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재작년 7월말 이였다.
남방의 갑작스런 소나기와 함께 후덥한 바람이 지나갈 때 까지 작은
가게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찿아 간 곳의 골목길 허름한 건물 일층에서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예~ 아까 전화하신 분 이시지요.
올라 가시지요.
2층의 자기 방으로 안내하는 그의 뒷모습은 여유도 없고 조바심도 없는….
그저 그전부터 알았던 거래처를 만나는 사람처럼… 덤덤한 분위기이다.
조잡한 가죽제품의 샘플들이 먼지에 쌓여서 벽에 걸려있다.
저는… 오 진수 라고 합니다만…… 그래요, 뭘 도와 드리까요 ?
아는 후배가 얘기 하기를…
아, 글쎄 그 얘기는 아까 전화로 말씀 하셨고… 본론을 말씀 하세요.
예. 친척의 부탁이 있어서 조카 애 학교를 좀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학교등록 이야 돈만 내면 되는 것이고 기숙사 비용과 식대는 월 USD500
정도로 계산 하시면 되지요. 우리집 에서 하숙을 하려면 USD600 입니다.
독방에 방마다 에어컨이 있고 세끼를 한식으로 드리지요. 근데 지금은 방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아직 이곳의 학교로 확실히 결정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하기에 … 와 봤습니다.
근데 뭐 하시오.
예 ? 이곳에서 무슨 일 하시냐구요. 순간 전화가 왔다. 서투른 중국말 이기는
하나 거침이 없다.
가만히 그를 들여다 보았다. 강력한 눈매와 자신감 있는 표정. 아무렇게나
걸친 옷가지도 자신감의 표출 이리라.
벽에 걸려 있는 제품을 봐서는 장사가 될듯한 내용들은 아니다.
싼 인건비를 이용 한다고 하기는 하나 고급 소재에 고단가 제품으로 가야
유통 마진 이라도 챙길 수 있던지,
아니면 Invoice 단가를 적절히 책정하여 관세를 피해 갈수 있는 여유라도
있을 터인데.
이런 물건들이 한국으로 가봐야 시중 노점상 들 이나 팔 수 있는 수준인데.
꼭 필요한 생필품이 아닌 다음에야 과연 한국 사람들이 싸다고 아무거나 들고
다니는 사람들인가.
3-4 군데의 유통 과정을 거치면은 돌아올 것은 4-5%도 챙기기 어려운 제품들
이며 또 이런 제품의 유통 과정에서는 깨끗한 상 도의를 기대 하기가 쉽지않은
사람들이 적잖이 있는 곳이기에 장사 시기가 안 좋을 경우 누구 하나가 보따리
싼다면 그 손실을 그대로 감수해야 하는…
뭔가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아이템 이다.
20년 가까이 단일품목의 무역업에 종사해온 오 사장으로서는 그간 갖가지
장르의 장사에 종사 하는 사람들을 접해 왔음으로 비록 자기 아이템이 아닐지
라도 짧은 시간 내에 상대방의 장사 상황이 파악 된다.
우선 외모나 말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일반적인 장사경험을 쌓아온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우연히 만나왔던…..
장사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온 체계도 없이 장사를 하고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도 뭔가가 다르다.
잠시 기억이 스쳐간다.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태권도 사범의
직분을 이용하여 자리 잡은 후 잡화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유학을 왔다가 취직시기를 놓치다 보니 현지에 그대로 눌러앉아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도 꽤 많이 있었고…
계급 대립을 타파 하려던 프로레타리아 시절에 허무하게 무너진 3공화국을
애처로이 바라보다가 혁명적 역사성의 인식과 함께 이제 한국에서 내가 할 일은
없노라고…
"가노라 삼각산아”를 외치며 남미의 한 국가에 자리잡아 새로운 장사의 투쟁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중 다른 한명은 선명하게 생각이 난다.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시절까지 자기가 자란 도시에서 더 이상 싸울 상대를 찿지
못하여 지방원정 까지 다녔던 그가 갑자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친구들이 교회 앞에서 기다리며 “ 네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놓고 너 혼자
천당 가려 하느냐 ” 라고 하며 두둘겨 맞을 때는 울었다고 한다.
