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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첫 시집 ‘할미꽃과 중절모’를 대책 없이 내놓고 18년만이다.
돌이켜 보면 ‘느림’이 아니고 ‘게으름’이었다.
먼저 가신 오라버니(시인 송유하)께는 미안하고 송구하다.
나만 살아서 있어서. 이 책은 너무 사랑한 어머니와
너무 미워한 아버지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바친다.
2011년 겨울 송영숙
지상에서 가장 슬픈 교향곡 - 우대식 시인
송영숙 시인의 시집 <벙어리매미>를 앞에 두고 보니 그녀의
오빠인 송유하 시인의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서른 후반에 세상을
떠난 쓸쓸했던 시인 송유하. 단 한 권의 시집조차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떠난 그의 유고시집 제목은 <꽃의 민주주의>이다.
이런 세상에, 꽃의 민주주의라니. 아름답고도 슬픈 이 땅의
역사를 그는 기록하였다.
빙폭(氷瀑)의 탄압을 견디다 견디다가/ 아! 소리치며
일어서는 것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신비로운
약속에 의해/ 일제히 궐기하는 의지 하나로, 너는
꽃이다
- 꽃의 민주주의
세상을 타계한 송유하 시인에 관한 글을 쓰다가 송영숙 시인을
만난 것이 약 칠년쯤 되었다. 지금의 대전 터미널 근처
조용한 술집에서 송유하 시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고,
그녀는 아마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그런 인연으로 가끔씩
연락이 오갔고 최근에 송유하 시인의 <꽃의 민주주의>를
재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송영숙 시인은 1993년에 첫 시집
<할미꽃과 중절모>를 낸 이후 18년 만에 이번 시집을 출간한다.
어쩌면 ‘시와 절연한 것은 아닐까’, ‘지긋지긋한 시와 결별했나
보다’라고 생각할 즈음 출간되는 이 시집은 자신에게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준다.
이 시집의 제목 <벙어리매미>는 저간에 놓인 그녀의 삶과 문학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목청이 찢어지도록
여름을 노래해야 하는 매미가 벙어리라는 역설적 진술은
시인으로서 그녀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리적 시간은 그냥 흘러갈 뿐이다. 인간을 고무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내면의 시간의식이다. 그녀의 내면에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조용한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시집을 읽으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치열한 자의식의 갈등이었다. 예술에서 자의식의 갈등은 자아를
편안한 상태가 아닌 괴로움의 지경을 몰고가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 쉽다. 송영숙 시인의 시에서도 자아에 대해 끝없는 물음을
제기하며 초극의 지경에 도달하고자 전력을 다한 시를
여러 편 만나 보았다.
전생에 나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다섯 악사 중 배소를
불던 주악상이었다
어쩌다 속 깊던 한 사내를 몰래 가슴에 두었다가
그를 위해 연주한 것이 발각되어 쫒기듯 나와 지금
여기 허름한 나무의자에 기대있는 것이다
그러다 단 한 번도 나팔을 불어본 적 없는 나팔꽃
하늘 한 번 올려다 본 적 없는 엔젤트럼펫처럼 꿈인 듯
생시인 듯
슬퍼도 소리내어 울 수 없게 된 벙어리매미
사랑에 눈멀었던 악사들이 인연의 줄을 끊고
소리를 허락받는 날이면
사람들은 지상에서 가장 슬픈 교향악을 듣게 될 것이다
당신은 모른다 내가 밤낮 잘도 웃지만 돌아서서
한 번씩 크게 울기도 한다는 것을, 울면서 새끼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피가 나게 파보기도 한다는 것을
- 벙어리매미
시집 제목이기도 한 이 절창의 시편을 개인적으로는 송영숙 시인의
시론으로 읽었다. 한 사내를 위해 연주하다 쫓겨난 ‘배소를 불던
주악상’은 생의 秘意를 훔쳐 보다가 절망한 시인의 초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슴을 울리는 것은 “지금 여기 허름한 나무의자에
기대있는” 시적 화자에 관한 상상이다. 쫓겨난 주악상은 연주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허름한 나무의자에 앉아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런 의미로 “슬퍼도 소리 내어 울 수 없게 된 벙어리매미”는
시적 화자의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연주할 수 없다. 소리낼 수 없다.
깊은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운명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소리가 가능한 시간은 ‘인연의 줄’을 스스로 끊었을 때이다.
인연의 줄을 끊는다는 것은 종교적 성찰과도 같은 인고의 세월을
통과했을 때 가능하다. 그녀에게 시는 이렇듯 범상치 않은
존재론적 고민에서 비롯되고 있다.
