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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 지상에서의 위험한 꿈
1. 생을 관통하는 유년의 체험 어린 시절,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동화책 속의 어른들은 생각과 행동이 정말 어른다운데, 실제 생활 속의 어른들은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다. 가까이는 가족으로부터 선생님, 동네 이웃들까지, 내가 기대하는 어른의 모습과 다를 때가 너무 많았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자주 가슴이 아팠으며, 때로 심한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실제의 세상을 미처 파악하기 전에 동화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었다. 동화책 속에서 만났던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체들, 참되고 조화로운 질서, 기쁘고 아름다운 삶을 실제의 세상에서도 기대한 탓이었다. 현실은 보편적 질서가 구현되는 장이 아니라 치열한 인간 욕망의 각축장임을, 어린 나는 당연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날은 외로웠다. 있는 현실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알 수 없는 소외감과 이방인 의식을 느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랬다. 동화를 쓰면서 비로소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고,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비천체(卑賤體)인 인간 존재, 이 불완전한 삶 자체를 애틋이 여기게 되었다. 삶과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왜곡되고 파편화된 현실을 타자화 하여 거부해 왔다면, 이제 너와 나의 분별심도 흐려져 '지금 여기 이 곳'에서 충만한 생을 누리고(고통까지도) 끊임없이 타자와 교감할 방도를 찾는 일이 관심사가 되었다. 내가 유년기에 동화를 접하지 않았더라도 기존의 가치를 의심하는 고집스런 탐색을 계속해올 수 있었을까? 현실 삶에 결핍된 보다 완전한 그 무엇을 꿈꾸며 글쓰는 일을 하게 되었을까? 수없이 상처 입고, 죄를 얻고, 혼돈의 늪에 빠지면서도 거듭 자신과 세상을 신뢰하며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최선의 자아 실현을 믿고 바라고 격려할 수 있었을까? 가지 않은 길은 사방으로 뻗어 있고 대답은 아무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유년기에 많은 동화책을 읽었다는 것이고, 그 체험이 일생을 관통하였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결과를 들자면 동화 작가가 되는데 결정적 자양분을 얻었고, 보이지 않는 면에서 무의식적 취향과 사고 성향, 삶의 패턴 형성에 깊은 영향을 입었다. 한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너무 미세하고 다양하고 돌발적이기도 해서, 일반화시켜 적용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유년의 체험은 나무의 나이테 그 중심처럼 일생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을 이해하는 개인적 인식의 지표가 된다. 이 시기의 독서 경험을 통해 인간의 뛰어나고 넉넉하고 아름다운 어떤 자질들을 풍요롭게 경험함으로써, 어린이는 자신과 타자의 전망을 그만큼 폭넓게 구축할 수 있다. 개인의 비전과 물리적 환경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삶의 공간이 만들어짐을 염두에 둔다면, 때묻은 현실계를 보여주기 전에 인간과 자연의 최선의 존재 방식을 보여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야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상태를 거듭 지향하게 될 테니까. 매순간 참 생명의 발화를 꿈꾸게 될 테니까. 이쯤에서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 고유한 생명의 거침없는 개화를 소망하는지, 현실 가치의 탁월한 내면화를 기대하는지. 그들 자신을 실현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타자의 꿈을 실현하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진실로 그들 몫의 정당한 생을 보장하고 있는지, 아니면 끊임없이 억압하고 침해하며 조각 내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진짜 사랑인지, 욕망의 또 다른 얼굴인지.
2. 침묵하는 아이들 아데나는 억압 집단의 특성을 그들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구사력을 갖지 못한 점, 즉 '벙어리 됨' mutedness에서 찾았다. 지배계급에 비해 피 지배계급, 식자에 비해 무식자, 남자에 비해 여자에게서 이러한 특질은 쉽게 발견된다. 이렇게 본다면 어린이들이야말로 억압된 집단으로서의 특성을 대표적으로 지닌다. 그들은 자신의 느낌을 제대로 분석하고 표현할 줄 모른다. 정신적인 고통이나 공포감에 대해서도 머리나 배가 아프다는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한다. 유년기는 철저히 권리 위임의 시기이다. 어린이들의 몸/욕망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지켜주는 일까지 전부 어른들에게 맡겨져 있다. 일반 문학과 다른 아동문학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 있다. 일반문학은 성인 주체인 자신을 충실히 표현하면 되지만, 아동문학은 어른이 어린이들의 느낌과 욕망을 대신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동문학은 무엇보다 어린이 편이어야 하며, 아동문학인은 어린이의 철저한 아군이어야 한다. 우리 아동문학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절실한 그들의 느낌을 표현해왔던가? 아동문학을 매개로 성인 주체의 욕망을 투사하거나, 자기 만족을 추구한 적은 없었나? 어린이를 위한다는 구실로, 특정 가치관을 주입하고 현실논리를 강화하여 오히려 어린이의 발랄한 생명력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지는 않았던가? 아동문학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성인 문학에 비해 아동문학이 주변 문학으로 취급되는 현실을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고, 열등의식을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고 소중히 생각할만한 아동문학 작품의 풍요로운 목록을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각 문학 장르는 저마다 기능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장르간에 비교할 필요도 없고 우열 관계는 더더욱 성립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동문학을 한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반대로 대단한 사명의식이나 우월감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물론 문학도 사람 사는 일의 하나라 미묘한 권력 의지가 첨예하게 개입되고, 문화자본 시대에 문화 권력의 위력이 자못 대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언제나 근원을 응시해야 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지금 행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동문학이 주변 장르화된 현실이 불만스럽다면, 불평을 하는데 그칠 게 아니라 개선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 정말 좋은 작품을 쓰고, 널리 나누기 위한 노력을 하고, 아동문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인식을 도모하는 활동을 펼쳐야 한다. 삶도 사랑도 실천이 따라야 한다. 삶의 많은 길 중에서 아동문학을 택하였다면, 어린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아동문학을 가꾸고 돌보고 옹호해야 한다. 그 동안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겼던 것 중의 하나는, 아동문학인 스스로가 아동문학을 비난하고 비하하는 풍토였다. 그러니 자신이 아동문학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한 나라 아동문학은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와 경제 등 총체적 수준을 반영한다. 힘도 권력도 없는 어린이에 대한 참다운 존중과 배려의 풍토가 결여된 땅에서, 아동문학인들만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이 땅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현실 공간을 이토록 왜곡된 구조로 만들어, 새로 오는 어린 생명들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함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을 소유하고 누리고 발견하며 성장의 기쁨을 알게 하는 대신, 어른의 이기심과 불안과 조급증을 누더기처럼 입혀 싱싱한 생명력을 시들게 함이... 나는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라고 믿는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할 사람은 자녀가 아니라 부모이다.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자. 어른들이 해방되면 아이들은 저절로 자유롭다.
