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tUe3MkIZzkQ 조선일보 2012/07/21 03:27 [Why] [김윤덕의 사람人] 임실 치즈의 代父 … 디디에 세스테벤스, 지정환 신부 신부님, 김치 나라에 〈치즈의 기적〉을 행하다 유신 시위로 체포 … 박대통령, 치즈만든 공로 듣고 추방명령 취소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휠체어 신세인데도 老신부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텁수룩한 수염 사이로 전라도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젊어서 배우처럼 자알~ 생겼었제. 사제 안되었으면 연애박사가 되었을것인디』 신부의 손끝이 가리키는 컴퓨터 화면이 흑백 사진들로 가득하다. 「1931.12.5일」이란 글자가 적힌 출생신고서, 7살적 작은형과 찍은 사진, 한달반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올때 찍은 여권 사진, 임실에서 처음 비누갑에 치즈를 만들던 시절 사진들… 페르귄트 조곡(Grieg: Peer Gynt Suites)이 나지막이 흐르는 서재(書齋)에서 신부는 흡족한 표정으로 지나온 흔적들을 回想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3209325 https://www.youtube.com/watch?v=LLXXdVlGRjk&feature=youtu.be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 81).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지만 「지정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반세기였다. 전쟁 직후의 한국을 선교지로 택한건 순전히 젊은 혈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언제 원자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한국에 가고 싶었다. 1959년 전주교구 신부로 부임한 뒤 「사고」도 많이 쳤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마련한다고 부안(扶安) 바닷물을 막아 여의도(汝矣島)보다 2배나 넓은 간척지(干拓地)를 만들었고, 임실(任實)로 부임해서는 산양(山羊)을 키워 치즈를 만들었다. 명실공히 〈임실치즈〉의 원조다. 지학순 주교를 구속한 유신(維新)정권에 맞서 시위를 하다 추방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정의가 환히 빛나게 하려고 지랄한다」가 내 이름 뜻이여』 1980년대부터는 장애인 공동체 〈무지개가족〉의 지도신부로 중증장애인을 위한 재활사업에 헌신, 2002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상금 1억원을 종자돈으로 설립한 〈무지개장학재단〉은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장애인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다. 지난 7월 10일, 지정환 신부가 살고있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을 찾았다. 치즈 만들면서 얻은 「다발성신경경화증」으로 지팡이 없이는 몇발짝 걷지 못하는지 신부는 주로 휠체어에 앉아 모든일을 처리했다. 『이눔이 폭탄이라. 다리로 왔다가 눈으로 왔다가 지 맘대로여. (경화증이) 눈에 왔을때 제일 힘들제. 책도 못읽고 운전도 못하고 컴퓨터도 못하니. 그래도 괜찮어. 愛人(病)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도 재미있어』 池신부는 요즘 〈한국 천주교 교회사〉를 정리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남긴 1800년대 자필 문서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그의 집에는 「별아래」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벨기에 귀족가문 막내 치즈 개발 도전 … 가난 대물림하던 청년들 꿈에 날개 달아 사랑은 주고 받는것 한국을 「爲해」 일한게 아니라 그저 「함께」 했을뿐 내 장례미사엔 노사연의 〈만남〉을… 1960년대 부안성당 주임신부(中)로 일할때 신도들과 찍은 사진 ◇ 별 아래, 달 아래 ― 왜 〈별아래〉입니까? 『古文書를 정리하다 찾아낸 이름이에요. 지금은 北韓에 속한 강원도 이천 마을 중에 「별아래」가 있었어요. 「별 아래 있는 마을」이라니 얼마나 예쁩니까? 그래서 우리집은 「별아래」, 옆집은 「달아래」예요. 일제강점기 들어와 마을 이름들이 죄다 漢字語가 되는 바람에 아름다운 한국말들이 사라졌어요. 우리 동네 이름인 「다리목(多梨목)」도 「배(梨)가 많은(多) 동네」라는 뜻의 한자어죠』 ―우리말에 조예(造詣)가 깊으십니다. 『한국말 어려워 울면서 배웠는데, 알면 알수록 정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漢字도 좋아해요. 한글과 한자의 맛이 완연히 다르지요』 ―일선에서는 물러나신 건가요? 『2003년 〈무지개가족〉 지도신부 직을 사임했고, 지금은 〈무지개장학재단〉이 잘 굴러갈수있게 돕고 있어요. 가끔 미사 집전은 합니다. 본당 신부들이 바쁠때나 우리 동네 천주교 노인복지시설, 무지개가족 장애인 미사 등등. 내가 집전하는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이뤄져요. 장애인이든 아니든, 지병(持病)이 있든 없든 미사 도중에 절대 일어나지 말라고 해요.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들이 창피함을 느끼니까요』 ― 〈무지개가족〉은 중증장애인 재활센터로 명성이 높습니다. 약물 치료보다 운동을 통한 재활에 중점을 둔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끊어진 신경(神經)에는 약(藥)이 없어요. 줄기체세포? 모두의 희망일뿐이지요. 100년후에나 가능할까요? 약(藥)을 믿으면 안돼요. 침, 쑥뜸 다 소용없어요. 나도 19일 동안 다리에 쑥뜸 고문을 받았는데 아무 소용 없더라고요. 방법은 운동, 운동, 또 운동뿐이에요. 침대에 누워있으려고만 하면 안돼요. 휠체어에 앉았다가, 다음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려고 노력해야지요』 池신부를 도와 〈무지개장학재단〉에서 일하는 吳선(52) 씨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체대 출신의 전직 체조코치였던 그녀는 선수들에게 시범을 보이다 평행봉에서 떨어지면서 전신마비가 됐다. 절망감에 자살 기도까지 했던 오씨는 〈무지개가족〉에 오게 되면서 「제2의 인생」을 얻는다. 침대에서 꼼짝못했던 그녀는 운동과 재활치료로 이제 휠체어에 앉아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룬다. 池신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사이버대학에서 장애인복지를 전공하기도 했다. ― 장애인 주거지, 휠체어 하나도 신부님이 직접 설계하고 개조한다고 들었습니다. 『문턱 없애고, 침대에 누워서도 바깥풍경을 볼수있게 창문을 낮춰 달고요. 그리고 휠체어는 오래 앉아있으면 욕창(褥瘡)이 생기고 심장(心臟)이 약해집니다. 팔에 힘이 없는 장애인들도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할 수 있게 팔걸이 밑에 스프링을 설치했지요.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팔걸이가 밑으로 내려가게끔. 그렇게 하루종일 팔운동을 하다 보면 팔에 힘이 생겨요. 또 하루에 몇번씩 환자의 겨드랑이, 허벅지, 엉덩이 부위를 버팀목에 고정시켜 직립상태로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면 심장이 계속 펌프질하게 되고 튼튼해지지요. 사지마비(四肢痲痹)로 들어왔다가 지금은 혼자 일어나 식사까지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 중증 장애인에게 운동은 또 다른 고통 아닐까요? 『그래서 컴퓨터부터 가르쳤어요. 敎區 세례(洗禮)문서를 다 받아와 장애인들에게 나눠주고 타이핑 훈련을 시키고, 부기(簿記)도 가르치고, 그래픽도 배우게 하고요. 오선 씨만 해도 열 손가락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엄지로 1분에 100타 정도 칩니다』 ―장애인 스스로 일어서는 〈자활법〉은 어떻게 생각해내신 겁니까? 『신학생 시절 방학이면 의대생, 간호사 몇몇과 함께 그룹을 이뤄 장애인 봉사를 나갔어요. 그때 장애인 그룹을 이끌던 여성이 우리들에게 내린 첫 당부가 「자기들이 할 수 있는걸 절대 대신해주지 말라」는거 였지요. 이를테면 허락없이 휠체어를 만지지 않는 겁니다. 휠체어는 장애인의 옷과 같다고 하더군요. 우리 역할은 장애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대신해주는게 아니란걸 그때 배웠어요』 ― 「욕창 치료의 달인」이라고 하던데요? 『벨기에 신학교는 입학해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의 길을 계속 갈것인지 결정합니다. 