하느님.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선교사 수업을 마친 후 아프리카 변방 국으로 간 그는 지역공예품을 유럽으로
팔고있다. 선교 활동을 위하여 지역 주민들과의 친밀감을 유지 하기 위해서 이다.
한 지역의 교민들이 3-400명 정도에서 수년이 지나도록 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한국식당 아주머니, 그런 국가에 비하면은 중국의 교민은 몇 명인가 ?
인천시 "위해 구”로 얘기하며 전라도 “청도 시"라고 할 만큼 집성화 된
산동성 과 대도시와 연안을 따라서 정착된 한국교민이 20만 명이 넘는다.
게다가 매일 매일 비행기를 채우는 출장자 들과 관련된 갖가지 업종의
종사자들…
이 사람은 그 중 어떤 부류일까. 다소 궁금해 진다.
작성자 : 남풍 분류 기타 조회수 228 추천수 5 다운횟수 :0
누가 중국을 아는가 (2)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히 하시오 ?
아… 예~
근데 노형께서 는 이런 가죽잡화 공장을 하십니까.
이거 지금 정리 중이지요. 다른 일 하다가 한 일년 손대 봤는데.
그간 알토란 처럼 벌은 돈 20만원 만 날렸수다.
주문이 적어도 걱정이고, 많다고 이윤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돈만 자꾸 잠기고…
그저 하던 일 이나 계속 하는 건데.
그가 이곳에 도착 한 것은 1997년 2월 이였다.
사근 사근 스며드는 남방의 추위는 낯설은 이방인을 감싸줄 온기를
기대 할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주머니에 있는 전재산을 다시 확인한다
미화 육백불 과 한국 돈 팔만원… 동전 몇 잎 까지 만지작거려 본다.
IMF 한파에 신발만 간신히 챙겨 신고 나온 잔인한 그 해 겨울의 기억은
부인의 자살로 마무리 되었다.
지방의 유복한 교육자 집안의 돌연변이로 얼룩진 어린시절은 김 두한 의
후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무리들 속에서 가출로 일관된 생활 이였고….
뒷골목에서 만나게 된 부인과는 고등학교를 졸업 하기도 전에 갖게 된 지금의
딸 자식이 이미 상고를 졸업 하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이가 41세 였다.
결혼 후 집안 어른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십여 년간 하다가
부동산 업으로 시작한 사업이 큰돈을 모으게 되었으나 건축업 까지 손대게 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원.부 자재 수입의 대금 결재 일자가 마침 환율이 천정부지로 올라가 있을 때인
12월 초순에 몰려 들은 것이다.
지방에 노른자 임야를 갖고 있던 게 다소 있었으나
당장 현찰을 마련 할길 이 막연한 상황에서 어음과 가계수표 까지 돌아오다
보니 가차없이 차압이 들어 오게 되었다.
더 이상 털어 낼 것도 없다, 라는 것을 감지한 거래 은행에서도 그 정도 선에서
내부 결재를 끝낸 것 까지는 좋았으나 …
선천성 질환과 유방암까지 겹쳐서 수년간 투병 생활을 하던 부인이
자살을 한 것이다.
딸 자식과 같이 납골당을 걸어 나오면서 …
앞으로는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 동안 영위해온 여유 있던 생활의 잔상들을
두 번 다시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상대적 박탈감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고 그래서 선택 한곳이 중국 남방의 한구석 이였다.
네가 결혼 할 때쯤 에는 돌아오겠다고…
공항에 마중 나온 딸자식과 약속하며 돌아서는 날
금방 눈 이라도 내릴 것 같은 시커먼 하늘에 막 이륙하는 비행기 굉음 소리가
앞날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었다.
허 허 허 … 난 이래서 여기에 있게 되었소만…
형 씨는 무슨 일을 하쇼.
한 여름이기는 하나 시간 지나는 줄 모르고 있다가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소주 한잔 하시겠소.
이거 초면 이기는 하나 형 씨 인상이 참 좋소.
