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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가 말년에 그린 ‘나는 아직도 배운다’. 프라도미술관 소장. 위키미디어 코먼스
권성우 |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정치적 사안이 주된 화제로 떠오르는 격동기에는 사유의 매력과 해석의 깊이를 담보한 책일수록 본격적인 관심과 논의의 대상에서 멀어지곤 한다. 그건 갓 출간된 한 권의 책이 시대의 격류에 휘말린 어떤 불가피한 운명이기도 하겠다. 내게는 지난해 계엄 선포와 국회의 탄핵 가결 사이에 출간된 사회학자 김종엽의 ‘스페인 모로코 인문기행’이 바로 그런 책으로 다가왔다. 여행기치고는 드물게 두꺼운(750쪽에 달한다) 이 책의 탐독은 자연스럽게 아직 가보지 못한 스페인과 프라도미술관을 언젠가는 방문하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책의 전작에 해당하는 ‘타오르는 시간’(2022)이 여행(관광)의 본질과 공항을 비롯한 여행 인프라에 대한 면밀한 사회학적 탐색을 보여준다면, ‘스페인 모로코 인문기행’은 저자가 스페인의 여러 미술관을 둘러보며 만난 미술 작품과 건축을 다룬 예술 기행에 가깝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예술가인 벨라스케스, 고야, 피카소, 가우디 등에 대한 흥미진진한 해석과 통찰이 스페인 근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이 책에 펼쳐져 있다. 마치 반가운 선물처럼 책 내용 곳곳에 펼쳐져 있는 여행을 둘러싼 에피소드와 감회도 엄청난 밀도의 여행기 읽기에 여백을 제공한다.
이 책의 심원한 안목은 이 격변기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사뭇 통한다. 여러 대목에서 독서의 즐거움과 상큼한 지적 자극을 느꼈지만 내게는 고야에 관한 서술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저자처럼 네 권 분량으로 번역된 홋타 요시에의 장대한 역저 ‘고야’와 츠베탄 토도로프의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를 독파했기 때문이리라. 고야는 진보와 반동이 교차하던 스페인 역사와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온몸으로 통과한 화가다. 그는 궁정화가로 계속 안정된 지위에 서고 싶다는 세속적 욕망과 그림을 통해 시대의 어둠과 광기를 묘사하고 싶다는 예술적 소망 사이에서 늘 고민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앞으로 이 땅의 작가와 예술가들은 2024년 12월3일 계엄 선포 이후에 전개된 격변의 과정을 작품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 어떤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운명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여부에 따라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마드리드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학살을 다룬 그 유명한 고야의 대표작 ‘1808년 5월3일’도 진보와 퇴행이 복잡하게 뒤엉킨 역사의 변화무쌍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실제 학살과 작품 완성(1814) 사이에는 6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만약 당시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물러가지 않았다면, 페르난도 7세의 복귀가 가능하지 않았다면 고야의 창작 의지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으리라. 그렇다면 ‘1808년 5월3일’을 작가 자신의 기획을 통해 “애국주의적 언어로 치장”(김종엽)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 작품은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가의 욕망보다 작가의 기억에 새겨진 참화의 진실을 훨씬 극적으로 드러낸다.
팔순에 이른 말년의 고야는 소묘 작품에 “나는 아직도 배운다”는 문구를 적었다. 그가 살아온 시대에 드리워진 계몽의 빛과 그늘, 악몽과 광기, 전쟁과 학살을 투철하게 응시해 온 작가다운 태도다. 이 시대는 그런 지성의 등불을 통과한 예술적 감성을 요구한다. 고야의 예술과 인생을 생각하며, 지금 이 역사의 격류와 혼란의 본질, 폭력의 무의식, 정치적 욕망을 오롯이 응시할 이 땅의 고야 같은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