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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37-44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37-44 / 인자가 올 때도 노아 때와 같이 될 것이다. 38) 노아 때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갈 때까지 흥겨운 잔치를 벌이며 장가 가고 시집 가고 하였다. 39)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휩쓸려 갈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올 때도 그럴 것이다. 40) 그때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 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 둘 것이다. 42) 그러니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 주인이 언제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리라. 43) 만일 집주인이 밤에 도둑이 드는 시간을 알았다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을 지킬 것이다. 44) 그러니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라. 인자는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고도 없이 올 것이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 재림의 시기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다(37-39) 본 단락은 예수님 재림의 상황을 말하십니다.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때도 노아는 홍수 심판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었습니다. 신앙적이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이었고 육신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불기 시작합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이 경험하게 될 마지막 홍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다”는 말씀은 노아 때나 앞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나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일상의 반복과 무탈, 그리고 계획한 것들이 잘 진행될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없어지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 심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데 몰입되어 있을 뿐입니다(딤후 4:4).
깨어 있으라(40-44) 두 사람이 밭에 있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이 중단되지 않고 성실하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고 해서 일상생활을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받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조건이 데려감을 받는데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조건이 데려감을 받는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해석하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44).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둑이 언제 들어올지 안다면 절대로 도둑맞을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항상 신앙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매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질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일까요?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우리가 죽어야 할 마땅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 삼일 만에 부활하사 승천하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떤 신분이고 어떤 사명과 임무가 주어졌는지 알고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받도록 복음 증거에 더욱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설 교 >
그 때에 두 사람
마태복음 24:36-44 / 석원태목사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당시 돈만 내면 모르는 것이 없이 잘 가르쳐주던 소피스트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저들에게 도덕적 각성을 촉진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천재였습니다. 순결 무욕했고, 솔직했으며, 따뜻한 인간애와 종교심 그리고 위트와 유머감각까지 지니고 있어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들에게까지 철학자 중 철학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 아테네는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는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리에 힘이 없다고 하며 조용히 누웠다. 간수는 그의 발을 세게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없다고 대답했다. 간수는 다리를 눌러보고는 차츰 위로 올라가면서 몸이 굳어진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천을 걷어내면서 “크린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자네가 좀 갚아주게.”라고 부탁했다. 크린톤은 “꼭 갚아 주겠네. 더 할말이 없는가?”라고 답변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응답이 없었다. 1-2분 후 몸이 약간 움직였고, 그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크린톤은 그의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게 했다.’
도대체 소크라테스가 남긴 마지막 말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말입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서 완쾌된 자는 병을 고쳐주는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이 마지막 말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병든 아테네를 치유하다가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아테네가 치유되어서 모두가 착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면 그때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감사의 제물로 닭 한 마리를 바쳐다오.’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유추적 해석을 합니다.
문제의 초점은 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정신적 쾌유를 위해 살다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무도, 그 누구도 소크라테스의 유언대로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쳤다는 기록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어두움은 영원히 계속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불확실한 미래를 남기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을 보십시오. 그는 마지막 감람산 강화에서 개인과 역사의 확실하고 분명한 종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주적 종말의 징조를 예언했습니다(마 24: ). 그리고 그 종말의 대비책을 비유로 교훈하고 있습니다(마 25: ).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은 모든 인류가 알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의 재림 시기 앞에 두 사람, 두 세계의 삶과 종말의 분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Ⅰ. ‘그 때에 두 사람’은 공존공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라고 하였습니다. 41절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두 사람’은 남자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밭에 있다’ 함은 생존경쟁의 현장을 말합니다. 모든 경우의 직장 전선, 노동 전선, 생존 전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밖의 일들도 뜻합니다.
