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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14
6월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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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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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tIMZxwxGaE&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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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씀 언젠가 복음서를 쭉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만 한번 추려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유형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말씀들을 하셨더군요. 수많은 비유들, 제자들의 특별 교육용 일화들, 정신 못 차리던 제자들 혼내시던 말씀들, 잘 알아듣지 못하던 군중들을 위한 재미난 이야기들,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셨던 대화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들, 그 많은 위로의 말씀들, 희망의 말씀들... ^^*
예수님의 말씀을 유형별로 정리하다가 느낀 바입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상황 상황에 너무도 적절했고, 기지로 넘치는 말씀이어서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특히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떠보려고 할 때, 예수님을 올가미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계책을 마련해서 다가왔을 때, 그래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 때,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지혜로 흘러넘쳤습니다.
적대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언변은 더욱 빛을 발했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용감하게도 홀로 맞서셨습니다.
적대자들은 논리 정연한 예수님의 말씀, 순금과도 같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말씀, 어쩔 수 없이 승복해야하는 진리 앞에서 언제나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뺍니다. 그리고 치를 떨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눈앞에 놓여있던 먹잇감을 놓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 강경하게 맞서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약자들이 상처받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지혜의 말씀으로 궁지에 몰린 약자들을 셀 수도 없이 구해내셨습니다. 박해자, 위선자, 이교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우셨지만, 길 잃고 방황하던 양떼들에게 그분의 말씀은 한없이 감미로운 생명수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랜만에 좋은 건수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잡아넣을 수 있겠구나, 드디어 소원성취 하는구나, 하면서 희희낙락,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고발되어 구속될 상황이었습니다.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면, 그 인간들 분명히 예수님을 유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이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나온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의 대답은 난감한 상황을 적당히 넘기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장황하게 이것 저것 설명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단 한 마디 강력한 말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황제의 권위도 존중해주시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우위성, 하느님의 우선권에 대한 강조도 놓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 가득 찬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찌 그리 힘이 있는지요? 어찌 그리 지혜로운지요? 어찌 그리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지요? 어찌 그리 감동적인지요? 그 배경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랜 기간 나자렛에서의 깊이 있는 수행생활 탓도 컸을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침묵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진리를 깨쳐나가셨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일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벽한 일치상태에 계셨는데,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길은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난감하고 절박한 상황 앞에 설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단 하루만에도 엉뚱한 말, 허황된 말, 거짓말, 일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돌아서면 후회할 말, 이웃들에게 상처 주는 말, 그래서 이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들을 셀 수도 없이 내뱉는
우리들의 언어생활 앞에서 예수님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건네주셨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그렇게 어렵지 않군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늘 여유를 찾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심사숙고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버지의 도움, 하느님의 견해를 구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시라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런 경우 아버지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늘 고민하셨습니다. 그 결과 단 한 마디도 버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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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족한 것이 많을수록 사기당할 확률도 높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HtJqZi1ISl4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것으로 올가미를 씌우려고 시도합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기당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보좌 신부 때 사기를 당해 물건을 엄청나게 산 일이 있습니다. 추석 즈음에 한 백화점에서 영화를 보고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냉동탑차가 도로에서 제 차 옆으로 오더니 잠깐만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길가에 세웠더니 자신들도 그 백화점에 납품하는 사람들인데 물건이 남아서 싸게 팔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어놓은 물건은 제주 옥돔이었습니다. 얼음 위에 재워진 옥돔은 정말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백화점에서는 35만 원에 판매되는 것인데 4만 원에 사라고 했습니다. 자신들도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바빠서 내려갈 수 없어서 그렇게 남은 것들을 팔아 소주라도 한잔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면 여러 가정에 선물을 해야 해서 10박스를 샀습니다. 수녀원에도 주었는데 수녀님들이 옥돔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져갔더니 온통 얼음으로만 채워져 있고 위에 3마리 정도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몇 마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20마리 정도 있다고 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사제가 사기 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해버렸다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저는 돈이 넉넉하지 못한 보좌 때였기 때문에 사기를 더 당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애정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니까 그만큼 싸게 판다는 것에 대해 더 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싸게 사기 위해 사기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100원짜리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굳이 싸다고 돈을 쓰지 않습니다. 돈이 더 넉넉해졌는데도 사기당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 것입니다. 무엇이 넉넉할 때 덜 미혹됩니다. 친구가 많을 때 애정에 덜 미혹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기꾼들은 그 사람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만약 전화금융사기를 치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녀가 다쳤다고 해서 당황하게 만듭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당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민감한 것이 많은 이들은 많은 사기를 당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믿고 보증을 서주거나 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인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인간 애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뿐입니다. 재물이든 사람에 대한 애정이든 자신이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기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민감해지지 않는 방법은 넉넉하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만약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다인들에게 매국노처럼 취급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란세력으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이란 세상의 욕구입니다. 