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번, 진국 그리고 삼한 - 삼한의 기원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조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조선왕 위만은 원래 (전국시대의) 연나라 사람이었다. 燕은 그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키고 요동장성을 쌓았던 적이 있다. 秦의 시황제는 燕을 멸망시키고 요동의 이민족을 복속시켰다. 漢王朝가 일어나자 그 땅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옛 燕의 요동장성을 修復하고 浿水까지를 국경으로 하여 燕에 소속시켰다. 燕王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위만은 1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상투를 틀고 蠻夷의 복장으로 長城을 나와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옛 진나라의 땅에 터를 잡았다. 위만은 진번에 속해있던 조선의 蠻夷들과 그 땅에 살고 있는 燕. 齊 망명자들의 왕이 되었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 漢은 위만이 漢의 변경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것과, 蠻夷의 君長이 천자 알현을 원할 경우 이를 막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하고 그를 外臣으로 삼았다. 위만은 이를 기화로 인근의 소읍들을 침공하여 항복을 받고 진번, 임둔 등을 모두 복속시켰기 때문에 수천 리의 땅을 얻었다. 그 아들에서 손자 우거로 왕위가 전해지니 많은 漢人들이 망명해와 조선은 더욱 부강해졌다. 우거는 한나라에 入朝하지 않을 뿐더러 진번에 이웃해있는 진국(眞番旁辰國)이 天子를 알현코자 入朝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한서> 조선전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있다. <삼국지> 마한전은 <위략>을 인용하여 ‘재상 역계경이 이의 잘못을 간했으나 우거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2천여호의 주민과 함께 동쪽의 辰國으로 망명했다’고 기술했다. 漢의 武帝는 이를 이유로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BC 108년 이를 멸망시키고 그 故地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편 <삼국지> 마한전에는 위만이 왕이 될 때의 일(BC 195년경)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조선의 왕 準은 (망명해 온) 위만을 믿고 총애했으며 圭의 땅을 그의 영지로 봉했으며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고 거짓 보고를 하여 준왕을 꾀어낸 뒤 準王을 공격하였다. 準王은 맞서 싸웠지만 위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준왕은 왕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 韓地에 정착하여 韓王을 칭했다.
이상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에 나오는 眞番과 辰國은 요동지방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도 위만조선에 관하여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지만 辰國의 위치에 관해서는 전혀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즉 <삼국지>는 ‘진한은 예전의 진국이다’ (辰韓者古之辰國) 라고 하였으며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는 ‘안사고가 말하기를 辰은 옛 진한을 일컫는 것이다’(師古云 辰謂辰韓之國) 라고 되어있다. <위략>과 <삼국지>는 진국을 진한의 前身으로 본 것이다. 반면 <후한서>는 ‘韓은 마한. 진한. 변진으로 나뉘어있으며 합계 78국인데 모두 옛 진국이다’ (韓...皆古之辰國) 라고 하여 진국을 삼한 전체의 前身이라고 하였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학계에는 한사군의 위치에 관하여 여러 견해가 있으며, 진번군의 위치에 관해서도 북방설과 남방설로 의견이 나뉘어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번과 진한은 위만조선의 남쪽에 있었으며 위만조선의 간접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위만조선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한나라에 조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진번과 진국은 한반도 남부를 막연하게 부르는 말이었으며 진번은 한반도의 남서부, 진국은 남동부를 가리켰다고 본다. 漢의 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故地에 한사군을 설치할 때 위만조선의 간접 지배하에 있던 진번과 진국의 일부를 한사군에 포함시켰다고 본다. 그래서 진번군의 위치는 진번의 땅, 즉 황해. 경기. 충청지역이었다고 본다. 진번군이란 원래 그곳이 진번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임둔군은 강원도지역이었으며 그 이남에 辰國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辰國은 한사군 설치 때 이에 편입되지 않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한 총칭이기도 한 것이다.
<후한서>는 진국을 삼한 전체의 前身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저자 氾曄이 <삼국지>의 기술내용이 애매하다고 생각하여 합리적으로 이를 改作한 것이지 별도의 다른 사료가 있어 그렇게 기술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후한서>의 기술대로라면 진번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진국은 진한의 前身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辰韓이라는 명칭은 辰國에서 나왔을 것이다.
한반도의 전라도와 경상남도에는 韓人과 倭人이 雜居하고 있었다고 본다. <梁書>와 <南史> 백제전에 ‘그 나라는 왜에 가깝고 문신을 한 사람이 매우 많다’고 쓰여 있고 <수서> 백제전은 ‘그 나라 사람들은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등이 잡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개토왕비문의 왜가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고 본다. 그 왜는 일본열도의 왜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변진과 마한의 남부는 ‘왜’라고 통칭되었다고 생각한다.
