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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학들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 ➀]
이시영 김창숙 신익희 등 환국 후 연이어 설립
인천시와 하와이 동포들이 세운 인하대 70주년
경희대 뿌리는 무장 항일투쟁 요람 신흥무관학교
성균관‧국민‧건국‧홍익‧단국‧대구‧덕성여대 등
유서 깊은 창학이념…세월 흐르며 퇴색하기도
우리나라 공식 이민사의 출발은 19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22일 121명이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 중인 일본 여객선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이 가운데 신체검사를 통과한 102명이 미국 상선 게일릭호로 옮겨 탄 뒤 이듬해 1월 13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첫 미국 이민자의 대부분은 인천 출신이었고, 인천 내리교회 신도가 많았다. 이곳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 조지 존스가 모집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게일릭호를 시작으로 1905년 8월 8일 입항한 몽골리아호에 이르기까지 이민선들은 56회에 걸쳐 7천여 명의 한인을 하와이에 내려놓았다.
1954년 인하공과대학 개교 당시 대학 입구에 세운 대형 입간판. 오른쪽 기둥에 ‘이 대통령 각하 만세’라고 적혀 있다.
이민자들의 눈물과 염원이 서린 인하대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된 이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인종차별과 향수병을 겪으면서도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푼돈을 모아 독립자금에 보탰다. 중매쟁이를 통해 신랑감의 사진만 보고 만리타국으로 떠난 이른바 ‘사진 신부’들도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하와이 한인 공동체 조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광복과 정부 수립을 거쳐 6·25가 한창인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공과대학 설립을 발의했다. 공업입국(工業立國)의 기치 아래 공학 분야 인재를 기르려는 취지였다.
인천은 하와이 동포들의 고향이자 한국 이민사의 시발점이고, 경인공업지대의 관문이어서 최적지였다. 이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기붕 당시 민의원 의장이 재단법인 인하학원 초대 대표를 맡아 자금 조달과 설립 작업을 주도했다.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설립해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의 매각 대금에다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 국내 독지가들의 지원, 국고 보조 등을 보탰고 인천시가 학교 터(41만4126㎡)를 기증했다.
1954년 2월 5일 학교법인 인가를 받은 뒤 4월 24일 인하공과대학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인하(仁荷)’는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초대 학장으로는 국내 최초의 이학박사인 천문학자 이원철이 취임했다. 오는 24일은 인하대 개교 70주년이다.
서울 종로구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에 있는 신흥대학 터 표지석.
“신생국가 발전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절실”
이승만에 앞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환국하자마자 앞다퉈 대학을 설립했다. 근대 교육에 뒤처진 탓에 국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고, 신생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로 꼽히는 이회영 일가는 막대한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이주한 뒤 1911년 신흥강습소를 세웠다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했다. 이곳 출신들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맹활약한 것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 역할을 했다. 이회영 6형제는 일제의 탄압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리더인 넷째 이회영은 옥사했고 당대 최고 갑부로 꼽히던 둘째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살아서 광복을 본 인물은 다섯째 이시영이 유일했다. 그는 1945년 11월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해 독지가들의 성금을 모았다. 1947년 2월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하고 2년 뒤 신흥대학으로 승격시켰다. 오늘날 경희대의 전신이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설립자 심산 김창숙 동상.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은 1910년 합일합병 후 경학원을 거쳐 명륜전문학교로 개편됐다. 1·2차 유림단 사건의 주역인 김창숙은 이석구의 기부를 바탕으로 성균관 학통 계승을 표방하는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전국의 유림이 성금을 내고 향교들도 토지를 팔아 힘을 보탰다.
국민대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학교다. 1946년 국민대학설립기성회가 발족할 때 회장은 신익희, 명예회장 조소앙, 고문 김구·김규식이었다. 그해 9월 국민대학관(야간부)을 개설한 데 이어 1948년 법인 인가를 받아 주간부 정식 대학으로 개교했다.
경남대도 국민대학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불교 총무부장이던 최범술이 해인사 재산을 기부하겠다며 1948년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신익희 학장과 갈등을 빚어 국민대와 갈라섰다. 1952년 해인대학, 1961년 마산대학을 거쳐 1971년 경남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학교 교정에 설치된 교훈석. 설립자 해공 신익희 글씨체로 ‘이교위가 사필귀정(以校爲家 事必歸正)’이란 교훈을 새겼다. “학교를 내 집같이 사랑해야 하니 모든 일은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홍익대 단국대 국학대의 뿌리는 대종교
건국대 설립자 유석창은 12살 때 만주로 이주해 관화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 유승균을 도와 독립운동 전선에서 활약하다가 1921년 귀국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1931년 민중병원(건국대병원)의 전신인 중앙실비진료원을 세웠으며 1945년 10월 건국의숙을 설립했다.
미국 유학 시절 한국부인회를 조직한 차미리사는 귀국 후 배화학당 교사로 일하며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20년 그가 설립한 부인야학강습소는 근화여학교를 거쳐 덕성여중고와 덕성여대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이름을 딴 홍익대와 ‘단군(檀君)의 나라’란 뜻의 단국대는 민족종교이자 항일종교인 대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흥수 이사장과 정열모 학장 등 홍익대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모두 대종교 지도자들이다. 대종교 총전교를 지낸 이 이사장은 군산의 기업가였고, 정 학장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단국대 공동설립자 장형은 만주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투옥돼 독립장을 받았다. 조희재는 장형과 교분이 깊었던 남편 박기홍의 유지를 받들어 재산을 쾌척했다. 우석대에 통합됐다가 다시 고려대에 인수된 국학대도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 정인보가 정의채의 재산 기부를 바탕으로 설립했다. 정인보 역시 대종교인이다.
이밖에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의 유한대,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한항길(한흥리)의 부천대, 대구에서 만세시위를 이끈 이영식의 대구대도 독립유공자가 세운 대학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가 2020년 4월 16일 덕성여자대학교 창학 100주년을 맞이해 기념우표 63만 장을 발행했다.
족벌 소유로 넘어가며 창학이념마저 지운 대학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학의 주인이 대부분 바뀌었다. 설립자들이 학교 경영이나 이재에 밝지 못한 탓도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념 대결에 희생되는가 하면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인하대는 현재 한진그룹이 사실상 소유하고 있다. 학교법인(정석인하학원) 이름의 ‘정석’은 한진그룹 초대 회장이자 조원태 현 회장의 조부인 조중훈의 호다. 성균관대 재단에는 삼성그룹이 참여하고 있다. 국민대 학교법인 국민학원의 이사장은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의 손자인 김지용이다.
그래도 이들 학교는 뿌리를 인정하고 있다. 설립자 동상이 교내에 세워져 있기도 하고(인하대는 1979년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가 1984년에 철거), 학교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설립 배경이나 취지 등을 소개해놓고 있다.
“인하라는 이름은 인하대가 인천에 위치하고, 당시 하와이 교포들의 도움을 기념하는 역사적 의미에 따라 인천의 ‘인(仁)’, 하와이의 ‘하(荷)’에서 유래했다.”(인하대 홈페이지)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대표가 되었다.”(성균관대 홈페이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한다는 건학 이념으로 국민대학교를 세웠다."(국민대 홈페이지)
그러나 경희대, 홍익대, 덕성여대 등은 운영권이 학원족벌의 손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창학 이념이 역사에서 지워지고 훗날 뿌리 논쟁이 불거져 법정 다툼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 4주 뒤에 후속편이 이어집니다>
출처 :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대학, 재벌·족벌 손에 넘어가다 < 문화 모꼬지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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