술이 한 두잔 건네지면서… 그 뒤의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중국에 온지 4개월쯤 지나 초여름의 태풍을 동반한 폭우가 며칠이 계속
될 때쯤에 한국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법원에 출두 하라는 명령서가 왔다는 것이다.
기억해 보니 죽마고우 이며 같이 건축업을 하던 친구의 빛 보증을 서준 것이
있었다.적은 금액이 아니 였는데......
자금난에 압박을 받던 친구는 남아 있던 것을 챙기어 외국으로 야반도주를 한
모양이다.
본인 또한 중국으로 와있으니 은행에서 는 같이 공모 한 것이 아니라면은
들어 와서 해명을 하라는 것 이였다.
주머니를 털어봐야 먼지밖에 없는 상황에서 잘못 되면은 친구의 죄까지 뒤집어
쓸 상황이 되었고...
안 들어가도 마찬가지 결과 이기는 하나 그로서는 당장 밥 한끼 먹기도 힘든
상황 이였으며 달리 대책도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
그저 돈 있고 힘있는 놈들이니까. 지들 편한 대로 해 놓았겠지. 기소중지로…
딸년 결혼식에도 못 가봤는데…
두달 전 사위와 같이 이곳을 다녀 갔단다.
서랍을 뒤적이며 손자의 백일사진을 찿아 보여주는 그의 눈가에 물기가 서린다.
주섬주섬 안주거리와 술 한병 을 더 챙겨 들고 왔다.
형씨 얘기도 좀 해 보시 구랴.
작성자 : 남풍 분류 기타 조회수 52 추천수 3 다운횟수 :0
누가 중국을 아는가 (3)
그럼 지금 나이가 45세 이신데. 할아버지가 되셨습니까 ?
뭐. 그게 다 그렇지요.
나도 속도 위반을 했었고… 우리 딸 년도 급했던 모양 이지요…
하 ~ 하하하…
얘기 중 처음으로 같이 한바탕 웃을 수 있었으며 침울했던 분위기가 금방
바뀌었다.
오 사장은 6년 전 처음 출장을 왔었다.
이미 기회의 시장 이라는 환상이 식상 되어 갈 때쯤 이였으며
초기 진출자중 사상자들은 물러나고 회생 가능한 일부는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있을 때에도 밀물처럼 대중국 투자는 계속 되고 있었다.
오랜 기간 거래해온 바이어 들이 있었고 아이템에 관한 전문성이
있어 주문을 받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인력 의존도가 높은 제품의
특성상 해가 지날수록 거래공장에 작업을 의뢰할 때마다 짜증스럽기 만 하며
어느 순간은 생산 원가가 시장가격을 따라가지 못하여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경우도 다반사 였다.
위기감을 느끼고 중국의 공급 선을 확보 하고자
몇 차례 출장을 와서 만나본 동북성 일대의 한국사람 이나 화교. 혹은 조선족
통역을 통한 한족들과의 상담 내용들은 아리송 하기만 하며 의문 투성이
인 것이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장사는 구매코자 하는 사람이 요구되는 제품의 질적인 수준과 가격 그리고
납기와 대금결제 조건이 기본적인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좀더 구체적으로 제품의 결여도 및 작업의 난이도를 고려한
서로간의 이해와 융통성이 바탕이 된 후 판매업자는 그것을 이행 할 수 있다면
그 장사는 성립이 되는 것이다.
판매를 하려고 들면은…물건부터 갖다 놓으라는… 물 건너 하는 장사의
통념상 이해 하기가 힘든 요구를 하며
구매를 하려고 하면은 생산공장으로 접근하기 까지 몇 군데서 따라 붙는다.
조선족 통역.진출구 직원. 외에도 명분 없이 자리를 같이 하는 몇몇 사람들...
그간 해온 장사의 여러 가지 형태 중 어느쪽으로 접목을 시도 해보고
다시 고려를 해 보아도 기본적인 감각으로 와 닿는 그들에 대한 불신감은
중국에 대한 환상에서 일단 한걸음 물러나게 하여서
일년 여 기간의 공백이 있다가 ...
중동지역 출장 중 같은 바이어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대만의 공급업체
"루"사장을 알게 되었다.