세상의 욕구는 세상에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모든 바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바라기 위한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을 욕망할수록 하느님 것을 덜 욕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 것을 욕망할수록 세상 것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에너지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는 무관심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 편을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하느님 편을 들으셔서 그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면 부족한 것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있을 때 아이들이 세상 어떠한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것을 귀찮아해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면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못 받는 대신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그 아이는 엄마를 버리고 그 스마트폰을 내미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지면 자녀들은 그렇게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에 미혹되어 사기당하고 이용당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만을 믿는 아이라면 자신을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겁을 먹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미혹되는 일이 없는데 그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당하지도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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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3-17 :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교묘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예수님께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것이냐는 함정이 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절) 그들은 그분을 거슬러 교묘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15절) 하신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돈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황제’,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16-17절)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디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 하여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황제에게 바쳐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금고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의 은화이다. 우리 안에 새겨주신 당신의 초상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도 하느님의 모상을 가진, 즉 하느님의 초상이니 하느님께 속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그 깊은 뜻을 알아듣고 그 함정을 없애버리시는 주님의 지혜에 대하여 경탄하였던 것이다.
동전에는 통치자의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고 올바로 되돌려 드릴 수 있을 때 될 수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참된 예물로 이 제단에 봉헌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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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주시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들은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이 대답은 맞는 것이었을까요? 황제는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누가 황제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 아니십니까? 세상에 어찌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신앙적인 것은 종교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황제의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가 복음의 빛을 받아 각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된 정치 문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2246항 참조). 부조리와 불평등, 억압과 폭력으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모든 이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라고 선을 긋고 무심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쓰시는 만큼 교회는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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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3-14)
여기서 ‘올무를 씌우려고’는 ‘함정에 빠뜨리려고’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을 하시든지 간에 그 답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계획했습니다.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하시면 “예수는 민족의 배반자다.”라고 선전했을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시면 반역자라고 로마 당국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은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사람을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라고 말한 것은, 진심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방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아첨한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들의 입으로 “스승님은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금에 관해서 어떻게 가르치시든지 간에 그 가르침을 ‘하느님의 길’로 받아들이겠다고 미리 다짐한 일과 같습니다. (물론 그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을 근거로 예수님을 고발한다면, ‘하느님의 길’을 고발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의 길’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세금에 관한 질문을 겉으로만 보면, 마치 황제가 이제 막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세금 징수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될 때부터 시행되었던 일이고, 유대인들은 이미 세금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고, 위선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저희가 지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는 일은 합당한 일입니까,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까? 세금을 계속 바쳐도 됩니까, 아니면 바치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까?”로 바꿨어야 합니다. (그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제국의 하수인들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세금을 내고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양심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어떤 일이 양심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것도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5-17)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린 데나리온 한 닢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고, 로마 제국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라는 말씀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한다면 세금을 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있고, 제국의 체제와 질서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낼 것인가, 안 낼 것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그 일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황제의 권력, 황제의 목숨, 황제가 지배하고 있는 것들,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만일에 황제가 세금을 징수해서 악한 일에 사용한다면 그에게 세금을 내면 안 되지만, 그게 아니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세금을 안 낼 이유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임금에게는 주권자이므로 복종하고, 총독들에게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도록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므로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베드 2,13-15) (우리는 항상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선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선이 실현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말씀을 “종교인들은 정치인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마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만일에 정치가 독재로 변질되고, 정치인들이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것을 막고 바로잡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신앙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악을 방관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정치권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세속 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인은 세속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면서도 세속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속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은 신앙생활과 세속 생활을 함께 해야 하는 신앙인들의 ‘삶의 원칙’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신앙인은 선행과 사랑 실천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만일에 세상을 향해서 담을 쌓고 선행도 사랑도 없이 배타적으로 살면서 미움 받을 짓만 한다면, 그래서 신앙인들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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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전례, 기숙사 생활, 강의, 기도는 신학교 생활의 기본입니다. 