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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반도 시나리오 원문보기 글쓴이: 복록수
[고대일본은 한국 분국]
부산일보 연재물(2000)
<1> 일본 민족의 뿌리
`야요이 문화 독자 형성은 어불성설`
삼한시절 한국인 일 진출 벼농사.금속문화 등 전파
죠몬인 물리치고 주인 역할
"일본 역사 바로잡기"의 선봉 역할을 하고 있는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최근 "국민의 역사"란 책자를 발행,앞으로 일본의 역사교육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책자의 서두는 "야요이문화(기원전 약 3세기~서기 3세기)는 도래인(한국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 선주민인 조몬인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고,야요이문화의 주체는 조몬인이었으며 북 규슈와 남조선(한국)과는 같은 시기 동일문화권에 가까웠으나 사람의 왕래나 교역이 있었던 것 뿐이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이는 일본 문화 형성의 기반인 야요이문화가 일본 고유민족의 독자적인 것이며 고대 한국과는 무관하다는 학설이다.
일본의 역사교육을 이러한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인데,우리가 이를 예사로 넘겨도 될 것인가.
새끼줄무늬의 토기를 사용했던 조몬인은 아이누족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상식이다.아이누족은 일본열도에 선주한 부족이기는 하나 현대 일본인의 인상,체격 등 우생학으로 봐도 결코 일본 민족의 선조일 수 없다.
종래의 학설은 "일본 야요이문화는 한반도의 삼한 삼국인들이 벼농사,금속문화,견고한 토기 등의 새 문물을 가지고 진출해 조몬인을 물리치고 정착하면서 전파했다"는 게 정설이었다.이는 아이누족이 현재 일본의 소수종족으로 북쪽 끝 홋카이도와 남쪽 끝 오키나와에 분산돼 있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일본 민족 형성의 기원은 인구동태를 살펴보면 더욱 확연해진다.인류학 권위자인 일본 국립 민속학박물관의 고야마슈조 교수는 1984년 일본인류학회에 보고한 "죠몬시대의 인구"라는 논문에서 "죠몬말기(기원전 약 3세기) 일본 총인구는 극심한 추위 등의 영향으로 겨우 7만5천8백명에 불과했고,그후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자 59만4천9백명으로 급격히 늘었으며,하지키(김해 토기)를 사용한 나라시대(710~784)에는 무려 5백39만9천8백명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인류학자 중 세리자와 죠수케씨는 죠몬말기의 인구를 약 12만명,야마우치 세이오씨는 약 15만명으로 추계했다.
이로 미뤄 야요이시대 초기에 일본 인구가 급증한 것은 고대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대거 진출,벼농사로 식량이 풍부해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 애리조나대학 유전학자 마이클 해머교수는 "기원전 4세기께 한국에서 건너간 야요이인들이 조몬인과 아이누족을 물리치고 일본의 주인이 됐다"고 발표했다.
일찌기 메이지시대의 인류학 및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씨는 "현대 일본인은 조선반도에서 야요이문화와 함께 도래해 선주민인 아이누족을 축출,고유 일본인으로 파생하였고 선주민은 현대 일본인 선조와는 연고가 없다"고 설파했다.
일본왕족 만다친왕은 815년 저술한 "신찬성씨록"에 신별(신령씨족),황별(천황가문),제번(도래인)을 분류하고 한국인이 3분의 2를 점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상은 한반도에 거주하던 우리 선조가 일본의 주인이 되었다는 증언과 기록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선조들을 귀화인 혹은 도래인으로 취급한다.소수의 선주민사회에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귀화하기 위해 건너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국경이나 민족 관념이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점거하면 바로 고향,고국의 연장으로 인식했을 터이다.일본열도에 산재하는 유적에서 지천으로 쏟아져 나오는 한국 유물들을 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일본을 점령해 나라를 세웠음을 여실히 입증할 수 있다
<2> 왜국의 정체
규수지역은 '가야국의 분국'
`왜국` 일 건국기초 주장은 억지
서기 173년엔 왜국여왕 히미코 신라에 사신 보내 즉위 신고하기도
고대 일본인을 왜인이라고 한다.
일본서기 진무기는 "남 규슈에 키가 작고 수족이 긴 종족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고 후한서 동이전과 위지 왜인전에는 "신장이 3,4척"으로 나와있다.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박사는 "왜인은 한국인이 진출한 이전부터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고 설파했다.일본 선주족은 오래 전에 진출했고 매우 왜소했던 모양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지 산해경 등 역사서에는 남양에서 일본으로 북상한 왜인을 남왜,만주와 연해주 거주의 왜인을 북왜라 했으며,중국 발해만 연안,내몽고 동남부,요령성 북부,중국 남부 그리고 한반도 경상도 지방에도 왜인이 있었다고 돼 있다.일본열도 이외의 여러 곳에 왜인집단이 형성돼 있었다는 증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왜"라는 기록은 기원전 50년 왜구가 신라를 침범했다는 대목이 시초이다.중국 한서지리지 왜인전은 "3세기께 낙랑해중에 왜인이 1백여국으로 분할돼 있다"고 적고 있다.위지 왜인전에는 "북 규슈 야마다이국은 여왕 히미코가 29국을 연합해 지배하고 있어 동경1백장과 왕인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 일본은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교과서마다 야마 국 왜 대왜 대화 일본을 모두 "야마토"로 읽는다.이는 "일본은 고대로부터 한국보다 훨씬 앞서 국가체제를 갖춘 강성한 나라였으므로 후진의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역사관을 심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 일본은 야마토를 대왕이 통치했으며 일부 나라에서는 조선반도에 있었던 중국의 관청에 사신을 보냈고 히미코 여왕은 위나라와 교류를 활발히 했다고 교육한다.통일된 왜국이 하나의 맥락으로 오늘에 이르면서 강국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국여왕 히미코가 즉위 직후인 서기 173년 5월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했다는 내용이 있다.신라와 각별히 연고가 두터워 즉위신고를 했다는 설도 있다.히미코의 이름은 태양숭배족을 암시하는 조선고어이며 "가장 존경받는 위인"을 의미하고 있어 가야-신라계 분국의 수령이었다고도 한다(박병식 저 우가야황국 211쪽).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405년 백제학자 왕인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져가 처음으로 일본에 문자를 전파했으며 이전에는 한문글자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일본은 왜국이란 국호를 가질 처지가 아니었으며 여러 지역별로 수령이 할거하고 있어 고유국호를 제정할 입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 사서의 "왜국"이란 기록은 중화사상에 근거해 "왜소한 종족"이라는 천시관념에서 통칭해 왔던 것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불가피하게 국명처럼 써 놓은 것에 불과하며 후일 국명으로 통용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위지 왜인전의 "가야인이 규슈에 진출하여 평민은 한 두명,지위 높은 자는 4,5명의 왜인여성을 데리고 와 처로 삼았다"는 기록을 보면 가야인과 왜인의 내왕이 많았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서지리지는 "일본은 왜국의 별종"이라 했다.일본열도내에만 왜국이 있었다면 "왜국의 별종"이란 표현은 성립될 수 없다.그러니까 가야인이 대거 규슈지역에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가야에 예속된 왜국의 별종" 혹은 "가야국의 분국"이었다는 학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결국 일본이 "왜국"을 일본의 건국 기초라고 주장하는 것은 건국연대를 오래 잡아 천황은 한 혈통으로 세습해 만세일계를 누리고 있다고 과시,후세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우월감을 부풀게 하는 황국사관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3) 가야인의 진출
日 신사들 `가라` 명칭 많아
규슈를 답사하면 지명 유적 전설 신앙에 이르기까지 온통 "가라""가야"와 인연깊은 흔적이 무수히 깔려있다.고대 가라제국인들이 진출한 증거물들이다.