일부 동일한 제품을 같은 바이어 에게 판매를 하는데. 오파 가격이 우리 가격
보다 30% 나 낮은 게 아닌가.
한국에서 생산 하는 것보다 이들로부터 공급을 받아 제 3국으로 판매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빨간색 홍차를 나눠 마시며, 이 친구를 통하여 중국 문을 다시 두드려 보자는
생각을 할 때에"루"사장도 뭔가를 느낀 듯… 호기 있는 눈길을 보내온다.
그간 적절한 공급 처를 물색치 못하다가 만나게 된 “루”사장은
5년 전 부터 투자해 놓은 중국공장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의 부인인"마리"는
기존의 대만 공장을 관리하며 연간 4백만 불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으나,
마케팅에 의한 판매능력 보다는 공장 관리에 비중을 두고,
대만의 트레이딩 업체에 로칼 판매 의존도가 높은 공급업체 였으며
거래선 다변화를 위하여 실제 구매자를 모색 하려는 시도로 여러 번 출장을
다니기는 하였으나 까다로운 다큐먼트 하자와 크레임 에 적절히 대처하는 경험
이 부족하여 몇 차례 손실을 감수 하다 보니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 였다.
오 사장의 해외 무역에 대한 감각은 경우에 따라서 치고 빠지는
현지 상황 판단력이 능숙 하였기에 일단, 이해의 공통 분모는 마련된 것 이며
직접 거래를 해 보니 서로간에 제대로 만나기는 만난 것, 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초기 2년간은 이들의 물건을 받아서 한국산으로 포장을 바꾼 후 나가게 되는
물건의 짭짤한 마진에 재미를 붙이게 되다 보니…
한국의 기존 거래선 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으며 제품관리
및 개발을 위해서는 아예 이곳 에다가 사무실을 만드는 게 효율적 이라고
판단이 되어서 한국은 최소한의 업무기능을 위한 직원으로 규모와 인원을
축소해 놓은 상태로 아예 상주를 하게 된 것이다.
서울사무소의 업무기능 과 중국사무실의 현지 관리 및 안정된
대만 공급처 와의 거래형태는 그 동안 소규모 자영업에서 오는 불확실한 시장
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 해 나 갈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가끔씩 갖는 긴장감도 일의 활력이 될 만큼 오 사장의 시장접근에 대한
능력과"루"사장의 제품 생산에 대한 경험이 어울러져 장사는 순풍에 돛 단듯
하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더욱 쌓이게 되어 서로간에 적잖은 금액의 여신을
유동적으로 갖게 될 만큼 업무의 탄력을 붙여 나가게 되었다.
중국에 들어와 있는 자체가 선전 포고 된 전쟁 이기에 피아 간에 사상자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간의 일방적 패배에 비한 다면은 대만업체의 경험과 노력에
편승 된 행운을 갖게 된 경우 라는 것을 중국에 정착해 있으면서 알게 되었고
더불어 중국 본토일 지라도 아직 까지는 중국 사람들 과의 직거래 보다는
타이완 이나 홍콩업체 등… 화교 권을 우회한 상거래가 위험부담이 적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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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중국을 아는가 (4)
전재산 칠 천원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옷가지가 담긴 가방을 끌고 찿아 간 곳은 시내 중심가 에서 버스로
사십 여분이 걸리는 외곽 지역의 허름한 아파트 6층 이였다.
방 하나와 작은 거실 그리고 부엌 안 화장실에 샤워기 하나가
달랑 달려 있는 월세 삼백원 짜리 집 이다.
밤이 되어도 불을 켜지 않은 채 갇혀진 야수처럼 어둠을 응시하며 긴긴밤을
지내왔다. 울분과 분노를 삭이면서…..
가까운 대학의 어학 당 에 2개월 짜리 초급반의 수강 신청을 한 것은.
겨울잠 자듯이 한달 을 지낸 3월 초순 이였다.
더욱 꺼칠해진 피부와 눈에 띄게 늘어난 흰머리의 사십이 넘은 학생을
호기심 으로 바라보는 자식 또래의 한국 학생들 그리고
일본 및 태국 이나 유럽으로부터 중국어를 공부 하러 온 학생들...
