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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13 / [열 처녀의 비유] 하늘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유할 수 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을 채우는 것을 잊어버렸고 4)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가득히 채워 가지고 있었다. 5) 처녀들은 밤이 늦도록 신랑이 오지 않자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쯤 되어 `신랑이 온다. 나와서 맞아들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7)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손질하였다. 8) 기름을 채워 놓지 않은 다섯 처녀들이 다른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의 등잔불이 꺼져가기 때문이었다. 9) 그러자 다섯 처녀들이 대답하였다.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마저 모자라게 돼. 그러니 가게에 가서 너희가 쓸 것을 사오는 것이 좋겠어.'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를 하러 들어갔고 문은 잠겼다. 11) 그런 뒤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돌아와 문밖에 서서 소리쳤다.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12) 그러나 신랑이 안에서 말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13) 그러므로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그날과 그 시간을 너희는 모르지 않느냐?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강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9) 천국이 신랑을 신부에게로 데리고 갈 신부의 들러리들과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신랑을 맞이하여 안내해야 하는 사명을 자진 자들이 가질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천국이 올 때의 속성을 알려주십니다. 신랑을 맞이하여 신부에게로 안내하는 신부의 들러리들은 밤에 신랑이 오므로 등불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신랑이 오면 알아볼 수 있도록 등불을 계속 켜놓아야 하고 신랑을 안내하여 데리고 가려면 등불과 함께 넉넉한 기름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더욱이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때 슬기 있는 자들은 신랑을 맞이할 기름이 넉넉히 준비된 자를 말하며, 미련한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들러리들과 같이 종말에 천국을 기다리는 자들도 미련한 자들과 슬기 있는 자들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천국이 오지 않는 다고 하여 믿지 않는 자들과 믿으나 더디온다고 하여 준비하지 않고 세상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맞이하는 결과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속히 오리라 하신 주님의 약속에 오늘이나 내일이나 주님 오시려나 항상 깨어 준비하며, 매일을 종말같이 성도로서의 신앙적 삶을 점검하고 천국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10-13) 신랑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결코 혼인잔치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신랑이 오시는 시간을 자신들이 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종말의 천국 또한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주님과 함께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넉넉히 기름을 준비하고 성령충만함을 입어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면서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적용: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시간 중에 하나님의 시간, 때가 몇 번이나 찾아오셨는지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인생 최고의 기쁨은 영육이 즐겁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반길 수 있는 신앙을 갖춘 자의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못 보는 사람이 내일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당연히 인생의 종말을 설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영육을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에 의심이나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 기다리며 간절히 바라며 고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 설 교 >
성도에게 준비하는 삶이 왜 필요한가?
마 25:1-13 / 최종천목사
Content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하늘을 나는 새 그리고 들의 풀을 말씀하시며 <28절>에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이 세상 일로 인하여 염려하는 것은 아니나 언제나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 속에 주님을 맞이해야 할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때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 못하나 우리는 언제나 준비된 자세로 우리의 삶을 대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언제 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항상 감격과 긴장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평안과 은혜와 기쁨,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속에 편안함을 주시지만 또 늘어지고 나태할 수밖에 없는 이처럼 마음에 긴박감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은혜의 축복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평안과 긴박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주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나태하고 책임감이 없는 늘어진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을 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준비를 생각합니다. ‘나는 과연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나, 주의 천국에 입성할 준비가 되어있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열 명의 처녀가 등을 준비하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랑이 홀연히 임하게 되었을 때 그중에 다섯은 그 등에 기름이 준비되어있어서 그 등불을 밝혀 신랑을 맞이하여 연회석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섯 명의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빈 등을 가지고 있다가 그 기름을 사러 갔지만 돌아와 보니 이미 연회장의 문은 닫혀있고 슬픔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홀연히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가 준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주의 은혜와 영광 가운데 참여하여야 될 자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됐는지, 천국에 가야 할 준비가 됐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보면서 먼저 생각하는 것은 착각과 구별입니다. 한 번 따라서 합니다.
“착각과 구별”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보고 긴장해야 할 구원의 은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문제는 착각함과 구별됨입니다.
