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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신안군 천사대교를 찾아
배만식
산을 찾아 전국을 떠돌던 내게 언제부턴가 자전거여행 바람이 들어 올해에도 어김없이 후배와 둘이 자전거 여행을 꿈꾸었고, 우여곡절 끝에 신안군 섬 라이딩을 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 완도 보길도며 신안군의 여러 섬 여행을 가보고 싶었던 터라 흔쾌히 동의하고 여행 준비를 했다.
후배와의 최초의 자전거 여행은 집이 가까운 낙동강자전거길과 밀양에서 청도까지 자전거길이었고, 그 다음이 포항에서 정동진까지 동해안 코스 종주, 그 다음이 문경새재 자전거길과 춘천에서 충주까지 북한강 남한강 종주, 대전에서 군산 거쳐 선유도까지 금강종주, 강릉에서 고성까지 갔다가 정동진까지 되돌아오기였다.
여태까지의 여행은 항상 열차와 버스로 접근하고 라이딩 도중 숙식은 여관과 식당을 이용했는데 이번 여행은 오지인 섬으로 가는 것도 있고, 코비드19로 인하여 차량에 일체의 캠핑 장비와 자전거 두 대를 싣고 집을 나섰다.
오전 10시에 출발한 우리는 신안군까지 예상했던 3시간의 두 배인 6시간을 교대로 운전하여 도착했다. 목포에서 신안군으로 들어가는 압해대교를 지나 우선 신안군청 민원실에 들렀다. 날씨는 더웠다. 우리는 하얀 마스크를 끼고 입구에서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체온을 측정한 뒤 여행지도 두 장을 얻어 나왔다. 거기서 물통에 물도 채우려 했지만 주차장까지 거리가 멀어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신안군의 섬이 1004개나 된다고 하여 천사섬이라고 한다는데 우리는 그 천사섬의 해무 가득한 천사대교를 건넜다. 다리는 미국의 금문교 크기는 아니지만 국내에선 찾아보기 쉽지 않은 웅장한 규모였다. 며칠 전에 다리가 출렁인다는 유튜브를 본 기억이 되살아나 잠시 걱정도 되었다.
그 다리를 건너서 나타난 섬은 암태도의 암태면이었다. 거기서 다시 북으로 달려 은암대교를 건너가니 자은도의 자은면이었다. 우리는 면소재지 농협매장에서 부식을 사고 물통 2개를 꺼내어 물을 가득 채웠다. 차는 계속 북으로 달려 둔장해변에 도착했고 거기엔 아득하게 뻗어나간 갯벌에 번쩍이는 오후의 햇살이 뒹굴고 있었다.
그 갯벌에 ‘무한의 다리’라는 아름다운 도보다리가 건설되어 있어 도착하자마자 우린 그 다리 끝까지 걸었다. 다리는 갯벌이 끝나는 곳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까지 거의 1킬로 안팎의 거리를 연결해 두었다. 많은 관광객들은 그 다리를 따라 갯벌을 건너가서 갯벌 끝 부분의 바위며 자갈로 된 해변에서 조개나 고둥을 줍기도 하고 그물로 썰물이 빠져나가고 남은 웅덩이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기울어 가는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 그 바닷가 끝에서 몇 개의 웅덩이 속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운이 좋으면 커다란 문어라도 한 마리 얻을 수 있으려나 하고.
문어는커녕 아무 소득도 없이 바닷가 바위 웅덩이를 수색하다 말고 그 옆에 있는 섬의 정상에 올라갔다. 큰 바닷새들이 섬의 숲에서 귀가 아프도록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저들이 저렇게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를 때엔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이 되기에 저렇게 시끄럽게 지저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올라가며 한참 동안 귀를 기울여보았어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지난겨울 문협 회장님과 둘이 우포늪을 한 바퀴 걷다가 늪 가운데에서 크게 짖어대는 고니들의 울음소리를 두고 저들이 하는 소리가 무슨 뜻일까고 물으니 회장님 가라사대 ‘함 안아보자’ 카는 중이라고 하여 크게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는 기울고 늦은 오후의 날씨는 서늘하였다. 이십 대 초반의 어린 남녀 한 쌍이 다리를 건너와서 해변의 벤치에 앉아 노을이 어우러지며 붉게 익어가는 저녁 바다를 바라보며 다정한 밀어를 나누고 있는 걸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나이이고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두 사람이기에.
우리는 해변으로 되돌아 나왔다. 그곳은 해수욕장은 아니고 갯벌이 이어진 십리도 더 됨직한 아름다운 모래 해변의 작은 관광지였는데, 음악이 흐르는 청결한 수세식화장실과 쇄석이 깔린 50면 정도의 주차장이 있었다. 그 주차장 우측 해변의 공터에 검정 오피러스를 타고 온 중년의 남녀 한 쌍이 2인용의 작은 텐트 속에서 저녁을 지어 먹고 있었다.
우리도 그곳 화장실 가까운 곳에 6인용 텐트를 설치했다. 해풍이 심하게 불어 차량으로 바람을 가로 막아 주차하고 그 뒤에 텐트를 설치하고 그 텐트 뒤에 커다란 식탁을 설치했다.
후배가 버너 2개를 가동하여 밥과 국을 동시에 조리하고 기본반찬을 꺼내어 펼치니 금방 진수성찬이다. 화장실에 가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스피커에서 조용하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사람이 감지되면 음악이 흘러 오랜 옛날, 이십여 년 전 지리산 단독 종주 중 세석 산장의 화장실에서 들었던 헤어진 연인에게 잘살아 달라며 처절하게 절규하던 여자 가수가 부르던 가슴 아픈 유행가 가사가 연상되었다.
밤이 되니 해변에는 그들 중년의 남녀와 우리 두 사람 밖에 남지 않고 아무도 없었다. 오후까지만 해도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안고 번쩍이던 갯벌은 밀물이 밀려들어와 주차장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저녁을 먹고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텐트 속에 누워 잠이 들었다. 후배도 운전을 하느라 피곤했던지 나보다도 더 빨리 잠에 빠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다시 월광 소나타가 흘렀다. 자정이 좀 지난 시각 두 남녀가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언제 일어났던지 후배가 먼저 일어나서 밥을 하고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서 라디오를 들으며 씻고 식사 후 캠핑 장비를 챙겨 차에 싣고 길을 나섰다. 운전대는 후배가 도맡았다. 대부분의 장거리 여행에서 나 혼자서 운전해왔던 내겐 큰 휴식이었다.
다시 은암대교를 건너 신비의 바닷길이라는 암태면 추포 노둣길을 건너 추포해수욕장으로 갔다. 그곳 추포해수욕장의 바닷가 해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오전의 햇살은 화창하고 파도는 철썩이고 끝없이 펼쳐진 해변의 모래는 아스팔트에 가까울 정도로 단단하여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기분이 몹시 좋았다. 후배는 소금물에 자전거가 상할까하는 걱정도 잊어버리고 자전거를 타고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 속을 비스듬히 돌진하며 달렸다. 달리기를 시작한 김에 그 해변을 벗어나서 섬을 한 바퀴 자전거로 돌았다. 작은 섬의 어촌의 집들은 모두들 바다에 나갔는지 사람이라곤 없었다. 길가에 오디가 검게 익어 도로 위를 검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데 후배는 자전거를 세우고 그것을 따먹기도 하였다.
섬을 한 바퀴 돌고 아침에 해둔 점심을 내어 먹고 다시 자전거를 차에 매달고 길을 나섰다. 암태면에서 다리를 건너 팔금면을 거쳐 안좌면으로 넘어갔다. 가는 도중에 김환기 고택이 있었다. 후배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화가 중에 가장 비싼 작품을 남긴 대단한 화가라고 했다.
기록에 따르면 김환기 화백의 아내인 김향안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니던 시절 오빠의 소개로 천재 시인 이상을 만났는데, 이상은 시인답게 그녀에게 ‘우리 같이 죽을까, 어데 먼 데 갈까’라고 고백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였지만, 이상이 결혼 후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가자마자 그 이듬해 결핵으로 사망하여 한 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다시 이혼하고 세 딸의 아버지인 김화백을 소개받아 재혼하는데, 친정의 가족들이 반대하자 가족과 연을 끊고 원래 이름 변동림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 김향안으로 개명하고 결혼, 프랑스로 유학 가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김화백도 프랑스로 유학 가서 공부하고 둘이 미국에서 정착하여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과연 시대를 앞서 간 두 천재를 사랑한 대단한 여성이었다 생각되었다.