BC 82년 진번군이 폐지되자 진번군 지역은 韓과 倭가 잡거하던 전라도를 합하여 마한이 되었다. 한편 진국은 진한과 변진으로 나뉘었는데 이것은 변진, 즉 진국 남부에는 왜인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즉 마한은 진번과 남쪽의 한. 왜의 잡거지역이 통합된 것인 반면 진한과 변진은 진국이 북쪽의 韓人지역과 남쪽의 韓倭 잡거지역이 분리된 것이다. 그것은 전라도와 경남지방에서는 한과 왜가 잡거하고 있었으나 전라도지방은 韓人에 비하여 왜인이 소수였던 반면 경남지방은 왜인이 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진한은 변진이라고 표기되어있기도 한데 이것은 변진에는 韓人보다 倭人이 많았기 때문에 명칭에서 ‘韓’을 뺀 것이라고 본다.
마한은 인구나 국력에 있어서 진한. 변진을 압도하고 있었고 그들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한 50여국 가운데 月支國(목지국)이 최강국이었는데 이 월지국은 옛 진번군의 땅에 세워진 나라로, 백제의 호족 眞氏는 원래 이 월지국의 왕이었다고 본다. 眞氏라는 姓은 眞番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학자 今西龍은 진씨의 眞은 우리말 ‘참’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월지국의 왕은 월지국이 원래 진번에 속해있었으므로 진번의 眞을 따 그의 姓을 ‘참’이라고 한 것이라고 본다.
한편 辰國, 辰韓의 辰은 ‘새벽’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신라의 前身 사로국의 사로는 ‘날이 새다’(=동이 트다)의 형용형 ‘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東의 순수 우리말은 ‘새’라고 하는데 이것은 ‘날이 새는 쪽’, 즉 동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동이 트다’는 ‘東이 트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즉 辰國의 辰은 ‘동쪽’이라는 뜻이므로 이것은 眞番傍辰國, 즉 진번이 진국의 옆에 있는 나라라는 <삼국지>의 기술내용과 부합한다.
BC 3세기 경, 한반도의 북부에는 고조선이 있었고 남부에는 진번과 진국이 있었다. BC 108년의 한사군의 설치 이후 진번과 진국은 삼한 즉 마한. 진한. 변진으로 바뀌었다. 고조선은 고대국가의 체제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지만 진번과 진국은 그 후의 삼한이 70여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미루어볼 때 그곳에 있었던 느슨한 읍락국가들을 총괄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본다.
첫댓글 辰國의 출자와 언제 건국되어 멸망했는지는 기록이 참으로 부족하다.
사서에는 우거(위만조선)가 깨지기 전에 역계경이 동쪽 辰國으로 도망쳤다고 하였으니, 위만조선의 대까지는 辰國이 존속했다고 볼 수 있다. 辰國은 남방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마한은 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이 남으로 도망쳐서 목지국에 도읍하여 세웠다고 하였다.
문제는 다스린 곳이 辰國의 영토와 겹친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을 서로 다른 나라가 모두 다스렸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치더라도 양자간에는 복속의 관계는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기준이 辰國을 깨뜨려 복속시키고 韓의 맹주를 자처하였을 것이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부여가 일어섰는데 부여가 辰國의 후손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즉 辰國의 후손들이 위만조선의 땅을 회복하고 부여를 세웠으나 다시 나라가 다시 분열되어 흩어지고 이를 다시 회복한 이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는 제왕연대력의 설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다.
제왕연대력에는 辰國의 적통이 신라라고 주장하며, 그 논리가 정연하지 못하다.
아마도 고대에도 이러한 적통의 시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면 辰國은 옛날 단군조선의 후예인 듯 하다.
요임금시절 檀조선을 건국하고 후에 남방을 평정하여 震조선(辰國)으로 나라 이름을 고쳤는데, 후에 기자가 온 이후로 나라가 오그라들어 남방만을 다스렸을 것이다. 혹은 기자조선에 내속하여 있었을 것이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마한을 세우니 바꾸어 마한을 섬기게 되었다.
위만조선이 멸망하자 옛 조선의 땅을 회복하고자 부여가 일어났다.
논리가 정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참고하는 사서마다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어디가 맞고 어디가 그른지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진자는 여진도 있고 발해인 진국도 있습니다. 숙신의 신자와 연결될 수도 있어 조선 숙신의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신채호도 지적했듯이 조선과 숙신을 같이 보는 견해가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음글은 요사지리지 기록입니다.최초의 진국과 진한은 개주에 있었습니다.후에 한에 밀려 요동반도의 남쪽으로 이동합니다.<진주(辰州) 봉국군(奉國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이세적(李世勣)과 만나 개모성을 공파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발해는 개주(蓋州)로 고쳤다가 다시 진주로 고쳤으니, 진한(辰韓)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정읍(井邑 ; 아홉집이 나누어 경작하는 토지)이 나란 줄지어 모여있다. 요나라가 조주(祖州)에서 백성을 옮겨왔다. 처음에는 장평군(長平軍)이라 하였는데, 호구수는 2,000이다. 동경유사사에 예속되었으며 관할하는 현은 건안현(建安縣) 하나이다.>
불사조님이 말씀하시는 진자(신자)는 처음 듣는 말이라... 요서지리지의 내용은 사기나 한서와 비슷하군요. 하여튼 원래의 조선의 영역, 위만조선의 강역 등이 불확실한 상태이므로 진번.진국의 위치도 不明이라고 하는 편이 옳은 것 같습니다. 낙랑군이 위만조선의 故地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지만 과연 그것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고요. 진번. 진국이 요동이나 만주방면에 있었을 가능성도 많다고 봅니다만 그럴 경우 한사군의 위치가 지금의 통설과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라고 봅니다.
