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25기였던 김오랑 중령은 79년 정병준 특정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동기생 중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김 중령은 일치감치 비서실장직에 오르면서 장래가 촉망됐던 군인이었다. 그는 신군부에 의해 12.12 사태에 가담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끝까지 뿌리치며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살신상관 보호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고 있다. 79년 12월 13일 새벽 0시 15분께. 중무장을 한 군인 10여명이 성남에 위치한 특전사령관실로 쳐들어 왔다. 맨 앞에서 인솔하는 사람은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의 지시를 받은 3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 김 소령 육사 선배였던 박 중령은 김 소령과는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절친했던 사이였다. 박 중령은 사령관실로 통하는 비서실에 도착한 후 부하들에게 "갈겨"라며 명령을 한 후 출입문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자 출입문이 열렸다. 김 소령은 권총으로 응사를 하면서 사령관실 안쪽에 있는 내실 쪽으로 밀려났다. 그곳에서 소지하고 있던 실탄을 모두 쏘며 저항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집중 총격을 받은 김 소령은 배, 허벅지, 등에 M16 실탄 6발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정 소장은 왼쪽 팔에 총상을 당했다. 김 소령은 반란군으로부터 직속상관이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 끝까지 항전하다 수적으로 우세한 반란군에 사살당한 것이다. 신군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김 소령은 부대 뒷산에 묻혔다가 80년 2월 육사 25기 동기들의 항의와 노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김 중령의 장조카 김영진씨는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삼촌의 죽음 이후 온 집안이 풍비박산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81년에는 비명에 간 막내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김 중령의어머니가 눈도 감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고 82년에는 조카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한 삼촌마저세상을 떠났다. 91년에는 충격 때문에 실명한 김 중령의 부인도 자신의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졌다(타살의혹) 김영진씨는 숨진 삼촌이 90년에 중령으로 추서됐지만 최소한의 명예회복일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