이튿날은 안좌면의 남쪽에 위치한 ‘가고 싶은 섬’이라는 퍼플교로 유명한 박지도와 반월교를 연결하는 보랏빛의 목조 다리가 있는 해변으로 갔다. 그곳은 다리뿐만 아니라 온통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보랏빛이었다. 집들도 심지어는 지나가는 스쿠터도 보랏빛이다.
오후의 햇살은 아주 더웠다. 바람은 좀 불고 있었지만 햇살이 너무 뜨거워 차에 싣고 간 대형 천막을 해변 언덕 위 외진 주차장 끝에 설치했다. 아무리 더운 한여름이라도 뜨거운 햇살을 완벽 차단하여 시원하게 해 주는 두꺼운 방수천막 아래에 깔개를 깔고 누우니 잠이 솔솔 쏟아져 후배는 금방 코를 골며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그 천막 아래 안락의자를 펴 놓고 수평선을 바라보다 졸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 늦게 일어나 차를 두고 보랏빛 보행자용 다리를 걸어서 갯벌을 건너 반월도와 박지도를 가 보았다. 그곳 퍼플교는 보랏빛 페인트칠을 한 목조 다리로 세 개의 섬을 갯벌을 가로질러 놓았으니 그 다리의 길이가 수백 미터가 넘어 거의 2킬로 정도 되어 보였다. 먼저 박지당 숲이 있는 박지도까지 건너가서 거기서 더 길게 연결된 다리를 건너 반월도에도 가보았다.
그 다리를 놓게 된 유래는 그곳 섬에 살던 어떤 할머니가 걸어서 목포까지 가보고 싶다는 소원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알려져 무려 47억의 거금을 들여 보행자용 목조 다리를 건설했다는데 다리는 장식과 칠이 몹시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리 중간 중간엔 넓은 면적에 벤치를 여럿 만들어 두어 쉴 수 있게 되어있었다. 전설은 전설일 뿐 섬이 아름다우니 관광지를 조성하려고 다리를 지은 것이리라는 생각 속에 둘러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에 몰리고 있었다. 입장료 2천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관리인은 아직 돈을 받지는 않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 우린 그 두 개의 다리를 다 건너가 보았다. 두 섬 모두 둘레가 2킬로 안팎으로 섬의 규모가 작아서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자전거를 빌려주고 있었는데, 때마침 노랑과 검정으로 배색을 한 자전거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성들이 단체 라이딩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 마침 우리가 도착한 그 시점에 반월도의 상징인 반달 모양의 조형물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검정 하의와 노랑 상의를 입은 중년 여성들의 몸에 착 달라붙는 자전거복장의 아름다운 몸매에 잠시 달콤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지만, 괜히 죄를 짓다 들킨 것 같아 두려움이 앞섰다. 기왕이면 자전거 복장을 하여 최대한 바람의 저항을 줄이는 것도 효율적이겠지만 로드로 평속 40km 정도 달리는 것이 아닌 이상 굳이 자전거 복장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된다. 하물며 우리처럼 여행용 자전거를 타고 쉬엄쉬엄 여행지를 둘러보는 입장에선 몸에 착 달라붙는 저지는 튀어나온 것을 숨길 데가 없어 민망하고 불편할 뿐이다.
젊은 그녀들이 타고 온 자전거 중엔 티타늄 산악용 자전거가 서너 대 보였다. 대당 칠백을 더 부르는 자전거다. 카본도 대당 이천을 상회하는 제품이 나오긴 하지만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흐뭇했다.
어김없이 어제와 같이 해는 서편 하늘로 기울며 그 아름다운 햇살을 갯벌 위에 번쩍이고 나그네는 다시 다리를 건너 언덕 위에 돌아와 차에서 6인용 텐트를 내어 설치하고 저녁을 지어 먹고는 아무도 없는 밤에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에 가서 대야 가득 물을 받아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 온 여성이 한국의 화장실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흐른다고 유튜브에서 칭찬하는 걸 보았는데, 실제로 독일인 부부가 27년 동안 차박으로 노 호텔 노 식당을 고수하며 지구 세 바퀴를 돌았지만, 한강변의 한국의 화장실이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예전에 서울에 장기 출장을 가는 경우 많은 동료들은 모텔을 이용하기도 하고 나이가 좀 든 여직원들은 찜질방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나 여관은 불결하고 찜질방은 집이 없는 사내들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어울려 자는 것이어서 두 곳 모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결국은 갈 때마다 호텔에서 한 주일간 편안하고 안락한 시간을 보냈다.
자전거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은 날은 호텔에서 깨끗하게 잘 수도 있지만 정동진 같은 대부분의 관광지에선 호텔이 아닌 많은 숙소는 불결하고 바가지로 불쾌할 뿐이었다. 국토종주 자전거길 주변의 모텔이나 여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비하면 캠핑은 신선한 해변의 공기로 그 어떤 불쾌함도 없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것도 좋고, 음식도 청결하고 위생적으로 손수 지은 잡곡밥에 건강식으로 배를 두드리도록 양껏 먹을 수도 있다. 코비드19로부터 자유롭고 비용이 절약되는 것은 덤이다.
밤에는 갖고 간 통발을 생각하고 먹이를 넣으려고 보니 음식 먹고 남은 것이 없어서 후배와 둘이 자전거를 타고 근처 매점에 가 보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모두 다 문을 닫아 놓아 멀리 면소재지로 달려가다가 말고 되돌아와서 후배가 불빛이 있는 가게에 사정하여 과자 두 봉지를 샀다.
밤이 깊었지만 한 봉지는 남겨두고 오징어 땅콩 한 봉지를 통발에 넣고 20미터 가량의 밧줄에 달고 그 아름다운 퍼플교 난간에 한쪽 끝을 묶고 밤이 되어 거세게 소리를 내며 밀려 들어오는 밀물의 파도 속에 던져 넣었다. 퍼플교에 아름답게 조명이 켜지고 보랏빛 난간은 밤하늘의 별빛을 받아 더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아무도 없는 퍼플교 중앙에서 혼자 통발작업을 마쳤다. 그 다음날 아침 커다란 문어와 게, 우럭이며 장어를 기대하면서.
밤바다는 거센 밀물로 내륙 쪽 깊은 해변까지 계곡물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통발은 해류를 따라 우리가 텐트를 쳐 놓은 상류 방향으로 멀리 떠내려갔다. 텐트에 돌아와서 보니 작은 어선 한 대가 내가 통발을 던져놓은 퍼플교 교각 아래를 지나 우리가 캠핑하는 곳 근처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밤새 야간조업을 하고 있었다. 은근히 속으로 통발의 밧줄이 고깃배의 스크루에 감겨 끊기지나 않았나 걱정이 되어 다시 퍼플교에 가 보았다. 통발은 그대로 있었다.
이튿날 새벽 5시 깨어보니 밤사이 해무로 텐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나 밖으로 나오다 텐트에 내린 이슬로 옷이 젖었다.
다리 위로 가 보니 통발은 어제와는 반대 방향인 퍼플교 하류로 떠내려가 물 밖에 있었는데 누군가가 새벽에 작은 배를 묶어둔 곳에서 시작하여 그 통발까지 왔다 간 발자국이 보였다. 고기가 들었더라도 이미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닐지.
예상대로 통발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씁쓸한 마음으로 밧줄을 당겼는데 애꿎은 녀석은 다릿발에 감겨서 올라오지 않았다. 제법 오랫동안 애를 쓰다가 실패하자 하는 수 없이 주머니칼로 밧줄을 잘라 통발을 버리고 밧줄만 가지고 돌아왔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자전거를 달고 자라대교를 건너 자라섬을 한 바퀴 도는 자전거 라이딩을 하였다. 먼저 자라섬에 도착하자마자 테이블과 안락의자를 꺼내어 해변 언덕 위 소나무 그늘에 설치하고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는 자전거를 떼어내어 라이딩을 했다.