3. 그들 앞의 生 인생의 각 시기는 그 순간으로 완결된다. 성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유년기와 청소년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매 순간이 바로 생의 전부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아동문학은 성장을 돕는 힘이 있지만, 보다 본질적인 기능은 유년의 각 단계에서 문학 체험을 '즐기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성인들이 다양한 문학을 접할 권리가 있듯, 어린이도 자신의 단계에서 문학을 즐길 권리가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종족이다. 어린 시절을 이미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신 인류를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놀라운 에너지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문학은 보다 까다로운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연령에 따라 인식능력과 이해정도의 큰 차이를 보이는 어린이들의 보편적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여, 그 단계에 적합한 문학의 내용과 형식을 익혀야 하며, 그 이전에 순수하고 정직한 어린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동질성을 회복해야 한다. 누구나 쉽게 아동문학을 택할 수는 있지만, 동심을 단순 소박하게 드러내는 능력이 아무에게나 허용되지는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천연한 마음 바탕이 없고서는 아무리 수련을 해도 이르지 못하는 상태가 또한 있다. 그 비슷비슷해 보이는 작품들의 미세한 차이를, 전문가일수록 금세 알아볼 수 있다. 바로 그 차이가 독자 영혼의 섬세한 결을 형성한다. 그런 점에서 어른들을 위한 아동문학 교육은 필수적이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혀야 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지만, 어느 시기에 어떤 책을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 또 어떤 책이 좋은 지 어떤 책이 그렇지 못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끔 어린이 도서관에 가보면 엄마나 아빠가 아이들과 책을 읽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중에는 그 아이의 수준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단계의 책을 열심히 읽어주며 이해시키려고 애를 쓰거나, 하나하나 자세하게 해석을 덧붙이고 되묻고 확인까지 하는 너무 친절한 부모를 가끔 볼 수 있다. 자신의 지적 능력과 이해력의 범위를 벗어난 책에 대한 강요의 경험은, 어린이로 하여금 독서 행위 자체를 회피하게 만드는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의 독서 체험을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끊임없이 침해하는 행위 또한 조심해야 할 일이다. 어린이는 모두 자신의 눈과 언어로 세상을 신선하게 해석하는 시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른들이 자꾸 개입함으로써 남들이 기대하는 말을 하는 아이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독서뿐만 삶의 다른 체험들도 부모와 아이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그 자체로 이미 비길 바 없이 의미 깊고 소중하며, 그러나 그 순간에도 여백을 두어 아이의 체험은 아이 몫으로 존중하는 어른다운 배려가 항상 요구된다. 아이 스스로 보고, 느끼고, 겪고, 시행착오를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바람직한 부모 역할을 하기 위해, 또 어린이의 발달 단계에 맞는 책을 골라줄 수 있는 실질적인 감식력의 배양을 위해,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아동문학 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각 대학에서 아동문학 과목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지역 사회 단체별로 부모 대상의 아동문학 강좌를 보다 많이 마련해야 한다. 특히 아동문학인들은 좋은 작품을 창작하는 본연의 일에 가장 마음을 써야겠지만, 아동문학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함께 나누기 위한 노력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동문학은 대단히 급진적이며 위험한 문학이다. 모든 좋은 아동문학 작품들은, 때묻고 왜곡된 현실을 갈아엎고 보다 완전한 질서의 깨끗한 세계를 지구에 구현하고자 하는 은밀한 소망을 감추고 있다. 복잡한 현실의 표면을 꿰뚫고 본질을 응시하는 눈을 갖게 하며, 참 자유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힘에도 진정으로 복종하지 않게 하는 반항심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타자가 깨어나는 것이 두렵다면, 아이들에게 아동문학 작품을 주지 말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간절히 말하고 싶은 것은, 제발 우리 아이들에게 스스로 자랄 시간을 주자는 것이다. 세상과 처음 만나는 그 특별한 시기를 그들 몫으로 가질 수 있게, 조금 더 참고 기다리는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거듭 새로 올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현실의 질곡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꿈꾸지 않으면 이룰 수도 없다. 아동문학의 존재 이유도 바로 거기 있으리라. <2001. 제주문학 특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