철학을 마치면 다음 1년간 병원에 가지요. 모든 진료과를 돌면서 수술하는 것도 보고 아기 낳는것도 보고요. 주사 놓는건 기본이죠. 神學生들은 군대(軍隊)에 안가는 대신 간호사(看護士) 교육을 받는셈인데, 그때의 경험이 장애인들 욕창 치료할때 아주 요긴했어요. 그야말로 「주야빵꾸」 아닙니까?(웃음). 밤낮으로 욕창에 시달리니.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주야빵꾸를 내가 고친답니다』 ―중증장애인 재활에 헌신한 공으로 〈2002년 호암상〉을 수상하셨지요? 『어느날 서울에서 교수들이 내려와 우리 센터를 보고 가더군요. 며칠뒤 전화가 와요. 호암재단인데 상(賞)을 받으러 서울로 오래요. 상(賞)주고 싶은 사람이 와야지 내가 왜 서울로 올라가야 하나 싶어서 그냥 우편으로 보내시면 안되느냐 했지요. 상금이 1억원이나 되는줄도 모르고(웃음)』 『다시 태어나도 사제(司祭)의 길을 가겠느냐?』고 묻자 지정환 신부가 답했다. 『50년전 한국으로 떠나야 하는 사제라면 안할거여. 두번 다시는 못할짓이여. 하하!』 지체장애 1급인 오선 씨의 휠체어를 자동차 안으로 밀어올려주는 池신부. 오씨는 『오경추를 다친 내가 이렇게 기적처럼 살아가는 것은 모두 신부님 덕분』이라며 웃었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 쓸개 빠진 신부 지정환 신부는 기사(騎士) 작위(爵位)를 받은 벨기에 귀족 가문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池신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치즈로 만든 무지개》에는 11살 무렵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천주교 신자가 80%인 벨기에는 전세계에 나가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아주 많았어요. 휴가철이면 그들이 本國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에 대한 강론을 했는데, 그때 동경(憧憬)을 품게 됐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무조건 남을 돕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부모님이 신부 되는건 찬성했지만 선교지를 「한국」으로 택한건 극구 반대하셨다면서요? 『전쟁 직후의 한국은 아프리카보다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였거든요. 중국의 참전(參戰)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부모님은 「콩고」로 가라고 하셨는데, 거기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가있으니 한국으로 가겠다고 우겼지요』 ― 두렵지 않았습니까? 『6·25전쟁에 참전한 벨기에 군인들의 사망소식, 한국·중국 등지로 선교(宣敎)하러 들어갔다가 감옥(監獄)에 갇히거나 추방(追放)당한 신부들 얘기를 들으면서 잠시. 결혼을 앞둔 여자가 흔들리듯이요(웃음)』 ― 초반엔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당시 한국에 포장(鋪裝)된 길이라고는 서울에서 인천가는 길뿐이었죠. 여름에 비라도 오면 버스 운전기사가 「다들 내려서 버스를 밀어주십시오」 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나무와 (클래식) 음악이 없다는 것이었죠』 ― 한국말은 금세 익숙해졌습니까? 『부안 성당 시절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어요. 외모가 특이하니 승객들이 죄다 쳐다보는데 노인 한 분이 물어요. 「몇살이나 먹었는가?」 「서른살 입니다」 했더니, 「장개는 갔어?」 하십니다. 전북 장수군 「장계」라는 마을에 두어번 다녀온 기억이 있어 자신있게 「네, 두번 갔습니다」 했더니 어르신이 버럭 화를 내더군요. 「이런 호로상놈이 있나」』 ― 부안에서 농민들과 간척지를 개간하셨지요? 『1961년 부안(扶安)에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넘쳐났어요. 농사는 커녕 막대기 하나 꽂을 땅조차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죠.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면 가난을 면할것 같아 농민들과 3년에 걸쳐 100정보(町步)의 땅을 개간(開墾)했습니다. 벨기에에서 원조물자로 들어오는 밀가루 2,000포대 중 일부를 팔아 인건비로 충당하면서 개간한 결과 100명의 농민에게 1정보(3,000평)씩 나눠주게 되었으니 가슴이 벅찼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어요. 간척지의 특성상 가뭄이 들면 염분 때문에 벼가 모두 죽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걸 인내(忍耐)로 이겨내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당장의 배고픔을 참을수 없으니 땅을 저당잡혀 쌀과 술을 샀고 노름에 빠져들었죠. 결국 피땀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고리대금업자(高利貸金業者)들에게 헐값으로 내어줬고요』 ― 그 기간에 신부님도 병을 얻으셨지요? 『일이 고되기도 했지만, 한국음식에 익숙해지기 전이라 빵과 라면으로 아침 저녁을 때우다 담낭(쓸개)에 문제가 생겨 제거수술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쓸개 빠진 놈」이 되었지요(웃음)』 1961년 부안(扶安) 농사로 가난 떨치게 하려 바닷물 막아 간척지 개간 100명에 3,000평씩 줬지만 노름에 빠져 다 뺏기더라 1967년 임실(任實) 굶주린 청년들과 치즈개발 3년간 온갖 실패 맛보고 결국 프랑스 가서 비법 전수 우리 치즈 맛본 조선호텔 첫 70kg 주문 땐 눈물 왈칵 2012년 완주(完走) 중증장애인 재활센터 차려 운동시키고 컴퓨터 교육 사지마비로 들어왔다가 일어나 숟가락 들고나가 행복이란…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음식 난 대한민국의 神父 여기(한국)가 벨기에보다 좋다 수술을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6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온 지정환은 부안(扶安)에서 임실(任實)성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간척지 개간이 실패한 뒤 「한국인들의 삶에 다시는 깊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하지만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대물림하고 있는 임실(任實) 주민들을 보니 또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만 개입하자는 심정으로」 임실 청년들과 함께 〈신용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치즈 만들기〉도 이 무렵 시작했다. ―어쩌다 「치즈」를 생각해낸 겁니까? 『아는 신부님한테 선물로 받은 산양(山羊)을 두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임실의 너른 풀밭에 소의 1/10 값도 안되는 산양을 키워 그 젖을 짜서 판매하면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물론 뜻대로 되진 않더군요. 수요가 적어 기껏 짜낸 산양유(山羊乳)가 남아서 버려졌으니. 팔고남은 산양유를 처리할 방법을 고심하다 「치즈」를 떠올린 거예요. 연유, 분유(粉乳) 같은 가공식품은 엄청난 시설비용이 들지만, 치즈는 달랐죠. 유럽에서는 혼자 집에서 치즈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 치즈를 플라스틱 비누갑에 응고시켰다면서요? 『약탕기, 멸치국물 낼때 쓰는 망(網)까지 동원해 아마추어처럼 만들었죠. 모양은 치즈인데 품질이 고르지 않으니 상품 가치가 없어 치즈공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벨기에 부모님께 2,000달러를 받아 작은 치즈공장과 발효공간은 확보했는데, 이번엔 또 유산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누가 막걸리 만들때 쓰는 누룩을 넣으면 좋을것 같다고 해서 시도했다가 다시 실패하고. 시행착오만 무려 3년이었으니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급기야 치즈 기술을 배우러 프랑스로 떠납니다. 대개는 포기할만한데 꽤 집요(執拗)했습니다. 『기왕 미쳤으니 끝까지 미쳐야죠(웃음). 3개월 동안 프랑스·벨기에 치즈공장을 견학하면서 성분 배합비율, 공정 과정을 꼼꼼히 살폈지요. 카망베르 치즈(Camembert cheese), 체다 치즈(Cheddar cheese) 등 종류별로 산도(酸度)를 조절하는 법도 배우고요. 이탈리아 치즈 기술자가 건네준 노트가 결정적이었죠. 각종 치즈의 제조법들이 적혀 있었으니까. 그 노트를 품에 안고 임실로 돌아올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1969년 池신부는 임실치즈 생산에 성공한다. 