일본의 정사라는 "일본서기"는 천손강림으로 시작한다."니니기노미코토가 휴가규슈)의 구시후루다케에 강림하여 가라구니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찾았고 마침 가고시마현 남쪽 끝 아다에 자리잡아 구야국을 설립했다"는 내용이다.
규슈에는 일본 최초의 궁궐 터가 남아있다.이곳에서 세력을 강화한 가야인 후손이 일본 중심지역인 나라지방을 정벌하여 일본 건국왕 진무천황이 되었다고 전한다.
"구시후루"는 김수로왕이 강림했다는 구지봉과 같은 어원이며 구야국은 김해 금관가야국(가락국)의 전신이다.
김해김씨 족보에 수로왕의 왕자 10명 중 7명이 하동 칠불사에서 수도한 후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같은 시기인 2세기경 남규슈 가고시마 유적에 시치구마라는 지명이 있다.지금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7명의 지배자가 웅거했다는 유적이 있다.
가야신을 모시는 7개소의 신사도 있고 7왕자를 주신으로 모신다.인근에는 가라구니우즈미네신사 등 "가라"명칭을 붙인 신사들이 많다.이 지방 향토사학자들은 "옛날부터 가야국 7명의 왕자가 이곳에 군림하여 세력을 뻗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왕가의 사학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씨는 "일본신화는 가야신화와 흡사하며 연고가 깊다"면서 가야인이 천황가문의 조상임을 간접적 긍정한 바 있다.
일본 개국왕 진무천황의 증조부가 바로 수로왕의 왕자들인 것으로 비정하는 일본사학자도 있다.당시 남규슈는 가야계가 점거하고 신라계 여왕설의 히미코는 북규슈에 자리 잡았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북규슈 후쿠오카 남쪽 세부리산 너머의 사가현 요시노가리의 야요이시대 유적은 일본역사를 바꿔 써야할 만큼 유명하다.가야식 옹관묘와 지석묘,가야유물과 동질인 토기,동검,곡옥 등 귀족들의 장식품,동경,무사들이 착용한 판갑옷,투구,말머리가리개,말안장까지 출토됐다.
유물중에서 가장 진귀한 것은 파형동기이다.이것을 만든 거푸집(주형)도 출토돼 일본 사학자들도 놀랐다.파형동기의 수수께끼를 풀면 북규슈일대에 대한 가야국의 지배 여부를 명확히 파악하게 된다.파형동기의 파는 태양의 불꽃형상이며 권위의 상징이다.김해의 수로왕릉 정문에도 파형문양이 부착돼 있다.따라서 규슈유적에서 파형동기가 출토된 것은 당시 그곳에 수로왕의 왕자나 수령급 집단의 군대가 있었다는 증거물일 것이다.
수로왕릉의 파형문양은 9개파,요시노가리 것은 7개파에 불과하다.파수가 많은 것은 상위자의 의미를 갖는다.요시노가리 파형동기의 파수가 적은 것은 분국임을 추정할 수도 있다.
더욱이 거푸집이 출토된 것은 파형동기를 대량 제작한 증거이며 규슈에 가야국 예하의 왕자급 집단이나 군사력이 엄청났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에가미 나미오박사가 주장한 고대한국의 기마군단이 일본 중부지역을 정벌했다는 기마민족정복설과 합치되기도 한다.
일본 고대사 고사기에 요시노가리일대를 말로국이라 했다.경남 밀양고을이 말라국이었다.말라국의 호칭이 말로국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정설이다.따라서 가야시대에 밀양출신들이 먼저 점거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또 일본서기에 남규슈 사츠마지방을 졸마국이라 했다.삼국사기에 졸마국은 경북 김천군 조마면으로 명시돼 있다.고령 대가야의 성읍국이었던 김천 졸마국 출신의 터전이었던 모양이다.
(4) 일본 最古의 왕묘
후쿠오카 일대는 발닿는 곳마다 가라 가야의 유적 유물이 산재해 있고 후쿠오카시립박물관에는 가야유물이 가득하다.주목을 끄는 것은 후쿠오카시 서부의 사라지역을 흐르는 무로미가와천변의 이이모리유적과 그 인근의 나나다마애유적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이이모리유적에서는 야요이시대의 옹관묘 6백여기를 발굴했는데 모두 가라시대의 김해식 옹관묘임이 확인됐다.집합묘지의 중심부에 가장 큰 옹관묘가 있고 둘레에는 크고 작은 옹관묘와 목관묘가 배치된 특이한 구성이다.
이들 분묘에서 다뉴세문경지름11.1cm),세형동검 2본(길이 33.5cm),세형동모(세모진 창:길이 30.5cm),세형동과날이 넓은 창:길이 27.1cm) 등 조선제 청동기 5개,곡옥 관옥 2백여개가 출토됐다.특히 중심부의 김해식 옹관묘는 두개의 옹광을 맞물려 놓은 합구형으로서 길이 1.8m의 대형이다.
발굴에 참가한 후쿠오카시 교육위원회 다카구라 히로아키씨는 "기원전 2세기경의 대형 옹관묘를 중심으로 한 분묘 배열이나 동경 동검 곡옥을 한 세트로 부장한 것은 지배자의 상징물이므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묘임이 틀림없다"고 발표했다.
이 유적 인근의 나나다마애유적에서는 충청남도 송국리유적에서 발견한 기원전 7,8세기의 송국식토기(무문토기)인 입넓은항아리토기,주발토기 1개씩이 죠몬토기와 함께 출토됐고 초기 전방후원분도 발견됐다.
일본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출토된 조선식 무문토기는 일본의 야요이 토기문화보다 선행하는 원형이며 조선반도에서 농경문화와 철기문화가 현해탄을 건너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놀라워 했다.
이 지역의 "사라"지명도 주목된다.고대지명은 "가라"였다.가라가 사라로 변한 것이다.인근에는 "가라""가야"라는 지명도 많다.유적범위는 7만5천여평에 이른다.1982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묘(왕릉)급임을 확인하고도 경지정리로 말살해 버렸다.일본 신문들은 발굴 당시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반짝뉴스로 그쳤고 고고학자들도 관심밖으로 돌리고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인근의 요시노가리 아요이시대 유적은 대대적으로 복원해 매일 10여만명의 관광객과 학생들이 참관하여 고대사 학습장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유독 사라지역 유적을 매몰해 버린 것은 김해 가라국 왕묘급이 발견되었고 한국에서 건너온 도작문화의 보고였기 때문일까.복원하지 않은 것은 지방문화의 손실이다"면서 아쉬워했다.
