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베트남 기행 최 건 차
전선이 불확실하고 치열했던 1960대의 전황을 회상하며 베트남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한류의 열풍을 타고 전 세계인들이 우리나라를 찾아 들고 있다. 한국인들도 가까운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와 전 세계로의 나들이가 한창이다. 특히 베트남을 향한 발걸음이 잦아져 우리 문학인들도 가보게 되었다. 2025년 5월 역사문학기행으로 베트남을 찾았을 때 나는 참전한 작가로 동행했다. 캄란공항에 내려 아름다운 해안 도시 나트랑과 하얀 비닐 농장이 광활하게 펼쳐진 고원의 휴양도시 달랏를 탐방했다.
2026년에도 베트남에 가볼 기회가 또 생겼다. 우리 목회자들의 년 중 행사이기도 한 하기 수양회를 다낭으로 가게 되었다. 57년 전, 베트남전 참전 시 나는 육군 중위로 나트랑에서 칸보이(호송차량) 소대장으로 작전을 수행 중, 캄란에 있는 미군 전투선박부대에 파견되었다. 미군 수륙양용정으로 해안기지에 보급품을 실어나르다가 베트콩의 기습을 받고 접전을 펼쳤던 정황들이 선명하다. 캄란은 베트남전을 수행하는 미군과 한국군 및 참전국 장병들의 장비와 보급품을 저장 보급하는 미군기지였다.
중요한 캄란기지를 베트남 정규 육군이 지키다가 베트콩들에게 밀려 빼앗겨버렸다. 미군의 인명 피해는 물론 전투용 장비들과 엄청난 양의 보급품과 전투식량(C-레이션)을 탈취당해 전략적인 피해가 막심했다. 이에 주베트남 참전 미군 사령관이 주베트남 참전 한국군 사령관을 급하게 찾게 되었다. 그는 우리 미군은 베트남군을 믿지 못하겠으니 한국군이 나서서 캄란기지를 되찾아주기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이에 우리 한국군은 백마부대가 가까운 닌호아에 있었지만, 천하무적으로 귀신을 잡는다는 용맹한 해병대의 제2여단 청룡부대로 하여금 탈환 작전을 즉시 감행케 했다.
청룡은 캄란기지 일대를 철저하게 수색하며 베트콩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치열하고 살벌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기지 전체를 회복하여 미군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백마 사단이 책임지고 J 대령의 30연대가 경계를 맡게 되었다. 청룡부대는 또 다른 작전으로, 미군의 중요한 전술기지인 중부해안 다낭으로 갔다. 그곳 미군기지를 경계하며 베트콩 소탕전을 펼쳐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캄란에서 미군들과 연일 작전을 수행하느라 다낭에서 승전보를 보내는 청룡부대에 가볼 기회가 없었다.
드디어 2026년 4월 하순, 팔순의 은퇴목사 작가로 다낭 땅을 밟게 되었다. 이곳에서 전사한 청룡용사들을 추모하자니 감정이 북받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무렵 나는 대위로 진급하여 중대장직을 수행하다가 참전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였다. 이후 군 복무를 명예롭게 마치고 목사가 되어 수원에서 1990년대 노회장과 경목위원장직을 수행하면서 목회자들을 인솔하여 베트남 전적지를 두어 차례 탐방했다. 그때의 형편은 무척 열악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한국을 모델로 많이 발전하고 있다.
프랑스의 지배와 잦은 외세에 저항하면서 단련된 베트남인들은 국익과 동족의식이 매우 강하다. 과거를 접어두고 도움이 된다면 어제의 적과도 손을 잡지만 싫어지면 금방 돌아서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내가 참전했을 당시에는 중공의 지원을 받으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철수케 한 후 공산주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그 후 중국과의 국지전에서 중국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였으며, 소련의 도움을 받으며 캄란기지를 사용케했다가 소련도 쫒아내버렸다. 베트남을 정리해보면 프랑스를 물리치고, 미군을 철수케 하고, 중국과도 맞섰으며, 소련도 나가게 하는 정도의 국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전쟁의 상흔들이 싹 지워진 듯하고 발전의 급물살만 흐르는 모양새다. 칠레 다음으로 긴 해안선에 석유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고, 2모작 이상으로 쌀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로 꿈틀대는 것 같다. 다낭과 호이안 거리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무척이나 많은데 그들 중 1/3 정도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보인다. 나는 그 당시의 전투 트라우마와 지금의 풍광이 뒤섞여지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번 3박 5일의 일정이 버겁게 느껴지는 중에 바나산(1487미터)를 오르게 되었다. 여러 갈래의 케이블카와 산 위에 펼쳐진 시설의 규모가 웅장하고 대단해 보였다. 특히 고풍스러운 서구식 건물 안으로 가동 중인 상당한 규모의 맥주공장이 있고 생맥주도 한 잔씩 마시게 내주었다.
긴 해안의 중남부에 있는 다낭은 이웃 호이안과 더불어 베트남 3대 도시로 해외 무역항이다. 시가지 중심에 ‘한강’이라는 제법 큰 강이 마치 우리나라의 ‘한강’처럼 흐르고 있다. 5천여 명 이상의 교민들과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아서인지 ‘경기도 다낭시’라고 회자 되고 있었다. 우리 교민이 경영하는 식당에 들렸드니 ‘경기도 다낭시 한강식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로고의 현수막이 살갑게 보였다. 넓은 식당에는 순 한국식으로 식단이 잘 차려져 있어 입맛대로 골라서 흡족하게 먹을 수가 있었다.
다낭과 호이안에는 세계인들이 다 모여드는 듯이 북적인다. 호텔과 상점에서 달러를 받지 않고 베트남 화폐 ‘동’으로 받고 있어 불편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들에게는 1천 원짜리부터 다 받아주고 있어 편리해서 이게 우리의 위상인가 싶어 흐뭇했다. 베트남에 가톨릭 성당이 처음 세워졌다는 다낭성당을 탐방하고서 한인연합교회를 찾아 예배드리고 귀국길에 오르려고 한다. 언제 다시 베트남에 오게 될지 모르는 형편이라 전사한 동기생들과 부하들의 얼굴이 주마등 쳐 가슴이 저린다. 2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