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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金)나라와 청(淸)나라의 조상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은 누르하치이다. 그런데, 만주족(여진족)을 이끌고 후금(後金)을 세운 여진족의 수장 누르하치는 그 성(姓)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누르하치가 자신의 본래 성을 버리고 애신각라를 새로운 성으로 삼으면서 모든 여진족에게 공표하기를,
"우리는 신라의 아들들이니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생각하여
우리 뿌리를 잊지 않아야 하니
성을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하노라"
하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姓)도 당연히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몇 년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마지막 황제 "부의"가 모택동시절 재판받는 광경이 나오는데, 재판에 앞서 판사가 피고인 "부의"의 성을 묻자,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판사가 "거 참 별 희한한 성도 다 있군" 하고 중얼거린다.“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姓)에는 무슨 뜻이 숨어있는가? 애각(愛覺) 신라(新羅)라는 것은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신라(新羅)? 삼국시대의 그 신라? 그렇다. 그 신라다. 다름 아닌 그 신라다. 청나라와 신라가 무슨 관계냐고? 다름 아니라 청나라의 왕족과 신라의 왕족은 그 뿌리가 같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당시 자신들의 뿌리요 어버이의 나라인 조선이 왜의 침략을 받음을 보고 군대를 보내어 돕겠다고 자청해 왔으나 명의 눈치를 본 조정이 이를 거절했고, 누르하치가 자기들을 한 핏줄의 형제로 여겨줄 것을 여러번 간청했는데도 이를 뿌리치는 우를 범하였다. 그나마 광해군 때는 명과 후금과의 사이를 잘 조정하여 현명하게 대처했으나, 인조반정 이후에 친명배금으로 외교정책을 바꾸고 명의 장수 모문룡이 평북 앞바다의 작은 섬에 주둔하는 것을 용인하면서 마침내 누르하치가 군대를 보내게 되어 정유호란이 일어났다. 전쟁은 "형제의 맹"을 가지므로서 끝났다. 그러나 후금이 명과 전쟁을 하는 동안 이 형제지맹을 지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명의 편을 들므로 훗날 병자호란을 불러오고 형제가 아닌 군신지례를 지키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왕과 전 조정 대신을 남한산성에서 포위하고 명목뿐인 군신관계가 아니라 청의 영토로 아예 복속시킬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강화를 맺고 청군이 즉각 돌아간 것은 이 땅을 정복대상으로 생각지 않은 누르하찌의 모국애(母國愛) 때문이었다.
금은 곧 김(金)
우리가 오랑캐 청나라라고 알고있는 만주족이 세운 첫 나라는 청나라가 아니다. 대진국(발해)이 망한 후 북방 종족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그중 거란(글안)족이 세운 나라가 "요(僚)"이고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금(金)"이다. 나중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가 되는 시점에서 이때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할 정도로 “金”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데, "金"이라고 써놓으면 이 성씨를 가진 사람이 워낙 많아서 두 셋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언가? 신라가 워낙 오래전에, 그리고 오랜동안 나라를 유지했기에 왕족의 숫자가 이리 많아져 이제 와서는 나라 성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정도가 되었다. "김"은 곧 "금"이다. 금을 잘 다루고 세공을 잘하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김"이라 했다.
신라는 대륙에서 온 기마족
그런데 만주족의 나라이름이 金이라니! 김씨더러 너는 만주족 출신이다, 라고 하면 아마 열받는 정도가 아니고 이빨을 악물고 명예회복을 하러 덤벼들 사람이 한 둘이 아니리라. 신라계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가 대표하는 부족으로, 혁거세와 석탈해 다음으로 왕족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왕은 세습이 아니라 여러 종족 중 한 종족이 번갈아가며 맡아 하였는데 종국적으로 김씨종족이 왕족을 맡아 나라를 이끌어 나간 것은 우리가 익히 일고 있다. 김알지는 어디서 왔는가? 만주에서 왔지.(물론 종족 연원이라는 의미이며 지역적 의미는 아니다) 신라족을 구성하는 주요한 종족인 김씨족은 우리가 알다시피 신라의 중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을 지킨 왕조이다. 사실상 신라왕족을 칭하는 김씨족의 근원은 어디일까? 김씨들 스스로도 잘 알지못하는 이 부분은 그저 경주김씨라는 관향명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 경주, 서라벌, 금성, 동경으로 칭하는 신라의 도읍이 현재의 경상도 경주라고 명시해놓은 책자나 문헌은 없다! -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일요스페셜에서 증거 보여줘...