그들 틈에 끼어 아침 일찍 등교를 하는 생활은 20여년 전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장만 간신히 받은 그에게는 낯설고 어색 하기만 한 생활 이였다.
어릴 적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면서 중학교 졸업이후 영어 단어
하나 외어 본 기억이 없는 그는 공부에 대한 방법이나 요령도 없었기에 멍하니
칠판만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계속되다가 …
어느 날부터 쓰기를 시작 하였다.
공책 한 장에 한문 한글자를 다 채우고… 다시 넘기여 다른 글자 한자를
다 채우며 한장, 한장, 써 내려 갈 때 마다. 사별한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고.
자식으로 효도 한번 못해보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
혼자 있는 딸 자식을 걱정 하였다.
뜻을 몰라도 좋았고 글씨가 거칠어도 상관없이 매일 매일 지칠 때 까지
한문 쓰기를 계속하며 지내던 어느날
댓 명의 한국 학생들이 집으로 찿아 왔다. 아저씨 ~
우리끼리 상의 한 것이 있는데요.
음… 지금 우리들 가장 큰 애로점이 식사거든요. 한국 식당을 가려면은 멀고…
또 비싸기도 하고…
학교 주변에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기숙사 에서 라면으로
해결하던 학생들이 돈을 모아 보겠으니 식당을 하면은 어떻겠냐고… 제의를 한다.
얼마씩 걷어준 돈을 들고 주방용품 과 냉장고 등을 샀으며…
재래 시장과 야채 시장을 다니면서 식 자재 비용을 알아 보았고…
스레트 지붕과 나무 판자로 대충 손님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진 식당은
일년후면 재 개발 공사가 시작될…
흙 먼지 날리는 공터 한구석의 간판도 없고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공사장
함바 집 같은 수준 이였다.
몇 푼씩 각출해준 한국 학생들은 재미있어 하며 친구들과 같이 자기집
드나 들듯이 하였고...
한국사람이 식당을 한다는 호기심과 같은 학교 학생 이라는 친근감으로 오는
일본 학생들… 그리고 같이 와주는 교수와 학교 관계자들.
골프장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주말에는 주재원 들의 자가용 이 몇 대씩
와서는 비빔국수 한 그릇 이라도 맛있게 먹고 갔으며...
측은해 보여서인지 손수 시범을 보이며 가끔씩 요리지도를 해주는 한국 엄마들
덕분에 장사는 그럭저럭 벌이가 되어서 생활비나 학비 걱정은 한숨 돌리는
가운데 … 어느덧 일년이 지났다.
그간 김치 담그는 솜씨도 수준급이 되었으며 파전을 부치는 손길이 분주
할 때에도 삼겹살을 썰거나 북어 국의 간을 맞춰 가면서…
음식의 종류에 따라서 감자의 크기를 모양새 있게 썰어 되는…
그럴듯한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낮부터 간헐적으로 쏟아 붓던 소낙비 가 이제는 본격적인 장마비로 바뀌어
주룩 주룩 이대로 밤새도록 내릴 모양이다.
3 학기나 등록을 하며 다녔던 학교의 삼십대 중반 나이인 어학당의 교수는
그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며 ‘고맙다’ 고 하였다.
무엇이 고마울까 ……
자식 같은 학생들 하고 공부를 하면서도…
시험지를 백지로 내면서도 이름 석자 하나만은 꼬박 꼬박 적어내며…
강의가 끝나고 식당일 때문에 성급하게 뛰어가는 그의 뒷 모습을 보면서…
일년 육개월의 기간 중 거르지 않고 강의실의 자리를 지켜준 그가 고마웠으리라.
다시 시간이 되면은 중급 반으로 수강신청을 해달라고 하며
두 손을 꼬옥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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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중국을 아는가 (5)
식당이 있던 공터에 공사가 시작되면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일년간 열심히 일한 덕분에 모여진 돈도 다소 있어 길 건너 허름한
건물 일층에 5개의 테이블을 놓을 수 있는…
식당의 기본 모양새 는 갖출 수 있었으며 간판도 붙여 놓았다.
