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전쟁을 읽다가,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라는 부분의 글이 상당히 감명깊어서 한번 올려봅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써 유럽사회는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 역사를 느껴볼수가 있더군요..[무슨말?!]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달이 중천을 넘어가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어둠 속에 빨간 꼬리를 길게
끌며 폭죽 세 줄기가 떠오른 것이 신호였다. 16만 전군이 투입된 총공격이 시작
된 것이다.
함성 소리가 전체 전선으로 번져갔다. 공격의 주력은 역시 성 로마누스 군문
을 중심으로 한 메소티키온 성벽으로 향했다. 시내 교회에서 경종이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총공격의 선봉에 선 것은 부정규군단 병사들이었다. 5만 병사들이 성벽 전역
에 쇄도했다. 장비도 제각각이고 무기도 창이나 검, 혹은 밧줄 사다리를 지녔을
뿐이다. 필사적으로 방책이나 성벽에 매달리려 하지만 방어도 굉장한 기세여서
투르크 병사들은 픽픽 쓰러져만 갔다. 포격은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날아
온 포탄에 투르크 병사들까지 쓰러졌다. 북과 나팔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진다.
여기 맞서기라도 하듯 신의 자비를 간원하는 여자들의 높고 날카로운 기도 소리
가 시내 가득 울려퍼졌다.
성벽에서는 기도할 여유도 없었다. 부정규군단 5만 명은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칼을 뽑아들고 등뒤에 버티고 선 예니체리 군단이 두려워 물러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첫번째 공격의 물결은 두시간 뒤 투르크 쪽에 상당한 피해
를 입히고는 일단 수습되었다.
메메트 2세는 부정규군단 병사들의 결점을 낱낱이 알고 작전을 짜 놓았다. 통
일성도 없고 전투력도 떨어지는 부정규군단이지만, 수비병을 지치게 할 수는 있
다. 부정규군단이 철수한 것과 거의 동시에 방위측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술탄
의 두번째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빨간 투르크식 모자에 하얀 군복으로 의상을 통일한 정규군단 병사들의 수는
5만이 넘었다. 전투에 익숙한 병사들이라 대열 하나 흐트리지 않고 전진한다. 더
구나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성벽 전체에 공격을 가할 것처럼 보여 수비병들을 제
자리에 묶어 두면서 메소티키온 성벽에 주력을 집중시켰다.
메메트 2세는 같은 투르크인, 같은 이슬람교도인 그들이 전투를 벌일 때에도
포격을 계속하게 했다. 성 로마누스 군문 근처의 방책이 튀어오르고 거기 매달
려 있던 투르크 병사 한 무리를 하늘 높이 날려 버렸다. 주변은 자욱한 흙먼지
와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에 몸을 가린 200명 정도의 병사
들이 파괴된 외성벽 틈새로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때를 놓치지 않고 달
려온 병사들에게 대다수가 족음을 당하고 나머지는 외호로 도망쳐 갔다. 포격이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마다 투르크 병사들을 찾아내 죽이고 격퇴하는 것
이 반복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공격 제2선도 제압하지 못했을때 제3선이 밀어
닥쳐 왔다.
달이 끊임없이 구름에 가리워 모든것이 흐릿하게만 보이는 어둠 속을 하얀 옷
에 녹색 허리띠, 하얀 모자로 복장을 통일한 술탄의 최정예이자 가장 믿음직스
러운 예니체리 군단 1만 5천 명이 발걸음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외호를 가로
질러 성벽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2개 군단처럼 무작정 돌진해 오지 않았다.
보병의 방진은 수비병의 총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쓰러진 병사는 마
치 정해진 수순처럼 한 켠으로 밀어 버렸다. 대형은 한치도 동요하지 않는다. 왼
손에 높이 든 반월도의 칼끝까지도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메메트 2세는 더 이상 후방의 본진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외호 가장
자리까지 가서 거기 선 체로 눈앞을 지나가는 친자식 같은 군단 병사들을 향해
소리 높여 질타와 격려를 하기 시작했다. 투르순은 깜짝 놀랐다. 술탄은 성벽에
서 내리꽂는 총탄과 화살의 사정거리 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술탄 뒤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했을 그이지만 그런 데에 신경쓰고
만 있을 수가 없었다. 외호 옆에 선 주군을 성벽으로부터의 공격에서 지키기 위
해 양팔을 크게 벌리고 술탄 곁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덮칠지도 모를
위험 따위는 투르순에게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예니체리 군단 병사들은 술탄의 격려에 보답하듯 용맹스럽고 과감한 전투를
펼쳤다. 2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메소티키온 성벽에 정예 1만 5천이 투입되었다.
군단은 여러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가 돌격하자마자 다음 부대가 그 뒤를 따랐
다. 이 파상공격은 규칙적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고 그때마다 성벽에 매달린
병사들의 수는 늘어가고 있었다.
방위군은 교대 한 번 못 한 채 연신 밀려오는 적에 맞서 싸우면서도 격투에
잘 버티고 있었다. 특히 집중공격되고 있는 메소티키온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총지휘관 주스티니아니의 제언에 따라 외성벽에서 내성벽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닫아걸고 열쇠를 황제에게 맡겼다. 외성벽을 최종 저지선으로 삼은 것이다. 이곳
에는 그리스인도 베네치아인도 제노바인도 없었다. 그들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지킬 뿐이었다. 아직 젊을 뿐만 아니라 으레 신중한 전투를 하
게 마련인 용병대의 대장인데도 주스티니아니의 지휘는 결단력 있고 용감무쌍함
그 자체였다. 황제도 친히 검을 뽑아들도 외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투르크 병
사들에 맞섰다.
무시무시한 백병전은 1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세상이 그 용맹함을 익히 알고
투르크 육군의 대들보로 소문난 예니치리 군단도 여기서만은 별다는 전과를 얻
어내지 못했다. 적과 아군이 뒤엉킨 덩어리가 성벽을 따라 군데군데 소용돌이처
럼 생겨났다 흩어지곤 했다. 이 모습을 일출 직전의 여명이 희미하게 비추더니
곧 조금씩 분명히 그려내기 시작한다. 격투는 이미 다섯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 가까이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주스티니아니의 왼편 목에 명중했다. 일순
온몸이 굳어 버린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다시 화살이 꽂혔다. 땅에 쓰러진 젊은
장수의 은빛 갑주 틈새로 피가 분수쳐럼 솟구쳤다. 격통을 참지 못한 주스티니
아니는 비명을 지르면서 급히 달려온 부하 한 명에게 배로 데려가 달라 부탁했
다. 내성벽으로 통하는 문과 시내로 통하는 문이 남김없이 잠겨 있음은 부하도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에게 달려가 열쇠를 내주기를 청했다.
외성벽과 방책 사이의 통로를 달려온 황제는 쓰러져 있는 주스티니아니 옆에
무릎을 굻고 그 손을 쥐고는 그곳에 머물라고 청했다. 하지만 그토록 용감했던
이 무장은 넘쳐 흐르는 피에 순간 아직 어린 자기 나이를 되찾은 듯했다. 전선
에서 물러나기를 청할 뿐 황제의 간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열쇠가 주스티니아니의 부하들에게로 넘어갔고, 그들은 제노바의 무장을 후방을
데려갔다.
이 사고가 주스티니아니의 직속 부하 500명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들은 용병이라 불리는 전쟁 전문가들이다. 이기는 싸움에서는 용감하
지만 패색이 보이면 도주도 빠르다. 후방으로 실려가는 대장을 본 순간 이제 전
투는 끝장나 버렸다는 생각이 그들을 휘감았다. 제노바 병사들은 주스티니아니
를 실어나른 뒤 채 닫히지 않은 출구로 밀어닥쳤다. 황제를 필두로 그리스 병사
들이 그들을 제지하려 했다. 성벽 안에서 일어난 이 때아닌 소동을 외호 곁에
있던 술탄이 알아차리게 되었다. 스물 살의 젊은이는 일찍이 들은 적 없는 큰
소리를 내질렀다.
“제 도시는 우리 것이다!”
예니체리 군단 병사들은 일변했다. 전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성벽으로 돌격했
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격퇴당하지 않았다. 방책은 넘은 자는 쉴새없이 외성벽
에 달라붙었다. 방위측은 이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더니, 내성벽에 몸을 의지하
기 위해 외성벽 안쪽 통로로 눈사태처럼 밀려들었다. 통로를 가득 메운 방위측
병사들을 외성벽을 점령한 투르크군들이 화살로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황궁 쪽 수비도 순탄치 않았다. 파괴된 곳을 비집고 들어오는 투르크 병사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제는 격퇴가 불가능하리만치 많아졌다. 이윽고 성문 하나
가 붕괴해 버렸고 그곳을 통해 술탄 투르크 병사들이 밀어닥친 뒤로는 완전히
절망적인 형세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계속 싸우고 있던 베네치아인들은 탑 위
에서 휘날리던 제국 깃발과 베네치아 국기가 내려가고 그 자리를 하얀 반달이
그려진 붉은색 투르크 국기가 대신하는 것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아
차렸다. 트레비사노는 병사들에게 금각만으로 철수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탑 위에서 휘날리는 투르크 국기를 황제도 보았다. 백마를 달려 성 로마누스
군문까지 가서 아군 병사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병사들도 이미 붉은 깃발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병사들은 도주
로를 찾아 허둥지둥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외성벽을 완전 점거한 투
르크군이 양떼에 몰려든 늑대처럼 이들은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
황제는 이제 다 끝났음을 알았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은 세 명밖에 안
되는 기사들. 그리스 기사 한 명과 달마티아 출신 사내 한 명, 그리고 스페인 귀
족 한 명뿐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말을 버렸다. 말에서 내려 계속 싸우리라 마
음먹었다. 그러나 주위가 너무나 혼란스러워 싸움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황
제의 사촌이기도 한 그리스 기사는 포로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외치며 적과
아군이 뒤얽힌 속으로 뛰쳐들어갔다.