섬 라이딩은 강변의 자전거 도로와 달리 도로의 기복이 심했다. 경사 심한 밭두렁과 아기자기한 어촌의 집들을 구경하면서 즐거웠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을 교대로 달리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오르막에는 이미 이골이 날대로 난 상태였지만 평소 타지 않던 무거운 여행자전거라 심하게 무릎에 자극이 왔다.
이것은 동해안 자전거길도 마찬가지다. 4대강 자전거길을 달려 보고 자전거 여행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동해안 자전거길이나 섬 자전거 여행을 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거기다 자전거 여행 중에는 자전거 가방에 많은 물건을 싣고 달려 가벼운 빈 자전거로 달리는 짧은 라이딩과는 비교할 수 없다.
라이딩이 끝나고 자전거 두 대를 차 뒤에다 달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하늘은 흐리고 해무로 가득한 바다는 어디가 수평선인지 알 수 없었다. 잿빛 하늘과 잿빛 바다의 연속이다. 염전도 있고 대부분이 경사가 완만한 밭이다. 황토흙으로 이루어진 밭을 보니 한하운의 소록도로 가는 황톳길이 떠올랐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한하운의 ‘손가락 한마디’ 전문)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중략)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는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라도길-‘소록도로 가는 길’에 일부
후배도 그걸 생각하고 떨어진 손가락을 주머니에 넣었다던 위의 시를 기억해 내었다. 후배는 명색이 문인이란 나보다도 더 시(詩)에 조예가 깊어 보인다. 거의 모르는 시가 없을 정도로 시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이다. 이야기 도중에 암태면 에로스 서각박물관에 차를 주차하고 입장료를 지불하고 손 소독과 체온측정, 인적사항 기록 후 들어갔다.
1, 2 전시실은 순수한 서각 박물관으로 대단히 정교한 서각 작품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후배는 지금 서각을 배워 작품을 만드는데 푹 빠져 있어 그 많은 작품을 한 점씩 감상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작품들은 거개가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극히 일부는 한글로 되어 있었지만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평소에 서예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아름답게 쓴 글씨의 가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서각과 켈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아름답게 쓴 서예와 그걸 나무에 새긴 작품이나 종이나 헝겊에 쓴 켈리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가슴을 찌르는 감동을 주는 시나 수필 혹은 소설 같은 문학작품이나 음악 혹은 그림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무한 영원한 것이지만 글씨만 아름답게 쓴 것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말을 하면 미술에 대해 무지하다 할 것이다마는.
3전시실에 올라가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굵고 큰 놈과 가늘고 기다란 놈, 온갖 크기와 모양의 양물들을 나무로 조각하여 사포질을 한 것으로 실물과 거의 다름없는, 아니 실물보다 더 과장된 대단한 놈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다 춘화들은 매우 자극적이어서 동영상을 통해서 보는 활동사진과는 또 다른 그림만이 표현할 수 있는 특징적인 부분이 돋보였다.
말이 나온 김에 사랑의 그릇에 대해 약간 언급하자면,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어떤 것이 가장 훌륭한 명물인가 하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품평회의 기준에 대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흔히 말하기를 양물은 굵고 큰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알고 있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크기에 있어서 남녀 공히 4개 등급으로 분류되는데 남자의 경우 코끼리급과 당나귀급 강아지급과 토끼급으로 구분할 수 있고, 여자도 그에 걸맞게 크기가 구분된다.
여기서 크기를 주제로 한 서로의 속궁합에 대해 논해볼작시면 같은 급의 남녀가 만나면 가장 행복하고, 서로 한 등급 정도 차이는 높거나 낮은 결합이라고 하여 그런 대로 쓸 만한데, 두 등급 차이가 나면 속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하며,
남자가 크면 여자는 열상(裂傷)을 입기 쉽고, 여자가 등급이 높으면 낮은 결합이 되어 긴밀함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크기에 있어서는 서로 비슷한 크기의 사람끼리 만나면 가장 이상적이며 단순히 크기로 인해 좋거나 나쁘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다.
남성은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상대를, 여성은 한 단계 높은 배우자를 선호하지만 그 모두가 긴밀한 접촉을 위한 것이지 과한 차이는 열상(裂傷)의 원인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결혼하기 전에 어떻게 서로의 속궁합이 잘 맞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건 마치 신발을 사러 가서 신어보지 않고도 발에 꼭 맞는 것을 사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그 방법을 연구해 왔으니, 척 보면 알아보고 알아서 선택하여 오랜 세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결과, 인간 수컷의 그것은 체구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고 한다. 고릴라의 경우 덩치가 거대하지만 거시기는 새끼손가락만큼 작다고 한다.
‘형부는 코가 커서 언니는 좋겠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전혀 아니다. 코가 큰 사람은 껍데기를 까 보면 코만 클 뿐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여성들은 귀담아 들을 일이다. 우선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봐야 할 것은 남자의 경우 몸이 ‘겹사람’이어야 한다. 쉬운 말로 기골이 장대하고 체격이 좋은 사내를 이르는 말이다. 장대한 기골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으로 입술이 볼륨감이 있는 경우, 콧방울이 살집이 많은 경우 등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력이다.
허우대만 크고 허풍선이라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면 무용지물, 결론은 기력이 얼마나 좋은가 여부가 남자에겐 가장 중요하단 말인데, 대체로 기골이 장대하고 강한 체격을 갖고 있는 자가 기력이 출중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이다.
흔히 어린 소녀나 철이 없는 여자들은 여성처럼 가느다란 몸매의 예쁜 얼굴을 한 남자를 선호하지만, 그런 나약한 사내를 남편으로 맞으면 뼈와 살이 타는 밤은 기대하기 어렵고, 평생 병수발을 하거나 청상과부가 될 확률이 높을 뿐이다.
암사자들이 강한 수컷사자를 무리의 배우자로 선택하듯 오랜 세월 진화의 과정에서 여성들이 강한 남자를 선택한 결과 지금의 인간을 존재하게 한 것이다.
크기 문제를 마무리 짓자면, 너무 높은 결합일 경우, 즉 남성이 지나치게 장대하고 여성이 작은 경우 결합 자체가 불가능하고, 억지로 결합하더라도 다치기 십상이다. 반대로 낮은 결합일 경우 긴박하고 높은 자극을 기대하기 어려우나 재미있는 것은 당사자들이 경험이 없을 경우 그것이 낮은 결합인지 어떤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서로 낮은 결합의 속궁합일 경우라 하더라도 양자가 공히 이성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평생을 그렇게 살다 죽더라도 별다른 불만을 몰라서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의 배우자가 반금련에 나오는 서문경이나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무송처럼 희대의 절륜한 병기와 내공을 겸비한 상대를 경험하고 보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게 된다.
소설 돈 주앙을 원작으로 쓴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 죠반니를 본 천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주인공이 3천 명이 넘는 여성을 두루 편렵하는 것을 보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라고 했다. 그 자신이 자유분방한 사랑을 즐겼던 아인슈타인은 비서와 사랑을 하다가 아내에게 들키게 되자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아내도 사랑하고 비서도 사랑한다고, 그러자 아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난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내가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베토벤과 모짜르트와 슈베르트의 음악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며 거듭 당신도 그녀도 함께 사랑한다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것에는 정답이 없다. 근대 이전의 남성들은 대부분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아직도 네팔의 고산족과 티베트의 차마고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일처다부제를 유지하고 있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만주에 사는 중국인들도 여자가 귀해 한 여자를 여러 형제가 동시에 결혼하여 함께 산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네팔의 고산족은 한 여자가 여러 명의 다른 남자와 중혼하여 사는 경우이고, 티베트의 경우는 한 여자에 남자 형제간이 함께 결혼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형은 험난한 차마고도를 몇 달 동안 걸어가는 여정에 나서고, 아우는 형이 없는 동안 아내와 둘이 집을 지킨다는데,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문화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미개한 풍속이다.
