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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島는 언제 高麗帝國에 편입되었나 ? | ||||||||||||
[한민족사] 일본에서 본 고려제국사 (16) ㅣ 列島의 高麗 편입은 평안경(平安京)-평안궁(平安宮) 대화재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시작에서 단초를 잡아야 / 日本 天皇은 과연 단일 百濟係였을까 ? | ||||||||||||
이번 연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마도 이 번 글일 것입니다. 日本의 주장대로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천황제(天皇制)가 지금까지 列島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면 列島를 지속적인 독립국으로 보아야 하며 지금까지의 논의는 자칫 다 허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상당수 역사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일본의 주장, 즉 지금 전세계가 사실이라 인정하는 그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통찰력과 그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상식을 통해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전 글에서 日本이 잠시 독립국을 이루기는 했지만 막부(幕府)가 시작된 시점부터 高麗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적은 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독자 여러분께 당부 드리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저의 글을 포함해서 시대소리 대부분 글들은 집필진들의 독창적인 작품들입니다. 이 독창적인 작품들을 마치 자기가 생각해 낸 것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런 사람들은 민족의 역적들이며 기본 소양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갖은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의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때로는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감내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대소리 필진들이 원하는 것은 물론 대칸민족(大韓民族)의 비상(飛上)입니다. 그러나 필자 개개인에게 적어도 명예(名譽)는 주어져야 합니다. 시대소리를 통해 새로운 생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물론 그 사람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봐야겠지요. 그러나 그 생각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 시대소리가 있었음을 분명히 밝혀야 하며 시대소리를 통해 얻은 지식을 그대로 사용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시대소리에서 얻은 것이라고 밝혀야 합니다. 저도 이번 글을 연재할 때 황진이 선생의 양계론(兩係論)과 남고려북조선론(南高麗北朝鮮論)을 통해 글을 전개하겠다고 분명히 밝힌바 있습니다. 시대소리에 와서 기웃거리다가 아이디어만 얻어 자신의 명예와 부귀를 위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결국 대칸민족(大韓民族)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미리 경고해둡니다. 제 글을 읽어보시는 분들이 가장 흥미로워 하는 것은 아마도 마을(町)을 이야기하며 현장에서 찾은 증거를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일 겁니다. 도시를 공부하는 사람의 역사 접근법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알아보기 힘든 고지도와 한자에 의존하지 않고 납득 가능한 범위 내에서 통찰력을 토대로 제가 소화한 사항을 여러분들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가 막부(幕府)가 시작된 시점부터 列島가 高麗帝國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太王 高麗의 중심지인 동경권(東京圈)에서 일어났다는데 있습니다. 저번 글에서 설명 드렸지만 가마쿠라(鎌倉)는 東京圈의 서쪽을 알리는 高麗山과 인접해 바로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즉 東京과 高麗山 사이에 가마쿠라(鎌倉)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마쿠라(鎌倉) 북쪽에 高麗神社가 있으니 가마쿠라(鎌倉)는 太王 高麗 세력의 근거지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할 것입니다.(여기서 高麗神社는 高麗山에 있는 高來神社(舊 高麗神社)와는 다른 신사임)