신학교에는 학생들의 끼와 재능을 높일 수 있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의식과 지식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모임도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동아리입니다. 새내기 1학년인 제게 신학교는 새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와 글을 쓰고 발표하는 아람 동인회, 연극을 연습하고 발표하는 낙산 연극반, 농악을 배우고 농촌 봉사하는 민문연, 학교 내 폐지를 줍고 노동운동을 공부하는 밀알회, 설명이 필요 없는 신약반, 구약반이 있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철우회, 신학을 공부하는 신토연, 학교 매점을 운영하는 신협, 클래식 기타를 배우는 로고스 기타반, 주일 미사에 함께하는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연극반에서 3년 있었고, 신학교 매점에서 4년 있었습니다. 연극을 통해서 또 다른 나를 표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데미안, 크리스티나 여왕, 결혼’과 같은 작품을 함께 했습니다. 같이 무대를 만들고, 함께 연습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저녁식사 후에 잠시 문을 여는 매점 운영도 좋았습니다. 신학생을 위한 편지지와 노트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루에 30분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물론 매일 외출이 가능한 것도 좋았습니다. 신학교는 기도와 전례, 신학과 철학을 배우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내개 숨겨진 끼와 재능을 발휘하는 면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오래 전 신학교 생활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꽹과리, 북, 장구, 깃발을 들고 교정을 도는 농악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로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꿈속에서는 정말 신났습니다. 마음껏 뛰었고, 막걸리도 마시고, 동료들과 어깨춤을 추면서 땀을 흠뻑 흘리는 꿈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인식과 사고의 전환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식이 바뀌고 내 삶의 방식이 바뀌면 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두 달이 넘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자칫 지루하고 따분한 날들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나 바꾸면 멈출 수 있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날이 됩니다.
성서를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몇 번씩 시험하려 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을 데리고 와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지은 여인을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인식의 전환으로 사람들은 돌아갔고,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안식일의 주인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인식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웃이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주체는 내가 아니라, 지금 강도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인식의 전환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되었습니다.
황제에게 재물을 바쳐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커다란 황소도 고삐만 잡으면 어린애라도 쉽게 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 재물은 황소보다 훨씬 힘이 셉니다. 재물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황제의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식의 전환으로 이 땅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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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에는 전례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달력과는 시작도 다르고, 내용도 다릅니다. 세상의 달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날짜가 계산되지만, 교회의 달력은 예수님의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 시기를 지냈고, 지금은 연중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 달력의 시작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부터입니다. 성탄을 축하하면서 잠시 ‘연중 시기’를 지냅니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을 지내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를 지냅니다.
성 주간을 통해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면서 ‘부활 시기’를 지냅니다. 7주간의 부활 시기를 지내고 ‘성령강림 대축일’이 지나면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는 ‘연중 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려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전례 안에서 사는 것은 우리는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주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홀로 설 수 있는 제도와 복지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에 회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사장님은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잘 마련해 주었습니다. 직원식당은 값이 싸면서도 영양가가 높았고, 직원들은 하루 3끼를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체력 단련실을 마련해 언제든지 운동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의료시설이 있어서 의사와 상담할 수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명상할 수 있는 공간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장님은 회사의 목적은 이윤을 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회사의 목적은 직원들이 사명감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저는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그 회사는 더 많은 발전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천사, 선녀, 요정, 산신령, 도깨비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도 하고, 요정들이 숲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는 그런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교육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라는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은 땅에 사는 사람들과 가까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고착되었고, 사람들의 삶에서 악취가 풍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습니다. 우리의 교육과 사회제도는 계속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잘살아야 하고, 더 많이 소유해야 하고, 끊임없이 ‘더’라는 마법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나만 멈추면 도태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면 정말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늘의 구름도, 바람의 느낌도, 꽃의 색깔도, 새들의 노래도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려 하고, 증거를 찾으려 하고, 확신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멈추라고 합니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하느님의 것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세상은 기계론적인 자연법칙의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응보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그런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멈출 수 있었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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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믿는 사람>
마르코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 것도 그럴 수 없이
하느님만이 스스로 계심을
믿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심을
알아듣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있는 모든 것에서
있게 하신 하느님을
느끼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있는 모든 것이
있게 하신 하느님의 것이라
말하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있는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느님께 돌려드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갖지 않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빚으신 모든 것을
온전히 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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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2009년 TV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자동차 광고를 기억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식 자동차 앞에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악수를 하며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대사가 흘러나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 곧이어 리모콘으로 자동차 문을 여는 소리가 ‘삐빅’ 들리고 상대방의 표정이 굳어집니다.