황제는 주홍색 망토를 버렸다. 제위를 나타내는 문장도 벗어던졌다.
“ 심장에 창을 꽂아 줄 기독교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누군가는 그가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는 검을
뽑아들고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적군 한가운데로 모습을 감췄다. 두 기사가 뒤를
따랐다.
성벽 함락을 알리는 폭죽이 투르크 진영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내리비추어 밤에 솟아올랐던 폭죽만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투르크 병
사들은 재빨리 알아차렸다. 전군이 북소리를 울리며 성벽으로 밀어닥쳤다. 그 순
간까지도 적을 막아내고 있던 페가에 문 근처 수비병들 중에 이 폭죽의 의미를
놓치는 병사는 없었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도망
칠 곳은 금각만에 떠 있는 배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는 금각만에서 가장 먼 곳.
초조해진 그들은 충분히 격퇴할 수 있는 적과도 맞서려 하지 않았다. 오직 공포
만이 그들을 지배했다. 성벽을 넘어온 투르크 병사가 성문을 열어 주자 수많은
병사들이 밀려들어왔다. 일찍이 제국이 흉성했을 때 황제들이 전승을 거두고 개
선하던 황금문도 이런 식으로 방치되어 여기서도 투르크 병사들은 거칠 것 없이
시내로 밀려들어왔다.
공방전 기간 동안 적과 상대한 적이 한번도 없는 마르마라 해 쪽 성벽도 이날
5월 29일 아침만은 무사할 수 없었다. 육지 쪽 성벽 함락을 알리는 폭죽이 솟아
오른 것을 본 투르크 해군은 이에 뒤질세라 남하를 시작하여 마르마라 해 쪽으
로 난 작은 선착장 두 군데로 상륙했다. 선착장 앞에 난 성문 부근 주민들은 저
항해도 별 수 없음을 알아차렸는지 일찌감치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그곳 바로
남쪽을 지키고 있던 투르크 망명 왕자 오르한과 휘하 투르크인들은 손써 볼 틈
도 없이 밀려든 투르크 병사들에게 포위되었다. 왕자도 그의 부하도 술탄 앞으
로 끌려나가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배나 더 많은 적에 맞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왕자는 말 위에서 몸을 던져 아군 한 명
이 자기 쪽으로 내민 검 위로 떨어져 세상을 등졌다.
스페인 영사 펠레 프리아와 휘하 카탈루냐 병사들도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들
은 전원이 포로가 될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바로 북쪽을 지키고 있
던 이시도로스 추기경이 당면한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처음 공방전
이 시작될 때 적이 노릴 공산이 적다고 판단해서 병사들 대부분을 육지쪽 성벽
으로 보냈기 때문에 여기 남아 자신을 지켜줄 병사는 이제 거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일 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의 대리가 아닌가. 술탄이
황제 다음으로 찾아나설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붙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지상
에 있는 신의 대리인이자 전 카톨릭 교회의 대표자인 로마 교황이 이슬람교도
술탄의 포로가 되는 셈이다. 추기경 이시도로스의 시선은 마침 자기 곁을 지나
던 한 걸인에게 머물렀다.
워낙 시내가 넓었기에 방위군이 붕괴된 사실을 콘스탄티노플 주민 모두가 곧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도주해 오는 아군 병사들과 그들을 쫓아오는 투르크
병사들은 본 뒤에도 절망에 빠져 금각만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
리스인들이 도망쳐 간 곳은 도시의 동쪽 끝 근처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이었
다. 전승은 이렇게 말했다.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어 적이 성 소피아 대성당까지
밀려올 것이나, 그때 대성당 원형 지붕에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하여 그들은 보
스포루스 해협 동쪽으로 떨쳐낼 것이라고. 사람들은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광대한 성 소피아 대성당 안이 도망쳐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청동 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뒤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금각만 안의 기독교 함대도 황궁 탑 위에 투르크 국기가 걸리는 것을 보고 폭
죽 소리가 몇 번 나는 것을 듣고는 육지 쪽 성벽이 돌파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방어 사슬 밖의 적 함대와 금각만 안쪽 함대 모두가 동원되는 일제 공격에 대비
해 함대는 즉각 전투 대형을 갖췄다. 그런데 투르크 함대 선원들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기독교 함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육지 쪽 성벽으로 침입한 아군
이 자기들보다 먼저 전리품을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방어 사슬 밖
의 투르크 함대는 마르마라 해 쪽 선착장을 통해 시내에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
가려고 기독교 함대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금각만 안쪽의
투르크 선박들도 황궁 근처 성문을 통해 침입하기 시작한 자가노스 파샤군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만만치 않은 적인 기독교 해군은 그대로 놔 둔 채 훨씬 더
손쉬운 사냥감을 찾아 성문으로 쇄도했다.
이는 금각만 안에 있던 기독교 함대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은총이나 다름없었
다. 트레비사노를 대신해 함대를 총지휘하던 디에도는 휘하 선박 선원에게 언제
든지 출항할 수 있도록 뱃머리를 밖으로 하여 선착장에 정박하고, 도망쳐 오는
사람들은 최대한 많이 탑승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고 있
음을 확인한 디에도는 또 다른 선장 한 명과 니콜로를 데리고 보트를 몰아 금각
만을 건너서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로 향했다.
마중나온 거류구 행정관 노멜리노에게 디에도는 말했다.
“앞으로 당신들은 어떻게 할 거요? 여기 남아서 싸울 거요. 아니면 다 팽개
치고 도망칠 거요? 만일 당신들 제노바인이 일치단결해서 싸운다면 우리 베네치
아인들도 행동을 같이하겠소.”
행정관 로멜리노는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지막 총
공격 직전에 술탄의 사자가 와서 거류구의 중립을 재확인하고 갔던 것이다. 하
지만 그런 말을 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로멜리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
로 말했다.
“일단 시간을 좀 주지 않겠는가. 술탄에게 사절을 보내 술탄이 제노바 거류
구의 중립만 인정하는 게 아니라 베네치아 거류구와도 강화할 생각이 있는지 알
아보고 싶네만.”
이렇게 급박한 때에 그런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디에도는 그저 경멸감을 얼
굴에 띤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담을 마친 뒤 타고 온 보트에 올라타기 위해 발길을 옮긴 세 사람 앞에 거
류구 성문은 모조리 닫혀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콘스탄티노플의 불
행을 덤덤하게 보고 넘길 수만은 없는 사람들이 이곳 제노바 거류구에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성문을 열어 줘서 세 베네치아인은 다시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거류구 선착장에서는 술탄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족을 데
리고 잇달아 배에 오르고 있었다.
세 사람이 콘스탄티노플 쪽 선착장에 닿았을 때 구출작업은 최고조에 달해 있
었다. 도망쳐 오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가뜩이나 그다지 넓지 않은 선
착장은 순식간에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개중에는 떠밀려 바닷물에 빠지는 사
람들도 있었다.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선원들은 침착하게 한 사람 한 사람씩 배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선착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거
의 다 배에 올라탔고 도망쳐 오는 사람들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니콜로
는 부상자를 치료해야 하는데도 왠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선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트레비사노가 없다. 대사 미노트도, 베네치아 거류구의 유력자들 중
몇 명도 구출된 사람들 속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들과 더불어 트레비사노의 모
습 역시 어떤 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휘를 맡고 있던 디에도는 구출작업 때문에 더 이상 만안에 머물면 위험해진
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탄 갤리선에 닻을 올리라 명하고 다른 배에도 뒤를
따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직도 사람들은 도망쳐 오고 있었다. 그들은 배가 떠나는 것을 보고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차마 미련을 떨칠 수 없어 해안선을 따라가며 평
소보다 천천히 움직이던 배들이 이들을 모두 건져올렸다. 니콜로가 탄 배도 바
다에 뛰어들긴 했어도 수영을 못해 허우적거리던 한 사람을 구해 냈다. 피렌체
상인 테탈디였다. 베네치아 상관에서 가끔씩 마추쳤던, 아직 수염도 덜 자란 피
렌체 출신 학생의 모습은 배 위에 죽은 듯 누워있는 사람들 속에도 없었다. 그
리고 곁에 있기만 해도 주위를 안심시켜 주는 육신의 소유자 트레비사노 제독은
끝내 선착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디에도의 갤리선은 금각만 안에 있던 모든 배들에 자신을 따르라는 신호를 보
내면서 아직 봉쇄된 채로 있는 방어 사슬로 향했다. 방어 사슬에 닿을락말락해
지자 선원 두 명이 보트를 내려 콘스탄티노플 쪽에 탑에 묶에 있던 가죽끈을 끊
었다. 잘린 방어 사슬이 곧 파도에 떠밀리고 사슬을 떠받치던 뗏목들이 해면 위
를 표류한다.
갤리선은 그 틈새를 비집고 외해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 바로 뒤를 일곱 척의
제노바 배가 따른다. 거류구에서 온 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로시니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갤리선 한 척, 이어서 또 한 척의 베네치아 갤리 상선도 탈
출했다. 이 배는 왠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육상 방어에 동원된 선원들
중 150명이나 돌아오지 못한 배였다. 가까스로 금각만을 빠져나온 이 배 뒤쪽에
트레비사노의 갤리 군선이 따라오고 있었다. 승무원 부족은 앞의 배만큼 심하지
않았지만 함장이 없다. 다시 그 뒤로 제노바 배 두 척이 따라온다. 마지막으로
탈출한 배는 크레타 선박 네 척이다. 이 네척의 배는 상당수의 그리스 난민들을
태우고 있었다.
