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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長 90장/ 신작 단편소설
세계에서 유례없는 콘서트
이원우(26기계화보병사단 홍보대사 및 안보 강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국가톨릭문인회 및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원/ 대한가수협회 회원)
2015년 8월 22일 열한 시. 26사단 출신 나경운은 서울 역 대합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하사 계급장이 달린 베레모를 벗어 손에 쥐었다. 냉방이 되어 있지만, 이마에 땀이 맺혔기 때문이다. 체격과 인물이 좋은 청원 경찰은 그날도 입구에 버티고 서서, 선글라스를 낀 채 감춰진 눈매를 번뜩거린다. 그러면서도 경운에게 목례로 아는 체를 한다.
한데 경운이 찾는 26사단 병사들은 안 보인다. 어찌 26사단뿐이랴. 군복을 입은 젊은이는 그 넓은 서울 역 대합실에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계속하여 북한의 첫 포격 도발부터 정리해, 보도를 쏟아내고 있었다. 20일 오후 세 시 53분께 저들이 연천군에 포탄 한 발을 쏘았었단다. 그리고 오후 4시 12분께 포탄 3발을 비무장 지대 군사분계선 남쪽 700미터 지점에 또 퍼부었고우리는 대응 화력으로 북방으로 자주포 스물아홉 발을 날려보냈다.. 바로 26사단 예하 포병대대에서란다. 열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은 모두 텔레비전에 시선을 붙박았고. 모두들 웅성거렸다.
아 참, 여기서 하나 밝히자. 경운은 평소 대합실에서 어김없이 하는 일이 있다. 한두 시간 기다리다, 마침내 병사 두서넛을 차례로 만났다 치자. 녀석들('용사'니 '전우'니 하는 말보다 이 ‘녀석’이란 말이 마음에 들어서 경운은 가끔 이 '녀석'에 정을 담뿍 쏟는다.)의 손을 잡고 들르는 곳이 서너 군데 있다. 빵집과 호두과자 가게, 햄버거 가게, 비빔밥 집….미리 십만 원씩 맡겨 놓은 터다. 노병의 *신분(?)을 알기 때문에, 기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대개의 병사는 그 중 택일하여 뭔가를 집어 든다. 반세기 전의 배고팠던 시절이 생각나서 경운은 그게 정말 기쁘고 좋은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국군 FM 방송에서 녹음을 마치고, 걸어서 서울역까지 나왔다. 바로 그 앞이 정류장이어서, 거기서 5000번 버스를 타면 바로 집 근처까지 올 수 있다. 하지만 경운은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대합실에 들어가고 것이다. 방송에서의 마지막 이야기도 이랬으니까.
“서울역 근처에 오면 대합실에 무조건 들어가 26사단 병사들을 만납니다. 그게 왜 그렇게 좋은지, 오직 나만 알지요. 많을 때는 서넛과 맞닥뜨립니다.”
그래봤자 3만 원쯤이면 녀석들의 함박웃음을 볼 수 있었다. 헤어질 때는 마주보고 웃으며 거수경례를 한다. 공격!
쩌렁쩌렁한 한 목소리에 뭇사람들이 놀라기도 하였고. ‘공격’은 전군에서 26사단만이 쓰는 구호다.
특히 고향에 가는 병사에게 호두과자 상자를 두 개 안기면서 부모님께 전해 드리라고 당부할 때! 그런 기분은 겪어 본 경운이라야 알 것이다. 그런데 그날 매표소 가까이 가려는데, 한 병사가 달려오더니 거수경례를 올려 부치는 게 아닌가. 경운이 물었다.
“어, 자네 날 어떻게 알아?”
“지난 겨울 저희 7*여단 본부에 와서 강의를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오세흔 대령이 여단장이지. 잘 있었어? 녀석 굉장히 잘생겼구먼. 어디 가는가? 감사합니다. 병장 김창현, 마지막 휴가를 떠납니다.”
마침 의자가 비어 있어 둘은 나란히 앉았다. 배고프냐고 물으니 녀석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깨에 손을 앉았다. 따뜻하고, 땀 냄새가 물씬 풍긴다. 경운은 병사의 체취를 경운은 가슴 깊이에서부터 기억한다. 반세기 전부터 여태까지. 자신의 당시 전우들 것은 물론, 근래 몇 해 동안 모부대 손자들에게서 몸에 밴 것이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엄마의 젖무덤에서 맡았었던 것과 비슷한 냄새일까?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경운은 휴대전화를 꺼내서 번호를 눌렀다. 이윽고 들리는 소리!