우리는 사랑이란 물리적인 것이 전부가 아닌 정신적인 부분도 있음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이와 서로 눈빛만 바라보아도 행복한 전율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며, 수많은 헌신적인 커플의 경우 상대가 온 몸이 마비된 상황에서도 평생을 정신적인 사랑만으로 사랑하길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일이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참된 사랑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의 변명은 극히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탕아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춘화들, 사진이나 실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익살과 과장이 가미된 재미있는 그림들을 구경하고 주차장에 도착하니 특산물을 팔고 있는 곳이 있어 들어가 구경을 하다가 차를 출발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바람이 불고 흐리고 어두웠다. 또 다른 관광객 한 팀이 버스에서 내려 손소독제를 바르며 줄을 서서 체온을 측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가 퇴직을 하고 직장을 떠난 예순 중반이 넘어 보였다.
그 다음엔 분재박물관으로 갔다. 무릎도 다치고 조금은 지쳤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분재원에 들어갔다. 후배는 또 수석에 거금을 투자한 사람이라 분재와 식물원을 대단히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설악에서 지리까지 한라에서 울릉 성인봉이며 남해 바다 여러 섬산행까지 두루 산행을 한 사람이라 분재나 수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국의 모든 국립공원의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산세며 계곡을 거의 모두 답사한 내게 인공으로 구부려 만든 가지며 수석이란 조그만 돌덩이들은 애초부터 비교불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후배의 호기심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고 인내심을 발휘하여 끝까지 같이 구경을 했다.
차량은 후배가 운전했다. 거의 백여 킬로는 달렸음직한 시간, 땅끝 마을에서 7km 정도 떨어진 송지면의 송호리 해수욕장 근처 해변에 주차하고 자전거를 내려서 땅 끝 마을 구경을 갔다. 지방도에 대형 화물 차량이 위험하게 달리고 있었지만 자전거를 몰고 달리자니 운전자들 모두가 많은 배려를 해 주어 안전하게 달릴 수 있었다.
특기하고 싶은 것은 이곳 해안가의 도로들도 굴곡이 심하다는 사실이다. 송호리 해수욕장에서 바라보이는 고개는 아득하여 보이지도 않을 만큼 높았지만, 기분이 좋아 단숨에 정상까지 달려갈 기세로 자전거를 몰았는데 첫 오르막을 다 오르기도 전에 지쳐 속도가 끌바 속도로 떨어졌다.
이번 여행에선 즐겨 타던 7킬로 대의 극강의 가벼운 카본 로드자전거와 그보다 조금 더 무거운 산악용 카본 자전거를 두고 두 배나 무겁고 튼튼한 14킬로, 거기다 가방에 물건을 잔뜩 넣은 20킬로에 가까운 크로몰리 여행용을 몰고 갔다. 그것으로 고개 정상까지 올라갔고, 반대편의 땅끝마을 관광지를 둘러보고 또 전망대 정상까지 타고 올라갔고, 전망대까지 걸어올라 갔다가 다시 하산하여 처음 그 고개를 넘어오고 보니 무릎이 탈이 나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길에서는 잠시나마 아주 시원하게 달리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주차한 그곳은 조용하고 바다를 향한 커다란 팔각정자와 아주 크고 깨끗한 화장실과 해변의 벤치며 넓은 공간이 있었다. 정자 위에 6인용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 먹고 샤워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엔 또 해물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페트 병 2리터짜리 상단을 칼로 잘라 거꾸로 끼우고 그 속에 전날 밤에 샀던 새우깡을 넣고 후배의 조언에 따라 자갈도 한 움큼 넣어 두 개를 만들어 밀물이 가득한 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다음날 아침, 결과는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고 점심을 지어 나의 자전거 가방에 넣고, 차를 몰아 땅끝마을 공용주차장에 주차하고 자전거만 타고 보길도로 가는 배를 탔다. 승용차는 2만원 오토바이는 1만원을 받는 걸로 알지만 열차나 버스와 마찬가지로 여객선도 자전거는 돈을 따로 요구하진 않았다.
날은 화창하고 선원들은 자전거를 입구 계단 아래 주차하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아마도 고희를 바라보는 머리가 허연 노인이라 그럴 것이라 생각하니 약간은 서글퍼졌다.
우리는 2층의 맨 뒤편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코비드19 때문에 선실에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아직도 서울 지역에서 병이 유행하고 있는데도 여행을 나섰던 것은 전라도의 끝이기도 하고, 기본 전제로 노 식당, 노 호텔로 일체의 물체와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힘차게 나아가는 거선의 엔진에 감탄하면서 점점이 가까워졌다 멀어져가는 다도해의 섬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절로 좋아져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시원한 바닷바람과 비린 물내음에 취해 도착한 곳이 노화도였다. 여기서 노화(蘆花)란 갈대꽃을 이르는 말로 고산의 어부사시사 중에 노화에 불을 붙여 고기를 굽는다는 말이 나온다. 왜 보길도로 바로 가는 표를 끊지 않았냐고 물으니 후배는 보길도로 가는 배는 없고 모든 여객은 노화도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고 했다.
물론 우리는 자전거로 달려가야 했다. 후배가 타고 있는 자전거는 여행용 자전거로 정평이 나 있는 캐나다 산 셜리다. 요즘은 가격이 올라 이백을 줘야 살 수 있다. 내가 탄 자전거는 일본산 후지자전거로 오랜 세월 여행용 자전거 하나로 버텨온 역시 여행 전문용이다. 모든 스펙은 셜리와 같은 크로몰리 프레임이지만 가성비는 좋다.
혹자는 무슨 자전거를 그렇게 종류별로 사느냐고 비난할 지도 모르지만 여행에선 가방을 주렁주렁 매단 튼튼한 여행용 자전거를, 산악이나 비포장에선 산악용을, 길이 좋은 도로나 자전거길을 장거리로 달릴 때엔 로드로 나서는 것이 좋다. 거기다 열차나 버스를 보조교통수단으로 삼을 경우는 20인치 접이식 미니벨로가 더 좋다. 마지막으로 시내 마실용은 20만 원대의 유사 엠티비가 도둑 걱정 없고 승차감 좋아 가장 편리하다.
노화도는 동천항 부두에서 벗어나자마자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오전 9시 30분 배를 탔으니 열시가 한참 지난 시각이다. 햇살은 따끈따끈하게 아스팔트 도로를 달구고 경사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느낌에 오르막 7%에 거리는 몇 백 미터 됨직해 보였다.
그렇게 고개를 오른 다음 내리막을 달려갔다. 그 다음 언덕을 또 올라 후배와 같이 내려다보이는 평야를 가로질러 끝날 즈음에 길가의 언덕에 한 떼의 상주들이 포클레인으로 묘를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세상 소풍 끝마치고 영원한 쉼터로 돌아가는구나 생각하며 그 앞을 달려갔다. 머지않아 우리도 따라가야 할 길이다.
그 다음 고개를 넘어가니 노화읍소재지인 번화가가 나타났다. 전통시장도 있고 유흥가며 마트 등등이 육지의 도심과 다름없었다.
우리는 바로 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어가 부식을 좀 더 사고 아침에 못 먹은 커피 캔을 3개나 샀다. 사자마자 그 자리에서 시원한 커피를 한 통 해치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전통시장 앞에서 시작하는 급오르막을 올라가니 보길대교가 우뚝하니 높게 보길도와 노화도를 연결하고 있었다. 다리 위에는 인부들 몇이서 작업을 하고 있었기로 우리는 인도가 아닌 차도를 달렸다. 우리가 탄 것은 엄연한 자전차이기에.
다리를 건너가자 갈림길 팻말이 왼편은 송시열글씐바위 오른편은 윤선도유적지라 되어 있어 바로 우측으로 잡아 달리기 몇 분, 약한 오르막을 오르기 잠시 만에 완만한 내리막을 내려가니 학교 뒤에 커다란 기와건물이 보였다. 윤선도의 그 유명한 세연정이 있는 곳 입구였다.