동방과 서방을 마구 넘나드는 기마종족(스키타이족)의 이야기를 꾸밀 때면 빠질 수 없는 것들이다.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의 스키타이 유물과 한반도 신라의 그것은 너무 닮아서 러시아 학자들조차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KBS 일요스페셜.97.3)특히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金冠)은 스키타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줄줄이 달린 곡옥은 지금도 흑해남부와 터키지방에서 발굴되는 스키타이 종족의 그것과 너무 똑같다! -당연히 같을 수밖에 모두 우리조상들이니... -편자註.. 고구려와도 다르고 백제와도 다른 이 금관의 주인공들의 강역은 카스피해 근처다. 이런 추정이 틀리더라도 최소한 동일한 문화를 뿌리고 가지고 그곳과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같은 유물과 같은 문화양식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그들이 같은 연원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완강히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에서 “추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실증이란 문헌에 의지하는 것이고, 결국 문헌을 남기지 못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동방스키타이족은 “역사도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주요 근거로 남용된다. 그것도 주로 식민사학자나 그 후계자들(주로 관변사학자)이 잘 쓰고 우리도 그 바탕에서 교육을 받았길래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살짝 눈을 돌리면 그 유명한 토인비의 가설은 “추정”을 위한 논리틀이다. 더군다나 문헌대신 그 광대한 영역에 흩뿌려놓은 흔적만 보아도 기마종족의 역사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마종족을 “페라스키야”라고 불렀다. 말을 탄 야만족이라는 이 뜻은 알고보면 “페라”와 “스키야”의 합성어인데, 페라는 “페르”,“펴라” 등과 같은 어원으로 고대 동,서,중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던 “불(fire)” “벌(field)”의 뜻이다. 어떤가?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가? 평양도 이 어원에서 왔고 부여도 이 어원에서 왔다. 더욱더 신기하게는 페르-샤(터키지방의 고대제국)도 똑같은 의미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다. 불을 신앙하는 불종족인 셈이다. 강역이 여기까지 가는데, 당신은 만주족이 그저 만주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서 왔을 것이라 믿는가? 만주족의 또다른 호칭인 “여진(女眞)족”만해도 그렇다. 그 말은 이두문자다. 즉, 한자의 음을 빌려 호칭을 적어놓은 것이다. 이 여진이라는 말이 숙신(肅愼), 조선(朝鮮), 주신(珠申)과 똑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 그 말은 “밝은 온누리”를 뜻하는 말로써 마찬가지로 박달(밝은 들), 배달과 같은 뜻이라는 말을 그대는 아시는가?단지 우리 민족(현재의 대한민국경제권을 형성하는)만이 아니고 고대 기마종족 전체가 밝은 들판을 지향해 뻗어나가는 이념(준 이념이라고 해두자)을 공유했다는 추정을 그들의 흔적에서 찾아내는 것이 그대는 도라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말텐가? 못난 것은 우리들이지 그 넓은 광역을 누비던 우리 조상들이 아니다.