그리고 나오는 광고의 모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의 오늘을 말해 줍니다. 그랜져.”
저는 수업 자료를 위해 이 광고를 다시 찾아보고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차 하나로 인간의 삶을 평가 받는 다는 것이 황당한 일이지만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1년이 지난 현재 2020년, 같은 차종의 CF는 과연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찾아봤습니다. 최근CF의 배경은 동창회입니다.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창회에 참석한 주인공이 남자 동창에게 물어봅니다.
“야 정호야, 외제차로 바꿨냐?”
그리고 다음과 같은 대사가 오갑니다.
“얼마 안 해”,
“야, 성공했네”.
곧이어 다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아 맞다 유경아, 넌 승진했다며? 너는 차 안 바꿔?”
그러자 그 친구가 이야기 합니다.
“굳이 뭐... 회사에서 차 나오는데.”
이 말을 들은 여 주인공이 중얼거립니다.
‘벌써 임원?’
이어서 나오는 장면은 임원이 된 친구가 회사에서 나온 차, 곧 그랜져 신형을 운전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광고의 모토는 “2020 성공에 관하여”입니다.
이 광고는 최근 국산차 광고에서 가장 센스있다는 평을 듣습니다. 수입 차와 국산차 사이에는 가격적 측면에서 간극이 있는데, 국산 세단을 대한민국 조직에서의 성공에 비유함으로써 수입 차는 돈이 있으면 탈 수 있지만 그랜저는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내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광고들은 현대인들의 관점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사회적 지위와 재물이 인간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 물론, 성공한 분들을 폄하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유하고 있는 차종과 재산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의 삶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모두가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목적, 즉 선한 삶으로 정향되어 있고 그것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혹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감히 물질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차를 살 여유 없이 땀 흘려 번 돈을 모아 자녀의 교육에 사용하는 한 미혼모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그 누가 그녀의 삶이 아름답지 않거나 소중하지 않다고 폄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은 예수님께 교묘한 질문을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는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 것이냐는 함정이 놓여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계시던 남쪽 이스라엘 지역은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황제의 직할지로서 로마인 지방 장관이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금 문제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하느님만이 유일한 지배자라 여기며 세금을 내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인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로마 황제를 신과 같은 존재로 떠받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훼 하느님만을 섬겨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황제의 군인들에 의해 처벌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 데나리온 앞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 쓰여 있었으며,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화폐는 권력의 상징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한 나라를 정복하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화폐를 발행하여 자기 주권과 권력의 보증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통치 능력의 척도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즉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라는 말은 결국 우리의 삶이 세속적 지위와 재물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황제의 이름과 그림이 있는 화폐는 황제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세속적인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화폐 혹은 권력이라는 물질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모든 ‘삶’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인간의 것일 뿐 하느님의 것이 아닙니다. 한편 우리의 모든 삶은 하느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온전히 그분께 정향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누구도 이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 이를 이루는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사랑의 실천, 이웃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내가 가진 재능을 통해 타인을 돕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정말로 바라보고 지향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가치의 실천인 것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나 자신이 가진 것 중에 세속의 가치를 뛰어 넘어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따져보고 실천하기를 주님께 약속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런 광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는 2030년, 주인공이 차를 구입한지 어느덧 10년이 지난 미래입니다. 조금 오래됐지만 여전히 튼튼한 차를 이끌고 주인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아원에 봉사를 나갑니다. 차가 도착하자 뛰어 나오는 아이들, 그리고 차에 올라타 즐거워하는 아이들. 이들을 바라보며 주인공은 ‘어느덧 이 차를 산지 10년이 다 됐네’라고 중얼거립니다.