<마24:40-41>을 보면 두 사람이 밭에 있다 한 사람만 불려 올라감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하다가 한 사람만 올라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모양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그 모양 갖춘 사람이 다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따라서 구별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서 거하시는 하늘나라로 불려 가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기대되는 바입니다. 하지만 밭에 있다가 혹은 맷돌질을 하다 혹은 우리의 생활 속에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거나 우리를 부르실 때 모두가 다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주님 만나고 주님나라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어떤 예고했던 특정한 시점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우리 날 중에 우리도 모르는 일상적인 한순간에 임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는 달란트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주인이 종들에게 돌아오는데 그 역시 미리 정한 한 시점이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예기치 못했던 시점에 돌아와 그 종들의 모든 일을 결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잘 아는 신랑 맞으려고 등불 준비하고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시간이 돼서 그러나 사람들은 예기치 못했던 시간에 신랑이 오지만 신부들 중에 다섯 명은 등도 기름도 있어 신랑 맞이하고 다섯 명은 등은 있으나 기름이 없어 불 못 밝혀 맞이하지 못하고 밖에서 슬피 울며 고통당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준비의 외양은 비슷하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양뿐 아니라 실제 내용이 어떠했는가에 따라서 구별되고 일부는 맞이하고 일부는 맞이하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위협적인 내용입니다. 매우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슬피 울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다섯 처녀는 자신이 분명히 신랑을 맞이할 줄 알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를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이 오시는 시간을 우리에게 확정하여 미리 알려 주시지 않고 어느 땐가 주님께서 홀연히 오신다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 다섯 처녀처럼 문득 임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서 우리는 구원받을 믿음과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등을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했던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여 즉, 주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지만 나머지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기회가 되었을 때 신랑을 맞이하는 연회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주님 구원의 영원한 나라에 입성하지 못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격은 무엇이냐 하면 이 다섯 명의 나머지 들어가지 못했던 처녀들도 자기들이 신랑을 맞이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기다리고 있고 똑같은 모양으로 있었는데 다섯 명은 신랑을 맞이하였고 다섯 명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딱 반수라고 말할 수 없지만 두 무리로 분명히 구획되고 구별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두가 주님의 나라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외양도 비슷하고 무엇 하나 구별되는 것 없었는데 어느 순간 주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오실 때 문득 우리 가운데서도 들어가는 사람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나 놀라운 일인 것 입니다. 다른 것은 모든 것 어쨌든 감수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그 절대 가치인 성도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을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미처 준비하고 대처하지 못하여서 자신의 모습을 착각하고 있는 결과, 결국 그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너무 쉽습니다. 나는 쉽게 예수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마음에 확신되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너무나 여러 번 강조하시는 것을 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전혀 알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려다가 근심하고 돌아간 청년의 모습을 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다 땅을 사서 경작해야 해서, 장가들어야 돼서 돌아가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심지어는 <누가복음 9장>에는 아버지 장례 치르고 오겠다는 가족과 작별 인사하고 오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도 주님은 마음에 상심하셨습니다. <눅9:62>을 보면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가는 자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또한 천국에 가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말씀을 지킨다고 그 마음에 확신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구원이 보장된 것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방금 말씀드린 <마태복음 24장> 말씀처럼 똑같이 맷돌질 하다 똑같이 밭에 있다가도 누구는 천국 가고 누구는 천국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오늘 혹시라도 이 가운데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이 가운데 일부 누군가가 가고 일부 누군가는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다면 도대체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천국에 간다는 구원의 역사 때문에 너무 많은 것에서 구별되었습니다.
애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 간다는 소망 때문에 나름대로 희생과 헌신을 치르면서도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믿음으로 확실히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좌절과 죽음의 공포 가운데 처해야 합니다. 그것은 죽음은 무서움과 공포일뿐입니다. 마치 율법은 인생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어서 우리 인생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구원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이 율법의 용도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분명 용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구원이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제까지 우리 믿음생활을 통해서 확실한 효과를 보고 있었던 것은 우리는 천국에 절대 못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그 지옥의 그 고통과 아픔을 알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가는 믿음을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등을 가지고 있으나 같이 밭을 갈고 있으나 같이 맷돌 갈고 있으나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장해 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많다는 것은 주님은 우리들에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착각하고 있나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생각에 휩쓸려 내가 어떤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혹은 내가 찬송을 부르고 있다고 내가 기도를 하고 있다고 그것 자체가 나의 모든 믿음을 보장하고 나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적어도 그렇습니다.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그 가운데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본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생각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본심이 나타나는 것은 어려운 순간 또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할 때입니다. 때로는 내 마음의 생각에 휩쓸려 내가 어떤 착각을 하고 내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가 착각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배척받아도 그리고 모두에게 버림받아도 우리는 꼭 환영받아야 할 분이 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본심은 내 삶에 드러나는 행태로 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숙과 미숙의 차이는 아닙니다. 미숙하면 성숙해지면 됩니다. 그것은 마음에 당연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선인지 악인지, 내가 구원받은 백성이 지녀야 할 마음에 분명한 기준이 있는지 없는지, 내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있는지 악행이 있는지 우리는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결정적인 중요한 순간에 움직여지고 나타나는 내 마음을 보고 우리는 내 마음의 중심과 상태와 본 모습을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등을 준비한 것 즉, 외양을 준비한 것과 기름까지 준비해서 등불을 밝혀 신랑을 맞이하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경건의 모양뿐 아니라 경건의 능력까지 있는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내가 분명한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판단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다면 과연 나는 이러한 모습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나, 나의 행동은 선한 열매인가 악한 열매인가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착각하면 우리는 큰 실패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고 어느 순간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이 땅에 남아 있을 자가 구별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는 방향의 문제입니다.
