”이라 했고, 헤매이는 양떼같은 무리의 발걸음 속에서 새 나라의 행진곡을 들은 예수는 “하늘나라 가깝다”했고, 음울한 중세기의 교회당 문을 박차고 나오려는 현대 민중의 중얼거림을 들은 루터는 “믿음만”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오고 있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일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새 종교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것이 어느 민족에서 먼저 일어날까 하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습니다. 유럽일까, 아시아일까, 신대륙일까, 검은대륙일까, 독일일까, 프랑스일까, 영국일까, 인도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봤지만, 별로 분명한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와서는 거기 대한 생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2차 대전이후 급속도로 발달하는 기술은 물질적 정신적 모든 경계선을 많이 휘저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 나라나 민족이니 하는 것을 전날처럼 생각 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 있어서의 혹은 세계사 속에 있어서의 민족관이라 했을 때도 그런 것을 이미 느껴서 한 것일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같이 국가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 안되는 때이므로 민족관도 크게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영원불변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생각은 옛날에 지배자들이 씨들을 묶어놓고 강제하기 위해 만들어서 씌웠던 신화입니다. 이제 보는 눈을 가지고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라는 의식을 가지는 씨에게 그것은 이미 깨어진 신화입니다. 병은 예방을 해야 이기는 것이고 사상은 앞질러서 해야 바로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에게 구식적인 민족주의 사상, 국가주의 사상이 있는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남의 식민지로 매여 있었던 반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거기서 따라 잡으려는 후진국 심리를 면치 못하다가는 영 역사의 낙오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가는 방향을 볼 것 아니라, 선진 후진의 차이가 없어지는 딴 방향 혹은 딴 차원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보는 것입니다. 내가 말 시작할 때에 나는 좀 달리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라고 했던 것은 이래서 한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민족은 세계의 경쟁장에서 지지 않아야지”하는 것은 케케묵은 국가주의 도덕입니다. 이제는 적국이 있을 수 없는 시대에 들었습니다. 지금 세계는 고민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고민은 다른 것 아니고 이 시대 떨어진 국가관 민족관을 버리지 못하는데서 오는 고민입니다. 국가도 민족도 변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나가고 인간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국가 민족을 우상화 하려고 애쓰는 것은 지배주의자들이 하는 간악한 수단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서 씨을 동원하여 전쟁을 시키고는 그것으로써 자기네 권력의 자리를 유지해가는 방법으로 삼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같이 충성을 다해 섬겨야 하는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한분 절대자가 계실뿐입니다. 창조 이래 영원히 있을 오직 하나의 나라는 그 절대자의 뜻을 땅 위에 실현하는 그 나라뿐입니다. 땅 위에 서로 적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한 생명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짓 임금들이 인간을 노예로 지배하기 위해 그 사이에 적의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들은 거짓의 아들입니다. 우리 사람은 사랑으로써 그 싸움시키는 거짓을 이기는 싸움이 있을 뿐이지 그밖에 또 형제가 서로 미워하는 싸움이 이 이상 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그 심판은 벌써 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것 아니라 거짓하는 자들의 하는 일이 스스로 그 거짓임을 들어내서 이루어진 심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권력주의 지배주의 국가들은 스스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시 전제의 시대가 됐다
이 소리 저 소리 하다보니 말이 산만해졌습니다. 차차 말을 끝내야 하겠는데, 내 말의 요점은, 내 보는 촛점은, 내 생각의 핵심은,「보자는 것」입니다. 인생과 역사를 뚫어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제도에 기계처럼 매여 있는 것 아니라, 종으로서 하는 일의 목적도 의미도 모르고 그저 심부름 을 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고 살아가자는 것 입니다. 생각은 하되 지난날처럼 개인 개인이 제나름으로 생각을 하는 것 아니라 전체로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씨 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요, 새 종교를 찾는 것도 이 때문이요, 새 시대의 말씀을 받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전체〉라는 데 관해서만은 좀더 말하고 싶습니다. 당초에 모든 문제가 여기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샤르댕에게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앞으로 오는 시대는 전체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말하는 의미의 전체주의는 물론 아니지만 이 앞은 전체주의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것같은 가짜 전체주의가 나왔던 것은 이제 앞으로 정말 참 의미의 전체주의 시대가 오는 증거라고 합니다. 