곧이어 “아저씨 차가 제일 멋있어요” 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다음의 광고 모토가 등장합니다.
“진정한 성공에 관하여. 그랜져.”
우리의 진정한 성공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아름다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좀 더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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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하는 여러분!
독서의 베드로 사도가 거푸 ‘사랑하는 여러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 주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제자의 참 모습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저릿합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을 시험해 보려는 수석 사제들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율법학자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 말의 올무를 씌우려는 자들에게 말씀으로만 정확하게 대응하신 사실을 전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매우 감탄하였다지요.
매일 주님께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의 시간이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인지 그분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인지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마음인지 묻고 싶습니다.
세상의 것을 위해서 기도를 이용하며 오히려 주님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미사 시간조차 세상 것에 묶인 채, 헛된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주님께서 희생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실을 알기에 감탄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분의 희생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 온 삶이 그 사랑의 보혈에 오열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감사로 땀을 흘리고 기쁨으로 그분을 전하며 사랑의 열매를 위해 매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혹여, 미움으로 분심으로 다툼과 시기로 그 사명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시간과 삶을 한낱 감정에 묶여 소진하는 일이야말로 ‘원수를 묵상하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인생을 갉아 먹는 삶의 독소는 다양합니다. 그 독은 스스로 확인하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려는 원의만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께 한 가지를 강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삶을 주님으로만 채우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흘러갑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예수 성심 성월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온 땅을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으로 가득해서 아무것도 곁들여지지 않는 축복을 얻기 참 좋은 시간입니다.
주님만 묵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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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때 사람들은 ‘행복’을 떠올립니다. 행복한 사람이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을 찾아 나서고 있는 우리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행복보다는 성공을 쫓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소한 일상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돈과 물질, 지위와 명예 등 세상의 성공 기준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다 보면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행복이 아니라 성공만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편안한 쉼의 시간을 가지면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에,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까,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입니다. 이 역시 행복이 아닌 세상에서 바라보는 성공을 쫓는 것입니다.
행복을 찾아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 순간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으로,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도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은 황제에게 세금 내는 문제를 질문하지요.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황제의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을 테고, 내라고 하면 매국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데나리온 한 닢에는 황제의 초상이 그려져 있지만, 우리 인간의 몸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초상을 찾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양심과 영혼을 세상의 것들로부터 지켜내어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행복이 아닌 성공만을 쫓으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초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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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먼저입니다>
신학생 때, 그리고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기도의 힘을 잘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학사님, 기도해주세요.”, “신부님,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지만, 기도를 부탁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떠맡기려는 심보가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보다 적극적인 실천이 담긴 열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부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열정도 너무나 보잘것없음을 뼈저리게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정이 담긴 노력과 실천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필요하지만, 기도가 먼저였습니다.
솔직히 이제까지 기도보다 나의 열정만으로 밀어붙인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결과는 언제나 기도가 먼저였습니다. 그래야 나의 일에 하느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기에 더 깊이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와 열정.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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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수한 마음>
-천상 지혜의 샘-
엊그제 써놓고 내심 만족하고 행복해 한 ‘당신은’ 이란 시를 나눕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바로 당신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바다임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선물이 선물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더 좋은 선물이예요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더 깊고 넓은 바다예요”-
이 또한 순수한 마음에서 솟아 난 성령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바티킨 뉴스 홈페이지가 참 고맙습니다. 참 많은 영적 자산을 제공합니다. 강론 준비에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순수한 마음, 순심純心이란 좀 촌스럽게 들리는 어감의 말마디에 왜관 수도원에 속한 순심학교가 생각납니다. 순심이란 말이 촌스럽다 하여 이름을 바꾼 자매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순수한 마음이요 여기서 샘솟는 천상 지혜입니다. 참 좋은 본보기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순수한 마음은 천상 지혜의 샘입니다. “아버지의 선교사(the Father’s Missionary),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선교” 교황님 말씀 제목이 참 신선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뿐 아니라 선교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선교사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누구입니까? 성령 강림 대축일, 교황님의 강론이 참 좋았습니다. 일부 소개합니다.