경주 김씨들은 경주에 정착하기 전만해도 카스피해와 태평양 사이를 오가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황금족이라 칭하였으며 자칭 황금족들은 반도경주에서만 정착한 것이 아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과 만주 곳곳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밝다는 뜻을 가진 金이라는 뿌리말을 지켰고 한 가지가 신라(새라불, New Land/Field)를 세웠고, 통일의 전통을 이어받고자한 후금(황금족의 후예)의 누루하치는 중원을 제패했다. 물론 이 때는 이미 우스꽝스러운(북방 기마종족들의 입장에서 보면)“단일민족”으로 전락한 조선은 그들을 오랑캐라며 중국편을 들었지만, 누루하치의 신라사랑은 변함이 없었다고나 할까? 사실 중국역사의 속을 들여다보면 “상상”을 넘어선 “공상”이 난무하고 이런 이야기들을 학계의 거두들이 마치 대단한 이론인 것처럼 내세우면 그게 곧 사실의 역사로 추인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이런 상상력을 내세우면 어떻게 될까? 당장 얼마전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온 사람들처럼 “도라이”취급을 받을 뿐이다. 물론 이 사람들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도 못하나?아니 아메리카에 들어온 것치고 원래 아메리카적인 것이 있었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거기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유입된 사람들의 인종통합 실험장이었다. 따라서 중국종족의 것만 있었다고 한다면 웃기는 이야기다. 하다못해 그들 종족은 수시로 다른 민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고대는 물론이고 근세의 청나라도 그렇고 1000년만 넘어가면 몽고족의 원나라가 그렇다. (5호16국시대에서 5胡가 누구인가? 동북방 오랑캐-제 조상을 오랑캐라고 부르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이다.- 아니던가?) 고대 소아시아와 우랄산맥, 중앙아시아를 마구 휘둘러 다니던 여러 제국의 역사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코난, 바바리언”이라는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고대 세계사의 수수께끼인 “스키타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분명 오늘 김씨 성을 가진(김알지계열을 말함. 김수로 계열은 다음에 이야기하겠음)사람들의 뿌리라고 믿는다. 바바리언, 스키타이, 야만족이라고? 아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고 아마 스키타이들은 말도 탈 줄 모르는채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을 “패쇄적이고 우둔하고 느린 곰탱이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사라져버린 X파일을 찾는 것은 그들을 선조로 인정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오늘의 비참한 신세 때문에 과거를 상상할 힘을 잃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도 버리는 짓이다. 제깟 춘추사관과 식민사관을 순간에 깔아뭉갤 무궁무진한 흔적들은 아시아 전역에 살아있다.(최소한 몽고가 지배했던 영역은 스키타이들의 것이다) 때가 되면 죄다 살아나 춤을 출 것인즉, 그 때를 기대해보자!
환단고기에 기록이 있다
안함로의 삼성기전 상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乙未(을미) 漢昭時(한소시)에 進據夫餘故都(진거부여고도)하여 稱國東明(칭국동명)하시니 是乃新羅故壤也(시내신라고양야)라. 을미(BC 86년)년, 한나라 소제때에 고두막한은 부여의 옛서울을 점령하여 나라를 동명이라 칭하니, 이곳은 신라의 옛 땅이다. 고대사 엑스파일을 편집한 내용
- 청나라 황실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인 이유는 뭘까요?
청나라 황실의 성이 애신각라인 이유는 ...
애신( 愛新)-신라를 사랑한다.
각라( 覺羅)-신라를 기억한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가 신라 경순왕의 후예라고 합니다.
후김(대청제국) 시조 애신각라 누루하치
[愛新覺羅-大淸帝國]
북부 한국, 만주대륙 이곳은 태초부터 한민족의 영원한 보금자리였으며, 한웅천황 이래로 단군쥬신, 가우리, 대가우리, 대김제국을 거치며 민족 사이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민족의 본 고향땅이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며 발생된 행정 공백의 틈을 뚫고 한족(漢族)의 신흥 세력인 명나라와 옛 땅을 다물하려는 왕씨 가우리[高麗]의 다툼에서 민족 숙원의 절대명령을 거부하고 제 한 몸의 영예에만 집착했던 이성계의 반역으로 그만 민족의 귀중한 성역을 명나라에 빼앗겨 버리고만 통한이 서린 우리 땅이다.
비록 명나라가 만주를 빼앗았다고 하나 그들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겨우 요녕성 정도에 불과했고, 그 동쪽의 광활한 대지에는 여전히 옛 여진족(女族)이 각 부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본서가 일찍이 밝힌 것처럼 여진족은 쥬신[朝鮮]족으로 우리와 같은 족의 일파이다. 만족 대사전(滿族大辭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여진(女)은 만족의 선세(滿族的先世)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쥬신[朱先, 朱里, 諸申, 혹은 珠申]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민족[朝鮮=珠申] 쥬신족임은 명백한 진실이다.
개천(開天) 5457년: 서기 1559년, 만주의 대영웅 누루하치[努哈赤]가 멍거테무얼[猛哥帖木]의 5세손, 탑극세(塔克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애신(愛新)은 실라[新羅]를 사랑하고, 각라(覺羅)는 실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옛 조국 실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옛 실라의 망명 집안인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 신단민사는 애신각라는 김태조(金太祖)와 같이 계림(鷄林) 김(金)씨의 후손이라고 했다. 신라가 망한 후 경주 김씨 경순왕의 망명 왕자들이 금강산과 흑룡강성 그리고 백두산 속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제각기 힘을 모아 다시 흥기했던 것이다.