또 ‘두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집안의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두 남자와 두 여자는 똑같은 숫자적 개념을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50% 대 50%라는 뜻도 아닙니다. 함께 섞여 사는 두 세계의 공존공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섞여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1-13),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14-30) 그리고 양과 염소(마 25:31-46)와 같은 경우입니다. 신자로 상징된 나사로와 불신자로 상징된 부자의 경우입니다(눅 16:19-31). 좁은 문과 넓은 문(마 7:13-14), 가라지와 알곡(마 13:24-30)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세계의 공존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사는 세상입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직장을 가지고, 같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차별성이 없는 공존공생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잠자고, 일어나고, 일하는 육신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는 삶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끝나는 그 때까지 두 세계는 공존하고 공생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Ⅱ. ‘그 때에 두 사람’은 분리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41절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 가운데서 중대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1. 그 때 두 공존공생의 삶에는 끝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유한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때’라는 말입니다. 여기 ‘그 때’는 예수님 자신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도 ‘그 때’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마 25:1). 종의 비유에서도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그 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마 25:34).
히브리서 10장 37절에는 ‘오실 이가 오시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0절에는 ‘그 날에 강림하사’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10절에는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인자의 때’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5절에는 ‘주 예수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8, 고후 1:14).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는 ‘마지막 날(끝날)’, 유다서 6절에는 ‘큰 날’, 마태복음 10장 15절에는 ‘심판 날’, 로마서 2장 5절에는 ‘진노의 날’, 에베소서 4장 30절에는 ‘구속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존공생 하는 시간이 끝나는 날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섞여 사는 때가 끝나는 날입니다. 바로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작정해 놓으신 크고 중한 비밀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36, 막 13:32). ‘두 사람’의 세계는 ‘그 때’, ‘그 날’, ‘그 시간’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2. 그 때에 두 사람은 분리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또 한 사람은 버려 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다 현재형으로 확실한 미래사를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데려감을 당한다’는 뜻은 슬기로운 처녀가 예비하였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경우입니다(마 25:10). 충성된 종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경우입니다(마 25:21). 오른편에 있는 양이 영생에 들어가는 경우입니다(마 25:33, 46). 바울의 영감의 표현대로 하면 잠자던 무덤에서 일어나 생존자들의 변화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림을 당하여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경우를 말합니다(살전 4:16-17).
‘버려 둠을 당한다’는 뜻은 문이 닫혀 혼인잔치에 들어갈 기회를 놓쳐버린 자의 경우입니다. 미련한 처녀의 경우입니다(마 25:10-12).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김을 당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의 경우를 가리킵니다(마 25:30). 염소로 비유된 불신자가 영벌에 들어가는 경우를 가리킵니다(마 25:46).
3. 그 때에 그 분리의 기준이 예수 신앙과 불신앙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확실한 진리는 믿는 자는 영생,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불신자에게는 멸망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16, 18).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불신자는 사망의 부활,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요 5:24-29). 이것은 사실상 기독교의 요체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버림을 당한 것은, 저들이 예수를 불신앙하였다는 단 한 가지의 이유뿐입니다.
4. 그 때 두 사람의 삶의 목적이 달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생을 받았습니다. 같은 장소와 시간을 받았습니다. 같은 노동의 재능을 받았습니다. 같은 밭과 같은 매라고 하는 재원과 노동의 수단을 받았습니다. 결코 밭에서 일하고, 집에서 매를 돌리는 것이 죄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축복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짓는 문화생활을 하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생존의 목적과 의의와 가치와 내용과 방향이 어디 있었는가가 중대합니다. 인생에게 주어진 온갖 유의 생존 수단 그 자체에는 반드시 목적이 수반됩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살아가는 생존의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주를 위하여 밭을 갈고 매를 돌렸습니다. 반대로 또 다른 한 남자와 여자는 자기를 위하여 아니면 맹목적으로 무의미하게 밭을 갈고 매를 돌렸습니다. 노아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도 그 시대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옷 입었습니다.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주를 짓는 일을 자신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와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반대로 그 시대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던 것입니다. 한편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했습니다. 또 한편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했습니다(요 6:27). 예수를 믿고 사는 그 자체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은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고, 밭을 갈고, 맷돌을 돌렸습니다. 또 한편은 주를 위하여 밭을 갈고, 맷돌을 돌렸습니다(롬 14:6-8). 속이 달랐습니다. 내용이 달랐습니다. 목적이 달랐습니다. 우리 속담에 ‘비둘기 몸은 산에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로 신자들은 몸은 밭에 있고, 손은 맷돌을 붙잡고 있어도 그 삶의 내용과 목적은 주를 위함에 있습니다. 같은 일에 공존공생 하면서도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용적 차별의 삶입니다. 목적적 차별의 삶입니다.