벨기에 천주교 구제회를 통해 〈치즈 가공기〉까지 무상으로 제공받으면서 치즈 생산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판매망도 확보했다. 1970년대만 해도 치즈는 미군부대를 통해 불법으로 유통되는 것이 전부였다. 池신부는 「100%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합법적인 치즈」라는 점을 강조하며 남대문 등지 외국인 전용상점에 이어 특급호텔로 판매망을 넓혔다. 『조선호텔이 우리 치즈 맛을 보고 그 자리에서 70㎏을 주문했을때는 감동의 눈물이 터져나왔지요』 산양유를 우유로 바꾸고 체다치즈 생산에도 성공하면서 임실치즈는 점점 유명세를 탔다. 한국에서 생산된 최초의 치즈였고, 농민들의 땀방울로 일궈낸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업가 기질이 다분하십니다.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1831년 보험회사를 시작했어요. 벨기에의 가장 큰 보험회사로 성장했고, 나중에 벨기에의 큰은행들까지 인수했죠. 비록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무너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경영에 대한 기본소양은 조금 있었던것 같아요』 ―그렇게 애써 다져놓은 임실치즈가 최근 들어 진통을 겪고있다 들었습니다. 신부님 이름을 딴 〈지정환 임실치즈 피자〉는 특허권,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많았지요? 『임실치즈로 피자를 만들어 팔면 치즈 소비에도 도움이 되니 나한테 얼굴을 빌려달라고 해요. 처음엔 반대했지만, 치즈시장 개방으로 값싼 외국산 치즈가 밀려오는 마당에 「우리 임실치즈를 되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빌려줘야 한다」고 마음을 바꿨어요. 그래봤자 전북 지역에 10여곳 정도 생길줄 알았는데 2년새 전국에 〈지정환 피자체인〉이 100개가 넘게 생긴거예요. 이익을 둘러싸고 싸움이 뻥뻥 터지고, 그때마다 이해당사자들이 나를 찾아와 괴롭히니 화가 나요. 그래서 변호사를 불러놓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수익의 5%를 〈무지개장학재단〉에 내놓아야만 내 얼굴과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덕분에 장학재단 종자돈이 크게 늘어났습니다만』 지정환 신부(右)가 7살때 작은 형과 함께 찍은 사진. 한국에서 사느라 부모의 臨終도 지키지 못했다 ◇ 모두가 그들의 功 『신부들 모인 자리에 가면 〈3악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서 경찰들한테 진작에 찍혔지요. 공산당, 공해, 그리고 공화당이 〈3악공〉이에요. 신문에다가는 「YOU SIN REPENT NO MORE YOU SIN」이라는 개인광고를 내서 여수출입국관리소에 불려가기도 했어요. 「유신헌법 반대 광고」인걸 눈치챈 경찰이 다그치길래 「지금이 사순절(四旬節)이라 더 이상 罪를 짓지 말자고 다짐하는 내용」이라고 둘러댔습니다(웃음)』 ―교구에선 아주 골칫거리였겠습니다. 『제가 미움을 좀 받았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대통령 덕에 추방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시위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사진이 外信으로 나가고 벨기에 정부는 물론 부모님도 그 장면을 보게 됩니다. 벨기에 정부에서 한국 外務部로, 다시 靑瓦臺로 보고되자 박 대통령이 「지정환이 어떤 놈이여?」 하고 물었겠지요. 호출된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임실에서 농민들과 치즈공장 세운 사람입니다」 하니까 「당장에 추방명령 취소하라」고 지시했대요. 박통이 농촌 발전이라면 껌벅 넘어갔으니(웃음). 치즈공장이 날 살렸지요』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요즘 老子에 빠져있어요. 그중에서도 공수신퇴(功遂身退)라는 말을 좋아해요. 공(功)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라.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維新)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권이양을 제대로 했더라면 세계역사에 남을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지도자가 아니라 참 좋은 지도자가 되었을 거예요』 ―대한민국이 신부님 母國도 아닌데 정치 시위까지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요? 『경찰도 내게 똑같이 묻더군요. 「당신 외국 사람이지?」 하길래 「아니오」 했지요. 「벨기에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대한민국 천주교 신부로서 살고 있다」고 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요즘의 한국 정치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매일저녁 뉴스는 봐요. TV를 보고 있으면 「아직도 한국에 사람들이 살고있나?」 하는 의문이 들지요. 교통사고로 매일매일 죽고, 부정부패로 매일매일 잡혀들어가니(웃음). 민주주의는 참 어렵지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모릅니다. 선망의 대상이던 유럽 민주주의는 국민이 달라는대로 주었다가 수입 지출이 안맞아 요즘 「주야빵꾸」아닙니까? 외신을 보니 토론하다가 상대방 뺨도 때리고 권총까지 꺼내듭디다. 서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내 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한, 지구촌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고 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고요』 ―개신교를 두고 하는 말씀인가요? 『제일 배타적인 사람은 우리 敎皇이지요(웃음). 다음이 무슬림』 ―사랑했던 여인은 없었습니까? 『저 아랫집 담벼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어요. 「나는 하느님 보고 꽃 하나 달라고 했는데 하느님은 공원을 하나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나무 한 그루 달라고 했는데 숲 하나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江 하나 달라고 했는데 太平洋을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天使 하나 보내달라고 했는데 당신을 보내주셨다」 이것이 나의 답입니다』 ―사랑은 열정입니까, 희생입니까? 『사랑은 주고받는거예요. 사랑이 희생(犧牲)이면 위험하지요. 주기만 하다보면 화가 나거든요. 누구를 「爲하여」 일하지 마세요. 남편을 「爲하여」가 아니라 남편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부안(扶安)에서 내가 실패했던 이유는 농민들을 「爲해서」 일하려 했기 때문이에요』 ―행복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 내앞에 있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지요. 한국이 벨기에보다 좋은 이유는 내가 지금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겸한 점심식사에 지정환 신부는 막걸리를 곁들였다. 『운전은 술기운으로 해야지, 아니면 무서워서 못혀』 영락없는 시골 아저씨 넉살이다. 곁에 있던 오선 씨가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 『신부님이 당신 장례 미사에 노사연의 〈만남〉을 꼭 불러달라고 교구 신부님께 부탁하셨어요』 그 이유를 池신부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도 배움도 민주주의도 모두 「만남」에서 시작되니까요. 다시 老子 이야기를 할까요? 「공수신퇴(功遂身退)」는 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이지요. 백성한테 가거라. 가만히 앉아서 「이놈 이리와」가 아니라 백성 속에 들어가 함께 살아라. 그들에게 배워라. 거기서 功을 이루었으면 모든 功을 그들에게 돌려라. 치즈도, 무지개가족도 내 공로(功勞)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그들」의 功입니다』 / 김윤덕 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20/2012072001378.html ● 카망베르 치즈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1k0877a ● 체더 치즈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0c2704a ● 임실 치즈 마을 http://cheese.invil.org/index.html