벼는 일본어로 "이내"이다.사라지방에서는 "우루시내"라고 한다.일본은 맵쌀을 "우루치"라 하며 "우루"는 우루치의 준말.일본어 5만단어를 한국어와 대조 연구한 재미사학자 박병식씨는 "시내"는 "이내"의 변화음이며 "이내"의 "이"는 쌀,"내"는 껍질이라는 조선고대어라고 풀이했다.북한은 지금도 쌀밥을 "리밥"="이밥"이라 하는 것으로도 입증된다."이내"의 어원은 순수한 한국고어이며 사라지방에서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사라지방은 일본열도 어느 곳보다도 먼저 벼문화를 가진 가라인들이 정착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은 벼를 한문글자 도(도:이내)로 쓴다.한문글자는 중국문자임을 내세워 벼문화는 중국에서 전파된 것이 주류라는 주장이 득세하고 있다.물론 중국에서 4천여년전에 경작법이 번성해 3천년전께 한국에 전파된 것이 다수설이다.벼문화는 사람의 이동으로 수반하기 마련이며 사라지방에 중국인 정착지는 없고 한국 관련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고대한국인이 전래한 것이 분명하다.도는 중국발음으로 "다오"로서 "이내"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5>신화의 고장 이즈모
아라가야신 모시는 축제 열어
고오진다니 유적지서 김해식.신라식 토기
하지키.청동기 등 출토
경북 포항과 마주보는 시마네현 이즈모는 일본 신화의 고장이다.일본은 바다도 "아마",하늘도 "아마"라 한다.가라제국과 신라에서 새 문물을 가지고 배편으로 바다를 건너가도 선주민들이 하늘에서 강림한 천신으로 모셨기 때문이다.지명마저 가라인의 고을이라 하여 아라가야이다.
요즘도 이 지역 고령자들은 이즈모를 "아다가야"로 부른다.아라조,가라조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전후에 아라가야조로 통합됐다.이즈모에서 최고의 천신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즈모신사는 1백여년전까지만 해도 "아다가야 신사"로 불렀다.
주민중에는 출운이라는 성씨가 많은데 "이즈모"라 하지 않고 "아다가이"로 호칭한다.고대에는 아다가야였으나 "야"의 발음이 "이"로 변한 것이다.고대로부터 아라가야신을 모시는 축제를 연례행사로 열며 특이하게도 제수차림에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햅쌀로 만든 "시도키"인데 바로 우리의 시루떡이다.벼농사로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가야신의 은덕이라면서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아다가야는 삼한시대의 경남 함안의 아라가야 지명에서 연유한다.일부 한국사학자는 하가야아래가라)로 보고 고령 상가야에 대응하여 김해 가라국 등 남부지역의 가라제국 전체의 통칭이라는 설도 있다.아무튼 이즈모지방은 고대 가라인(가야인)들이 점거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즈모 신화의 핵심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이며 고령 대가야의 건국왕 이진아시로 추정한다는 학설도 있다.그의 아들 수사노오가 신라에 강림(탄생)했다고 하여 일본역사서에 "신라는 어머니의 나라"라고 하였고 그 연장으로 "이즈모는 일본인의 어머니의 나라(의 국) 혹은 일본국의 뿌리가 된 나라(의 국)"로 기록돼 있다.
수사노오는 용감하고 성격이 거칠었던 모양이다.머리 여덟개 달린 괴상한 뱀을 퇴치했다고 하는데 이 지방을 정복했음을 비유한 것 같다.신라에 내왕하면서 배를 만드는 목재를 가져갔고 일본의 산림조성에 공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수사노오의 아들 오오쿠니누시는 천하를 다스리다가 니니기노미코도에게 북규슈를 이양했다고 한다.
일본 천황가는 세명의 조상신을 모시는데 모두 이즈모의 가라긴이다.천황이 읽는 제문도 "가라신이시어-보살펴 주옵소서"라는 내용이다.
에도시대의 조정중신이며 유학자인 아라이학세키1657~1725)는 "신화의 신령은 인간이다"고 규정했으며 이는 신은 곧 실존의 가야-신라인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즈모에는 엔기식905년 제정한 제사법 세칙)의 국가지정 신사들이 많다.가라신을 모신 신사만이 지정돼 있다.대표적인 이즈모신사의 주신이 신라와 연고 깊은 수사노오이다.모든 국가지정 신사들의 명칭은 가라쿠니이타대신사,가라시마신사,사라가미시라기신사,가라가마신사로서 어김없이 "가라"를 명시해 놓았다.이야)신사와 다마사쿠유신사에도 가라신이 주신이다.
벼농사의 곡창이라는 이즈모평야를 내려다 보는 고오진다니유적에서는 3백58개의 동검과 동탁(구리 종)6개,동모 16개,무기류,동경,곡옥 등이 무더기로 출토됐다.인근 유적에서는 김해식-신라식 토기로 보이는 하지키,청동기가 무수히 발굴됐다.한국 고고학자들은 고대에 가라-신라인들이 전승한 유물이라는 주장이고 이론을 가진 학자들은 대륙과의 교류품이라면서 간접적으로 가라유물임을 인정했다.이는 고대 일본이 가라-신라의 분국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이미 북규슈 요시노가리유적의 가라유물군과 이즈모지방의 가라인 판도를 상정하면 고대 가라인들은 북규슈로 진입하는 항로와 이즈모로 직행한 경우도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6>사이도바루 고분
`원분 형태.지명.부장품 한국식`
`일왕릉` 위장위해 고분 형태 변조
출토유물도 봉인
일본 전역에는 마치 우리나라 고령 지산동 고분군,신라왕릉 고분군 모습과 같은 봉토원분이 15만여기나 있다.가장 많이 분포돼 있는 지역은 부산 건너편 규슈지방이며 1세기께 축조한 것도 더러 있고 2~5세기께 축조한 원분도 5천여기나 된다.이 중에서 약 3천기는 국가 지방 문화재로 특히 동규슈 미야자키현 사이도바루에 집중돼 있는 약 3백기는 "특별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분묘제도는 조상이나 군주를 숭모하는 보수적 관습의 계승이므로 민족에 따라 특성을 가진다.우리 전통분묘는 기원전부터 적석총 석실봉토분 등을 거쳐 봉토원분으로 정형화돼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내부구조는 옹관 석관 목관 횡혈식 수형식 등 다양하다.지배자급이나 귀인의 분묘내에는 토기 장신구 무기류 각종 생활동구를 부장하기도 했다.
일본은 역사교과서마다 "야요이시대에 원분이 돌연히 등장했다"는 교육을 하며 "한국형 고분"임을 부정하고 있다.
마침 지난해 일본 야요이시대 직전의 죠믄말기 유적에서 80cm정도 깊이의 구덩이에 매장한 평장풍속이 확인됐다.봉토원분 묘제가 없었고 원분은 우리 민족이 야요이문화를 가지고 진출하면서 분묘제도를 수반한 것임이 확인됐다.
