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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마 24:45-51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 24:45-51 /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눅12:41-48]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종은 과연 어떤 사람이겠느냐? 주인이 맡긴 집을 잘 관리하고 주인의 자녀들에게 때맞춰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46) 그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종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47)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주인은 이런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악해서 자기 스스로 `내 주인은 곧 오시지 않을거야'하면서 49) 동료 종들을 억압하고 술친구들과 흥청망청 놀고 술에 취해 있다면 50)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예고도 없이 집주인이 돌아 올 것이다. 51) 그러고는 그 종을 모진 매로 때리고 위선자들이 받는 심판을 받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두 종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입니다. 두 번째는 악한 종입니다. 그들의 특징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45-47) 예수님 다시 오실 때를 준비하는 종의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을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주인이 곁에 있고 없고 상관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 하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종입니다. 맡겨진 일이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것을 말합니다. 양식을 나눠주는 것을 충성스럽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일곱 집사를 세운 목적은 바로 이런 나눔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종에게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맡기십니다(47). 마태복음에 착하고 충성된 종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마 25:21). 이 종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칭찬과 함께 많은 것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상급입니다. 상급을 받는 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마다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고 지혜롭게, 충성되고 착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악한 종(48-51) 이번에는 악한 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악한 종의 특징은 주인이 더디 올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시기를 자기 생각대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돌아올 시기는 주인이 결정하는 것이지 종이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월권입니다. 이런 종의 또 다른 특징은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49). 이는 사람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동료는 때릴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반면 술친구들은 멀리하고 끊어야 할 대상입니다. 가까이해도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종은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인지, 멀리하고 끊어야 할 사람인지를 구별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악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지도 못하고 착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을 어떻게 하실까요? 예수님은 종이 생각하지 못한 날, 알지 못하던 시각에 갑자기 오십니다. 예수님은 악한 종을 엄히 때리십니다. 벌에 처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롭지 못할 때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적용: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친구들과 더불어 지내는 성도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하나님은 충성하고 있는 종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맡긴 주인처럼, 예수님도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 나라를 맡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통치에 참여하여 이 땅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있다 없어질 잠깐의 소유를 위해 영원한 소유를 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인은 많이 모아서 자기 뜻대로 쓰는 이보다, 맡은 것을 주인의 뜻대로 나눠주는 종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주께서 믿고 맡길만한 종입니까? <좋아, 시작하자>
< 설 교 >
예수님 만날 날을 대비하라
마 24:45-25:31 / 최영기목사
예수님 만날 날을 대비하라는 것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오신다 느니, 대비한다느니, 하는 말이 실감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전연 오실 것 같지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 지 모릅니다 라는 말에는 실감이 안 가하시는 분도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라는 말에는 실감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오시든지 아니며 우리가 죽어서 저곳으로 가든지. 어느 경우에든 우리가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 만날 날을 대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Ⅰ. 사명 위해 살아야 한다
첫 번째 비유는 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못한 종에 관한 것입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이 없을 때에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주인이 갑자기 돌아왔을 때에 칭찬을 받았고 신실하지 못한 종은 주인이 안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은 안하고 자신이 원하는 짓만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주인으로부터 엄한 벌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1. 구원 받은 사람은 사명 의식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다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인가 주님 앞에서 보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사명자인데 신실한 사명자인지 신실하지 못한 사명자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악한 종은 이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그리도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다가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결과를 자초한 것입니다.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에 쓰시는 표현입니다(마13:41-42). 그렇다면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고 지옥에 간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다고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명 의식이 없다는 것은 구원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갓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가장 활발하게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청하고 생명의 삶을 권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성령을 받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주시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빌2:13).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서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순간부터 벌써 사명 의식이 생깁니다.
저는 한국의 많은 크리스천에 관해서 염려가 됩니다. 특히 남성들에 관하여 염려가 됩니다. 이들이 정말 구원 받았는가? 이들이 죽은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많은 남성들이 사명에 관하여 전연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교회 한번 나오는 것을 큰 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결국은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삽니다. 생존 경쟁에 살아 남기 위하여서는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동료들을 공격하는 신실하지 못한 종처럼 경쟁자를 비난하고 공격하고 부하에게 못되게 굽니다. 사업하기 위하여서는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비유에 나오는 신실하지 못한 종처럼 술친구와 어울려 먹고 마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과연 이들이 크리스천일까? 염려가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잘못된 확신을 심어주는 목사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구원에 관한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 이유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고 골프를 치러 가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다.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회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골프를 치면서도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 자문을 한다는 것이 성령님이 안에 계시다는 증거이고 구원 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는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주님이 오셔서 신실하다고 해주실 까 아니면 악하다고 쫓아내실까?
