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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2
마 23:27-39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27-39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아름답게 장식한 무덤 같아서 겉은 좋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위선과 죄가 가득 차 있다. 29) 화가 있으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너희 조상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인들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놓고는 30) `우리는 조상들이 저지른 행동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31)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들을 죽인 악한 자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32) 그리고 너희는 그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밟아 가고 그들의 악을 다 채우고 있다. 33)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형벌을 피하겠느냐? 34)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교사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 중 몇은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몇은 회당에서 벗겨 놓고 매질하며, 이 동네 저 동네로 잡으러 다닐 것이다. 35) 그래서 마침내 의로운 사람 아벨의 피부터 성전의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신앙인들의 피값이 너희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36)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지나간 세대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이 이 세대에 내려질 것이다. 37) [예루살렘아!;눅13:34-35]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38)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3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환영할 준비가 될 때까지 너희가 결코 나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같은 부패한 내면을 지닌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맡은 자들인데 오히려 구원역사를 대적하는 자들이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27-28) 본 단락에서 예수님이 언급한 회칠한 무덤은 당시 들판이나 길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길가 무덤에 회를 칠하는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월절 순례자들이 지나가며 쉽게 무덤을 식별하고 피해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깨끗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 같다고 질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29-36)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옛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미면서 말하기를 “만약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이 선지자들의 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떠들어 댄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스스로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너희는 조상들의 악행의 분량을 마저 채울 것이라 합니다. 그들이 분량을 채우는 악행은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도들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일 것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부터 시작하여 너희가 죽인 사가랴의 피까지 그 흘린 의로운 피, 순교자의 죽음의 피의 대가가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고 하십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37-39) 창조주이자 심판주이신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셔서 자녀들을 모으려 수없이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거절했다고 탄식하십니다. 결국 그 도성이 철저히 황폐되고 버려질 것을 선고합니다. 즉 그 땅의 사람들이 죽고 흩어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를 잃고 오랫동안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전히 회개하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양 할 때까지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적용: 주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엄히 책망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만약 주님께서 당신에게 그러한 책망을 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게임에서는 형편없이 지고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게임에서는 승리하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부족하고 형편없어도 이미 승리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면 출산의 때는 반드시 다가옵니다. 승리는 예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업 기간이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실지 잘 몰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결국 승리는 나의 것이 됩니다.
< 설 교 >
삶의 이중성을 극복하자
마 23:25-28 / 이종철 목사
여행을 하다보면 소위 환상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사진이나 자기 머릿속에 그리던 것과는 전혀 다를 때입니다. 머릿속에서는 거대하고 웅장할 것을 기대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해 보이는 곳도 있고, 반대로 실제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이는 제가 성지 순례를 하면서 느꼈던 바입니다. 1948년도에 사해 주변에서 쿰란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구약 사본의 원본이라고 해보았자 AD 1000년경의 레닌그라드 사본이 최고인데 그보다 무려 1천 년을 앞선 예수님 시대의 구약 성경 사본들이 발견되었기에 성서학계를 흥분시킨 세기의 발견이었습니다. 이 쿰란 사본은 쿰란 동굴이라는 곳에서 한 목동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쿰란 동굴을 찍은 전형적인 사진이 있는데 마치 거대한 산 중턱에 있는 동굴처럼 보입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인상이 지어졌고 성지 순례를 하면서 그런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갔다가 그 초라한 모습을 보고 매우 실망했습니다. 쿰란 동굴은 평지에서 약간 꺼진 낮은 구릉지에 있는 작은 동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이 일으킨 착각이었습니다. 하도 실망해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실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행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람을 보면서도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의외의 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평상시 보던 모습과는 다른 면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밖에서는 사람들에게 호인처럼 보이는데 가정에서는 폭군인 사람도 있습니다. 선량해 보이던 사람이 실은 강도요 살인마일 경우도 있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이 갑작스런 자살로 충격을 주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즐겨 있었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라는 작품은 낮에는 존경받는 박사요 보이지 않는 밤에는 야수로 변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화있을진저
오늘 읽은 말씀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들을 특징짓는 단어는 외식입니다.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는데 실상 속은 더럽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무려 7번에 걸쳐 “화있을진저” 하며 그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들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책망합니다. 마치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합니다. 무덤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한데 겉에 회를 칠해 놓으면 깨끗해 보이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화장을 하고 온갖 명품을 두르고 멋진 타이틀로 포장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탐욕과 방탕함과 두려움과 불안들이 숨겨 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아름다운 것으로 감추려 하지만 속에 있는 것은 언제든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주로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그 속에 있는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경건한 척 환상을 심었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이런 영광을 즐겼습니다. 구제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구제를 자주 했습니다. 구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제가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구제였습니다. 산상설교에서는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6:2)고 말씀합니다. 구제의 목적이 이웃 사랑이 아니라 실은 그것을 통해서 얻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었습니다. 유대 랍비들 또한 이런 외식적인 구제에 대해서 경고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최고로 인정하는 구제는 도움 받는 사람 모르게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은밀한 구제를 행하는 사람은 모세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받는 사람도 자존심 상하지 않고 주는 사람 또한 자기 영광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도 기도의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입니다. 나 이만큼 경건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그의 경건을 칭찬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이 마음은 안에만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그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철저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 속에 온갖 폭력과 살인과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율법의 더 중요한 바 긍휼과 자비보다는 자기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식적인 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경건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이들의 이런 외식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을 때 병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그 사실에는 감동이 없고 안식일 계명을 범한 것에 대해서만 분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안식일 율법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간음한 여인의 실패를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음모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고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처럼 때로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매우 노골적인 폭력성과 탐욕으로 분출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16절 이하에서는 그들의 노골적인 탐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이 성전이나 제단에 두고 맹세하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성전의 금이나 예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보다 물질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하는 맹세는 물질적인 이익이 없지만 성전의 금이나 예물을 걸고 맹세하는 것은 물질적인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23절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에 대한 열심히 대단해서 박하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박하와 근채와 회향은 아주 사소한 나물들을 말하는데 이런 작은 것조차도 엄밀하게 십일조 계산해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율법의 더 중요한 바 의와 인과 신, 곧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버렸습니다. 24절에서는 하루살이는 거르고 낙타는 삼킨다고 말씀합니다. 실제 유대인들은 작은 생물들 중에서도 부정한 것이 있을까 하여 포도주나 음료를 마실 때 걸러서 마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에는 철저함을 기하면서도 정의와 자비와 믿음 같은 더 중요한 것은 무시하였습니다. 실상 그들의 마음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광과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것은 악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목회자의 이중성
바리새인을 비판했지만 이중성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 중에 설교자나 목회자만한 존재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설교 강단에서 온갖 아름다운 말과 경건한 말들을 토해냅니다. 설교 단상에서 선포하는 제 말들만 본다면 저는 마치 천사나 성자를 방불케 합니다. 그러나 설교 단상에서 내려와서는 제 삶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는 설교고 삶은 삶이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성도들은 주로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들만 듣기 때문에 목회자에 대한 환상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목회자 또한 넘어지기 쉽고 유혹에 약한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이런 괴리를 인식하고 고민하고 있다면 그래도 건강한 목회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중생활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최근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회자의 성추문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이 분은 탁월한 설교적 재능과 성공적인 청년 목회로 한국교회의 차세대 지도자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석상에서는 청년들의 순결과 성결을 그렇게 강조해 놓고는 본인은 자신의 침실에서 온갖 추악한 일을 다 하였습니다. 일반 성추행 정도를 넘어서는 매우 심한 것이었고 그것도 오랜 동안 지속된 고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아픔을 당하였고 이 때문에 교회나 전체 한국교회가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보면 목회자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피해자에게 권위를 행사했으며, 피해자들 또한 그 목회자의 권위 때문에 항거하거나 책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경악해 하고 잇습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사실이 드러났지만 본인이 진정한 사과와 회개를 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물러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이전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잘못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스스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새로 개척한 교회로 기존 교회의 성도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정의나 거룩함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추앙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지지해 주니 당사자는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와 반면에 유사한 잘못을 범했지만 정상적인 치유의 과정을 거쳤던 미국의 고든 맥도날드의 경우는 귀감이 됩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목사이며, 미국 기독학생회(IVF) 총재를 역임했던 분입니다. 그런 그가 그의 여비서와 간음을 행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는 이 잘못에 대해서 그가 담임하던 미국 그레이스 채플 예배 시간에 공개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후 그를 아끼던 빌 하이벨스, 찰스 스윈돌을 비롯한 목회자들이 그를 도와 치료와 회개의 과정을 3년 동안 진행하였습니다. 회복을 확인한 후에는 회복식을 열어주었으며, 그 교회는 맥도날드 목사를 다시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하였습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이 과정에서 영적으로 더 성숙해졌고 나중에는 성추문에 휩싸였던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을 상담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상처는 고통이지만 잘 극복한다면 내면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소하고 이를 계기로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자기가 받았던 상처를 가지고 다른 동일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면하고 감추려하면 고칠 수도 없고 거기서 이중성이 고착화됩니다.
이중성의 극복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이중적인 인간이 되게 합니다. 옛날 농촌 사회 같으면 그 사람의 위인 됨은 그대로 다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우리 가정과 직장, 가정 안과 밖의 사회생활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난 나와 가정에서 드러나는 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밖에서는 호인이지만 가정에서는 어떤 폭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중 생활에 익숙해지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중적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TV 등 영상 문화가 발달된 사회에서는 이런 괴리가 더 심합니다. 그 사람 속에서 무슨 고민이 있고, 열등감이 있고, 어떤 악마적 성격이 있는지 모른 채 겉모습만 보면서 환호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정작 본인은 심한 우울증과 허탈감과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데 마치 강하고 완벽한 사람처럼 착각을 합니다. 본인의 진심은 알려지지 않은 채 무고하게 정도 이상의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이틀이나 허상을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가 연약한 인간이고 사랑받기 원하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허상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이중적이 되는 이유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인이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 괴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우리가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신 낯선 의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이 다 드러나고 그런 비참함을 깨달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은 헛된 자기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그대로 고백하십시오. 자기는 부족한 데 사람들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실제 나’와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 사이에 간격이 일어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타이틀이나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자기 모습이나 자기 기대는 버리십시오. 이런 허상들이 우리를 이중적인 인간들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을 대변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강단에서 내려오면 그도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성도들도 목회자도 연약한 인간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 연약함을 자랑하십시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화려한 말 재주가 없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10:10) 또한 몸에 가시라고 하여 아마 몸에서 간질병과 같은 어떤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실제 갈라디아에서는 복음을 전할 때 병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4:13-14)
사도 바울은 이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세 번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고쳐주시지 않고 대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사도 바울은 자기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사도로서의 능력이나 체면보다 자기 부족한 것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사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나는 대단하고 여기에 맞는 무언가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강점은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는 데 있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고 난 후 그 남편 우리아도 살인 교사를 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알고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런 책망을 받았을 때 다윗은 이를 묵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그것도 통일제국을 이룬 강성한 왕입니다. 고대 역사에 보면 왕들이 자기에 마음에 드는 여자를 취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자기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나단 선지자를 죽일 수도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에 이런 일은 흔치 않습니까?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은 자기의 잘못을 어떻게든 입막음하려고 들지 않습니까? 이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나단의 지적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달게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이중적인 인간이 되는 기로에서 그는 하나님을 택했고 양심을 택했습니다. 이는 나는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은데 이렇게 높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철저한 은혜의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자기의 타이틀이나 권위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이런 태도가 가능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강요합니다. 이런 위선적인 삶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고칠 수도 없고, 자기답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눈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려 합니까? 자기의 잘못은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 자기의 연약함을 위장하지 않는 것, 자기 좋아 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행복하게 합니다. 또 자기다울 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를 충분히 발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의인이 흘린 피의 대가
마 23:29-36 / 박덕기 목사
마 23장은 누구보다도 설교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토록 책망하셨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살펴볼 때에, 마 23장의 말씀은 오늘날 저를 포함한 이 시대의 목사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질타하신 음성처럼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날카롭고 단호하게 책망하신 말씀은
1)언행의 불일치였습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가리켜, 표리부동한 자 또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표리부동하고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질타를 당하는 것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외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제할 때나, 기도할 때나, 금식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으시는 하나님 중심해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3)명예욕과 교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서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행태이기도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오늘날 이 땅의 교계를 돌아보신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훨씬 더 통렬하게 책망하실 것 같습니다.
4)천국 문을 가로막는 악행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선포 받은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자리’인 율법 선생의 지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까지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5)가치관의 오도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가르치기를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고 했고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6)율법의 근본정신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의(義)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89:14절에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의를 바라고 정의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불의가 판을 칩니까? 이 불의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의롭게 살아갑니까? 주님께서 율법의 중요한 근본정신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하나는 긍휼 곧 인(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불쌍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보고서, 그들을 향하여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긍휼 곧 자비를 바라시는 것 역시, 하나님 자신이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들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한 가지 주님께서 율법의 근본정신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신(信) 곧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 곧 신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확신이나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상은 또 얼마나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이 세상의 불신은 거의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뿌리가 깊고, 이러한 불신은 성도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7)도덕적인 타락을 가볍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윌리암스는 “주님은 아주 사소한 의식상의 더러움을 피하고자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저들의 모순성을 지적하신다.”고 정확하게 잘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책망 속에서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의 윤리에 대해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술과 담배 문제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처럼 술. 담배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이보다 더 큰 거짓과 사기, 뇌물과 부패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살이도 걸러내고 반드시 약대도 걸러내야 합니다.