후쿠오카지역의 원분은 소형인데 비해 사이도바루의 3세기이후 원분은 대형인 것이 특색이다.우리민족 진출 초기에는 소형분묘를 축조했으나 벼농사 번성과 인구증가 집단체제 정비 세력이 강력해짐에 따라 점차 동규슈 지역으로 퍼져 대형원분을 축조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사이도바루의 가장 큰 원분은 지름 1백28m,높이 18m,제사터인 배단까지의 길이가 2백19m로서 엄청난 크기다.지방통치자인 왕급이나 수령급의 분묘라고 한다.사이도바루 지명의 "바루"(원)는 순수한 우리말 "벌"인 것도 특이하고 이곳 고분에서는 가야 신라유적에서 출토된 선형토기 청동기류 무기류 마구 장신구 등과 흡사한 부장품이 출토돼 고고학자들은 "한국분묘와 관련이 깊다"고 시인했다.원분의 형태 지명 부장품 등을 미뤄 우리민족의 세력권이었던 증거라는 학설도 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이들 원분 중 가장 큰 것을 왜국에 최초로 강림한 천신으로 숭앙하는 니니기노미코도의 분묘로 지정했다.그후 왜국 초기의 부족국연합체였던 야마다이국 히미코여왕 분묘로 이름을 바꿨다.니니기노미코도는 김해 금관가야국 김수로왕의 왕자설 혹은 손자 선이라는 학설이 분분하고 야마다이국은 "가야-신라의 분국"이었으며 히미코여왕은 신라계라는 학설이 제기되자 다시 오사호츠카 매사호츠카라며 이름표를 바꿔 붙였다.고고학적으로 여러 대형고분을 어느 왕의 능묘로 특정짓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경우는 "일본고유의 왕릉"으로 위장하기 위해 갈팡질팡한 것이었다.
일본은 1926년 멀쩡한 이 원분을 전방후원분으로 변조하고는 "천왕릉 참고지"로 지정,봉쇄하고 출토 유물도 황실박물관에 봉인해놓았다.천황릉이었다면 굳이 극비리에 형태를 변조하고 부장품을 숨겨놓을 리 만무하다.고분연구 학자들이 발굴전의 고문서를 근거로 "이 원분이 한국식 원분이며 한국계 왕릉임이 분명하다"고 폭로,최근까지 논란이 일고 있다.
<7> 지역왕국
일 부족국 `우가야왕국` 서 파생
북규슈 유적서 가락국 유물 출토
가와치 왕국 주민 대부분 한국인
일본 사학계는 일본열도에 3~7세기 사이에 "수수께끼의 15왕국"이 있었다고 한다.15왕국 외에도 부침한 지역국이 많다.그런데 아직도 이들 부족국의 정체를 명확히 구명하지 못하고 있다.
초고대사연구가 고고오 세이히코씨는 고대문헌학을 근거로 이들 부족국이 기원전부터 규슈지방에 있던 일본 최초의 "우가야왕국"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학설을 펴기도 했다.
고증하기 어려우나 우가야왕국의 존재는 널리 알려져 왔다.우가야는 고령가야로 여기기 쉬우나 "상대의 가야" 즉 가야국 전신이었다고 한다.그후 지역마다 부족국이 난립했다는 것이다.2세기께 북규슈의 히미코왕국 야마다이국=친위왜국과 남규슈의 가야계의 구노국,3세기초 오사카북쪽 효고현에 신라계의 다지마왕국,백제 유물이 출토되는 규슈중부 구마모토현에 히고왕국이 형성돼 있었다.이들 부족국을 규슈왕국으로 통칭한다.
북교슈 유적에서 일본천황의 왕권을 상징하는 "삼종의 신기"(신기:거울 옥 칼)가 한 세트로 출토되었는데 이는 김해가락국 유물과 같은 종류이다.도항해간 초기의 가야 신라세력이 규슈 여러 지방에 분산되어 웅거한 흔적이 이들 부족국이란 게 일본고고학계의 정설이다.
일본 중앙부 나라지방 유적에서는 4세기경 분묘에서 꼭 같은 "삼종의 신기"가 출토됐다.이 시기에 가야-신라세력이 진출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포항 건너편 시마네현 이즈모는 신령이 바다에서 건너왔다는 "신화의 고장"이다.가야-신라유물이 지천으로 출토되며 이즈모왕국이었다고 한다.4세기경 동규슈 미야자키현의 휴가왕국,5세기의 오카야마일대의 시비왕국,오사카 남부에는 가와치왕국,나라현 남서부지방에 가츠라기왕국,나라 남부에는 아츠카왕국,교토북쪽 시가현에 오오미왕조,나라현 천리시 지방에는 아먀토왕조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왕국 왕조는 통일왜국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했다.모두 서일본지역으로 각처에 거점을 잡은 부족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들 지역 유적에서는 삼한삼국 유물이 무더기로 촐토되고 있다.삼한삼국인 집단이 첫 상륙지인 규슈에 잔류하기도 하고 그후 일부집단은 일본열도 중앙부로 이동하는 과정에 형성한 한국계 부족국이었다는 증거라고도 한다.
기비왕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나라로 동진하는 도중의 해상교통이 편리한 세토나이가이 바다를 끼고 히로시마 오카야마의 일원에 자리잡았다.특히 오카야마지방 산비탈에는 5세기경 축조한 한국식 대형원분이 많다.금장식 귀걸이 스에기(신라토기) 작은 철판을 엮은 갑옷 계갑 말머리 모양의 혁대 버클(죔쇠) 가야토기인 특수기대 등 한국유적에서 출토되는 부장품과 꼭 같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또 분묘의 석실 석관에 이용한 석재는 한국인 살았던 규슈 구마모토에서 산출되는 응회암이다.규슈에서 이동한 한국인들의 분묘임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가와치왕국이 있었던 오사카부 남부에는 일본왕족인 만다친왕이 신찬성씨록에 이 지역 주민의 90%이상이 한국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이곳에는 근년에 흙을 산처럼 모아 놓고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일본천황릉이라면서 자랑하는 전방후원분이 있다.일본은 닌도쿠왕릉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믿지 않는다.그런데 이 분묘에서 출토한 동경 칼 등의 부장품이 백제 무령왕릉의 출토품과 흡사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일부 일본사학자는 백제계 대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10> 고구려세력
영락 6년 일본열도 진출
쓰시마의 백제세력 제압
다카마쓰. 후지노키 고분 고구려계 왕 가능성 높아
일본 고고학은 기원전부터의 고분을 전기고분,5세기 이후 고분을 후기고분이라 한다.나라지방에는 후기고분이 많으며 대부분 고구려분묘 양식이다.
분묘내부가 밝혀진 다카마쓰고분의 석실 벽화는 고구려고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고 기토라고분에서는 고구려 천체도가 나타났다.후지노키고분은 도굴당해 부장품 확인은 어려우나 역시 고구려 석실구조이다.이들 고분은 서기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대왕 훈적비 비문내용과 관련이 깊다.
비문해석을 놓고 일본은 "왜군이 고구려와 항쟁하였고 백제와 신라를 정복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며 역사교육의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이에 대해 우리는 "일본이 침탈야욕으로 1883년 일본 군부 스파이 사코중위가 비문 106자를 지우는 등 변조해 놓고 역해석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마민족의 왜국정복 학설로 충격을 준 에마가미 나미오씨는 "야요이시대의 전기고분 출토품은 주술적,보기적이며 농경민족문화가 주류이나 후기고분에서의 출토품은 군사적이고 대륙계 무기,마기 등 화려한 것이 특색"이라고해 고구려군이 일본열도에 진출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369년,백제 근초고왕의 3만 군사 침공으로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했다.391년(영락 1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광개토대왕이 즉위해 이해 7월,백제의 10성을 공략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고구려인 1만명을 데려왔다.여세를 몰아 신라를 공격해 번국으로 삼았다.
