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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초과노동 수당 감소에 대한 잠깐동안의 걱정, 그리고 마주 대한 내 안의 비굴함
권종상 추천 3 조회 20 14.01.30 13:5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나이가 들은건가, 마음이 여려진건가. 길 가다가 문득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을 들을 때,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될 때, 내가 그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고, 마음이 아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 원래 성정이 조금 그런 편이긴 합니다.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하고, 함께 눈물흘리고,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기자 생활 할 때도, 사실 정말 힘든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했었고, 그럴 때 제가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 때문에 취재할 때 애먹은 적도 꽤 됐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특별히 더 우울하다거나 한 건 아닙니다. 물론 시애틀의 날씨는 우울을 부를 수 있습니다. 지금 거리를 추적추적 적시는 이 비는 우울함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올리브 웨이의 스타벅스 커피점엔 그런 기분을 떨쳐내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저처럼 뭔가 화면을 들여다보며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람들도 가득 차 있습니다. 어제보다도 훨씬 사람들이 많다고 느껴지는 건, 당연히 이 비 때문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울하진 않습니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이제 더 화창한 봄날이 올 거란 걸 예고하는 비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저는 저를 사랑해주고 제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가 내리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우울한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저는 우울할 일이 없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적어도 저는 길을 행복하게 걷습니다. 일한 만큼 충분한 수입을 보장받는 '정규직'을 가진 가장이라는 내 자신의 위치는 내게 충분한 보람과 자신감을 부여합니다. 게다가 사람들과 만나 좋은 관계를 맺고, 내가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뭔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기다리는 무엇인가를 가져다 주는 것 - 물론 그들이 원하지 않을 고지서들도 잔뜩 가져다 주지만서도 - 은 우체부라는 제 직업이 가져다줄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끔씩 뭐가 맺힌 것처럼 왈칵 올라오는 것은 조국의 현실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대의 반동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 사람사는 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봉건성이 극복되고 상식과 민주주의가 확립되는 세상이 올 거라고 믿었던 것에 대해 기대가 무너진 것에 대한 어떤 실망감,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파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뤄진 감정이입들... 

 

그러나, 오늘 저는 잠깐이나마, 제 자신에 대해 실망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결국 거기서 깨달은 무엇 때문에 눈물 흘릴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 나왔더니 노조 대표가 '배달구역 특별 감사 요청서'를 만들어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우체국만 해도 원래 스무 개의 배달구역이 열 여섯 개로 줄었고 남은 사람들의 일이 상식 밖으로 늘어났으니 그럴만도 한 일이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지만, 솔직히 안에서 조금 갈등이 생겼고, 그것은 제게 죄책감 같은 것도 생기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돈 때문에 생긴 갈등이었습니다. 제 배달구역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난 이후, 당연한 결과긴 하지만 늘어난 일의 양만큼 수입이 늘어난 것입니다. 처음엔 빨리 새 배달구역 주민들의 이름을 외우겠다고 억척스레 일을 했지만, 이 길디 긴 라우트도 지난 11월부터 두 달 반 이상을 배달하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의 이름에도 익숙해지고, 여기서도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배달 효율이 올라가자 매니저들은 제 구역의 우편물을 보조 우체부에게 잘라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좋아했고, 오버타임을 제게 더 주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편물의 양이 너무 터무니없이 많지 않은 이상, 저는 하루에 열 시간에서 열 한 시간의 격무를 그냥 맡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버타임, 즉 초과 근무 수당을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은 고되지만, 몸도 이 격무에 익숙해졌고, 두 주마다 챙기는 페이첵의 양은 아내에게 웃음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아내에게 생일선물로 태블릿을 사 주었고, 큰아들놈에게 노트북 컴퓨터를 사 줬고, 쉬는 날이면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서 제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조금 빠듯하게 느껴졌던 삶에 여유가 느껴졌고, 새 세탁기를 사는 것을 고민할 수 있게 됐고, 우리 가족이 다 함께 가진 못하더라도, 아이들에게 한국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 감사가 통과되어 배달구역이 '합리적으로' 재조정될 경우, 제 수입은 오버타임 수당이 사라지는 만큼 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걱정이 들었던 것입니다. 제 삶이, 수입이 늘어난 만큼의 속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제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새 배달구역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매니지먼트 쪽에선 제가 시간이 얼마가 걸린다고 하든간에 내버려 두고 오히려 고맙다며 저를 격려해 줄 정도로 매니지먼트 쪽으로부터 신뢰까지 듬뿍 받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에.

 

솔직히 두어 시간, 아침 우편물 분류 작업을 하면서 고민하다가 쉬는 시간, 감사 요청서에 서명하고 제 이름과 배달구역 번호를 적어 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원래 원하는 세상이 이런 거 아니었던가 하고. 제가 요청서를 적어 내서 특별감사 내용이 통과되면 제 라우트의 크기는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전 배달구역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면 서너 개의 사라진 배달구역이 복구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해야 하는 '정규직 우체부'들이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계획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들 중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사람들도 그만큼 늘어나게 됩니다. 즉, 제가 스스로 일거리를 줄이는, 즉 '벌어들이는 임금'을 조금 포기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내게 욕심이 생기면서 잠깐이나마 내가 세웠던 삶에 대한 원칙이 흔들린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저는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여기서도 있는 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삶의 조건이란 것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전 한국에서도 화두가 됐던 '통상임금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제 자신의 삶에 숨어 있던 비굴함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통상임금의 비중이 큰 편이어서 삶에 아주 어려운 상황을 겪지 않는 제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이런 상황이 아닌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길에 나서야 합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하던 일을 열심히 할 겁니다.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이젠 그런가보다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제 삶을 보장해줄 만큼의 임금을 보장해주는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확실히 자신감의 원천이긴 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제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물론 '현재'라는 시간은 언제나 내 황금기여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 그리고 내가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런 환경이 가능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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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1.30 15:26

    첫댓글 항상 좋은 글 고맙습니다.올해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작성자 14.01.30 18:30

    읽어주시는 분들도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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