-“성령의 일치의 비밀은 바로 선물이다. 그분 자신이 선물이다. 하여 ‘하느님은 선물(God is Gift)임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은 가져가는 분이 아니라 주는 분이다. 만일 우리가 이를 깨닫는다면 우리 역시 우리 삶을 주기를 원할 것이다. 겸손한 사랑으로, 자유롭고 즐거운 섬김으로, 우리는 세상에 참 하느님의 모상을 제공할 것이다. 자기를 내어줌(self-giving)에 세 적은 자기도취(Narcissism)와 희생자의식(Victimhood), 염세주의(Pessimism)다. 희망의 기근(Famine of hope)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세 적을 치유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인 성령을 필요로 한다.”
성령은 바로 마음을 순수하게 하는 천상 지혜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자기도취, 희생자의식, 염세주의가 치유될 때 비로소 순수한 마음이요 희망의 빛이신 하느님이 환히 드러납니다. 이의 참 좋은 본보기가 아버지의 선교사,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천상 지혜가 빛납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적수들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내라 해도 걸려들고 내지 말라 해도 걸려듭니다. 양자택일의 딜렘마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내어준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 한 닢을 들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적수들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역습이었을 것입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적수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감탄하여 말문을 잃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선교사,예수님의 하느님 중심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천상 지혜임이 분명합니다.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의 모상인 황제란 인간 또한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런 대원칙의 진리에 대한 자각에서 결정은 각자 알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내심은 분명 세금을 바치라고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진퇴양난의 처지입니다. 저 같아도 역시 세금을 바칠 것입니다. 세금을 바친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의 부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짧은 생각에 명분을 쫓는다 하여 세금을 내지 않을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이니 현명치 못한 결정이요 바로 적수들의 올가미에 걸려 든 형국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선교사, 예수님과 함께 선교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했던 수제자 베드로가 제1독서에서 순수한 마음을 위한 참 좋은 지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티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무법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하느님의 선교사이자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날로 그분에 대한 은총과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갈 때, 우리 역시 순수한 마음에 천상 지혜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로 순수해진 우리 모두에게 천상 지혜를, 분별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90,14)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1,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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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이 많은 사람에게 큰 힘이 되지만 결국 갚아야 할 빚입니다. 보편복지를 외쳐도 실제적으로 재원마련대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때는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눈앞에 것만 보아서도 안 되고 기금을 이용해 먹어서도 안 됩니다.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을 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내지 말라” 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여 “이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진짜주인은 누구입니까?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황제도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오직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서로 다른 탈랜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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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연중 시기를 다시 시작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근원과 목적을 보여 줍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마르 12,14)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던 시절, 그때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임금이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찾아와 임금을 요구하고, 이를 언짢아 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 왕정을 허락하신 이야기를 소상히 전합니다(1사무 8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고 효력도 확실한 제도와 우두머리를 필요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손수 뽑으신 백성에게 배척당하신 것이지요.(1사무 8,7)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그마저 무너져서 로마 제국 황제에게 지배를 받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이때 종교 지도자들이 눈엣가시같은 예수님께 정치적 올가미를 던지지요. 예수님의 선택지는 로마에 대항하는 선동가거나, 아니면 민족적 반역자, 둘 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예수님의 답변은 이스라엘 왕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다윗의 자손답게 순수하고 영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까마득히 잊고 있었거나, 종교 행사의 시공간 안으로 축소시켜 버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환기시켜 주시면서, 동시에 온건하지만 단호하게 어둠의 세력이 품은 흑심과 속셈을 드러나게 만드셨지요.
"황제의 것 ... 하느님의 것"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황제의 것이 존재할까요?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황제마저도 하느님 것이니까요. 또 그에게 생명과 권한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신데 감히 어느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을 주장할 수 있을지요!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하도록 신자들을 독려합니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자신이 하느님의 것임을 아는 이는 세상 재물과 허영에 목메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 곧 황제의 것들은 추구하고 차지할수록 더 욕망하게 되고 달려들게 만드는 마약과 같지요 마시면마실수록 더 목이 타서 계속 들이키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바닷물과도 같습니다. 이 상태에서 평화란 없습니다.
