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지리지의 기록
위 고구려의 초기 강역인 유주를 한서지리지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上谷郡) 秦置。莽曰朔调。属幽州。户三万六千八,口十一万七千七百六十二。县十五:沮阳,莽曰沮阴。泉上,莽曰塞泉。潘,莽曰树武。军都,温馀水东至路,南入沽。居庸,有关。雊瞀,夷舆,莽曰朔调亭。宁,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长昌。广宁,莽曰广康。涿鹿(탁록),莽曰抪陆。且居,阳乐水出东,南入沽。莽曰久居。茹,莽曰穀武。女祁,东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渔阳郡) 秦置。莽曰通路。属幽州。户六万八千八百二,口二十六万四千一百一十六。县十二:渔阳,沽水出塞外。东南至泉州入海,行七百五十里。有铁官。莽曰得渔。狐奴,莽曰举符。路,莽曰通路亭。雍奴,泉州,有盐官。莽曰泉调。平谷,安乐,BA3C奚,莽曰敦德。犷平,莽曰平犷。要阳,都尉治。莽曰要术。白檀,洫水出北蛮夷。滑盐。莽曰匡德。
(右北平郡) 秦置。莽曰北顺。属幽州。户六万六千六百八十九,口三十二万七百八十。县十六:平刚,无终,故无终子国。浭水西至雍奴入海,过郡二,行六百五十里。石成,延陵,莽曰铺武。俊靡,氵垒水南至无终东入庚。莽曰俊麻。薋,都尉治。莽曰裒睦。徐无,莽曰北顺亭。字,榆水出东。土根,白狼,莽曰伏狄。夕阳,有铁官。莽曰夕阴。昌城,莽曰淑武。骊成,大揭石山在县西南。莽曰揭石。广成,莽曰平虏。聚阳,莽曰笃睦。平明。莽曰平阳。
(辽西郡)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辽东郡) 秦置。属幽州。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玄菟郡) 武帝元封四年开。高句骊,莽曰下句骊。属幽州。户四万五千六。口二十二万一千八百四十五。县三:高句骊,辽山,辽水所出,西南至辽队入大辽水。又有南苏水,西北经塞外。上殷台,莽曰下殷。西盖马。马訾水西北入盐难水,西南至西安平入海,过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위 한서지리지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인터넷 자료로 하나하나 검색해 들어가면 고죽성이 있던 요서군 등 모든 지명은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즉 유주(幽州)는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 일대에 걸쳐있었다.“
따라서 유주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명인 (상곡군) 거용, 창평, 탁록 (우북평군) 갈석산 (요서군) 고죽성, 유성, 비여 (요동군) 안시, 요양, 서안평 (낙랑군) 패수, 수성, 대방 등의 지명도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 일대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 고죽성(孤竹城)인 포주고성이 아직도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에 유적지로 남아 있다.
| | 고죽성이 있었던 요서군의 노룡(盧龍)은 어디?
동이족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高竹國)이 있던 노룡(盧龍)은 원래 산서성 서남부 황하 굴곡 지점에 있었다. 그런 노룡을 명나라 영락제 때 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 고죽국과 관련되는 난하와 갈석산과 창려도 노룡 바로 옆 진황도시로 옮겨 버렸다.
게다가 한서지리지 유주 요서군(遼西郡)과 요동군(遼東郡) 편에 나오는 모든 지명도 모조리 하북성으로 옮겨 버린다. 그 이유는 명나라의 수도였던 북경 부근은 예로부터 한족의 강역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추적해 보면 요서군은 산서성 서남부로 추정되며, 요동군은 산서성 동남부로 추정이 된다.