금각만에는 아직도 비잔틴 배 열 척, 제노바 배 두세 척, 거기에 화물전용 베
네치아 범선을 더해 최소한 스무 척 정도가 남아 있을 것이다. 디에도는 이들
배가 뒤늦게 온 사람들을 모두 구해서 금각만을 탈출해 주기 바라면서 보스포루
스 해협 출구 근처 해상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탈
출해 온 배는 한 척도 없었다.
디에도로서는 본연의 임무를 떠올린 투루크 함대에 의해 해상에서 동료들을
기다리는 자기 함대가 공격받을 위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강
한 북북동풍이 불고 있지만 이 바람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그는 이 바람이 부
는 동안에 최종적인 탈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를 제노바 배에 알리자 선원들
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 배는 대형 범선이라서 바람만 잘 받으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적어도 해질 때 까지는 기다려 보고 싶
습니다.”
방어에 강한 제노바 대형선이 일곱 척이나 있으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음
은 디에도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일단 베네치아 선단부터 출발시키기로 했다.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베네치아 배 네 척과 크레타 갤리선 네 척은
두 개의 돛대에 펼친 삼각돛에 강한 북풍을 가득 안고서 마르마라 해를 남하하
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이어 이제 대투르크 최전선이 되어버린 네그로폰
투스가 일차 기착지이다.
멀어져가는 콘스탄티노플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은 이들 배에 한 명
도 없었다. 전투라면 신물이 나는 군용 갤리선 선원들 마저도 굳게 다문 채 수
평선 건너로 흐릿해져가는 `기독교를 믿는 로마인의 도시`에서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는 밀려들어온 투르크군이 규율이고 뭐고 없이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았다. 허락된 사흘 동안 약탈한 것은 모두 자기 것이 된다. 이
런 식이라면 반항만 하지 않으면 적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음을 그리스인들은
재빨리 알아챘다.
실제로 살해당한 자는 4천명이 될락말락했다. 4만 명 가까운 사람이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대도시 함락치고는 당시로서는 그리 심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살해된 사람들 대다수는 적의 돌입 직후에 죽었다. 투르크인들은 시내의 전투원
이 8천 명도 안 된다고는 믿을 수 없었기에 아직도 안에는 본대가 웅크리고 있
을 거란 생각에 돌입 직후 눈에 띄는 사람들을 공포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죽여
댄 것이다. 성벽 수비병들 중에 전사자가 많은 것도 어느 정도는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피로 도시는 큰 비가 내린 것 같았다는 것도 성벽
에 가까운 지역에서 펼쳐진 광경이었다.
워낙에 투르크인들은 친부모를 죽인 자라도 죽이기보다는 노예로 팔아 돈을
버는 쪽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있던 사람들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주저하지
않고 노예로 삼았다. 이리하여 도망치지 못한 주민들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다.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도망친 사람들도 반월도를 든 투르크 병사들의 말에 아무
저항 않고 밧줄에 묶였다. 시내에 수없이 많았던 수도원, 수녀원도 투르크 병사
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녀들 중에는 이교도의 손에 넘어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안뜰 우물 속에 몸을 던진 사람도 몇몇 있었지만, 성직자들 대부분
은 순종의 미덕에 따라 수도원장의 명대로 저항하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 저항
하지 않았는데도 죽음을 당한 이들은 노예로 팔 수 없는 노인들이나 갓난아기들
이었다.
투르크군은 포로가 된 사람들을 신분이나 남녀 구별도 없이 두 줄로 늘어세워
흔한 그물이나 여자들이 쓰고 있던 얇은 비단으로 포박했다. 비명이 일어나는
것은 용모가 빼어난 젊은이나 여자를 차지하려는 투르크군이 그들 대열에서 끌
어낼 때문이었다. 그럴 때를 빼고 나면 포로들은 마치 온순한 양떼 같았다. 절망
으로 퀭해진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끄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황궁이나 교회는 물론이고 서민들의 집도 약탈을 피해갈 수 없었다. 투르크
병사들은 앞다퉈 물건을 실어날랐고 관심이 없는 것은 그 자리에서 부수고 불태
웠다. 수많은 성상이 깨어지고 태워졌으며, 보석이 도려내어진 십자가가 길바닥
에 나뒹굴었다.
정오가 좀 지날 때까지 메메트 2세는 천막에 머물면서 자신을 찾아온 갈라타
의 제노바 거류구 대표와 포로가 된 비잔틴 제국 중신들을 불려들여 만났다. 그
가 무엇보다도 알고 싶었던 것은 황제의 행방이었다.
제국 중신들은 한결같이 황제는 전투가 극에 달했을 때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 직후 황제의 목을 베어 왔다는 투르크 병사 두 명이 당도했다. 그들
이 가져온 목을 보이자 중신들은 예외없이 황제라고 했다. 메메트 2세는 그 목
을 성 소피아 대성당 근처에 있는 원주 위에 걸어 놓으라고 명했다. 두 투르크
병사는 이 목을 베어 온 사체에는 독수리 문장이 수놓인 양말이 신겨 있었다고
했다. 메메트 2세로서는 황제가 죽은 것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
이 모든 것을 끝낸 다음 젊은 승리자는 안으로 들어가 잠시 동안 입성을 위한
몸단장을 했다. 하얗고 두꺼운 비단 망토 밑으로 하얀 옷에 녹색 허리띠를 맨다.
머리에 쓴 하얀 터번에는 커다란 녹색 에메랄드가 빛을 발한다. 허리에 찬 반월
도는 눈부시게 번뜩이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몸단장을 끝낸 메메트 2세는 천막 밖에 백마를 타고 대령하라고 투르순에게
명했다. 56일 동안 늘상 타고 다니던 흑마를 승리의 순간 입성할 때에도 타리라
생각하고 있던 투르순은 일순 귀를 의심했지만 곧 주인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
다. 시동은 공손히 절하고 마부장에게 백마를 준비하라고 이르기 위해 천막을
나섰다.
스물한 살의 젊은이는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났을 때 대신들과 장군들, 거기에
이슬람교 고승들까지 거느리고 예니체리 군단 정예병의 호위를 받으며 카리시우
스 문을 지나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그는 이제서야 자기 것이 된 이 도시를
차분히 음미하려는 듯 큰 길위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약탈에 제 정신이 아닌
병사들이나 포로들의 침묵의 행렬에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성 소피아 대성당 앞까지 왔을 때 메메트 2세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몸을
숙여 한줌 흙을 쥐어 터번 위에서부터 흩뿌렸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주인이 알
라 신 앞에 겸허함을 표한 것임을 투르순도 알 수 있었다.
술탄은 걸어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토록 많던 그리스인들이 모두 끌려
나간 지금, 구석진 곳에 늙은 몇 명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 투르크 병사
가 교회의 대리석 포석을 끌어내려 하는 것을 본 술탄은 처음으로 노성을 질렀
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약탈을 허락했지만, 도시와 거기 있는 건물들은 술탄의
전리품인 것이다. 그 투르크 병사는 즉시 밖으로 내쳐졌다. 승자의 노성에 더 움
츠러든 늙은 승려들에게 메메트 2세는 그저 수도원으로 돌아가라 일렀을 뿐이
다.
더 안쪽으로 들어간 메메트 2세는 벽면을 메운 모자이크가 내뿜는 장엄한 색
채의 홍수에 잠시 찬탄의 눈길을 보냈지만, 이내 대신들을 돌아보며 이 교회를
즉시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했다. 모스크로 바꿀 때 제일 먼저 없어지는 것은 벽
면의 모자이크이다.
그러는 동안 이슬람 고승 중 한 명이 설교단에 올라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
도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메메트 2세도 제단에 올라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승
리를 가져다준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성 소피아 대성당을 나온 술탄은 근처에 있는 황폐해진 구 황궁에 들른 뒤 마
찬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고대 로마식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연후에 또 다른
큰 길을 따라 폐가에 문을 나서서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술탄의 순시가 이
뤄지는 동안 저항의 총소리 하나 나지 않았고 정복된 사람들 중에 말 앞을 막아
서는 사람 하나 없었다. 콘스탄티토플은 술탄 메메트 2세 앞에 완전히 굴복한
것이다.
비잔틴 제국은 지상에서 소멸하고 그 자리에 투르크 제국이 출현했다.
에필로그
속히 황제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시내 예비군을 모으는 데 힘을 쏟
고 있던 프란체스는 성이 함락될 때 밀려들어온 적군에 포위되어 주변에 있던
그리스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성실하고 소박한 성격처럼 체격도 평범한
그는 당시 지위에 어울리는 무장도 갖추고 있지 않아서 투르크 병사들은 그를
잡아 놓고도 이 사내가 비잔틴 제국의 대신일 뿐 아니라 황제의 제일가는 측근
임을 전혀 알지 못한 것 같았다.
일개 병사 취급을 당한 프란체스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이열 종대로 서서 성
밖 투르크 진영까지 끌려갔다. 그곳에서 투르크 병사들은 포로를 서로 나눠 가
졌고 여기서 주인으로 정해진 투르크 병사의 천막 밖에서 프란체스는 다시 한
달 동안을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그리고 메메트 2세가 정복한 도시의 관리를
중신 한 사람에게 맡기고 아드리아노폴리로 돌아가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출발
한 6월 26일, 승리자를 따라 아드리아노플리로 향하는 포로들의 기나긴 행렬 속
에는 프란체스도 들어 있었다. 포로가 너무 많아서 술탄의 백마가 지평선 서너
로 사라진 뒤에도 행렬 끝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 콘스탄티노플 성문 앞에 있었
다고 한다.
