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글라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문경 저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떠났습니다.
뻐꾸기와 고라니가 어쩌다 번갈아 울 뿐, 적막하기가 절간인 독거노인의 집에 14명의 장정들이 북적대다가 일시에 빠져나가니 평소보다 집이 더 조용합니다. 터널 안보다 터널 직후가 더 잘 안 보이듯.
‘아사히글라스’는 TV와 휴대폰, 컴퓨터 모니터와 건축용 판유리 등을 만드는 회사라는데 휴가 중인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문자로 일방 해고하여 조합원들이 5년째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노조를 결성했을 때에 백칠십 명을 넘었던 조합원들이 이제 23명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첫날, 저녁 식사 후 뒤풀이를 하면서 들었습니다. ‘못난 놈들이 선산을 지키’고 있는 실제상황입니다.
목살과 삼겹살, 선산곱창을 안주로 술잔이 몇 차례 돌면서 슬슬 취흥이 오른 조합원들이 드디어 적막강산의 칠흑 어둠 속으로 연달아 떼창을 쏘아 대자 혹여 이웃들 수면 방해를 하는 것은 아닐까 내심 쫄았던 집주인은, 그럼에도 차마 젊은 친구들의 모처럼 스트레스 분출을 어쩌지 못했던 집주인은, 절정을 치달았던 술판이 조금씩 정리되고 수습 단계에 이르자 휴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조합원들끼리의 편한 밤을 위해 산 너머 배 목수네서 자야겠다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이튿날 아침.
자체 준비해 온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 식사를 하겠다는 아사히 친구들을 굳이 이십여 리 떨어진 작목반 식당으로 오게 하여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먹임은, 그 국밥보다 곱절은 더 따뜻한 작목반 누이들의 마음입니다. 국밥에 ‘두술도가’ ‘희양산막걸리’를 두어 잔씩 곁들인 아사히 친구들이 감사 인사를 곡진히 하고 떠나자 집주인도 산 너머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아, 집이 참 깔끔합니다. 깨끗이 설거지를 하여 샤방샤방 빛나는 씽크대의 그릇들도 그렇고 전날 밤 분리배출 했던 재활용품들도 몽땅 되가져가 집안이 휑하고 환합니다. 만만치 않은, 오랜 농성장 투쟁의 내공일 겝니다.
최선을 다해 뒷정리를 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바닥청소를 안 할 수는 없어 청소포를 대걸레 자루에 끼우고 한 손으로 건성, 거실 바닥을 걸레질하는데 하늘이 살짝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에고,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툭. 툭. 투툭. 툭. 툭. 툭... 갈색 폴리카보네이트의 데크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원합니다. 골짜기 저만치에서 피어 오르던 은빛 운무(雲霧)는 순식간에 18평 누옥(陋屋)을 에워쌉니다. 건곤일색(乾坤一色)! 아, 이 몽환(夢幻)적 풍광에 술! 술을 아니 마실 수 없습니다.
재빨리 데크 바닥에 왕골 돗자리로 멍석을 폅니다. 술상은 서울 집에서 가져온 혼술용 소반, 안주는 그저께 끓였던 간편식 알탕 찌개와 열무김치입니다.
처-ㄹ. 철. 철... 장대비는 계속 내리고 비구름은 앞산의 옥녀봉을 숨겼다 내놨다 합니다. 그 옥녀봉이 보이면 상봉주(相逢酒)로 한 잔! 안 보이면 이별주(離別酒)로 한 잔! 가지가지 구실로 참이슬을 축내는데... 그러다가 문득 눈에 띈, 데크 난간의 벤치는 올봄, 데크 공사를 할 때에, 골바람 엄청 드센 곳이니 벤치를 난간에 고정시켜 놓으면 난간이 훨씬 튼튼할 거라며 최 목수가 뚝딱, 만들었던 벤치입니다.
술기운 탓입니다.
우연히 본 그 벤치에 불현듯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동공은 진즉 풀렸을 텐데 생각은 나사못처럼 한 꼭지만을 맴돌며 팝니다.
‘그래, 나도 벤치가 되어야지. 이제는 현역이 아니니 지금부턴 현장 노동자들의 벤치가 되어야지. 저 벤치처럼, 나도 후배 노동자들을 붙잡아 주어야지. 그들이 쓰러지지 않게 힘을 보태 주어야지. 지친 몸 언제든 쉬게 이 집을 open 해야지.’
이번에 마시는 술은... ㅎㅎ, ‘다짐酒’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취기에 예수님 코스프레까지 합니다. 빨간 뚜껑 참이슬의 신성 모독입니다.
처-ㄹ. 철. 철... 비는 여전한데 벼락은... 아직, 입니다.
전전끙끙.
지금도 즐거운, 한여름 ‘낮’의 꿈.
첫댓글 벤치가 되겠다는 형의 마음이 보이네요.
낮술 하면서 이런 마음을 먹는것은 비때문일까요? 글도 차분하게 다가오는 것이 형의 겉과 속은 늘 다르지 않다는 형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미노리에서 보는 비, 산을 둘러싼 비구름, 그리고 보살의 마음. 이것이 바로 소~~오~주~ 의 마음
제가 치실에 입성하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쌤님이 선수치시네요,흑..
그 날 한여름 밤의 꿈속같았던 그 밤.. 덕분에 멋진 분들 많이 만나 모처럼 흥에겨웠습니다. 막판 강림하시여 '느티당'을 초토화 시킨 주역들도 기억에 남는군요. 만인의 벤치로 등극하신 것 감축하오며 응원 또 응원입니다.
최선배가 선사하신 벤치가 소담하고 정겹습니다.
돋자리 깔린 그자리, 저도 턱하니 자리 잡았던 그자리, 비소리에 젖은 참이슬에 반은 또 외롬 찬 그리움일터..
근데 누옥이라니... 과공비례라 하지 않을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