"공격! 예,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 대령입니다." "반갑습니다. 잘 계시지요? 여단장님은 물론 여단 본부와 12* 기보대대, 12* 기보대대, 5* 전차 대대 장병들 모두 그립습니다."
"선배님, 부대 이름도 다 기억하시는군요. 여단 장교들도 깜빡할 때가 있는데…."
"아니 그걸 제가 왜 잊습니까? 그들을 만나는 것은 이 노병의 보람입니다. 잠깐만요."
경운은 깜짝 놀라는 김창현 병장에게 건네주었다. 녀석의 얼굴을 긴장감이 덮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일개(?) 상병이 '하늘과 같은 여단장'과 통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데 녀석은 얼굴 표정이 이내 풀어지더니 상당 시간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한참 걸려서야 녀석이 전화기를 경운에게 돌려주었다. 경운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두 장 끄집어내 녀석의 손에 쥐어 준다. 처음엔 마다했으나
"이 녀석아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야, 하자 당당히(?) 받아. 경례도 한 번 부쳐봐"
녀석은 노병 아니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목소리가 더 커졌다. 공격!
이렇듯 경운은 이미 서울 역 대합실에서는 명물이 된 지 오래다. 일부러라도 올라가고, 다른 볼일을 마치고 나서도 들르는 곳이 거기다. 인색하다는 소릴 듣는 그가, 26사단 병사들에게만은 그렇지 않은 이유가 있다. 5년 전에 경운은 참척을 겪은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을 먼저 저승에 보냈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 여생을 기대고 사는 곳에서, 모부대('국방일보' 에 가끔 글을 썼는데, 이 '모부대'란 말을 그들이 일러 주었다. 어머니 母!)가 지척에 있고, 거기서 장병들을 대상으로 소위 안보 강연을 무료로 한 게 또 하나의 인연이 된 것이다.
경운의 엄마는 시각 장애인이셨다. 앞을 거의 못 보실 정도이셨다. 경운을 군대에 보내 놓고 나서, 엄마는 거의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의지할 곳 없는 당신 말씀대로, 육신은 못 그러더라도, 영혼만은 그대로 옮겨 천 리 넘게 떨어져 있는 아들 곁에 갈 수밖에. 거기서 엄마는 그대로 머물러 계셨다. 그런데 누구의 섭리 덕분인지 경운은 딱 반세기 만에 엄마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부대 26사단에 발에 땀이 나도록 드나들게 된 것이다. 모부대와의 해후엔 참척이 다리를 놓았다?
처음엔 온갖 상념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마침내 이런 불경스러운 죄책감으로 괴로움을 당했었지만, 이제 마음을 고쳐 잡았다. 대신 26사단의 마흔 살 안팎의 장교와 부사관은 아들이요, 갓 스무 살은 넘긴 병사들은 내 손자다!
그로부터 경운의 모든 삶의 초점은 26사단에 맞춰 놓고 있다. 엄마가 아직 머물러 계시고 아들과 손자들이 땀을 흘리는 곳, 거기는 그의 영원한 은혜의 땅이고도 남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느 병사도 만날 수 없다. 일촉즉발! 바로 긴장감이 나라 전체에 팽배해 있다. 장병들의 외박 외출은 물론 휴가까지 금지하였다니, 그들과 맞닥뜨리기는 힘들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경운은 서둘러 아내에게 전화를 넣었다. 아무래도 26사단까지 갔다 와야 하겠다고 했더니 아내는 소스라쳐 놀란다.
“아니, 준전시라는데 당신이 가서 뭘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도 가봐야겠어. 사단장이나 부사단장 중 누구를 만날 수 있겠지. 큰일을 앞두고 있잖아? 겨우 열흘 남짓 뒤에.”
아내는 걱정을 했다. 시간을 묻기에 열두 시를 좀 넘겼다고 말하곤, 부대에 다녀오겠다고 일렀다. 김밥 사들고 가서 양주 역에서 점심 대신 먹겠다고 했고. 불무리 회관(사단 복지회관/ 숙소에서 자고 내일 내려 올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경운의 성격을 아는 터라 아내는 조심하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역구내 서점에 가서 이문열과 박완서, 오정희의 소설집 등을 눈에 뜨이는 대로 달래서 대금을 치르곤 배낭에 집어넣었다. 행여나 싶어 과월호 <한국소설> 몇 권과 자신의 저서 <개가 들어도 웃을 일> <대통령의 오줌 누기> 등 여남은 권 등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제법 무게가 느껴졌다. 7* 여단 본부와 3개 대대, 그리고 직할 중대 및 군악대 등에 총 2천 권의 양서를 보내느라고 서재까지 없앤 터다. 경운은 중얼거렸다. 오늘은 군악대에 전하면 되겠지.