건물 우측 옆의 주차장에 도착하여 자전거에 탄 채로 ‘이곳이 아닌갑다’라는 나의 말에 서너 명의 산채며 잡곡, 해산물 등을 파는 아낙들이 앞 다투어 맞다고 맞장구다. 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자전거를 주차하고 들어가니 건물 입구 마당에 곱게 말리고 있는 다량의 꽃씨가 햇살에 마르고 있었다. 그걸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세연정을 향해 걸었다.
맨 처음 놀라운 것은 진입로 왼편으로 키가 이십 미터는 족히 됨직한 푸른 등거죽을 한 소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는 모습이었다. 대충 보아 열 그루 안팎으로 뵈는 그 오래된 소나무를 보며 후배에게 물었다. 소나무의 수명이 몇 살인지 아느냐고.
삼백 살이 평균 수명이라니 후배는 윤선도가 임진왜란 즈음에 태어난 사람이니 정확히 433년 전의 사람이므로 소나무도 더 오래되었다기에 사람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듯 소나무도 오래 사는 나무가 있지 않겠냐고 둘러대었다.
경북 울진의 백암산이나 다른 큰 산들을 오르다 보면 만나는 금강송의 크기와 아름다움은 이미 익히 알려진 바이지만 이곳 보길도에 사백 년 전의 고인이 살던 시절 소나무를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제와 달리 날은 몹시 더웠다.
고산 윤선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서울에서 태어나 벼슬을 했던 시인, 문신, 작가, 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의술에도 정통했으며 인조 시절 의금부 금부도사 겸 통덕랑을 지냈고, 남인으로서 서인인 송시열과 평생을 겨루어 패배를 거듭하여 오랜 유배로 고통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같은 주옥같은 작품이 나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는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며, 아내는 초취, 재취, 삼취 3명에 첩이 2명이었고, 자녀는 6명, 85세에 보길도에서 노환으로 운명했다.
한 모퉁이 오솔길을 돌아서니 먼저 커다란 바위 아래 작은 바윗돌 뙤약볕 위에 짙푸른 청색의 자라 두 마리가 햇볕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곳이 얼마나 청정한 계곡인지 감탄을 연발하며 연못을 구경하며 급한 마음에 먼발치에서부터 그 유명한 세연정을 바라보았다.
티브이에서, 또한 책을 통해 알게 된 이곳을 오래 전부터 얼마나 와 보고 싶었던 곳이던가? 고산의 울적한 심경을 이곳에서 달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엾기도 하지만 또 한편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으로 이런 정자와 시와 문학으로 평민이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리다 간 분이란 생각도 들었다.
세연정은 좌우 각 3칸의 전부 열 칸에 달하는 웅장하고 높은 정자로 한가운데는 온돌을 넣어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였고, 사방이 모두 물이 고이도록 계곡 하류인 서편을 판석으로 상자처럼 길게 가로질러 만들고 그 안에 회를 부어 굳혀 판석보를 만들어 보의 역할 겸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로도 사용하도록 해 두었다.
정자의 외부에는 열어서 위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목재덧문이 만들어져 한겨울이나 혹은 태풍으로 인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가운데 온돌에 불을 넣기 위해 서쪽 가운데 칸 마루를 기본 마룻바닥 보다 자반 정도 더 높게 만들어서 부엌에서 서서 그 아래로 들락거리며 아궁이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그 아궁이 쪽 부엌에서 가운데 온돌방으로 음식을 들이밀어 넣을 수 있는 작은 가로쪽문도 두 개 붙어 있었다.
이 세연정은 명승 제34호로서 영양의 서석지,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손꼽히는 정자다. 여기서 세연(洗然)이란 뜻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고산은 노비와 기생들과 문우들을 모아놓고 술잔을 들고 즐겼으리라.
거기다 산 위로 동천석실과 침실이, 길 왼편엔 곡수당과 낙서재가 있었지만 사전 지식이 부족하여 다 돌아보지 못하였다. 보길도에 다시 갈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 동천석실 아래엔 바위를 깎아 파내어 만든 인공연못도 있고, 그 앞에 고산이 차를 마시던 차바위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그 석실에서 시를 쓰고 책을 보았으리라. 아직도 이 섬에 400년 전의 그의 숨결이 온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우리도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시를 쓸 일이다. 그의 산중신곡을 읽어보자.
산중신곡 윤선도
1. 절로 흥이 일어남
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는다 하니
그 모르는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햐암의 뜻이야 내 분수인가 하노라.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서 싫도록 노니노라.
그 밖에 여남은 일이야 부러울 줄 있으랴.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니해도 못내 좋아 하노라.
누군가 三公보다 낫다 하더니 萬乘이 이만하랴.
이제와 헤아리니 巢父許由가 약았구나.
아마도 臨川閑興을 비길 곳이 없어라.
내 천성이 게으르니 하늘이 아시고서
人間萬事 하나도 아니 맡겨
다만당 다툴 이 없는 江山을 지키라 하시도다
강산이 좋다 한들 내 분으로 누었느냐.
임금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겠노라.
아무리 갚고자 하여도 하올 일이 없어라.
2. 아침 산안개
月出山이 높다하더니 미운 것이 안개로다.
天王 第一峯을 일시에 가리는구나.
두어라, 해 퍼진 후면 안개 아니 걷히랴.
3. 긴 여름비
비 오는데 들로 가랴, 사립 닫고 소 먹여라.
장마가 오래되니 쟁기 연장 다스려라.
쉬다가 개는 날 보아 사래 긴 밭 갈아라.
심심은 하다마는 일 없는 적 장마로다.
답답은 하다마는 한가할 적 밤이로다.
아이야, 일찍 자다가 동 트거든 일어나라.
4. 고운 석양
석양이 넘은 후에 산기운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우니 物色이 어둡구나.
아이야, 범 무서운데 나다니지 말아라.
5. 깊은 밤의 휴식
바람 분다 창 닫아라, 밤이 깊다 불을 꺼라.
베개에 누워서 싫도록 쉬어 보자.
아이야 새벽 오거든 내 잠을 깨워라.
6. 흉년의 탄식
還子를 산다 하여 그것을 그르다 하니,
伯夷叔齊가 높은 줄을 이런 일로 알겠구나.
어즈버 사람이 그르랴, 올해 운수 탓이로다.
7. 내 다섯 벗
내 벗이 몇이나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깨끗다 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많은지라.
깨끗고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른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는 건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九泉에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거시
곧기는 뉘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光明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정적이었던 송시열과 서인들도 그의 주장을 거절하고 매번 유배를 보냈던 왕들도 역사의 파도 속에 가라앉아 사라져버렸지만, 고산은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그는 시로써 영생을 얻은 것이다.
이 산중신곡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피신한 왕을 위해 의병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상경하였으나, 화의하고 도성에 환도한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되돌아간 것을 두고 환도한 즉시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되어 영덕으로 귀양 갔다 풀려나 고향인 해남 금쇄동에서 지은 시조이다.
따지고 보면 절대군주 아래에서 효종과 현종이 동궁이었던 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평생을 겨루어 패배했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지만, 당사자가 되어 걸핏하면 억울한 유배생활을 계속하는 일이 그 누가 즐거우랴?
시를 잘 지었고 문학에 재능이 있는 예술인이었으며, 성급하고 직설적이었던 그가 어떻게 목숨 걸고 덤비는 당대 최고의 학자라 칭송받는 송시열과 서인들을 이길 수 있었으랴. 대개의 예술 하는 사람들은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사람보다는 마음 좋고 감성적인 부분이 더 많다. 시퍼런 칼날 같은 이성으로 중무장한 송시열 같은 무리들을 이길 수 없었음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산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헛되이 보내지 않았고, 천추에 길이 빛날 아름다운 시를 남기고 있다. 그는 시(詩)를 통해 영생을 얻어 사백 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평생 85년의 세월동안 16년이나 유배생활을 하였고 마지막 유배가 풀린 때가 죽기 3년 전인 82세였으니, 왕도 참 졸렬하고 인정머리 없는 못난 작자였다 싶다. 고산은 그 고통을 오롯이 시에 쏟아 부었고 그 자신도 시(詩)를 통해 스스로 위안을 받았으리라.
보길도에서 가까운 강진에는 다산초당이 있다. 요즘 가보면 그 자리에는 초당 대신 와당이 있지만 이름처럼 처음에는 초가였다. 이 초당에서 18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지내며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정약용은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다.
