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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이 노래를 듣고 죄수 하나가 찾아와서 울면서 "날개가 상한 새는 영영 날수 없는 겁니까?" 하고 슬픈 얼굴로 묻습니다. 아무 대답도 못 했습니다. 그러구 집에 돌아왔는데 '날개가 상한 새는 날수 없습니다.' 이게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습니다. 그 슬퍼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그는 깊은 은혜 가운데 노래를 다시 지었습니다. 그 작곡한 노래가 이렇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 맡기기만 하면 실패한 과거도 새롭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그대를 맡기십시오. 그대의 날개는 다시 새로워지고 높이높이 푸른 하늘을 날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20년 후에 뉴욕 YMCA에 무슨 일이 있어서 가서 행사에 참여할 때 자기 눈앞에 미군 대령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인사를 합니다. "제가 20년 전에 날개가 상한 새는 영영 날수 없는 겁니까?라고 물었던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작곡해 주신 상한 날개를 치유하면 다시 날 수 있다고 한 그 노래를 듣고, 새 사람이 된, 바로 그 사람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상한 날개로써는 날 수 없습니다. 이 날개를 치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역속에서도 찬양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삼상 16:23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욥 36: 17-23
내가 만일 나이팅게일이라면/ 나이팅게일처럼 노래하고/ 내가 만일 종달새라면 종달새처럼 하늘을 날터인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끝없이 하나님을 찬양하여/ 나의 창조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사람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쓴 시입니다.
이사야 43:21에서 “이 백성을 내가 나를 위해서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라” 이 말씀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의 우리들에게 대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도 있습니다. 누구를 어느 길로 어떻게 인도하시던지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찬양을 하게 하십니다. 찬양을 온전케 하시고, 찬양을 진실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여러가지입니다만, 그증에 가장 부모의 마음을 강동시키는 말은 사소한 일에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것을 바라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늘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다’ 목에 금 메달 걸었다고 승리자가 아니며, 자기 발 앞에 원수를 때려 눞혔다고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웃는 자가 승리자라는 말입니다. 웃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마지막에 찬양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일을 당했으며 어떤 실패와 고난을 격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지막 숨 넘어가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찬양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웁니다. 원망을 합니다. 증오합니다. 그러나 형통한 날에는 교만해집니다. 잘난척합니다. 방탕합니다. 어려울 때 우리들의 환경이 좋아지고, 돈이 많이 생기고, 건강해 지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환경이 되면 그 마음이 변해서 언제 그런 말을 했는가 싶게 등을 돌리기 일수입니다.
고통중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가지는 아주 뛰어난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남들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려 들지만 이 사람 스스로 남이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를 하려 간 사람이 도리어 위로를 받고 돌아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남이 원망하는데로 다 원망하고 남이 욕하는데로 다 욕한다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점에서 특별한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원망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원망하는 사람은 세상을 늘 원망 속에 삽니다. 환경이 바뀌면 무엇합니까? 좋은 것을 주면 무엇합니까? 이렇게 해도, 자렇게 해도, 그 사람은 늘 원망을 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체질은 구제 불가능의 체질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아주 짜증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 것만 고쳐지면 감사한다고 하지만 역시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디서나 감사하고, 어떤 때나 감사합니다. 환경이나 여건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욥기는 고난의 책입니다. 이 고난은 의로운 고난입니다. 스스로 아무 잘못이 없는데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 욥기는 그런 고난 속에 하나님을 감사하는 신앙의 간증서입니다. 욥은 동방의 갑부였습니다. 재산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원수들이 와서 다 약탈을 해 갔습니다. 욥의 모든 제산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 욥은 10남매를 둔 화목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10남매는 의롭게 잘 자라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맛 형집에 점심을 먹으로 모였다가 음식을 먹는 갑자기 태풍이 몰아 치더니 그 집 대들보가 뿌러지면서 집웅이 내려 앉아 몰살을 당했습니다. 사람이 자식하나 죽은 것도 견딜 수 없어서 평생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인데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10남매가 몰살을 당했으니 그야말로 욥의 마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욥은 그런 때에 “일어나 곁 옷을 찍고 머리 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1:20)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적신으로 나왔은즉 또한 적신으로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1:21)”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그가 이러한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미친 사람이던지, 하늘처럼 높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욥은 하늘처럼 높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은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지경에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고통이 다른 모양으로 장기화한 것입니다. 