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오일쇼크 닮은꼴? 이스라엘 전쟁에 국제유가 불안 우려
https://www.yna.co.kr/view/AKR20231008050000009
전문가들 "양측 모두 원유생산 무관…직접 영향 제한적일 것"
"이란 등지로 사태 확산하면 유가 100달러선 넘겨 급등할 가능성"
우선 1973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주요 아랍 국가들이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면서 강력한 석유 감산에 나섰지만..
현재 80달러대인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는 물론 그 이상으로 치솟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3차 오일쇼크 오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3102958861
이스라엘 "2단계 전쟁 시작"
네타냐후 "길고 어려운 전쟁"
이란 "레드라인 넘었다" 경고
"최악 땐 유가 250弗 치솟을 것"
이란은 즉각 “이스라엘이 레드라인을 넘었다”며 강력 대응을 시사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신(新)중동 전쟁’으로 비화해
세계 경제에 적잖은 충격을 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란도 강경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29일
X(옛 트위터)를 통해 “시오니스트(유대민족주의) 정권의 범죄가 레드라인을 넘었다”며
“이것이 모두를 행동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석유파동이 부른 물가상승…경제학 흐름도 바꿨다는데
http://teen.mk.co.kr/economy/economy01_01_view.php?c1=2&c2=8&c3=12&idx=76
전쟁으로 인해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70년대 오일쇼크(Oil shock)일 것이다.
당시 배럴당 2.5달러였던 국제유가는 11.7달러로 4배 넘게 상승했다.
1979년에도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석유가격은 또다시 3배 상승했다(제2차 석유파동).
그때까지만 해도 저유가로 인해 값싸게 에너지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던 세계인들은
생활 필수품인 휘발유 가격이 상승하면서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특히 자동차 운행이 필수적이었던
미국인들은 휘발유 소비량을 줄이기가 어려웠고 대신 다른 물품을 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도 오일쇼크로 1980년 물가상승률이 30%에 달하는 등 큰 충격을 겪었다.
당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했던 우리나라는 핵심 원자재인 원유 가격이 올라
비용 상승 압력을 받게 됐고, 기업들은 신규 투자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고용 감소와 불황이 찾아왔고, 온 국민은 동결된 임금으로 높아진 물가를 감내해야 했다.
오일쇼크는 경제학의 조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거시경제학의 주류였던 케인스학파는 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발생할 때마다
경기안정화 정책으로 경기를 회복시켜 왔다.
그러나 오일쇼크로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실업을 해결하자니 물가 상승이 더욱 심해지고 물가를 진정시키자니 실업이 극심해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주장하던
케인스학파로부터 작은 정부와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신고전학파 계열로 경제학의 주류가 이동하게 된다.
대한민국
“주요 자원재를 수입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빈약성을” 가진 나라.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황은 ‘격차’ 문제를 부각시켰고
사회복지와 사회개발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 “석유파동 이후 고도성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고도성장의 부작용 해소를 위해 사회개발과 복지증진에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갔다.
이에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준 연도인 1976년의 예산안에 대해서
여전히 사회개발 및 복지예산의 비중이 낮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대한상공회의소는
경제개발의 결과 격차가 심화되어 사회적 불균형이 확대되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분배 국민경제의 구성에서 피고용자의 보수가
1962년 36.6%에서 1974년에는 36.8%로크게 변화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경제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이것이 노동자 몫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이외에도 대한상공회의소는 농가와 비농가의 격차 및 지역 간 격차 등을 문제로 제시하였다.
제2차 석유파동은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의 4.0%에서 1979년에는 2.9%로 낮아졌다.
물가 면에서는 선진국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0.3%를 기록하였으며,
개발도상국의 경우 32.0%의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OECD 평균 실질성장률은 1978년 4.6%에서 3.2%로 저하되었고
인플레이션도 소비자 물가상승률로 볼 때 1968년 10.2%에서 1979년 13.2%로 높아졌다.
이렇게 되자 각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한 금융긴축을 강화하고
그 정책수단으로 고금리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국제금리도 상승세를 지속하였다.
이와 함께 선진국의 보호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1977~78년 2년간 좁아졌던 석유 수출국과 석유 수입국 사이의 경상 수지 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선진 각국이 수출 촉진책을 채택하고 수입규제조치를 강화하는 등
국제 수지 방어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선진국 간에는 무역 마찰이 심화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한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의 무역 환경은 매우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산유 개발도상국의 경우 대외 채무가 크게 증대되어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개도국에 대해 신용공여조건이 점차 경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1979년 중 세계경제는 석유 가격의 급등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되어
국제교역 환경이 크게 악화되었다.
특히 비산유 개도국의 경우 선진국의 보호주의가 강화되면서
수출 부진과 함께 대외 채무 부담의 증대라는 악재를 맞게 되었다.
또한 석유 가격의 급격한 상승은 국제 통화 금융 시장을 교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1차 산품 시장에서도 영향을 미쳐 가격이 크게 상승하였다.
제2차 석유파동은 1차 때와 달리 한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9년 경제성장률은 상반기까지는 10%이상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하반기부터 국내외 수요가 모두 급속히 둔화되어 6.4%로 낮아졌다.
그러한 석유 가격 등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 등이 요인이 되어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상승하였다.
1979년 4월 17일 정부는 긴축조치를 골자로 하는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을 발표하였다.
이 시책에는 수출지원의 축소, 중화학 투자의 조정, 농촌주택개량사업의 축소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붕괴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 때까지
한국경제는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첫댓글
오일쇼크로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