인천뉴스 2014/12/28 15:53 치즈와 장애인을 위한 평생의 삶 [서평] 박선영 명인문화사 대표의 《지정환 신부》 임실치즈 성공의 산 증인, 장애인 삶의 용기 제공,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항거 등 55년째 한국생활을 기록한 한 외국 출신 老신부의 삶의 철학을 기록한 책이 나왔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9년 12월 피폐(疲弊)해진 한국땅을 밟은 벨기에 출신 천주교 신부가 있었다. 디디에 세르테벤스(Didier t’Serstevens) 신부이다. 임실치즈 성공의 산증인으로 한국이름 지정환(84) 신부로 잘 알려져 있다. 박선영 명인문화사 대표가 쓴 《지정환 신부-임실치즈와 무지개가족의 신화》(2014.11.28, 명인문화사)는 1950년대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 와 따뜻하고 풍요로운 사랑과 평화를 전해준 지정환 신부의 일대기를 진솔하게 기록했다. 1959년 12월 사제 신분으로 한국에 온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는 첫 부임지인 전북 부안(扶安)에서 농민들과 함께 30만평의 땅을 개간했고, 임실(任實)의 척박한 자연환경을 활용해 산양(山羊)을 키우고, 이를 통해 한국에서 최초로 치즈를 생산하며 지역주민들의 삶의 개선에 노력한 성직자이다. 당시 척박한 한국생활에서 여러번 病을 앓아 한국과 고국인 벨기에 가 치료를 받았고, 특히 다발성신경경화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장애인으로서 삶을 시작한다. 이후 장애인 공동체 〈무지개가족〉의 지도신부가 돼 장애인들에게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혼신을 쏟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해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 호암상 사회봉사상 수상자가 돼 상금 1억을 받게 됐다. 이와 더불어 임실치즈협동조합 등과 관련한 이익금을 합쳐 〈무지개 장학재단〉을 설립해,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한 환경에 처해있는 장애인이나 어려운 이웃을 대상으로 장학금(獎學金)을 수여하고 있다. 현재 84세 고령인 池신부가 20대에 사제서품을 받고 왜 굳이 「한국」을 선택했을까? 바로 「1950년대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못살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내게 만약 지금 다시 사제 서품을 받던 20대로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한국이 아니라 아프리카로 가고 싶습니다. 내가 「한국」을 처음 선택했을 때는 「아프리카」보다 「한국」이 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을 선택했지요. 그러나 지금 한국은 발전했고, 아프리카는 그때보다 훨씬 가난해졌습니다. 한국이 이처럼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敎育이었듯 이번에는 아프리카로 가서 그들의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본문 중에서- 池신부는 지난 1970년대 장기집권을 할 목적으로 유신헌법(維新憲法)을 발표한 박정희 정권에 항거하며, 「3공악(惡)을 없애야 한다」고 소리쳤다. 당시 그는 「3공악」인 「共和黨, 共産黨, 公害를 없애야 한다」며 반정부 시위에 돌입하기도 했다. 시위중 경찰에 연행됐고, 가담한 시위자 중 외국인 신부를 확인한 박정희 대통령은 『임살에서 치즈를 만들고,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농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신부』라는 報告를 듣고 『구속과 추방을 하지말고 임실로 다시 돌려보내라』는 일화가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이다. 1970년대 절대권력을 갖고 사회·정치적으로 탄압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現代化(近代化)」라는 말에 민주화 투쟁으로 잡혀온 그를 용서해준 것이다. 또한 池신부는 지난 1980년 5.18 때, 위험을 무릅쓰고 임실에서 우유를 실고 光州로 내려가 두려움에 떨고있던 시민군들에게 주고 오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럼 벨기에 디디에 세르테벤스(Didier t’Serstevens) 신부가 한국식 지정환 신부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뭘까? 「한국 사람들이 부르기 힘들었다」는데서 연유를 찾을 수 있다. 전주교구에서 부임했는데 敎人들이 아무리 이름을 가르쳐줘도 「디뎌 세수」 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를 알아차린 김이환 부주교가 「디디에」의 「D」를 한국어로 발음했을때 가장 가까운 발음 「池」를 「성(姓)」으로 하고, 이름을 지어준 당시 김이환 부주교의 끝이름 「환(煥)」을 넣어 완성한 이름이 「지정환(池正煥)」이었다는 것이다. 지정환 신부는 「임실치즈공장의 설립과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강한 집념으로 도전했다.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으로 가서 치즈기술을 배웠고, 특히 池신부가 싫어한 이탈리아 공산당 당대표 비서로 일한 젊은이가 우연히 건네준 〈치즈제조법〉이 적힌 노트를 받고, 한국행 비행기에서 마냥 설레고 기쁜 마음을 간직하게 됐다고. 『아무리 유럽에서는 공산당(共産黨) 인식이 한국과 다르다고 하여도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池정환 신부였다. 그런 그가 공산당 대표 비서가 건넨 치즈 제조와 관련한 비밀노트를 받았다. 아이러니하다 할수있겠지만, 그는 이념을 모두 떠나 임실 주민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池신부는 임실치즈 기술자에서 치즈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이 돼 동분서주했다. 당시 서울의 가장 유명한 호텔 조선호텔에 납품을 성공시켰고, 가공유 대기업들과의 공존으로 지방 임실치즈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이후 다발성신경경화증으로 한쪽 다리가 마비된 장애인으로서 장애인 지도신부가 돼 〈무지개가족〉을 이끌었다. 池신부는 『누구든지 언제든 장애인(障礙人)이 될수있다. 모든 非장애인들이 잠재적 장애인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인정함으로써 이미 장애인이 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만큼이나 장애인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아울러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 박선영은 명인문화사 대표이다. 고려대 정치학석사 졸업했고,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공저 《그녀들은 무엇이 다른가 : 세계여성지도자들》 등이 있다. / 김철관 미디어전문기자 3356605@naver.com http://www.incheo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4218 ● 지정환 신부 書評 http://www.yes24.com/Product/Goods/15293682?OzSrank=1 ● 치즈로 만든 무지개 書評 http://www.yes24.com/Product/Goods/2655527?OzSrank=2