이 한 달 동안 프란체스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최대의 문제는 황제의 시
신이 어디로 갔는가였다. 황제가 용맹스럽게 싸운 끝에 적의 창검에 숨을 거뒀
다는 소식은 포로들 사이에도 바람처럼 번지고 있었지만, 그 시신이 어떻게 되
었는지는 누구 하나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다. 프란체스는 술탄 앞에 대령되어
황제라 말한 그것이 황제의 목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충심을
다해 섬기던 그 분은 비잔틴 제국 최후의 황제에 어울리는 죽음을 택했다. 그것
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며 위안할 뿐이었다.
또 하나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아내와 아들딸의 행방을 찾는 일로 그것도 쉽
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래도 모든 포로들의 관심사여서 주의를 기울이면 정보를
얻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아내가 다른 투르크인 소유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노폴리에 닿은 지 얼마 뒤, 아들도 딸도 모두 술
탄이 직접 궁정 노예로 고른 젊은 남녀들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술탄의 마부장 소유의 노예가 된 프란체스는 일단 자신의 자유를 사야만 했
다. 아직 그리스인이 지배하고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사는 사람들도, 이미
투르크 지배하에 든 지방의 그리스인들도 너나할것 없이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노예가 된 동족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에 그들 중 한 사람에게서
빌린 돈으로 노예 생활 18개월째에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다음은 아내의 자
유를 사야 했다. 이것도 프란체스가 제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해 왔는지 알고 있
던 사람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아버지에게로 아들과 딸의 비보가 전해져 왔다. 술탄의 하렘에 들어간 딸
은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아직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도 술탄의 욕
망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더 이상 투르크인의 나라에 머물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다. 프란체스는 아내를
데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를 영유하고 있는 황제 토마스 팔레올로구스에게
몸을 의탁했다. 거기서 관직을 맡아 살고 있다가 1460년에 이르러 메메트 2세가
여기마저도 정복해 버리자 토마스를 따라 베네치아령 코르푸 섬으로 망명했다.
그뒤 몇년 동안은 팔레올로구스 망명 정권의 일원으로 참가해 로마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여러 나라에 사절로 가기도 했지만 1468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1477년에 죽을 때까지 수도사로 삶을
보내면서 <회사롱>을 썼다. 프란체스가 처한 입장만으로도 이 기록은 비잔틴
제국 최후의 날을 알려 주는 그리스 쪽의 제일가는 사료로 간주되고 있다.
경애해 마지않던 황제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 장본인으로 프란체스가 내심 미
워하던 비잔틴 제국 재상 노타라스 앞에 놓인 운명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극적이
었다.
중신들과 함께 포로가 된 노타라스의 신분은 처음부터 누가 봐도 뚜렷했다.
사람들이 전하는 애기에 따르면 재상은 정복자 앞에 금화와 재보를 받쳐든 채
나타났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메메트 2세는 당시
노타라스와 여러 중신들을 후대하고 앓아 누운 노타라스의 아내에게 병문안까지
갔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포로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
다. 하지만 노타라스의 아들이 세상이 다 아는 미소년이라는 애기가 술탄의 귀
에 들어갔는지,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보내라는 술탄의 명을 전하는 사
자가 노타라스를 찾아왔다.
이때 황족이기도 한 재상 노타라스의 핏줄 속에 흐르던 비잔틴제국 귀족의 피
가 눈을 떴다. 재상은 승리자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다. 반응은 곧 나타났다.
전원 참수형. 노타라스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타난 투르크 병사를 향해 아직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동요하면 안 되니 먼저 아들을 죽여 달라고
청했다. 소년과 소년의 동년배인 사촌의 목이 베이는 것을 본 뒤 그 또한 목을
길게 늘였다. 메메트2세는 그전부터 제국의 지배계급을 근절하리라 생각하고 있
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결말은 언젠가 올 것이 좀더 빨리 온 것뿐이었다.
한편 황제가 독신으로 있었던 비잔틴 궁정에서 모후가 세상을 떠난 뒤로 제일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뽐내던 노타라스의 아내도 아드리아노폴리로 가던 도중 병
사했다. 노타라스 가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포위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재산을
가지고 베네치아로 떠난 딸 한 명뿐이었다.
포로가 된 사람들 중에는 작전회의 석상에 동석하면서도 노타라스가 말 한 번
걸지 않을 만큼 합동 반대파의 증오를 고스란히 받았던 이시도로스 추기경도 있
었다. 하지만 머리에 입은 상처를 돌보기 위해 얼굴을 가릴 정도로 붕대를 둘렀
고 자신의 화려한 옷을 걸인의 옷과 바꿔입은 까닭에 적군들 중 어느 누구도 이
너저분한 노인이야말로 자신들이 황제 다음으로 찾아다니는 로마 교황의 대리임
을 알아보지 못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 불행한 걸인은 곧바로 참수되었다
고 한다.
이시도로스는 그뒤에도 운이 좋았다. 하루빨리 현금을 쥐고 싶어한 투르크 병
사들이 이시도로스가 포함된 포로들 무리를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로 팔러 갔
기 대문에 아드리아노폴리까지 끌려갈 일도 없었다. 이시도로스를 비롯한 포로
들을 사서 곧 바로 자유를 돌려준 제노바인은 그 중에 추기경이 있다고는 생각
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뒤 여드레 동안 그는 거류구 안의 여러 집들을 전전하
면서 숨어 지냈지만, 술탄이 제노바 거류구에도 항복을 요구하고 거류구가 투르
크 지배하에 들어가자 그것도 위험해졌다.
그리스 하층민으로 변장한 추기경은 소아시아로 가는 투르크 배에 올라 탈출
했다. 소아시아의 항구에 닿은 뒤에는 고생고생하며 여행한 끝에 제노바 식민지
포체아까지 갈 수 있었다. 여기서 주민 몇 명이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제노바
식민지라고는 하지만 투르크령에 포위된 섬 같은 곳. 추기경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탈출을 결심하고 간신히 구한 보트에 의지해 일단 제노바령 키오스 섬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인 만큼 도저히 안
심할 수 없었던 그는 출발 직전의 베네치아 배에 도움을 청했고, 이 배가 그를
태우고 크레타 섬까지 왔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크레타
는 투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반투르크 기치를 선명히 내건 베네치아의
식민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크레타에는 적어도 6월 말까지는 머물렀던 것 같다. 로마 교황 앞으로 두통,
맹우 베사리온 추기경 앞으로 한통, 베네치아 공화국 원수 앞으로 한 통, 그리고
전 카톨릭교도에게 부치는 것으로 생각되는 서한 한통, 이렇게 합계 다섯 통의
서한을 그는 이곳에서 작성했다. 이 서한들에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양상이 상
세하게 적혀 있었다.
베네치아를 경유해서 로마로 돌아간 것은 같은 해 11월 말이었던 것 같다. 로
마에서 대투르크 십자군을 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
한 채 눈을 감은 것이 146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10년이 지났을 때였다.
재상 노타라스 같은 소극적 반대가 아니라 명확하고도 적극적으로 합동에 반
대한 게오르기오스도 콘스탄티노플 낙성에 즈음해서 포로가 된 사람들 중 한 명
이다. 교회나 수도원에 재산이 많다는 것은 투르크군 말단 병사들도 다 알고 있
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가 있던 수도원도 철저히 약탈되었다. 그리고 수도사들
도 저항하지 말라는 게오르기오스의 명령을 충실히 지켜 순순히 적의 포로가 되
었다.
아드리아노폴리로 끌려가는 길 내내 게오르기오스는 포로가 된 사람들을 격려
하고 이 불행한 자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데 전념했다. 몸에 걸친 승복은 보잘것
없어도 고귀한 기풍이 전신에 흐르는 게오르기오스에게는 투르크 병사들도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도중에 기력이 다해 쓰러진 사람들이나 끝내
숨을 거두는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해주고 싶다는 그의 청을 순순히 들
어 주었고 그만은 목에 맨 밧줄을 풀어 주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 승려가 어떤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는지까지는 몰라서 그의 행방
을 팔방으로 수소문하던 메메트 2세도 한동안은 그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뒤 아드리아노폴리의 한 부유한 투르크인 집안에 노예로 있던 사람이 그를 알
아본 까닭에 즉각 술탄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메메트 2세는 젊은 혈기 하나만 가지고 아버지가 못한 것도 나는 할 수 있다
고 과시할 생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이 스물한 살 난 투르
크 젊은이는 비잔틴 제국의 구 영토, 즉 전 동지중해 세계를 자기 것으로 하려
면 제일 먼저 교통의 요충이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수중에 넣어야 함을 알았
기에 다른 무엇 보다도 `저 도시`를 원했던 것이다.
젊은 술탄은 자신이 쌓아 올릴 대제국의 수도를 아드리아노폴리가 아니라 콘
스탄티노플에 두리라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도시 운영에 익숙지 않은 투
르크인만 이주시켜서는 안된다. 그리스인이, 동지중해 세계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리스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스인을 도시로 들인다 해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술탄의 신하여야 했다. 그
리스 정교 신앙을 허용하고 일신상의 안전과 자유를 허용하더라도 이는 어디까
지나 투르크인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데 대한 보상이어야 한다. 메메트 2세는 이
런 구도를 실현시키는 데 게오르기오스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
었던 것이다.
술탄의 부름을 받은 게오르기오스는 메메트 2세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니, 명령이기보다는 간원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
주교가 되는 것은 전 그리스 세계 제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됨을 뜻한다. 게오르
기오스는 처음에는 상당히 주저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곤란한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와 술탄 간에 이미 투르크 지배하에 있는 그리스 정교도
와 같은 권리, 즉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아직 어린 소년들을 정기적으로
징집해서 예니체리 군단 병사로 하는 대신 종교의식의 자치를 포함해서 종교의
자유와 신변상의 안전을 보증받는다는 권리에 대해 협정이 성립된 셈이다.