따라서 산서성과 하남성에 있었던 고구려 초기 강역이 모조리 북경 이동으로 이동하게 된다. 현 황하는 당시 요수(遼水) 또는 바다(海)로 불렸으며, 고구려와 당나라, 거란과 대진국(발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요수라는 지명을 현 요녕성 요하로 옮겨 놓음으로서 북방민족인 고구려, 대진국, 거란(요)의 역사 강역이 북으로 이동되어 만주와 내몽고 일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위 결론의 기준이 되는 대표적인 것이 고죽성이 있던 노룡을 들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에 기록되어 있기를 “括地志云:“고죽고성은 노룡현 남쪽 이십리에 있다. 은나라 때 제후인 고죽국도 거기 있다.(孤竹古城在卢龙县南十二里,殷时诸侯孤竹国也.)“ 고 했으며, 据地理志에는 고죽성은 요서영지현에 있다. 군의 성은 묵태씨이다. (“孤竹城在辽西令支县,其君姓墨胎氏”)
▲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고죽고성인 포주고성은 산서성 서남부인 영제시에 있다. | | 고죽국은 동이족인 백이.숙제가 있던 나라였다. 고죽국을 중국에서는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나, 실상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그 이유는 은나라는 단군조선에서 임명하여 파견한 동이족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중국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숙제는 은나라를 멸한 주무왕의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은 청절지사(淸節志士)로, 그 고사리를 캐먹던 곳이 수양산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이 수양산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으나, 실제 수양산과 백이.숙제의 묘는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영제시 서남단 황하 굴곡 지점에 있다. 대청광여도 상에도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 고지도인 대청광여도에도 산서성 황하 굴곡 지점에 백이.숙제의 묘가 그려져 있다. |
▲ 산서성 영제시 서남단 황하 굴곡 지점에 있는 백이.숙제의 두 무덤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 어디까지 인지를 말해 주면서 말없이 누워있다. 이곳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성이 있던 고죽국이요,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 | | 그 근처를 흐르는 유수는 난하의 고명으로 중국 기록에 나와있다. 한서지리지에 “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라 기록되어 있는데, 물의 방향을 보면 산서성 운성시 중간을 관통해 서남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 현재의 속수(涑水)로 비정된다.
이렇게 산서성에 있던 ‘노룡’이란 지명은 명나라 영락제 때 현 하북성 노룡현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는 사육신의 한명인 성삼문의 시조를 봐도 알 수 있다. 성삼문은 요동으로 귀양 온 명의 음성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13번이나 요동을 방문한다. 아래는 그 과정에서 하북 노룡의 수양산을 보고 지은 시조이다.
(원문) 首陽山(수양산) 바라보며 夷齊(이제)를 恨(한)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採薇(채미)도 하낫 건가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해설) 수양산을 바라보면서, (남들이 다 절개가 굳은 선비라고 말하는) 백이와 숙제를 오히려 지조가 굳지 못하다고 꾸짖으며 한탄한다. 차라리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 먹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산에 자라는 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땅에서 났는가?
▲ 중국 경심 고속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하북 노룡이 백이.숙제의 고향이라고 중국 정부는 말하면서 20억 동아시아인들을 속이고 있는 중이다. 언제쯤 되어야 이러한 거짓말을 그만둘 수 있을지... 즉 언제쯤 되어야 철이 들지 모르겠다. |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의 가짜 수양산에 세워놓은 가짜 '백이.숙제의 고향'이라는 비석. |
▲ 이곳이 중국 정부가 조작한 가짜 수양산으로 높이 10m도 안되는 동네 야산일 뿐이다. 이곳은 시내 한복판에 있어 고사리는 커녕 개똥 밖에는 눈에 뜨지 않는다. 왼쪽 상단에 '이제고향'이라는 비석이 보이고 산 꼭대기에는 담장이 보인다. 이 동네 야산을 보고 만고의 충절 성삼문은 백에.숙제의 수양산으로 본 것 같다. 이미 수백년 전부터 역사왜곡이 시작되었다. | | | | 이 시조에서 누구의 절개가 더 곧은 지를 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성삼문이 본 수양산은 백이.숙제가 있었던 산서성의 진짜 수양산이 아니라, 명나라가 역사 조작을 위해 지명 이동을 한 현 하북성 노룡을 보고 지은 시조로 생각된다.
하북의 가짜 수양산은 고사리가 날 만한 산이 아닌 그야말로 동네 뒷산인데 그걸 진짜 수양산으로 보고 위와 같은 시조를 읊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안된다. 가보면 누구든 그 하북 수양산은 가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육신이라는 고귀한 명성에 오히려 흠집을 내는 행위였던 것이다.