5. 그 때에 두 사람의 결국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 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당하는 그 때의 사건은, 전혀 두 사람 자신의 주장함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전혀 피동적이 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당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 둠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당함입니다. 피할 수 없는 당함입니다. 지연할 수 없는 당함입니다. 당연한 당함입니다. 필연적인 당함입니다. 그 때 역사의 현장에 나타나신 주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만유의 주이십니다. 자신의 약속대로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실 분이십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으로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분이기 때문입니다(마 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락한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그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확실하고, 현재에도 확실하고, 미래에도 확실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미래인 종말과 역사의 미래인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 너무나도 확고부동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영존하고, 자신이 전지하고, 자신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신 말과 행동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전 자연계에 이변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안에 거짓 그리스도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도 세계적인 복음 운동의 종말선교가 땅끝까지 전개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자리잡고 있는 교회는 그 때 두 사람 중에 속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역사는 멈추지 않고 그 날 그 때를 향하여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탁은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43)고 하였습니다. 각성하는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각성의 삶이 열심 있는 독경, 예배를 위한 주일성수, 온전한 십일조, 생활에서의 설교체험, 끊임없는 가정예배, 힘쓰는 기도와 전도, 찬미와 감사로 펼치는 기쁨, 진리의 사자들을 양성하는 귀한 신학교 운동, 주의 뜻에 적중하는 마지막 세계선교운동, 마지막 진리운동의 보루로 받은 새 성전 헌당운동인 것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 나은 미래지향적 축복의 약속이 아닌가! - 아 멘 -
깨어 있으라!
마 24:37-51 / 박덕기목사(송정중앙교회)
하나님께서 새 해를 주신 의도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분명히 무엇인가 새로운 각오,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래서 내 인생이 진보하고 신앙이 성장하라고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새 해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각오와 결심은, 이제껏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앙생활부터 바로 해보자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기본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건축에서 기초가 없이 어떻게 건물이 세워지겠으며, 학문에서 기초가 없이 어찌 더 지식의 진보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본은 힘이 세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새 해에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더욱 힘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몇 가지 꼭 갖추어야 할 성도의 기본생활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1)성수주일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 유치원 단계, ㄱ.ㄴ 단계는, 주일을 지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눅 14:28-30절에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집을 짓는다고 하면서, 일 년, 아니 3년 5년이 가도 기초도 제대로 쌓지 못하고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비웃지 않겠습니까?
2) 온전한 십일조 생활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회심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심령의 회심이고, 둘째는 그의 돈지갑의 회심이다.”고 했으며, 웨슬레는 “한 인간 중 회심해야 할 마지막 부분은 그의 돈지갑이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의 크리스웰 목사님은 말하기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거두어 가실 때, 그 돈이 소리를 지르면서 나에게 고통을 주고 도망간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새 해에는 모두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여서, 병원에다 돈 갖다 주지 않는 평강의 복을 받으시고, 터진 웅덩이 파지 마시고, 하는 일마다 번성하고 창대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전도생활입니다.
어떤 날 인도의 스테판 닐 주교가,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서류를 내밀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대주교는 서류를 옆으로 밀어 놓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전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10년 전입니까? 5년 전입니까? 3년 전 입니까? 작년에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한 적이 있습니까? 금년에는 내가 한 달에 한 명, 혹은 일 년에 5명 또는 3명을 반드시 전도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시고, 열심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4)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주님의 명령은 어떤 그리스도인도 거역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든지 보내든지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몇 천원 부스러기 돈으로 형식적인 선교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마음을 담아서, 힘껏 선교헌금에 동참하여, 보내는 선교사들이 되시고, 큰 상급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성경애독 생활입니다.