게오르기오스가 대주교 자리에 있었던 것은 1454년 1월부터 1456년 봄까지였
다. 이 기간 동안 여러 교회들이 차례차례 모스크로 바뀌어갔고 대주교의 본당
교회마저도 이리저리 전전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강제
이주된 그리스인들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는 데 전력했을 뿐만 아니라 투르크
지배하에서도 그리스 정교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수많은 조언과 호소를
담은 글들을 쓰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그 깊은 학식에 경의를 품고 있던 메메
트 2세가 자주 그를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대주교가 술탄에게 설파한 기독교의
신앙 원리는 곧바로 터키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게오르기오스도 1456년 여름부터 1457년 사이 어느 땐가에 대주교 자리를
물러나와 아토스 산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뒤에도 1460년부터 1464년
에 걸쳐 메메트 2세의 요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대주교 자리로 돌아온 것만
두 차례이다. 이러는 동안에도 늘 마음 속에 그리던 수도원 생활을 한껏 누리게
된 것은 1465년이 되어서였다. 1472년, 그는 평범한 수도승으로 세상을 떠났다.
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종루 대신 이슬람교 사원의 광탑
이 숲처럼 빽빽히 세워진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관하여-신앙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겼다.
19세기에 이르러 400년에 달한 투르크 지배에서 독립한 그리스인 등 그리스
정교도가 얼마나 끈질기게 신앙을 지켰는지를 보면, 나라를 위해서라면 종교상
의 타협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이시도로스보다는 신앙의 순수함과 통일을 위
해서라면 나라의 멸망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게오르기오스 쪽이 옳았던
게 아닐까. 광신을 배격하는 입장에서 보면 암담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
리를 따지기 전에 무조건 믿고 보는 광신이 신앙을 지키는 데 더 쓸모있었던 예
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단 투르크 지배하의 그리스 정교도는 오히려 순교에서 기쁨을 느끼며 기꺼이
맹수의 먹이가 되었던 초기 기독교도와는 달리, 신앙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서슴없이 타협하고 그외에는 그저 참고 견디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냈다. 이슬람교도이긴 해도 투르크 민족은 종교 문제에 관용을 베푼다는 것
을 게오르기오스는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게오르기오스를 경애하면서도 결국엔 서구인으로 행동한 그의 제자, 브레시아
출신 우베르티노도 함락 때에 포로가 되었다. 그가 지키고 있던 폐가에 문에서
금각만까지는 너무 먼 거리여서, 일단 가기만 하면 베네치아 배가 자신들을 구
해 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도중에 투르크군에 둘러싸여 버린 것이다. 그를 잡
은 투르크 병사들도 빨리 현금을 쥐고 싶은 일념뿐이어서 곧장 제노바 거류구로
끌려간 우베르티노는 한 피렌체 상인에게 팔렸다. 대금은 나중에 우베르티노의
부모가 그에게 부쳐 주기로 약속했다.
자유의 몸이 된 우베르티노는 배에 올라 이탈리아로 향했지만, 불운하게도 도
중에 이슬람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다시 노예가 되는가, 아니면 평생 사슬에
묶여 갤리선의 노를 저어야 하는가 하는 갈림길에서 다행히 해적선을 공격한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구출되었다. 기사단의 본거지 로도스 섬에서 잠시 지낸 뒤
크레타를 경우해서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는 고향 브레시아에는 말 그대로 얼굴
만 비추고 곧장 로마로 갔다. 추기경 카브라니카가 그를 비서로 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로마에는 적어도 3년은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제목의 장편 서사시를 짓는다. 자기 눈으로 하나의 제국, 하나의 문명이 멸망하
는 것을 본 고전학도 우베르티노에게 이 경험은 어떤 형태로든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할 정도로 강렬했을 것이다. 그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리스 철학을 연구하는 한편으로 번역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면서 조용한 삶을
보내게 된다. 1470년에 세상을 떠난 듯하다.
고전문명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가토톨과 그리스 정교의 합동이 이
뤄질지 어떨지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상인 테탈디도,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라는 대사건에 직접 참가한 뒤로 이를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싶다고 생각한 데
서는 다른 `현장 증인들`과 다름없었던 것 같다.
함락 때 자기가 수영을 못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바다에 뛰어든 덕택으로
목숨을 부지한 이 피렌체인은 그로부터 엿새 뒤 베네치아 해군기지가 있는 네그
로폰투스에 입항하게 되는 배에 올라탔다. 베네치아인들이 향후 대책을 논의할
동안 여기서 기다리던 그는 때마침 이곳에 있던 한 프랑스인에게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프랑스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테탈디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아
비뇽의 대주교에게 보냈다. 이 글은 순식간에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
고 원래부터 십자군 정신이 왕성했던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십자군 결성을 호소
할 때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추인까지 받아 선전문으로 활용되었다. 피렌체 상
인 테탈디는 고국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에서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로부터 15년 뒤인 1468년에 이르면 간결한 대신 문학적 매력이 떨어졌던 테탈디
의 이야기는 더 세련된 문체를 띠고 나타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사료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6월 4일에 베네치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7월 5일에 출발하여 피렌체로 향했
다는 것까지는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뒤 테탈디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없다. 아마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며 프랑스에서 유명인이 된 데 쓴웃
음이라도 짓지 않았을까.
더 이상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아니게 된 콘스탄티노플을 뒤로 하고 때마침
불어온 북풍을 돛에 안아 전속력으로 남하한 베네치아와 크레타 선단이 투르크
함대의 추격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풀려난 것은 엿새째 되던 날 아침, 네그로
폰투스에 입항해서였다. 총지휘관 디에도의 판단에 따라 최전선 기지이지만 수
비가 부실해 보이는 테네도스 섬을 지나치고 안전면에서 불안이 없는 네그로폰
투스로 직항한 것이다. 롱고 휘하 15척의 배가 테네도스에 있다는 것은 디에도
도 알지 못했다.
네그로폰투스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지중해 해역의 제해권을 보전하는 데 가
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코르푸 섬, 모도네 섬, 크레타 섬과 동렬에 놓이는
기지이지만, 대투르크 전선이라는 면에서 보면 최전방이기도 했다. 항구에는 출
항 명령만 떨어지면 곧장 가서 콘스탄티노플을 구원할 체비가 되어 있는 베네치
아 함대가 닻을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 `수도 함락`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네그로폰투스 주둔 함대 총
사령관 로레단은 디에도 등 생존자들의 상세한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본국 정
부에 이를 통보하기 위해 쾌속선을 출항시켰다.
도망쳐 온 배들은 며칠 뒤 이곳 네그로폰투스에 부상자들을 남겨 놓은 채 출
항했다. 크레타 배들은 그대로 남하를 계속해서 크레타로, 베네치아 배들은 여기
서 20일 이상 걸리는 본국까지의 항해에 버틸 수 있는 배 두 척만으로 고국으로
향했다. 지휘는 디에도가 맡고 니콜로도 디에도의 배에 승선했다. 또 다른 배 한
척에는 테탈디가 타고 있었다.
두 척의 베네치아 갤리선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에 있는 모도네 기지에 하
루 동안 기항했을 때 브란덴브르크에서 팔레스티나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태운
배와 마주쳤다. 이슬람의 바다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던 기독교도의 마지막 성채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 이들 순례자들에 의해 전해질 것이다.
로레단이 급파한 쾌속선이 베네치아에 입항한 것은 6월 29일, 서구는 콘스탄
티노플이 함락되고 실로 한 달이 지나서야 이 중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베네치아 정부는 곧장 이 `특보`를 로마교황,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프랑스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헝가리 왕 등에게 알리기 위해 각국으로 사절을 급파했다.
상업상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종교상의 이유로 로마 교황
이 각각 콘스탄티노플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재정 지출을 결정한 직후였던 만큼
함락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저 견고한 성벽이 이렇게 빨리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디에도나 니콜로, 그리고 테탈디 등의 현장 증인들이 베네치아에 닿은 것은
로레단이 보낸 쾌속선이 닿고 나서 닷새가 지난 뒤였다. 곧장 각의로 출석한 디
에도는 거기서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 직후에 소집된 원로원 회의
에서도 같은 보고를 되풀이 했고 의원들의 질문에도 대답해야 했다. 단 이 단계
에서는 인명 피해에 관한 한 공방전 중의 전사자 외에는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
다. 베네치아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상선 선장이더라도 귀국 후에 반드시 국
회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디에도도 20일 남짓 선상에서 지내면서 여
기에 대비한 상세한 보고서를 미리 작성해 놓았을 것이다. 베네치아 정부도 그
의 보고를 받고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이때도 강온 양면을 구사하기로 했다. 강경책으로 택해진 것은 이
러했다. 네그로폰투스로 사자를 급파해서 로레단 제독에게 휘하 전 함대를 상시
체제에 두는 한편, 테네도스에 있는 롱고 휘하 15척과 함께 에게 해를 회항할
것도 명한다. 만의 하나 투르크가 남하할 기미를 보일 경우, 에게 해의 제해권을
위해서라면 베네치아는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
다. 코르푸, 모도네, 크레타에 있는 각 해군기지에도 임전 체제를 취하라는 지령
이 하달되었다. 본국 조선조에서는 17척의 갤리 군선이 건조되고 있었지만 이것
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라 새로이 50척의 건조가 원로원에서 결의되었다.
이에 드는 비용 5만 2천 500두카토의 임시 지출도 가결되었다.