가장 어렵고 또는 가장 쉬운 천국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주님이 말씀대로 하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음의 확신과 우리의 행동은 양면이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은혜를 확신하면서도 우리가 연약하다 보니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았다 안 받았다는 문제가 아니고 구원받은 자의 성숙과 미숙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참 어려운 것은 이러한 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대단한 노력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주님께 이처럼 힐난을 받았습니까. 그들의 멸망을 주님께서 왜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은 노력하되 엉뚱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겁니다. 그들은 사실 경건하지 않았어요. 전혀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경건한 것처럼 꾸미려고 한 노력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 꾸민 경건을 인정받으려고 그와 같이 노력했고 경건을 주장했을 뿐입니다.
진실은 주장하지 않아도 진실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꾸민 것 위장한 것은 그 자체가 빛이 없으므로 주장하고 위장하고 노력해야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힘들게 믿음 생활하니 다른 사람의 평안함을 보면 속이 상할 수밖에 없고 비판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우월을 주장해야만 우월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격적이고 가해적이고 위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 문제는 심지어는 하나님에게조차 자신의 의를 주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에게 주장하다 보니 가속도가 붙고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인양 자기 스스로도 거짓 설득되어 자신이 그렇다고 믿는 것입니다. 거짓말 오래 하다 보면 그것이 자신에게 진실로 느껴져요. 전혀 자신조차도 속아 넘어갑니다.
여러분,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것 들으셨죠? 언젠가 보니까 텔레비전 드라마도 그런 것 하던데요. 이름이 리플리 어떻게 된 것 같던데. 제가 정확하게 기억은 못 하겠습니다. 자기가 어떤 상태에 대해서 환상 가지고 꿈꾸고 또 그대로 살면서 거짓말하다 보면 나중엔 자기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몰라요.
자기 자신은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느 한순간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겠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경건을 위장하고 내가 경건에 대해서 거짓 꾸미고 그것을 주장하다 보면 내가 정말 그것이 경건이고 내가 경건한 사람처럼 생각돼요.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가장 낮고 겸손한 자 되어 하나님께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고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 때문에 구원받음을 믿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기대어 자신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아픔을 알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나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준비하며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준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귀찮고 힘들어서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그래도 꽤 괜찮은 수준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준비를 안 하는데 막상 평가의 시간이 되면 전혀 기준에 미달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진실히 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겸손히 보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어요. 내가 나를 봐야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 부족하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가 나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회개가 왜 중요한지 알아요? 회개가 왜 힘이 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의 죄악을 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통회하면 그 순간 보이는 것 있어요. 회개하고 통회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요. 부족하고 누추한 내 모습이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는 더욱더 누추하고 부족해서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느껴지는 것이 뭐죠. 우리의 겸손, 깨달음, 하나님 앞에 통회함이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게 되어 그 영광을 힘입는 능력으로 우리는 변화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한 상태 때문에 준비하고 내가 분명히 부족하니 이대로 있다가는 어려움 겪을 것이라는 마음이 더 강해 귀찮음과 힘듦을 극복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 나 자신을 보고 주님을 보면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 마음에 합당하게 움직이도록 우리의 부족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잘 아는데 실행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실행이 안 되는 겁니다. 잘 알면 실행됩니다.