개천(開天) 5481년: 서기 1583년, 누루하치는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을 위하여 만주에 들어와 있는 한족(漢族: 明國)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군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강력한 힘을 가진 한족을 몰아내려면 우선 만주를 통일한 후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이리하여 시작된 민족 통일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건주 여진(여진이 여러 부족중 가장 강력했던 부족)을 손에 넣은 후 서기 1587년에는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을 구축하여 강력한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서기 1607년에는 후이파를, 13년에는 우라[烏拉]를 병합하여 명실공히 통일 여진국을 만든 후 서기 1616년에 한(汗)의 지위에 올랐다. 새 나라의 이름은 대김제국(大金帝國)의 영광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후김(後金)으로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였다.
누루하치는 역사의 초기부터 써 오던 한자(漢字)가 우리 쥬신족의 소리말에 적당치 않으므로 새로운 글자 "여진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여 나라의 기본으로 하고 도성을 허투아라[赫圖阿拉]로 옮겼다.
서기 1618년, 마침내 대명 선전포고를 하고 푸순[撫順]을 곧 취하더니, 곧이어 청하(淸河)지방의 한족들을 멀리 서쪽으로 내쫓고 이 지역을 완전히 다물해 내었다.
개천(開天) 5523년: 서기 1625년, 후김은 서울을 심양으로 옮기고 요하 이동 70여성을 모조리 탈환하였다. 누루하치가 죽자 그의 여덟번째 왕자인 황태극[皇太極]이 즉위하여(1,636년), 나라 이름을 후김(後金)에서 청(淸)으로 고치고 여진인을 만주인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후김, 청으로 이어지는 만주의 동포들은 남쪽에 있는 동족의 나라인 조선[李氏 朝鮮]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민족의 원수인 한족[漢族之國=明]을 토벌하자고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얼빠진 이씨조선 왕족들은 동족인 청을 거부하고 명나라에 빌붙어 만주 동포들을 실망시켰다.
오히려 이를 강압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군사 행동(丙子胡亂)을 굴욕적인 국치였다고 원한의 감정만 쌓게 되니, 이씨 왕족들의 사대주의 사상은 가히 실라가 당을 상대로 행했던 추태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종횡으로 누비며 생업을 꾸리던 만주인들은 기마민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특유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른바 그 유명한 8기제도(八旗制度)가 그것이다.
이 제도는 평상시에는 밭 갈고 사냥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일단 전시 동원령이 내리면 그들이 속한 깃발을 들고 자신들이 타던 말에 올라 그대로 전선으로 내닫는 체제여서,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기동력이 대단히 신속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8기에는 제각기 고유한 색깔이 있었다. 정황(正黃), 정홍(正紅), 정람(正藍), 정백(正白), 양황(黃), 양홍(紅), 양람(藍), 양백(白)이었다. 8기제도는 군사, 경제가 일체된 사회 체제로서, 누루하치는 8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군정 대사는 8기 수령들이 공동으로 상의하여 결정하고 최고 통치자의 계승권도 8기에서 선거를 통해 뽑았다. 이처럼 청조(淸朝)는 항상 준전시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국민이 모두 동원되는 국가 총동원 체제였으므로, 인구 비례상 10대 1이 넘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무려 276년 동안 중국인들을 다스리며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조가 중국을 제압하고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세습왕제를 받들고 있었으면서도 장자가 아니라 왕자들 중 가장 훌륭한 왕자를 뽑아 황제로 추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씨조선은 왕을 조종하려는 실세들의 첨예한 대립과 투쟁으로 나라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청의 이 제도는 정여립이 생각했던 왕의 선출 방식이었는데 그는 못난 이연 왕을 만나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 우리 만주족이 중국 한족을 다스리면서 주인행세를 했음은 서양인들 눈에도 정확히 비췄던 듯싶다. 그것은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다스리는 관리를 "만다린"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다린-MANDARIN"의 한자는 "滿大人(만대인)"으로, 곧 만주 대인이라는 뜻인데, 중국 발음으로 大가 "다", 人이 "렌"이기 때문에 만주 대인이라는 말이 만다린으로 변하였음을 똑똑히 밝혀 둔다.