8)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을 닮았다는 것은, 그들의 외적 행위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들의 실상 즉 도덕적. 영적 상태는 썩어 냄새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나는 세 개의 ‘나’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이 보는 ‘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보는 ‘나’는 대개의 경우 관대합니다. 자기 합리를 잘 시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외식과 위선으로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보시는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는 정확합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부르짖었던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라고, 그리해서 우리의 안과 겉이 성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하여 밟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9-30절에 “회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데 열심히 남달라 성전의 헌금 일부를 선지자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데 사용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이렇게 선지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면서, 자기들의 경건함을 과시하는 동시에, 의인과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자기들은 다르다는 은근한 자기 우월감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과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을 탓하며, 자기들만큼은 다르다고 말한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의인중의 의인이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악하기 그지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 때에 살았더라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의롭고 경건한 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증명함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조상들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의로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며, 조상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려 하였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이스라엘의 선지자라 할 수 있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메시아이자 최대의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죽이려함으로써, 그들 조상의 행위를 답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그들 조상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임을, 그리고 그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채우라’는 표현은 원래 ‘말이나 저울의 부족한 양을 채우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는 좋은 의미에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너희 조상들이 죄의 잔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사악한 일을 너희가 충만히 채우기까지 계속하라”는 냉소적인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전 11:절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눈에 보는 대로 행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대로 청년들이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눈에 보는 대로 살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계속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러니까 청년들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마음에 원하는 길과 눈에 보는 대로 살 수는 있지만, 만일 그렇게 살았다가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이 있을 줄 알아서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는 말씀은, 조상들이 다 행하지 못하고 남겨둔 악행을 가득 채워 완성하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그러지 말라는 말씀이고, 그리하면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뱀과 독사는 사탄의 상징으로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동물이었습니다. 따라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모욕적이고도 심한 욕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현은 장차 마귀가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될 운명인 것처럼, 그들도 지옥 심판을 당할 운명적 존재라는 사실을 경고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이 당할 세상의 핍박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 대해 세상은 무자비한 핍박을 가해 왔습니다. 그들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고, 야고보의 목을 베었으며, 베드로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외에도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를 당했으며, 요한도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얼마나 많은 핍박이 성도들에게 가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신앙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 평안과 칭찬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도리어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 하셨으며, 그 말씀대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상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피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핍박이 올 때 그것을 성도가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생각하며 인내로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당시에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이겨낸 성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도록 해 주는 방편이 될 것입니다.
35절에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고 죽이는 천인공노할 살인 사건이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알량한 휴머니스트들은, 흉악범 살인범들의 사형을 반대합니다. 아무리 사람을 죽인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그의 인권은 존엄하기 때문에 사형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형이 인간 존엄성을 침해한다며 2008년 위헌소송을 낸 사람은 전남 보성에서 젊은이 4명을 연쇄 살해한 어부 오종근(74세)입니다. 오종근은 2007년 8월 바닷가에 놀러온 19세 대학생 커플을 자신의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간 뒤 남자를 물에 빠뜨려 숨지게 했습니다. 여대생을 성추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는 여대생마저 바다로 내던졌습니다. 그는 3주 뒤 같은 방법으로 20대 여성 2명을 더 살해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고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2심도중 사형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판단을 요청하였습니다. 사형이 확정돼 수감 중인 사형수는 현재 60명(군인 사형수 2명 포함). 이들이 살해한 피해자는 모두 207명으로 사형수 한 명에게 평균 3.5명이 희생됐다. 여러 명의 생명을 빼앗아놓고 자신의 인권은 존중해 달라고 요구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형의 합헌성이 두 차례 확인됐지만 사형은 1997년 이후 15년간 집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형수 60명을 살려두기 위해 한 해 13억2000만 원가량의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뭔가 우리 사회가 대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보다 더 자비하고 사랑이 많은 척하는 위선자들은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면서 사형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피는 강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후 즉시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가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가인을 향하여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계 6:9절에 보면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그때에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의인들의 흘린 피는 반드시 보상을 받고 갚음을 받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도 반드시 심판의 형벌을 받을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과, 보혈의 공로를 거부하고 주님의 피를 욕되게 한 자들이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중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들에게는, 또 다른 놀라운 대가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는 사죄의 축복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지성소 곧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놀라운 권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의인 중의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지성소 곧 천국에 들어가고, 그 곳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지자를 죽인 자들
마 23:39 / 이정선 목사
인류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선지자를 잡아 죽인 역사였습니다. 선지자를 좀 더 광범위하게 해석하면 선각자, 선구자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선구자나 선각자의 삶은 외롭고 고단합니다. 그들은 대중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버림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지금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라서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400년 전에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지동설을 철회한 후에도 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 연금을 당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시력을 잃고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노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갈릴레이가 죽은 지 350년이 지난 1992년에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갈릴레이에게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로마 교황청에서는 천문학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날 누군가가 고흐의 그림 한 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백만장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흐가 900여 점의 작품을 남기는 동안 아무도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의 작품들은 빛을 보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화가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살았을 때는 오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추앙을 받는 것, 어쩌면 이것이 선지자들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그들의 행태를 비판하십니다. 선지자와 의인은 같은 사람, 또는 동일한 카테고리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직 죽은 다음에야 그들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들이었고 의인들이었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무덤을 거창하게 만들고 비석을 세워 기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후대에 와서나마 올바로 평가받고 인정을 받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조상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운 후에, 이스라엘의 비행기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공항의 직원들이 나가서 일렬로 정렬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는 유대인들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자기 조상들이 잔혹하게 유대인들을 핍박했던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요.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도 자기 조상들이 선지자 죽인 과오를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조상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들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상들의 잘못과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는 차별화 전략입니다.
오늘날 고흐의 그림을 수억 달러에 사들이는 사람들이 ‘내가 고흐의 생전에 살았더라면 그의 그림들을 다 샀을 텐데. 그 당시 사람들은 왜 그림 보는 안목이 없었을까?’ 이렇게 말한다면 누가 공감하겠습니까? 어쩌면 자기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화가의 그림에 더 높은 가격이 매겨지도록 하기 위해 고흐 같은 무명작가의 그림을 더 깔아뭉개고 매장시키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한국사람 100명에게 ‘당신이 일제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일본 순사의 앞잡이가 되었겠습니까, 아니면 독립군이 되었겠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100명 모두가 독립군이 되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군의 수만큼 일본 순사의 앞잡이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조상들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통회하는 사람은 조상들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조상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큽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조상들의 죄를 책임질 생각은 전혀 없고 비난만 하고 있습니다. 조상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겠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행위일 뿐입니다. 나와 조상들의 관계는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가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잘못했으면 내가 그 잘못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조상들이 잘했으면 내가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우리는 신분을 하는 일과 동일시합니다. 신분이 뭐냐고 물으면, 학생이다, 목사다, 또는 주부다, 이렇게 대답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유대인 사회에서 신분이 뭐냐고 물으면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의 신분은 누구의 아들인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람을 소개할 때 누구의 아들 아무개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 아밋대의 아들 요나, 기스의 아들 사울, 이새의 아들 다윗, 이런 식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후손이라는 것이 자기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만일 조상들의 잘못을 뼈저리게 슬퍼하며 통회한다면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런 조상의 후손들이니까 무조건 비난 받아야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은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속은 더럽고 악하면서 겉으로는 선하고 깨끗한 것처럼 꾸미는 자들이라는 말씀이지요. 즉 이들은 조상들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은 그렇지 않을 것처럼 말을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악하게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죽인 조상들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외식의 절정입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이 말은 이들도 조상들이 하던 것처럼 선지자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분량을 채운다는 것은 조상들이 했던 악을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그릇에 물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한 방울만 더 넣어도 물은 넘치게 됩니다. 분량을 채운다는 것은 그 마지막 한 방울을 더한다는 뜻입니다. 그 한 방울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완성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영광이겠지만, 악한 일을 완성하는 역할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주어진 거예요.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 의인들을 핍박하는 일이 이들에게 와서 완성됩니다. 넘치게 돼요.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메시야를 죽이는 일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기서 메시야로 오신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손에 잡혀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겉으로는 매우 경건하고 하나님께 충실한 것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악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칭호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기 쉬운 저속한 욕설이 아닙니다. 그냥 모욕을 주기 위한 욕설이라면 뱀보다 돼지라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뱀은 마귀를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꾀어 범죄하게 한 것이 뱀이었습니다. 그래서 뱀은 여자와 원수가 되었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투쟁의 관계가 생겨났습니다(창 3:15).
바로 그 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예수님을 비난하고 방해하면서 그의 메시야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탄과 싸우셔야 했습니다. 인간이 사탄의 수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 역시 무방비 상태로 인간을 내어줄 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고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씁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메시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사탄 역시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방해공작을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율법에 충실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사실은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 그 속에는 악독이 가득하고, 메시야를 죽여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는데 우리 편의 핵심 전력이라고 자처하는 부대가 사실은 적군에게 포섭되어 아군을 공격하는 꼴입니다. 결국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한 하나님의 적인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이니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래서 그들이 마귀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이렇게 그들을 칭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아따, 예수님도 욕을 엄청 잘하셨구나. 성질나면 나도 그 정도까지는 해도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하겠지요.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악한 행위를 답습하고 반복하는 그들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예수님과 그의 보내신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과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고, 베드로와 안드레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바울은 채찍질을 당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쫓겨 다니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죽이는 그들의 악행의 절정은 메시야를 죽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그 세대에 돌아가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을 죽이는 조상의 분량을 이 세대가 채우는 것처럼, 그에 대한 모든 책임도 이 세대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여 온 것은 이 세대가 메시야를 죽이기 위한 준비 작업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땅 위에서 흘린 모든 의로운 피는 아벨의 피로부터 바랴가의 아들 사가랴의 피로 정리됩니다. 아벨은 최초로 살해당한 사람입니다. 그가 살해당한 이유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임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피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10).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 당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는 정확히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는 선지자 스가랴인데(슥 1:1), 이 스가랴가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4장에 보면 스가랴가 성전 뜰 안에서 살해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에 우상숭배가 만연하게 되었을 때에 여호와의 영이 스가랴에게 임하셔서 백성들을 책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대하 24:20-21). 그런데 이 스가랴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
선지자 스가랴 역시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메시지를 선포했기 때문에 살해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스가랴의 아버지 이름이 바라갸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름을 둘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호야다에게 바라갸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여호야다가 스가랴의 할아버지이고 그에게 바라갸라는 아들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손자를 아들로 표현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특히 히브리 성경에서는 역대하가 마지막 책이기 때문에,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살해당한 아벨과 마지막 책인 역대하에서 살해당한 스가랴를 언급하심으로써 그 동안 죽임 당한 모든 선지자들을 통칭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선지자들을 죽인 죗값이 그 세대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야를 죽인 세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저주입니까?
선지자를 죽이고 의인을 핍박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선지자를 죽이고 의인을 핍박하는 일입니다. 실수로라도 그런 일에 연루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임 당한 선지자들, 억울하게 핍박을 당한 의인들을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부르짖는 의로운 핏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주님 때문에 핍박을 당한다 해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독사의 새끼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던 주님과 같은 경험을 하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세계 곳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고난을 당하는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루살렘과 예수
마 23:29-39 / 이필재 목사