전에도 지행합일이라는 말씀 드렸죠?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이게 하나가 돼야 한다. 라는 당위론적인 얘기일 수도 있으나 알면 행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확실히 아는데 그것을 안 행합니까. 제가 늘 이렇게 말씀드리면 15층에서 뛰어내리니까 나 죽는다는 것 깜박 잊어버려서 뛰어내렸다. 이런 사람은 없어요. 분명히 아는 것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실수는 잘 모르는 거예요. 실수는 실력이지 그것이 그냥 잘할 수 있는데 못한 게 아닙니다. 완벽하게 할 수 없는 능력이 실수입니다.
여러분 한 번 봅시다.
우리가 전철을 타고 간다고 합시다. 돈도 없고 카드도 없는데 어쩔 수 없어서 무턱대고 갈 줄 알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있는 줄 착각하고 주머니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가는 사람이 더 많겠죠. 없는 줄 알면 대책이라도 세웁니다. 항상 믿음 안에서 사고치는 사람은 자신이 믿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라요. 실제 믿음이 없거나 잘못된 믿음이면서 자신이 옳은 믿음 소유하고 잘 믿고 꽤나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나중에 큰 낭패를 봐요.
오늘도 이 등을 준비한 열 명의 처녀 중에 다섯 명의 처녀는 등불까지 준비해서 신랑 맞이합니다. 그런데 다섯 명의 처녀는 등은 있는데 기름이 없어요. 만약에 이 다섯 명의 처녀가 이 등까지 없었다면 그렇게 편안하게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이 등, 형식이라는 것만 있는 것이 오히려 이들에게 더 큰 어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확실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만약 방향은 바른데 그 상태가 미숙된 상태라면 우리는 노력하고 애쓰고 또 우리는 시간이 지나 기다리면 돼요. 문제는 마음의 열심과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나는 열심 없는 성도라고 스스로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성도님들이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잘못하면 마음에 가책이 있다고 생각하면 여러 성도님들이 성도님 자신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괜찮아. 하나님께서 내게 언젠가 은혜 주실 거야.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 귀한 은혜의 백성으로 크게 세우실 거야 라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 있어서 기다림 속에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괴롭다면 그 괴로움보다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택하는 삶이 비용에 있어서 덜 드니 차라리 믿음의 강에 풍덩 빠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저는 그냥 오래 예수 믿고 주일 예배만 나온다. 나와서 많이 존다. 살다 보니 그래도 세상 사람과 어울리며 사는 맛도 괜찮아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하는 분들 너무 가책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잘 자도 천국은 갑니다.
제가 보니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예배 시간에 와서 존다. 아니면 예배 시간에 와서 똑똑히 듣는다. 이게 믿음의 기준은 전혀 아닌 것 같아요. 잘 자도 바른 생각하시는 분들 계시더라고요.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요. 우리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바른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믿음에 근거하여 가지고 있는가 구원에 근거하여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절대 남을 폄하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길에 서게 되면 자신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해요. 내가 믿음의 길 안에 있는데 아직도 미숙한 상태라고 하면 하나는 하나님이 어려움 주셔서 깨닫게 하든지 혹은 어렵지 않을 때 내가 의식적인 애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귀의할지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말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 같지만 우리 인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교회 열심히 나온다 봉사 열심히 한다 하는 것하고는 또 달라요.
예배 시간에 존다 안 존다 하는 것하고는 또 다릅니다. 중요한 순간에 어떻게 판단하는가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예요. 저는 그래서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믿음에 근거한 것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면 계속 졸면 마귀에게 잡혀갑니다.
세 번째는 타이밍입니다.
첫 번째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일에든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착각하고 구별에 대해서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두 번째 방향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세 번째는 타이밍입니다.
시간의 시의 적절성.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에요.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딱 적합한 그 시간에 해야 해요.
아무리 그 일을 이루어도 시간 지난 다음에 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야구에서 안타 하나치면 적시타 되어서 많은 점수 내고 그것으로 승리타점 될 수 있는데 아무리 홈런 쳐도 그저 1점내고 지는데 그치고 별 도움이 못 되는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서도 타이밍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타이밍이에요. 신랑이 오는데 그 시점에서 등도 준비되고 기름도 준비되어 등불을 밝힐 수 있느냐 에요.