경향신문 2019/04/14 11:40 벨기에에서 온 〈한국 치즈의 아버지〉 한국 땅에 묻히다 ··· 지정환 신부 선종 지정환 신부(中)가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오기 전 벨기에 에서 父母님과 함께 찍은 사진 (지정환 신부 제공) 지정환 신부(中)가 〈임실치즈 협동조합〉을 시작한 마을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지정환 신부 제공) 지정환 신부(左 2째)가 1960년대 조선호텔 요리사들에게 임실치즈를 선보이고 있다 (지정환 신부 제공) 2018.8.21.일 지정환 신부가 초창기 치즈를 만들고 기거하던 옛건물을 둘러보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지정환 신부가 2018년 8월 〈주간경향〉과 인터뷰하며 치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한국 사람이 전라북도 임실(任實)이라는 지명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식은 무엇일까? 아마 〈치즈〉일 것이다. 농사도 짓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치즈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고, 임실은 한국 치즈의 대명사가 됐다. 그리고 그뒤에는 벨기에 출신으로 한국땅에서 60년을 보낸 지정환 신부가 있었다. 池신부가 지난 4월 13일 오전 9시55분 숙환으로 선종(善終)했다. 향년 88세. 池신부는 193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디디에 세스테벤스. 1958년 사제(司祭) 서품(敍品)을 받고 1959년 한국에 왔다. 池신부는 2018년 8월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19살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당시 주변에서는 다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른들은 공포(恐怖)에 질려 있었지만, 제겐 한국(韓國)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지요』라고 말했다. 전북 전주(全州)와 부안(扶安)을 거쳐 임실(任實) 성당에 부임한 것은 1964년이다. 당시 임실은 농사도 짓기 힘든 산골이라 굶주림이 심했다. 몇몇 농가에서 池신부 이전 다른 신부에게 선물받은 산양(山羊)을 키우고 있었는데, 산양유(山羊乳)가 생겨도 팔 곳이 마땅치 않아 버리기 일쑤였다. 池신부는 버려지는 〈산양유〉를 보고 〈치즈〉를 떠올렸다. 유럽에서야 가정에서도 치즈를 만들어 먹으니 큰 어려움이 없을것이라 생각했다. 산양유를 굳히기만 하면 되는줄 알고 두부에 쓰는 간수를 넣기도 하고, 간장이나 누룩까지 써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池신부 부모님이 지원해준 2,000달러로 치즈 숙성공장을 만들어 3년 동안 시행착오만 거쳤다. 池신부는 유럽으로 가 직접 치즈기술을 배워오기로 결심했다. 池신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치즈공장을 3개월간 다니며 무작정 묻고 또 물었다. 대부분 핵심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이탈리아의 한 기술자가 「먼나라에서 고생하는 신부님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싶다」며 〈비법노트〉를 내놓았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대부분의 산양농가(山羊農家)는 산양(山羊)을 팔아치운 뒤였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池신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람을 모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기술자가 전해준 〈비법노트〉를 바탕으로 균일한 치즈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1969년 임실치즈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池신부는 서울로 가 호텔과 남대문 외국인 전용상점으로도 판매망을 넓혔다. 조선호텔도 임실치즈와 계약했고, 한국에서 최초로 문을 연 서울 명동 피자가게도 임실 모차렐라 치즈를 주문했다. 성공가도(成功街道)를 달리던 池신부에게 다발성신경경화증(多發性神經硬化症)이라는 불치병(不治病)이 찾아왔다. 池신부는 1981년 그동안 일궜던 치즈산업 기반을 협동조합에 넘기고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1984년 휠체어를 타고 돌아온 池신부는 재활공동체 〈무지개 가족〉을 만들었다. 池신부는 2018년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내가 장애인이 됐으니 그들의 고통과 재활에 동참할수있게 됐다』고 말했다.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한 〈무지개 가족〉은 천주교 전주교구 지원으로 완주(完州)에 자리를 잡았다. 2007년에는 각계에서 받은 상금과 기부금으로 〈무지개 장학재단〉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지정환」이란 이름은 전주교구 부주교 김이환 신부가 지어준 이름이다. 池신부는 『「지(池)」는 제 이름 「디디에」에서, 그리고 신부님의 「환(煥)」자를 따서 적당히 만든거죠. 한동안은 「정(正)」의가 「환(煥)」하게 빛날때까지 「지」랄한다고 소개했는데, 진짜로 지씨(池氏) 성(姓)을 가진 분을 만나고나니 괜히 미안해졌다』고 말했다. 池신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서울에서 〈인혁당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진 뒤에는 우유트럭을 몰고 光州로 가기도 했다. 여러 공로로 추방(追放)은 면했지만 정권의 감시(監視) 대상이었다. 2004년 사목일에서 은퇴한 池신부는 2016.2.4일 법무부로부터 「특별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국적을 받았다. 2018년 초에는 창성창본을 신청해서 「임실지씨(任實池氏)」의 시조가 됐다. 지 신부는 2018년 8월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를 위해서 한 것은 없어요. 누군가를 위(爲)한다는 것은 그들을 무시(無視)하는 거예요. 전 단지 그들과 함께한것 뿐입니다. 노자(老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그들에게 가라,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들을 배우고 사랑하라. 그들이 알고있는 것부터 시작해 그것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라」 사제(司祭)든 목사(牧師)든, 특히 지도자(指導者)라면 누구나 이를 새겨야 합니다. 공수신퇴(功遂身退, 공(功)을 이루었으면 스스로 물러나라). 내가 내세울수 있는것은 없어요. 공(功)을 이루었다면 이내 물러나야 합니다』 빈소는 전주시 덕진구 전주중앙성당에 마련됐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4월 16일 오전 10시 전주중앙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진행한다. 장지는 전주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池신부는 한국땅에 묻힌다. /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4141140001&code=960206 뉴스1 2019/04/16 12:32 4월 16일 오전 전북 전주시 전주중앙성당에서 치른 〈임실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의 장례미사 및 고별식에서 유족들이 지신부의 棺 위에 헌화를 하고 있다. 池신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 (전주=뉴스1) 문요한 기자 https://www.news1.kr/photos/details/?3601602
뉴스1 2019/04/16 12:35 4월 16일 오전 전북 전주시 전주중앙성당에서 치른 〈임실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의 장례미사 및 고별식에서 池신부의 조카 아니따가 헌화하고 있다. 池신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 (전주=뉴스1) 문요한 기자 https://www.news1.kr/photos/details/?3601600
뉴스1 2019/04/16 12:32 4월 16일 오전 전북 전주시 전주중앙성당에서 치른 〈임실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의 장례미사 및 고별식에서 조카 아니따가 고별사를 하고 있다. 池신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 (전주=뉴스1) 문요한 기자 https://www.news1.kr/photos/details/?3601605
뉴스1 2019/04/16 13:33 4월 16일 오전 전북 전주시 전주중앙성당에서 치른 〈임실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 장례미사를 마치며 사제들이 지정환 신부의 영정사진과 棺을 들고 운구차로 향하고 있다. 池신부는 생전에 희망을 뜻하는 무지개를 좋아해 완주군 소양면에 중증장애인 재활센터 〈무지개 가족〉을 설립해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지신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 (전주=뉴스1) 문요한 기자 https://www.news1.kr/photos/details/?3601728