그러므로 교회를 몇 년 다니면서도 예수 믿으라는 소리 남에게 한번 해보지 못하고 교화와 이웃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 전연 없는 분들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혹시 죽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삶, 사명 받은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 하루하루 사는 것이 대비하는 삶이다
신실하다고 칭찬을 들은 종은 어떠한 종이였습니까? 주인이 갑자기 들이 닥쳐도 맡긴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종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말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잘못된 종말론자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할 때에 일상 생활을 포기합니다.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주님 오실 날만을 기다리고 일상 생활은 무시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칭찬을 듣는 종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예기하지 않았을 때에 갑자기 오실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일상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 오실 날만 고대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주인이 맡겨주신 사명을 더 성실히 감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렸으니까 반복을 않겠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신실하다는 칭찬을 듣기를 원하면 하루하루 살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사명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성실하게 수행하여야 합니다. 또 주님이 주신 축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감사하면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에 오늘 밤 내가 잘 때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유감이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깔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천국에는 일이 있다
신실하고 신실하지 못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또 하나의 사실은 천국에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종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고 신실하지 못한 종이 받는 벌은 지옥의 형벌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신실한 종이 받는 상은 천국의 상을 의미한다고 보아서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신실한 종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라고 되어있고 영어 NIV에서는 "He will put him in charge of all his possession"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맡겨 관리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이니까 핵심 되는 교훈 외에는 큰 의미를 둘 수 없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종의 예를 들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일을 맡긴 청지기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듯이 모든 일을 맡긴다는 것도 신실한 종에게는 천국에서 많은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정적인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염려가 없고 눈물이 없고 아픔이 없는 곳. 쉬임과 평화가 있는 곳. 그러나 저는 천국이 그것보다 훨씬 더 동적인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도 일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일에 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일은 좋은 것입니다. 일은 우리의 존재 가치를 확인해주고 보람과 기쁨을 안겨다줍니다.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주신 것이 세상을 정복하라는 일입니다. 거기에는 땅을 경작하는 일도 들어있을 것입니다(창1:28). 아담과 하와에게는 일은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즐거웠던 노동이 고역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받은 저주가 그러한 것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으면 열매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창 3:17). 전에는 즐거움이었던 노동이 이제는 고역이 된 것입니다.
일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도 천국에 가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마지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입니다. 그 일은 거의 놀이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지 않지만 자신의 일을 즐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어떤 형제님은 직장에서도 컴퓨터를 갖고 일을 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와서도 컴퓨터 앞에 들러붙는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형제님이 경영하는 식당에는 같습니다. 이 형제님은 요리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답니다. 불란서 식을 가미한 일식 식당인데 미국 젊은이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요리 학원에를 다닌 줄 알았더니 아니랍니다. 요리가 재미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보았더니 미국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일이 회복될 것입니다. 시인은 시를 짓고, 음악가는 노래하고, 사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에 몰두하고, 농부는 농사를 짓고,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창조하고. 천국에 가서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은사에 맞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즐거움이고 기쁨일 것입니다.
(2) 천국에는 높은 사람이 있다
천국에는 큰 일 작은 일 큰 자 작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자일까요? 더 신실하고 더 많이 섬겼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큰 자는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자이지만 하늘 나라에서의 큰 자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섬김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다 신앙 생활에 기쁨을 누리지만 목자들이 보통 성도보다는 더 기쁨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자보다는 목회자가 더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침례 간증을 들을 때에 자기 목장 식구가 간증을 하면 그것을 들으면서 목장 식구는 기쁨과 감격을 맛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목자만큼은 못합니다. 허그식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목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목장 식구 허그식을 하면 그 목자도 별로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 목사는 똑같이 감동합니다. 왜 보통 교인보다 목자가 기쁨이 크고 목자보다 목사가 더 기쁨이 큽니까? 더 많음 사람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들 주신 사명 신실하게 잘 감당하여서 주님 오셨을 때에 신실하다는 칭찬 들으시고 더 큰 일을 맡는 더 큰 사람 되어서 남보다 더 큰 천국의 기쁨과 보람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Ⅱ.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처럼 잘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해석이 구구한 비유도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당시의 결혼 풍습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나 마태가 이 비유를 기록할 때에 이들은 결혼 풍습에 너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넘어갔는데 수천 년 후에 사는 우리는 그 풍습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견이 생기는 것입니다.