오늘은 삼일절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킵니다. 국가에 대한 신앙적 미를 새롭게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요즈음 남북 적십자 회담이 대화가 잘 되어 희망의 불빛을 가지게 되는데, 남측 수석대표가 우리 갈보리교회 장석준 집사님이라서 더욱 기도를 많이 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가 삼일절을 기념 주일로 선정하여 지켜 내려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국가관을 재정립하는 아름다운 의미입니다. 오늘 이 어두웠던 역사의 조명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랑에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국가관에 대해서는 세계 모든 교회들이 공통으로 정하고 있는 신조가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소속한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에 복종할 의무를 가집니다. 지상에 주어진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그림자로 지상 국가를 주셨으며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서 어떤 특정인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상국가의 법과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국가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아래 존재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지상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존립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유지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도와줘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장발전에 국가가 협조하여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촉진시키는 일에 국가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지상에 있는 어떤 권세가 이러한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이나 만민의 구원 사역을 부인하고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경우 교회는 성경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거기에 대하여 항거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국적을 소유합니다. 지상국가의 국적과 하나님 나라 국적입니다. 두 국적의 관계는 배타적이거나 적대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협조적 관계입니다. 만약 지상의 권세가 핍박을 가해서 나더러 이 둘 중에 하나만을 소유하라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했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의 국적을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나라 시민권만을 지킴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모든 핍박은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불의의 세력에 어떤 침략을 당할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때 전쟁을 피하거나 참가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으로 간주합니다. 그 다음에, 특수 경우로 우리 대한민국과 같은 분단국가일 경우는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 평화적 통일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개인과 국가가 원수 같은 적대관계를 가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 신조에서 비추어 볼 때 이 3·1운동은 하나님의 뜻이며, 민족의 슬기요, 순교자적인 민족혼의 부활사건으로 한국 교회가 영원히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애국정신이 표현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영적인 관계에서 이 사건을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은 두 가지로 애착과 배신감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애착 부분은 “나는 예루살렘을 암탉이 병아리를 모음 같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과 동물의 공통점은 모성애입니다. 이 부분은 피차 생명을 걸고 투쟁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대해 그러한 애착을 가지셨다고 나타나는데, 배신 부분은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획은 예루살렘을 인류 구원의 중심지로 정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가장 열심히 추진해 주고 협력해야 될 사람들이 정반대로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고 바로 그 곳에서 죽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의분이 나셨으면 오늘 말씀 “화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33절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에나 들어가라!” 이런 저주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 이후에도 바울을 통한 세계 선교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안디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통탄스러운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선택을 받은 예루살렘이 어찌 반대로 선지자나 죽이고 돌로 치는 마귀 역할의 주역의 장소가 되었느냐?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애착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복음화 작업의 첫 번째 지역을 예루살렘으로 말씀하셨는가 하면, 사도행전 1장 4절에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여기서 기다리라.” 예루살렘에 대한 애착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 아주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세계 복음화의 센터로 예루살렘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약 시대부터 큰 의미를 지니고 전해 내려온 장소입니다. 첫째 개념은 왕적인 개념입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는 영적 의미의 도시가 예루살렘으로 구약에 나타났습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모두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였습니다. 다윗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역대하 6장 6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에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시편 122편에 보면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앞에 섰도다.” 예루살렘은 얼마나 거룩한지 “내 발이 예루살렘 땅을 밟은 것만 해도 감격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인데 제가 일본에 처음 갔을 때 나를 태우고 가시던 목사님이 별안간 길가에다 차를 세우고 내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요?” “아, 여기서 뭐 할게 있습니다.” 내렸더니 자기는 안 내리고 “열 발자국만 여기서 걸으세요.” 시키시는 겁니다. “아니,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그래서 열 발자국 걸었더니 “이제 도로 타세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목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땅을 열 발자국 밟아본 겁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성지순례 팀이 이번에도 다 돌아보고 어제 모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처음 갔을 때 주님이 밟아본 땅을 내가 밟아본다는 감격에 겨워 비행기가 내려 그 땅을 바라보는 순간 내 일평생 생명을 다해 섬기는 주님이 바로 이곳에 계셨다는 감격이 북받쳐 올라 비행기에 내려 땅에 입 맞추는 것을 딱 한번 해봤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런 의미입니다. 하늘나라에 돌아가는 기분이 납니다. 제 일행 중에 어떤 사람은 갈릴리 바다에 가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서 하는 말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좀이여 물러가라!” 그러면서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예루살렘 같도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너는 예루살렘같이 예쁘냐?”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 지로다.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너는 영원히 빛나라.” 유대 사람들이 사용하는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이 이 지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 10개를 만들어놓으셨는데 그 중에 9개가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 아름다움이란 건물이나 경치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 의미입니다. 하늘나라도 예루살렘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많습니다. “♬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받아쓰리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그러한 영적 의미의 하늘나라 그림자인 예루살렘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구원의 중심지로 삼아 인류 구원의 빛을 발해야 된다고 그렇게 정하셨는데 그 당시 형편은 정반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로마를 종주국으로 하는 식민 통치의 노예가 되어 있음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애국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번 토리노 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안현수, 이호석 두 선수가 나란히 금메달, 은메달을 딴 것이 정말 통쾌하지 않았습니까? 왜 통쾌합니까? 옛날에 김동성 선수가 일등하고도 오노 선수의 할리우드 액션 때문에 실격 당해 태극기를 힘없이 떨어뜨린 것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때 미국에 있는 교포들은 미국의 올림픽 위원회에다 얼마나 이메일을 많이 쏟아 부었는지 모르는데, 더 의미 있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훨씬 더 항의를 많이 했습니다. “비록 미국 선수이지만, 할리우드 액션은 올림픽 정신이 아니다! 그 금메달 치사하다! 한국 김동성 선수에게 주어야 한다.” 미국 사람들이 더 흥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선수들이 그 오노를 물리치고 금메달, 은메달을 따니까 속이 다 후련합니다. 그러면 금메달, 은메달 하나를 놓고도 민족 감정이 발동을 하는데 지금 히브리 민족은 어떻겠습니까?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되어진 하늘의 도성 예루살렘을 빌라도라는 사람이 와서 통치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나라의 헤롯왕이라고 앉아있는 꼭두각시는 로마의 앞잡이로 절대 권력과 야합을 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죽지 못해 사는 죄수들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구도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왕의 권위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불의를 들고 나왔다가 단칼에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세상이 바뀌어서 언어문화도 헬라어로 모두 바뀌었습니다. 1910년 우리나라도 별안간 일본어 할 줄 알아야 사람 같이 보이는 역사를 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신약 성경의 원어는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되면 국민의 생각이 바뀝니다. 약삭빠른 민족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 문제는 지금까지도 문제가 됩니다. 신사참배 하는 파와 안하는 파가 서로 저주하면서 바라보던 것처럼 유대 나라도 바리새파, 사두개파로 갈린 것이 똑같습니다. 이 사두개파 사람들은 현실에 적응파입니다. 로마 정부와 가깝습니다. 그래서 정치의 실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파가 서로 한 나라 안에서 싸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희망을 걸고 환영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종려나무 가지까지 흔들며 겉옷을 길게 깔면서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래서 이 나라는 국민도 문화도 신앙도 갈래갈래 찢겨진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보시며 슬프게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이 그렇게 되었는가? 여기에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하늘의 음성을 듣지 않은 죄를 너희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이 가장 극렬한 표현의 언어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에 들어가라. 저주 받아라!” 유일하게 이런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벨 때부터 들추어내십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희생자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까지 너희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일만 계속하고 있느냐?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까지 예루살렘의 중앙지대 골고다에서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이 택한 나라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지자 죽이는 일만 계속하고 있음에 대한 통한의 눈물을 지금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38절에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 우리가 찬양을 부릅니다. 메시야의 발이 멈추는 곳, 하늘의 수도, 인류 구원의 중심지!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러한 선지자의 소리는 일찍이 예레미야 때부터 이곳에서 들려왔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찬양하던 자들이 업신여기고 물러가도다.” 예루살렘을 보며 이렇게 예레미야가 노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지금까지 20번 이상 무장 군인의 침입으로 주인이 바뀌는 비운의 도시이며 완전 파괴된 역사만도 10번이 넘는 어둠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예루살렘은 사명을 저버렸도다.” 이번 성지순례 가신 분은 ‘통곡의 벽’을 다녀오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돌의 규모가 큰지 ‘도대체 그 시절에 저렇게 큰 돌들을 어떻게 운반해서 이렇게 견고한 성을 쌓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AD 70년에 로마 군인에 의해서 완전 폐허가 되고 서쪽 방향의 벽 하나만 남아서 히브리 민족의 한풀이 마당이 된 통곡의 벽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이 그대로 되고 있습니다. 38절에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완전 버려진 쓰레기더미 그래서 예수님이 우신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영원한 두 가지 실수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택한 백성의 사명을 국수주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의 종을 삼으신 뜻이나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한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축복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9장 6절을 보면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게 너희들의 사명이다.” 창세기 12장 3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라고 히브리 민족, 하나님 택한 백성의 사명이 구약시대부터 분명하게 주어졌으며, 그 중심적 역할을 해야 되는 예루살렘은 그 사명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는 겁니다. “이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예루살렘이라는 나라가 어찌 이 모양이 되었느냐?”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못하고 처벌한 죄가 그 백성의 영원한 실수로 남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슬픈 고백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통한의 눈물입니다. “내가 너희를 품으려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빌라도 총독이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냐? 바라바냐?” 그때 유대 민족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를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히브리 민족의 영원한 실패의 슬픈 역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행복을 목적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 개인의 행복이란 건강한 국가 공동체 문화 속에서만 가능하지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했다 하여도 국가라고 하는 보호막 역할이 없어질 때는 그것이 다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6·25 전쟁 때 북한에서 재산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들은 보따리 하나 가지고 빈손으로 내려 왔습니다. 우리가 행복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이 애국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지리적, 인종적 유대와 아울러 정신적인 풍토와 문화적 풍토를 같이 하는 혈연적인 집단 그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민족 지상주의나 배타주의에 빠질 때 세상을 불행하게 합니다. 20세기에 나타난 것은 독일의 나치즘, 무솔리니의 파쇼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이런 것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국가관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 이것이 국가관이다.” 시편 33편 12절에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삼일절 공약 3장에 3·1 운동 정신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지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되심과 역사의 주인되시는 것을 거절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생명을 걸고 이에 항거하며 이것이 계속될 경우 하나님은 심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그러한 민족지상주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모든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모두 국가 재산으로 귀속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그러나 예루살렘 침공에서 얻은 전리품은 너희가 가져라.” 그러니 병사들이 얼마나 악착같이 전쟁을 하였겠습니까? 로마 병사들은 정보를 얻은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벽을 쌓을 때 신도들이 돌과 돌 사이에 금붙이를 넣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성지순례에 가보면 유럽에 금덩어리로 지은 성전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번에 터키 가신 분들이 보신 소피아 성당은 13톤의 금을 발라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성도 하나님께 최고 좋은 것을 드린다고 해서 금붙이들을 다 그 성벽에 집어넣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그 돌과 돌 사이에 금붙이가 들어있다는 정보를 얻고 나서 그 돌을 전부 파헤쳐서 금붙이를 꺼내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그 말대로 된 것입니다. 삼일 운동 때 민족 지도자 33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되었던 것이 초기 한국 기독교의 빛이었습니다.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신흥식, 박희도, 오화영, 정춘수, 이갑성,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박동완, 신석구! 더 중요한 일은 제가 21세기 교회의 갈 길에 대해서 역설했듯이 이때 종교와의 대화가 이루어졌던 것이 삼일 운동의 빛입니다. 한용운은 불교계 지도자입니다. 손병희는 천도교의 지도자입니다. 불교, 천도교,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민족 구원의 입장에서 다 뜻을 같이 한 종교와의 대화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잖습니까? 예루살렘을 망친 종교 지도자 바리새파, 사두개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메신저를 끝없이 돌로 쳤던 백성을 보시며, 최종적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오늘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며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도 대한민국도 북한도 모두 하나님의 의에 중심을 둘 때 세계 평화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세계 선교를 하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 이 국가에서 몸을 바쳐 사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하나님의 의가 영원하여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민족의 삼일 운동은 기독교 정신에서 출발하였음을 저희들이 기억하고 예수님도 애국심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이 나라가 21세기에 세계 선교를 위해서 몸 바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국가로, 하나님께 사용 받는 국가로 발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예수님의 손
마 23:33-36 / 이정익 목사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몸에 있는 지체는 모두 다 소중할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일정때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몸의 지체 중에 하나를 끊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살펴보니까 다 소중해서 자를 것이 없더라고 합니다. 아니면 발가락이라도 자르려고 보니까 그것도 잘라낼 것이 없더라고 합니다. 그것을 절대가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체를 만드실 때 불필요한 것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몸의 지체는 다 소중한데 그중에서도 손이 참 소중한 지체입니다. 사람의 손은 만능입니다. 손가락은 모두 다섯 개로 구성되어있는데 왜 다섯 개인가 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손가락이 때로 6개였으면 더 편리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는데 하나님이 사람의 손가락을 만드실 다섯 개로 만드신 것은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 손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맨 손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창조해 왔습니다. 이 손으로 오늘의 문명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위대한 일 아닙니까. 우리의 손은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이 손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 손으로 사람들은 모조품을 만들고 갈취를 하고 도둑질을 하고 파괴를 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손으로 더 위대한 일을 합니다.
성경을 보면 특별히 이 손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손의 역할은 참 대단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길을 보면 참 위대하게 나타납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으로 행한 손의 사역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손”
눅 5:12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찾아와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손을 나병환자의 몸에 대십니다. 그랬더니 그 나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은 사랑의 손이고 소망의 손입니다. 어떤 손은 파괴하는 손이 있습니다. 병들게 하는 손이 있습니다. 아프게 하는 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은 병을 낫게 하는 손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그 손으로 조용히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며 병자들을 고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몸속에서 병을 고치시고 병의 근원을 고치시고 병든 영을 고치시고 상한 내 마음을 고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은 고치시는 손입니다.
“제자의 발을 씻기신 손”
요 13:3-8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눈 후에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참 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면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지금은 아주 심각하고 정신적으로 아주 복잡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간에 자신의 인생 최후의 시간에 대야에 물을 떠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가장 심오한 교훈을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세상은 지금 상당한 중증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온갖 불화와 갈등과 살인과 증오와 모략과 미움으로 가득합니다. 집안에도, 교회에도, 직장에도, 나라 안에도, 심지어는 내 마음에도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할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마 이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면 고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부간에 관계가 참 껄끄러운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며느리의 발을 씻기며 “어른스럽지 못한 부족한 나를 용서해라”하고 말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아마 모든 갈등은 순간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 사람들은 평생 이 갈등과 불화 속에서 치유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지금 상당히 갈등 속에 있는 관계의 사람들일 경우 그중 한사람이 이렇게 상대방의 발을 씻겨준다면 그 갈등도 순간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최후의 순간에 마음도 분주하고 할 일도 많았을 텐데 구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방법이 모든 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니까 그렇게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 발을 씻겨주신 손으로 우리들의 추한 마음, 더러워진 생각, 고집스런 마음과 흔적들을 씻기고 계실 것입니다.
“땅에 글씨 쓰심”
요 8:1-11을 보면 한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오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사회의 관습이고 율법의 정신입니다. 사람들이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께 보이며 이 여인을 죽일까요 살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난처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면 지금까지 말한 그의 사랑의 교훈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여인을 용서하라 하면 지금까지 부르짖었던 공의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고 엎드려 땅바닥에 글씨를 쓰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신 글자는 무슨 글자였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네 자신을 알라”고 쓰지 않았겠나 하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주 흥분했을 때 1분 2분만 진정해도 상당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참지 못해서 실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살인하고 파괴하고 싸우고 막말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현대인들 보다 옛사람들이 참 지혜로웠습니다. 옛날 집 구조를 보면 반드시 집에는 문지방이 높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문이 없습니다. 반드시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마다 문지방이 높습니다. 방에서 마루로 나갈 때도 마루에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지방도 상당히 높습니다. 조심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 높은 문지방을 건너갈 때 분이 삭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숨 돌리게 되고 마음의 여과장치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혜로움 아닙니까.
예수님이 흥분해 있는 사람들에게 즉시 대답하지 않고 손으로 땅바닥에 글씨는 쓰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의 손끝으로 몰렸을 것입니다. 과연 무슨 글씨는 쓰며 무슨 대답이 나올 것인가 하고 급한 마음들이 상당히 누그러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 모두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판단이 될 즈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아주 침착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 있으면 이 여인을 치라.”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여인을 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들고 있던 돌을 놓고 한사람씩 그 현장을 빠져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주는 손입니다. 마음에 여유를 주고 정신에 여유를 주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조금도 여유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이득만 보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고 분노하고 소리치고 주장하고 그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그 손길로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십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느끼게 하시고 돌아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주는 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
요 11:1을 보면 죽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뭍인지 이미 사흘이 지났습니다 뭍인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으면 소생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매장을 사흘 되는 날 하는 이유도 혹시 소생가능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이미 나흘리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가서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외치십니다. 그러며 손짓하셨을 것입니다. 빨리 나오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죽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 예수님 손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시는 손입니다. 낙심해 있는 사람을 격려하시는 손입니다. 빈 그물을 가득 채워주시는 손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몸은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바쁘게 움직이고 계실 것입니다. 찾아가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소망을 일으키시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주님의 손은 지금 여러분의 손도 그렇게 잡고 일으키시려 애쓰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은 살리시는 손입니다.
“축사하시는 손”
마 14:13을 보면 예수님은 들에서 오병이어의 아주 보잘 것 없는 내용물을 들고 축사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인 5천명이 먹고 배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손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그리고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께 온 사람은 모두 소원을 이루고 돌아갔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모두 배부른 채 돌아갔습니다. 병든 자들은 병을 고치고 돌아갔습니다. 그 주님의 손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고치시고 먹이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은 지금도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시며 사역에 충실하십니다.