더욱 깊어가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부인는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욥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을 저주하더니 집을 나가 버립니다. 이제 욥은 병이 들었습니다. 腫處가 낫지 않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괴로워 했습니다. 잿더미에 딩굴었습니다. 몸에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악성 옴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 고통 중에 친구들이 찾아 옵니다. 아무 멀리 있던 친구도 찾아옵니다. 처음에 욥은 그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래도 마누라 보다 친구가 더 낳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 친구들은 고난을 당하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오긴 왔는데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들을 수 없는 비난을 퍼 붓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때 이런 점을 주심해야 합니다. “자네 얼마나 고생이 심하나? 자네가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직 깨닭음이 없는가? 자네 자식이 왜 주었겠나. 사실 그 아이들은 자내가 모르는 죄를 짓고 있었던 것이네. 자네 재산이 왜 그 모양이 되었겠나. 자네가 그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하이----- 자네 몸에 왜 병이 생겼겠나. 자네는 죄를 지은 것이네, 하나님은 죄도 없는 사람을 이런식으로 징개하시지는 안네. 그러므로 회개를 하게---, 회개를 하라니까. 자네가 회개를 안하는 것은 교만해서네. 그것도 회개를 하게----” 욥은 그들의 위로 아닌 정죄에 대해 너무 고통을 받아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나를 주위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13:24)라고 울부짓습니다.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이 모두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고난이 꼭 죄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어 고난을 당했으며 스데반과 바울과 베드로가 무슨 죄가 있어 순교를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네 번째의 친구 엘리후는 앞에서 말한 그들과 다른 말을 합니다. 그는 세 가지 충고와 한 가지 권면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말라”(:24)의 말씀입니다. 어떤 형편이던지 어떤 고난 속에 있던지 하나님 찬양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엘리후는 충고도 합니다. 18절에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하지 말라.” 욥은 재산을 다 잊어 버려도 참을 수 있습니다. 자식이 다 죽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 맹타를 당했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가. 명예, 자기의 도덕성과 결백성,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무시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이 고통이 모두 네가 지은 죄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욥은 그 모욕적인 발언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너는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에는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마침내 분통을 터뜨립니다. 징책을 합니다. 힐난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하십니까? 왜 나를 대적으로 여기십니까?” 이에 대하여 엘리후의 첫 번째 충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 들던 아니들던 이 고통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자비가 있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는 것을 알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잠시 동안 느껴지지 않지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알기 바라네. 그러므로 이 고난을 대적할 생각을 말게. 잘 감수하시게. 받아들여야 하네. 믿음에서 떠나지 말게”라고 권면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권면입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충고는 20절의 말씀입니다. “자네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을 때를 사모하지 말게” 이 말은 죽기를 소원하지 말라. 자포자기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입니다. 여기 “밤”은 죽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3장에서 “내가 육신 밖에서 주를 뵈오리라”라고 하고 심지어 자기가 세상에 태여난 것을 원망합니다.즉 즉기를 소원하여 “하나님 제발 나를 죽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아닙니다. 죽음 다음에 오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 자체에 대하여 낙심을 해서는 안됩니다. 생의 의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절망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어느 때 어떤 경우에도 죽기를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기를 소원했다가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빼앗기는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산다는 것”에 대한 자포 자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산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고 살아 있어야 무슨 일에 대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있음을 하나님에게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말에도 “죽을 각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면 못할 일이 없고 못 해결할 고난이 없습니다.