등은 있되 기름이 없는 사람은 그 시간에 나가서 기름을 사와서 등을 밝히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서 문은 닫혀 있고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때 왔어요. 결국, 한 번은 전부이고 우연이 필연입니다. 인생이란 운 없어 평가당한 것 같으나 그런 모습은 우리의 평상시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침 저조하고 잘못됐을 때 내가 평가받았다. 그런 사람 괜찮아요. 시간 지나면 결국은 그 사람의 원래 실력대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느 날 운 좋게 눈에 띄어서 좋은 상 받았다. 그것도 너무 자만할 필요 없습니다. 시간 지나면 결국 평균대로 대우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든 대우는 있는 사실대로 수렴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평상시 실력으로 수렴하지 어느 날 우연히 운 좋은 그것 한 순간으로 수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최대 능력은 그 시간 꼭 필요한 시간에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또 해야 할 일 하고 준비될 것 준비 되어야합니다. 딱 시간을 우리가 정하여 그 시간에 딱 맞출 수 없으니까 우리에게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면 언제나 준비하고 언제나 우리의 수준 속에서 그 일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으나 그 기회를 활용하여 준비하는 사람과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죠. 인생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회를 기회로 느끼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름까지 준비한 다섯 명의 처녀나 준비하지 못한 다섯 명의 처녀나 똑같은 기회가 있었어요. 그러나 다섯 명은 준비했고 다섯 명은 준비하지 못한 차이입니다.
인생은 모든 것을 반드시 그 생각하고 실행한 결과에 따라서 어떤 결정적 순간에 평가와 판단을 받고 그 이후의 삶이 결정됩니다. 후회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후회하지 말고 후회를 대비하여 조금 더 먼저 준비하고 철저히 준비하고 조금 더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시간의 적시성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제때 수고하고 제때 그 일 하고 제때 그 수고가 빛을 발휘해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해야 할 때 그 일 안 하면 나중에 열 배의 수고를 거쳐서 그 일을 해도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때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원하시는 때에 그것을 맞출 수 없으니까 우리는 평상시에 늘 그 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니 우리는 꾸준히 그 모습대로 사는 거지요.
결국, 사람은 순간에 평가받는 것 같으나 그 순간이 우리에게 있어서 평상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갑자기 닥친 어려움 혹은 위기의 수간을 통해 우리의 현재 상태에서 평가받고 판단 받아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결정돼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우리에게 운 없는 때, 운 좋은 때가 아니라 우리가 평상시에 준비한 것으로 결국은 평가받는 때입니다.
어느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 받아 쓰임 받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준비된 만큼 또 준비된 것을 사용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았어요. 열 명의 처녀가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밤에 홀연히 신랑이 임하게 될 때 다섯 명은 그 등에 기름이 있었고 다섯 명은 그 등에 기름이 없었어요. 똑같은 모습으로 이렇게 있어도 분명히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 살아가야 합니까. 주님을 믿는 자의 모습이되 믿는 자의 모습뿐 아니라 믿는 자의 능력도 있는 삶입니다. 경건의 모양뿐 아니라 경건의 능력까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늘 준비된 삶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요구하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판단하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실 때 그 판단에 합격되며 주님의 말씀을 들어드려 주의 영광을 이룰 수 있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주님 맞을 등불이 준비 됐는가?
마 25:1-8 / 박덕기목사(송정중앙교회)
제가 30여 년 전 광주 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인데, 어느 봄날 전 직원이 야외를 가게 되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교회 버스 안에서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며 여흥을 하게 되었는데, 보일러실 기사로 일하는 청년의 차례가 되자, 그는 힘차게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기름을 채워라 계속 타게, 주 맞을 준비됐느냐. 이 세상 심판 날 가까웠네. 계속 타게 기름 채워라.♪ 그 노래를 듣고 그만 일동이 얼마나 웃었는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름보일러 기사가 그 많은 찬송가와 복음송가를 놔두고 하필이면 ‘기름을 채워라 계속 타게’ 라고 큰 소리로 노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등에 기름이 없어서 큰 낭패를 당한 기사가 나옵니다. 바로 유명한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입니다. ‘열 처녀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유대 나라의 결혼 풍습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유대 나라에서의 결혼이란 대단한 경사였습니다. 온 마을이 총출동하여 결혼을 축복하는데,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기 위해서, 신랑의 결혼 행렬은 가장 먼 길을 통해 갔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혼례식은 보통 초저녁별이 나타날 무렵에 베풀어지는데,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를 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신부의 친구인 열 명의 들러리 처녀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데, 때로는 어떤 사고로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랑의 행렬이 늦게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쌍의 남여가 결혼을 하면, 그들은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일주일가량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혼인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치 왕자와 왕후와 같은 예우를 받았는데, 그 때가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1. 열 처녀 비유의 상징적인 의미
‘열 처녀 비유’는 이 같은 유대인의 결혼 풍속을 배경으로 하고 주신 것인데,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들러리인 ‘열 처녀’는 성도들을 의미하며,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그리고 ‘기름’은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를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눈 것은, 성도라 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자와, 버림받을 자가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열’ 또는 ‘다섯’이란 숫자가 아니라,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그 준비 상태에 따라 둘로 양분되었다는 것이며, 신랑이 더디 올 때에 신랑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예식에 들어갈 수 있었던 반면, 신랑이 더디 올 것을 대비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시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므로, 항상 깨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되,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교훈인 것입니다.