어색한 태극 무늬의 도안 주변에 정통 한국요리 라고 써있는 조그마한
간판 일 지언정...
여기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더 이상 만족 스러울 수가 없었으며
종업원 도 한명 구하고 조선족 찬모 도 한명 두었다.
그간 혼자서 주방장 겸 종업원 그리고 주인 노릇을 해왔으나
다른 일 도 찿아 봐야지 계속 식당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 에서도
그렇고...
한달 전 출산을 한 사천성 출신의 중국 부인도 갓난 애 때문에 당장은
식당 일을 거들 수 없는 이유도 있어서 이다.
같은 학교 에서 영문학을 전공 하던 부인은 식당 문을 열 때부터 자주 찿아와
설겆이나 집기 정돈 등 잔일을 도와 주다가 보니 어느날 부터는…
같이 지내게 된 것이었다.
식당을 옮기기 달포 전
공터 주변에 있던 4층 건물의 주인은 허름하게 차려놓은 식당에
손님 들이 꾸역 꾸역 모이는 것을 한동안 신기 하게 보고만 있다가.
세를 놓아도 나가지도 않고 별로 활용할 방안이 없었던 자기 건물의 일층
한쪽에 양 식당을 차렸다.
조만간 공사가 시작 되면서 자연히 없어질 조그마한 한국식당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으나 길 건너로 옮기 여 간판까지 붙이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영업에 지장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무허가 업소로 고발을 한 것이다.
공상국의 위생과 직원과 같이 나온 외사과 차에 실려 갈 때는
이대로 한국으로 가야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고 아무런 결과도 없이
스쳐 만 지나가는 자신의 인생과 신세를 한탄하며 착잡한 심정으로 조사에
응하고 있을 때에...
같이 따라온 부인은 갓난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서 있었으며 부인의 전화로 도착한 어학당의 교수 두 명도 관내 공무원 과의
친분을 들춰가며 담당 직원에게 사정을 한다.
신고가 접수 되었으니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며 완강하게 버티던 외사과
직원도 이런 조그마한 일까지 나서야 하는 자기의 직분이 못 마땅 해서인지
3주내로 영업허가를 내겠다는 각서를 받고 내 보내 주었다.
신고가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 하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독한 "백주”를 컵에 따라서 벌컥~ 벌컥~
마시다 보니...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어린 부인의 눈물과 동정으로 여섯 시간 만에 풀려나온 굴욕감과 자신의
팔자에 대한 서러움... 그리고 그사이의 긴장감에 치를 떨었던 자신이 불쌍하여
짐승처럼 울어 댔다.
다음날 아침
부인은 영업허가를 접수 하려고 공상국 으로 갔고 자신은 위생 처리용
용기를 묻기 위하여 곡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 하였다.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반바지만 입은 채로 파 들어 가면서… 퍼내 가면서
기도문 외우듯 쉴새 없이 중얼거렸다. 분노 하지 말자 … 증오 하지 말자.
그 동안 내가 받은 고통은 전부가 나 자신 때문 이였는걸 …
이 업보를 내 대신 누가 짊어져 주겠는가……
추억의 저편은 끊임없이 나를 이끌고 그 속에는 희망의
번민과 따스한 웃음도 있었는데.
그 가느다란 회상들이 엮어져 있는 세월은……그리움과 같이 가는 것이지.
이름없는 들꽃과 한줄기 바람과 설령 보이지 않는 별이 된다 하여도 …
우리, 어느것 하나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 속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도 본다.
이성의 정체성과 맹목성을, 야유와 조롱을, 무너지는 가치관 들을……
모든 것 들이 갈피를 잃어 가면서 쓰러진다.
세상은 사랑과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열정과 신념도 아니면서……
나열된 단어의 앞 뒤가 바뀌었다고 진실이 아닐 수 없는데.
체념과 실망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움을 가엽게 지켜 볼 수가 없어 오늘도 간다.
이르는 길 까지,
하루가 저물 때 마다 일년을 돌아본다.