가마쿠라(鎌倉)는 東京을 방문한 여행객들도 꼭 들릴 만큼 동경과 가까운 곳입니다. 이 가마쿠라(鎌倉)에서 막부(幕府)가 시작된 것이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1185년경이라고 합니다. 막부 시작을 언제부터 볼 것인가를 두고 여러 논쟁이 있지만 보통 1180년에서 1200년 사이로 규정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1177년 교토(京都), 즉 당시 평안경(平安京)에 대화재가 났으며 1227년에는 평안궁(平安宮)에 대화재가 나서 宮이 완전 소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宮이 소실되자 天皇은 귀족 저택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거처하다가 1331년이나 되어서 지금의 교토어소(京都御所)에 거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본측 기록을 통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막부(幕府)의 시작과 평안경(平安京)-평안궁(平安宮)의 대화재가 엇비슷한 연대에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화재에 대한 상세기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얻은 것은 고작 화재발생 연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교토(京都)가 일본 최대 역사 도시인 점과 기록을 잘 남기는 일본인(日本人)들의 특징을 생각해 본 다면 너무나 의외적인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허수아비라 해도 天皇이 100년 넘게 집도 절도 없이 살았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막부의 우두머리가 실질적인 통치를 한다고 해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天皇의 재가를 얻어야 합니다. 그런 天皇이 집도 절도 없이 100년을 보냈다는 것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지요. 혹시 막부시대(幕府時代), 天皇은 列島에 없었고 天皇이라함은 半島에 있었던 皇帝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100년이 지나 생긴 곳도 궁(宮)이 아니라 어소(御所)로 불렸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御"자는 “㉠거느리다, 통솔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 ㉢어거하다(馭車--) ㉣거둥하다 ㉤짐승을 길들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교토어소(京都御所)의 의미는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해도 “교토에서 다스리는 곳 / 교토를 다스리는 곳” 정도 일 것입니다. "御"자가 "임금"을 뜻한다 해도 교토어소는 "교토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곳" 정도의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평안궁(平安宮)은 天皇의 거처답게 주작대로(朱雀大路)의 한 가운데 최북단에 위치해 있었던 반면 교토어소(京都御所)는 원래 평안궁(平安宮) 자리에 재건되지 못한 채 동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지금은 도시가 확장되어서 교토어소(京都御所)가 위치한 지역이 변두리가 아니지만 처음 건립되었을 때에는 확실히 도시의 변두리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변두리라도 지대가 높으면 그 자리 잡은 위치가 통치자의 거처로 적당하다 하겠지만 교토어소는 평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안궁(平安宮) 자리에는 지금 니조성(二條城)이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교토어소(京都御所)는 몇 번의 화재를 거쳐 1855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도 단순히 볼 사안은 아닙니다. 近代 日本 天皇은 죽어서도 宮(明治神宮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에 사는데 왜 살아서는 宮에 살지 못한 것일까요? 교토어소(京都御所) 다음 天皇의 거처 장소는 시대소리 독자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에도성(江戶城)을 변형시킨 황거(皇居)입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성공 후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은 같은 해에 에도(江戶)로 천도합니다. 그리고 에도(江戶)를 동경(東京)으로 지명을 변경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에도성(江戶城)을 변형시킵니다. 에도성(江戶城)은 1888년이나 되어서 지금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됩니다. 1888년에 坂下門도 새로 건립되었음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에도성(江戶城)의 다음 이름이 바로 황거(皇居)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도성(江戶城)은 동경성(東京城), 황성(皇城), 궁성(宮城)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태평양전쟁 이후에 황거(皇居)로 명칭이 정립됩니다.(왜 태평양전쟁 이후에 황거(皇居)로 명칭이 바뀌어야 했는지는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황거(皇居)는 말 그대로 “天皇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왜 天皇은 宮에서 살지 못한 것일까요? 더욱이 “居”는 “임시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한자입니다. 일본에서는 宮이라는 명칭이 중요하지 않거나 굳이 宮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날로 갈수록 한자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면 여겼지 그리 단순하게 다룰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天皇과 관련된 한자인데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일본측 기록을 어떻게 재구성해서 보아야 할까요? 