다만 그들이 잘못한 것은 사랑으로써 실현해야 할 것을 폭력으로 강제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가 히틀러, 무솔리니에게 역사 위에 설 자리를 지적해 주는 것을 보고 참 위대한 사상가라고 놀랐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를 미워하기는 쉽습니다. 그들에게 죄를 지워 지옥으로 보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그저 정죄할 뿐 아니라 역사상에서 그의 설 자리를 옮겨 골라서 지적해 주어야 참으로 역사를 뚫어보는 사람이요, 미래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살리지 않고 미래를 살릴 수 없으며, 죄인에게 설 자리를 주지 않고 의인의 서는 자리를 알 수 없습니다. 흉악한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너희도 이 영원한 역사의 바퀴를 메노라니 저지른 잘못이다 할 때 우리는 너 나할 것 없이 다 죄사함을 받고 살아납니다. 새 역사 창초의 영감과 능력은 거기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역사의 나가는 과정에는 언제나 세 단계가 있습니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正反合입니다. 맨첨은 미발(未發) 아직 갈리지 않은 통일의 단계, 그 담은 발(發)해서 발전하여 갈라지는 단계, 나중에 다시 화합해서, 혹은 종합되어서, 보다 높은 통일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인류의 역사의 처음은 원시 공동체의 시대입니다. 그때는 전체가 있을 뿐이지. 개인은 없었습니다. 다음에 개인이 차차 깨는 시대가 왔습니다. 사람이〈나〉를 알고 자기 인격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이 시작되던 때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대가 그것입니다. 그동안 인간은 개인적으로 많이 자랐습니다. 그래서 영웅주의가 나왔고 이상주의가 나왔고 영혼구원의 신앙이 섰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문명은 점점 발달이 됐고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교통이 아주 잦아져서 이제 인간관계가 전면적으로 유기적인 것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전체의 시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하는 개인이 깨지 못함으로 있었던 원시적인 전체가 아니고, 개인이 깰대로 깨여서 자기 존재가 본래부터 서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었던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살핍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간을 성인기(成人期)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공동체 속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하는 생각과 행동은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전체의 규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김새 모양부터 말, 생각, 행동에 이르기까지 전체의 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생각은 각 개체 개체가 하게 되어 있지 전체로서 하는 생각이란 것은 없습니다. 여기가 문제의 근본입니다. 인간관계처럼 복잡한 것은 없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그것은 결국 개체 대 전체,개체 대 개체와 두 가지에 귀착되고 맙니다. 사람은 일찍부터 하늘을 알고 하나님을 믿어왔지만 그 하나님이 나타나는 곳은 전체입니다. 자연 속도 생각할 수 있고,꿈 속,환상 속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도 결국 생각하는 사람의 심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인데 그 생각함의 배후에는 언제나 역사적 사회적 전체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심이 천심이라는 것인데 그 인심이란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곧 전체의 인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도덕, 모든 법률, 모든 풍속에서 사람의 사상과 행동을 규정하는 권위는 그 전체에 있습니다. 인간 만사라지만 그 복잡한 만사의 고민거리는 이 전체와의 관계가 잘 되지 않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가 절대의 권위를 가지고 사람의 충성을 요구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참나라는 하나로 사는 공동체
그런데 거기 한가지 중요한 것이 그 전체는 결코 고정된 전체가 아니고 자라는, 부단히 자라는 전체입니다. 처음에는 아마 몇 개의 원시인이 들어 사는 동굴 속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차차 자라는 동안에 굴에서 골짜기로, 골짜기서 버덩으로, 버덩에서 더 큰 강유역으로, 반도로, 대륙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동안에 이름은 언제나〈나라〉라 불렀지만, 그 나라는 자꾸 변한 것이지 가만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커가면 커갈수록 이날까지의 대적, 원수하던 이질적인 분자를 그 속에 넣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전쟁으로 됐거나 평화적으로 됐거나간 통합이 되면 그 권위에 있어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급이란 것도, 종이란 것도 이렇게 해서 생겼습니다. 그러니 도덕, 종교에는 늘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 자라는 전체야말로 늘 문제입니다. 그 전체는 늘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불리웠고, 그래서 그 나라의 우두머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지만, 그의 하는 일과 뜻은 늘 분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개인주의가 발달했고 생각하는 개인이야말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라 주장하여 그 하나님의 이름을 쓰고 앉아있는 개인의 제멋대로 하는 정치가 종교를 비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유와 정의의 사상이 발달했고 혁명사상 해방주의가 왕성해 가게 됐습니다. 그것이 근대입니다.