통상 국가 베네치아는 다른 나라와의 교역으로 살아가는 나라이다. 강경한 태
도만 취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이미 로레단에게 보내 둔 특사 마르첼로
의 교섭 상대를 비잔틴 제국에서 투르크로 바꿨다. 마르첼로에게는 즉시 아드리
아노폴리에 있는 술탄에게 서둘러 가라는 지령과 아울러 술탄에게 줄 선물 비용
으로 1천 200 두카토를 쓸 권한도 주었다. 그리고 술탄에게는 콘스탄티노플 공
방전에 참가한 베네치아 시민은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것일 뿐 베네치아 정부는
투르크와의 우호관계를 파기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정부도 그들의 행동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베네치아가 당면한 급선무는 특사를 통해 투르크와 베네치아 간에 예전과 같
은 우호관계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공방전의 전사자 문제는
물론이고 거류구 안의 창고나 상관, 금각만 안에서 포획된 상선에 실려 있던 화
물 등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베네치아가 입은 손해, 돈으로 환산하면 총액 40
만 두카토에 달하는 막대한 손해에 대해서도 통상관계가 재개되기만 하면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특사 마르첼로에게 명했다.
하지만 나라를 떠나 있던 베네치아 시민 하나하나가 설령 자신의 희생이 국익
을 위해 어둠 속에 묻히더라도 고국의 동포들만은 자신을 잊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도록, 베네치아는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술탄 앞으로 갈 선물 비용의 지출이 결의된 지 닷새 뒤, 원로원은 대사 미노
토의 아들에게 조만간 출항할 예정인 아리몬다호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사의 행방을 찾아보고, 만일 정말로 포로가 되어
있다면 돈을 주고 석방시키라는 말을 전했다. 7월 17일까지는 베네치아 정부도
미노토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 다음날, 원로원은 또한 야습시 돌격대장으로 전사한 것이 확인된 선장 코
코의 아들들에게는 연금을, 딸에게는 결혼 지참금을 국고에서 지출하기로 결의
했다.
그리고 8월 28일의 원로원 결의 사항에서는 대사 미노토의 딸이 결혼할 경우
1천 두카토의 지참금을, 혹 수녀가 된다면 300두카토의 자금을 지출키로 했음을
볼 수 있다. 함락 때 베네치아 배로 탈출한 처와 또 다른 아들 한 명에게도 각
각 매년 25두카토의 연금을 주기로 정했다
이는 원로원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두 달이 지나서야 미노토가 아들 한 명
과 함께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접했음을 보여준다. 미노토와 더불어 베네치아 거
류구의 유력자 일곱 명도 함께 참수되었다. 당당히 국기를 내걸고 도전해 온 베
네치아 거류구를 메메트 2세는 한치도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 미노토 이외 일곱 희생자의 유족에게 원로원은 종신 연금 지출을 결의하지
않았다. 귀족이긴 해도 부유하지는 않았던 미노토와 귀족일 뿐 아니라 부자이기
도 했던 다른 일곱 명을 구별한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국정을 담당하
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귀족(노빌레)이라 불렀는데, 그 권리에 따른 의무는
항상 최일선에 서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이런 체제에서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귀족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선원들이
남긴 유족의 생활을 보증하는 것도 원로원은 결코 잊지 않았다. 함락 소식을 접
했을 때부터 그해 연말까지 소식이 확인될 때마다 연금을 지출하기로 결의한 내
용과, 포로가 된 사람들을 풀어 주기 위해 보상금을 지출한다는 결의가 원로원
의 결의 사항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12월 10일의 원로원 결의 사항에서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 제독의 소식이 처음으로 분명히 기록됨으로써 오늘날 우
리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원로원은 함락 때에 포로가 되어 풀려나는 조건으로 제시된 보상금 중
가족의 지불 능력을 벗어난 350두카토를 국고에서 원조키로 했다.
트레비사노가 언제 본국으로 돌아왔는지 알려주는 사료는 없다. 하지만 다음
해 가을부터는 대투르크 최전선에 선 해군 장수들 속에서 그 이름을 다시 찾아
볼 수 있으므로 원래 직위로 돌아간 것 같다. 단 가브리엘로라는 이름은 트레비
사노 가문 남자들이 많이 쓰던 것이어서 어쩌면 동명이인일지도 모르겠다.
디에도의 배에 타고 일찌감치 귀국한 니콜로지만 그뒤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려주는 사료는 없다. 아마도 예전처럼 의료업에 종사했을 것이다. 베네치아에
서는 상선이든 뭐든 장거리 항해를 하려면 반드시 선의를 탑승시켜야 했는데,
상급 선원 명부에서 니콜로 바르바로라는 이름을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경
우 역시 바르바로 가문 남자들 중 니콜로라는 이름은 흔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일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물론 선의로 근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
각할 수 있다. 어쨌든, 트레비사노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간 니콜로 바르바로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일지>를 남겼다.
이 글은 공방전에 들어가기 전에 정세부터 쓰기 시작해서 공방 전 과정에서
그날그날 일어난 사건이나 관찰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베네치아에 귀국한 뒤
비로소 알게 된 것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때의 일지를 기초
로 삼아 귀국 후 일년 정도 지나서 정리해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지> 덕분
에 비로소 우리 후세 사람들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하루 단위로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콜로 이외의 현장 증인들의 기록만 읽으면 공방전 과정에서 일어
난 수많은 사건에 대해서는 알 수 있어도 그런 사건들이 도대체 언제 일어났는
지까지는 동시대인이라도 현장에 없었던 사람이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니콜로의 기록이 역사적인 중요성면에서도 발군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 기술의 정확성에 있다. 후세의 연구에 따르면, 예컨대 투르크군의 전력만 놓
고 봐도 육지 쪽 성벽 수비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이 베네치아 의사가 기록한
숫자가 가장 실상에 가깝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도 냉정한 이 기록은 로마
교황청을 경악시킨 이시도로스의 편지나 로마 지식계급 사이에서 평판이 높았던
우베르티노의 장편시와 비교해서, 또한 프랑스 땅에서 십자군 정신을 고무하는
선전문으로 활용된 테탈디의 진술에 비교해서도 당시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837년에 중요 사료로서 베네치아의 마르치아나 도서관에 들어갈 때까
지 바르바로 가문의 사료실 안에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1783년
에 <로마 제국 쇠망사>를 쓸 때 그 마지막 부분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매듭
지은 역사가 기번도 그리스 쪽 사료는 활용하면서도 니콜로의 <일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디에도가 원로원에 보고했다는 내용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함락 때
에 니콜로가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까지 동행했다는 점과 베네치아 배에서 선
의의 지위가 높았다는 점, 그리고 디에도의 보고문이 네그로폰투스에서 베네치
아까지의 20일 간의 항해중에 작성된 점 등을 생각해 보면 이 `보고문`을 작성
할 때 그와 동승했던 니콜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할 것이
다. 만약 그랬다면, 니콜로의 냉정하고 정확한 관찰도 적어도 베네치아의 국정
담당자들에게만은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두세 군데 잘못 파악한 부분이 있고,
때로 반제노바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는 점을 빼고 나면 베네치아의 한 선의가
써 남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일지>는 비잔틴 제국 최후의 나날들을 알려주는
사료들 중 가장 신뢰도가 높다 할 것이다. 게다가 공방전 기간중에 제노바인이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 것을 생각해 보면 니콜로가 이 글에서 드러내는 분개심도
이런 유의 사료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분개심이 오
히려 생생한 감정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데다 돈을 보고 찾아온 용병대 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방전
기간 내내 방위 제일선에 서서 싸워, 제노바인이라면 뭔가 애매한 눈길로 쳐다
보곤 하던 그리스인과 베네치아인들까지도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던 유일한 제노
바인인 주스티니아니도 최후의 한순간에 갈피를 못 잡은 결과 이 모든 경의와
믿음을 수포로 돌려 버렸다.
전선을 이탈한 그는 자기 배로 실려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이도 일단 금각만
을 벗어난 뒤에는 늦게라도 올지 모를 피난민들을 기다리던 다른 제노바 배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 전해오는 함락 때의
묘한 분위기나 탈출 기회를 놓친 금각만 안의 선박들이 차례차례 투르크 병사들
에 약탈당하는 모습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주스티니아니의 부하 용병들은 그래도 끝까지 대장에 대한 경애를 버리지 않
았지만, 다른 선원들은 자기들 역시 제노바인인데도 이 고명한 동료가 마지막에
택한 행위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만만했던 젊은 무장을 진정으로
상처 입힌 것은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피보다도 동포들의 이런 눈길이었다. 콘
스탄티노플을 뒤로 하고 돛을 올린 지 사흘 뒤 주스티니아니는 배 위에서 세상
을 떠났다.
같은 제노바인이라도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 행정관 로멜리노에게 함락 후의
나날들은 불안과 무력감이 돌아가며 괴롭히는 지옥과 같은 날들이었다.
5월 29일, 투르크군이 성벽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술탄의 진영으로
사절을 파견해서 제노바 거류구는 시종 일관해서 중립을 지켰음을 강조하게 했
다. 그날 메메트 2세는 사절을 만나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틀 뒤,
술탄의 부름을 받아 그 앞으로 나아간 거류구 대표에게 메메트 2세는 거류구의
항복을 명한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거류구와 자가노스 파샤가 강화를 맺고 이후
거류구의 행정을 주민 투표로 뽑은 장로들이 맡는다는 내용이었지만, 모든 것은
투르크의 허가 없이는 행해질 수 없었다. 사실상의 항복이었다. 그 다음날 로멜
리노와 자가노스 파샤 간에 `강화`가 조인되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주민들은
투르크군 1개 부대가 밀려들어 거류구 성벽을 철거하는 것을 묵묵히 보고만 있
어야 했다. 성벽은 200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기지로 통상을 하는 여타 국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리한 지위를 누려온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의 번영
을 상징해왔다. 그 성벽이 이제 가장 높은 탑 하나만 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흔히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베네치아 거류구는 40만 두카토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제노바의 피해는 적게 잡아 50만 두카토, 부동산까지
포함하면 100만을 가볍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라이벌 제노바와의 경쟁을 피해서
동지중해 무역의 거점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옮긴 베네치아와 달리, 콘스
탄티노플과 흑해에 전력을 투구해온 제노바의 통상은 비잔틴 제국이 멸망함으로
써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비잔틴을 멸망시킨 그 메메트 2세가 1475년에는 카파 공략에 성공하고, 훗날
1566년에는 키오스 섬이 투르크에 점령당함에 따라 제노바 상인은 동지중해 교
역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반면 항해 기술로는 여전히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노바 선원들의 눈이 그 뒤 서지중해, 나아가 대서양으로 돌려지는 것도 따지
고 보면 투르크 젊은이의 유별난 정복욕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지도 모
른다.