신동아 2019년 6월호 2019/05/19 10:00 [卒記] 임실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 가난하고 소외된 한국인들의 영원한 벗 스스로 장애를 가졌지만 장애인을 위해 헌신한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임실 치즈의 대부〉 지정환 신부(1931~2019)가 4월 13일 선종(善終)했다. 정부는 벨기에 출신의 사제(司祭)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追敍)했고, 많은 한국인은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했다. 60년간 가난한 한국의 소외(疏外)받는 이웃들을 위해 모든것을 내주고 「불모의 땅」에서 기적(奇蹟)을 행한 지정환 신부.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지정환(본명·디디에 세스테반스 Didier t’Serstevens) 신부는 1931.12.5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2세기 기사(騎士) 작위(爵位)를 받은 귀족(貴族) 가문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부모님은 절약의 미덕을 강조했다. 디디에(Didier)는 형, 누나가 가지고논 다음에야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었고, 집마당의 자전거는 특별한 날에나 탈 수 있었다. 자신 만의 자전거를 타고 싶었던 디디에(Didier)는 늘 자전거를 타는 우편배달부를 꿈꿨다. 청소년기 디디에는 「가톨릭 사제」라는 새로운 꿈을 꿨다. 벨기에 인구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친가와 외가에는 세대마다 적어도 1명 이상이 사제(司祭)의 길을 걸었다. 새로운 꿈을 가지게된 그를 부모님은 『하느님의 사제가 되는 것은 영광』이라며 축복했다. 1950년 6월 브뤼셀 성베드로 고교를 졸업한 디디에는 가톨릭 전교협조회(SAM)에 입회해 예비 사제의 길을 걷는다. 그 무렵 평생을 함께한 친구 「한국」을 만난다. 브뤼셀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러갔다가 영화 상영 전 방영된 뉴스에서 〈미지의 나라〉 한국의 전쟁(戰爭) 소식을 접한 것이다. 뉴스를 본 순간 디디에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했다. 『하느님! 한국을 지켜주시고 세상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뉴스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됐지만 그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2017.5.22일 임실에 부임할 당시부터 현재까지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심민 임실군수에게 전달하는 지정환 신부 [임실군 제공] 〇 영화관에서 만난 한국 그해(1950년) 브뤼셀 루뱅가톨릭대에 입학한 디디에는 철학(哲學)을 전공했다. 2년 만에 철학 학사를 취득하고, 1년간 전교협조회신학교 연수를 거쳐 1954년 루뱅가톨릭대 알베르토 신학교에서 신학(神學)을 공부하게 된다. 신학교 시절, 디디에는 다시한번 한국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대학內 유이(唯二)한 한국인 이효상(李孝祥)과 장병화(張炳華 요셉 1912~90)를 만난것이다. 훗날 제6~7대 국회의장이 된 이효상(李孝祥 1906~89)은 그무렵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제2대 천주교 마산교구장이 된 장병화 신부는 1938년 사제 서품후 본당 사목(司牧)을 거쳐 1954년부터 알베르토 신학교에 유학하고 있었다. 첫 만남후 「두 한국인」과 교류가 잦아졌다. 두 한국인은 해외 선교를 꿈꾸던 디디에에게 「한국」을 추천했다. 디디에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고, 결국 가족에게 『한국으로 선교활동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막내의 「폭탄선언」에 부모님은 우려했다. 그들에게 한국은 지구의 동쪽끝 전쟁 위협이 도사리는 낯선 나라였다. 부모님은 벨기에령(領) 콩고를 추천했지만 디디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콩고보다 한국에서 제가 할수있는 일이 더 많을거예요. 하느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1958년 7월 사제 서품을 받은 디디에는 그해 가을,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에 입학했다. 해외 선교를 위해 필수였던 영어(英語)와 현지어인 한국어(韓國語)를 동시에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어 학습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그에게 교수는 『한국어가 쉬운 언어인줄 알았어? 중국어, 일본어보다 어려운게 한국어야』라고 했다. 디디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됐지만 포기할수는 없었다. 시간을 아껴가며 한국어를 익혔다. 1959년 11월, 1년간 연수를 마친 디디에는 한국 전주지목구(1962년 전주교구로 승격) 사제로 발령받았다. 수에즈 운하를 거쳐 말레이 반도를 경유하는 한달여 항해를 거쳐 1959.12.8일, 디디에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다시 10여 시간 비포장도로를 달려 전주교구청에 도착했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디디에가 부딪혀야했던 첫번째 벽도 언어(言語)였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그의 이름조차 낯설어했다. 이를 지켜본 전주교구 부주교(오늘날 교구장 총대리) 김이환 신부가 말했다. 『디디에 신부! 이곳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려면 한국 이름이 필요합니다』 김 부주교의 제안으로 「디디에」와 유사한 발음 「지(池)」를 성(姓)으로 삼고, 김이환 부주교 이름 마지막 글자 「환(煥)」을 차용해 발음하기 쉬운 이름을 찾다 「지정환(池正煥)」으로 결정했다. 벨기에인 디디에 세스반테스(Didier t’Serstevens)가 「지정환」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〇 한국의 가난, 보릿고개 池신부의 삶을 다룬 《지정환 신부: 임실치즈와 무지개가족의 신화》(2014)에 따르면, 池신부는 한국에 도착한 이듬해(1960년) 3월부터 전주교구 주교좌 전동성당 보좌신부로 봉직하다 1961년 7월 전북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부안(扶安)도 가난과 보릿고개에 허덕였고 주민들을 구휼(救恤)하는게 시급했다. 미국의 대외원조 밀가루를 제공받으려고 물심양면 노력한 끝에 부임 이전 매월 40포대를 지원받던 밀가루는 2,000포대까지 늘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었다. 식량 자급자족 방안이 필요했다. 池신부는 서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부안(扶安)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농지를 간척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사업은 전임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구상했지만 차일피일 미뤄진 일이었다. 갯벌을 간척해 농지로 만드는 사업은 네덜란드에서 성공한 사업이었고, 이웃 벨기에 태생인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간척사업 부지를 고민하던 그에게 부안여중이 떠올랐다. 학교 부지 내부에 바다에 묻힌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池신부는 부안여중 관계자를 설득해 「개간이 성공할 경우 소유권의 절반은 학교에 주고, 절반은 부안성당이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학교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〇 한국판 간척사업 간척(干拓) 후보지를 찾은 그는 개간(開墾)을 함께할 사람을 구했다. 「간척후 농지 1정보(약 9,917㎡)씩을 한 가족에게 분배하겠다」고 제안했다. 3,000평 넓이의 농지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이들도 외국인 신부의 열정에 감화했고, 池신부는 주임신부로서 업무시간外 모든 시간을 간척사업에 쏟아부었다. 3년간 공사 끝에 100정보(약 30만평)의 새로운 농토가 생겼다. 간척사업은 성공리에 끝나 마음은 흡족했지만 낯선 풍토와 음식에 池신부는 복통(腹痛)과 설사(泄瀉)에 시달렸다. 1963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담당 의사는 「내과적 이상은 없으나 복통, 설사가 지속되는 이유는 정신병이니 벨기에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소견서를 전주교구로 보냈다. 교구장 한공렬 주교로부터 이런 얘길 전해들은 池신부는 기가 막혔다. 귀국을 권하는 韓교구장에게 『나는 미치지 않았다. 