육신의 양식은 하루 세끼 잘도 챙겨 먹는데, 영혼의 양식인 성경 말씀은 일주일 내내 한 장도 읽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건강의 척도는 식욕이고, 영혼의 건강의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 식욕입니다. “성경책이 더러우면 마음이 깨끗하고, 성경책이 깨끗하면 마음이 더럽다”는 말도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 김현준 장로님은 하루 종일 서서 힘들게 일하고, 밤늦도록 성경을 읽어서 1년 동안 12독을 했다고 했지요. 우리 모두 큰 도전을 받아서, 새 해에는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최소한 성경을 1독 이상하시기 바랍니다.
6)기도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도 같습니다. 호흡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호흡을 통하여 탄산가스를 배출하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하여 죄를 토해내고,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을 통해 응답을 받고,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드리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7)가정예배 생활입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 한 자녀가 있어, 가을 밤 고요해질 때, 그들 세 사람이 등불을 둘러앉아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이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가정들이 무참히 붕괴되는 이 시대에, 가정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이 견고해지고, 임마누엘의 은혜를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감사가 넘치고, 화목하고 성결한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올해 다섯 살 된 제 손자가 젓가락질을 하는 것을 본 아내가 “와 우리 주경이 젓가락질도 잘하네.”하고 놀라니까, 녀석이 하는 말이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고 했습니다. 제 손자의 말을 인용해서 여러분에게 물어볼 때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수주일 하십니까? 온전한 십일조생활을 하십니까? 일 년에 한 명이라도 전도하십니까? 선교헌금에 힘껏 동참하고 계십니까? 성경애독생활을 하십니까? 기도생활을 하십니까? 가정예배를 드리십니까? 무엇이든지 기본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본이 가장 힘이 세다고 했습니다. 2013년 새 해에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꼭 이 같은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실천해서, 신앙의 큰 진보와, 영육간에 큰 축복을 받게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 24장은 구약의 다니엘서와, 그리고 신약의 요한 계시록과 함께, 종말에 대한 아주 귀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사관이라고 했습니다. 직선사관이란 한 해의 시작이 있는가 하면, 또 한 해의 끝이 있듯이, 역사는 시작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끝이 있고 종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의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지 2천년이 넘었고, 그래서 지금은 말세지말 이라고 하는데, 곧 말세 중에서도 끝자락에 와 있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가 말세라는 말은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불신 세상 사람들까지도 이 시대를 가리켜 ‘말세다 말세!’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말세의 현상과 징조들은 어떠한 것들일까요? 1)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출현할 것이다. 2)민족과 민족이,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3)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4)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5)복음이 온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이다. 6)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이다. 7)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 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말세의 징조가 모두 성취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세상 역사는 끝이 오는데, 이것을 가리켜 대종말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대종말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종말이란 역사가 정점에 이르러 죄와 악이 청소되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과 창조 성업이 완성 종결됨으로서, 생의 질이 전혀 다른 새 시대가 와서, 인간은 하나님의 불사의 생명에의 참여로, 피조성의 혼란과 한계를 벗고, 다른 피조물의 세계에도 죄와 적대감의 제거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 임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시는 날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소망스럽고 대망이 되는 날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믿고, 그 날을 대망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성경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문제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 준비는 곧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지말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님께서는 미리 예견하셨습니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대홍수 심판이 임박한 순간까지, 세상 것에만 취해 있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역시 사람들은 그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인간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일들입니다. 