상세한 부분은 잘 모르지만 그래서 큰 그림은 그릴 수가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때에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든지 제 3의 장소로 가서 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신부와 하객들을 신랑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 잔치는 사흘 혹은 닷새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하루가 저녁때에 시작되기 때문에 결혼식을 밤에 갖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러기 때문에 길을 밝히든지 신랑을 환영하기 위하여 횃불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 등불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등불보다는 횃불이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할 것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열 처녀는 들러리였는지 모릅니다. 신랑을 환영하는 일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랑은 준비 때문에 오는 것이 지연되었습니다. 열 처녀는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많은 설교자는 나무라는데 사실 이것은 잘하는 짓이지요. 시간이 있을 때에 눈을 붙여두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정쯤 되어서 신랑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횃불을 들고 나가서 마중을 해야 하는데 횃불에 불을 붙이니까 다섯 처녀의 횃불은 기름이 그 동안 다 말라서 그런지 붙자마자 껴져 갑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처녀는 기름을 가외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횃불을 활활 부쳐서 신랑을 맞으러 갈 수 가 있었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구하려 갖다 왔을 때에는 잔치 문이 잠겨져서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문을 열어달라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게 신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매몰차게 말하는데 이 표현을 예수님은 가짜 예언자를 설명할 때에 사용하셨습니다(마7:23). 가짜 예언자처럼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1. 기회 있을 때에 믿어야 한다
어리석은 5처녀는 왜 이런 비극적인 운명을 마지 했을까요? 그들은 잔치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신랑이 늦어질 것을 예상하지 않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막판에 기름을 준비하려다 이러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상징하는 사람은 은퇴한 다음에, 늙은 다음에, 죽기 전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막판에 가서 믿겠다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도 오실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13절에 깨어있어라. 그날과 그 시각을 너희는 모른다고 못박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든지 우리가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가든지. 우리가 예수님이 언제 오실 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다가 어리석은 처녀처럼 처참한 운명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준비하여야 합니다.
연수로 오셨던 지 아니면 주재원으로 와서 휴스턴에 오셨다가 우리 교회에 참석하시다가 결국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귀국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영혼 구원을 위하여 모든 프로그램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교회를 안 다니거나 영혼 구원에 열정이 없는 교회에 나가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텐데 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마음에 감동이 올 때 영접 헌신도 하고 휴스턴에 왔을 때에 생명의 삶도 수강하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하여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기회가 다시 안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길게 보며 살아야 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신랑이 늦더라고 상관이 없게끔 준비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이 오늘 오시더라고 두려움이 맞을 수 있게끔 하루하루를 사는 동시에 예수님이 천년 후에 오시더라고 상관이 없게끔 길게 보고 길게 계획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잘 알려진 한 미국 목사님은 자신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은퇴도 하지 않고 후계자를 세울 계획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리석은 5처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주님이 오늘 밤에 오늘 오실 것처럼 준비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주님이 오늘 오시지 않더라고 상관이 없게끔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장기 계획도 세우고 후계자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주님이 오늘 오시더라고 상관이 없게끔 하루하루를 살며 동시에 천년을 내다보며 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길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보면 몇 개월 휴스턴에 다니러 오신 분들 가운데에 등록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잘 하시는 것입니다. 몇 달이지만 영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사람처럼 교회 생활을 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슬기로운 처녀 같은 삶입니다. 우리는 길게 생각하는 습관을 드려야 합니다. 잠시 있을 직장이라고 영구히 그곳에서 은퇴할 것처럼 직장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잠시 할 사업이라고 영구히 몸담을 사업인 것처럼 하여야 합니다. 1년간 맡는 사역이라고 평생 사역인 것처럼 하여야 합니다. 잠시 사귈 목장 식구라도 일생을 같이할 사람처럼 사귀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갖고 살 때에 주님께서 오실 때에 지혜롭다고 칭찬을 해주실 것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라
마태복음 24:45~51 / 김상복 목사
며칠 후면 이 땅에 6.25전쟁이 일어난 지 58주년이 됩니다.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압제 당하던 우리 민족을 1945년 하나님께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다시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큰 혼란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김일성은 군대를 총동원하고 중국과 소련의 도움을 받아 남침을 하여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던 날 아침, 김일성은 “오늘 새벽에 남조선 괴뢰군들이 우리 조국을 침략했다. 그래서 우리 용감한 인민군이 지금 반격을 하고 있다”고 북한 주민들을 속였습니다.