▲ 요서군에 있던 고죽성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요서군은 물론 유주에 있던 지명까지 낱낱이 밝혀지고 있다. 이 지도가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 |
갈석산이 있던 창려는 어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갈석산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漢書武帝紀注》「文穎曰,碣石在遼西壘縣,故城在今河北省昌黎縣東南」, 郭璞注《水經注》「謂在臨榆南水中,蓋因壘縣後漢省入鹽榆,即文穎之說也,水經漯水注雲,碣石淪於海中」, 濡水注又雲,濡水東南至壘縣碣石山 《史記正義》「碣石,在幽州薊縣西三十五裡,」薊縣故城在今北京大興縣西。
위 한서지리지 유주 우북평군에 대갈석이 나오고, 요서군에 유수( 濡水)가 나오는데 위 사전에도 같은 지명이 나온다. 즉 똑같은 지역이란 말이다. 아래는 갈석산에 대한 설명이다.
据史书记载, 秦始皇在公元前(215年)秋东巡时登上碣石山,令人刻不容缓下“碣石门辞”,赞颂始皇统一中国的丰功。 汉武帝刘彻元年(110年),“北至碣石”登临碣石山,在山顶修建“汉武台”祈仙求神。 魏武帝曹操(207年)统兵征乌恒转道芦龙,凯旋班师经昌黎登上碣石山,留下壮丽诗篇“观沧海”。 唐太宗李世民于贞观十九年春(公元645年)率大军东征高丽时,登碣石山刻石“春日望海”以记功德。 北魏文成帝太安四年,登碣石大宴群臣百官于山下,并改碣石山为“乐游山”。 至公元前215年至公元645年前后860年间,除秦皇、汉武、魏武、太完、文成五位帝王登临碣石山外,还有秦二世、北齐文宣帝(天宝四年)也先后登上碣石山。 晋宣帝司马懿,讨伐公孙渊(公元238年)经昌黎登临碣石山,求仙思秦皇。 隋扬帝杨文东征高丽时分兵出昌黎登碣石山。九位帝王临登,使碣石山成为古今中外的历史名山。山不在高,有仙则名,帝王登碣石山与本山的神秘文化密切相关。
《资治通鉴》卷七,秦纪记述“战国后期,燕人宁毋忌,羡门子高之徒称有仙道”“形解销化之术、燕齐迁坚之士皆争传习之”。“自齐威王,宣王,燕昭王皆信其言”“使人入海求蓬莱,诸仙人及不死之蕴含在焉”,“月中仙人守毋忌,羡门子高,仙人居碣石山”。 秦始皇就是仰慕碣石山名气而登山求仙,秦始皇于二十八(前219年)派徐市“发童男女数千人入海求仙”,过了四年(公元215年)亲驾登临碣石山,勒马记功,以求长生不老,江山千秋。 由于始皇碣石求仙提高了碣石山的知名度,增加了该山的神秘色彩,随后许多帝王仿效,企盼朝拜碣石,以沾仙气,益寿延年,为己歌以咏志。
自唐代又出现了八仙的传说,碣石山又演变为八仙聚会之所,留下与八仙有关的仙踪遗迹,如“果老院”“仙台顶”等。 水岩寺曾是一香火鼎盛的古刹,现已被确定为秦皇岛市唯一的宗教活动场所,中国佛教协会副会长、河北省佛协会会长净慧法师多次莅临指导佛事活动,其弟子存海任寺院住持,使碣石山的佛教文化得以弘扬。
碣石山前有一湖,因山而得名“碣阳湖”,相传这正是秦始皇东临碣石,镌刻“碣石门辞”的地方,也是北魏文成帝“大宴群臣”的地方。 五峰山上座落有纪念百人文宗韩愈“韩文公祠”。韩愈,字退之,中外闻我的文学家、哲学家、古文运动领袖,祖籍河北昌黎,宁代追封为昌黎伯,故又称韩昌黎。
中国共产党革命先驱李大钊同志,曾多次到此游览客居著书立说,在这里创作了《我的马克思主义观》、《再论问题与主义》等革命战斗檄文,现已被定为省级爱国主义教育基地。 毛泽东的一首“往事越千年,魏武挥鞭,东临碣石有遗篇”使得“碣石”这一古代名山更另声名显赫。
간단히 설명하자면, 갈석산에는 진시황, 한무제 유철, 위무제 조조, 당태종 이세민 등 중국 역대 9인의 황제가 등정한 명산으로, 특히 진시황이 구선(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을 떠나 보낸 곳이란 설명이다.