연주가 허락되었을 때 “지상에서 가장 슬픈 교향악”이 울려 나온다.
자신의 온 존재가 울면서 빠져나올 때 그 울림은 바로 슬픔이다.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는 귀를 씻고 들어야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범상한 노래가 아닌 까닭에 스스로 피가 나도록
귀를 파보는 것이다. 시를 쉽게 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듯 삶에 대한 치열한 의식은 그녀가 생의 기원을 온전한
완성태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파열과 불완전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개 인간은 일상에 주어진 불완전성을
성긴 그물망으로 감싸안은 채 스스로 위로하며 평정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많은 시편들은 그러한 파열의 불편함을
직시하고 있다.
아들아 나 죽거든 갠지스 강으로 데려가다오
그 강가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장작더미에 나를 던져
한 점 티끌도 남지 않게 불태워다오
그리하여 이 땅에서 가장 먼 곳에 가 닿아 다시 너의
가난한 어머니가 되는 일이 없게 해 다오. 미안하다.
- 나무십자가, 부분
이 시 첫 구절의 진술처럼 시적 화자는 ‘바닥’을 보고자 한다.
바닥은 일상의 시선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그녀는 운명처럼 주어진
이번 생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자식과의 인연마저도
끊어버리고 싶어한다. “가장 먼 곳에 가 닿아 다시 너의 가난한
어머니가 되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은 슬프다.
이것은 인간 밖의 일이기에 자신의 의지로 성취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의 대화는 인간과 인간의 대화가 아닌 독백
혹은 보이지 않는 신과의 대화이다.
“눈 멀고 귀 먹게 하는 나는 악의 꽃”(- 능소화, 부분)이라는
선언은 왜 그녀의 대화가 독백 혹은 보이지 않는 신과의 대화인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현실에서 그것을 치료할 방법은 없다.
“천수보살 천 개의 손으로/ 가슴을 쓸어줄 때까지”(능소화 부분)
상처는 더 깊어진다는 점에서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지상의
노래는 아닌 것이다. 치열한 의식의 저변에 놓인 상처를 확인하는
일은 그녀의 시의 원적(原籍)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서 도드라진 소재 가운데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불우한 가족사이다. 그로 인한 상처는 근원적인
슬픔으로 작동하면서 현재의 삶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엄니 목구멍에 거머리가 산단다
시앗을 보느니 차라리 비켜주리라 다섯 남매를 맨
치맛폭에 폭 싸안고 나와 고생 지지리 하다 어느 날
남의 집 수도꼭지에 입 대고 물배 채우신 날
그날부터 엄니 목구멍에 거머리가 붙었다며 손가락
구겨넣었다 뺐다 덜컥 주저앉아 갱신을 못하셨다.
그걸 뭐라고 비켜나와선 우리 엄니는 사랑을 한 거다
꽃잠 자고 첫길 다녀온 기억만 안고 가신 엄니 혈관성
치매 알츠하이머는 얼마나 고마운 병인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 비켜서 살아온 세월 오십인데 다 잊고는
‘조금만 기둘려라 기둘리다 보마 그것 갈기다
와 안가겠노’하셨다며 홀홀 웃는데 나는 피가 거꾸로
솟아 그 검정 기와집 한 방에 후르르 불 싸지르고만
싶었던 거다. 그걸 사랑이라고
- 오래된 관계, 일부
어머니는 평생을 인내하며 살아온 여인이다.
아버지로 부터 버림받은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키우면서도 끝내
남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슴에 한의 덩어리를
고스란히 담고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어머니가 앓았던
치매, 알츠하이머에 대해 “얼마나 고마운 병인가”라는 역설적
진술로 드러난다. 망각의 병이 오히려 고맙다는 말은 신산한
어머니의 평생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끝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버지의 첩이 곧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의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적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어머니가
버림받았다는 사실 보다는 어머니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치매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적 화자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그로 인한 상처를
처절하게 확인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될 뿐이다.
“도덕이니 계율이니 들어도 못 본 것이/ 고마워도 고맙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그래도 주인은 끔찍이 섬긴다는
여자/ 꼭 푸들같은 것이”
- 아버지의 여자, 일부
아버지의 첩에 대한 부정적인 각인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정비례하는
까닭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 전반에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 또한 함께 깔려 있다.
“아버지의 둘째여자가 죽었다/ 한 쾌에 그녀를 보낸 건
무얼까/ 하늘이 한꺼번에 흔들했다/ 그녀를 너무 많이
미워했던 건 아닐까”
- 바람의 말, 일부
아버지의 첩은 시적 화자에게는 여전히 3인칭의 여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연민을 보이는 부분이나
심지어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는
진술은 아버지의 첩을 넘어 여자로서의 교감까지도 보여준다.