숙신(肅愼), 여진(女眞), 발해의 옛이름인 진국(震國) , 또 辰은 신으로도 발음된다는 점에서 관련성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진국을 辰國으로 쓰고 '辰'을 동쪽으로 해석한다면 상대적으로 진국의 서쪽에 고조선에 속한 나라가 있어야 할것입니다.그런데 개주지역의 서쪽은 요동만이라는 발해의 북쪽바다만이 있습니다.그 바다 서쪽으로는 요서군만이 보입니다.그렇다면 요동군은 어디로 간것입니까? 연나라가 치고 들어와 멈춘곳은 진번조선입니다.이것을 진번,조선으로 번역하는건 잘못된것입니다.당시 조선은 예맥.진번.낙랑조선으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따라서 진번조선은 요하의 동서에 분포되어 있었다고 보는것입니다.그런데 이 진번조선의 광령평원이 요동만으로 윤몰되었다고 주장하는것이지요. 따라서 제후국이었던 진국이 개주에 있었다는 설은 타당합니다.
그렇군요. 짧은 지식에 구산님의 말씀을 100%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실 진번조선이라는 번역이 옳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통설에서는 진번조선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것 같아서요. 구산님의 설명대로라면 한사군의 위치도 상당히 바뀌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준이 될 수 있는 單單大嶺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불확실하고요. 특히 진번군이 실제로 어디에 위치해있었는지가 저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후한서> 郡國志에 거리가 표시되어 있습니다만....여러가지 애매한 점도 있고.....
아하~ 진자, 신자의 자는 字로군요.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조선=쥬신인가요? 진번조선 또는 기자조선의 위치와 강역은 잘 모르겠지만 위만조선은 수천리의 땅이라고 했으니 숙신, 여진, 진국(발해국)이 포함되어있었을 수 있지요. 쥬신론도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환단고기는 위서라고는 하지만 만주지방에 남아있던 고기록이나 전승을 많이 참조했다고 봅니다. 또 요서 등의 기록에 대해서도 많은 검토가 이루어져 진번조선, 진국, 초기 한사군의 위치 등이 좀 더 분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정사에 위만이 준왕을 밀어내고 건국한 조선에 대한 <,사기>> 조선열전의 첫번째 기록에 대한 정의의 주석입니다.
王之都王險城 滿得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왕지도왕험성 만득병위재물 침항기방소읍 진번,임둔,개래복속 방수천리
[正義 括地志云 朝鮮高麗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정의 괄지지운 조선고려맥동옥저오국지지 국동서천삼백리 남북이천리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재경사동 동지대해사백리 북지영주계구백이십리 남지신라국육백리
北至靺鞨國千四百里]
북지말갈국천사백리
정의 괄지지에 따르면 조선.고려맥.동옥저등의 땅은 나라의 동서가 1300리이고 남북이 2000리라고 하였습니다.그런데 그 위치는 경사(낙양)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러(산동반도 북부)400리라는 말입니다.이 뜻은 발해해협에 해당되는 지역을 말하는것입니다.북쪽으로는 영주계(營州界)까지 920리이고 남쪽으로는 600리 거리에 신라가 있다고 하였습니다.그리고 북쪽으로 1400리 거리에 말갈에 이른다고 합니다.여기서 같은 북쪽이지만 영주계는 서북쪽이고, 말갈은 동북을 의미합니다.이 글을 쓸 때가 당나라때 인 만큼 남쪽으로 600리 거리에 신라가 있다는 말은 서기 732년 이후 영해군사寧海軍使의 산동반도 동부지역 통치를 말하는듯 합니다.
구산님의 글, 늦게 보았네요. 그렇군요. 그런데 東至大海四百里란 조선고려맥동옥저의 동쪽 동해바다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東至는 낙양에서 사백리 동쪽이 아니라 조선고려맥동옥저의 중심에서 사백리 동쪽이란 뜻 아닐까요? 조선고려맥동옥저가 요동의 동쪽, 남만주한반도북부에 있고 그 서북쪽에 영주, 동북쪽에 말갈, 남쪽에 신라, 이렇게 보면 대충 앞뒤가 맞을 것 같은데요. 하여튼 저도 나름대로 재검토해보겠습니다.
경사에서 바다에 이르기 까지는 거리가 나와있지 않습니다.즉 동쪽으로 바다에이르러 4백리라는 뜻입니다.4백리의 바다안에 흩어져 있는 묘도군도를 말한것이지요.지금은 잘 이해하시기가 어려우시겠지만 앞으로 많은 사서를 통해서 왜 그러한 주장을 하는지를 이해하시게 될것입니다.우거가 지키던 고조선이 한 무제에게 무너질 무렵 그 위치를두고 위에 설명드린 영역은 발해해협에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명이 따르게 됩니다.위만조선시대 생겨난 한이나 삼한역시 한나라 세력에 쫓겨 요동반도의 동남쪽으로 분산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