김밥을 두 줄 사 들고, 양주행 지하철을 타러 플랫 홈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럴 수가! 불무리 성당 군종병(軍宗兵) 최진형 일병이 서 있지 않은가? 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례를 했다. 준전시인데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었다. 군종 교구 심부름 갔다 온다고 했다. 최 일병은 경운이더러 지금 이 시간에 부대에 가느냐고 되묻고말고. 경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운은 콘서트 걱정을 했다. 최진형 일병은 잘 풀릴 테니 염려 말라고 위로한다.
최진형 일병은 마다하는 경운에게서 배낭을 빼앗다시피 하여 자기 어깨에 걸쳤다. 그 속에 든 것을 최 일병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양주 행 열차가 들어왔다. 점심 시간대라서 그런지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아서 둘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양주 역까지는 딱 한 시간 걸린다.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종병의 생활관 생활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걸 경운은 최 일병에게 물었고, 최 일병은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고 대답했다. 두어 달 지나서 상병 진급하는데, 그 정도면 생활관에도 한결 수월할 거라고 덧붙였다. 한데, 앞 의자에 앉은 중년 부부와 곁의 노인 몇몇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직도 약간은 어색해 보이는 하사모를 쓴 경운과 스물두어 살로 짐작되는 병사가 대화를 나누는데, 둘 다 하나같이 깍듯한 존댓말을 쓰기 때문이다. 경운은 웃음이 나왔다. 여기에다 설명을 하면 이렇다. 가톨릭 대학교에 다니다가 일정 연한이 지나면 보통 학사라는 호칭을 붙인다. 그때부터는 설사 부모라도 그에게 말을 놓지 않는 것이다. 군에 입대했다 치자. 훈련을 마치고 사단에 군종병으로 배속되고 나선 사단 영관급 장교도 일단 성당 안에서는 그들에게
“학사님, 오늘 미사 마치면 특별한 순서가 있습니까?”
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손자뻘인 최 일병이지만, 경운은 그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드디어 열차가 양주 역에 닿았다. 둘은 플랫폼을 걸어 나온다. 경운의 제안이다.
“우리 사단가 2절이나 부르면서 나가지요. 서울 역 대합실에서는 1절을 불렀거든요.”
최 일병인들 그게 싫을 리 없다. 행군 간에 군가를 제창한다. 하나 둘 셋 넷!
흥안성 바라보며 말을 달리던/ 화랑의 뒷자손이 그 누구이냐/ 무궁화 꽃동산 혼을 이어서/ 잃어진 북녘 땅을 찾아오리라/ 아아 우리는 불무리의 용사/ 식을 줄 모르는 불무리 용사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며 역무원 등도 웃는다. 최 일병도 점심 식사 전이라 해서, 둘은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경운이 얼른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빵 몇 개와 생수, 커피 등을 사 왔다. 김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일 것 같아서다. 경운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학사님, 부대에서 올 때면 난 항상 일부러 여기서 식사합니다. 반세기 전 생각이 나서요. 그땐 물론 여기 역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정말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습니다.”
최 일병이 고개를 끄덕인다. 경운은 시장하지 않다며 김밥 몇 개만 입에 넣고, 나머지는 최 일병에게 넘겨주었다. 잘 먹는 그가 너무 고마울 수밖에. 그렇게 김밥과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물 한 모금씩을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건장한 체격의 헌병 병사 둘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러더니 딱 부동자세로 경운과 최 일병 앞에 서서 거수 경례! 선임자가 최 일병에게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고 묻는다. 최 일병은 조금 전과 같은 대답을 했고.
경운이 끼어들었다.
“자네들 수고하네. 학사님은 내가 모시고 들어갈 거야. 한데 자네 내가 이상하이. 늙은이가 하사모를 쓰고 있는데, 왜 검문하지 않는가?”
“할아버지를 알거든요. <국방일보>에서 뵌 적 있고요. 사단 공식 카페에 글을 가장 많이 올리시는 작가시잖아요? 그리고 저희 헌병 사병은 간부(幹部)들은 검문하지 않습니다. 저희 선임하사임도 할아버지를 알고 계시니, 설사 여기 오시더라도 그냥 경례만 부치실 걸요.”
“허허, 내가 간부라고? 난 제대한 지 반세기인 노병일세. 하여튼 자네 둘 수고하네. 여기 빵이라도 좀 들게. 그리고 만난 김에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고.”