결단력은 부족했지만 성실했던 행정관 로멜리노는 그뒤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던 조카가 투르크군의 포로
가 된 뒤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이 그 첫번째였다. 거류구 주민들 중에 상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개종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잡혀서 노예가 된 기
독교도들의 자유를 하루 빨리 되찾아주기 위해 거류구의 뜻있는 이들과 함께 보
상금을 모으는 데 전력하던 그 앞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조카가 개종한 자
유인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환갑을 훨씬 넘긴 로멜리노가 이곳 갈라타에 정을
붙일 것이라고는 이제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공방전 개시 전에 부임했어야 할 신임 행정관이 이제서야 키오스 섬에 닿았다
는 소식을 듣고 그도 갈라타를 떠난다. 키오스에 닿아 신임 행정관에 대한 인수
인계를 마친 것이 9월 말, 인수인계가 끝나자마자 로멜리노는 본국으로 가는 배
에 올랐다. 본국으로 돌아 온 그가 어떻게 여생을 보냈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사
료는 없다. 다만 아직 키오스에 있을 때 본국에 사는 동생 앞으로 보낸 장문의
편지가 남아 있다. 공방전을 거류구측 시각에서 진술하면서 제노바 거류구가 극
히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으며, 거류구의 많은 제노바인들이 포위된 콘스탄티노
플을 돕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의 원조를 행했는지
를 진술한 내용의 편지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로멜리노도 거류구의 다른 사
람들도 서구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메메트 2세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시 그리스 정교도의 몸으로 투르크군에 가담해서 싸워야 했
던 세르비아 기병들의 희생도 결국은 헛수고였음이 판명하는 데는 채 2년도 걸
리지 않았다. 자신의 요구에 따라 1천500기병을 보내준 나라에 술탄이 돌려준
것은 1455년의 세르비아 침공이었다. 그해, 세르비아 남부 노보브로도에 파견되
어 있던 미하일로비치는 쳐들어온 투르크군의 포로가 되어 두 동생과 함께 소아
시아의 투르크 군단으로 보내졌다.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서였겠지만, 아직 스물
다섯 어린 나이여서 군복무를 할 수 있는 노예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니체리 군단 병사로서 미하일로비치는 그후 8년 간을 복무하게 된다. 이 시
기는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메메트 2세의 영토 확장 정책이 파죽
지세로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투르크의 전선 확장에 따라 미하일로비치 또한
각지에서 전투를 치르던 나날이기도 했다.
1463년, 그가 군단과 함께 보스니아에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기독교국 육군
중 투르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용장으로 이름 높았던 헝가리 왕 마티아 코르
비노가 이끄는 군대와 대적한 투르크군이 열세에 몰림에 따라 미하일로비치가
속한 부대가 헝가리 병사들에게 포위되었다. 미하일로비치는 자유를 되찾을 호
기라 판단하고 헝가리군에게 항복한다. 그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그해의
일이었다.
그뒤에도 변함없이 병사로 지냈다. 세르비아인인 그가 돌아갈 조국은 이미 없
어졌기 때문에 권유에 따라 헝가리군에 가세해서 싸우기로 한 것이다. 헝가리군
의 행군에 따른 그의 행적은 헝가리, 보스니아, 모라비아, 폴란드에 걸치는 것이
었다. <회상록>은 폴란드에 있을 때 쓴 것 같다. 1490년부터 1498년에 걸쳐 씌
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즈음에는 그 옛날 세르비아의 청년 기사도 이미 환갑
을 넘긴 노인이 되어 있었다. 미하일로비치는 <회상록>은 저자의 특이한 경력
때문에 `예니체리 군단 병사였던 자의 회상록`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해서 한 인물에 대한 그때까지의 평가를 180도 바꿔 버릴
때도 있는 법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턱없는 야심에 도취된 풋내기, 잘 봐
줘도 선대 술탄이 남긴 영토를 현상 유지하면 다행인 그릇 정도로 평가되던 메
메트 2세를 일세를 풍미한 영웅으로 바꿔 버렸다.
함락 직후 이 젊은 승리자와 관계를 개선키 위해 파견된 베네치아 공화국 특
사 마르첼로를 수행한 부관 랑그스키는 8개월에 걸친 교섭 기간 동안 자신이 받
은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술탄 메메트는 22세, 군형잡힌 몸매에 키는 보통 사람보다 큰편이다. 무술에
능하고 친근감보다는 위압감을 풍기는 사람이다. 웃을 때가 거의 없고 신중하며,
어떠한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한 번 정하면 반드시 실행에 옮기는데, 이
때 그 행동이 실로 대담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맞먹는 영광을 바라면서 칠리아코 단코나와 또 한 명의
이탈리아인으로 하여금 매일 로마사를 낭독케 하고 여기에 귀기울인다. 헤로도
토스, 리비우스, 크루티우스 등의 역사책이나 교황들의 전기, 황제들의 평전, 프
랑스 왕들 이야기, 랑고바르드 왕들의 이야기를 즐기는 편이다. 터키어, 아랍어,
그리스어, 슬라브어를 말할 줄 알고 이탈리아 지리를 소상히 알고 있다. 아에네
아스가 살았던 땅부터 교황이 사는 도시, 황제의 궁정이 있는 곳, 전 유럽 각국
이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된 지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지배욕이 강하며 가장 관심을 많이 두는 분야는 지리와 군사 기술이다.
우리 서구인들에게 유도 심문을 할 때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교묘하다.
이렇게 만만치 않은 인물을 우리 기독교도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재능이 뛰어난 이 젊은이는 게다가 10만을 헤아리는 군대의 통수
권자였다. 이 정도 군사를 모을 수 있는 나라는 당시 유렵에는 하나도 없었다.
대포의 위력도 서구 군주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유럽에도 대포는 있었다.
이미 150년 전부터 베네치아는 배에도 대포를 장착해서 쓰고 있었다. 그러나 대
포의 진정한 위력에 착안해서 이를 활용한 자는 메메트 2세가 처음이었다. 더구
나 당시 최강이라 평가되던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을 파괴한 것인 만큼 실험
결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것도 없었다. 실제로는 수비병이 부족해서 방책과
외성벽 외에는 전혀 지키지 못했을 뿐이고, 가장 견고한 내성벽은 끄떡없이 남
아 있었지만 당시 이 정도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소수에 지
나지 않았다. 대포라는 무기가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을 파괴했다는 정보만
이 유럽 구석구석까지 퍼져갔다. 다음해, 대포의 즉각적인 대량 제작을 위한 예
산을 원로원에서 가결한 베네치아를 필두로 유럽 각국은 앞다퉈 이 신병기 개발
에 나섰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에 따라 축성 기술에도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동서를 불문하고 유럽이나 중근동 지방을 여행할 때 마주치게 되는 성벽이나
성채는 크게 나눠 두 가지이다. 대포 사용이 활발해진 시기의 것이냐, 아니면 그
이전의 것이냐이다. 두 유형의 차이는 긴 말이 필요없이 한 번만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비교적 얇은 성벽이 지상에서 높이 직립한 것이 전자이고, 두꺼운 성벽
이 그다지 높지는 않아도 지상에 튼튼하게 뿌리박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하반부가 지표면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 후자에 속하는 성벽이
다. 중간쯤부터 내리뻗은 완만한 경사면은 직격탄을 맞았을 때 충격을 조금이라
도 완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런 식의 성벽을 가장 빨리 채용한 것이
투르크의 공세에 정면으로 노출된 로도스 섬이 성 요한 기사단과 베네치아 공화
국이었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대포라는 신병기의 출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강철 갑주로 무장하고 전투의
전문가라는 자긍심으로 살아가던 중세 기사계급을 완벽히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
리기도 했다. 대포 조작은 가르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말을 모는 능
력도 창을 내리꽂는 능력도, 다시 말해 오랜 수련이나 타고난 특권 없이는 갖출
수 없는 모든 능력이 이제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중세 전장의 꽃이었던 기사들
은 대형을 짜서 수로 밀어붙이는 보병들과 대포를 다루는 포병이라는 양대 `아
마추어` 집단 앞에 쇠퇴기를 거듭해야 했다.
중세와 근세를 구분지은 것은 병기 부문에서만은 아니었다. 메메트 2세와 재
상 할릴 파샤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이나 온존이냐로 대립했지만, 이후 투르크에
서는 메메트 2세의 선택 쪽이 정치적으로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를 수중에 넣은 것은 예전의 제국 영토 전체에 대해 영유
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했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교통 요충지이자 축
이기도 한 콘스탄티노플의 획득은 발칸 반도와 아시아로 나뉘어 있던 투르크를
한 국가로 연결, 연동시키는 기반을 완성케 하기도 했다.