내 가느다란 믿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작업이 끝나서 삽으로 흙을 두드리고 있을 때에 그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허 허 허~ 형 씨가 운이 좋다기보다는 그간 쌓아온 경험과 노력이 결과를
갖게 된 것 이겠지요.
운도 말이지요. 노력하고 준비된 사람이 아니고는 잡지를 못하오.
아니, 그것이 와도 알지를 못 할뿐 더러 더욱이 우리 같은 외국인 에게 까지
돌아올 운 이라는 것은…… 이땅 에는 없소이다.
작성자 : 남풍 분류 기타 조회수 266 추천수 5 다운횟수 :0
누가 중국을 아는가 (6)
식당은 평온을 되 찾았으며
그전의 손님들도 꾸준한 가운데 한국 유학생들도 조금씩 늘어갔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도 그 동안의 힘들었던 생활의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인사를 하고 갔고...
해가 바뀔수록 새로 오는 학생들도 점점 많아 지면서 이곳 남방에도 조금씩
조금씩 한국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 졌다.
가죽 잡화제품 및 섬유 부 자재 와 신발 그리고 컴퓨터 부품 등……
다양한 제품에 종사하는 관련자 들이 연락이 되어서 문의가 들어왔고
조그마하게 공장을 차리고자 상의를 할 때에는 자기 일처럼 나서서 통역 과
업무처리를 같이 하였다.
공장을 만드는 데에 현지 조달될 물품을 공급해 주었고……
그러는 동안의 식사와 잠자리도 해결해야 하기에 식당 2층 까지 임대를 하게
되었으며 독방 몇 개에 침실도 들여놓다 보니 이제는 숙박 업 까지
겸하게 되었다.
한국의 회사와 거래를 하게 된 인근 중국공장에서 학교로 통역을
의뢰하게 되면은 그를 추천 해 주었고…
중국회사의 통역 신분으로 만나는 한국업체와의 상담을 할 때에도……
한국 회사의 입장에 서서 계약이 성사 되도록 노력 하면서 주위의 인맥을
굳혀 나갔다.
오 사장은 곰곰 히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의 지난날 한국에서의 생활은 적당히 짐작이 된다.
한동안 부동산 경기가 좋았을 때의 상승기류에 합류된 운이 있었고 건축업을
수년간 할 때에도 적절히 관련법규를 피해가며 마진을 챙기는 요령과
그렇게 안주 된 생활이 익숙해진 중산층의 한 모습 이였으리라.
그러나 급변된 중국 이라는 환경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주위에서 필요로
하는 자신의 가치를 가꾸어 온 것이다.
스스로의 변신을 통하여 변화가 무쌍한 주위환경에 적응하는
도태성에서 벗어난 창조가치를 만들어 온 것이며 ……
경영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 실현의 과정 까지를 혼자의 노력으로 해온 것이다.
누구나 방법은 알지만 실천을 못하는 현실에서…
아니 실천에 옮기기 에는 기본생활에 안주 하려고만 하는 요령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 하고 비한다면은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에이 ! 못난 놈들
허공을 쳐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한국 사람들 욕을 한다.
갑작스럽게 쏟아 붓는 남방지역 특유의 소나기가 내릴 때는
우산을 들고 다니며 팔았던 그였다. 가까운 공장의 재고품을 5원에 받아서
학교 앞으로 들고 가 12원에 팔았으며
시중에서 20원 상당의 제품 이라는 것을 알기에… 잠깐 사이에도 수십 개씩
팔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우산을 팔려고 오는 한국사람이……
허어 …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우산장사라도 시작 해야 우산공장 이라도 차릴 것 아니냐는 거지요.
돈 이요…… 다들 돈 벌려고 왔지요.
열심히 일해서 버는 사람들도 꽤 있소만…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 거지요.
필요한 정도만 쓰고 나머지는 보내야 하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여자들 이나
데리고 있고… 돈 몇 푼 있다고 거들 먹 거리니 문제가 발생 하는 거지요.
머리를 써서 버는 돈은 내 돈이 아니지요. 돈은 가슴으로 벌어야 하는 거요.
가슴으로 버는 돈만이 오래 오래~ 내 돈이 되며 바르게 쓰일 수 있습니다.
조용히 말이지요.