처음엔 쑥스러운지 거절했으나, 두어 번 더 권유하자 헌병 특유의 반듯한 자세를 취한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최 일병이 다루었고. 촬영이 끝나고 나자, 경운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몇 달 전 대한가수협회 회장 선거장에서, 김흥국 후보가 해병대 후배들에게 거의 헌병 수준의 복장을 시켜, 여단장처럼 호위(?)를 받고 있던 모습이 생각나서다.
역 앞은 좀 한산했다. 진돗개 발령이 났으니, 28사단 26사단 신병 훈련소로 가는 부모들이 거의 없어서일 게다. 택시가 여남은 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운과 최 일병이 맨 앞차를 타려고 그 옆을 지나가는데, 중간쯤에서 기사가 그들을 부른다.
“선배님, 조 기사입니다. 이 차 타시지요. 어차피 부대 앞으로 갑니다.”
“오, 조태환 기사님, 반갑습니다. 잘됐네요. 학사님 타십시오.”
사단까지의 거리라 해 봤자, 고작 8킬로미터 남짓이다. 요금은 항상 7천 원 정도 나온다. 20분 남짓이면 도착하고도 남는다. 조태환 기사는 본래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물론 옛날에는 양주군이었다.) 출신이다. 경운이 워낙 사단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알게 된 본토박이이다. 오갈 때 택시를 이용하는 까닭으로, 기사와 손님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 하나. 반세기 전에 사단 정훈 참모로 박홍주 대위가 있었다. 생쌀을 먹고 삶은 국수를 고명도 없이 삼키던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월남전에 참전했다 돌아왔을 때는 소령이었다. 그런데 그가 결혼을 하고 범죄에 연루되어 전역했는데, 그 후문을 나는 사람이 사령부에는 아무도 없다. 아니 박홍주 대위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는 정훈참모 감창언 소령마저 세세하게 물으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런데 조태환 기사는, 박홍주 대위가 먹여 살렸던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 기거하던 곳이 바로 지척이라며 다음에 한 번 들르자고 의기투합한 사이임에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조태환 기사는 일흔 살이라 했으니, 부대가 자리 잡고 난 뒤로부터 그 발전을 지켜본 증인이고도 남는다.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택시 기사들이 부대 앞에 몇몇 있다.
경운은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방성리는 이미 경운에겐 고향이나 다름없고, 64년 부대 창설 이후 거기 오랜 터전을 잡고 사는 조 기사가 동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걸 얻었었다가 그 모든 걸 잃어버린 부산이 고고향이라는 생각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당으로 직행하는 최진형 일병을 전송하고 경운은 바로 위병소로 향했다. 경계야 항상 삼엄하지만, 보통 때보다는 확실히 달랐다.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그래도 경운은 곧장 걸었다. 경운을 아는 위병들이 일시에 경례를 부친다. 공격!
“사단장님 계셔?”
병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아예 입을 닫는다. 경운은 눈치를 챘다. 아하, 이 준전시에 아무리 홍보대사이지만 일개 예비역 일반하사가 사단장의 현 위치를 묻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지….경운은 병사들에게 일렀다.
“그래 걱정하지들 말게나. 부사단장이나 주임원사를 통해 상황을 알아볼게. 자, 수고!”
경운은 배낭을 벗어 통째 맡겼다. 허수진 군악대장에게 전하라면서. 그리고 돌아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별정 우체국이 있고, 국장은 10대 이상 방성리에 뿌리를 내고 살아온 예비역 대령 출신이다. 우선 그부터 만나려고 걸음을 옮겼다. 우체국장은 마침 자리에 있었다. 인사를 주고받기 무섭게 커피가 나왔다. 경운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쩌지요? 9월 5일에 26사단 장병 초청 콘서트를 서울 ‘문학의 집’에서 열기로 했거든요. 부제목으로 ‘ 예비역 일반하사 나경운 제대 50년 기념’이 붙는 겁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윤성필 행정 부사단장한테서 개요는 들었습니다."
"사단장님을 좀 뵐까 싶어서 올라왔지만, 심려 끼칠 수 없고…. 아무튼 오늘 저녁은 불무리 회관(사단 복지회관) 묵을 각오입니다. 누구든 간부에게 직간접으로 물어 봐야지요.”