2. 더디 오는 신랑
5-6절에 보면 신랑이 오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5절을 보면 신랑이 매우 더디게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졸며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절은 신랑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졸며 잠든 한밤중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은 자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깨어 환영할 때에 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기다리다 모두 지쳐 잠들었던 바로 그 때에, 돌연히 찾아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옛말에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길이 멀고 험해야, 타고 가는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 온갖 풍상을 겪어 보아야, 사람의 우정이나 사랑이 진실한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시험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영적으로 더욱 깨어 경성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하산이 늦어지자, 그만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가장 많이 침입할 때는, 사람들이 경계를 늦추는 한낮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밤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 역시 사람들이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을 때, 돌연히 오셔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영적 어두움이 깊어갈수록, 더욱 믿음과 성령의 불을 밝히고 준비함으로써, 언제든지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이들의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차이는 그녀들의 지력 혹은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준비성에 있었습니다.
1)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다.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으나, 많은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면, 성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는 참 신자와 형식적인 신자, 성령을 받은 신자와 받지 못한 신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한 자와 예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를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 준비를 잘하여, 신랑이 왔을 때 혼인 잔치에 참예하여 한껏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자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다만 말씀대로의 순종이 뒤따를 때만, 가치가 있고 생명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말씀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명을 얻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이 요구하는 바에 순종하여, 준비된 삶을 살고 있는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2)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등에 가장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낮 동안에 기름을 준비할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시덕거리고 놀기만 했는지, 혹은 설마 그토록 밤늦게 올까 하는 생각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부주의 하고 방심했던 다섯 처녀들은, 결국 신랑을 영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혼인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내어 쫓김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도 주님 맞을 준비, 즉 회개와 믿음, 성령의 열매 맺는 삶 등을 소홀히 하다가, 결국 구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 맞을 준비를 미루다, 결국 구원의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믿음은 나누어 줄 수 없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도 준비해 놓지 않고 졸다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아오라” 할 때에야,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면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름이 부족하여 쩔쩔매는 친구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인 다섯 처녀는, 주님의 책망을 듣는 대신, 오히려 지혜롭다는 칭찬과 함께,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가진 재산은 나누어 줄 수 있지만, 나에게 속한 남편이나 아내는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나누어 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출생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영생을 좌우할 믿음과 구원 역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백이 나를 구원 하고, 나의 회개가 나를 죄에서 건지고, 나의 충성과 봉사와 희생으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구원에 대해,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주거나, 도와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오로지 1:1의 관계입니다. 믿음이나 행함은 남에게 빌릴 수도 없으며, 어디 가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부모님이나 가족의 신앙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오직 자신과 주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발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5.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10절을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밤에 결혼이 이루어지던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신랑의 입장과 함께 혼인 잔치가 시작되면, 강도와 도둑을 막기 위해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 문을 닫으면 다시는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뒤늦게 가름을 사러 갔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 밖 어두운 곳에서 울며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에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가 되면, 구원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리고 그 때가 지나면, 아무리 구원의 문을 열어 달라고 애걸복걸해도, 더 이상 구원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120년의 기회를 주셨지만,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후에는 그 방주 문을 친히 닫으시고, 열어 주시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그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문이 항상 열려 있을 것으로 착각하여, 조금 쉬었다 믿겠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함부로 중단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 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생명 길로 갑시다.♪
6. 항상 깨어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13절에서 주님은 열 처녀 비유의 최종 결론의 말씀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이 구절 외에도, 종말에 관한 교훈을 하실 때마다, 거듭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까?
1)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주님, 공의로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 주님, 그 분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의 재림 후에 있을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두 번 다시없을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이다.