“그 시대 필요한 사람을 부르시는 손”
예수님은 그 손으로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자들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바다로 가서 고기 잡던 베드로 형제와 요한형제를 불러 제자 삼았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았습니다. 신실한 동역자들을 불러내서 제자 삼았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포악했던 사울을 불러 전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모두 순한 양 같은 사역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신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계십니다. 누가 오늘 일할까, 누가 오늘 영혼구원을 위해서 나아갈까. 누가 오늘 열방으로 복음을 들고 나갈까. 누가 오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인가, 주님은 지금도 조용히 돌아다니며 당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고 다니십니다. 그렇게 부름 받아 주님의 손에 잡힌 사람들은 한결같이 큰일을 해 내는 충성된 사역자들이 다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그렇게 해서 불러냄을 받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생각해보니 예수 믿으면 좋겠다 싶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보이지 않게 주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호령하시는 손”
예수님은 두 얼굴을 가지셨습니다. 한 얼굴은 아주 온화하고 용서하고 고치시고 살리시고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인자하신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고 인자하신 모습입니까. 그런데 또 한편의 예수님의 얼굴은 심판하시는 얼굴이고 호령하시는 얼굴이고 추상같이 분노하시는 얼굴입니다. 마 21:12절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때 성전 뜰은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의분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좌판을 뒤집어엎고 짐승 떼를 내 좇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기 띤 얼굴일 것이고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누고도 예수님의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열매를 찾았으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나무를 저주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아주 추상같은 말씀으로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 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했습니다. “너는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얼마나 준엄한 심판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그냥 서서 저주했겠습니까. 그 손가락을 뻗치며 질책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질책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아”, “화 있을 진저 눈먼 인도자들이여”,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 23:33절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뱀들아, 이 독사의 새끼들아”하고 질책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렇게 말씀할 때 그냥 앉아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쳤겠습니까.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소리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의 손이 너무 무섭고 권위가 있고 그 모습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손입니다. 평소에는 그 손으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렸고 상한 자를 어루만져 위로하였고 병든 자를 만지며 고치셨고 슬픔 당한 자와 함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 자비로운 손길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죄인들을 향해서는 당장 벼락을 내리치실 것처럼 호령하시고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보아야 합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얼마나 추상같은 두려운 손가락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간담을 서늘케 했던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회개하고 깨우치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렇게 힘이 있던 예수의 손은 마침내 피를 흘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이 피 묻은 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손은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의 양심을 향해서 손가락을 겨누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 잠만 자지 말고 깨어있으라, 네 영혼이 건강한가 한번 시험해 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손입니다. 이 손에 이끌리고 인도받고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그 손에 붙잡히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멸망의 선고
마 23:34-39 / 박지온 목사
제목을 '멸망의 선고'라고 삼았습니다. 37절부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러면서 멸망을 선고하는 이런 배경이 나옵니다 만은, 바로 이렇게 된 이유들이 여덟까지 화로 '화 있을찐저 화 있을찐저' 이렇게 여덟까지 화로, 13절 이하부터 쭉 나오는 메시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8복에 대비해서 여덟까지 화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여덟까지 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뭔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좀 뭉뚱그려서 뭔가 개괄적인 면을 좀 정리를 해야 되겠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지금 이것을 그냥 넘길 것이 아니고, 중요한 오늘 여러분과 제게 주신 메시지, 또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그런 기회로 삼아야되겠습니다.
8복을 강의 할 때도 중요한 것은, 복음을 빼버리면 그 8복은 완전히 도덕입니다. 그래서 그 8복을 구체적으로 누리고, 그 8복을 하나님 은혜로 효과적으로 우리 개개인에게 성취되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 속에 그것이 이루어지고 오늘 똑같이 8가지 화도 똑같이 뭐냐하면, 생명이 없을 때에 오는 화입니다. '생명이 없을 때에 빠져 가는 사단의 통로다!' 그렇게 이해하면 더욱 쉽겠죠. 그래서 이 8가지 화는 생명이 없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죄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저지른 이 죄악들 곧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그 죄악들 때문에 결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탄식과 함께 이 멸망의 역사가 선포됩니다.
이 멸망의 역사에 선고조차도, 그것조차도 역사에 보면, '하나님의 축복된 주권적인 역사다!' 그렇게 또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뭘 좀 붙잡아야 되느냐 하면, 정말 예수 믿고 복음 없다! 이것만큼 불행스러운 게 없어요. 모든 불행은 여기에 다 있어요. 그냥 일반적으로 뭐 그냥 '복 받았다, 안 받았다!' 이런 것보다도 복음을 받았느냐? 이것은 뭐 엄청난 축복과 은혜다! 그러나 복음이 없느냐? 그것은 엄청난 저주다! 복음과 연결된 것은 그냥 받는다! 큰복이지만, 그 다음에 반대방향으로, 반대편으로 그것은 또 엄청난 저주다! 그렇게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8가지 죄악, 8가지 화! 저주 속에 빠졌던 생명 없는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 여덟까지 죄를 짓게 되는... 뭐 하나로 뭉뚱그려서 말한다 그러면, 이들이 무슨 죄에 빠지느냐? '생명이 없다!' 그럴 때에 외식에 빠진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께서 "(마 23: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에 외식이라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면, 원문에서는 배우라는 말입니다. 종교 배우다! 외식할 때에 종교 배우에 빠진다! 배우라는 것은 사실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재미있는 것은 이 배우들도 인기를 얻습니다. 또 환호를 받습니다. 똑같이 이 종교배우들도 아주 역할만 잘하면 환호를 받습니다. 아주 인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종교배우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것과 상관없이 그것은 엄청난 그런 이 저주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한마디로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이 '종교배우다! 외식이다!' 하는 이 말속에 모든 악한 성격이 요약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외식한다!'는 말속에, 사단의 역사에 모든 악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전부 통로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나왔다 정말 참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썼다! 노력한다! 또 아니면 일반적으로 뭐 도덕적이다! 뭐 어떻다! 그렇게 할수록 참 생명 없이 종교배우로 노력한다! 그러면 환호를 받을 수 있고, 박수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큼 악한 것이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왜, 악하냐? 왜,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은 이제 쭉 다음에 설명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설명을 7가지로 하나에 보면 두 가지가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설명을 하려고 그러면 7가지로 나누어줄 수 있는데, 그것을 먼저 말한다 그러면, 첫 번에 이 생명이 없이 내가 신앙생활 한다고 그럴 때에, 자기도 모르게 '복음에 원수가 된다!' 그랬습니다. 생명이 없이 열심을 낸다! 복음에 원수다! 그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예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전도를 하고, 정말 복음 전하는데 방해된다, 장애 된다! 또 그 다음에 이걸 반대한다! 그게 간단한 이유가 아닙니다. 이게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좀 강조해버리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반대 급부로 아주 엄청난 그런 어떤 판단이 되는 이건 것이 되어요.
그래서 우리 다락방을 하게 되고, 또 그 다음에 이 전도한다는 것에 방향을 맞추어 있는 여러분들이 초기에 그랬던 그런 어떤 잘못들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왜 잘못하면 이런데 빠질 수 있어요. 이런데 빠질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만... 그런데 '빠졌다!' 정 죄 해버리고 판단해 버리니까, 문제가 오는 것이 되었는데, 13절 말씀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메시아를 전하고, 이 구원을 온 세상에 전해야될 사명을 가진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걸 가르쳐 주어야 되요. 그런데도 참 생명, 말하자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가져야 될 참 생명이 그들에게 없으니까, 이 메시아를 가로막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을 깨닫지 못하니까! 복음을 막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까지 막았습니다. 그 결과가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이제 말한 것처럼 종교에 열심 내고, 생명 없이 열심 내게되면 이런 결과가 와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조금 다음 구절 말씀에 보면, '한 생명을 얻으려고 들과 산으로 쫓아다니면서 그래 놓고도 얻어놓으면 자기보다 더 악한 자를 만든다!'그랬습니다. 결과가 그렇게 되어 버려요. 참 생명이 없어지게 될 때에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늘 그럽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여기에 감사 정도가 아니고 엄청난 축복이 우리가 실제로 체험되고 날마다 이 삶의 역사 속에 우리가 살아야 그 다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요. 따라오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이제 말씀한 것처럼 반대로 8가지 화가 나온다! 이겁니다. 이게 참 비참한 문제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안된데 열심을 내면 열심을 낼수록 더 이상하게 되어버린다. 이런 문제가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게 참 쉬운데도 예수 믿는 게 왜 그렇게 어렵게 보여지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여러분 어린 아이가 자라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참 쉽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자랍니다. 뭐만 있으면? 생명만 있으면 자랍니다. 문제는 죽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라날수가 없어요. 거기다가 죽었는데 자라나도록 팔다리 당기면 빠져버리는 것이지, 그게 자라날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 종교라는 것이 잘못 오해가 되고 있으면 여기에 이런 문제가 와요.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생명 가지고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없으면 뭔가 내가 하려고 애를 써야 돼요. 여러분 호흡하는 것을, 호흡을 일부러 하려고 애를 쓰면 이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밤에 자면서 호흡하려고 그러면 눈뜨고 깨어서 잠도 못 자고 호흡해야 됩니다. 그런데 생명 있는 자는 저절로 하게 되어있어요. 밤에 자도 하게 되고, 어려워도 하게 되고, 좋아도 하게 되고... 그런데 그것이 어려우냐? 저절로 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로부터 오는 그 하나님의 역사로, 그 힘으로, 오직 그분 바라보고... 지난주에 제가 메시지 한 것처럼 모든 문제 우선해서 신앙이 우선되어지는 이것이 내 체질이 되었다! 내 모든 것이 되었다! 저절로 되어지는 겁니다. '쉽다, 어렵다!' 그것과 상관없어요. 그래서 참 복음이 되면 복음에 축복을 함께 누리는 자들,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안되면 복음에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향한 화로 선언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이, '종교와 경건을 자신의 이익과 탐욕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랬습니다. 복음이 안 되어있으면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인간 욕심을 채우는 방편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그저 듣고,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고, 정말 여러분 신앙생활 하는 목적이 뭡니까? 그래서 가끔 세례 받을 때에, '예수 믿는 목적이 뭐냐?' 이러면 뭐 나름대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이 대답을 잘 못해요. 여러분 왜 예수 믿습니까? 사람에 제일 되는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왜 그렇게 욕심을 자꾸 냅니까!
쉽게 말해서 기도하는데, 자꾸 그렇게 한번 해 보라 안 그럽니까! 녹음 한번 해보세요. 뭐라고 기도하는지!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빙자해 가지고 전부 욕심으로 구합니다. 뭐 '하나님,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뭐 내놔라, 뭐 없다!' 욕심내지는 전부 불평입니다. '하나님, 왜 이럽니까! 어쩌다가 이렇게되었습니까!' 당연하지, 그렇게 된 것도 약과다! 우리가 진짜 이 신앙이 안되어요.
그런데 이 말씀은 몇 절을 가리켜서 말하느냐 하면, 14절입니다. 사실은 14절인데, 성경에는 23장 14절에 보면 우리 현재성경에는 가지고 있는데는 그 14절에 뭐라고 그래놓았어요? '(없음)'그래놓았어요. 이것은 우리 성경이 갖고 있는 사본은 14절은 기록이 안 되어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본이 많이 있습니다. 사본의 종류가...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 사본에는 이게 안 나와있는데, 다른 많은 사본에는 이게 14절에는 어떻게 나와 있느냐 하면, 그 밑에 난 외주에 "1. 어떤 사본에, 14절에 막12:40과 눅20:47과 유사한 구절이 있음"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번 읽어드리면,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또 "(눅 20: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을 합니다. 그 다음에 서기관들에게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어떤 권리까지 주었느냐 하면, 재산을 관리하기 힘드는, 재산을 관리하는데 무식해서 못한다거나 이런 어떤 사람들에게 그때 당시에 법으로 그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맡겼어요. 그러면 주로 이것이 잘 안 되는 분들이 여자분들이, 뭐 우리나라에도 그런 게 비슷하죠. 남자들은 공부시키는데, 여자들은 공부를 잘 안 시키는 경우가 있어요. 더군다나 이 과부가 되어 버리면 관리할 수 있는 그게 안되어요. 돈은 많은데도 관리할 수 없는 과부들이 많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관리를 누가 하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게 되는 배경이 뭐냐하면, 그들이 성직자요, 그것도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사회적인 배경에서 그들에게 법적으로도 맡기고, 그들에게 이 일을 맡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신뢰한다!'는 그런 배경에서 어떤 신뢰하는 사람에게 더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도 정말 신뢰를 받는 사람! 그래서 이 신뢰를 받는다는 것이 더 사회적으로 인정되기 위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때 택한 것이 뭐냐? '외식'이라 안 그럽니까! 외식이라고 할 때에 어떻게 했느냐? '시장바닥에서 다 남이 보는, 전부 보는데서 오랫동안 기도한다!' 그래요. 그래서 어떤 그 학자들은 보니까, '3시간 이상을 매일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골방에 앉아서도 3시간동안 힘든데, 시장바닥에 서서 3시간 기도하는 것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뭘 하느냐? 경건하게 산다는, 경건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참 그때 당시에 어떤 풍습이라든가, 그런 어떤 경건주의, 경건 생활이 요즘 우리가 봐서도 그것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예요. 그래서 이 부분을 주경 하면서 어떤 분이 뭐라고 해석을 했느냐 하면, 마치 경건이라는 날개로 저 높이 올라가는데 그러나 그 눈은 독수리처럼 뭘 보느냐? 저 땅에 기어다니는 잡아먹을 것을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높이 올라갈수록 그의 눈은 욕심을 가지고 땅의 것을 찾는다!
이 배경은 뭐 특별히 성직자들이나 오래 믿은 묵은 디이 들이나 뭐 여러 가지로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은, 저는 그런 어떤 적용보다도 우리 개개인으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애를 쓰는 배경이 나도 모르게... 정말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그 구원의 역사에 참 생명을 주신 역사에 감사해서 보다도 이런 경건 생활을 하면 할수록 다른 욕심을 가지고 살피는 눈으로 우리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많은 경우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이것이 뭐냐하면, 이걸로 끝나면 되는데 뭐냐하면 사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더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사단이 들어오는 통로가 열리고, 사단이 들어오는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럴 때에, 경건하게 사는데도 자꾸만 내 가정에 재난이 오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느냐?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들어오는 흑암에 세력들이 여기에서 일어나게 되는 배경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영적 싸움에 있어서 들어오는 배경이 뭔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만 이걸 알면, 저는 그 정신문제 있는 사람들도 그렇더라 구요.
