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시대의 시대적 배경
이사야서 1장 1절에“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라고 되어 있음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했던 시대가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앗수르의 팽창으로 인한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유다 또한 거의 멸망에 이를 지경까지 갔기 때문이다. 외교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던 애굽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아람과의 연합이 오히려 침공의 빌미가 되거나 북이스라엘의 공격을 격발한 상황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앗수르의 비위를 맞추고자 한 종교적인 배교의 행위는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만듦으로 앗수르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이런 격동의 시기에 사역자로 세워진 이사야는 자신의 이름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시다” 라는 메시지를 사역 기간 내내 남유다의 왕과 백성들을 향해서 선포했다. 그가 주로 사역했던 시기의 왕들과 그에 따른 시기는 다음과 같다.
1. 웃시야
웃시야 왕은 남유다의 10대 왕으로 주전 791-739년경 재위했던 왕이다. 그는 신앙으로 주변 대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농경을 발전키며, 군대를 위해 무기를 예비하는 등 유능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왕이었으나 나라가 부강해지고 평안해지자 제사장이 아닌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교만에 빠져 나병환자가 되었다. 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사 6장).
2. 요담
부왕인 웃시야가 나병환자가 되자 일찍 왕에 올랐고, 부왕과 함께 공동 통치를 했다. 남 유다의 11대 왕인 요담은 그의 재위 기간은 주전 750-731년이며 평생 여호와의 신앙으로 통치했다. 또한 그는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즈음에 통치를 시작했고, 호세아와 미가 선지자와 동시대의 인물이었기에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을 받으며 남유다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가 부왕인 웃시야처럼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했어도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왕하 15:34-35).
3. 아하스
아하스는 남유다의 12대 왕으로 통치 기간은 주전 735-715년이다. 아하스의 시대는 남유다 역사 중 매우 혼란한 시기 중 하나였다. 급속도로 왕성해진 앗수르가 주변국들을 집어 삼키고 있었고, 지리적 위치상 앗수르의 동쪽에 있는 바벨론도 패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애굽도 오랜 강대국으로서 그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람과 연합하여 앗수르에게 저항하던 북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에 아하스 시대에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고 그에 맞는 외교정책을 펴지 않으면 나라의 존립이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하스는 아람-북이스라엘 중심의 반앗수르 연합에 가담하지 않았고 멸망당하지 않았지만 조공을 바치며 연명하였다. 그리고 앗수르의 비위를 맞추고자 제사장 우리야를 보내 앗수르의 우상을 숭배하고 인신 제사를 하도록 하여 앗수르로 인해 패망하는 일은 없었으나 이런 우상숭배를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진행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왕이 되었다(왕하 16장).
4. 히스기야
신실했던 선왕인 웃시야-요담과는 달리 앗수르를 염두하고 외교 정책을 진행함으로 나라를 우상숭배로 이끈 부왕인 아하스 이후 히스기야가 남유다의 13대 왕으로 올라 통치한 것은 주전 728-687년이다. 이미 우상숭배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된 남유다는 새로운 왕인 히스기야가 세워지자 이전과는 다른 외교정책을 진행하게 되었다. 재위 초기 13년간은 아하스와 공동통치를 하면서 무능한 아하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에 히스기야는 재위한 지 6년 만에 북이스라엘이 패망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무서운 현실을 보면서도 히스기야는 과감하게 종교개혁을 단행했고, 외교 노선을 앗수르에서 애굽으로 바꿔나갔다. 그러자 호시탐탐 노리던 앗수르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 남유다는 산헤립의 가공할 공격을 주전 701년에 당하고 말았다. 남유다가 거의 앗수르의 손에 떨어지고 오직 예루살렘 성 한군데만 남은 남유다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앗수르의 군사 185,000명이 하룻밤 사이에 궤멸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히스기야가 죽음의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았다. 히스기야가 회복되자 바벨론에서는 앗수르의 대적인 므로닥 발라단을 보내어 히스기야와 비밀동맹을 맺으려 했다. 방심한 히스기야는 그의 모든 보물창고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장차 바벨론에 의한 유다 왕국의 멸망을 암시하는 행위로, 또한 지켜주신 하나님보다는 외교정책에 더 기댄 것으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