상처와의 화해는 날이 선 의식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나이 오십되면 공들이지 않아도 경지에 오르나보다 아들을
키워보고 나서야 세상의 남자를 아버지를 곱게 부르게 되었다”
(-오래된 관계, 일부)는 고백은 그러한 심리의 변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어쩌면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의 첩 모두
그녀에게는 연민의 대상이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불우한 가족사는 그녀에게 상처 그리고 증오를 넘어 연민에 이르는
먼 길을 돌아오게 했다. 치열한 자의식과 연민에 이르는 길에
불교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도대체 왜 이런 것인가?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야 사물과 인간을 다루는
시인에게 필연의 문제일 터이다. 송영숙 시인은 이러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풀어가고 있다.
차로 그 녀석을 쳤다
사각의 백미러로 두 동강 났을 녀석을 뒤로하고
악셀을 밟고 있었다 콧등으로 등줄기로 땀 흐르는데
악셀을 밟고 있었다 너를 피하면 내가 죽거든 그렇거든
악셀을 밟고 있었다 너를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히거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 차도 그 다음 차도
내가 모르던 내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목덜미를 잡는다
점멸등의 빨간불인지 그 녀석의 암컷인지 무섭게
지나가고 불현듯 나는 없다
찬 아스팔트에 그 녀석을 놓아두고
어느 절에선지 들었을 저녁 예불소리 떠올리며
다시 만나게 될 그 녀석과의 복잡한 관계를 가늠해 본다
- 인연
시적 화자는 차를 몰고 가다 동물을 친다. 로드 킬, 길 위에서
죽은 동물을 바라보는 화자는 존재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이 세상은 생존의 정글이다. “너를 피하면 내가 죽거든”이라는
진술은 알레고리의 성격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이나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불우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 운명을 존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운명론자가 될 것이다.
하나의 죽음 앞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관여한 존재의
소멸에 대해 시적 화자는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다시 만나게 될 그 녀석과의 복잡한 관계”는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 복잡한 관계는 과거이며 미래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도덕이나 윤리 감각이라는 것도 이 부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다. 어떤 인연도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불교적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내 행위에 대한 인과적 책임을 당위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존재간의 복잡한 관계를 단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역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이
인연이다. 시적 화자에게 인연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로 작동한다.
하나는 끊을 수 없는 관계, 다른 하나는 도덕적 결정이 그것이다.
“돌로 문지르고 피가 나게 닦아도 소용없죠/
그래도 어머니 언제나 내게/ 이쁜 내 검은 장미,
라고/ 검은 눈물 검은 피 내림이라네/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시네”
- 코리도라스아메네우스, 일부
코리도라스아메네우스라는 청소 물고기를 자신에 비유해 쓴
이 시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어머니와의 인연을 직시하고 있다.
어머니의 불행했던 삶이 그대로 이어질까봐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살면서 자신의 삶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피 내림이라는 생리학적 문제조차
시적 화자는 삶의 양태와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윤회의 밧줄 매고 푸느라/ 노곤한 잠
밀려와도/ 몸을 눕히지 않는 표적”(- 돌핀,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의 현상조차도 인연을 바탕으로 한 윤회와
결부지어 비유하고 있다.
“유랑은 끝났다/ 꽃으로 나비로 혹은 사람으로/ 돌고 돌아
사라지는 것이 없다 해도/ 그 사라짐 없는 것에서/아주
사라지고만 싶은/ 아름다운 보헤미안”
- 단풍, 일부
이 시는 단풍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지만 기실 끝은 없다고 하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아주 사라지고만” 싶다는 것은 바람일
뿐이다. 사라지지 않는다. 각자의 업과 인연에 따라 윤회를 거듭할
뿐이란 인식은 송영숙 시인의 인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인식은 어린 전어를 구어 먹다가도 “막잔을 털어 넣은
내 대가리를/ 누군가 씹어 삼킨다”(- 내 머리가 없어졌다, 일부)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인연을 바탕으로 한 윤회의식은 내면에
타오르는 불길을 다독이고 정제하는 도덕적 기제로 작용하며
산만한 삶의 여러 국면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 시집을 관류하는 다른 하나는 여성성에 대한 성찰이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은 끊임없이 시적 화자로 하여금 자신은
누구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이 어머니나 딸 혹은 아들에
대한 명상과 여성성이 겹쳐졌을 때 분노와 염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투기(投棄)하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드러낸다.