다른 병원에서 재검사를 하겠다』며 항변했고, 결국 서울 청량리 소재 성바오로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는 「담낭(쓸개) 이상」. 자칫 「정신병자」로 몰려 母國으로 돌아갈뻔했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담낭 제거수술을 받았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쓸개 빠진 놈「이라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수술후 6개월간 벨기에에서 휴양한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자리를 옮겼다. 산세(山勢)는 빼어났지만 고지대(高地帶)에다가 경작지(耕作地)가 부족한 임실(任實)에서의 삶은 척박했다. 주민들은 고랭지 재배가 가능한 고추, 고구마를 심어 생계를 이어갔다. 이곳에서도 池신부는 지긋지긋한 한국의 가난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 무엇이든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유럽에서 경험한 「신용협동조합」이 떠올랐다. 「내 서랍 속에서 뒹굴면 그저 흔한 동전이지만, 그것이 모이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임실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제1호 조합원이 됐다. 시간이 흘러 동참하는 사람은 늘었고, 임실신용협동조합 자본금도 쌓여갔다. 한푼 두푼 모인 종자돈으로 농지(農地)를 구매하거나, 급한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자 없이 대출(貸出)을 해줬다. 처음엔 가톨릭 신자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이후는 따로 선별하지 않았다. 임실 주민들은 「저축이 남과 나를 돕는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〇 산양(山羊) 두 마리와 임실치즈 임실성당 부임후 池신부는 사제관에 산양(山羊) 두 마리를 키웠다. 삼례성당 오기순 신부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산양(山羊)을 보던 그의 머리에 아이디어가 번쩍였다. 「그래 젖소에 비해 가격이 싼 산양을 키워 젖을 팔자. 산지인 임실에서 키우기에도 적합하잖아」 그는 새로운 사업에 관심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산양사육법〉을 교육했다. 1명으로 시작한 「산양 교육생」은 이후 12명이 됐고, 자신이 기르던 산양이 새끼를 낳으면 분양을 했다. 의기투합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山羊사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사육 두수가 늘면서 산양유(乳)도 증가했지만, 판로가 마땅치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폐기처분하는 산양유가 늘어났고,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남는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문제는 치즈가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음식이었다는 점. 치즈에 대해 설명해봤지만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보니 「치즈를 만들어 팔자」는 그의 제안은 반발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고심 끝에 『치즈는 우유로 만든 두부』라고까지 설명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민들에게는 池신부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자신들에게 해(害)가 될 일을 시킬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었다. 1966년 5월, 드디어 산양을 키우던 조합원들과 치즈 만들기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대실패. 이후 실패가 거듭되자 벨기에 본가에 「2,000달러만 보내달라」는 「SOS」를 쳤다. 그는 이 참에 치즈공장을 세우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공장은 완공됐지만, 「제조기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치즈 관련서적을 100번 넘게 읽으며 공부했지만 제대로된 치즈를 만들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치즈의 본고장 유럽으로 날아갔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크고 작은 치즈 제조공장을 찾아 노하우를 기록하고 익혔지만 제조법 전체를 배울수는 없었다. 「영업기밀」을 이유로 생산공정을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소개받은 한 남자는 池신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노트 1권을 건넸다. 치즈제조법이 상세하게 담겨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간부였다.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司祭)가 유물론/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지정환 신부 장례미사가 열린 4월 16일 전주시 전주중앙성당에 池신부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다. 池신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됐다 [뉴스1] 〇 이탈리아 공산당원이 넘겨준 제조법 부푼 꿈을 안고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을때 池신부는 쓰러질 뻔했다. 그의 난감함과 고단함은 생전 인터뷰에 잘 나타난다. 『한국에 와보니 1명 빼고는 다들 산양을 팔아치우고는 떠났더라고요. 그들 입장에선 앞날을 기약할수 없었겠죠. 제가 돌아올지도, 치즈 만들기에 성공할지도 불투명했으니까요. 얼마나 절망적(絶望的)이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포기(抛棄)할수 없었어요. 이탈리아에서 받은 기적(奇蹟) 같은 선물이 있었으니까요. 그 비법(秘法) 덕분에 균일한 치즈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다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어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 넘겨준 제조법에 따라 공정 하나하나 최선을 다했다. 매순간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드디어 맛과 모양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 〈한국산 1호 치즈〉가 탄생한 것이다. 치즈 제조에 성공하자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프랑스식 포르살류 치즈로 시작해 영국이 원산인 체더치즈도 제조했다. 사업 확장을 위해서는 브랜드가 필요했고, 조합원들 의견을 반영해 〈지정환 치즈〉로 이름 지었다. 「치즈 세일즈맨」으로 변신한 그는 조선호텔 등 유명 호텔과 남대문의 외국인 전용상점으로 판매처를 넓혔다. 1967년 설립된 임실치즈협동조합은 1970년대 국내 치즈 생산량의 70%를 담당할 정도로 성장했다. 1998년에는 〈임실치즈피자〉도 탄생했다. 오늘날 임실치즈가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개,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 개에 달한다. 박철민 지정환임실치즈피자 대표는 〈신동아〉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신부님은 늘 입버릇처럼 「부안 간척시절 함께했던 이들은 첫째요, 임실치즈협동조합 구성원들은 둘째요, 무지개가족은 셋째요, 임실치즈피자를 함께하는 이들은 막내」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우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에 무척 비통합니다』 池신부가 사업에만 신경쓴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池신부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에도 동참해 추방명령(追放命令)을 받기도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93) 주교 석방운동을 벌이다 체포되는 사진이 외신을 타고 나간적이 있어요. 벨기에에 계신 부모님도 그 사진을 보셨죠. 