※ 만주인들의 중국인 차별 정책도 대단했었는데, 한 예로 중국인들도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머리를 변발하고 길게 따내려야 했으며, 만주 땅은 내지(內地)라 하여 중국인들은 출입을 제한당했고, 특히 성지(聖地) 백두산 100리 이내로 접근하면 죽음으로 죄를 갚아야 했을 정도였다.
※ 백산흑수록(白山黑水錄)에는, 청조(淸朝) 시조는 장백산 북쪽 돈화현(敦化縣) 액마색(額摩索) 남쪽 100리 지점인 야액다력성(野額多力城)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 본 저자가 만주의 곳곳을 헤매며 애신각라의 발자취를 추적하던 중 몇몇의 괘씸한 중국의 학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조선족의 학자라는 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애신각라를 만주나 한국인이 아닌 중국 송(宋)나라 인으로 조작하여 탄생시키려는 공작을 한참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우선
"애신각라의 이름을 후금이나 만주의 8대 성씨들 중에서 발견할 수 없으므로 원래 만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분명히 중국의 송나라가 망한 후 김제국(金帝國)시절 만주지방으로 망명했던 교로(交魯)가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교로(交魯)의 북중국 발음이"Jiao-lu"여서 애신각라의 각라(覺羅)의 중국식 발음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애신각라의 애신은 이름이고 각라는 성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중국에서 성을 이름 다음에 썼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하고, 어째서 중국학자가 한자의 뜻을 버리고 발음을 따르는가 하는 질문도 묵살한 채, 하여튼 애신각라는 만주인이 아니고 송나라 사람임으로 중국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의 논문은 수정 없이 그대로 발표하여 당당하게 역사를 뒤집었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무섭게 꼬이고 뒤틀리며 왜곡되어가고 있다.
- 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다.
판사가 젊은이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젊은이는 대답
한다. "아이신지료 푸이(愛新覺羅 傅儀)."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중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
가 모택동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아이신지료…, 아이신지료….
한족(漢族)인 판사가 듣기엔 이상하기만 했던 청나라 황제의 성 '애
신각라(愛新覺羅)'. 만약 '애신각라'에 '(고국인) 신라를 사랑하고 잊
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면.
애신각라의 비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라는 중국의 억지가 10년만의 폭
염으로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한국의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
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부흥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의 지방 정권
일 뿐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토록 가볍다. 그러나 섬뜩하게 위험하
다. '섬뜩하게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노리는 것이 단지 고구려사만
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은 상당
부분 한반도 북부와 동북아시아로 고구려와 비슷하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면 고조선도 중국사인 것이다.
실제로 중국 사학자들은 이미 이 같은 논리를 펼치고 있다. 고조선
은 기자 조선과 위만 조선인데, 기자는 은나라 사람이고 위만은 연나
라 사람이므로 결국 기자-위만 조선은 중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고조선(삼조선이라고
도 불린다) 역사에서 단군조선 부분을 '공식적 한국사'에서 사실상
배제하고 신화로만 치부해온 국내 사학계의 책임이 크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박탈당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신라 건국 이후 2천년으
로, 강역은 한강 이남으로 좁혀질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현재 논리
를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백제도 한국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중국인'이라는,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
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는 중국의 논리를 중국 측에 그대로 되돌려 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보니까 예상대로(!) 중
국의 공식 역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한족(漢族) 국가인 송나라를
강남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지배했던 금나라와 중국 역사상 최강대국
인 청나라가 저절로 한국사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조선이 중국사라면, 금나라와 청나라는 한국사
에 속해야 한다. 그 건국자들의 뿌리가 한반도 남부라는 믿을만한 사
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중국 흉내내기1 : 금(金), 청(淸)은 시조가 신라인이므로 한국사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세를 떨쳤
던 나라를 묻는 질문에 4위를 차지한 국가가 청나라이다. 그 대단했
던 청나라를-엄격히 말하면 후금(후금은 청나라의 전신이다)-세운
사람은 누루하치. 그런데 그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이 신기한 조합
의 한자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고국인) 신라를 사랑
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
도 있지만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의 '근원'을 살펴 보면 신라와 관
련된 성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진다.(뒤에 서술)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지료'인데, '아이신'은 '금
(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청나라라면 고려
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오랑캐의 나라로 불리며 제대
로 대접받지 못한 나라이다. 그런데 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
라'와, 신라 왕족의 성 인 '금(金)'이 포함되어있는 것일까?