그 거짓말을 지난 58년 동안, 오늘까지도 계속 반복하다보니 남쪽에도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맥아더 장군 때문에 이 나라가 통일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인천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동상은 아직 무사합니다만 그들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의 주동인물들이 최근 계속되는 촛불시위의 주동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소고기와 나라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거의 두 달을 계속해 온 촛불시위는 분명한 메시지를 표현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만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6.25전쟁은 북한에서 도발한 것입니다. 만약 그 때 맥아더 장군이 전쟁을 지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공산주의의 통치 밑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예배도 못 드리고, 자유롭게 다니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거나 수용소에 가있을 것입니다.
6.25 한국전쟁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을 “잊어버린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부르며, 그나마 잊지 않기 위해 워싱턴에 기념공원을 만들었습니다. 총을 들고 판초를 입고 진흙탕을 걸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고 미군 전사자 3만7천명의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그 후손들은 지금도 워싱턴 공원을 찾아가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에 손을 얹고 기도하곤 합니다. 그곳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한국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하여 분연히 나섰던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미국 국민 -
한국이 공산화된다고 해도 멀리 있는 미국인들은 크게 손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쳐 여러분과 저의 자유를 지켜주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아이젠하워의 아들, 클라크 유엔 총사령관의 아들이 한국전에서 전사했습니다. 워커 중장은 자신과 아들이 함께 목숨을 잃었고, 딘 소장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6.25전쟁 3년 동안 세계 16개국의 젊은이 1백36만 명이 참전했습니다. 그 중에 4만1천명이 전사하고 16만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실종자가 600만 명, 이재민이 370만 명, 공산당에 학살되거나 납치된 사람이 20만 명, 전쟁고아가 10만 명, 이산가족이 천만 명입니다. 이런 엄청난 비극이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이 침략을 했다, 남쪽이 침략을 했다는 주장을 믿는 일부 남한 사람들은 반미운동을 계속합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 나라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이웃나라인 소련이나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를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기회만 있으면 우리의 땅과 자원을 탈취하려고 했지 우리를 도와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나라가 자유를 찾고 현대화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폐허가 된 이 나라를 살리는데 경제원조로 큰 공헌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최대의 무역특혜국가로 만들어주어서 우리나라 제품들을 미국에 마음껏 내다 팔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미국의 가게마다 “Made in Korea” 상품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미국이 시장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무역특혜국가가 아니고, 오히려 미국과 맞대결을 하는 경쟁국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혼자의 힘이 아니라 미국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많은 제품을 미국에 수출, 수입하고 있습니다. 차기 미국 대통령 후보인 민주당의 오바마는 불평을 합니다. “한국은 미국에 현대자동차 수 만대를 팔면서 미국 차는 겨우 몇 대 밖에 사가지 않는다.”
미국은 과거에 수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을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현재도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무려 8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에 안 간 곳이 없지만 미국에서 최선의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아이들이 우리나라에 돌아오면 큰 몫을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처음 유학을 갈 때 우리나라 GNP가 100불이었습니다. 10만원 가지고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겨우 10만원을 들고, 어떤 사람들은 10만원도 없이 빈손으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 우리나라 대학의 교수와 연구소 연구원과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우리나라와 친구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목숨을 바쳤습니다. 대속적인 고난을 당한 국민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어디에서 재난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가장 많이 돕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준 미국을 우리의 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랜 친구와는 앞으로도 좋게 지내야 합니다. 북한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오랜 친구를 반대하고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옛날 친구는 옛날 친구대로 계속 잘 사귀고 새 친구는 새 친구대로 사귀면서 많은 친구를 얻어야지, 한 친구를 얻기 위해서 옛 친구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외교정책입니다. 우리나라가 굳이 다른 나라를 적으로 삼아야 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천연자원도 부족하고, 가진 것은 인적 자원, 두뇌 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하루만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목요일에 가서 금요일에 목사 안수식을 마치고 금요일 밤에 돌아왔어요. 그곳에서 보니 미국 국민의 64%와 전문가의 58%가 “30개월 이상 된 소고기를 한국에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이 반대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 광우병이 발생한다면 미국 정부가 소고기판매를 막을 것입니다. 자기들도 안전한 고기를 먹어야 되니까요. 전 세계 78개국에서 미국 고기를 먹고 있는데 한국만 골라서 “광우병은 한국의 특수”라고 할 이유가 없지요.