영락 6년에는 백제를 굴복시켜 53성을 차지했다.400년 신라의 반발조짐이 있어 고구려는 군사 5만명을 동원해 제압하고는 쓰시마의 신라영지인 임나가라까지 추격해 갔다.당시 "고금신라"로 불린 지금의 쓰시마북부 사스나지역으로 추격한 것이다.이 지역에 가야, 신라유적이 많은 것으로도 입증되며 이병선교수는 지명연구로 구명한 바 있다.
고구려가 승리해 쓰시마 중앙부 니이옛 고구려촌)에 본거지를 두었다.고구려 진출전에 쓰시마 정세는 백제세력이 우세하여 약체인 신라를 괴롭히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신라가 고구려의 번국이라는 인식으로 신라세력을 지원했다.고구려와 신라세력이 합류하여 쓰시마의 백제세력을 제압하고는 백제세력을 지원하는 본거지를 타도하기 위해 일본열도로 진격했다.
"일본서기" 이추왕기(404년 3월)에 당시 상황에 대해 "추쿠시(북규슈)의 삼신이 나타나 무슨 이유로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가하고 푸념하고는 곧 왕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고구려세력에 패망했음을 의미한다.일본사서들에는 "백제인 집단이 왜국에 오려는데 신라가 저지했다"고 은유하고는 "백제는 일본의 예속국,분가였다"며 정반대로 왜곡해 놓았다.
신찬성씨록의 당시 왜국에는 한국인이 90% 이상이었다는 현실에서 소수의 선주민 왜인이 대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을까.실은 왜군으로 통칭하는 왜지의 백제세력이었던 것이다.일본이 주장하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왜군출전설"은 침략사관 고취용의 잠꼬대임이 분명하다.
고구려 진출후 한제이왕이 등장한다."반정"이란 시호를 붙인 것은 제도개혁을 단행한 공적이 반영되고 있으며,고구려 분국왕으로 추정한다(문정창,"일본고대사").이 때의 고구려세력 진출로 왜국에는 고구려 불교가 성행하였고 고승들이 들어갔으며 담징의 걸작품 법륭사 금당벽화 등을 남겼다.다카마쓰고분,후지노키고분,기토라고분 등에 잠들고 있는 혼령도 고구려계 왕일 가능성이 높다.
<24>동탁
가야 기마민족 정복설 입증
생김새 삼한시대 제작방식과 흡사
日 중국 문화 도입설 등 모호한 주장
오사카 북쪽,전차로 20분쯤 거리에 이바라기시 히가시나라유적이 있다.나라지방과 인접한 곳이다.고대인들이 오사카만에 상륙하여 교도와 나라지방으로 향하는 갈림길의 요충이다.
1999년 6월,이곳 히가시나라유적에서 기원전 1,2세기께의 소형동탁이 출토됐다.높이 14.2cm 무게 750g 동탁 몸체에 주조할 때의 구멍이 뚫려 있어 우리 삼한시대 제작방법과 같았다.동탁 내부 위쪽에 소리를 울리는 혀가 매달려 있었고 혀가 부딪힌 부분이 깊이 패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년간 말 목에 매달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종래 일본학자는 소동탁의 형태에 따라 "조선식(한국식) 소동탁",외면의 문양이 다른 점을 들어 "일본식 소동탁"으로 구분했다.일본에서 발굴된 것은 일본제품으로 치부했으며 "대륙의 영향,혹은 교류에 의한 것"라는 등 모호한 주장을 펴 왔다.도쿄대학 다케다유키오교수는 "소동탁은 중국 한시대의 마탁이거나 그 계열의 것"으로 주장하기도 했다.이러한 중국문화 도입설이 지배적이었다.
소형동탁은 우리 삼한시대 지배자나 기병의 말장식품으로 사용한 마령말방울)의 일종이다.마령 마탁 소동탁 등으로 구분되며 마령은 얇은 동판을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외면에 문양을 새겼고 영롱한 소리를 찰그랑거린다.
기원전후에 우리 삼한제국에는 기마군단이 있었으나 당시 왜지(고대일본)선주민은 말 사육을 몰랐다.마령 마탁 소형동탁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에가미나미오박사의 "고대일본을 가야의 기마민족이 정복했다"는 학설처럼 우리 민족이 말을 타고 갔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기원전 1세기께의 마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출토됐다.히가시나라 유적의 것은 둥근 모양이어서 약간 다르지만 같은 계열이다.당시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선주민은 금속문화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자 금속음을 듣기만 해도 진귀한 신물로 여겨 동탁을 두드리면서 제사를 지냈다.점차 대형화하여 높이 1m이상의 것까지 만들어 의기로 삼았다.
대형동탁의 원조인 소형동탁이 오사카지방에서 출토되자 유적발굴관계자들은 "일본 최고의 동탁"이라며 경탄했다.교토국립박물관 고고학실장 나니와요조씨는 "동탁은 규슈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펴졌다는 학설이 유력하지만 이 소동탁 발견으로 기내오사카 나라 교토지방)에서 동탁이 기원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발견"이라고 주장했다.
요즘 일본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기내지방에 고대일본왕권이 존재했다는 이른바 "기내중심설"에 치중한 견해이다.고대 일본성립을 규슈에서 시발했다는 "규슈중심설"을 부정하는 자료로 삼으려는 것이다.일부학자는 "조선(한국)에서 만든 동탁이 일본동탁의 원조로 보이지만 일본에서 일본인이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면서 모방품 취급을 하기도 한다.
이곳 유적은 소동탁 이상으로 중요한 특성이 있다.주거지 둘레에 환호(도랑)를 파 돌려져 있는 것이다.마을 외곽에 목책이나 환호를 돌려 파놓은 것은 외적 침입을 방어하고 주거지에 물이 고이지 않게 하는 장치인데 우리 가야지역에는 석기시대(기원전 4세기께까지)의 울산 검단리,진주 대평리,산청 사월리,창원 남산 등 유적에서 흔하게 조사됐다.
우리민족이 석기시대부터 설치해 왔던 장치가 일본열도에는 약 200년 후에 시행한 것이다.가야인들이 오사카지방에 정착하여 모국의 관습을 재현한 것임이 분명하다.가야인들의 오사카지방 진출이 종래의 학설보다 훨씬 앞섰던 것이라 추정하게 된다.
<25> 백제 木氏
나라현 가모추바 1호분 `백제유물 가능성 높다`
나라현 고세시 가모추바 1호분은 고고학자들이 "백제식 분묘같다"면서 발굴을 미루어 왔다.일부 사학자는 분묘형태가 고구려 적석총을 원류로 하여 백제시대에 흔했던 네모난 방분이어서 발굴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6월초 분묘에 구멍이 뚫려 발굴이 불가피해졌다.분묘내부는 목관이었고 4세기께의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철판을 엮은 단갑갑옷의 일종),화살통,철검,곡옥,동경인 소형의 삼각연신수경과 토기류였다.일본학자들은 "백제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았다.현장을 답사해 보면 유적의 위치가 갈성목씨일족의 거점이었다.이 고분을 발굴한 고세시 교육위원회측은 "나라의 야마토조정(고대일본)이 대륙과 교류한 증거물"이라며 모호하게 발표했다.
