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넷째날
가. 시코쿠무라(四國村) 민속촌
이제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은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의 민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시코쿠무라(四國村)라는 민속촌을 들릅니다. 이곳 민속촌 안에도 2002년에 안도가 미술관을 지었다는군요. 민속촌 앞에 내리니 민속촌 옆으로 야시마(屋島) 신사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신사 이름이 '옥도'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예전에 이곳이 섬이었다는 것인데, 지금은 육지로 이어져 우리는 곧장 차를 타고 이리로 왔습니다.
무슨 신사인가 설명문을 보니 초대 고송본(高松藩) 번주 송평뢰중(松平賴重)이 동조대신(東照大神) - 덕천가강을 동조대신으로 신격화 하였군요. - 의 신묘(神廟)를 짓고 숭경(崇敬)해오던 중 8대 번주 송평뢰의(松平賴儀)가 1815년 이곳에 사전(社殿)을 지었고, 명치 4년에 관악(冠嶽) 신사로 되었다가 명치 7년에 지금의 옥도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답니다. 그리고, 명치 15년에 초대번주 송평뢰중도 이곳에 합사하였다는군요. 풍신수길의 신사가 있는데 덕천가강의 신사가 없을 리 없죠. 시코쿠무라 민속촌을 보러 왔다가 뜻밖에 덕천가강의 신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신사야 다 비슷할 테고, 이미 동기들이 민속촌으로 가고 있어 저도 발길을 민속촌으로 돌렸습니다.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니 김교수는 우릴 덩굴을 꼬아 만든 흔들다리로 안내합니다. 한 때 일본을 지배했던 타이라족이 1185년 미나모토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야 골짜기(祖谷)로 도망쳐왔는데, 이곳은 가파른 산과 골짜기, 골짜기를 흐르는 급류로 인하여 피난지로는 아주 적격이었답니다. 이곳에 이들이 만든 다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다리랍니다. 저도 한 손에 사진기를 들고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는 흔들흔들 하고 게다가 나무를 엮어 만든 발판은 나무를 촘촘히 연결하지 않아 조심하지 않았다간 군데군데 발이 빠질 염려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발판 밑으로 고인 물만 보이지만 이 다리가 놓여있던 곳은 급류가 흘러가던 곳일 텐데 자칫 다리 밑으로 떨어지면 그냥 급류에 휩쓸려 가던 것은 아닌가요? 이러니 당연히 여자 원우들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다리를 건너고 이미 다리를 거의 건넌 제가 이런 기회를 놓칠세라 다리를 흔들어댔죠. ㅎㅎ 죄송했습니다. 덩굴로 만든 다리이니 오래가지 못할 테고, 그래서 3년에 한 번씩은 다리를 보강해야 했다는데, 지금 건너고 있는 다리는 이곳에 재현해놓은 것이라 덩굴 속으로 잘 안 보이게 철선으로 보강을 해놓았답니다. 그런데 당시 기술여건이나 지형여건상 다리를 이렇게밖에 만들 수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만약 적이 쳐들어올 경우 쉽게 다리를 끊어버릴 수 있게 이렇게 만든 것일까요?
일본의 민가는 우리와 많이 다르군요. 우리는 아무리 가난한 농가더라도 최소한 사랑방, 안방의 구분은 있는데, 일본은 건물을 크게 지어 방 한 가운데 화로를 중심으로 하여 온가족이 빙 둘러 자도록 되어 있고, 비가 잘 흘러내리도록 지붕 경사를 급하게 하니 천정이 높고 집은 넓어 집안은 어슴프레 하고 겨울에는 춥습니다.
김교수는 이렇게 집안이 어둡기에 일본 여인들은 얼굴은 하얗게, 입술은 빨갛게 화장을 하고 옷도 원색적인데다가 금박을 입혀 눈에 잘 띄게 했다네요. 빛이 잘 반사되어 반짝거리게 밥그릇도 칠기로 하고... 사실 통유리가 발명되기 전에 전세계적으로 제일 밝고 청결했던 집은 한옥이랍니다. 우리의 온돌과 일본의 다다미도 비교가 안 되었겠죠? 그나저나 이렇게 온가족이 한방에 빙 둘러 자면 부부는 어떻게 자기들 사랑을 나눌까요? 예전에 이글루 안에서 온 가족이 같이 생활하는 에스키모족들은 아이들이 보고 있어도 태연히 자기들 할 것은 다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설마 우리와 같은 유교권의 일본에서도 그러진 않았겠죠? 글쎄~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랑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는 가족들 다 나가 있으라고 하나?