촛불시위가 두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니 우리 물건을 싣고 나가야 할 배가 텅텅 비어있어요. 경제가 잘못 되고 나라가 파탄되고 민생을 혼란시키는 일은 이제 그만 해야 합니다. 이제는 모두가 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학생들은 학교로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더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수출하는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전 세계에 수출해서 기업과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5-10년이 우리나라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동안 정신 안 차리면 완전히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잘 가다가 문턱에서 주저앉아 헤매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예를 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이 민족과 이 사회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제는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살려야 합니다. 정치인은 국회로, 가장 주부들은 집으로, 직장인은 직장으로 돌아가 기업인은 기업체로 돌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힘을 쏟아 이 나라를 부강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나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정부와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우리는 매주 이 자리에서 대통령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교회의 장로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진리의 편입니다. 대통령과 정부가 잘 못하면 책망할 것입니다. 격려할 때는 격려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늘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힘을 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가 안정되고 경제가 일어나고 평화로워서 우리가 하는 것들이 모두 나라에 큰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축복 받는 청지기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받은 것입니다. 내 몸도 내가 만든 것 아닙니다.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이 몸을 잘 다스리고 돌봐서 일생 건강하게 맡은 일들을 잘 감당하라고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시간도 주셨고 각자 다른 재능도 또 물질적 소유도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 미국 방문 길에 훌륭한 연주를 듣고 참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오랫동안 갈고닦은 솜씨로 우리에게 좋은 음악의 재능을 선사하는 연주자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아요. 사람들이 각자 가진 능력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제가 묵었던 호텔이 바닷가에 있었는데 하루밖에 못 잤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새벽에 바닷가를 거닐었는데 벌써 서핑 보드를 한바탕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조금 후에 해가 뜨니까 사람들이 해변에 몰리는데,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그고 좋아서 깔깔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연과 건강을 주시고 가족과 직장을 주시고 재능과 시간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것들을 어떻게 잘 돌보고 관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요즘 우리 시국처럼 우리끼리 싸우고 맡은 나라를 잘 돌보지 않으면 누가 좋아합니까? 우리의 적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충성스럽고 복 받는 청지기가 되어 자기 자리에서 맡겨진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복 받은 청지기를 “충성되다”고 했습니다. 맡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겁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해서 우리가 한 번 지나간 자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 놓고 가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45절). 충성되고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십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식량을 분배하는 작은 일을 맡았지만 제 때에 지혜롭고 적절하게 자기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46-47절)고 했습니다. 우리 온 국민이 신실하고 지혜롭고 적절하게 각자 맡은 일을 잘 하면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이 나라를 더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48절). 악한 종입니다. 악한 종은 시간을 낭비하고 방탕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파괴합니다. 분노와 두려움과 걱정과 혼란을 일으킵니다. 또한 자기 멋대로 생각합니다. “주인이 일찍 오지 않을 거야. 한참 있다가 올 테니 실컷 먹고 놀자.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사실대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주관적으로 생각합니다. 폭력적입니다. “동무들을 때리며”(49절). 물리적 폭행, 언어적 폭행, 심리적 폭력을 사용합니다. 남을 해칩니다. 어리석어 손해를 끼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걱정을 일으킵니다.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며” 방탕합니다(49절). 절제가 없습니다. 지금은 먹고 마시고 떠들 때가 아니라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우리가 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맡은 일에 충성할 때입니다.