메시지를 받게 되고 메시지를 듣게 되면 어떤 힘이 오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약해지면 들어오는 구나!' 하는 통로를 알아요. 그러면 정신문제 있는 사람들이, '아, 이게 들어오는 통로구나!' 이것만 깨달아도 정신문제가 극복이 됩니다. 그러니 알기만 해도 됩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영적 문제는 알기만 해도 해결된다!" 알기만 해도 해결되어요. 그런데 진짜 영적 문제 있는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게 또 특징이라! 이 못 알아들어요. 이상하게, 이상한 게 아니고 정상이지! 그걸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받아합시다. "잡혔다!" 뭐에 잡혔어요? 사단에게 잡혔다! 이겁니다. 이상하게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꼬집어 줘도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고, 오히려 오해를 하는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어떤 면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 허물이 지적될 때에, '아, 맞다!' 알아듣는 수준이 참 이건 생명 안 가지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이게 바로 되어야 이걸 알아듣습니다. 그걸 알아듣는 것만 해도 그건 축복 중에 축복이에요. 부부 싸움할 때는 주로 못 알아들으니까, 싸움하는 것이거든요. 암만 지적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여러분 부부 싸움하는 사람일수록 영적 문제가 많습니다. 그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잘했다, 못했다!'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조용히 한번 깊이 살펴 볼 수 있는 그런 문제인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는 복음에 원수로 살지만 그들의 파벌이나 그들의 이익집단을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어떤 면에서 안 믿는 자들이 자기의 어떤 이익이나 이런 것을 위해서는 더 철저히, 열심히 노력하고, 오히려 이단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성경에 15절에 보면, "(마 23: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그랬습니다. 참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참 두려워해야 될 부분입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할 것도 없어요. 저절로...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 오고 난 후에 바울이 그의 생애를 완전히 하나님께 드렸던 배경이 그것이거든요. 정말 좋은 것을 좋은 줄 알면 나도 모르게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이 얼마나 좋으니까! 나도 모르게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전도라는 배경이, '전도는 복 받는다!' 그 배경이 아니고,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 전도하는 것이지,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복 받으려고 전도한다! 그건 말이 안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전도할 수 있다고 하는 복이 엄청난 복입니다. 전도, '복 받기 위해서 전도하러 가야지!' 이것은 벌써 복 받는 게 아니죠. 그런 어떤 개념하고는 벌써 다른 개념이에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적인 이익집단을 만들기 위해서도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 사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복음 가지고 조금만 하나님 앞에 섰다! 그러면 진짜 복음 가지고 선 자들의 삶이 안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도 모르게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과 이익을 더욱 추구하기 위해서 뭘 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거짓말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흔히 거룩한 거짓말이라 그러는데 그건 거룩한 거짓말 붙이면 안되고 그건 악한 거짓말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을 붙일만한데 거짓말하면 더 악한 것이죠. 이건 엄청난 그런 문제가 되죠. 그래서 23장 16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소경 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이건 뭘 말하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성전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먹고삽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맹세하면 재단으로 맹세한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그게 진짜 맹세예요.
그런데 성전에 재물, 금으로, 예물로 맹세하면 하는 것은 뭐냐하면, 이건 자기들도 모르게 뭘 강요하느냐 하면, 예물을 강요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헌금을 많이 내어놓고 기도하면 복 받는다 하는 그런 식입니다. 헌금을 많이 내어놓고 맹세하면 효과가 더 있고, 적게 내어놓고 맹세하면 그것은 효과가 없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뭐냐하면 많은 경우 백성들로 하여금 헌물을 많이 드리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참 축복의 배경으로, 참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역사 속에 있는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들이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많이 드린다! 적게 드린다! 문제가 아닙니다. 어저께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 요사이 불경기가 되어 가지고 어떤 분이 사업을 했는데 사업을 했는데도 수입이 없어서 십일조를 못 합니다!' 이러더라 그래요. 그래서 십일조라는 문제에 근본을 놓쳤다! 특히 뒤에 좀 설명이 나옵니다 만은, 수입이 있다, 없다! 이런 배경 이전에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얼마 벌었다! 안 벌었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 같은 경우에는 전부 다 드렸는데, 그리고 브리스가 부부도 마찬가지로 다 드렸는데, 하나님 앞에 내가 복음 위해서는 내 생명도 아깝지 않게 다 드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뭘 말하느냐! 어떤 사람은 벌든지, 안 벌든지 한 달에 딱 정해놓고, 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람들도 있더라 구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아니고, 10에 9는 드리고 하나만 가지고 살더라 구요. 여러분 하나만 가지고 살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면 그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많이 드렸다, 적게 드렸다!' 이걸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뭐냐? 십일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내게 주셨구나!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먹는다!' 이 믿음을 내가 물질 받았을 때에 그 물질을 하나님 앞에 하나를 떼어 드림으로 인해서 날마다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오해를 했습니다.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뭐냐? 사소한 곳에는 엄격하고, 보다 근본적인 것에는 무관심합니다. 23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바리새인들이 여기에 이건 뭐 너무 확실한 거니까! 십일조는 막 강조를 하면서도 십일조를 하게 되는,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배경! '어째서 내가 십일조를 하느냐?' 이것은 지금 강조를 못했거든요. 십일조 한다고 그럴 때는 그냥 '얼마 한다!' 그걸로 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들이 지금 교회 나와서 내가 십일조를 적게 드리든지, 많이 드렸든지, 감사라든지, 그 다음에 내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형편이 있어서 많이 드렸든지, 못 드렸든지 간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내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늘 우리 하나님 앞에 드릴 때에 그게 고백이거든요. 이 믿음이 안 된 상황은 그것은 드렸다! 그걸로 자랑할게 없다! 이겁니다. 드려서 되는 건 아닙니다. 많은 경우 드리고도 이렇게 악하게 외식하게 되고, 그 다음에 드리고도 이런 사람들이 어떤 경우가 생기느냐 하면, 자기들도 모르게 좀 어렵고 힘들어도, 어렵고 힘든 척을 안 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외식하는 이런 사람일수록 망하면 절대로 망한 척 하지 않습니다.
그래가지고는 돈을 뒤로는 다 자꾸 꾸어 가지고 가고, 다른 사람까지 피해를 주면서도 절대로 그런 사람은 피해를 주는 것처럼 안 합니다. 그래서 교회문제가 이런 사람들은 문제더라 구요. 나중에 터지니까,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던지, 그런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정말 생명이 있을 때에 정말 생명, 생명 주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제게 '먹고산다, 마신다!'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오늘 생명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좋고 나쁜 것, 높고 낮음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그 하나님 앞에 내가 얻고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지, 이게 안되면 자꾸 다른 것이 나와요.
그 다음에 여섯 번째 외식으로 치중해서 내면은 소홀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3장 25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것은 겉과 속, 그래서 외식은 죽은 사람일수록, 생명이 없을수록 이게 나온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참 재미있는 것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이렇게 자꾸 오는 것 같아요. 외국 같은 경우에는, 특별히 미국도 그렇고 가깝게는 일본도 보니까 그렇더라 구요. 제가 장인어른 돌아가시고 그럴 때에 시체가 되면 그걸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고, 딱 시체를 화장 시켜요. 근사하게 분도 바르고, 연지도 찍고, 입술에도 루즈를 바르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관에다가 넣는데 그 앞에는 유리로 해서 얼굴이 보여지도록 그렇게 관을 만들더라 구요. 그리고 이제 안 썩도록 뭔가 드라이 아이스도 넣고 그래가지고 하는데, 요즘은 우리나라에도 그런 추세가 보이더라 구요.
옛날 우리 풍습에는 일단 돌아가셨다! 꽁꽁 묶어 가지고, 그것도 많이 묶는 것을 자랑해서 일곱 가닥으로 꽁꽁 묶고 발로 밟아 가지고 그렇게 묻어버렸는데, 외국 같은 경우에는 다 화장을 시킵니다. 시체는 화장을 시킬수록 속은 더 섞습니다. '죽었다!' 그럴 때는 아무리 겉을 깨끗이 해도 속은 더 섞습니다. 생명을 잃었을 때에는 이건 비참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 믿었다! 안 믿었다! 그 정도가 아니고 정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없는 신앙생활, 이건 시간 갈수록, 치장할수록, 경건 생활할수록, 뭐 십일조 하려고 애쓸수록, 노력할수록, 점점 더 비참해진다!
그래서 오늘 날 복음 없은 그런 신앙인들, 그래서 오는 것이 이 땅이 망하고, 이 땅이 어려운 거 아닙니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축복이 안되니까, 재난과 재앙들이 계속해서 들이닥치고, 결국은 지금현재 여러분 보세요. 교회가 무너지게 되고, 세상이 무너지게 되는 이런 엄청난 문제들이 지금 닥쳐오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시점에서, 여러분 지금 이런 시점에서 여러 가지 모든 문제가 터질 때에 지난주에도 제가 강조를 했습니다 만은, 한가지 빨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바로 그 길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오늘도 내 안에 오시옵소서!' 그분을 통해서 정말 축복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생명의 사실을 누릴 수 있는 이 신앙이 회복 안되면 우리는 점점 외식이 되어요. 점점 종교 배우가 됩니다. 점점 더 꾸미게 됩니다. 사실이 없으니까 꾸밀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 연기 잘합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 가고 1년, 2년 가고 3년, 4년 가고 점점 시간 갈수록 점점 잘합니다.
나는 목사가 되어 가지고 참 어려웠던 것이, 처음 전도사 때에 제가 뭔가 교회 담임을 하고 있을 때에는, 부부싸움하고 있는 도중에 교인들이 찾아와서, '전도사님!' 할 때만큼 괴로운 때가 없어요. 그때는 문열면 싸우던 얼굴을 해 가지고 문을 여는데, 지금쯤은 여러분들이 우리 집에 와서 '목사님!' 그러면서 찾아왔어도 절대로 내가 싸우는 얼굴로 문열고 그렇게 얼굴 보이는 일은 거의 없지 싶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제는 수십 년 하다보니까 완전히 늘어 가지고 얼굴 바꾸는데는 도사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느냐? 정말 사실이 없이 신앙생활하면 시간 갈수록 외식에 도사가 됩니다. 이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참 기쁨이 없는데 기쁜 척 하려고 하니까, 어렵습니다. 기쁜 척 안 하고, 걱정 안 하는 척, 그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니까 걱정하고 자꾸만 늘 우울해 하고 보이고 이러면, '저 사람 신앙 없다!' 소리 하니까, 그렇게 말이라도 안 들어야 되니까! 얼마나 어렵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말세에 그렇지 않아도 자꾸 세상이 어려워지거든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때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에 역사, 믿음 회복입니다. 다른 게 없어요. 참 생명이 여러분 회복되고, 내가 기쁘게 노력해서가 아니라 기뻐지고, 감사하고, 찬양이 나오고, 이것이 내 삶에서 저절로 이루어져야 참 된 신앙 생활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있는 선지자들은 미워하고 죽은 선지자들을 위해서는 비석을 쌓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말하면서 참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렵지만 너무나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한 것이 뭐냐하면, 29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마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랬습니다. '선지자를 조상들은 죽였지만 내가 만약에 그때 있었다면 나는 안 그랬으리라!' 그러면서도 지금 의인 중에 의인이요, 메시아 중에 메시아인 말하자면 메시아 바로 그분이신 누구를 핍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현재 모순이거든요.
그런 마음이 들어요. 저는 절대로 우리 교인들은 안 그러리라고 나는 믿고 있거든요. 다른 교회 목사님은 좋아 보이는데 본 교회 목사님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안 좋아 보여... 다른 교회 목사님은 존경 스러운데 우리 교회 목사님은 맨 날 대하고 맨 날 들으니까 뭐 그저 그래... 조금 더 이제 그 사실적으로 우리가운데 이렇게 해석을 한다 그러면 이것이 그저 지나가는 말일 것 같지만 여러분들에게 축복되는 메시지는 바로 이 순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뭐 박 목사가 좋게 보였던지 나쁘게 보였던지 간에 내게 축복해주시는 메시지는 박 목사가 지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지금 은혜 받는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이 어려운 시대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 남을 수가 없어요.
제가 우리 딸아이 이야기를 가끔 해요. 하는데 그 하게 된 배경이 걱정이 되어서 하거든요. 뭐냐하면 정리된 교회, 우리 교회에 있다가 다른데 가보니까, 개척교회고 이러니까 아무래도 뭔가 이 목사님이 주도해서 마음대로 하고, 또 뭔가 하고 이러니까, 쭉 뭐 기관이 이렇게 하는 것하고 다르니까! '아, 저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런 게 자꾸 오잖아요. 오니까 어떤 게 있느냐 하면, 그렇게 오니까 자꾸 강단의 메시지에 은혜를 못 받게 되는 문제가 생기더라 구요. 그래서 요전 앞에 한번 전화가 왔을 때에, '네가 어떤 위기에도, 어떤 상황에도 살아남고, 이 세대에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서는 네가 이 믿음을 가져야 된다!' 그러면서 설명을 좀 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목사님이 어떻든지, 교인들이 어떻든지,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하고 있던지, 그래서 막 심지어는 보기도 싫은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강단에서 메시지 전할 때에 그 메시지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믿어라!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왜, 그러냐 하면요, 외국에서 살면 외국에서 사는 자체가 병이 옵니다. 영육 간에 오더라 구요. 지난번에도 왔다가 갔는데, 왜 왔다가 갔느냐 하면, '오라!' 그래서 왔다 갔어요. 거기 가니까 꽃이 만발하고 또 기후가 안 맞으니까, 생전에 없던 알레르기 증세가 나오는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저희 어머니 닮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일단 막 콧물이 나오고 그러니까, 그래서 이걸 치료를 해야 되겠다 싶어서 왔다 갔어요.
왔다가 갔는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콧물 나고 애를 먹었는데 한국에 딱 나왔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게 기후 차이에요. 지금까지 내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이 풍토에는 적응이 되어 있는데, 외국에는 적응이 안되었어요. 그러니까 이 병이 나오는 겁니다. 거기다가 메시지를 못 들었다! 영혼에 병까지 옵니다. 여러분 외국 가 있는 사람들은 정말 자기 본 강단에서 말씀 못 들으면, 말씀에 은혜 못 받으면 그건 죽습니다. 말씀 못 받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말씀 못 받게 되면 누가 옵니까? 흑암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개인도 영육 간에 병이 들어오거든요. 그러면 가정이 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외국에, 한국에서 간 사람들의 가정이 많이 깨어지는 것이 이게 문제거든요.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누가 어떻든지 상관없습니다. 박 목사가 어떻든지, 상관없습니다. 이 자리에 서서 말할 때에 제가 소설책을 번역해서 나온 게 아닙니다. 다른 이야기를 제가 섞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어떤 환경이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위기에서든지 살아 남을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자!' 그게 뭡니까? 지금 이 시간 은혜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 강단에 은혜 받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구역에서, 지금 앉아있는 구역에서 은혜 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 앉아있는 다락방에서 은혜 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여러분 말씀이 들어갔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말씀 받는 순간, 순간 흑암들이 꺾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안되면 여러분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복잡한 시대 아닙니까!