경운은 국장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반세기 전에 허허벌판이었는데, 완전히 변해 있었다. 슈퍼마켓도 있고 노래방이며 음식점 등이 즐비하다. 그 옛날 생각이 날 수밖에. 엄마가 무슨 돈이 있으랴. 형님의 사업도 기울고 해서 휴가를 가봤자, 귀대할 때는 오직 십이열차만 탔다. 수중에 몇 푼은 남겨야 했다. 아껴 썼다. 그러니 토요일이며 일요일에 다른 전우들처럼 의정부까지 나가 영화 한 편 보고 올 형편이 안 되었고말고. 하물며 의정부 극장 앞에 줄지어 선, 그 흔한 여자들인들 살 수 있었으랴. 그러니 농번기만 되면 기를 써서 들판으로 나갔다. 대여섯 명만 되면, 주인은 굉장히 좋아하였다. 땀을 흘리며 일하노라면 중참도 나오고, 식사 시간에는 그야말로 진수성찬 대령이었다. 농가에서의 외식! 그건 꿀맛이고도 남았다.
두어 시간 걸려 방성리 곳곳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경운은 사단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언제나처럼 최일언 상병이 거수경례를 잊지 않는다.
“공격! 홍보 대사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오셨군요.”
“오늘 여기서 묵을 걸세. 본부대장에게 전화할 테니 그리 알게. 결제는 주임원사나 본부대장의 몫!”
7* 여단 본부며 예하 3개 대대 및 직할 공병 중대, 군악대 등에서 장병들을 대상으로 무료 안보 강연을 해 온 그에게 사단장이 부대 숙소를 1박 2일(숙박비는 1만 2천원 내외) 정도 제공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경운에겐 그게 또 미안하기 이를 데 없다. 어쨌거나 경운은 부관부 생활관이 잘 올려다 보이는 301호에 올라가 여장을 풀었다.
점심 식사가 부실했던 터라, 배가 고팠던 경운은 부대 숙소에서 항상 그랬었던 것처럼 육개장을 시켰다. 좀 이른 시각이었지만,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런지 곧 식당으로 내려오라는 게 아닌가. 역시 육개장은 맛이 일품이었다.
부대 숙소의 시설은 조그마한 호텔에 버금간다. 경운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좀 풀었다. 그러나 이미 입술은 부르터졌고, 삭신이 쑤신다. 제대 50년 기념 모부대 장병 초청 콘서트! 보름 이상이나 오직 이 일에만 매달려 왔고, 모든 준비에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학교 선배 김후란 시인에게 부탁하여 ‘문학의 집’도 대관 예약했고, 천신만고 끝에 국내 최고의 음향기기 전문가와 섭외를 마쳤다.
지금에 와서 부대 장병을 한 명도 초청하지 못한다? 그거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우셋거리라도 이런 우셋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곱씹고 곱씹어 봐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잠시 누웠다 일어났다. 커튼을 여러 젖히니 바로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부관부 생활관이 있다. 부대 숙소에 들어오면 항상 그랬듯이 그 옛날 입대 초년병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부터 흐른 세월이 어느덧 반세기다. 같이 사단사령부에 근무했었던 전우들은 어디 가고 자신만 하사 모자를 쓰고 부대와 인연을 맺고 있지 않은가? 부관부 박종각 분위가 얘기하더라. 전방 소총 소대 병사가 반세기 만에 모부대에 발걸음 하는 경우는 더러 있어도 나경운처럼 부관부에 근무했었던 전우가 그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말이다.
경운은 회억했다. 반세기 전 저 부관부 생활관에서 잠잤었지. 이덕화의 친형 이덕봉이 군악대에서 클라리넷인가 연주했는데, 가끔 그 반주에 맞춰 그의 아버지 이예춘 선생의 '나그네 설움'을 무리기도 했고. 가사가 어떻게 되느냐고? 웃고 오는 인생이냐 울고 가는 나그네냐 대장군 마루턱엔 찬 서리만 설레이네
낮에는, 워낙 표창장이며 감사장을 좋아하는 문중섭 사단장(시인)의 지시로 아예 부관참모실에서 먹 갈고 붓으로 그것들은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고말고. 나애심이 공연 왔을 때 그 감사장도 자신이 썼지 않았던가? 그날 나애심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불렀다. 팔순을 훨씬 넘겼을 그 글래머 가수의 모습을 기억하며 흉내 내봤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은 흘러/ 고요한 이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아…
노래를 부르다가, 경운은 쟈니리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 시절 쟈니리야말로 최고의 가수였다. 남진과 나훈아가 칼부림까지 하며 인기를 다툴 때였다. 하나 쟈니리는 그들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더러 있으리라. ‘뜨거운 안녕’은 최고! 모든 젊은이 특히 경운처럼 애인도 없는 처지에 몽환 같은 이별을 좇는 또래의 젊은이들에겐 눈물의 애창곡이었다.
경운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준전시라 부대 숙소엔 경운이 외엔 투숙객이 없으니, 그 정도는 괜찮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다시 말해 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별들이 다정히 손을 잡는 밤…
노래를 일단 거기서 끊었다. 경운은 휴대 전화 번호를 눌렀다. 010-3766-744*
“쟈니리 형님, 건강하시지요?”