따라서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 외에,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즉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심판이 있으리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등, 식욕과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하나님과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물처럼 땅의 것에만 관심을 쏟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모두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세상은 어떠합니까? 어느 일간지에 어떤 작가가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는 제하에, 이러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눈을 떠보면 매일 생겨나는 것은 레스토랑과, 골프장, 러브호텔 뿐,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돈과 섹스에 관한 이야기들뿐, 참으로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세상 종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고, 그 징조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오직 세속적인 욕구를 채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날이 순식간에 임할 때, 다 멸망하여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형편이, 노아 때와 같을 것이라는 말씀은, 홍수 심판 당시, 노아의 여덟 식구와, 세상 모든 인류의 분리가 있었듯이, 마지막 날에 최종적인 분리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농부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듯, 그리고 어부가 그물에 있는 고기를 좋은 고기와 쓸모없는 고기로 분리하듯, 구원받는 사람과 버림받을 사람으로 영원히 분리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분리에 의한 양극화 현상은, 지금 세상에서의 양극화와는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에 떨진 이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고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괴도 루팡 같은 도둑이 아니고서야, 예고하고 찾아오는 도적은 없습니다. 도둑은 항상 갑작스런 순간에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역시,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 순간에 돌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 보면, 깨어 있으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성경은 성도가 세상의 향락과 유혹의 사조에 빠진 생활을 잠자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눅 21:34-36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각성하여 깨어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래 전 옛날이야기 입니다. 어떤 동리에 한 바보가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돈을 회계할 때에는, 틀림없는 바보였습니다. 어느 해 여름에 갑자기 참외 장사를 해보겠노라고 아내에게 졸라댔습니다. 아내는 성화를 견디지 못해서, 아끼고 아끼던 무명 한 필을 농 안에서 끄집어내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둘러매고 아침 일찍 장으로 가서, 그날 시세에 비해 훨씬 싼 값인 엽전 석 냥에 팔았습니다. 농촌에 사는 가난한 사람으로 한꺼번에 돈 성냥을 받아들고 보니, 너무도 기뻐서 입이 쫙 벌어졌습니다. 싱글벙글하면서 참외 파는 데를 찾아갔습니다. 참외를 파는 장사꾼이 한 개를 썩 베어서, 사러오는 사람들에게 한 조각씩 맛을 보라고 주었습니다. 한 조각 받아서 입에 넣어보니, 아 어찌나 달고 맛이 있는지, 과연 속된 말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참외 장사가 달라는 대로, 한 개에 서푼씩 주고 백 개를 샀습니다. 자루에 넣고 멜빵을 해서 등에 걸머지고, 이 십리 가량 되는 참외가 좀 덜 나는 장거리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여름날 해가 높이 떠올라, 찌는 듯이 무더웠습니다. 백 개를 넣은 참외 자루를 지고 가다보니, 배도 고파오고, 땀이 비 오듯 했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있는 큰 나무 밑에 앉아서, 짐을 옆에 놓고 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외 한 개를 끄집어내어 먹어보니, 어찌나 달고 맛이 있는지, 한 개만 먹고는 견딜 수가 없어 또 한 개, 두 개 먹으면서 독장수셈을 했습니다. 참외가 많이 나는 지방에서 한 개에 서푼씩 주고 샀으니, 참외가 적게 나오는 지방에 가면 적어도 여섯 푼은 받을 거야. 그러면 5 6은 삼십이니, 60개만 팔면 본전이 된다. 첫 장사이니 본전이나 할 셈치고, 참외나 실컷 먹어 두자 하면서 또 몇 개를 먹었습니다. 남은 참외를 지고 가다가 또 쉬면서 먹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그만 40여개나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본전 할 60개만 지고 가니, 짐도 가볍고 배도 부르고,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가 퍽 지혜 있는 사람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시장을 거의 다 가서 좋은 나무 밑 그늘에서 한 번 더 쉬었습니다. 쉬는 동안에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쁜 사람이 지나가다가 낮잠 자는 것을 보고, 그 참외 자루를 송두리 채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한참 자다가 깨어 보니, 옆에 놓았던 참외 자루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두 손으로 허벅다리를 치면서 바보가 하는 말이 “야 이 도적놈아, 네가 참외 자루를 가져가기는 했다마는, 너는 헛수고 했느니라. 왜냐하면 利난 것은 내가 벌써 다 먹어 두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본전이 모두 없어진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利난 것은 자기가 벌써 먹어 두었다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계산 방법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매력이 있고, 죄악에는 참외처럼 얼마간의 달콤함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빠져 취생몽사하다가 보면, 여러분의 귀중한 영혼을 마귀가 훔쳐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얼마간의 재미를 맛보았으니, 본전과 같은 영혼을 잃어 버려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얼마간의 쾌락을 맛보았으니, 영원한 지옥형벌의 고통으로 떨어져도 괜찮은 것입니까?