그런데, 사람은 자기 관심분야에 먼저 눈이 간다고, 우리들은 가옥 내 전시품을 먼저 보게 되는데, 김교수의 눈은 이 집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나 보느라고 천정이나 기둥에 먼저 눈이 가더군요.
민속촌에는 이밖에도 전래 가무공연장, 설탕공장 - 찬기(讚岐)라는 지방이 설탕으로 유명했다는군요. - 종이제조공방, 등대, 등대지기 가옥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문화재라는 것은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 생각되는데, 여기 민속촌은 시코쿠 지방 각지의 것을 모아 놓다보니, 바다에서 많이 떨어진 이 언덕배기에 등대와 조그만 배까지 있어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보아야 좀 더 현장감이 있지 않을까요?
이곳 민속촌에 온 주목적이 안도가 지은 건물을 보는 것이라 우리는 안도가 지은 박물관에도 들어가보았습니다. 이곳 역시 안도 특유의 콘크리트 건물에 계단식 정원에선 한쪽 계단을 타고 물이 흐르는 게 특히 아와지시마의 백단원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화삼분(和三盆)이라는 일본 최초의 백설탕 제조업에 사용되던 찬기 지방의 공구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재래식 설탕 제조의 이모조모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 이노쿠마 겐이치로 현대미술관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이번 답사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마루카메(丸龜)시의 시립미술관인 이노쿠마 겐이치로 현대미술관. 이 미술관은 마르카메에서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이노쿠마 겐이치로(猪熊弦一郞) 화가를 - 이름에 돼지와 곰이 들어가 있네요. - 위한 미술관으로 설립되었는데, 마츠야마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죠. 입장하려는 쪽의 하얀 벽면에는 마치 초등학생이 그려놓은 듯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분야가 다양하게 뻗쳐나가다보니 이렇게 아이들이 그린 것과 같은 그리도 예술이 됩니다. 하긴 마르셀 뒤샹 같은 사람은 소변기를 갖다놓고 이것이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이라고 했으니...
이 미술관도 점박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언뜻 안도의 작품인가 하였으나 요시오 타니구치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안도는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건축가인데 반하여 그동안 타니구치는 일본에서나 알아주던 건축가였는데 2004년에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의 재건축을 맡아 국제적으로도 성가를 나타내었다고 하는군요.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게중에는 1924년에 그린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자화상도 있는데, 그림 속에서 약간 고집이 있는 듯한 젊은 청년이 나를 쳐다봅니다. 저렇게 젊은 기가 충만하였던 이노쿠마도 1993년에 9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술관 3층에서는 이사모 노구찌의 사진 작품도 전시되고 있었는데, 사진중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난 이후의 히로시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인상적입니다. 얼마 안 되는 건물들만 서있고 대부분의 건물들은 잔해더미로 변해버린 히로시마 시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한창 작품을 보고 있는데 미술관 직원이 와서 껌을 씹지 말라고 하네요. '원~ 요란스럽게 소리 내며 씹는 것도 아닌데, 껌 씹는다고 작품에 무슨 해가 가나?' 지중미술관에서도 그러더니 여기서도 직원들이 좀 유난떠는 것 같습니다..
아! 이제 모든 답사 일정을 소화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뿐!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비가 옵니다. 일본에 오기 전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하여 우산을 준비해오긴 하였으나, 그동안 우산 꺼낼 일이 없다가 막판에 비가 오네요. 그러나 막판에 우산을 적시기 싫어 저는 그냥 차에 오릅니다. 가는 도중 점심을 먹고 마쓰야마(松山) 공항에 도착하니 4:30경. 올 때는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왔지만, 돌아가는 것은 시코쿠 서북쪽 도시 마쓰야마의 공항입니다. 1시간 만인 5:30경 비행기는 어두워진 활주로를 박차고 오릅니다. 3박4일의 안도를 따라가는 답사여행. 모처럼 예술적으로 충만한 여행이었습니다.
첫댓글 3박 4일간의 안도를 따라가는 답사여행, 올리신 글 덕분으로 여비도 들이지 않고 제 거처에서 편히 동행하여 다녀왔습니다. 친절하고 풍부한 식견을 지닌 가이드의 안내로 답사지의 매 장소마다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얘기를 들으며 많은 교훈과 감동을 받은 여행이었습니다. 우리의 한옥과 일본의 민가, 그리고 온돌과 다다미를 예로 든 양국간의 주거문화에서 서로 다른 기후와 풍토, 환경 등의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전 가족이 한 방에서 생활하면서 부부관계는 어떻게 했을까요, 설마 식구들을 밖으로 내쫓고나서 하기야 했겠습니까? 아마 다른 식구들이 다 자나 안자나 눈치를 살피면서 은밀하게 관계를 갖지 않았을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