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제가 바로 눈 속에 들보를 두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는 자였습니다(마 7:4).
목사요 선교사임에도 눈은 어두워 침침하고 머리는 아둔하여 지식이 없는데 그저 그런 무지한 경험칙으로만 가르치고 전하려던 자였습니다.
늦게라도 나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주시고 깨닫는 은혜를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는데 이는 딱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좀 더 분명히 볼 수 있도록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교회의 본질과 존재 이유를 분명히 알고 교회로서 교회답게 설 수 있도록 나를 채찍질 하소서.
복음이 아닌 것은 과감하게 버리되 복음은 목숨 걸고 전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 아니라 주께서 전하기 원하시는 생명의 복음만 전하게 하소서.
일본 성서학원에서 열리고 있는 복음생명세미나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전하는 이들이나 듣는 이들이 성령에 감화되어 주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4:18-37
제목 :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18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데려가라 하매
20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21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2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3 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25 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 나의 묵상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하나님을 경외하듯 섬겼다.
여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며 남편은 늙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여인이 간절히 원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인 아들을 약속하였다.
선지자의 말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1년 후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자라나 하루는 추수하는 일꾼들과 함께 있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종에게 아들을 그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무릎에 정오까지 누워있던 아이가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엘리사의 침상에 뉘어놓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즉시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고자 하인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남편에게 달라고 하였다.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샬롬’ 곧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 대답하고 갈멜산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로 갔다.
멀리서 하나님의 사람이 그녀를 알아보고 게하시로 하여금 여인의 안부를 묻게 하였다.
게하시가, 당신은 평안하냐?, 남편은 평안하냐?, 아이는 평안한지를 묻자 평안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가서 그의 발을 끌어안았다.
이에 게하시가 여인을 말리려 하지만 엘리사는 가만 두라고 하면서 그녀 안에 괴로움이 있는데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여인은 엘리사에게 아들이 죽은 일을 말하며 따져 묻는다.
(28)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기 지팡이를 가지고 속히 가서 아이의 얼굴에 두라고 한다.
하지만 여인은 결코 엘리사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엘리사는 여인과 함께 아이가 있는 집으로 갔다.
앞서 갔던 게하시는 엘리사의 말대로 아이의 얼굴에 지팡이를 두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사가 집으로 들어가 자신의 침상에 뉘어 있는 아이를 보았다.
그 방에는 엘리사와 아이 둘 뿐이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엎드려 입과 눈 그리고 손을 포개었다.
그러자 아이의 몸이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하였다.
엘리사는 일어나서 방안을 왔다갔다 한 다음 다시 아이 위에 엎드렸다.
그러자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불러 수넴 여인을 오게 하고 살아난 아이를 그녀에게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이에 여인이 엘리사의 발 앞에서 절하고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엘리사는 죽은 아이의 어머니 수넴 여인으로부터 원망 섞인 불평을 듣는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고 오직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그의 사환 게하시에게 자기의 지팡이를 가지고 속히 가서 아이의 얼굴 위에 놓으라고 하였다.
그 때 여인은 엘리사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고 결연하게 말을 하자 엘리사는 바로 그 여인과 함께 여인의 집으로 간다.
앞서 갔던 게하시의 행동으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엘리사가 집에 도착하여 아이가 뉘어 있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였다.
그 후에 아이 위에 엎드려 입과 눈 그리고 손을 포개었다.
그러자 아이의 몸이 점차 따뜻해졌다.
방안을 한번 왔다갔다 한 후에 다시 아이 위에 엎드렸다.
그러자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면서 눈을 떴다.
아이가 살아난 것이다.
이 표적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부활을 어떻게 이루시는가에 대한 예표로서 의미가 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와 동일시 되어 그 위에 마주하여 엎드렸다.
눈은 눈에, 입은 입에, 손은 손에 포개어 엎드린 것은 그와 하나 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살린 것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시고, 우리의 부정하고 연약한 인성이나 죽음과 일치시킴으로 우리를 부활에 참여케 하시는 것이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로 삼으셨다.
따라서 죄인으로서 영원한 의를 얻은 의인이 된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는 불의한 자요 죄인 중에 괴수이다.
아담이 범죄한 것으로 인하여 징계를 받은 것처럼 나 또한 그가 지은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 모른다.
그러하기에 나도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아주 진멸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셨다.
공의의 심판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징계하시지만 진멸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원수요 죄의 뿌리인 마귀로 대변되는 뱀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진멸되었다.
물론 뱀 곧 마귀가 진멸을 받았지만 곧바로 죽는 것은 아니다.
뱀은 머리를 박살내도 그 몸통은 여전히 살아서 엄청난 힘을 과시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마치 자기의 세상인 양 세상을 호령한다.
그러나 그 마귀를 멸하시려 아들이 오셨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의 담지자이다.
그의 말씀을 듣는 자는 그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영생은 그 생명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영생을 사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런 삶의 과정 속에서 유혹과 시험이 따른다.
수넴 여인에게 있던 외아들이 죽은 것과 같은 시험 말이다.
그는 거기에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말씀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이는 곧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구원하심을 의미한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파레시아 곧 담대함이다.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파레시아 말이다.
그리고 이 파레시아는 시험과 유혹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이 극심하고 재산이 몰수되는 상황 속에서도 최후까지 파레시아를 버리지 말라고 촉구한다.
(히 10:32-35)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파레시아)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나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굳게 믿는다.
이렇게 영생을 얻었음에도 영생을 누리며 사는 일에는 요원했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영생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여 예수 잘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 닥쳤다.
그 시험 앞에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쓴 자가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 시험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이 곧바로 드러났다.
나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신 것이다.
목사가 되어 성도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나의 생각과 경험치를 가르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고통의 나락으로 던지셨다.
그리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셨다.
나는 그렇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이 영생임도 알게 되었다.
이제 날마다 주의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현재로 누리는 영생임을 믿는다.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복음도 영생도 모르던 나는 무지몽매한 자였습니다.
세상적인 이치나 재리에는 눈이 밝은 것 같았으나 정작 목사로서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가 무슨 목사이겠는지요?
이런 나를 고난의 풀무 속으로 던져 넣으시고 복음의 소식을 보내시어 듣게 하셨습니다.
관념적이고 지식적인 경험으로 목회를 하던 나에게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소망을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복음을 통하여 죄사함과 구원을 얻어 날마다 영생을 누릴 수 있음이 그저 은혜요 감사일 뿐입니다.
오늘도 유혹과 시험은 그치지 않는 만물 안의 세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날 도우시며 그를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파레시아가 있으니 넉넉히 견딜 수 있습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힘입는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