보세요, 교회 들어와서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해보세요. 신앙 다 떨어집니다. 송현교회 오면 엄청 좋은 교회로 소문은 많이 나 있어요. 들어와 보죠, 이상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비록 우리 교회뿐 아니라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옛날 목사님들이 말이 있어요. 옛날말로 '통시 똑같다!' 그래요. 요즘 사람들은 알아들으면 알아듣고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고... 그 말은 '교회 다를 게 없다!' 그 말입니다. 잘 알아 들어야됩니다.
집사님들 모여서 이야기하죠, 집사님들 모여서 이야기한번 녹음해놓아 보세요. 그게 신앙 떨어지는 이야기들만 하지, 신앙 주는 이야기 잘 안나옵니다. 더군다나 더 문제는 장로님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 보면, 그건 신앙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열 받히는 이야기만 합니다. 왜? 교회를 걱정하게 되니까! 자연적으로 교회 걱정이 나오게 되죠. 그뿐 아닙니다. 노회 가서 목사님 이야기하는 것 들어보세요. 여러분 조금 있는 신앙도 다 떨어져 나갑니다.
여러분 정말 이 말세에 '참 믿음을 보겠느냐?'하는 이런 시대에, 오늘 어떤 위기에서든지, 어떤 문제에서든지 지금 은혜 받는 믿음이 회복되어있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은혜 받는 이 축복된 순간이 여러분 어디에서 제일 확인되느냐? 초 신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감격에 간증할 때에, 이건 은혜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마 우리 교인들은 많이 이해하잖아요. 내가 데려온 신자가 신앙 고백하는 것을 들을 때에, 세례 받는 걸 볼 때에, 학습 받는 것을 볼 때에, 믿음이 저절로 쑥쑥 자랍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 그러든지 상관없어요. 현장 가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전했더니만, 죽음과 멸망에서 흑암 권세가 떠나가는 사실을 볼 때마다, '아, 예수 그리스도 뿐이구나!'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일을 가지고 뭐라 그럽니까? 교인들이 현장 잃어버리면 지금 은혜 받는 일이 잘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빨리 300미션 홈, 3,000제자 찾는다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는 뭐 교회 부흥되기 위해서 한다! 이게 아니고 우선 여러분과 제가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서도, 현장에 복음 전할 수 있는 눈이 안 여리면 회복이 잘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어지면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들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귀가 번쩍 번쩍 열려요.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저절로... 제가 이렇게 보면 고개 끄덕 끄덕 하는 사람은 다른데 있는 게 아니에요. 다 알아요. 누가 눈감고 조느냐! 다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누가 은혜 받고 있느냐! 지금 은혜 받는 게 다른 게 없어요. 이 축복된 역사,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이 말세의 세대에 우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 멸망을 선고했습니다. '멸망을 선고하는 것으로 세상이 망하느냐?'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나는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회복하자!'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하나님은 예루살렘 멸망을 선고했지만, 그 예루살렘 멸망 선고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선고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전 세계를 살리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고 이어서 이방인으로 구원이 넘어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 로마에 흉노족이 쳐들어 왔을 때에 불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그것이 오히려 전 세계가 복음화 되어 가는 축복의 역사로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주권!'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하나님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되어지는데, 이걸 딱 붙들어야 됩니다. 여러분 주권 신앙 그럴 때에, 이게 잘못되어져서 아마 믿음이 옳게 안 되는 것 같아요. 뭐냐하면요, 하나님의 주권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내 마음대로 한다! 내게 와서 내 일과 삶을 내 마음대로 하신다!' 그런 배경이 아니고,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축복의 계획을 세우시고, 여러분과 저를 주권 적으로 인도하신다!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축복하실 계획을 세워놓으셨다! 그게 이어서 주권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마음대로... 그래가지고 '하나님, 왜 이럽니까!' 덤벼들지 말고, '하나님이 지금 이 일을 이루셨다!'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하나님의 계획이구나! 계획이 성취되는 구나!' 그 말은 뭡니까? 내게 축복 주시기 위한 계획입니다. 이것이 주권 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걸 조금 순종만 해도 축복 받습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러는 것이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순종 안 하려고 마치 세계적인 사명을 타고 나온 사람처럼 대들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이게 문제거든요.
오늘도 여러분 이 방향에 조금만 맞추어놓고,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이런 8가지 방향! 여러분 조금만 눈뜨고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조금만 맞추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세우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조금만 보세요. 오늘도 이 사건과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실 역사로 인도하시는 구나! 조금만 알고 방향 맞추어 나가면 생각만 해도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역사 하시는 사실이 한 주간도 체험되고, 한 주간도 역사 되어질 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고, 이 일에 참여한 여러분들이 이 사건을 체험하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환난 중에 절망 말라
마태 23:37-24:14 / 최영기 목사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부터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말세라고 하면 세상이 끝날 당시라고만 생각하여서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그리고 책도 쓰고 영화도 만드는데 말세는 주님이 승천하면서 즉시 시작됩니다. 말세의 현상은 그즉시 시작되어서 이것이 가속되다가 세상 종말 직전에 극대화되고 세상 끝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은 종말을 맞는 세대 뿐만이 아니라 아닌 세대에도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Ⅰ. 죄에는 대가가 따른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이 끝난 후에 성전을 나오면서 제자들이 아름다운 성전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이때에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무너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24:2). 그런데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의 커다란 흰 대리석으로 지었는데 이 대리석을 금으로 입혀서 아침에 해가 뜰 때에는 햇빛이 반사되어 정면으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디도 장군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고사 작전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이스라엘이 회복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파괴 작전을 사용하였습니다. 성전에 불을 질렀을 때에 대리석 벽돌을 입힌 금이 녹아서 대리석 사이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캐낸다고 돌을 하나 하나 들어내어 문자 그대로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삶의 근거지를 잃고 세계 각처로 퍼져서 1949년에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까지 유랑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의 댓가를 치른 것입니다.
1. 예외가 없다
이것은 극히 상식적인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얘기입니다만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 할 때에 콜로라도 주 상원의원인 Gary Hart이 선두 주자로써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던 그가 정부와 요트에서 정답게 있는 모습을 사진 기사가 찍고 신문에 실려서 마침내 후보 경쟁에서 탈락된 예가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이면 신문사 기자에게 발각날 것이 틀림 없는데 어쩌면 이처럼 무모한 짓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때에 어떤 분이 그것은 인간은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쓴 것이 생각이 납니다. 남은 발각이 되어도 자신은 예외로 발각되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확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에는 댓가가 따릅니다. 남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이것이 위장병이 되는지 고혈압을 가져옵니다. 배우자 아닌 사람과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 배우자에게 아픔을 가져오고 신뢰가 영영 무너지게 됩니다. 남성중에서는 먼 곳에 출장 가서 섹스 영화를 보거나 나체 춤을 추는 곳에 갔다고 합시다. 출장이 끝나면 아무도 모르고 흔적도 남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방면에 전문가이신 어떤 목사님에 의하면 가장이 이처럼 음란의 영에 굴복을 하면 자녀들이 음란의 영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대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의 쾌락만 맛보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와 죄의 대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죄를 짓고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약을 마시고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살아야겠습니다.
2. 하나님의 슬픔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전도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나라가 멸망하고 세계를 유리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22:37-39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주님의 안타까움이 설명되어있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으려 했지만 거절했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면 공관 복음에는 나타나있지 않고 요한 복음에만 나와있지만 예수님은 그 전에도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셨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우셨다고 까지 했습니다(눅 19:41-4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벧후 3:9). 회개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주님이 회개하지 아니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던 것처럼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이 슬픔도 인간의 슬픔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슬픔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이 심정을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15:23-24). 이 기쁨은 또한 누가 예수 믿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대의 기쁨입니다(눅 15:10). 우리는 이러한 아버지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증을 덜어드리고 또한 하나님의 기쁨을 더해드리기 위하여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멸망 받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의 마음을 알고 이러한 연민의 마음을 가져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애써야하겠습니다.
Ⅱ. 거짓 구세주를 경계해야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로하고 감람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3절). 제자들은 성전 파괴와 이 세상이 끝나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성전 파괴는 곧 있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늘 나라의 시작은 곧 일어나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하늘 나라가 도래했다는 전주곡이지 종말이 임박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종말이 왔다고 선포하는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4-8절).
1. 불안은 거짓 구세주를 찾게 만든다
주님이 여기에서 거짓 그리스도와 전쟁과 기근과 지진을 상관 지어 말씀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소식과 소문으로 불안하고 기근과 지진으로 인하여 민심이 흉흉할 때에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붙잡을 것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때를 기회로 삼아서 등장하는 것이 거짓 구세주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짓 구세주를 많이 보았습니다. 전에는 박태선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자신을 재림주라고 말'했습니다. 요즈음은 문선명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려왔다고 주장을 합니다. 거짓 구세주를 쫓으면 가산 탕진하고 가족은 파괴되고 패가 망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 구세주는 꼭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차 대전 이후에 독일 국민은 히틀러라는 거짓 구세주를 쫓다가 나라가 2차 대전을 통하여 초토가 되었습니다. 인간 문제의 원인은 빈곤이다라는 단순한 명제와 해결책은 물질을 공유하는 공산주의다 라는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한 칼 막스라는 거짓 구세주를 좇은 나라들은 국민들을 다 거지로 만들어 놓았고 공산화 과정 가운데에 수백만, 수천만의 백성을 학살했습니다.
2. 인생 문제에 즉석 해결책은 없다
거짓 구세주의 특징은 단순한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끌리는 것입니다. 저도 초월 명상이라는 것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아침과 오후에 20분씩 명상을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집중력이 높아지며 등등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나 단체, 사상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상황이 불안하면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거짓 구세주에게 끌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가사를 돌보면서 연 수입 5만 불을 보증한다고 약속하는 광고 등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약만 먹으면 평소와 똑같이 식사를 하면서 1주일 안에 살 10 파운드를 뺄 수 있다는 광고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불안한 환경 불안한 심경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들을 채우려는 거짓 구세주들입니다.
우리는 쉽게 빨리 일을 이루려는 욕구를 경계하여야합니다. 이러할 때에 크고 작은 거짓 구세주에게 속아서 손해를 보고 자신의 삶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절대 쉬운 답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매일 지는 것입니다(눅 9:23). 성령 체험을 하면 당장에 거룩한 사람이 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닙니다. 성령 체험은 성령님의 실체를 감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후에 성령님의 도움으로 삶의 어두운 부분 약한 부분을 성령 충만으로 채워가면서 서서히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부부가 다시는 싸우지 않도록 결심하고 서약했다고 당장에 문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부부간의 문제가 되던 요소를 하나하나 해결해 가면서 점점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울증도 예수 믿었다고 즉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힘을 의지하고 나를 도우려는 목장 식구들의 사랑과 기도에 힘입어서 하루하루 싸우고 승리하다보면 언제인가 우울증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미나 다녀와서 교회가 즉시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 읽기, 등등 원칙에 충실할 때에 부흥되어있는 자신의 교회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생의 문제는 단숨에 쉽게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 십자가를 지어서 종내는 승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Ⅲ. 성도가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께서는 또 그의 제자들이 받아야할 핍박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9-12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겁주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시는 것이 지연되어도 실망하거나 실족치 않도록 하기 위하여 경고해주시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여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빌 3:20).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니까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따르는 법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거북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악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러한 사람들은 이러한 거부감을 미움으로 바꾸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표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음적 양적으로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요 15:19).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없고 칭송을 받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조직 폭력배 두목이 최 목사가 마음이 통하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랑하면서 다닌다면 여러분들이 듣기에도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핍박이 와도 이상한 일 당한 것처럼 의아해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4:12).
1. 핍박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주님으로 인하여 받는 손해, 비난, 핍박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합니다. 이것이 참된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환영하여야합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없을 때에 두려워하고 염려하여야합니다.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희생 없고 고난 없이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희생이나 고난 앞에 움츠려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것을 두려워하면 점점 더 두려워집니다. 그러지를 말고 신앙 생활에 불가피한 것으로 알고 이러한 것을 참된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로 알고 정면 돌파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핍박이 있어도 우리는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13절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견디라는 권면의 말씀인 동시에 견디게 해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14절에서 분명해집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끝까지 견디라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도 내포되어있습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에서도 주님은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핍박 중에서도 복음은 무너지고 사라져야되는데 세상 끝까지 전파되리라는 약속의 말씀도 포함되어있습니다.