벨기에 정부가 한국 외무부로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의견을 보내 청와대도 골치 아프게 된적이 있죠』 당시 池신부는 〈추방명령〉을 받았지만 「池신부는 임실에서 농민들과 협동조합을 만들고, 치즈를 만들어 팔며, 농촌 발전에 기여했다」는 報告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구속도 추방도 하지말고 임실로 돌려보내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치즈를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池신부는 1976년 신체마비 증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다발성신경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뇌(腦)와 척수(脊髓)에 염증(厭症)이 침범하는 병이었다. 날로 악화되는 병 치료를 위해 1981년 그는 벨기에行 비행기에 올랐다. 3년간의 치료후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주교구는 장애인 사목을 권했고, 전북 익산성모병원에서 장애인 사목을 시작한 그는 1984년 7월 중증장애인 재활쉼터 〈무지개가족〉을 만들었다. 전북 전주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한 〈무지개가족〉은 전주교구와 벨기에 전교협조회 도움으로 1989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13,223㎡(약 4,000평) 규모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3년후에는 〈제2무지개가족의 집〉도 완공됐다. 100명 넘는 장애인이 이곳을 거쳐 재활하고 자립했다. 배기현 마산교구장은 池신부가 〈무지개가족〉 규모를 키우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신동아〉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池신부님은 「〈무지개가족〉 규모가 크지 않아야 진정 피를 나눈듯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크면 그리 할수없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〇 『내 功勞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2002년 5월 호암재단은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그를 기려 제12회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수여했다. 池신부는 이때 받은 「상금 1억원」에 「지정환 임실피자 수익배당금」을 더한 「5억원」으로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전북도민 중에서 「장애인」이거나 「장애가족」을 둔 학생에게 대학 4년간 학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온지 45년 세월이 흐른 2004년 그는 사제직에서 내려왔다. 이후 池신부는 소양면 해월리에 〈별아래〉라는 이름의 저택에서 〈무지개가족〉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기거하며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 18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한국에서 활동했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의 행적(行蹟)을 정리해 전산화하는 것이었다. 한국을 위해 반세기를 헌신한 그에게 2016년 2월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國籍)」을 선물했다. 2012년 국적법 개정으로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 대해 특별귀화를 허가했는데, 4년후 법무부가 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한것. 창성창본(創姓創本)도 허락받아 池신부는 「임실 지씨(池氏)의 시조(始祖)」가 됐고, 그해 11월 임실군으로부터 명예군민증을 수여받았다. 말년의 池신부는 한국에서의 공로(功勞)를 치하(致賀)하는 사람들에게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더 못해서 아쉽습니다』하고는 미소 지었다. 60년간 가난한 한국을 위해,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해 모든것을 내준 池신부는 불모(不毛)의 땅에 기적(奇蹟)을 행하고는 홀연히 눈을 감았다. 《지정환 신부: 임실치즈와 무지개가족의 신화》 저자 박선영 명인문화사 대표는 『池신부님은 누군가 삶에 빛이 되는 사람이었다. 평생 희생하는 삶을 사셨지만, 그걸 당신께서 해야할 일이라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포용(包容)」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주변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그를 기억했다.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731697/1 ● 장병화(張炳華 요셉 1912~90) 2대 마산교구장 https://namu.wiki/w/%EC%9E%A5%EB%B3%91%ED%99%94 ● 지학순(1921~93) 원주교구장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6926.html ● 배기현(1953~ ) 마산교구장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687167/1
뉴스원 2019/09/26 15:55 임실치즈와 지정환 신부 … 대학 교양과목으로 강의 우석대 2학기부터 첫 강의 … 지역학 일환 황태규 교수 진행 9월26일 오후 우석대 정공관에서 〈임실치즈의 시작과 미래〉에 대한 임실치즈조합 김동수 상무 특강에 앞서 황태규 호텔항공관광학과 교수가 특강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올해 4월 선종(善終)한 지정환 신부의 도전과 임실치즈 역사가 대학의 지역학 교양과목으로 개설돼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석대학교는 9월 26일 오후 이 학교 정공관에서 임실치즈협동조합 김동수 상무를 초청해 〈임실치즈의 시작과 미래〉라는 주제의 특강을 진행했다. 이날 김 상무의 특강은 올해 2학기에 지역학 분야 교양과목으로 처음 개설된 〈지역산업과 청년 창업정신(副題: 임실치즈의 성공과 지정환 신부의 정신)〉이라는 과목의 한 부분으로 진행된 것이다. 앞서 임실치즈조합과 우석대학교의 협력에 의해 개설된 이 과목에서는 池신부의 정신과 임실치즈의 역사, 임실 지역민들의 탐구‧도전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됐다. 조합측은 강의를 맡아줄 대학을 물색하다 池신부가 생전에 유일하게 한 學期 동안 강의했던 우석대학교와 접촉해 강의 개설이 이뤄지게 됐다. 당시 池신부는 우석대학교에서 〈지역의 음식문화와 특화산업론〉를 강의했었다. 이번 강의에는 임실치즈협동조합 50주년 기념책자인 《대한민국 치즈의 역사, 지정환 신부의 치즈이야기》가 교재(敎材)로 사용된다. 이와 함께 《지정환 신부와 임실치즈 이야기》의 저자 박수진 우석대 객원교수가 특강을 통해 임실치즈의 시작과 좌절,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임실치즈의 역사를 강의하고, 《끝까지 살아남기(기업의 성공비결과 생존 방정식)》의 저자 최길현 단국대 겸임교수도 특강(特講)에 나서기로 했다. 강의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특강, 이론강의 외에 임실치즈 생산현장과 역사문화현장을 탐방하고 학기말 〈임실치즈의 사업화방안〉 아이디어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번 과목 강의책임을 맡은 황태규 호텔항공관광학과 교수는 『지역의 학생들이 직접 지역산업과 역사를 배우고 기업과 함께 발전방안을 고민하는 것은 「지역의 내발적 발전」을 시작하는 지역학 교육분야의 새로운 모델이 될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池신부님께서 가르친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가진것으로 하고, 그들이 한 것으로 하라. 그리고 떠나라」는 정신은 지금 우리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탐구정신과 도전정신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 (전북=뉴스1) 김대홍 기자 95minkyo@news1.kr https://www.news1.kr/articles/?3729596 ● 대한민국 치즈의 역사, 지정환 신부의 치즈이야기 (임실치즈조합) ● 지정환 신부와 임실치즈 이야기 저자 박수진 우석대 객원교수 ● 끝까지 살아남기(기업의 성공비결과 생존 방정식) 저자 최길현 단국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