다산의 외5대 조부였던 고산의 이 고통을 그의 후손인 다산도 그대로 또 받게 되는데, 39세의 아직 젊은 시절 유배를 갔던 다산에게 유배생활 10년째 되는 해에 그의 아내 홍혜완은 홀로 독수공방하면서 남편을 그리워한 나머지 신혼시절 뜨거웠던 밤을 생각해내고는, 그날 밤 신혼 초야에 입었던 하피(霞帔)라는 붉은 비단치마를 보낸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예복이지만 30여년 세월에 이미 색 바랜 낡은 치마다.
그 어떤 필설로도 대신할 수 없는 초강력 퍼포먼스로 첫날 밤 입었던 치마를 보낸 그녀,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난 집안이지만 명색이 대갓집 마님인데 아랫것들처럼 구구절절 야한 글로 당신의 품이 그립다 말할 수도 없는 상황, 편지나 옷가지 등을 지니고 심부름을 오가는 자식들에게 차마 맡길 수 없는 편지이니 치마를 보낸 것이 아닐까.
다산은 이 다섯 폭 치마를 가위로 오리고 풀을 먹여 종이를 붙여 70여 장의 하피첩(霞帔牒)이란 것을 만든다. 고향에 있는 두 아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로 내용의 요지는 근검(勤儉)이지만 황사영백서 사건의 황사영이 큰형 정약현의 사위이고, 4대가 순교하는 이승훈도 매부여서 온 집안이 폐족이 되었지만 두 아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근검하고 인품을 닦아 다시 가세를 일으키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이다. 하피첩을 만들고 3년 뒤엔 하나뿐인 딸에게 매화병제도란 화첩을 만들어 보낸다.
다산은 유배 기간 동안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겨 학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그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대표적인 저서이고, 의서인 마과회통은 천연두 예방접종을 자세히 다루어 후세의 백성들 목숨을 크게 보전하게 했다.
다행히도 유배 18년째 되는 해 1818년 57세의 나이로 다산은 해배되어 풀려나 다시 홍씨부인과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기 18년, 혼인 60주년이 되는 회혼일(回婚日) 아침에 자택에서 별세하지만 죽기 사흘 전 그의 나이 75세로 회혼시를 남기고 가는 모습은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회혼시(回婚詩)
六十風輪轉眼翩 육십 풍륜 전 한번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穠桃春色似新婚 농도 춘색사 신혼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生離死別催人老 생리사별최인로
살아 이별하고 죽어 헤어짐이 사람을 늙게 재촉하지만
戚短歡長感主恩 척탄 환장 감 주은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此夜蘭詞聲更好 차야란사성갱호
이 밤 목란사(木蘭辭) 소리 더욱 좋고
舊時霞帔墨猶痕 구시하피묵유흔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剖而復合眞吾象 부 이 복합 진소상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留取雙瓢付子孫 류취쌍표부자손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출처] 다산의 생애. 여유당과 회혼시(回婚詩)|작성자 원당
마지막으로 다산의 색다른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다산시문집 권4에 수록된 작품이다.
애절양
양물[陽]을 자른[絶] 것을 슬퍼하다[哀].
다산 정약용
蘆田少婦哭聲長
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
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
부정불복상가유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自古未聞男絶陽
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澡
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
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
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早
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
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
자한생아조군액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閩囝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騸馬豶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
호가종세주관현
부자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
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
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
[출처] 애절양(哀絶陽)|작성자 연암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조선시대 아전들은 따로 수입이 없었다. 그것이 거의 최근까지도 마을 이장에게 아무런 정부의 보상 없이 마을주민들이 일정금액을 내어 이장이 먹고 살도록 하고 있었던 제도와 비슷하다.
이 애절양이란 시는 다산이 어느 마을 앞을 지나는데 젊은 아낙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보니 남편이 자신의 양물을 칼로 잘라버린 사건이었다. 사연인즉 조선시대 남자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을 지게 되어있었고, 그것을 매년 베 한 필로 납부하게 하였는데, 이 집의 경우 이미 죽은 시아버지와 아직 배냇물도 안 마른 어린아이까지 장정으로 올려 남편까지 군포 세 필을 바치라고 하나 납부하지 못하자 아전이 와서 소를 끌고 가 버린 사건.
이에 격분한 남편은 자신의 양물을 칼로 잘라 방안에 피가 흥건하고 젊은 아낙은 슬피 울고 뭐 그런 이야기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 매관매직이 거의 노골적으로 성행하고 삼정은 문란하여 민초들은 양물을 자를 정도로 내몰리는데, 부자인 양반들은 정부의 모든 세금을 면제해주고 있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
고산의 보길도 세연정에 반해 달려간 걸음에 다산초당 이야기가 나와 잠시 여행기의 본류를 벗어났다. 다시 고산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세연정을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다시 되돌아왔다. 오다가 보길대교 다리 아래 그늘로 내려가서 갖고 간 자리를 깔고 보니 다리 아래 시원한 그늘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건너편의 노화도며 멀리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한 폭 그림이다.
그곳에서 자전거 가방에 싣고 간 점심을 내어 먹고 노화도 하나로 마트에서 산 커피도 즐겼다. 후배는 그곳에서 섬 북쪽의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를 보러 가고 싶어 하였지만 그 전날 땅끝마을 고갯길 오름으로 오른편 무릎이 탈이 난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유명한 섬 남쪽의 예송리 해수욕장과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을 구경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기회가 된다면 내년 여행 목록에 올릴 일이다.
고산의 평생의 정적이었던 송시열도 세자책봉 문제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주도로 귀양 가던 도중, 이곳 보길도의 백도리 끝 바닷가 바위에 탄식의 글을 써 넣었다고 하니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던가. 화무십일홍이 틀린 말이 아니다.
고산은 이 섬에서 오랜 세월 전원과 더불어 시를 짓고 유유자적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우암은 당대에는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후일 조선최고의 유학자로 추앙받기는 해도, 살아생전 말년의 그는 장희빈의 아들 세자 책봉에 반대하여 숙종의 노여움으로 제주도로 유배 되었다가 다시 한성으로 불려 올라가는 도중 전라도 태인에서 사사되어 객사하고 만다.
한때는 세자의 스승으로 나란히 궁중에서 촉망받는 사람이었지만 둘의 삶은 극히 대조적이다. 대부분의 정쟁에서 고산은 20세나 연하인 젊은 우암과 서인들에게 패해 유배와 낙향생활을 하였지만 그에겐 문학이란 행복한 도구가 있었다.
오후의 찌는 듯 한 햇볕이 아스팔트 도로를 달구었지만 다시 보길대교를 건너 노화도 전통시장과 번화가를 지나 고갯길을 올라갔다. 오름길 오른편 노화읍사무소에서 마스크를 한 공무원들이 여럿 달려 나와 차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넘어 다시 내리막을 달려 이번엔 도로를 택하지 않고 농로 가운데 지름길을 달려갔다가 다시 고개를 넘었다. 선착장이 보였다. 부두에 도착하자 표를 사고 이미 대기하고 있던 배에 올랐다.
다시 땅끝마을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 뒤에 자전거 두 대를 달고 길을 나섰다. 이날의 목표는 유서 깊은 해남 달마산의 미황사와 두륜산의 대흥사를 방문하고 저녁의 숙박지는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정하고 길을 나섰다.
여전히 햇살은 대단한 위용을 과시하는 듯 완연한 여름 날씨였다. 땅끝에서 미황사나 대흥사는 같은 해남군내여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달마산 종주를 위해 들렀던 미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절에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피해 계단 우측의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는데 전날 땅끝전망대 고개에서 상한 무릎은 그다지 시원치가 않았다.
일주문에서 밝은 색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혼자 바쁘게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다 우릴 보고 비껴 내려갔다.
처음 미황사를 방문한 후배는 웅장한 사찰규모도 아름답지만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달마산의 바위 능선을 보고 감탄을 그칠 줄 몰랐다. 후배는 여행에 깊은 병이 있어 일본 전역의 유명관광지를 혼자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였고, 얼마 전에는 중국의 차마고도를 무려 28일 동안 혼자 종주한 용감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거기다 어학실력도 출중하여 일어는 원어민 수준이고 중국어와 영어도 잘하는 능력자다.