일본학자들은 단갑과 화살통 등 무기류는 무시하고 동경에만 관심을 기울여 "종래에는 발견되지 않은 형태이며 단갑 등의 무기류와 함께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사카대학 후쿠나가 노부야 조교수는 "야마다이국(규슈)에서 온 심부름꾼에게 보내기 위해 중국 위나라에서 온 많은 기술자를 임시로 동원하여 단기간에 대량의 동경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같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일본 전국 150여개소에서 약 500개의 동경이 발견되었는데 동경 뒷면의 문양이 다양하고 모양도 각양각색이며 위나라 연호 명문이 있는 것도 있다.이에 눈을 돌려 위나라로부터 일본전신이라는 야마다이국이 위나라로부터 동경 100개를 선물받았다며 자랑해 왔다.
그러나 야마다이국과 야마토조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3세기경 규슈의 야마다이국 히미코여왕은 신라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려는 것이다.
가모추바 1호분에서 출토된 동경을 빌미로 위나라의 기술자 동원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야마토조정이 전국을 지배하여 동경까지 배부한 것처럼 억설을 펴는 것이다.동경은 지역,제작자,시대에 따라 문양 형태가 다르다.동경제작 기술력을 가진 민족의 동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지방에서 발견된 동경 보다 약 100년 앞선 3세기께의 동경이 이미 규슈지방에서 출토된 바 있다.동규슈 미야자키현 난고손백제촌) 미카도신사에 백제에서 전래된 동경 33개를 보관하고 있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발표하지 않았다.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 1~5세기께의 철검과 함께 동경이 출토되었다.북규슈 마에바루 유적에서도 유사한 것이 나왔다.가모추바 1호분 출토 동경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한국세력 진출을 해명하는 열쇠이다.도쿠시마 문리대학 이시노 히로노 부교수는 "현지생산의 많은 토기를 분묘에 부장한 것을 보면 현지인이 만든 동경이며 분묘의 매장자는 그 지역을 지배한 왕급 인물로 갈성목씨 전성기의 갈성습진언소쓰히코)의 분묘"라고 규정했다.
이미 앞서 밝힌 것처럼 갈성목씨는 갈성을 점거한 백제 8대성씨인 목씨이다.백제인 목라근자 일족은 나라지방에 군림,목만치를 선조로 소가 가라코,소가 이나메,소가 우마코,소가 에미시,소가 이루카 등 9대에 걸쳐 약 300년간 지배했다.
백제목씨가 갈성목씨와 소가씨로 스스로 개명한 것인지 또는 후일 일본학자들이 "일본인화하기 위해 변조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일본학자들의 "야마토 왕묘" "갈성목씨 지배" 학설을 종합하면 가모추바 1호분 발굴로 야마토 조정은 백제인이 왕이었고 백제분국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4세기께 나라지방의 "야마토 조정 존재설"은 허물어지게 된 것이다.
일본사학계는 아직도 일본의 체제성립과 "일본"국명의 제정연대 등에 대해 정설을 찾지 못하고 있다.천황을 만세일계로 고대에 한삼국을 정벌했다는 등 역사를 왜곡해 놓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의 총인구는 선주민 아이누족과 일부 해양족을 포함하여 7만5천800명에 불과했다.그 직후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자 9만4천900명으로 급증,8세기의 나라시대(710~784)에는 539만9천800명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일본국립민속박물관 고야마슈조오교수의 통계).
우리 삼한집단이 진출한 후 아이누문화(죠몬토기)는 종적을 감추었는데 삼한인에게 격퇴당해 북쪽 끝 홋카이도와 남쪽 끝 오키나와로 쫓겨났다는 것이 정설이다.우리민족이 90%이상 차지한 것이 분명하다.4세기께 나라현 히가시토노고분에서 발견된 15척 선단을 묘사한 선각화,그 동쪽해안의 미애현 다카라쓰카에서 출토된 선형하니오(흙으로 만든 장식물) 등 각처에서 발굴된 배 유물은 우리민족이 선편으로 건너갔음을 보여준다.7세기에 일본 중앙부에 우리문화를 꽃피운 도읍지를 우리말 "나라"로 불리게 된 것만 미루어 보아도 삼한삼국인이 점거했음을 새삼 설명할 여지조차 없다.
일본은 한국 중국에서는 고대로 "왜지"로 통칭했다.왜소한 인종이라하여 왜지,왜인으로 통칭하던 중 3세기에 왜인 사절이 가자 문서에 적다보니 중국사가들이 부득이 "왜국"( 국)으로 기록하게 되어 국명처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당시 발해만 연안,큐슈일원에 동남아에서 올라간 왜소한 해인들이 많아 큐슈지방을 기준으로 왜국으로 통칭한 것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국명이 서기 607년에 제정했다고 주장한다.이해 야마토국이 수나라 양제)에게 오노이모코를 사절로 보낼 때 "해 뜨는 곳 천자일본왕)가 국서를 보낸다"는 글귀를 썼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내세운다.그러나 오노이모코가 가져간 국서는 수 양제로부터 "무뢰한 야만인의 문서"라며 문전축출당했다.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억지주장을 펴는 것이다.당시 중국 주변국들은 중국 승인없이 국명을 제정할 수 없었던 시대였으며 이로 미뤄 607년 일본국명이 제정됐다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라-당군 합세로 백제가 660년 멸망하자 663년 백제 복국을 꾀하며 왜지에서 대군을 편성,부여 백마강(백촌강)으로 진격 항쟁했으나 전멸당했다.이때의 출전군을 "왜군"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엄연한 "왜지의 백제인"이었다.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함에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 대거 왜지로 피난,망명해 갔다.왜지의 "백제계 조정"은 고국에서 몰려 든 중신들을 요직에 등용했다.30여년이 흐르면서 왜지의 한삼국인들은 본국에 의존할 근거가 없어져 독자적인 행보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8세기초의 702년,아와타노마히토를 당나라에 보내 측천무후)에게 왜(왜)자는 왜소한 인종,비천한 글자이므로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할 것을 상소하여 승인받았다.고대 삼한인의 통치에 따라 우리민족이 제정한 셈이다.
그 동안 삼한삼국세력이 부침했던 나라지방은 702년의 국명제정을 고비로 통합,정돈을 서둘러 710년부터 "나라사대"를 열었다.이에따라 712년 "고사기",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등 인식전환과 정치기반을 형성해 나갔다.일본사학자 추나노 요시히코씨도 "7세기이전에는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끝-
<26>다이마(당마) 고분
삼총고분군 한국인 정착 실증
창녕 교동 등 고분군과 같아
다이마는 백제계 씨족 성씨
다이마는 백제계 씨족의 성씨로 나라현 기타가쓰라기군 다이마초라는 지명으로 계승되고 있다.