▲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다는 갈석산은 해발 695m의 평범한 산이다. 이것도 중국의 지명조작이다. |
▲ 가짜 갈석산에 새겨 놓은 위무제 조조의 시 '관창해(觀滄海)' | |
▲ 겨우 해발 695m짜리가 천고신악인가? 여기서 바다를 볼 수 있다고? 9 황제가 여기에 등림했다고? 아직도 중국 정부는 이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산서성 남부에서 연개소문에게 깨져 돌아 갔는데 어떻게 이세민이 이 산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 | | 위 지명을 추적해 보면 갈석은 두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현 운성시 영제시(노룡) 근처의 중조산이란 것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는 하남성 평정산시 서쪽 석인산(石人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창려는 산서성 운성시나 하남성 평정산시에서 찾아야 마땅한 것이다.
영락궁(永樂宮)은 누구를 위한 건축물인가?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에 영락궁(永樂宮)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축물은 최초 예성현 서남쪽 황하변 영락진(永樂鎭)에 있었던 것을 현재 예성현으로 옮긴 것이다. 중국 측은 이 건물이 원나라 때 세워진 도교 사원으로 명 영락제와의 관련을 말하고 있으나, 명나라 영락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永乐宫始建于元代,,施工期前后共110多年,才建成了这个规格宏大的道教宫殿式建筑群)
영락진은 한나라 때는 포판현(蒲坂縣), 당나라 때 영락현(永樂縣)이라고 한다. 이후 북송 때 현재의 지명으로 아직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원나라 때 영락궁을 처음 세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해 놓고, 영락현이란 이름은 당나라 때의 것이고 북송 때 현재의 지명이라는 등 앞.뒤가 전혀 안맞는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은 뭔가를 속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 영락진이란 지명과 영락궁이란 건축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광개토태왕의 것으로 확정 지울 수는 없으나, 아마 광개토태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당나라 때 영락현이란 지명이 생겨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산서성 영락진 출신인 당나라 때 사람인 여씨(呂氏)의 시조를 묘시는 곳으로 위장을 해놓은 듯 보이며, 동서남북 네 방향 중 유일하게 현신(玄神:북쪽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묘도 산서성 영락진 뒷산인 구봉산(九峰山)에 있다. 여하튼 깊이 연구해봐야 할 건축물이다.
▲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에 있는 영락궁 현판. 이 영락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궁일까? 명나라 영락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이 궁은 혹 광개토태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
▲ 원래 영락진이란 곳에 있던 건축물을 예성현으로 옮겨 왔다. 원래의 영락궁을 그린 그림이다. |
▲ 영락궁 안에 있는 여조묘. 즉 중국 여씨의 시조묘로 위장이 되어 있어, 영락궁이 분명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사당일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혹시 광개토태왕 아니면 연개소문이 아닐까? | | | | 결론은 중국에 의한 지명조작이었다.
중국은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에 있던 노룡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옮기면서 그 근처에 있던, 유수(난하)와 갈석산과 창려도 같이 옮긴 것이다. 즉 산서성 남부에 있던 모든 고대 지명을 하북성으로 옮김으로서 고대 동이족의 강역은 산해관 이동이라는 역사왜곡을 자행했던 것이다.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왜곡은 수백 년을 내려오다 중화민국이 탄생하면서 일제와 합세하여 우리(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했으며, 현재에도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이런 역사왜곡을 자행함으로서 동아시아 인류사에 엄청난 죄를 지었다. 그리고도 그 잘못을 느끼지 못하고 또 다시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 사업을 진행하여였다. 이것 역시 동아시아의 20억 인구의 역사에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다.
역사란 있었던 사실 그대로 기록이 되었을 때 그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왜곡되고 조작된 역사는 창작소설일 뿐 역사적 사료로의 가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중국은 산서성 황하 굴곡 지점에 있던 수양산을 현 하북성 노룡현으로 옮긴다. 이것을 일제가 다시 한반도로 옮긴다. 우리 역사 강역은 이렇게 축소되었는데도 아직도 국사교과서는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을 추종하고 있다. 중국보다도 못한 한국의 식민사학계여!!! | | 다음 주에 "(3부) 광개태왕 비문의 염수와 토곡은 어디? "가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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