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26.4.19(일) 09;30-
★코스;경의중앙선 응봉역-중랑천- 우이천-4.19민주묘지역-우이천-월릉교-태릉입구역-화랑대역-서울여자대학교-태릉선수촌-
삼육대학교-담ㅌ터1교차로-담터추어탕-불암천-별내역(44km)
★참가;쉐도우수,홍토마, 아스트라전, 스머프차
대열잔차 춘삼월 라이딩은 4.19 민주묘지를 참배하는데 목적이 있다. 올해가 4.19 혁명이 일어난지 66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이로 치면 66세 할아버지뻘이다. 그당시 우리들은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학년때였다.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3.15부정선거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신문 또는 흑백TV를 통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 3.15 부정선거 직후 얼마 후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전국적으로 시위운동을 촉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4월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직장인과 시민들이 합세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기붕 일가는 4.19 전후로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질때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이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으나 금방 진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밖으로 나가려 하면 건강에 해롭다거나 경호가 위험하다는 핑게로 가두워 두었다.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직전 병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부상당한 학생들을 본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들이 왜 총에 맞았느냐? 내가 맞아 죽었어야할 총을 아이들이 맞았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 모습은 이승만 대통령이 실제로 자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끔찍한 진압이 이루어졌는지 실시간으로 보고 받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민대표 5명과 면담하며 민심을 확인했다. 그리고 방송을 통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86세로 청력이 약해지고 판단력이 흐렸다. 자유당을 지휘하며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정치적 대리인이었던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당시 경무대의 실권자였다. 평생을 독립운동과 건국에 바친 노정객이 말년에 간신배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세운 나라에서 쫒겨난 비극적인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학교수들의 시위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그는 평소 국부(나라의 아버지)이자 지식인들의 스승이라 여겼는데 제자들인 학생뿐만 아니라 동료 학자들까지 들고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연연하지 않았다. 4월21일에는 국무의원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했으며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은 시민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내리며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26일 오전 10시 30분 방송을 통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기붕은 정권 2인자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다.
이기붕은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개인 비서가 된다. 이는 박마리아 여사가 프란체스카 영부인과 친분 덕분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기붕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이기붕은 정치 깡패 이정재를 영입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86세의 고령으로 임기를 제대로 마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부통령이 대통령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는 의미이다. 이기붕은 어떻게든 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성난 군주들은 이기붕의 서대문 저택으로 몰려갔다. 겁에 질린 이기붕은 포천에 있는 6군단으로 피신했다. 4월 25일 이기붕 저택은 완전 붕괴됐고 이기붕은 다시 경무대 별관으로 피신했다. 그 다음날인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틀인 4월 28일 새벽 5시 20분 이기붕이 피신했던 경무대 별관 36호실에서 일가족 전원이 숨을 거두웠다. 육군 소위 이강석이 가족들을 총으로 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강석은 아버지 빽으로 서울 법대에 편입학했으나 학생들이 등교 거부를 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여 결국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재입학했으나 관절염 때문에 중퇴 후 갑종 간부후보생으로 입학하여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기붕이 살던 서대문 자택은 국가에 환수되어 4.19혁명 기념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잇으며 이기붕이 부정축재한 재산은 환수되어 공항대로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4.19혁명은 내전으로 확전되지 않했고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통령을 하야시킨 시민 혁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러한 평화적 접근 방식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열정이 가득한 4명의 대열잔차 전사들은 봄 향기를 맡으면서 중랑천을 따라 4.19민주묘지로 향한다. 홍토마와 아스트라전은 4.19민주묘지 여행은 생전 처음이다. 중랑천은 완연한 봄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연둣빛으로 변해가고 야생화꽃들은 얼굴을 내밀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중랑천 수변은 오래간만에 행차하는 길이라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자교 부근에 파크골프장과 장안교 부근에 육상트렉과 자전거 연습장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파크골프장은 노인들의 천국이었으며, 자전거 연습장에는 40-50대 아주머니들이 코치 지도하에 자전거를 타고 연습중이었다. 중랑천에서 우이천으로 들어서면 철쭉과 영산홍이 수변을 따라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꽃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쌍문교를 지나자 북한산 인수봉(811,1m)이 얼굴을 내민다.
경치가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인증샷을 하고 덕수교에서 4.19민주묘지역과 우이동주민센터를 거쳐 국립4.19민주묘지에 당도하였다. 66주년 4.19기념행사가 종료된 시간이라 4.19혁명 기념탑에서 거수경례와 묵념으로 희생당한 민주열사의 영혼을 달래며 참배하였다. 그리고나서 돌아가는 길에 원점회귀하지 않고 태릉으로 향했다. 쉐도우수의 아이디어다. 화랑대역 부근에서 마땅한 점심식사 장소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할수없이 삼육대학교를 지나 담터1교차로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라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하고 힘은 지친 상태였다.
담터추어탕 식당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가 지난 시점이었다. 메뉴는 추어탕(鰍魚湯)이다. 가을 논두렁의 주인공은 미꾸라지 추어(鰍魚)다. 고기(魚)에 가을(秋)이 들어있다고 해서 추어탕으로 불린다. 추어탕은 단백질과 비타민,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특히 수술환자는 보양식으로 인기다. 추어탕은 통추, 갈추, 튀김 세 종류가 있다. 식사 메뉴는 갈추다. 갈아넣었다고 해서 갈추다. 그대로 넣은 것은 통추다. 추어탕은 들깨를 넣어서 먹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스머프차는 짠음식을 먹지 못해 비빔잔치국수로 대신했다. 식사시간은 항상 수다를 떨기 마련이다.
수다 주제는 요즘 핫 이슈가 되고 있는 삼군사관학교 통합 문제이다. AI에 물어보면 이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동문들로부터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민 여론을 환기시켜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이것이 육사인이 해야할 의무요 책임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불암천을 따라 별내역(경춘선)에서 오후 4시경에 상황을 종료하고 각산진비 하였다. 대열잔차 전사들과 함께 여인동락( 與人同樂)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움이 가득하다. 대열잔차 브라보!
중랑천 자전거길 '튤립꽃길'
청계천 세월교 건너
중랑천으로 진입 직전
중랑천 자전거길
장안교 부근 튤립꽃밭
겸재교 전 쉼터에서 숨고르기
중랑천에서 우이천 자전거길로
철쭉과 영산홍이 우이천 수변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인수봉을 배경으로 인증샷
우이천 자전거길에서 덕수교로 올라서는 중
국립4.19민주묘지 자전거를 목줄로 보초세우고
4.19 기념탑
거수경례
묵념
중랑천 북부간선로 통과중
월릉교로 진입
월릉교
태릉입구역을 지나 화랑대역 통과
옛경의선 철로를 배경으로
태릉선수촌
담터추어탕에서 오찬
대열잔차 전사들
갈추어탕 1인당 13,000원, 비빔 잔치국수 8,000원
불암천
경춘선 별내역에서 상황종료 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