지난 6월 이곳 미쓰즈카고분군에서 6세기말부터 7세기말까지의 원분과 방분 등 고분 33기를 발굴했다.횡혈식분묘 15기,봉분이 허물어진 석실분묘 14기,목관묘(널무덤)와 토광묘 각각 2기 등이다.고분군은 풍수설에 따른 듯 동남쪽에는 물(강),뒤에는 산을 배경으로 한 형세이다.경북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함안 말산리 고분군,경남 창녕의 교동고분군,계성고분군에 들어선 것으로 착각할 만큼 똑같은 모습이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시라이시 다이치로(고고학)부관장은 "이 고분군은 정치적 사회적 기능이 점차 약화.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지극히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나라현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는 "이 고분은 고대 중국의 풍수사상에 따라 묘소를 선택한 고분으로서는 일본 최고의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매장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다.일본학자들을 "고대 중국의 풍수사상에 따른 묘소"라면서 중국의 풍수사상을 직수입한 것처럼 위장하기에 급급하다.
고대한국은 일찍이 중국 풍수설을 도입하였고 원분은 전통적인 한국묘제이다.왜국 선주민 아이누족이 직접 중국풍수설을 도입하여 산지에 원분을 구축했을리 만무하며 미쓰즈카고분군은 한국인들의 정착을 보여주는 실증인 것이다.고대 이 지역의 주민분포와 정치현상을 종합적으로 검증해도 한국인의 묘소인 것을 알게 된다.
이 고분군지역은 앞에서 지적한 백제 목씨 일족이 점거한 지역이다.이 지역에는 백제 도검제작자가 많기로 유명하며 오늘날까지 명물인 일본도 다이마모노 원산지로 전해 오고 있다.
서기 612년 백제계로 추정되는 마려자 왕( 왕)이 오사카의 가와치에 만법장원 사찰을 창건했으며 681년 기타가쓰라기군으로 이전하면서 당마사로 개칭했다.당마는 당초 당마에 연유,백제전신 마한의 뿌리라는 뜻이기도 하다.기타가쓰라기군은 660년 백제멸망 전부터 존재했다.나라시대(710~784년)에 당마사의 보수 자료를 보면 동탑과 서탑으로 구성되어 있는 등 백제불교 양식이다.이 사찰에는 당마만다라불화(국보)가 전한다.불화 역시 전남 승주군 송광사의 불화(탱화)와 같은 계열이다.
이 무렵 왜국으로 망명해 간 백제인들은 백제 전신인 마한을 백제의 뿌리로 삼으려는 인식으로 당마사를 창건,백제불교의 명맥을 계승하려 했다.그런데 이 당마사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 승려도 합류했던 흔적이 많다.신라가 일본열도내의 한삼국세력을 통합하려 했던 움직임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백제사학자 오노야스마로려)가 "백제계 일본"체제를 구상하여 백제편중의 역사서 "고사기"(712년)를 다시 쓰게 됐다.이에 가야 신라계의 반발로 8년후 "일본서기"(720년)를 다시 쓰게 됐다.이러한 역사서 찬술을 계기로 왜국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국호를 개칭하여 신라와 등지고 독자적인 체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사학계의 "일본"국호와 천황제도가 천무천황때부터 시행됐다는 학설은 "일본서기"의 개작에 의한 것으로 정당하지 않다.
<27> 전쟁터 인골
동해지방서 고대일본 진출 입증
턱뼈 발달 안돼 한국 유골 확실 `도랑구조` 농경문화 전파 증거
동해지방서 고대일본 진출
입 턱뼈 발달 안돼 한국 유골 확실 `도랑구조` 농경문화 전파 증거
옛 신라땅인 경북 포항의 동해 건너편 시마네현 이즈모지방은 가야인(가락국인)들을 하늘에서 강림한 신으로 숭앙했던 곳으로 유명하며,그 동쪽에 인접한 돗토리현 일대에도 가야.신라문화가 무진장으로 뿌리박고 있다.지난 5월 돗토리현 아오야가미지절터 유적에서 53인분의 고대 한국인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됐다.우리민족의 진출경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골을 감정한 돗토리대학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해부학)교수는 "2세기께의 유골이며 아래턱뼈가 발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래계 야요이인의 유골"이라고 발표했다."도래계 야요이인"이라는 괴상한 호칭은 한국인임을 직설하지 않으려는 말법이다.유골의 아래턱 뼈가 발달하지 않은 것은 벼농사를 발전시킨 가야.신라인들이 쌀 등의 곡식을 주식으로 먹었기 때문이다.일본 선주민 아이누족은 주로 산지에서 동.식물을 수렵.채취하여 거친 식품을 먹어 턱뼈가 발달했는데 이를 비교하면 "한국인 유골"임이 틀림없다.
유골은 판자모양으로 다듬은 말목을 박아놓은 길이 15m,너비 8m,깊이 80cm쯤의 도랑에 첩첩이 쌓여있다.10세에서 40대쯤의 남녀 유골로서 그중 10인분의 두개골 및 늑골서 화살촉 칼 작살 등의 상처가 확인됐다.매장한 것이 아니라 대충 흙을 덮어놓았는데 전쟁에 휘말려 사망한 주민의 시신을 도랑에 버린 것으로 보인다.2세기는 가야인들이 벼농사법을 가지고 들어간 지 400여년 후이며 벼농사 기반이 확립된 시기이다.화살촉,판자모양의 말목,도랑 구조는 무력과 농경기술의 발전을 엿보게 한다.
중국 고대사 한서지리지의 기원전 108년 기록에 의하면 왜(일본)에는 1세기께 이래 100여개국이 분립돼 있었다.3세기의 진나라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왜인조에는 서기 239년에서 243년께 히미코여왕이 지배한 야마다이국시대가 30여개국으로 흡수 통합됐다고 기록했다.
그후 5세기에 이르면 왜국에는 더 많은 소국들이 각처에 거점을 잡고 있었다.중국 송서에 478년 송나라 순제)에게 왜왕 무가 보낸 상표문에 "동쪽은 모인에미시족) 56개국을 정벌,서쪽은 야만인 66개국을 복속,바다북쪽은 95개국을 평정" 운운한 구절이 있다.여기서 거론한 것만 217개국이나 된다.당시 왜에는 많은 소국들이 난립하여 분쟁이 그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돗토리현 유적 주변에는 한국 전통 고분이 많고 이 유적의 화살촉 쇠칼 작살 등의 무기류와 연장은 삼한.삼국시대에 한국인들이 철기문화.벼농사와 함께 사용했던 것들이다.이로 미루어 보면 무주공산인 고대일본에 간헐적으로 진출한 삼한 삼국 각 세력간의 세력권 확보,벼 수확물 등 이익 보호를 위해 분쟁을 벌였던 것을 암시해 준다.일본 개국왕인 가야족 신무천황은 규슈에서 출발하여 세토나이카이~오카야마~오사카를 거슬러 올라 북상하였고 이 돗토리지방의 유적은 우리 동해지방에서 진출했던 것을 입증하고 있다.
1693년 동래출신 안용복이 독도에서 오키노시마를 거쳐 상륙하여 하쿠기슈(현미자시)주지사를 만나 "독도는 우리 땅"임을 담판지은 곳임을 상기하면 옛적부터 왜국으로 진출한 동해항로였고 고서 이미자유래기에 가야.신라인이 선편으로 담배 한 대 참에 도착하는 한지서라국이라며 찾아간 지역이다.
<28>부본전
`8C초까지 신라의 영향력` 실증
나라현 아스카지방에 관한 고대사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지명부터 검증할 필요가 있다.
