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겸손히 역사의 이야기를 들어라
'시간은 만물 중 가장 현명하다.
모든 것을 밝혀내기 때문이다’
(Time is the wisest of all things that are; for it brings everything to light).
지금의 튀르키예 서부지역 밀레투스에서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의 말이다
인심은 조석변(朝夕變)이다
중국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신하가 있었다.
위나라 왕은 미자하의 재주를 아껴 남달리 대했다.
어느 날 미자하가 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다급한 마음에 왕명이라 속이고 왕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위나라 국법에 따르면 임금의 수레를 타는 무리는 다리를 자르게 돼 있었다.
미자하가 거짓말을 해서 왕의 수레를 탔다는 소문을 들은 위왕은
“어머니를 위해 중벌도 무서워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효자”라고 칭찬했다.
어느 날 미자하는 왕을 모시고 과수원에 나갔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따서 먹어보더니 유난히 달고 맛이 좋아 먹다
남은 반쪽을 왕에게 권했다.
미자하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였다.
그러나 위왕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자기 입맛을 잊고 나에게 먹였으니 참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칭찬해줬다.
‘인심은 조석변(朝夕變)’이라는 옛말처럼 위왕의 마음도 쉽게 변했다.
어느 날 미자하는 대수롭지 않은 죄를 지었다.
그런데 지난날에 미자하를 그토록 감싸주던 왕은 갑자기
“너는 일찍이 왕명이라 속이고 내 수레를 훔쳐 탄 일이 있으며,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일이 있다”고 꾸짖고 벌을 줬다.
위왕과 미자하 고사를 인용하면서 나는 위왕을 교활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뜻도 없고,
미자하를 가리켜 불운하다고 동정할 뜻도 없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처음에 미운 짓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착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처음에는 착한 일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배신하고 도망가는 일도 흔히 있다.
그러므로 사랑받을 때 겸손하고 삼가야 하며, 사랑할 때 치우치지 않아야 하며,
미움을 주고받을 때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잘못된 미움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가.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
선한 영향력과 악한 영향력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서 작은 친절을 받아본 적 있는가.
미국에서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할 때다.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 곳곳에서 적잖은 통행료를 내야 했다.
어디선가 통행료를 내려고 했더니 “그냥 가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던 앞선 차량 운전자가 미리 내준 것이다.
한 번은 아내와 버지니아주 매클레인의 한 커피숍에 갔다.
두 잔을 주문했더니 한 잔 값만 받았다.
이곳을 다녀간 어느 손님이 자신이 선택한 것과 같은 음료를 주문한 누군가를 위해
계산을 미리 해뒀다고 했다.
그때 ‘우연한 친절’, ‘뜻밖의 친절’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실감했다.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끝을 알 수조차 없는 우주 공간에서 지구라는 별에, 남북으로 갈린 국가의 남쪽에,
부모님 자녀로 태어난 자체가 엄청난 확률의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하다.
우연은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그렇다고 통행료를, 음료값을 내준 누군가가 세상을, 역사를 바꾸려 했던 건 아닐 터이다. 그저 누군가의 작은 기쁨을 상상했으리라. 그러면서 스스로 미소 짓지 않았을까.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 한 빵집에 선결제, 커피를 무료로 제공, 무료 음료 혜택,
결제 코드가 ‘김민주’인 걸 보면 그의 뜻을 짐작할 만하다.
민주주의를 향한 선한 영향력을 기대했으리라.
국회 1차 탄핵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 의원 105명을 향한 근조화환, 의원 지역사무실 문에 스프레이로 낙서, 현관에 흉기를 놓고 가기, 새벽에 정당 현수막에 방화 등은
민주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반민주적 테러행위 이다. 어떤 이유로도 인정이 어렵다.
선한 영향력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지만 악한 영향력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어느 한 편의 주장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마음을 바꿔 먹을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자세다
“이념이란 좌우 모두에게 영토와 권력을 추구하려는 빌미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된 정의는 이념이나 논리로부터 벗어나 제삼자들이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야 비로소 구현된다”
영국 소설가이자 ‘더 타임스’ 기자였던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의 말이다
이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는 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는 데에
정치는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다고 정치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느냐 하면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해도,
정치는 이 사회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을 고통에 쉽게 빠뜨려 버릴 수는 있다. 정치에 대한 이런 비관적인 믿음 때문에 평소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다고 정치에 무관심하라는 뜻은 아니다.
관심을 갖되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치가 삶을 집어삼키지는 않도록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일상을 건강하게 살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세상은 불안정하고, 그 위에 사는 우리는 불안하고,
그 누구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줄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마음 건강도 지켜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수인(囚人)이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에서 이 문장을 보고 나서는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상식적이고 순조롭게 기능하는 질서에 의해
유지된다고 믿을 수 있어야 평온해질 수 있다.
공기가 오염되면 신체가 병드는 것처럼, 사회가 오염되면 정신에 병이 든다.
공기를 마시고 사는데 공기가 없는 것처럼 살 수 없듯,
혼돈의 시대와 아무리 거리를 두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이 아픈 건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비록 괴롭기는 하지만 정신의 고통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마음이 아플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나는 본래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혼란이 찾아오면 우리는 고통에 빠지지만 그때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다시금 떠올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이웃과 함께 함이다
참다운 본래의 나의 존재를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