“그럼, 자네는 어떤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고생되겠네그려. 다시 한 번 장소와 시간 입력 시켜 주게. 문학의 집? 그러고 말일세. 출연료는 잘 받았네. 50만원. 고맙게 쓰겠네.”
“지금 사단에 와 있습니다. 한데 북한 놈들이 도발하는 바람에 콘서트 자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병사들이 못 온다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도 당일 형님의 올드팬이 상당수 참석할 테니 위로가 됩니다. 참, 가수협회 박수정 이사도 우정 출연하기로 했어요.”
“그래 알았어. 더 필요한 것 없어? MR은 내가 준비해 놨으니 반주는 걱정 말게.”
“필요한 거 있어요. 방금 ‘뜨거운 안녕’ 부르다가 목이 메서 그만 두었거든요. 나머지 두 소절씩 바꿔 부르십시다. 기어이 가신다면 헤어집시다. 아프게 마음 새긴 그 말 한 마디”
“보내고 밤마다 울음이 나도/ 납자답게 말하리라 안녕히라고”
마지막은 둘이서 제창을 했다. 뜨겁게 뜨겁게 안녕히라고
경운은 다시 전화를 돌렸다. 경운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최백호다. 가수협회 회장 선거장에서도 정훈희와 함께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 친구다. 경운은 최백호가 수화기를 들기 전에 빙긋 웃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다 있다.
"그래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하오만, 나 당신 닮았다는 이야기 참 많이도 들었소. 정훈희 선생이랑은 자주 연락되나?"
최백호는 며칠 내 부산 가면 또 만나게 될 거라 했다. 정훈희와는 선거 때 불티나게 전화가 오가기도 했었다. 정훈희가 최백호와 함께 인순이(김인순)를 지원하니 도와 달라는 부탁해 해왔고. 정훈희의 시아버지 고 김현옥 교장선생님과의 기가 막힌 인연은 여기 쓰지 말자. 최백호가 물었다. 어쩐 일로 전화를 했느냐고. 경운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섞였다.
"부탁이 하나 있소. 9월 5일에 문학의 집에서 열여섯 번째 콘서트를 열기로 했어요. 장병 초청입니다. 오후 두 부터 네 시 반까지요. 우정 출연 좀 부탁합시다. '낭만에 대하여'와 '영일만 친구' 두 곡. 출연료는 절충하기로 하고."
"쯧쯧, 어쩌지요? 일이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그날 부산 갑니다. 다른 분 소개할까요?"
"됐네. 쟈니리 형님 오시기로 했으니까. 이왕이면 당신까지 열창하면 금상첨화인데…."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고 최백호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경운은 조금 늦은 시각이었지만, 합참으로 자리를 옮긴 양병호 전 사단장에게 카톡으로 메시지를 넣었다. 010-3505-05**. 그가 아니었으면, 낯선 땅 서울, 그것도 문학의 집에서 콘서트라니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군악대의 협조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전망까지 한 그가 아니었던가? 그립다는 말을 서두로 해서, 콘서트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했다. 그리고 현 사단장 신응호 소장에게도 연락을 했다. 010-5075-16**. 그에게는 차마 콘서트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서울역까지 병사들을 만나러 왔다가 허탕을 쳤지만, 불무리 회관에서 묵는 중이라고. 왜 그가 콘서트 때문에 걱정되어 올라온 줄 눈치 채지 못했으랴. 이윽고 두 장군에게서 답신이 왔다. 간단하다. 남북 대치 상황이 엄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7* 여단 12*기갑대대 박참 중위에게서 전화가 오는 게 아닌가?
"오, 박참 중위, 아니 인사과장. 반갑소. 안 그래도 지금 나 불무리 회관에 와 있소."
"걱정이 되어서 전화 올렸습니다. 저희는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습니다. 근데 어쩝니까?"
"오죽하면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겠소? 오상석 대대장은 뭐라던가?"
사태가 진정되면 며칠 말미를 주겠다는 말씀까지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비목'을 연습 중이라고 거듭 강조했고말고. 나승인 일병도 뮤지컬 배우답게 그만한 준비는 하는 중이라 박참 중위는 덧붙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열한 시나 되었을까? 출입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열렸다고 응답했더니 이경진 사단 주임원사가 들어선다. 손에 통닭을 한 마리 든 채로. 부사단장 윤성필 대령과 서열을 정해 형님 아우라 하기로 한 사이다. (물론 경운이 큰형님, 윤성필 대령이 작은형님 이경진 주임원사가 막내니까 아우다.)