노아와 롯의 시대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것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팔고 하는 일상생활을 해서가 아니라, 그것 이상은 아무것도 없고, 영적 각성 없이 타락한 문화에만 취생몽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 세상에 취하여 살면 아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과 삶의 포커스를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계 16:15에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저버린 자는, 주님의 재림 시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는 것 같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 4:4에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만일 남편 몰래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발각된 아내가 있다면, 무슨 낯으로 남편을 대하겠습니까?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간음을 하다가 발각된 남편이 있다면, 무슨 낯으로 아내를 대하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짝하고, 세상과 벗이 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 시에 간음하다 발각된 아내보다 더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대로 살 것이 아니라,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평북 선천 모 교회에 이 장로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가세가 극빈하였으나, 가난과 싸워가며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였습니다. 아침이면 새벽 기도를 빼놓지 않고,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 헌금을 지성으로 바쳤으며, 교회를 위하여 그야말로 열심히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게 임하여 사업이 잘 되어 큰 부자가 되었고, 슬하에 아들 오형제를 두게 되었으며, 신앙이 독실하여 마침내 장로 장립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예수 믿고 예수가 밑천이 되어 영육 간에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이 장로는 사업상 인천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주일이면 꼭 본 교회에 돌아와서 지켰습니다. 그런데 차차로 한 번 인천엘 가면 2. 3개월에 걸려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이 독실한 장로인 만큼, 손톱만치도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숭실 전문학교에 축구 선수로 재학 중인 몸이 남달리 건강한 장남이, 겨울방학에 집에 와서 몇 날 감기로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마음이 몹시도 아파 이 장로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가정적으로 무슨 벌 받을 일이 있기에 그렇지, 그렇게 건강하던 자식이 감기로 몇 날 만에 죽을 수 있나요 하니, 이 장로는 ‘글쎄요’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부인은 의아심을 가지게 되어, 이 장로의 뒤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지 못할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인천에 첩을 두어 한 살림을 차려 놓고, 죄악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이 장로를 붙들고 “이렇게 배은망덕하고야 어찌 살 수가 있단 말이요? 앞으로 더 큰 벌을 받기 전에 회개하고 첩을 버리라.”고 강권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가정에는 불행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으니, 둘째 아들은 기생에게 미쳐 다니다가, 어떤 백만장자의 독자에게 사랑을 빼앗기자, 질투 끝에 남의 외아들을 죽이고 상해로 도망을 쳤습니다. 셋째 아들은 폐병으로 죽고, 넷째 아들은 절도죄로 철창신세가 되었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백만장자는 자식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상해로 자객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자객들은 찾지를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주 선경 어느 여관에 이 장로가 묵고 있는 것을 알고, 둘째 아들 대신 아버지인 이 장로를 죽였습니다. 또한 어느 날 동네 애들이 공기총으로 새를 쏜다는 것이,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 막내아들 눈을 쏘아 한 눈이 멀어 멀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죄 값은 이렇게도 비참하게 한 가정을 망하게 한 것입니다. 과연 죄 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살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세지말을 당한 우리들에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로마 제국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시대의 일입니다. 베스비우스 산 중턱에는 2,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주후 63년 어느 날 한 노인이 나타나 마을 주민들에게 외쳤습니다.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할 것이오. 살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이곳을 떠나 이사하는 것이오.” 그러나 아무도 이 말을 믿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주후 79년 8월 24일 베스비우스 화산은 폭발하였고,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말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역사의 마지막 날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역사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그 재림의 시간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한 자매는,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 때에, 신발과 회중전등을 침대 밑에 놓아둔다고 합니다. 그녀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만약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집을 떠날 준비를 항상 해두고 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는 말합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창문이 부서지고 전기가 나가지요. 그러나 신발이 있으면 깨어진 유리 위를 걸을 수 있고, 회중전등이 있으면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가 있어요. 나는 그것 없이는 절대로 잠자리에 들지 않아요. 언제나 준비를 해놓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깨어 준비를 하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삶에만 취생몽사 하지 말고,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믿음으로, 항상 깨어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끄럼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신랑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마24:42-51 / 송정환 목사
여름이 한창이라 많이 무덥습니다. 하나님 앞에 최고의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를 믿음으로 주시는 의의 옷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시 간편 복장 가능합니다.
