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코리아가 22일 보도한 내용이다. 한국인 기자가 쓴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 언론이 보도한 내용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 일을 영어로 옮긴 것을 한글로 다시 옮길 때 어떤 뉘앙스 차이가 빚어지는지 궁금해 옮겨 본다. BBC를 비롯한 서구 언론들은 다분히 인간적인 흥미와 관점으로 접근할 것이다.
'세상에 전쟁이 끝난 지 72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미전향 장기수들이 남녘에 살고 있다고? 그리고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이런 식이다. 우리가 느끼는 정서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개인적 신념과 가치관을 존중하는 것이 옳지만, 다분히 시대 착오적인 대목이 적지 않다. 물론 미국의 이해에 종속돼 이런저런 자주적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식민지 운운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번 주 초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아침, 북한과 가장 가까운 수도권 지하철 노선의 종점인 임진강역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수십 명의 활동가와 경찰관들의 관심이 한 남자에게 집중돼 있었다. 95세의 북한군 전쟁 포로 출신 안학섭씨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곳은 한반도를 가르는 국경 반대편이었다.
안씨는 인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한국에서 보낸 뒤 북한으로 돌아가 그곳에 묻히고 싶어 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필요한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예상대로 거절당해 국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안씨는 가능한 가까이 다가갔다.
폐부종(폐에 체액이 쌓이는 것)으로 인해 쇠약해진 그는 역에서 남한과 북한을 연결하는 몇 안 되는 다리 중 하나인 통일대교까지 도보로 30분 거리를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차를 타고 가다 다리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서 내려 그를 부축해준 두 봉사자와 마지막 구간을 걸었다.
그는 남한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매우 충격적인 인공기(북한 국기)를 든 채 취재진과 응원하기 위해 달려온 2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나는 오로지 내 몸이 진정으로 독립적인 땅에서 쉬기를 원할 뿐"이라며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땅"이라고 강조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
안학섭은 23세였을 때 국군에게 붙잡혔다. 그 3년 전, 그는 당시 북한 통치자 김일성이 남한을 공격했을 때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남북 통일을 원했던 김일성은 1950년 남한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동포들을 결집시켰다. 안씨는 이 말을 믿었다. 그는 1952년 연락장교로 북한 인민군에 입대한 후 남한으로 파견된 부대에 배속됐다.
그는 휴전 3개월 전인 1953년 4월 체포돼 같은 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42년 뒤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다른 북한 출신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씨 역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빨갱이' 꼬리표가 붙여졌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는 쉽지 않았다고 지난 달 BBC 인터뷰를 통해 털어놓았다. 그는 정부가 처음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않았고 요원들이 몇 년 동안 자신을 따라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도 하고 아이를 양육하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결국 민간인이 북한과의 국경에 가장 가까이 살 수 있는 김포의 작은 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2000년에 그는 귀국을 원하는 수십 명의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될 기회를 거절했다. 당시 그는 양측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며 국민이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는 송환에 동의하는 것이 미국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될까 두려워 잔류를 선택했다.
그는 "당시 그들은 (남한에서) 미국의 군사 통치를 추진하고 있었다"며 "내가 북한으로 돌아갔다면 내 침실을 미국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내 양심은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그가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는 강력한 군사 동맹을 포함하는 서울과 워싱턴의 관계 강화 말고 무엇을 언급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김씨 일가의 선전, 즉 한반도 통일을 막는 유일한 것은 "미 제국주의"와 그들에게 복종하는 한국 정부라는 믿음을 멈추지 않은 안씨를 깊이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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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통치의 이양'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던 1930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난 안씨는 삼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그에게는 두 여동생도 있었다.
애국심이 일찍이 뿌리를 내렸다. 할아버지는 "일본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학교에 다니는 것을 거부했다고 그는 돌아봤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다른 이보다 늦게 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의 식민 지배가 끝났을 때, 일본군을 탈영한 안씨와 남동생은 강화도 마니산 기슭의 이모 집에 숨어 있었다. 그는 "해방이 아니라 식민 통치의 이양일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보는) 전단지에는 한국이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미국의 군사 통치가 시행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심지어 미군법을 위반한 사람은 군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했다."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놓고 다투면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소련은 북한을, 미국은 남한을 장악해 1948년까지 군정 정부를 수립했다. 1950년 김일성이 공격했을 때는 이미 한국 정부가 들어 서 있었지만, 안씨는 많은 북한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남한이 갈등을 촉발했으며 미국과의 동맹이 통일을 방해했다고 믿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
체포된 후 안씨는 감옥행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북한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은 "전향"이라고 했는데 그는 마다했다.
안씨는 20일 국경 근처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나는 전향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끝없는 굴욕과 고문, 폭력, 수치심과 고통으로 가득 찬 나날을 견뎌야 했다. 그 고통을 말로 온전히 설명할 길이 없다"고 발언했다.
한국 정부는 특정 혐의에 대해 직접 대응에 나서지 않았지만 2004년 특별위원회가 교도소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를 인정했다. 안씨의 직접적인 혐의는 과거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는 독립 기구인 한국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과정에 고문 행위를 포함한 고의적인 전향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에서는 교도소 수감자들이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다. 안씨는 지난달 인터뷰 도중 "의식을 되찾을 때마다 가장 먼저 손에 붉은 잉크가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고 돌아봤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무엇을 하든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족감을 느꼈다."
북한은 눈에 띄게 변했다. 그의 손자가 현재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며, 1950년보다 부유해졌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인 은둔형 독재 정권이다. 안씨는 파괴적인 기근 때문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0년대 북한에 있지 않았다. 수만 명이 그곳에서 죽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다.
그러나 안씨는 북한이 인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주장을 일축하고 언론이 편향돼 북한의 어두운 면만 보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북한이 번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 김정은의 결정을 옹호한다.
안씨가 이곳에 있는 동안 남한은 한때 가난한 군사 독재 정권이었지만 지금은 부유하고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북한과의 관계는 공공연한 적대감과 희망적인 관여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그러나 안씨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30년을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있다고 믿는 미국에 항의하는 데 바쳤다. 안씨는 지난달 인터뷰를 통해 "인간은 동물과 달리 두 종류의 생명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기본적인 생물학적 생명체, 즉 우리가 말하고, 먹고, 배변하고, 잠을 자는 부류의 생명체이다. 두 번째는 사회생활이라고도 불리는 정치생활이다. 인간의 정치적 삶을 박탈한다면 로봇과 다르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저는 그 기간 일본 식민 통치 아래 살았다. 하지만 죽어서도 (미국) 식민주의에 묻히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