제가 처음에 이곳에 도착 했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았소. 회사에서 파견
나온 주재원 이나 그 가족들과 유학생 일부…
그리고 북방에 있다가 정리하고 내려온 사람들…
이제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우리도 조금은 성숙된 중국생활을 해야 이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지요.
이들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 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있지요.
"여기는 중국이다” 라고…
작성자 : 남풍 분류 기타 조회수 500 추천수 13 다운횟수 :0
누가 중국을 아는가 (마지막 회)
최근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올 구정연휴가 지난 2월 중순경 일요일 이였다.
따 르르릉… 오형 이요 !
내 기억으로는 아마 내가 오형 집 근방에 와 있는 것 같은데.
집이 어디시오.
식당 자리를 알아 보려고 돌아 다니다 보니까. 이 근방 까지 오게 되었다고
이사한지 일년이 넘은 집이건만 처음 오는 것이라며 세제와 음료수 몇 병을
들고 와서는...... 한국식 이라고 한다.
요사이는 어떻게 지내 십니까.
경험 없이 운영하다가 손실이 발생되던 가죽잡화 공장은 한국에서부터
동일제품의 공장을 하던 사람에게 넘겼으며 기계 값을 십만원으로 정산하여
그대로 투자해 놓은 채 지분을 받는다고 한다.
경상 이익의 20%를 받고 있는데. 아직 까지는 한 달에 만원 정도를 받고 있지만
최근 장사가 잘되어 60명 이던 공원이 100 여명으로 불어 났으니 수입도 더 늘어
날 것 이라고 하며 부 자재 구매 등… 자질구레한 업무를 도와 주고 있단다.
학교 앞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연줄이
있다 보니 세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하숙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얻어지는
수익은 월 팔천원 이다.
처음에는 얌전하게 지내던 학생들이 중국말을 조금씩
하게 되다 보니 밤늦게 돌아오는 날들이 많아져 걱정 이라고 하면서 웃는다.
흔한 교민지에 광고도 안내고 아는 사람들만 찿아 오는 곳으로 자리를 만들어
놓은 민박 집에서는 월 육천원의 수입이 생긴다.
한달 고정 수입이 이만 사천원이며 남들처럼 보내줄 곳도 없으니 생계비만
제외하고는 그대로 모으고 있단다.
하숙을 하는 변두리의 자기집은 일년 전 이십 육만원에 사놓은 것이며
공장에 투자된 십만원이 있고 민박 집 보증금도 일부 있다.
무슨 일 이든 처음 연루 된 것이 중요한가 보다.
그래도 식당 수입이 괜찮다고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중인데.
투자 금을 십 오만원 미만으로 고려 중이라고 하니 골목길 안쪽으로 중국
사람들 속에 묻혀서 조용히 장사를 할 것이다.
이제는 그도 안다. 영업허가를 내거나…안 내어도 골치 아픈 것은 마찬가지이며
허가를 안내고도 어떻게 피해 갈수 있는지를……
칠년 전 처음 이땅을 밟았을 때에 칠천원으로 시작한 사람이다.
가혹한 이곳에서 억척스럽게 잡초 같은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생활을 하며
돈을 만들어 가고 있는 그가 경이롭게 보인다.
그의 눈은 때때로 허공을 맴돌며 더듬는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 동안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고
흥청 거리며 지내온 죄이며…… 이제 그 죄 값은 다한 것 이라고…
돌아가야 한다고.....
끝 없다고 느끼던 웃음이 허공을 스쳐갈 무렵 우리는 나이를 같이 갖고간다.
대학로의 카페에서 같이 즐길수 있다고 알았던 시간들이 너희들 에게는
이방인 인것을.....
북한산 언덕길에 이르른 할아버지 웨이타 만이 어울리는지 그 까만
나비 넥타이를 기억해 본다.
그곳의 한적함은 혼자서 누리기 에는 벅차기에 외로움이 더해지지.
외로움은 더욱 외로워야 추슬러지기에 …그곳은 광화문의 뒷골목도 아니고
남대문의 포장마차도 아닌 따스한 겨울눈이 쌓인 광능의 소나무 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