“공격! 형님, 오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콘서트 때문에 심려 많이 하시지요?”
“아니 아우님, 전화라도 하고 들를 것 아냐? 안 그래도 콘서트가 문제이긴 하이.”
“사단장님도 그 문제 거론하셨습니다. 며칠 남았으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김정은, 정말 낭패야. 반세기 전, 제 할아비가 나와 엄마를 고생시키더니. 허허”
주임원사는 그렇게 돌아갔다. 경운은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쉬 올 리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말고. 이튿날 아침은 역시 육개장으로 대신했다. 입맛이 썼다.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하고서 귀가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전쟁이었다. 다른 준비는 가만있어도 하나하나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할 정도로 이루어져 가는데, 장병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리라는 예단이 경운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식은땀이 났다. 일흔이 넘어 정신 데뷔한 아마추어 가수인 그에게는 까짓 콘서트 따위 다시는 못 열어도 좋다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장병 초청'이라는 버거운 단서가 이렇게 비참하게 짓뭉개지나 생각하니 성급한 자신이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김관진과 황병서가 중심이 된 남북 고위 회담이 성공리에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그걸로 경운의 콘서트가 해결될 리는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다른 데에서는 모두 긍정 신호뿐이었다.
<조선일보>와 <국방일보>에서는 물론 <실버넷뉴스>에서까지 취재를 나오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두 군데, 중학교와 사범학교 동기 동창들도 몰려오겠단다. 무엇보다 밀양 숭진초등학교와 부산 감전초등학교 제자들이 자리를 채워 주겠으니 걱정 말라는 전갈을 보냈다. 서울에서 새로 교유(交遊)하게 된 문인들도 상당수, 당일 보자며 격려를 한다. 대중가요 가수들 상당수가 이 괴짜 늙은이의, 전무후무한 콘서트를 견학(?)하겠다고 나섰다.
예천에 있는 불교 어느 종파의 종정스님 보덕선사까지 와서 찬불가요 한 곡을 불러 주겠다고 했으니 신도들이 우르르 따라올 것이다. 손해일 PEN 부이사장이 자작시를 낭송하겠다고 오히려 먼저 청을 넣었으니 그 또한 의미가 크다. 전에 나가던 삼가동 본당 지휘자인 성악가 추태균 아마또 형제가 신상옥을 대신해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바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고 했고. 피아니스트 둘도 어렵사리 구했다.
포스터도 간단하게 만들어, 아파트 승강기 게시판에 붙인 뒤다. 주민들이 꾀죄죄한 그를 보고 많이들 아는 체했다. 더러는 오겠다고 했고. 현수막을 주문한 지는 이미 오래 됐음은 물어보나마나. 실내를 장식할 것 하나는 대형이다. 사단(불무리 부대) 마크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고말고. 다시 보자. 제대 50주년 母部隊 장병 초청/ 예비역 하사 이원우 콘서트!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오호통재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입구에도 배너를 만들어 세우기로 했으니 설상가상이 따로 없다. 이제 와서 모든 걸 취소? 그러나 그런다면 우셋거리라도 그런 우셋거리가 없다. 얽히고설킨 데가 어디 한두 군데라야 그런 엄두를 내어 보지.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자연스레 악보로 갔고, 멜로디언으로 단음을 눌러 가며 노래 연습을 했다. 때로는 한창 그가 색소폰을 배우던 실용음악학원에 가서 성악 전공한 최지서 선생의 지도도 받았다. 국방부 군악대장 이희경 중령도 서일범 원장을 통해 알았으니 그 인연 더 강조해 무엇 하랴.
남들은 사회를 하나 내세워야 안 되겠느냐 했지만, 경운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혼식 사회자가 주례가 해야 할 이야기를 제가 다하는 걸 수도 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여태껏 열다섯 번을 부산에서 콘서틀 열었지만, 제일 처음 남백송 선생이 우정 출연했을 때 외는 직접 자기가 겸해서 해왔던 터 아닌가.