맡은 일에 제대로 충성하지 않으면 나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50-51절). 슬픔의 시간, 고통의 시간, 눈물의 시간, 이를 가는 시간이 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내 자신, 내 가정, 내 직장, 내 사업, 내 나라, 내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모두 힘을 합쳐 헌신하여 더 좋게 만들지 않고 계속 데모들만 하고 싸움들만 하고 파업들만 하면 고통과 눈물의 시간이 올 수 있다는 겁니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의 탄압과 6.25전쟁으로 눈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죽음과 파괴와 아픔과 애통이 있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우리 모두가 각자 제 자리로 돌아가 충성되고 지혜롭게 자기 맡은 일을 잘 감당하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과거보다 더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시작할 때는 작은 것을 맡겼지만 우리의 충성된 모습과 수고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북쪽까지 맡겨주신다면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혼란의 시국이 계속 된다면 우리에게 눈물의 시간이 또 올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돌이켜서 신실하고 지혜롭게 자기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앞으로 더 많은 축복을 받는 국민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럭저럭 한다면
마 24:45-51 / 엄기호목사
모스 부호로 전보를 보내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전신국에서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많은 지원자들이 면접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상 질문을 추측해보기도 하고, 친구끼리 잡담을 하기도 하고, 신문을 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저 뒤에 앉아있던 한 청년이 들어오라는 지시도 없었는데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 다. 한참 후에 사장이 그 청년과 함께 나오더니, 지원자들에게 이제 채용이 끝났으니 모두 돌아가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당연히 불평과 항의가 잇달았습니다. 그 때 사장이 조용히 설명했습니다. ‘준비된 사람은 들어오라’라고 모스 부호로 신호를 보냈을 때, 이 청년만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한 사람도 들어오지 않았고, 한참 후에 더 이상 안 들어오면 이제 채용 면접을 끝낸다고 모스 신호를 여러 번 보냈으나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기에 면접을 마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지원자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언제 어느 때 찾을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맡겨진 삶의 터전에서 최 선과 열심을 다해 장래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며 허송세월( 虛送歲月)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일을 맡긴󰡐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 며 세상 쾌락에 빠지고 술에 취하여 싸움질만 하며 그럭저럭 자리를 지키는 악한 종이 나옵니다. 한편, 마태복음 25장에도 기름 준비를 하지 않고 그럭저럭 신랑을 기다리던 다섯 처녀는 등불이 꺼져서 혼인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고,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게으름만 부렸던 종은 달란 트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그럭저럭 믿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비참합니다. 그러면 그럭저럭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 쾌락에 빠져 술에 취하고 싸움질하던 악한 종이나, 기름 준비를 하지 않은 뻔뻔스런 처녀들, 그리고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게으른 종은 모두 장차 다가올 중요한 날을 생각하지 않고 그럭 저럭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와 재림에 대한 징조로써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 과 기사를 보여 택한 자라도 미혹하며, 큰 환난 후에 해와 달과 별들이 변동되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며,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를 통해 여름을 아는 것처럼, 이상의 징조들로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를 통해 시기를 분별하듯 우리는 항상 깨어 장래를 준비하는 성도,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럭저럭 사는 자는, 오늘의 생활이 내일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 문에 그저 그날그날을 적당히 살아갑니다. 장래를 생각지 않고 그럭저럭 사는 사람은 앞을 내다보 는 눈이 감긴 사람들이요, 미래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장래를 바라보며 주인과 동료들에게 자기의 의무를 다함으로 주인 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왔을 때에 칭찬과 축복과 많은 상 급을 우리에게 베풀 것입니다.
주인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때 믿으면 되지; 주님이 오시면 그 때 철야하고 그 때 성수주일하고 , 그 때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은 자 기 위치를 잊어버리면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자기 위치를 잊어버린 자는 세상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생각하고, 주인이 없는 것처럼 생활합니 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 자기주장, 자기만족, 자기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자기반성이나 겸손, 다 른 이들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나 칭찬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인을 기억하지 않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어두움에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주인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과거 노아시대에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 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유흥과 향락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풍조가 건전 한 성도들의 정신까지도 가차 없이 좀먹게 하고 마비시켜 버리는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늘 다가오는 유혹과 미혹을 뿌리치고, 나의 위치, 내가 할 일, 내가 받은 직 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지키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타락한 사람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재능대로 감당할 정도를 따라서 공평하게 주시되 이미 얻은 기회를 잘 선용 하면 새로운 기회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악하고 불충성한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땅을 파서 거기에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명 없이 목전의 유익에 목적을 두고 그럭저럭 사는 사람에게 인내나 절제, 관용이나 미덕이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타락한 생활 속으로 빠져 들 수밖에 없고, 결국 불행한 결과를 낳을 뿐 입니다.
주인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그분이 오시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딤후 2:21). 그리고 그때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는 쫓겨나지만 임무에 충실한 자는 상을 받습니다.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자는 버림을 받지만 주신 사명에 충성한 자는 주님께 칭찬을 받습니 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각자 모두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달란트를 얼마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느냐입니다.
히브리 속담에 하나님은 名詞(명사)보다 副詞(부사)를 더 좋아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의 결과보다는 일을 해나가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즉, 과정을 귀히 보신다는 것이요, 열매를 얼마나 많이 거두었는가 보다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행했던 그 태 도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4장 12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 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12장 35절에서 예수님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내일도 생각지 않고, 주님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타락의 생활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 은 죄악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는 반드시 불행한 날을 맞게 됩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고, 무감각한 심령에서 깨어나야 합 니다.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 소망에 두고 서로 화목하며, 등과 기름을 풍성하게 준비하며 주님 을 기다리는 성도가 됩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므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성 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