선대 술탄의 오른팔, 투르크 명가 중의 명가 출신인 할릴 파샤는 콘스탄티노
플이 함락된 지 사흘 뒤 돌연 체포, 투옥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인 포로들과 함게
아드리아노폴리로 끌려가 다시 20일을 감옥에서 보낸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죄
목은 비잔틴과의 내통이엇다.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함으로써 육상과 해상 양면에서 대진격의 발판을 마련한
메메트 2세는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고 수도 정복의 효능을 발휘시켰다. 콘스탄
티노플에 있던 교회를 잇달아 모스크로 개조하고 톱카피 궁전의 건조를 명하는
한편, 투르크 제국의 수도를 아드리아노폴리에서 이제는 이스탄불이라는 공식명
을 얻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길 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켰다. 이와 동시에 군사면에
서도 적이 충격을 딛고 일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2년 뒤, 세르비아 공략에 성공했다. 다음 해인 1456년에
는 보스니아도 투르크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로써 폴란드와 헝가리는 대투르크
전선의 최전선에 놓이게 된다.
1460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팔레올로구스 왕가 황족들이 간신히 보전하고
있던 지역도 투르크 대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족 중한 명인 토마스는 로마
교황에게로 망명한다.
다음해인 1461년, 역시 비잔틴 제국의 황통을 이은 나라인 트레비존드가 함락
된다. 이로써 흑해 남안은 투르크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1463년, 지금까지 육전을 주전공으로 하던 투르크군이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
했다. 과녁이 된 것은 에게 해에 있는 레스보스 섬이었다. 대군이 상륙해서 육지
에서 공격을 퍼붓자 200년 이상 제노바령이었던 이곳도 즉시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1470년, 에게 해 남하를 계속한 투르크는 베네치아 해군기지 네그로폰
투스에 싸움을 걸어왔다. 이 전투는 그 해에 투르크가 네그로폰투스를 점령한
데서 시작되어 이후 10년 간이나 계속된 투르크-베네치아 전쟁의 단초가 되었
다.
1473년, 페르시아 땅으로 원정에 나선 투르크군은 페르시아군을 패주시키고
개선한다. 이에 따라 동서로 투르크를 협공하려던 베네치아의 시도는 실패로 끝
났다.
1475년, 투르크는 대군을 흑해로 파견하여 카파를 공략한다. 이 공략에 의해
흑해는 투르크의 내해가 되었다. 카파를 근거지로 하던 제노바의 통상은 이로써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반면 투르크는 크림 지방으로 향하는 길을 열게
된 셈이다.
1479년, 이번에는 서남쪽으로 군사를 보낸 메메트 2세는 당시까지 산악지방의
게릴라전으로 애를 먹어왔던 알바니아를 마침내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한다. 이제
발칸은 그리스 해안을 따라 점점이 존재하는 베네치아 기지를 빼고 나면 완전히
투르크 앞에 무릎을 꿇었다.
1480년, 이탈리아 본토가 처음으로 투르크의 공격에 직면했다. 투르크군이 남
이탈리아의 오틀란토에 상륙하자, 로마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이 금세라도 이슬
람교도로 메워질 것만 같은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술탄이 급사를 하면서 투르크군이 철수함에 따라 이는 악몽에 그쳤다.
메메트 2세는 1481년 5월 3일,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 쪽으로 건너간 직후 숨
을 거뒀다. 당시 나이 마흔아홉, 이 원정의 목표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메
카, 그리고 이집트 공략이었다고 한다. 이 `기독교도의 적`이 죽자 유럽은 횃불
을 올리고 불꽃을 날리며 축하했고, 교회는 신에 감사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정복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메메트 2세의 전적이 모조리 성공으로만 색칠된
것은 아니다. 베오그라드 공략은 실패했고 로도스섬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 두
군데는 물론이고 시리아와 이집트 공략도 그가 쌓아놓은 기반 위에 선 손자 셀
림, 그리고 술레이만 대제때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투르크는 `정복왕` 사후에도 급격히 붕괴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20년 정도 더 산 메메트 2세에게는 정복에 그치지 않고 정복지를 지배망에 확고
히 편입시킬 수 있는 사회기구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투르
크 제국은 16세기 중반 술레이만 대제 때 절정을 맞이하고 20세기 초까지 이어
졌다. 이것도 콘스탄티노플 공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동 투르순은 1460년까지 메메트 2세를 섬겼는데, 그해에 대신들의 각의라
해도 좋을 `디반`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뒤 투르크 제국의 아이사 지구 재
무장관을 지냈고, 자리를 옮겨 유럽 지구에서도 같은 관직을 맡은 뒤 평온한 은
퇴 생활에 들어간 것 같다. 말년은 명확하지 않지만 1499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
다. 메메트 2세가 세상을 떠난 지 18년째 되는 해이고, 당시 투르크는 그의 아들
바예지트가 다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은퇴 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라고 생각되는데, 이제는 `베이`라는 존칭
으로 불리게 된 이 옛날의 시동은 한 권의 역사책을 써 남겼다. <정복왕 술탄
메메트의 역사>이다. 내용은 1487년에서 끝맺음되고 있다. 투르크인의 손에 의
한 역사 저술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라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인에게, 특히 고대 로마가 자기 세계의 모태라 생
각하던 서구인에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비잔틴 제국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나 로마 교황청, 그리고 헝가리 등 동
구 여러나라 사람들이 말기 제국의 실상에 정통해 있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다
른 나라 사람들도 동로마 제국이 쇠락을 거듭하며 수백년 세월을 보내왔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 십자군 시대부터 이슬람교도의 진출에 대해 수
세를 취해야 했던 제국의 실상은 십자군 원정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을 통해
유럽 세계 끝자락에까지 알려졌던 것이다. 더구나 최근 반세기 동안 제국을 버
리고 서구에 정착하는 학자들의 모습이나, 공의회가 열릴 때마다 서구 군주들을
찾아다니며 원군을 요청하는 제국 황제의 모습은 그들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이 끝내 지상에서 사라졌을 때, 이들의 가슴속은 딱히 뭐
라 할 수 없는 암울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고대 로마의 황제가 없어진 뒤 서구 군주들 중에 황제를 칭하는 이가 없지는
않았다. 그들 중 어떤 이는 고대 로마인이 갈리아인이라 부르던 프랑크인이고,
또 어떤 자는 갈리아보다도 더 야만적이라 생각되던 게르마니아 출신이었다. 그
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명칭을 걸고 검은 쌍두 독수리를 상징으로 삼을
지언정 옛 로마 제국 황제 같은 권위도 권력도 없었다. 서구 사람들은 이를 알
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을 때만 따르고 기회만 있으면 주저없이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고대 로마인이 창
설한 제국의 계승자는 비록 내용물은 그리스 것이어도 비잔틴 제국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비잔틴 황제는 고대 로마 황제에게는 없었던 기독교도라는 자신
들과의 공통성도 갖추고 있었다. 서구인이 보기에 황제라 부르기에 손색 없는
지상에서 유일한 이는 바로 이 동로마 제국 황제뿐이었다.
그것이 이제 사라져 버렸다. 팔레올로구스 가의 한 황녀가 모스크바 대공에게
시집간 뒤로 러시아가 `세번재 로마`라 자칭하지만, 그리스 정교의 본산이 이전
되었다는 뜻이면 몰라도 프랑스인이나 게르만인 황제도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없
는 서구인들이 황녀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흰색 쌍두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
았다는 이유만으로 러시아인 황제의 권위를 인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서구
사람들은 비잔틴 제국이 멸망함으로써 비로서 고대 로마라는 모태에서 잘려 나
온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한 한, 당시 냉정하고 정확한 기록보다는 감정적인 시
나 보고가 더 많이 퍼진 것은 다가올 변혁을 생각하기보다는 상실한 것에 대한
애석함 속으로 침잠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리라. 흰색 쌍두 독수리는 이슬람교
도의 반월도에 무참히 베인 것이다.
로마 제국의 최후의 황제는 주홍색 망토를 바람에 나부끼며 백마를 몰아 천공
저편으로 영원히 떠나 버렸다.
제가 듣기로...콘스탄티노플의 함락중에.....가장 결정적인 실수가.. 모든 주민들과 군사들이 힘을 합쳐 잘 막아내고 있었고.....그 강력한 성벽은 아무리 많은 터키군이 덤벼도 잘 버텨내고 있었는데......성벽과성벽사이의......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여러 문들중 하나를 누군가가 실수로 잠가두지 않아..
첫댓글 황제폐하~~~
우와~ 다 치느라 힘드셨겠네요^^;
제가 듣기로...콘스탄티노플의 함락중에.....가장 결정적인 실수가.. 모든 주민들과 군사들이 힘을 합쳐 잘 막아내고 있었고.....그 강력한 성벽은 아무리 많은 터키군이 덤벼도 잘 버텨내고 있었는데......성벽과성벽사이의......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여러 문들중 하나를 누군가가 실수로 잠가두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뚫렸다고 하던데요.....
주스티니아누스가 화살맞고 퇴각할때 열어둔 성문을 터키군이 성벽을 장악한뒤 들어온 것으로 압니다만.
나나미 할멈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주스티아니의 탓이라 돌려버리더군요.. 어느정도는 맞는말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전 생각합니다..
이 책 뒤에보면 다른 얘기도나와있습니다...탑밑의 작은 쪽문이 열린 것을 순찰도중에 보았다나...?그리고 역시 이 책 뒤에보면 주스티니아누스의 오해를 풀어준다던가 뭐라고 또 나와잇습니다;;;(기억이 가물해서;;;...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듯)
아, 그런가요? 글쌔요. 제가 이 책을 보았을대는 그런 얘기는 못봤거든요. 집에가서 봐야겠네요..
어짜피....무슨 이유였던지... 비잔틴은 그때 망할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