그런 후배가 춘천 충주간 자전거길 종주에선 일본의 그 어떤 곳 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곳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에서도 대단한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에 위치한 해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서쪽,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자리한 사찰이다. 신라 경덕왕 8년 749년에 의조화상이 창건하였고, 정유재란 때 일부 소실되어 이후 세 차례 중수되었다. 영조 27년 1751년의 세 번째 중수 때에는 필요한 목재를 보길도에서 실어왔고, 대둔사와 인근 마을에서 도움을 주었다.
후배는 대웅전에 들어가서 지극정성으로 부처님께 경배를 올렸다. 나는 마당에 서서 사진을 담았다. 종래엔 둘이 대웅전 왼편에 있는 찻집 감로다실에 들어가서 녹차를 마셨다. 아마 기억에 따르면 평생을 두고 마신 녹차 중 가장 진하고 강렬한 맛이었던 것으로 그 이후로 집에 돌아와서 계속 녹차를 마시게 되었다.
미황사의 조금 슬픈 이야기를 옮겨 보자. 백 년 전 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혼허스님이 절의 중창을 위해 서산대사진법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로 가다가 배가 뒤집혀 스님 한 분을 빼고 전원이 몰살당했다. 서산대사진법군고는 임진왜란 당시부터 승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군악으로 이때는 마을을 돌면서 풍년을 기원해주고 지신도 밟는 등 농악대의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건으로 일시에 스님이 모두 죽어 빈 절이 되어 이후 거의 백 년 동안 잊혀진 절로 남게되었다. 퇴락한 지 백 년이 흐른 1989년, 지운 현곤 금강 세 분 스님이 절에 들어와 오늘의 아름다운 절로 일으켜 세웠다.
미황사 하면 달마산 서쪽 끝의 암자 도솔암을 빼 놓을 수 없지만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두륜산 대흥사로 차를 돌렸다. 나는 산꾼 경력이 삼십 년이 가까워 전국 대부분의 명산을 두루 다녀 본 입장이라 달마산의 오묘한 바위 능선이나 두륜산을 각각 몇 번씩 종주한 경험이 있지만 후배는 그 웅장한 두륜산 정상의 바위 산세를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대흥사는 두륜산 도립공원 내의 사찰이다. 대둔사라고도 불리며 조계종의 제22교구 본사이다. 서기 426년에 창건했다. 서산대사의 의발과 유물일체가 보관되어 있고, 사적과 명승 및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우린 대흥사로 들어가서 주차하고 경내를 둘러보았다. 대웅전을 새로 중수하는 큰 불사가 있어 볼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후배에게 두륜산 정상의 웅장한 바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언젠가는 등산도 하러 오자고 하면서.
다시 차를 돌려 완도의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유료캠핑장이 많아 그 넓은 해변에 캠핑할 만한 곳은 모두 막아놓고 불법 운운하며 협박을 일삼고 있었다. 우린 미련 없이 차를 돌려 명사십리해수욕장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완도의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산 정상에 있는 이만 평가량 넓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먼저 화장실을 가보니 수세식에 최신식 비데까지 설치되어있어 거의 호텔 수준인데 밤이 되니 그 넓은 산위에 달랑 남은 건 우리 둘 뿐이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씻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마지막 날이라 마트에서 샀던 가브리살도 아이스박스에 들어있었기로 남포등은 기름을 넣지 않은 새 것이라 그냥 두고 커다란 테이블 좌우로 전기등과 촛불을 써놓고 가운데 불판을 얹고 가브리살을 구웠다. 6인용 텐트의 문을 한쪽만 열어두어 열기가 조금 갇혔기로 더웠지만 고기는 꿀맛이었다. 달게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5일째 되는 아침에는 서늘하고 맑은 하늘이 기분이 좋았다. 후배는 오곡밥을 짓고 잠시 후 아침을 먹고 점심은 아이스박스에 넣고 차를 움직였다. 차량 뒤칸에는 5일 동안 모은 쓰레기봉투가 몇 개나 되었다. 집에 가지고 가서 처리해야 할 것들이다.
먼저 차를 몰고 간 곳은 강진청자박물관이었다.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눈에 띈 것은 주차장 전체를 둘러싼 청자 작품 전시였다. 사람들 보지 않을 때 청자 한 점을 차에 싣고 가고 싶은 충동이 들 법도 하겠지만 청자는 모두 그 받침대인 사각의 화강암에 강력본드로 붙여두었다.
그 주차장 북쪽에는 기와로 된 천 평이 넘을 듯한 청자 판매장이 있고, 그 오른편엔 청자를 구워내는 불가마 모형이 있었다. 먼저 동쪽의 청자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작품들을 감상하고 아울러 동양화 중 어마어마한 크기의 산수화들도 구경하였다. 그 중 한 작품은 운문산 치마바위 위에서 내려다본 계곡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후배도 같은 말을 하여 서로 즐거워했다.
우리는 약간은 같은 산꾼 기질이 있어 많은 산에 대한 각각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거기다 자전거여행에 대한 입장도 같아서 비록 늙었지만 하루 백 킬로 정도 자전거여행은 별로 어렵지 않게 달릴 수 있고, 내가 어설픈 문인으로 이십 년 가까이 활동해 온 것과 같이 후배는 시와 산문 외국어와 수석 금문 서각 등 다방면에 두루 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 함께 하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다.
그 청자 박물관 옆에는 민화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곳은 유료인지라 패스하고 되돌아 나와 다시 차를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바로 보성 녹차박물관이었다. 예전에도 보성 녹차밭에 가 보았지만 이번에 간 박물관은 내게도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차에 대한 깊은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구경을 다 하고 나오니 한참 햇볕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점심시간이었다. 우리는 차를 몰아 녹차박물관의 정원 한 가운데 있는 팔각정을 차지했다. 그곳 팔각정에 자리를 깔고 점심을 달게 먹고 잠시 누워 쉬다가 차를 움직였다.
4박 5일의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보길도를 방문한 것은 큰 수확이었지만 사전에 관광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게을리 한 탓에 보다 더 세밀한 관광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고산의 대표작인 어부사시사를 감상해 보자. 보길도를 오고 싶어 했던 것도 다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끌림 때문이다.
어부사시사
윤선도
[춘사 1]
앞개울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 거의 끝나고 밀물 밀려 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춘사 2]
날이 따뜻하도다 물 위에 고기 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낚시대는 쥐어있다 탁주병은 실었느냐?
[춘사 3]
동풍이 문득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東湖)를 돌아보며 서호(西湖)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온다!
[춘사 4]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소(연못)에 온갖 고기 뛰어논다.
[춘사 5]
고운 햇볕이 쬐이는데 물결이 기름같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그물을 넣어 두랴 낚시를 놓을까?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탁영가(濯纓歌)의 흥이나니 고기잡이도 잊겠도다!
[춘사 6]
석양(夕陽)이 비추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안류정화(岸柳汀花)는 굽이굽이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찌 삼공을 부러워할소냐 만사를 생각하랴!
안류정화 : 해안 언덕의 버드나무와 물가에 핀 꽃
삼공 : 높은 벼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춘사 7]
방초(芳草)를 바라보며 난초 지초도 뜯어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일엽편주(一葉扁舟)에 실은 것이 무엇인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갈 때는 안개뿐이오 올 때는 달뿐이로다!
방초 : 아름다운 풀
일엽편주 : 나뭇잎 크기의 작은 배
[춘사 8]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니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낙홍(落紅)이 흘러오니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인세홍진(人世紅塵)이 얼마나 가렸던고.
낙홍 : 떨어진 꽃잎
인세홍진 : 인간세상의 욕망의 먼지
[춘사 9]
낚시줄 걷어 놓고 봉창(篷窓)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들었구나 소쩍새 소리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남은 흥이 무궁(無窮)하니 갈 길을 잊었구나.