여름철 더위의 필요성 ? 과일 곡식 익어감, 여름철 무더위 한 철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등, 사람도 여름 한 철에는 땀을 흘려 신진대사가 잘 되어야 건강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같이 따라합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주인이란? 대상이나 물건등의 소유자, 임자를 일컫는다.
종 - 개인의 자유나 소유가 없이 오직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자이다.
예전에, 남의 집에 딸려 천한 일을 하던 사람.
남에게 얽매이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청지기 ? 주인의 소유를 맡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고 활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처럼 주인은 대상이나 물건의 소유주로서 자유의지를 행할 수 있는 자이다.
주도적으로 인도하고 다스리며 결정하는 주체가 주인이다.
그렇다면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 진정한 주인인가?
우리는 먼저 현실적으로 나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는 자는 바로 자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내 인생에 주인은 자기 밖에 없음에도 때때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을 따라 남의 영향을 받아 좌우로 흔들리며 결과에 대하여 책임은 지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며 사는 사람도 많다. 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주인으로 삼거나 돈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데 이런 자를 수전노(守錢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사회적인 명예나 권력에 목을 매고 사는 사람도 온전히 자신이 주인노릇 못하는 자들이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비하는 삶
마 24:37-44 / 피종진목사
‘예비’(헤토이모스)란 말은 ‘무장하다, 준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자신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고, 또 사회에 유익한 인물이 되기를 원한다면 날마다 우리는 예비하는 삶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 향락에 빠져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면서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육적이고 세속적인 일에만 몰두하여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준비하지 않고 살다가 멸망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4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비하는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예비하고 살아야 될까요?
첫째, 하나님 만나는 일을 예비하고 살아야 됩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 4:12)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신명기 4:29에 보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 만나주신다고 했습니다. 육체가 생존하기 위해서 심장에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어야 하듯이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할 때 영적으로 깨어있게 될 줄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계속 기도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여러분이 고민하는 문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 위험한 일들, 슬프고 외롭고 고독한 것들이 다 해결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악한 귀신들 앞에 시달리고 두려워하는 자들도 하나님 만나는 순간에 마음이 평안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29:13에 보면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사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조금만 지위가 높아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심으로 찾기만 하면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일을 예비하고 살면 여러분의 모든 소원이 다 성취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예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릇을 쓸 때 깨끗한 그릇, 견고한 그릇, 혹은 크기에 맞는 그릇을 선택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쓰실 때에 준비된 것만큼 쓰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①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마음이 깨끗해지기를 바랍니다. 성품도 온유해지기를 바랍니다. 말도 은혜롭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의 더러운 죄악을 회개하여 마음이 깨끗해지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됩니다.
②순종하는 그릇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말씀하셨을 때 어디로 가야할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에 그도 그물을 즉시 버려두고 순종했습니다. 그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자기 직업을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③감사하는 그릇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감사의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넘칠 때 좋은 일이 있게 됩니다.