어쨌든 북한만 아니면 정말 일찍이 없었던 콘서트가 되는 건 명약관화한 터였다. 곡들이 얼마나 그럴싸한가 말이다. 혼연일체가 되어 제창할 노래부터 특이하다. 애국가와 사단가는 전 장병이 무대 위에서 일반 청중은 단하에서 목이 터져라 열창한다. '진짜 사나이'와 '행군의 아침' , '나의 자랑'.도 마 영남과 호남의 화합을 위해서 경운 자신이 '목포의 눈물' 및 '해운대 엘레지'부터 선보이고. 이어서 눈 어두우셨던 엄마의 살아생전 유일한 애창곡 '열아홉 살 과부가 스물아홉 살 딸을 데리고…'를 모두에게 던진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곡이 있다. 아들의 무운 장구를 비는 아일랜드 민요 Oh Danny Boy. 올드 팝송 레이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도 빼놓을 수 없었다. 상황에 따라 추가할 수 있고. 세계인의 가곡 O Sole Mio는 윤행원 수필가와 함께 소절을 바꿔가며 부르기로 했다. 물론 원어로.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몸부림치면 뭐하나? 대치 상황이 안 풀리는 데에야! 경운은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8월 31일 오상석 12* 기보대대장으로부터 결단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전화가 온 게 아닌가?
"공격! 선배님, 박참 중위와 나승인 일병을 특별 휴가 보냈습니다. 5일씩입니다."
"아니 대대장님,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고민은 했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이 저희 대대에 총 열두 시간 무 료 안보 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그 추운 겨울 새벽 여섯 시에 댁에서 출발, 양주 역에서 공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셨다는 것도 압니다."
현재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둘의 판다는 둘의 의견은 일치했디. 대대장은 일단 여단장에게는 구두 보고를 했단다. 책임은 자기가 진다고도 했다. 경운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고맙다는 인사를 할밖에. 비로소 숨통이 약간 트이는 것 같았다. 두 장병 외 또 있다. 부사단장과 주임원사는 어쩌면 참석할지 모르겠다는 낌새를 여러 번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언질을 준 건 아니지만. 그래, 대령과 중위 주임원사 일병 등 넷이라면, '장병(將兵) 초청'이라는 말을 억지로 갖다 붙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포기(?)를 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대신 경운은 자신이 당일 온 몸의 땀 한 방울이라도 마지막까지 흘릴 각오를 다졌다. 진짜 막춤의 진수도 보여 주리라 마음도 먹었다. 관중들은 웃겠지, 웃고말고! 경운은 일부러 파안대소를 해 봤다. 나머지 며칠을 그렇게 견뎠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깍듯이 고맙다는 인사 정도로 마치고 당일 행사는 예정대로 한다고 대답했고말고.
9월 4일 밤이었다. 잠이 올 턱이 없었다. 12시가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휴대 전화의 신호음이 들린 것은! 한데 사단장이 아닌가?
"공격! 선배님, 신 소장(少將)입니다. 걱정시켜서 미안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일 어쨌거나 행사는 진행하기로 했으니 안심하십시오."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선배님의 강의를 들은 모범 병사 30여 명을 행사에 참가시키도록 했습니다. 특별 휴가 2박 3일씩 줬지요. 녀석들이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야호! 비로소 경운은 무릎을 쳤다. 부사단장과 주임원사가 병력을 인솔하여 온다니, 이런 거짓말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경운은 서둘러 문학의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울밖에. 열 시에 도착하여 하나둘씩 점점에 들어갔다. 다들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점심은 박참 중위와 나승인 일병 등 셋이서 바로 밑 대중음식점에서 떡만두국으로 해결했다. 서둘러 올라오는데, 아 병사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두서넛씩 몰려오지 않은가?
오후 한 시 반, 개막을 30분 앞두었을 때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며 카메라맨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데, 부사단장과 주임원사가 어느새 경운의 앞에 나타나 거수 경례! 그리고 군복을 내민다. 명찰과 하사 계급장이 달린….화장실에서 갈아입을 수밖에. 한데 바지는 들어가지만 상의 지퍼가 도무지 닫히지 않는다. 병사 둘이 달려들어 우격다짐으로 지퍼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는 5분 전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세 신문은 비슷하게 제목을 같이 뽑기로 의견 일치를 봤다는 것. '세계에서 유례없는 콘서트!'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경운이 무대로 나서려는데, 아 이럴 수가! 그 옛날 삼랑진 친구 둘이가 먼저 등장하는 게 아닌가. 그건 전혀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
"나경운 하사와 우린 오랜 친구입니다. 삼랑진에 살 때 삼총사였지요. 헤어진 지 반백년 , 오늘 친구가 콘서트를 연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저희가 마련한 조그마한 선물입니다."
그러면서 둘은 제법 큰 현수막을 하나 펼치더니 업자와 이미 상의한 듯 아주 빠르게 무대 오른쪽에 설치하는 게 아닌가? 경운의 어머니를 사이에 모시고, 셋이 찍은 사진을 확대한 것이었다. 경운의 휴가 중에. 경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아 엄마!"
세계에서 유례없는 콘서트의 서막이었다. 경운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말고.
90장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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