봉창 : 나웃배의 창
[춘사 10]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얼마나 더되랴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시대로 지팡이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어부의 생애는 이럭저럭 지내노라
[하사 1]
궂은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기쁜 흥을 금할 수 없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연강첩장(烟江疊嶂) 누구라서 그려냈는가?
연강첩장 : 안개 낀 강과 첩첩 가파른 봉우리
[하사 2]
연 잎에 밥 싸 두고 반찬일랑 장만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청약립(靑蒻笠)은 쓰고 있노라 녹사의(綠蓑衣)는 가져 왔느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쫓는가 제가 쫓는가?
청약립 : 풀 줄기 등으로 만든 푸른색 삿갓
녹사의 : 초록색 도롱이 옷
[하사 3]
마름잎에 바람부니 봉창이 서늘하구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바람 고요할소냐 가는 대로 배 두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북포남강(北浦南江)이 어디 아니 좋을러니!
북포남강 : 북쪽 포구와 남쪽 강
[하사 4]
물결이 흐리거든 발을 씻은들 어떠하리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오강(吳江)을 가자하니 천년노도(千年怒濤) 슬프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초강(楚江)에 가자하니 어복충혼(魚腹忠魂) 낚을까 두려워라!
천년노도 : 천년의 성난 물결, 죽은 오자서의 한
어복충혼 : 고기 뱃속의 충성스런 혼, 멱라수에 빠져 죽은 굴원의 충혼
[하사 5]
만류녹음(萬柳綠陰) 어린 곳에 일편태기(一片苔磯) 기특하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다리에 닿았거든 어인쟁도(漁人爭渡) 허물 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가다가 학발 노옹 만나거든 뇌택양거(雷澤讓居) 본을 받자
만류녹음 : 수많은 버드나무의 푸른잎과 그늘
일편태기 : 한조각 물가의 이끼
어인쟁도 : 어부들의 뱃길 다툼
뇌택양거 : 연못에서 고기잡을 때 순임금에게 모두 자리를 양보
[하사 6]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처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배 돛대를 두드리고 수조가(水調歌)를 불러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엇더타 관내성중(款乃聲中)에 만고심(萬古心)을 그 누가 알겠는가?
관내성중 :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는 중에
만고심 : 만고에 변하지 않는 마음
[하사 7]
석양(夕陽)이 좋다마는 황혼(黃昏)이 가깝구나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 소나무 아래 비스듬히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벽수앵성(壁樹鶯聲)이 곳곳에 들리는구나!
벽수앵성 : 푸른 숲 꾀꼬리 소리
[하사 8]
모래 위에 그물을 널고 띠풀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하나 파리는 어떠한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진실로 다만 많은 근심은 상대부(桑大夫) 행여 들을까 두렵워라
상대부 : 출세주의자, 전한 상홍양이 공을 세운 후 벼슬에 집착하여 반란을 꾸민 사건
[하사 9]
밤사이 풍랑 일 줄을 미리 어이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야도횡주(夜渡橫舟)를 누가 일렀는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즈버 간변유초(澗邊幽草)는 진실로 보기 좋구나!
야도횡주 : 밤에 강을 가로질러 가는 배
간변유초 : 계곡 시냇가의 그윽한 곳의 풀
[하사 10]
와실(蝸室)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둘러 있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가로 쥐고 돌길로 올라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마도 어옹(漁翁)이 한가하더냐 이것이 구실이라
와실 : 달팽이 집, 작고 초라한 집
[추사 1]
물외(物外)에 조용한 일이 어부생애 아니더냐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漁翁)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 흥이 한가지나 추강(秋江)이 으뜸이라
[추사 2]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은 물결에 실컷 놀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추사 3]
흰 구름 일어나니 나무 끝이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 동호(東湖) 가고 썰물에 서호(西湖)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백빈홍료(白蘋紅蓼)는 곳곳마다 절경이로다!
백빈홍료 : 흰 마름꽃과 붉은 여귀꽃
[추사 4]
기러기 떠 있는 밖에 못 보던 산 보이는구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興)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석양이 비치니 모든 산이 금수(錦繡)이로다
[추사 5]
은순옥척(銀脣玉尺)이 몇 마리나 걸렸느냐
노 저어라 노 저어라
갈대꽃에 불붙여 골라서 구워놓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술병을 기울여서 표주박에 부어다오
은순옥척 : 은빛나는 입술모양의 옥같이 귀한 월척
[추사 6]
옆 바람 곱게 부니 다른 돛에 돌아왔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명색(瞑色)은 나오니 청흥(淸興)이 멀어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쩐지 홍수청강(紅樹靑江)이 싫지도 밉지도 않구나!
명색 : 어둑어둑한 빛
청홍 : 풍류적이고 고상한 흥
홍수청강 : 붉은 단풍나무와 푸른 강물
[추사 7]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봉황루(鳳凰樓) 묘연(渺然)하니 청광(淸光)을 누구를 줄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옥토끼가 찧는 약을 호객(豪客)에게 먹이고자
묘연 : 아득하고 넓으니
청광 : 맑은 달빛
[추사 8]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이것이 어디인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속세의 먼지가 못 미치니 부채질하여 무엇하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들은 말이 없었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추사 9]
옷 위에 서리 내리되 추운 줄을 모르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가 좁다 하나 부세(浮世)와 어떠하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내일도 이렇게 하고 모레도 이렇게 하자
부세 : 덧없는 세상, 부운세상(浮雲世上)
[추사 10]
송간석실(松間石室)에 가서 새벽달을 보자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공산납엽(空山落葉))의 길을 어찌 알아 볼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흰 구름이 좇아오니 여라의(女羅衣)가 무겁구나
송간석실 : 소나무 사이에 돌로 지은 집
공산낙엽 : 빈 산의 낙엽
여라의 : 소나무에 기생하는 하루살이, 가벼운 옷
[동사 1]
구름 걷힌 후에 햇볕이 두텁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폐색(天地閉塞)하되 바다는 예전과 같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비단 펼친 듯 하여 있다
천지폐색 :하늘과 땅이 닫히고 막힘
[동사 2]
낚시줄대를 손질하고 뱃밥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소상동정(瀟湘洞庭)은 그 물이 언다하더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마도 이때 낚시야 이만한데 있으랴!
소상동정 : 소상강과 동정호
[동사 3]
얕은 갯가 고기들이 먼 바다 다 갔느니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어느 듯 날 좋은 때 어장에 나가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미끼 좋으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동사 4]
간밤에 눈 갠 후에 경치가 달라졌구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것이 선계(仙界)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동사 5]
그물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앞 바다를 건너본 것이 몇 번인가 헤려보았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느닷없는 강한 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동사 6]
날아가는 까마귀 몇 마리나 지났는가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우니 저녁 눈이 자욱해졌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뉘라서 그 조용한 아압지(鵝鴨池)에 초본참(草本慚)을 싯었던고
아압지 : 연못의 거위 떼를 놀라게 하여 이를 이용하여 성을 함락
초본참 : 병자호란으로 초목까지 입은 치욕
[동사 7]
단애취벽(丹崖翠壁)이 화병(畫屛)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거구세린(巨口細鱗)을 낚으나 못 낚으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고주사립(孤舟蓑笠)에 흥 겨워 앉았노라
단애취벽 :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
거구세린 :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는 물고기
고주사립 : 외로운 배에 도롱이 입고 삿갓 쓰고
[동사 8]
물가의 외로운 소나무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한탄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물결소리를 염증내지 마라 진훤(塵喧)을 막는도다!
진훤 : 더러운 때와 소리
[동사 9]
창주(滄州)에 우리의 도(道)를 옛부터 일렀느니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칠리양구(七里羊裘)는 그 어떠함이런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모름이 삼천육백날 낚시는 손 곱을 때 어떠하던고?
창주 : 푸른 물가, 시골, 은자들이 사는 곳
칠리양구 : 후한 광무제 때의 은사로 칠리탄에서 엄자릉이 양피옷을 입고 낚시하던 곳
삼천육백 낚시 : 강태공이 위수가에서 삼천육백일 때를 기다리며 낚시하는 고사
[동사 10]
아아! 저물어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려진 길에 흥에 겨워 돌아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서봉(西峰)에 달 넘어가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노라 끝.
2020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