셋째,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언젠가 종착이 옵니다. 그 종착은 반드시 한 곳밖에 없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길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야 됩니다. 양다리는 걸칠 수가 없습니다. 믿는 자 천국, 불신자 지옥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 중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천국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다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한 세계입니다. 항상 하늘 나라를 소망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속담 중에 ‘비단옷을 입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누더기옷을 입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천국은 기쁨의 복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4:1~3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했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요 1:1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요 3:5)으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상급을 받도록 예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얻도록 달음질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7,8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하늘에 있는 상을 기뻐했고, 또 이 상이 바울 자신에게뿐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 이 상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이 상을 얻도록 힘쓰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핍박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5:10~12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행한대로 거두게 하시고, 심은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과 성품을 다하고 전심으로 항상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 만나는 일을 예비하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 즉 깨끗한 그릇, 순종의 그릇, 감사의 그릇이 되도록 예비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하나님의 상급을 받도록 죽도록 주의 일에 충성함으로 주께 영광 돌리는 온 성도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은 죄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의 진리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또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분입니다.습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
시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세요.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큰 복을 받은 인간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고통과 죽음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죽으시므로 우리 죄를 단번에 영원히 사함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로 위치가 회복되고 죽음을 이기고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 아들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무슨 값을 치루었습니까?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보세요 흠도 점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며 아울러 나를 종의 자리로 청지기로 낮추고 오직 주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을 나의 주인, 주님이라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제 우리는 입술의 고백만 주님이라 부르지 않고 내 삶의 현장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 증거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옛사람 자신은 죽은 자라고 그리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이제부터는 주님만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 다음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나 뜻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이면서도 너무 중요합니다. 성경일독을 꼭 도전하십시오. 주님 뜻을 알기 원합니다, 라는 소원을 품고 주보에 나오는 매일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을 말씀이 어디입니까? 이사야 56-59장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대충 읽어서는 의미를 잘 몰라요. 그래서 매일 읽는 성경의 핵심을 정리하여 자료를 홈페이지에 올려놓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기 위해서 꼭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정하신 날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출 31: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행 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안식일이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부활하신 날을 안식후 첫 날이라하여 기념하면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 날을 주님의 날로 구별하여 예배하며 봉사하며 전도하며 심방하면서 구별하여 지켜야 합니다. 구약 안식일을 구별하여 잘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사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사 58: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주님의 소유를 인정하고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말 3: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것, 주님의 것을 도둑질하여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득의 십일조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엡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러기 위해 성경을 읽고 범사에 기도하므로 주님의 뜻을 묻고 의논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여러분 성경과 설교를 통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전2020입니다. (놀이터 공사 사진)
자기 인생 항로의 최고 결정권자가 누구인가? 세상 사람인가요? 세상의 기준인가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입니까? 당연히 주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따라가고 대중 미디어 방송과 신문이 그렇다고 하니 따라가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이 그렇게 가르친다고 그것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세상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 것이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입술로 주님이라고 불러도 주님은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입술로, 마음으로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생활은 내 마음대로 세상의 기준대로 결정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데 어찌 주님이 인정하시겠습니까?
혹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복음을 듣고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므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그 마음의 진실과 고백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당시는 로마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한 시대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첫째는 유대사회에서 배척과 고립을 당하고 또 로마당국에 발각되면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 자라고 하여 총독에게 끌려가 심문과 심하면 화형을 당하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임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으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라는 심정과 고백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오늘 이 시대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긴다고 해서 어떤 제제도 피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된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상은 나여! 나여! 하고 자기가 주인 되어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분명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는 기쁘나 슬플 때나 주님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살아도 만사가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와 희생, 고난과 핍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종 결정권은 주님께 맡겨야 진정 주인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오늘 여러분의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십니까? 범사에 주님의 뜻을 따라 순응하려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속는 것입니다. 주님 편에 속하지 않으면 세상 임금되는 사단에 속한 것이 되고 맙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주인은 주님이십니까? 사단입니까?
짧은 내 생각만 앞세우지 말고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자. 짐승도 주인을 알아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역하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탄식하며 책망하십니다.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오늘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엘리야의 외침을 듣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