온 생애를 걸쳐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되돌려드리며 살다가 그 순간을 맞는 이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에 평화로이 들어섭니다. 하느님과 그 사이에 이미 주고 받음의 경계조차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것이 모두 그의 것이고 그의 것이 고스란히 그분 것인 차원에서는 소유나 욕망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집니다.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2베드 3,18)
베드로 사도는 그날이 올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고합니다. 우리가 간직하고 키워야 할 것은 바로 "은총"과 "앎"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은 분명 "받은" 것이지요.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사람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은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지요.
앎은 세속적이고 현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앎을 가리킵니다. 책과 학위와 상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사랑의 지식이지요. 깨끗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님은 당신에 대해서 열어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존재를 깨치고 들어온 앎이 사랑이 되어 존재를 차지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 살기 힘드시지요?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도 책임져야 하고 교회와 사회에 의무도 이행해야 하니 마냥 하느님의 것만 추구하며 살기는 어렵게 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등과 노고가 크십니까...
사실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은총으로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을 분별하는 눈이 존재합니다. 때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우리 영혼이 알고 양심이 알지요.
각자 자기 영혼의 저울을 바라봅시다.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 사이에 나의 추는 어디쯤 위치하는지요? 단번에 추를 옮기려다 저울 접시가 뒤집어질 수도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는 마시고, 우리 영혼이 아는 방향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도록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봅시다. 정답은 주님도 아시고 우리도 알지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화답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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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려면 깨어 선택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려면 깨어 선택해야 한다. 내 감정과 느낌이 여전히 상처와 원망 속에 빠져 있을 때도 나는 감사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불만이나 원망 대신 감사하기를 선택할 기회가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나를 비난할 때 가슴은 쓰리지만 그래도 감사하기를 선택 할 수 있다. 내 눈에 어떤 사람의 잘못과 허물이 뚜렷하게 보여도 그의 좋은 점과 아름다운 점을 말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앙심을 품은 말과 증오로 얼굴을 찌푸려도 나는 용서하라는 말을 듣고 웃는 얼굴을 선택할 수 있다.
-「살며 춤추며」중에서
♣내가 언제나 원망과 감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내 어둠 속에 나타나 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며 사랑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며, 내 것이 모두 네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 서 있는 어둠 속에 머물며, 나보다 나은 누군가를 가리키고, 지난날 나를 덮쳤던 불행에 마음 아파하며 원망과 한숨 속에 살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찾아오시는 분을 바라보며 나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순수한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은 내 선택에 달려 있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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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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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이는 말 그대로 하면, 은화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황재의 것이니 황제에게 돌려주고,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이 됩니다. 곧 돈은 황제에게 돌려주되, 자신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가 자신의 초상을 요구하니,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초상을 요구하시니,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사실, 동전에는 흐리멍텅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곧 황제의 초상이 자신에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인간에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압니다. 곧 하느님의 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은화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의 황제에게 팔아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팔려 넘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소유,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우리 안에 진리가 다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자라야 할 일입니다. 진리가 자라게 하는 일, 그것은 진리를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 그것은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에 속한 이들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진리에 속해 있기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까닭에, 불의 앞에 눈감고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진리에 속하도록 빛을 밝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부터 결코 제한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것입니다. 돈에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제게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당신께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르며, 당신의 말씀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빛이 빛나며, 당신의 진리가 새겨져 있고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당신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저는 영원토록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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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릅니다.
돈은 자신에게 새겨진 초상을 알지 못하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형상을 압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저는 영원토록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것입니다.
돈에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제게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당신께 돌아갑니다.
빛이 되어 비추는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새겨진 저는,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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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7uDqyFkF2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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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하느님보다
커져버린
우리의 모순된
삶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반성하며
살아 가는
이 모든 순간이
우리 힘이
아님을 뼈저리게
인정합니다.
그래서 진정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기쁘게
겸손되이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이 모든 길또한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카이사이르조차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기꺼이
놓아 드려야 합니다.
놓아드리는
그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돌려 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내어 놓기
싫어하는 우리들
아집을 만납니다.
돌려 드리고
내어 놓아야
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우리가 잠시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돌려 드려야 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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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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