“돌아갈 땐 남장을 하고 가리라”(- 끝에서 끝으로, 일부)는 선언은
상처 입은 여성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고로 여자들에게 경배할지어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못 할 것이 없다
슬하에 백 명의 아들과 딸을 둘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더한 백 명의 남자도 품을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한 대로에 천둥벌거숭이로 뛰어들어
달리는 자동차들을 일렬횡대로 멈추게 하는 일, 그리하여
지들끼리 물고 뜯게 만드는, 그리고 그리하여 그러므로
그래서 애국자도 되게 하고 매국노도 되게 하는
성직자도 되게 하고 사형수도 되게 하는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그녀들로 하여금 세상을 빛나게 할지어다
제 발등을 찍으며 아무도 모르게 피눈물을 쏟는
그녀들로 하여금 성나게하지 말지어다, 남자들이여
- 남자들에게 고함
여성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여성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잘못된
사회의식을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리하여 그러므로 그래서”에서 시적 화자의 단순치
않은 심리를 읽을 수 있다. 여러 접속사의 내용을 통해 추론컨대
마땅히 그러해야 할 사실들이 관철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이 규정적 선언은 응축된 감정의 드러냄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당당한/알바트로스 같은
남자를 만나거라”(- 사랑을 말한다, 일부)는 시적 화자 자신의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남성의 이기적인 사랑에 맞서
현명하고 강한 사랑을 하기 바라는 심리가 표출되어 있다.
그것은 대개 남성들의 사랑이란 순간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소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다른 심오한 생명의 본질을 여성은 담고
있는 것이다.
오만 가지 걱정으로 뼈만 남았어도
오만 송이의 꽃을 피우고 있는
조선 최고의 버커리다
- 배롱나무
“버커리”는 늙고 병들거나 또는 고생살이로 쭈그러진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각주에 설명되어 있다. 여자로 상징되는
늙은 배롱나무는 바로 생명의 보고이다. “오만 가지 걱정으로
뼈만 남았”다는 것은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불우한 생의 조건이다.
여성은 이 모든 불우한 생의 조건을 넘어 “오만 송이의 꽃” 즉
모든 생명을 키워내는 존재이다. 걱정 없는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감수해야만 참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강렬한 성적(性的) 이미지의 구현은 능동적인 여성성과 관련이
깊다. “사랑할수록 빠져들게 되는/ 부드러운 무기/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한방 맞고/ 쓰러져 죽고 싶은/ 사랑하다 죽어버리고 싶은”
(- 헐리웃 액션 일부) 욕망은 자신이 믿고 살아온 도덕률과 긴장
관계를 이루며 또 다른 의미의 여성성을 보여준다. 죽음마저
떠올리는 사랑은 그러나 실천의 문제라기보다는 내재된 욕망의
표출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
꽃차를 마신다
찻잔 속에서 출렁 겉잎 날개 폈다 접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 부채춤 너울 접었다 폈다
어쩌자고 물 속에서
새빨간 혀를
램프의 불꽃처럼 태우고 있는거야
너의 꽃술에 빨려 들어가
죽어버리고 싶다
- 유혹
찻물에 뜬 꽃잎의 화려하고 다양한 이미지는 아름다움을 넘어
치명적인 매혹을 지니고 있다. “새빨간 혀”, “램프의 불꽃”, “꽃술”
등의 이미지는 다분히 성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이러한 치명적인
매혹 앞에서 시적 화자는 중얼거린다. “죽어버리고 싶다”.
성적인 오르가즘과 죽음의 친연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즉 에로스는 죽음의 충동을 동반한다. 송영숙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죽음도 마찬가지로 절정의 순간에 온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 유혹은 은밀하면서도 두려운 것이지만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헐리웃 액션>, <유혹> 두 편 모두
“죽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죽지 않는다.
“싶다”는 바람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는 시적 화자의 욕망과 윤리적
감각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송영숙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여성성은 남성이라는 대타적 관계 속에서 생명의 근원에 대한
옹호로 작용하기도 하고 에로스에 대한 적극적인 투신의 욕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송영숙 시인의 시적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치열한 자의식에 대한 갈등과 불우한 가족사, 불교적 세계관
그리고 여성성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으나 이는 시집 해설을 위한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하다. 오랜 공백을 딛고 출간한 이번 시집은
그 시간의 길이만큼이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시에 대한 고민이
그만큼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공백을 딛고 세상에 나온
이 한 권의 시집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시집을 내고 나면 느끼는 일이지만 또 다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망막한 길 위에 서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새로운 길을 간다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오롯이 새겨
그녀만의 세계로 들어가기 바란다. 부족한 글로 풀어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은 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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