엘리후의 세번째 충고는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21절)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빼앗겼으니 그의 것을 빼앗고, 비난을 맏았으니 그를 비난하고, 미움을 받았으니 그를 미워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에게 다 마껴야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두 개의 악은 하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대적하여 의를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를 이루는 방법이 아닙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아무리 의를 지향하는 행동이라도 악한 것은 악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함 이 고난과 역경, 이 모순과 부조리를 악한 방법으로 대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악을 세상에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후는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찬송하기를 잊지말라”(24절) ‘찬송’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할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찬양하다. 칭찬하다. 자랑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찬양이라는 말에 ‘할랄’이라는 말 이외에 ‘야다’ ‘바락’ ‘자마르’등 여러 단어들이 있습니다. 이 말들은 모두 ‘감사하다. 고백하다. 하나님을 찬양하다. 송축하다. 찬송하다’라는 말들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랑과 감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 ‘할랄’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조건 반사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어떤 축복을 받아야 찬양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 얻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타내는 절대적인 반응입니다. 깊은 깨닭음이 있을 때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고, 신앙을 바로 고백하는 순간에는 어디서든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은혜에 대한 간증입니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살다 보면 감사할 날도 오겠지’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별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나의 내적 존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쁠 때 찬양을 하지만, 찬양을 해야 기쁨이 온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할 때 찬양을 하지만 찬양을 할 때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체험해야 합니다.
망난이 남편과 함께 사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술이 곤드래가 되어 인삼불성으로 집을 찾아 오는 남편이 늘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늘 팔자 타령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았습니다. 그 날도 남편은 밤 늦도록 돌아 오지 않습니다. 혼자 저녁을 차려 놓고 식사도 안한체 팔자를 생각하고 있는데 문듯 주일 날 목사님이 하신 설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기는 감사할 일이 별로 없다고 헛트로 들었는데, 그 시간에 이 말씀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이 생각이 나서 억지로 감사할 일들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게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기도를 하고 자기와 남편 자식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감사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속 썩이는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야 낳지. 저렇게 고주망태가 되어 가지고도 집이라고 꼭꼭 찾아 오는 것을 보면 장하기도 하지. 언젠가 사람될 날이 오겠지. 자기는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니 그것도 고맙지. 아이들이 다행히 착하게 잘자라는 것도 감사하지’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하나님 내 팔자’하고 울었는데 나중에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더랍니다. 자다가 목이 말라 눈을 뜬 남편이 보니 전에 같으면 독수리 눈을 하고 있던지 돌아 누워 있어야 할 아내가 자기를 보면서 웃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 ‘당신 왜 이래, 어디 아파’ 했습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을 보고 있으니 너무 고마운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면서 이제까지 자기 마음에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남편이 그 말을 듣고 나서 하는 말 ‘예수 믿어 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잡시다’
감사한 말은 감사할 일 뒤에 오는 말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말이 있어야 감사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저기가 살아 온 길을 뒤 돌아 보니 발자국이 네개더랍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왜 발자국이 네개입니까’라고 물으니 ‘두개는 너의 발 자국이고 두개는 내 발자국이니라’하셨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보니 험한 곳이 나왔는데 발자국이 두개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여기서는 왜 발 자국이 두개 밖에 없나요’ ‘그 발자국은 내가 너를 안고 지나 온 내 발자국이니라’
여러분 인생을 스스로 내 힘으로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교만입니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나와 동행하시고, 특별히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를 엎어 주시고 안아 주신다는 것을 잊지맙시다.
이제 우리들에게 무슨 다른 조건이 필요합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고 해도 감사를 잊지말고 삽시다. 어떤 환경에서라도 하나님 찬송하기를 잊지맙시다.
마 26장에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 가십니다. 이제 밤을 세워 기도하시고 내일 새벽에 잡혀 사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산으로 가시는 중에 ‘찬미하며 감란 산으로 가시니라’(:30)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주님은 찬양을 합니다. 우리는 심자가커녕 변변치 않는 괴나리 봇짐을 지고서도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무슨 불평이 그리 많은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지. 어떻게 그렇게 짜증을 내는지----
깊은 찬송을 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찬송을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정말 찬송이 찬송이 되도록 하나님이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깨닭고 찬송하고, 믿음으로 찬송하고, 열심히 찬송하고, 경건되이 찬송합시다. 바울과 실라의 찬송에 빌립보 감옥의 문이 깨진 것처럼 우리들의 찬송이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
첫댓글 예수그리도안에서 상한 날개를치료받고감사합니다 샬롬
평안 장로님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