2. 핍박 가운데에서 복음은 전파된다
이러한 미움과 핍박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가중되고 가속될 것을 예수님은 예고하고 계십니다(10-12절). 10절에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라고 말했는데 아래 주를 보면 '믿음을 잃을 것이요'라고 설명되어있습니다. 성도들 틈에 불법이 확산되어서 믿음을 저버리고 서로 미워하고, 같은 성도들을 당국에 고발하기도 하고, 성도들을 현혹시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이 온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정의와 자비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이룰 통치자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이 후보가 그러한 나라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나라라도 이루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지만 한국이건 미국이건 막상 뽑아놓으면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욕구를 채워주셨을 때에는 채워질 길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마음속에 아련히 자리 잡고 있는 대상을 알 수 없는 그리움. 이것은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에 갔을 때에 이 그리움이 채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과 희랍이나 로마를 비롯한 서양 역사를 보다도 어질고 지혜로운 통치자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이 지혜로운 통치자가 주님이시고 이러한 이상향이 주님이 다르시는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합니다. 주님도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나라가 임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는 것이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일까요? 선교 역사를 보면 개념이 시대마다 변천을 겪었지만 지금은 모든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미전도 종족에게 선교하는 선교사를 돕고 우리도 미전도 종족 선교에 직접 참여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핍박이 있어도 복음은 전파됩니다. 어떠한 핍박 가운데에서도 믿는 사람들은 계속하여서 생겨날 것입니다. 역경 속에서 핍박 가운데에서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 하늘 나라의 도래를 촉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식
마 23:37-24:2 / 이정선 목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탄식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탄식은 마음속 깊은 고통의 표현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이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나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곳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위대한 일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성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눅 13:33)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의 무덤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분명히 예수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종교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성전은 그들의 종교적 중심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왕이 있었고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습니다. 왕이나 산헤드린은 백성을 다스리는 지배자였습니다. 선지자들을 잡아 죽인 것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왕이나 공회가 한 일입니다. 종교와 정치가 구별되지 않았던 유대 사회에서 왕이나 공회의 임무는 백성들을 잘 가르치고 인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나 공회가 그 임무를 잘 수행하면 백성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될 것이고, 왕이나 공회가 타락하면 백성들 역시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의 역사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던 때도 있었고, 타락하여 선지자를 죽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그것이 예루살렘의 현재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당시의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읍이었더라면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의 자손이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이라고 부르십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비록 예루살렘이 타락하고 선지자를 죽이는 성읍이 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은 그 백성을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자기 백성을 모으시고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사셨던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종종 솔개가 나타나서 번개처럼 병아리를 낚아채 날아갑니다. 그래서 솔개가 나타나 공중을 빙빙 돌면 비상이 걸리는데, 그때 어미 닭이 하는 일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병아리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미 닭의 소리를 듣고 병아리들이 모이면 어미 닭은 재빨리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로 모아 넣습니다. 솔개가 떠날 때까지 그렇게 병아리들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묘사할 때 날개 아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온 모압 여인에게 보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다윗의 시에도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 61:4).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는 것은 어미로서의 특별한 애정과 보호를 의미합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백성이 타락하였고 반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자녀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 1:11).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선지자 죽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의 비석은 세우면서 의인들 핍박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메시야를 잡아 죽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슬픈 운명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날개 아래 피하기를 거부한 결과는 그들의 집이 황폐하여 버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 집’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상징으로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의 의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의미도 완전히 퇴색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하고,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지만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 되고 말았습니다(마 23:16,18).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기들이 차지한 거예요.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진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황폐하여 버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절교를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그 백성은 뭐가 되겠습니까?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잃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되었던가요? 다른 민족들에게 짓밟혀야 했고, 나라를 잃고 자기 땅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린 결과였습니다. 겉으로는 성전에 나가서 제사도 드리고 율법을 지키는 시늉도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이에요. 그런 행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꾸짖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 외식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떠나시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아 거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드리는 산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까? 아니면 가인의 제물처럼 하나님이 거절하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삶을 성전 삼아 우리와 동거하십니까? 아니면 성령께서 이것은 내 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떠나겠다고 하십니까?
물론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고(히 13:5), 어떠한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 8:35). 그러나 이런 약속의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지 않게 살아도 괜찮다는 무책임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대속하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죄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요.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잃어버리는 잘못된 행동과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는 엉망으로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나 염치없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큰일 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해야 우리가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이 날개로 모으시려고 해도 싫다고 거부하면, 하나님은 탄식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입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기들에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던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자기들에게 파송된 자, 즉 메시야를 영접하고 받아들일 때까지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거예요. 선지자들을 죽이던 자들이 마침내 선지자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던 자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고, 도둑질하던 자들이 도둑질 하지 않게 되고, 미워하던 자들이 미워하지 않게 되고, 이간질을 일삼던 자들이 이간질을 그치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해서 예수님의 성전강화(Temple discourse)가 끝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전을 나오십니다. 그것이 성전에서의 마지막이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전 건물들 구경을 하자고 했습니다. 시골 출신의 제자들로서는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 건물의 모습에 눈이 핑핑 돌았을 것입니다. 이 성전은 세 번째 성전입니다. 첫 번째 성전은 BC 957년에 솔로몬 왕이 7년에 걸쳐 지었는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유다가 망하면서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돌아와서 세웠습니다. BC 520년 경에 총독 스룹바벨의 주도로 성전이 건설되었지만, 형편이 페르시아의 속국 처지인지라 규모가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새로 지은 성전을 지을 때 울었다고 했습니다(에 3:12).
유대인도 아니면서 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유다의 왕이 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증축했습니다. 로마의 건축술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헤롯은 로마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성전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이 성전이 46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어떻게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킬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건축이 진행중이었습니다. 무려 AD 64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아마 영원할 것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성전이 느부갓네살에게 파괴당하고, 초라하게 다시 지어진 성전이 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에 의해 파손되었던 치욕이 있었는데, 이제 이 거대한 성전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겠지요. 그러나 성전은 하나님이 계셔야 영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아름답게 지었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크고 아름답게 지은 성전은 바벨탑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비록 우리 삶이 초라하고 내놓을 것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과 재물로 화려하고 거창하게 우리의 인생을 꾸며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전이라고 우겨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성전 건물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제자들의 생각에는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이 성전이 AD 64년에 완공되었다고 했지요? 그로부터 겨우 몇 년 뒤인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이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그것을 내다보시면서 예수님은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운 건물이나 업적, 또는 명예나 재물 같은 것은 이렇게 무너지기 쉬운 것들입니다. 아무리 튼튼하게 쌓아올린 것 같아도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로마 제국이나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 누가 그 제국들이 몰락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소련이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렇게 빨리 붕괴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을 했습니까? 대기업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고,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도 우리가 자주 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며 쌓아올리는 인생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크게 성공했어도, 아무리 열심히 봉사했어도,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면 크게 무너지고 실패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 계시는 거대한 성전 쌓아봐야 우리 주님께서 탄식만 하실 뿐입니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도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쌓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흡족해하시며 그 안에 거주하시는 성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 23:37-39 / 지용수 목사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셋입니다. 어머니, 아내, 그리고 딸입니다. 그 사랑하는 딸 경이가 생후 9개월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을 저희 집에 맡겨 놓고 공부하러 미국에 갔습니다. 며칠 전에 딸이 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울먹이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엄마, 나는 아들을 유학 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들과 떨어져 있으니 너무 힘들어요. 이렇게 보고 싶은데 어떻게 유학을 보내겠어요.”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니 함께 살고 싶고 함께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성경을 통해 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사야 45장 18절 말씀대로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며 삼라만상을 지으신 다음에 우리를 여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또 이 땅에서만 살게 하지 않으시고 아름다운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나라에 가서도 함께 살게 하시려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지못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러 오셨고, 우리를 데리고 가서 함께 영생을 누리려고 오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절에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셔서 예수님 안에 들어와 거하라고,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Remain in me, and I will remain in you.)』(요한복음 15:4)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도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하고, 예수님께서 따뜻한 음성으로 설교하실 때 은혜를 받기는커녕 예수님을 고발할 논쟁거리, 고발거리만 찾았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까지 ‘사람이면서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모든 주석가들이, 이것은 주님께서 우시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예수님의 비가라 말합니다. 예수님의 슬픈 노래, 탄식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두 번 부르십니다. 그러나 이 때는 탄식하며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독자 이삭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아브라함이 사랑스러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또 창세기 4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르십니다. 백 수십 세 된 야곱이 타향살이를 하러 가게 되었을 때 ‘내가 애굽으로 가야 되나? 가지 말아야 하나?’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아, 야곱아! 애굽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가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스러운 야곱에게 힘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3장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세상이 영적으로 타락한 때에도 사무엘은 깨끗하고 순결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얼마나 예뻐하셨겠습니까? 그 예쁜 사무엘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부르실 때는 탄식하면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부르실 때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부르시기를 원합니다. 야곱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원합니다.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을 부르셨듯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일이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이 말씀대로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토스 장군이 대군을 몰고 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아이들을 돌 위에 쳐서 죽였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교회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배척하고 잘된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이던 러시아가 교회를 배척하고 주의 종들을 배척하더니 약소국가가 되었습니다. 기름진 땅이었던 북한이 교회를 배척하고 주의 종들을 죽이더니, 지금은 자기 아들들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교회를 배척하면 황폐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꿈에서도 주님을 배척하고 교회를 배척하고 주의 종을 배척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병아리가 어미 날개 아래로 들어가듯이 주님 품으로 들어오면 삶을 얻게 해 주십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님 품에 들어오면 먼저 모든 죄를 사함 받게 됩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아무리 추하고 악하고 무서운 죄를 많이 지어도 우리 주님 품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죄 사함의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동네 밖에 나가서 해질 때까지 아들을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그리고 창기와 함께 재산을 다 말아먹고 돌아오는 거지 아들을 매질하지 않고, “너, 재산을 이렇게 말아먹었으니 3년간 징역을 살다 오너라.” 하며 벌주지 않고, “너는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요, 죽었다가 산 아들이라.”하며 무조건 용서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포악하고 더럽고 추한 죄를 지은 중죄인이라도 주님 품으로 돌아오면 심판하여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에스겔 33장 11절에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넘어지고 자빠지는 우리의 실수와 죄에도 정죄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할렐루야!
우리가 예수 믿은 다음에도 실수하고 죄를 짓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옥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징계는 받을지라도 지옥은 가지 않습니다. 예수 믿은 다음에 의로운 생활로, 거룩한 생활로 천국 간다면 목사님들 중에서도 천국에 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천국에 갔더니 하나님께서 반기시며 물으시더랍니다.
“너는 목사니 거룩하게 살다가 왔겠지?”
“하나님, 죄송합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뭐라고? 그래도 목사니 진실하게는 살다가 왔겠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겠지?”
“하나님, 죄송합니다. 진실하게 살려고 애썼지만 때때로 노란 거짓말, 하얀 거짓말, 빨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그래도 목사니까 깨끗하게는 살았겠지?”
“깨끗하게 살려고 무척 애썼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며 목사님을 당장 천국에서 쫓아낼듯이 하시니, 옆에 앉아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저 목사를 위해 제가 피 흘린 것을 아시면서 그렇게 화를 내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 그렇구나.”라고 하셨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생활로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품안으로 들어오면 원죄도 사함 받고, 자기가 지은 죄도 사함 받고,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 받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주님 품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주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께서 닭을 여러 마리 기르셨습니다. 그때 암탉이 알을 낳으면 특별히 저를 사랑하시는 할머니께서 그것을 제게 주셨습니다. 따뜻한 밥을 해놓고 기다리셨다가 암탉이 알을 낳으면 깨뜨려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밥에 비벼 주셨습니다. 그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계란이 아주 좋은 반찬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계란들을 모아서 암탉이 품을 수 있도록 날개 밑에 넣어 주었습니다. 20일쯤 지나면 거기에서 병아리가 나오는데, 그러면 암탉이 병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모이를 주어도 자기는 먹지 않고 병아리들에게 먹였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도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친 다음에 병아리들이 먹게 했습니다. 부드러운 풀을 보아도 병아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돌보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주님 품안에 있는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26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제가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은 제 딸이 낳은 아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그 아이 때문에 제가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 얼굴을 보십시오. 이렇게 새신랑 같은데 할아버지가 무슨 말입니까?
하루는 제가 그 아이를 안고 밥을 먹는데, 아이가 뜨거운 국그릇, 김치 그릇, 고추장 그릇을 마구 잡아당겼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인 줄 알고 그러는 것이지만,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우유나 죽, 과일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과일을 갈아서 주면 마음에 차지 않는지, 제가 먹는 사과를 자꾸 빼앗아 가려 합니다. 그 아기가 사과를 통째로 먹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먹다가는 질식할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이 주는 것이 그 아이에게는 필요한 것이고 좋은 것인데도 자꾸 엉뚱한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 아이가 하는 것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또 하고 싶은 것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하면 우리에게 오히려 손해가 되고, 우리가 그것을 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비빔밥을 먹고 싶어해도 부모는 아기에게 우유나 죽을 주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의 필요를 우리보다 먼저 아시고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주님 품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의 양식을 먹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세상의 양식은 먹습니다. 그 양식을 먹을 때도 그들은 그냥 먹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쌀 한 톨 먹을 때도, 사과 하나 먹을 때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것을 지으셨구나.’하고 감격합니다. 그냥 먹는 것과 감격하며 먹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고 구경도 못하는 비밀 양식을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은 결혼의 신비를 모릅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에게는 그것이 비밀이듯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밀인 양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 그 비밀 양식,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양식을 먹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 양식입니다. 하늘의 생수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5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굉장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 먹는 것은 생명 양식입니다. 설교를 받는 것도 생명 양식입니다. 생명 양식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생명 양식을 먹으면 기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올 때 피곤한 얼굴로 와도 말씀을 받고 나면 확 피어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번 집회 때에도 그 많은 사람들이 시간시간 모여서 기뻐한 것은 제가 그들에게 떡을 주어서입니까? 피자를 주어서입니까? 생명 양식만 전했습니다. 생명 양식만 전했는데 그들이 기뻐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정말 생명 과일을 먹으며 살게 됩니다.
「이후로 생명 양식 주와 함께 먹으며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교회 품에, 예수님 품에 있는 사람만 이 복을 누립니다.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은 이것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 품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여러분, 암탉이 병아리를 지켜주는 것을 보셨습니까? 실제로 보신 분이 쓴 글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독수리가 공격해 오면 수탉이든 암탉이든 큰 닭이든 작은 닭이든 다 숨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답니다. 그런데 병아리를 지키는 암탉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솟아나는지 독수리와 정면으로 부딪쳐 싸운답니다. 목에 피가 나고 날개가 찢기고 깃털이 다 빠져도 끝까지 독수리하고 싸운답니다.
암탉도 병아리를 그렇게 보호해 주는데, 하물며 우리 주님이시겠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권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권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는데요? 주님께서 지켜주시는데 왜 어려운 일이 있나요?”
그것도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AP통신 중동 지국장 테리 앤더슨은 6년 반 동안 인질로 잡혀 레바논에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레바논은 서방과 대화할 때마다 자기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테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테리는 고통을 당하다 6년 반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힘들지 않았습니다.”
“레바논 사람들이 밉지 않습니까?”
“밉지 않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내가 인질로 감옥에 있는 6년 반 동안 나는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기도할 수 있었고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내게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영원히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어려움 때문에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6년 반 동안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영혼이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또 도밍고라는 사람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 예약 시간에 맞추어 달려가고 있는데 자동차 타이어가 터졌습니다. 타이어를 교환하다 보니 비행기 출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속이 상해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하필 이때 타이어가 터져 중요한 여행 약속이 깨지고 말다니.’