이런 재구성에 앞서 百濟의 멸망(660년) 후 열도 부여(列島 夫餘)의 수도 이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 지도를 보면 간사이(関西)지방에서 수도가 계속해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수도 이전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정치세력의 이동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이제 한국에서 상식처럼 되어 있는 日本 天皇이 단일 百濟係라는 설에도 감히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물론 일본의 현 아키히토(明仁) 天皇이 자신의 주장대로 百濟 무령왕(武寧王)의 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의문을 갖는 것은 日本 天皇이 계속해서 百濟係였을까 하는 점과 列島에 천황제(天皇制)가 皇帝 高麗 시대에도 존속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수도 이전이 저렇게 심했다는 것은 百濟 멸망 이후 列島에서 주도권 다툼이 엄청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百濟가 건재해 있었다면 列島에서 百濟係가 주도권을 계속해서 잡았을 것이고 天皇도 물론 百濟係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百濟는 멸망했으며 列島에는 백제계(百濟係)뿐만 아니라 신라계(新羅係), 가야계(伽倻係), 그리고 태왕 고려계(太王 高麗係)도 있었습니다. 이중 가야계(伽倻係)는 일찌감치 백제계(百濟係)에 동화되었고 태왕 고려계(太王 高麗係)는 주 근거지가 간사이(関西)지방에서 먼 동경권(東京圈)이었습니다. 문제는 역시 新羅係였는데 百濟係와 新羅係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의 결과가 수도 이전으로 나타났다고 보여 집니다. 이런 주도권 싸움 과정에서 天皇마저 新羅係로 넘어 갔을 수도 있다고 보여 집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런 百濟係와 新羅係의 싸움은 결국 百濟係의 승리로 결말을 맺게 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百濟 부흥 운동이 실패한 다음 列島로 건너온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 용(扶餘 勇)의 자손들이 750년경에 백제사(百濟寺)와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를 건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앙 정치권력을 百濟係가 장악하였기에 가능하였다고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간무 천황(桓武天皇)이 수도를 옮겨 평안경(平安京)리라 명명하고 자신이 살 곳은 평안궁(平安宮)이라 했던 것은 그간의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을 완결 짓고 이제 列島가 평안(平安)해지기를 희망했던 바를 나타낸 것을 아닐까요? 그가 원한 바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평안경(平安京) 천도 후 막부(幕府) 이전까지 400년간 列島는 百濟係 주도로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대륙(大陸)에서 왕건 황제(王建 皇帝)에 의해 935년 후삼국이 통일되고 列島에서도 太王 高麗의 후손들이 가마쿠라(鎌倉)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列島는 1185년경 太王 高麗의 후손들에 의해 장악되고 列島는 皇帝 高麗에 편입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 평안경(平安京), 즉 지금의 교토(京都)와 평안궁(平安宮)은 불 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게 통찰을 통해 얻은 저의 가설입니다. 그러면 天皇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일개 귀족으로 그 생명을 유지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百濟係의 반발을 무마해야 하는데 天皇의 존재는 중요하며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도 귀족으로 걷은 바 있는 皇帝 高麗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충분히 그 개연성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방의 일개 귀족으로 신분이 떨어진 天皇에게 주어진 집이 교토어소(京都御所)라 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교토어소(京都御所)는 1855년에 재건된 것이라 하는데 냄새가 난다는 것이지요. 과연 1855년에 재건된 것이 맞을까요? 예전에도 교토어소(京都御所)로 불리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皇帝 高麗 시대의 교토(京都)를 살펴보면서 저의 가설을 풍족하게 보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사(百濟寺), 시대소리 역사찾기위원 시대소리뉴스 www.sidaesori.co.kr | ||||||||||||
2008/09/16 [20:39] ⓒ 시대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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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시대소리를 자주들어가 보곤 했는데, 최근에는 접속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대소리를 통해서 본 카페도 알게되었습니다.
일본천왕에게서 고구려의 흔적이?.... 일본은 과연 무엇인가요?... 일본어의 근원과 일본역사의 근원이 궁금합니다...
열도는..원 왜족들과는 거리가 좀 있는 종족들로 보이며...삼국과 고려...조선,청조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 받은 지역으로 보입니다...현해탄 바다길 보다는...북해도를 통해 대륙과 연결됐을 것으로 보입니다...허나,그들의 임란 전후부터의 행각은...철저히 왜놈들의 수장였으며...근대ㄲ따지 계속 왜족들과 혼혈이 됐다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