"아스카"지명은 본래 우리말 안숙이었다.우리 삼한인들이 편안하게 정주하는 지방이라는 데서 연유한다.안라인함안인)들이 선점하여 "안라인의 안식처"라는 의미로 불린 지명이라는 학설도 있다.일본은 "아스쿠"(안숙)로 부르다가 후일 "아스카"로 변해 얼토당토않는 "비조"라는 한자를 붙인 것이다.
아스카지역이 우리민족의 정착지였다는 사실은 일본왕족 만다친왕이 저술한 "신찬성시록"에 "아스카에는 도래인(한국인)이 약 90%나 거주하고 있었다"고 명시한 대목으로도 알만하다.
1998년 이곳 나라현 아스카의 아스카지유적에서 부본전이라는 엽전이 발견되었다.완제품 33점과 노적,주형(거푸집)파편,제작때 실패한 파편 등 3천여점이 쏟아져 나왔다.대량으로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엽전은 동구리)을 10%에 철과 안치몬(원자기호 51의 합금용 광석)을 90%쯤 혼합하여 주조하며 특수기술을 요한다.
일본학자들은 "일본은 이미 7세기말경에 화폐로 유통한 것으로 추정되며 화폐제도연구의 제1급 자료"라고 분석했다.
종래 일본역사서에는 무사시국도쿄를 포함한 관동지방)에서 발견된 서기 708년에 주조했다는 화동개진(화동개진)엽전이 일본최초의 화폐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보다 40여년전에 만든 부본전이 나타났으므로 역사서를 다시 고쳐 써야할 입장이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화동개진"엽전이 출토된 무사시국 지지부에서 서기 708년 1월 일본최초의 동광산이 발견되어 연호를 화동(화동)으로 제정하는 등 국가적 일대경사였다.그러나 일본사학자들은 동광산을 발견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교과서에도 절대로 싣지 않는다.이 지역은 3세기부터 가야 신라인들의 정착지였고 신라인 김상원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본전을 만든 아스카지방에는 일본최초의 궁궐인 아스카경궁내에서 경주안압지를 본뜬 연못이 발견되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일본정사라는 "일본서기" 천무천황 4월조에2년:서기 683년) "천황이 동전을 사용할 것이며 은전은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마치 그 이전에 은전을 화폐로 통용했다가 동전으로 교체한 것같은 문맥인데 이 대목은 역사를 과장하기 위해 후일 조작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기원전 1세기(삼한시대)경의 오수전이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발견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본전과 유사한 엽전은 부산 건너편 고대 한삼국 세력권인 야마구치현 나가토 등 한국식 산성이 있는 여러지방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또 신라에서는 일본의 부본전보다 1세기쯤 앞서 중국당나라 엽전을 본받아 주조했으며 통용하지 않고 보관중이었다.
일본의 부본전을 만든 천무천황은 어떤 인물일까.그는 일본 최초의 점성대를 나라지방에 설치했다.세계 최초의 천문대인 신라의 경주 첨성대를 본받은 것이었다.조정중신들의 관복마저 신라의복에 따르는 등 신라제도와 문물에 주력,신라계였다는 학설도 있다.그는 신라가 보관중인 엽전을 표본으로 도입하여 부본전을 만들었으나 기술미숙으로 결함이 많고 물물교환시대여서 통용하기 어려워 폐기한 것으로 보여진다.
부본전의 발굴은 삼국통일 이후의 8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영향력이 일본에 크게 미치고 있었음을 실증해 주는 자료가 됨직하다.
<30>`日本`의 성립
8C초 백제. 고구려 유민이 제정
본국과 단절 독자적 행보 모색
일본사학계는 아직도 일본의 체제성립과 "일본"국명의 제정연대 등에 대해 정설을 찾지 못하고 있다.천황을 만세일계로 고대에 한삼국을 정벌했다는 등 역사를 왜곡해 놓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의 총인구는 선주민 아이누족과 일부 해양족을 포함하여 7만5천800명에 불과했다.그 직후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자 9만4천900명으로 급증,8세기의 나라시대(710~784)에는 539만9천800명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일본국립민속박물관 고야마슈조오교수의 통계).
우리 삼한집단이 진출한 후 아이누문화(죠몬토기)는 종적을 감추었는데 삼한인에게 격퇴당해 북쪽 끝 홋카이도와 남쪽 끝 오키나와로 쫓겨났다는 것이 정설이다.우리민족이 90%이상 차지한 것이 분명하다.4세기께 나라현 히가시토노고분에서 발견된 15척 선단을 묘사한 선각화,그 동쪽해안의 미애현 다카라쓰카에서 출토된 선형하니오(흙으로 만든 장식물) 등 각처에서 발굴된 배 유물은 우리민족이 선편으로 건너갔음을 보여준다.7세기에 일본 중앙부에 우리문화를 꽃피운 도읍지를 우리말 "나라"로 불리게 된 것만 미루어 보아도 삼한삼국인이 점거했음을 새삼 설명할 여지조차 없다.
일본은 한국 중국에서는 고대로 "왜지"로 통칭했다.왜소한 인종이라하여 왜지,왜인으로 통칭하던 중 3세기에 왜인 사절이 가자 문서에 적다보니 중국사가들이 부득이 "왜국"( 국)으로 기록하게 되어 국명처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당시 발해만 연안,큐슈일원에 동남아에서 올라간 왜소한 해인들이 많아 큐슈지방을 기준으로 왜국으로 통칭한 것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국명이 서기 607년에 제정했다고 주장한다.이해 야마토국이 수나라 양제)에게 오노이모코를 사절로 보낼 때 "해 뜨는 곳 천자일본왕)가 국서를 보낸다"는 글귀를 썼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내세운다.그러나 오노이모코가 가져간 국서는 수 양제로부터 "무뢰한 야만인의 문서"라며 문전축출당했다.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억지주장을 펴는 것이다.당시 중국 주변국들은 중국 승인없이 국명을 제정할 수 없었던 시대였으며 이로 미뤄 607년 일본국명이 제정됐다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라-당군 합세로 백제가 660년 멸망하자 663년 백제 복국을 꾀하며 왜지에서 대군을 편성,부여 백마강(백촌강)으로 진격 항쟁했으나 전멸당했다.이때의 출전군을 "왜군"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엄연한 "왜지의 백제인"이었다.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함에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 대거 왜지로 피난,망명해 갔다.왜지의 "백제계 조정"은 고국에서 몰려 든 중신들을 요직에 등용했다.30여년이 흐르면서 왜지의 한삼국인들은 본국에 의존할 근거가 없어져 독자적인 행보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8세기초의 702년,아와타노마히토를 당나라에 보내 측천무후)에게 왜(왜)자는 왜소한 인종,비천한 글자이므로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할 것을 상소하여 승인받았다.고대 삼한인의 통치에 따라 우리민족이 제정한 셈이다.
그 동안 삼한삼국세력이 부침했던 나라지방은 702년의 국명제정을 고비로 통합,정돈을 서둘러 710년부터 "나라사대"를 열었다.이에따라 712년 "고사기",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등 인식전환과 정치기반을 형성해 나갔다.일본사학자 추나노 요시히코씨도 "7세기이전에는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