그런데 얼마 후, 그 비행기가 추락하여 탑승객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타이어가 터져서 그의 생명이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예기치 않은 일, 원치 않는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고 목사님이 백령도로 집회를 인도하러 가려고 할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배를 타려고 하는데 경찰이 목사님을 막았습니다.
“나는 이 배를 꼭 타야 합니다. 지금 집회를 인도하러 가는 길입니다.”
“무엇을 하러 가시든 이 배는 탈 수 없습니다. 지금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위험합니다. 정원을 넘어섰습니다.”
그래도 타야 된다며 목사님이 배에 올라서려고 하는데 경찰이 밀어내는 바람에 목사님이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배는 그대로 출발했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님이 되어서 욕을 할 수는 없고, 여관으로 돌아와서 옷을 말리며 ‘그놈의 경찰.’ 하며 시근거리고 있는데, 그 경찰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내게 감사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미운 사람이 감사를 하라고 하니 목사님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가 왜 당신에게 감사해요?”
“목사님, 그 배가 침몰해서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침몰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배를 탔다면 부흥회 인도는 고사하고 바다에 수장되었을 텐데, 그 경찰관 때문에 살았습니다. 바다에 빠졌을 때는 마음이 상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목사님이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좋은 일만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나쁜 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성공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가장 큰 성공을 하게 됩니다.
병아리를 혼자 두면 죽습니다. 아이들이 병아리를 기르려고 길에서 파는 것을 사오기도 하는데, 대개 병아리가 죽습니다. 혹 살아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병아리는 어미 닭 품안에서 자라야 최고의 닭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품에 안겨 있어야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됩니다.
가난한 통나무집에서 살았던 링컨을 백악관으로 옮겨가게 한 다리는 바로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다니엘을 전쟁 포로에서 총리가 되게 한 다리도 바로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죄수였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110년간 성공 생활을 하게 된 그 다리도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회장 잭 웰치는 세계적인 사업가요, 학자요, 박사요, 인생에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성공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비웃으며 싹수가 노랗다고 했지만, 내 어머니는 언제나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격려해 주어도 아들이 큰 사람이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격려해 주시니 얼마나 큰 사람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격려해 주고 계십니다.
“너는 할 수 있다. 내가 도와주니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나는 할 수 있다(I can do).”
우리는 못해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품에 있는 자는 자기가 될 수 있는 그릇보다 더 큰 그릇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품에 있는 자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품안에 있으면 낙심할 일이 있어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미국이 남북 전쟁의 힘든 고비에 있을 때, 미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뜻 있는 애국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각하, 이러다가 우리 미국이 끝장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링컨이 말했습니다.
“형제여, 내가 어릴 때 덕망 있고 지혜로운 한 노인과 밤하늘을 구경한 적이 있어요.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별똥별 몇 개가 떨어졌어요. 그것을 보고 무서워 떨고 있는 나에게 그 노인이 말씀했지요. ‘링컨,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지 말고, 저 높이 든든히 서서 빛을 발하는 견고한 별들을 보게나.’”
별똥별이 떨어져도 하늘은 그대로 있고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은 역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주님 품안에서 살아도 재산이 떨어져나가고 건강이 떨어져나가고 사랑하는 사람이 떨어져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별똥별이 떨어지듯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늘의 별들이 캄캄한 밤에 빛을 더 발하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밝을 때도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인생의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더욱 빛나는 별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베들레헴까지만 인도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소망의 길로 친히 인도하시되, 이 세상 끝날까지, 죽을 때도 인도해 주시는 소망의 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낙심할 일이 없습니다. 공허한 날이 없는 것입니다. 캄캄하다 싶어도 한 줄기 빛이 비쳐옵니다. 예수님의 빛이 비쳐오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쁨이시요, 우리의 소망이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주님 품안에 있어도 구겨지고 부서지고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버리겠습니까?
룻기 1장에 보면,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이 그 땅에 흉년이 들자 모압 땅으로 갑니다. 모압 땅으로 가서 초기에는 며느리도 보고 잘 삽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도 죽어서 세 과부만 남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이방인 며느리 룻만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풍족하게 가지고 갔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옵니다.
여러분, 교회 품에서, 예수님 품에서 사는 우리가 흉년을 만났다고 모압으로 가겠습니까? 가면 더 잃게 되고, 다 잃게 됩니다. 가진 것마다 잃게 됩니다.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자 잘 살아보려고 모압으로 갔던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모든 것을 잃은 후에는 그래도 다시 베들레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옵니다. 룻기 2장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뙤약볕 아래에서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그 룻에게 보아스가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모든 것을 잃고 이삭이나 주워 먹는 가난뱅이 며느리 룻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너에게 하나님께서 상 주시기를 원한다.”라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룻은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자부가 되고 보아스의 부인이 되고 다윗 왕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흥해도 주님 품에 있어야 됩니다. 망해도 주님 품에 있어야 재기하게 됩니다. 주님 품을 떠나면 있는 것마저 잃게 됩니다.
시편 73편 28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욥기 13장 15절은 우리 성경보다 영어 성경 Good News Bible로 보면 이해가 더 잘 됩니다.
“I've lost all hope, so what if God kills me? I am going to state my case to Him.”
“하나님께서 내 아들딸을 다 죽이시고 내 재산을 다 망하게 하시고, 그래서 아내가 가출하고 나는 망했지만, 이제 나까지 죽이셔서 내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내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 두겠습니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 가슴으로 엎어지겠습니다.”
욥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나님 믿다가 재산이 다 없어지고, 하나님 믿다가 열 남매가 다 죽고, 하나님 믿다가 아내가 가출하고, 하나님 믿다가 자기 몸에 병이 오고, 모든 것을 다 잃었는데도,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가 죽어도, 자기의 모든 희망이 끝나도 하나님 가슴으로 넘어지겠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전의 아내보다 더 좋은 아내를 주시고, 이전의 좋은 아들딸보다 더 좋은 아들딸을 주시고, 이전의 많은 재산보다 두 배나 많은 재산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잘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품에 더 꼭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망해도, 죽어도 주님 품안에 쓰러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함께, 더불어 동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내 안에 들어와라. 나도 네 안에 들어가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 딸이 낳은 아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저는 집회를 인도하러 갈 때도 그 아이를 데려가고 싶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품에 안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그 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주님 품에 거하기를, 우리의 현 주소가 In Christ, 예수님 안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21)
나라를 위한 마 23:37-39, 롬 10:1-3
6.25전쟁이 남긴 인류사적 교훈이 있다면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교훈을 전파하고 있는 중심적 장소는 6.25전쟁이 일어난 이 한반도가 아니라, 미합중국의 수도인 워싱톤 D.C.라는 것은 아이로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의 수도 와싱톤 D.C.에 위치한 한국전 기념공원에는 해마다 평균 320만 명이상이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하는 미국인들과 세계의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판초 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조각가 프랭크 게일로드의 조각 작품인 육, 해, 공군 군인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여기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 아래 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새겨진 불멸의 메시지가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두 동강난 한반도 땅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자유로운 국가로서의 민족적 생존이 가능하기 위해 희생된 미군 사망자만 5만 4246명(지금까지 이라크전 미군 사망자가 약3천명),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가 모두 62만 8833명, 부상자는 미군만 10만 3284명, 유엔군 전체는 106만 4453명, 미군 실종자만 8177명, 유엔군 실종자는 47만 267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이젠하우어 대통령도 아들을 잃었고 벤프리트 장군도 아들을 잃었으며,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도 아들을 잃었고, 워커 중장은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24사단 딘 소장은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 그릇된 이념적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젊은이들 가운데 종종 북침설을 믿고 있는 전후세대들이 있습니다만, 만일 6.25전쟁이 남에서 먼저 준비되고 의도된 북침이었다면 6.25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40일 만인 7월말까지는 낙동강 하류의 부산만이 남게 되는 일방적 전쟁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남한은 총병력이 10만 4993명, 북한은 20만 3480명으로 북한이 갑절이나 많은 병력을 소유했고, 남한에는 탱크나 자주포가 단 한대도 없었음에 반하여 북한은 탱크만 242대 자주포만 176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항공기는 남한에 연락기를 포함하여 총 22대가 고작이었지만 북한은 211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런 병력의 열세로 어떻게 남한이 북한에 대한 침공을 시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열세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자유로운 국가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요 이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기도한 분들의 기도의 응답의 결과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고 나라의 백성으로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거룩한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망해가는 조국 이스라엘과 수도 예루살렘의 내일을 예견하고 탄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그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큰 제자 바울 사도는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6.25 전쟁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우리는 구체적으로 민족을 위해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까?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민족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자유롭고도 안전한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첫 번째 기도제목은 민족의 육체적인 구원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첫 번째 기도 제목에서 자유와 안전이라는 두개의 단어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자유한데 안전하지 못하다면 그 자유 자체가 불안한 자유일 수 밖에 없고, 안전은 한데 자유하지 못하다면 그 안전은 비굴한 생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조국이 자유롭고 안전한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인 다음 세대들이 그런 나라에서 살아 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 마태23:38에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가 되리라”고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태 24장 2절에서는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AD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문자 그대로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뜨린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분들은 서쪽 벽 하나만을 볼 수 있고 그 벽에서 유대인들이 자기의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벽을 우리가 통곡의 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 누가19:41이하에 기록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예수께서 슬피 우시며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눅19:41-42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실제로 로마의 디도 장군은 4개 군단 약 8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을 무너뜨렸고 그 때 약 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수십 만 명이 노예로 로마로 끌려가는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아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것입니다. 이때 뜻있는 유대인 애국자들의 한 무리 어린아이들까지 약967명은 예루살렘 남쪽 사해 서쪽 약 4km지점에 위치한 헤롯의 천연 요새 산성 맛사다(해발 450m)로 도피하여 로마인들과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다가 3년 만에 실바 장군이 이끄는 10군단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자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의합니다. 이때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유명한 다음과 같은 연설을 남깁니다.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금까지 의로우신 하나님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방인 로마의 손에 죽거나 아니면 항복하여 그들의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동지들이여,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합시다. 자유의 몸으로 이 세상을 선택합시다.”
그리하여 극적으로 죽음을 면한 2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을 제외하고 맛사다의 언덕에 올랐던 전원이 장렬한 자결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이 장소는 지금도 이스라엘 군인들이 임관할 때 이 언덕에 올라 “우리는 다시 함락되지 않으리라” “다시는 맛사다의 비극이 없기를”하고 외치며 충성을 맹세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과 맛사다 못지않은 비극의 현장이 바로 한반도이었음을 젊은 세대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북한 군인사상자가 모두 약 300만 명, 민간인 사상자도 모두 약 300만 명 합계 약600만 명이 죽고 다친 전쟁이 6.25였고, 전쟁미망인만 약 20만 명, 전쟁고아가 약 10만 명, 파괴된 가옥이 60만채, 북한 월남민이 약 300만명, 이산가족이 약 1천만 명, 그리고 산업 생산력의 약 80%가 파괴되고 공산군 점령지에서 그 어떤 계층보다 핍박받고 투옥되고 고문당한 사람들이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로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비극적 전쟁이 바로 한반도의 6.25전쟁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전쟁의 비극을 기억하는 우리라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는 미래의 조국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어떤 지도자가 선출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은 누가 더 자유와 안전 그리고 번영의 내일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지도자인가가 우리의 선택의 준거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진실로 이 나라 모든 정책 시행에 있어서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우리의 안전을 지키고 이 나라의 번영을 선도해갈 비전 있는 지도자가 선택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메시아를 영접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기도제목은 민족의 영적인 구원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의 본문 37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오실 메시아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오실 메시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민족이 된다면 그 자체가 민족의 번영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드리는 일에 무관심내지는 적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민족의 위기인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자신의 날개아래 품듯 자기 민족을 품고자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기 민족이 정치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위기에 처한 것을 보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11에서 이 위기를 어떻게 증언합니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주로 영접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이 예수님을 대부분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 시대에 살며 예수님의 가장 큰 제자가 된 바울 사도는 이 때문에 가장 큰 기도제목을 갖게 된 것입니다. 롬10:1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 바울의 기도 제목이었는가를 롬9:1-2에서 읽어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무슨 말입니까? 자기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내 자신이 버림을 받고서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바울은 자기 민족에게 영적 구원의 부흥이 없이는 민족의 내일을 결코 낙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자기 민족에게 주시고자 했던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6.25는 비극이었습니만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후 한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이 6.25직후였기 때문입니다. 1950.6.25가 발발하던 그 날 주일 저녁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영락 교회 한 경직 목사님은 매우 예언적인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불행이라도 의로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행복으로 바뀌도록 하십니다. 지금 38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도 우리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 큰 영광의 결과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우리가 더욱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6.25의 불행 속에서 한 목사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붙들었고 우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교회는 부흥되었고 민족은 재건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6.25전쟁 속에 리더십을 발휘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 가지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분의 중요한 민족적인 기여의 하나는 한 경직 목사님 등의 청원을 수용하여 우리나라 군대 안에 군목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고 군과 학교 등에서 신앙 강연이 가능하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이런 제도가 민족 복음화를 앞당기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다음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족 복음화에 유익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자기 의보다 하나님의 의에 관심을 가진 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 민족의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그들의 종교적 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롬10:2-3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얼마 전 인천에서 일단의 그릇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6.25의 영웅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 시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맥아더가 전쟁 광이요 살인광인 것처럼 오도된 선전 시도를 했습니다만 맥아더가 얼마나 선교사의 마인드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아는 사람은 적은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후 그가 일본에 대하여 가진 가장 큰 관심은 일본의 복음화였습니다. 1947년 당시 일본 내 선교사의 총수가 315명이었는데 맥아더 장군이 미국 교계에 직접 호소한 결과로 1950명 일본 선교사 총수는 2,500명이 되었고, 그는 록펠러 재단에 직접 연락하여 일본에 기독교 대학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 1,000만권의 일본어 번역 성경이 일본에 전해지도록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한국전 참전을 결심하면서 그는 이런 기도를 남깁니다. “하나님, 또 하나의 전쟁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 작은 한반도 땅에 하나님의 의를 전할 수 있다면 기꺼이 저를 써 주소서.”저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쓰셔서 우리 민족을 구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는 1950.9.29 수도 서울을 회복한 후 환도 행사에서 “이 행사에 요구하실 것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주기도문을 함께 드릴 것을 제안합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 옵니다. 우리의 내일의 역사를 위해서도 우리는 또 한번 주께서 우리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에 헌신할 지도자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민족의 영적 부흥과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