"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
왜란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또 유명한 '삼
전도 항복' 때는 친명배금을 외치는 조선에 와서 '원래 우리는 고려
인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다'는 취지로 '그대는 왜 동족
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청은 조
선에 번번이 형제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조선은 명분론에 매여 끝
까지 청을 형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은 먼저 청나라가 조선을 부모
의 나라로 섬긴 예를 들었다. 그는 누르하치가 백두산 지역에서 태어
난 것을 지적하며, 당시 백두산 지역에는 만주계 조선인이 많았고 그
들 중 상당수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고려인 또는 조선인으로
귀화했다고 설명했다. 한 때, 누르하치도 평안도 지방관현에 벼슬을
수차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왜 청나라가 끝까지 조선에 호의적이었을까요? 바로 청나라가 금나
라로부터 나왔고 금나라는 신라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 씨도 오 연구원과 의견을 같이 했다.
"중원을 복속하고 한족을 지배했던 곳이 청나라입니다. 반정으로 왕
위에 오른 인조 때 조선은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청은 충분히
조선을 복속하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
죠."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우리 시조는 신라인"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
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금나라 태조와 정
확히 어떤 혈연관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
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
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
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
에 대해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
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고 전한다. 더
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
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
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
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다만 금
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의 직계 아들인지 몇 대를 거친 손자인지
는 의견이 다양하다.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는 없
을 것인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유민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
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
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
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
함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기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
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흉내내기2 : 민족개념 새로 짜기
'중화민족'은 사실 비교적 최근(중국공산당 집권 이후)에 나타난 새
로운 개념이다. 현재 중국의 영토에 사는 모든 민족은 모두 '중화 민
족'이란 것. 이 '중화 민족'은 역사학이라기 보다 대륙의 다양한 소
수 민족을 포섭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것이다. 이런 '우악스러운' 중화민족 개념에 대항하려면 우리
도 본래의 '단일 민족' 개념을 새로 짜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여
진, 거란 등의 북방 민족을 한민족(韓民族)의 테두리와 융화시키는
것일 터이다. 더욱이 이런 방식은 '중화 민족' 개념 보다는 문화, 인
종, 생활방식의 유사성 등에서 훨씬 타당성이 크다.
그럼 여진 등의 기마 민족과 '한민족(韓民族)'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공을 세운 부하의 4대 후손이 누르하치라고 밝히면서 여진족, 몽골
족 등과 조선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정립한다.
"이제 단일 민족 국가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성계가 위화
도 회군을 성공적으로 감행할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여진, 몽골 등
의 기마 민족 덕분이었습니다. 동이족이라 불리던 유라시아 반도 동
북부는 그렇게 서로 뒤섞여 살았던 것입니다. 고구려 영양왕은 거란
족, 말갈족을 거느리고 수나라에 대항해 싸웠고 발해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또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기마 부대원들도 거란, 여진족들이었지요. 심
지어 여진족은 조선에 귀화하면 벼슬을 주고 조선인으로 인정해 주
기도 했습니다. 혈통이 어찌 되었든 함께 어우러져 살았으니 '우리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배달회 오정윤씨는 민족개념에 대해 훨씬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
다. '동이족(東夷族)'에 거란, 여진, 몽골 등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거란은 '알'을 의미하는데 부화하기 전 알의 색상은 황금색입니다.