그런데 2차 대전에서 대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2차 대전 그 자체는 이때까지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며 자라오던 대국가들의 경쟁이 포화상태에 든 결과로 제 속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 시작하는 충돌인데, 결과는 엉뚱한데 떨어졌습니다. 본래 모든 나라는 다 가짜나라입니다. 참 나라는 그 하나로 살아가는 공동체 자체인데, 그것을 대표하노라 자칭하고 나선 나라가 참으로 그 공동체를 대표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주권자란 한번도 없었습니다. 다 개인 혹은 집단이 짜고 들어서 전체의 이름아래 도둑질을 해먹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저도 마찬가지지만, 전체주의를 내세우고 일어난 것은 모든 국가가 다 전체를 속여 먹고 있는 집단임을 알기 때문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강대국이 결속하여 반대한 것은 자기네의 죄상을 드러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고나니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 하면, 나라란 것의 의미가 더 희박해졌습니다. 전쟁은 과학을 급속도로 발달시켰고, 목적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한 것이지만, 그 과학의 발달로 국경선은 점전 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괴물의 냉전이란 것이 등장했고, 모든 나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경찰국가, 스파이국가로 전락했고, 외교는 흥정으로 돼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느 국가도 제가 대표하고 있는 그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다 부족하다 그 말입니다. 발달은 했는데 갈수록 불편한 세상입니다. 거의 매일같이 일어나는 비행기 납치란 무엇입니까? 백주에 가장 문명했다는 유럽 대도시에서 폭력단이 날뛰는 것은 무엇입니까? 권위도 질서도, 인도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국가란 국가 아니다. 모든 전체, 그 전체가 제정하는 도덕 질서란 도덕도 질서도 아니다, 모든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하는 종교도 종교 아니다, 그말 아니겠습니까?
民族觀은 全體觀으로!
이제 나라는 세계라는 나라 하나 밖에 없이 됐습니다. 전체란 우주란 전체 외에 또 다른 전체가 없이 됐습니다, 본래부터 그런 것인데 이날것 그것을 가리고 속여먹던 우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2차 대전 후의 가장 큰 소리는 아무래도 제3세계라는 것 밖에 다른 것이 없을 것인데, 나는 그 제3세계, 혹은 비동맹 진영을 생각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이때 것 제국주의 밑에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됐으니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 하잔 것이 그 고난의 의미는 아니었는데! 이제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부자의 등살에 고생했으면, 돈 없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그 목표가 돼야지 나도 이젠 부자가 돼보련다. 그래서야 이때 것 한 고생이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젊은 학생들이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것을 볼 때는 답답한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왜 좀더 널리 좀더 깊이 보려고 하지 않을까? 뒤늦게나마 나도 한동안 부귀를 누려보고, 민족중흥의 인물이란 공적을 남겨 보겠다 하는 묵은 역사의 찌꺼기 주어먹는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할지 몰라도 영원히 새롭고 자라가는 역사의 기수려는 젊음이 그래서야 됩니까?
이제 우리는 가장 새 일, 가장 큰 일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전체로서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은 생각하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하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아마 우리 몸을 이루어 가지고 있는 몇 백조 되는 세포 알알이 다 제나름대로 하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은 세포에서부터 시작됐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생각하는 능력은 세포 속에 있을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언젠가부터 한몸으로써 생각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늘하고 있는 일이므로 별로 신기하게 알지 않지만, 반성해 본다면 진실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개인이라는 세포로써 조직되는 인간이라고 왜 전체로 생각하지 못할 것 있습니까? 만일 그 일을 못한다면 이때까지 십만 년 백만 년 해온 생각, 수양, 요가, 참선, 기도, 성령이 다 무의미합니다. 역사 속에 있어서의 민족관이 문제 아닙니다. 전체관입니다, 스스로 사는 전체, 생각하는 전체, 그래서 자기 초월을 하는 전체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그래서 모두가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과, 거기 있는 나라란, 그 자리에 갈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다 못한 말은 다음 어느 세계에서 합시다.
씨알의소리 1978년 5월 73호
저작집30; 13- 129
전집20; 12-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