즉, 밝음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배달 민족의 '배달, 박달(밝은 들)'의
의미와 같습니다. 또한 여진은 고려의 '려'와 발해의 원래 이름
인 '진'을 합해 여진이라고 한 것으로 몽골어로 밝은 온누리라는 의
미에요. 또 몽골인들은 지배자를 '칸'이라고 하지 않습니
까? '칸'은 '삼한'의 '한'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동이족들은 똑같이 밝
음을 숭배하고 하늘의 자손과 땅의 자손이 만나 천지를 새로 만들 아
이들 잉태하는 거의 비슷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동이족에 포함된다는 민족들의 인류·신화학적 공통점들에 대
해 이야기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 말을 이었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 몽골, 거란, 여진과 같은 여러 북방 민족을 통치
했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도 발해가 이들을 상당수 흡수해 서
로 공동체가 되었고요. 교과서에는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이 말갈족, 즉 여진족이라고 나오지만 함께 오랜 세월을 지
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한국인들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는 교육을 받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것도 조선 후기 학자인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발해
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후부터였지만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발
해를 말갈의 나라로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민족사에 포함된
다고 주장하려면, 발해를 구성했던 사람들, 특히 말갈인들도 한국인
의 조상으로 보는 편이 훨씬 논리적일 것이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북방민족관
여기까지 쓰다 보니 '재야 사학자'들의 목소리만 너무 반영하고 있
는 것이 아니냐는 이른바 정통주류의 질책이 우려된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 북방 민족들을 어
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잠깐 살펴 보기로 한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이렇게 썼다.
"동국, 즉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민족은 선비족, 부여족, 지나족, 말갈
족, 여진족, 토족의 여섯인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5족을 정비하고 동국역사의 주류가 되었다."
단재의 대표작인 '조선상고사' 머리말도 읽어 보기로 하자.
"흉노와 몽골을 비롯한 거란. 여진족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규정하
고 그들이 우리민족에서 떨어져 나간 시기를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신채호를 꼽지만 정작 그
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잊고 살기 일쑤다.
이번엔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
이기도 한 백암 박은식의 소설 '몽배금태조'(꿈 속에서 금 태조를 만
나다)를 통해 그의 북방민족관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 소설은 일제
식민지 시절 '무치생'(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란 의미심장한 이름
을 가진 서생이 만주로 떠나갔다가 꿈 속에서 금 태조 아골타를 만
나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오호라. 우리 조선족과 만주족(滿洲族)은 모두 다 단군대황조의 자
손으로 오랜 옛날에는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기도 했고, 또 서
로 통하기도 했는데 필경은 통일이 되지 못하고 분리(分離)되면서 두
만(豆滿)과 압록(鴨綠)을 경계로 이루어 양쪽의 인민(人民)이 왕래
도 하지 못하고 각기 살은 지가 천여년이 되었다. 이에 따라 풍속이
같지 않게 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남같이 생각하면서 다른 종
족처럼 되었다. … 대개 대금국의 태조황제는 우리나라의 평주(平
州)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
령군이고 그 민족의 역사로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다른 이름으
로 발해족은 마한족(馬韓族)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金國)의 역
사로 말하면 두만강변의 한 작은 부락으로 흥기하여 단숨에 요나라
를 멸하고 다시금 북송(北宋)을 취하여 중국 천지의 주권을 장악하였
으니…."
이렇게 한탄하는 무치생을 금 태조 아골타가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한
다. 물론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다.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
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
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 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서
기자는 개인적으로 최근 한·중·일 동북아 삼국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민족주의 열풍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아시
아컵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중국의 관객들이 보여준 국수주의적 반응
과 이에 맞선 일본의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발언("중국인
은 민도가 낮아 어쩔 수 없다")은 민족주의가 얼마나 끔찍하고 좀스
러우며 혐오스러울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기자는 또한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통일)한국이 '거란, 여
진은 우리 민족이므로 그들의 역사적 강역 또한 우리 것'이란 식
의 '대민족주의'로 무장하고 새로운 국가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
지 않는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중국 같은 이웃이 한국의 역사
적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현실적 대재앙으로 이어
질 가능성을 고려하다 보면 '저항적 민족주의'가 다시 필요한 시기라
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주
장만 고집하는 것은 '발톱까지 무장한' 패권주의 앞에서 무장을 해제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윤율의 인생은 아름다워... 신라를 계승한 청나라...
윤율의 인생은 아름다워... 신라를 계승한 청나라...)
역그니 (編 ) 弼 祆 金 珔 國
첫댓글 좋은 사료 잘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왜 학계의 인정을 못받고
재야에서 떠돌고 있을까요 안타갑네요
교과서에도 채택되어 교육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
고대사를 망친 사람이 고려사 를 쓴 김누구드라 입니다 여기서 부터 잘못되기 시작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