신랑이 나아올 때 잠들어 있음으로 해서,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신부는 불행한 신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이 있을 때, 신앙의 잠을 자다가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성도는,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자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우리가 낮이나 밤이나 잠자지 말고, 눈을 뜬 상태로 있으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열 처녀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외견상으로는 모두 믿음이 있고 깨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중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실상 깨어 있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등과 함께 무엇보다도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곧 말씀과 성령으로 속사람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눔으로써, 생명력 있는 신앙과 경건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입니까?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 기회가 있는 지금 최선을 다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한 후회를 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께는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엄정한 선언은, 신랑이 그 처녀들을 혼인 잔치에 들일 마음이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실로 종말의 날에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은 죄인을 위한 것이었고, 죄인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는 긍휼과 사랑만이 충만했으며, 모든 죄인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림이 구원과 회개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다면, 주님의 재림은 심판과 멸망의 선언을 위한 것입니다. 마 3:12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재림하시는 주님께는 긍휼이 없고, 오로지 공의로운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때에 죄인들은 주님께 나아갈 수가 없고, 주님은 죄인을 더 이상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 때에는 한 편의 즐거움과 환희의 찬송,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의 회한의 눈물과 통곡으로 갈리는 두 종류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열 처녀 비유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말세의 교회에는 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믿음이요, 또 하나는 거짓믿음 입니다. 오늘의 비유대로라면 50:50입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나타나듯이, 교회 안에 알곡이 있지만, 분명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고 성도를 신부로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성도를 더 사랑하는 분이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주님께 성도가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하며,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동거하기 때문입니다.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체되는 주님의 재림을, 회개와 구원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종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가? 이 시간 각자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열 처녀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재림 직전에만 깨어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영적으로 깨어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때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찾아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적으로 잠든 상태에서 맞이하는 부끄러운 신부가 되지 말고, 항상 깨어서 등불 들고 주님 맞을 준비하고 있다가, 신랑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여,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예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의 재림의 날을 사모한다면
마 25:1-13 / 김상수목사
19세기 유명한 부흥사 무디(D. L. Moody, 1837~1899)가 시키고의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분은 내일 꼭 다시 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그 유명한 ‘시카고 대화재(Great Chicago Fire, 1871년 10월 10일)’가 발생했다. 당시 이 화재로 인해서 시카고 시내의 건물 3분의 1 이상이 전소되었고, 약 300명이 불에 타죽었고, 1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때 무디가 집회하던 그 교회 예배당도 불타서 없어져 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무디는 나무로 만든 임시 예배당에서 집회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강대상에 오른 무디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날 찾아온 사람들은 그 전에 왔던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재직전 집회에서 ‘내일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불에 타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충격을 받은 무디는 그때부터 설교 때마다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믿으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내일은 이미 늦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종말 중에 종말이요, 말세 중의 말세다. 기차나 지하철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멀리서 기적 소리가 나면 그것들이 가까이 오고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바로 종말의 기적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종말을 말하면서도, 정작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적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것을 믿고, 또 주님의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그날이 이르기 전에 전심전력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긴박한 때에 내 신앙 유지하기 힘든데 무슨 전도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그 앞에서 나만 멈춰 섰으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것인가? 구원받은 기쁨으로 나 혼자만 기뻐서 뛰면 그것으로 끝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쪽으로 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진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 마지막 때에 마귀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신자 한 사람이라도 더 넘어뜨리려고 공격하는데, 이때 마귀의 공격이 무서워서 방어만 하고 있는 것이 최선인가?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이 마지막 때 더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도 지키고, 사명도 감당하고, 이긴 자가 되는 길이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종말론에 대한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그 중에 첫 번째가 오늘 함께 읽은 열 처녀 비유다. 여기에서 신랑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그리고 열 명의 처녀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두 종류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문 내용을 보면 열 명이 모두 혼인잔치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익히 아는 바와같이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의 당시의 혼인풍습을 잠시 언급하면 이렇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더운 낮보다는 저녁시간에 주로 혼례예식을 치렀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열 명의 처녀들은 열 명의 신부가 아니라, 혼인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서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처럼 취급 받았다고 한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공중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에 들어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차이가 뭘까? 묵상해 보면 여러 가지 영적인 가르침들을 깨달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시간에 특히 나누고 싶은 것은 ‘기름을 준비한 타이밍’이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부터 충분한 기름을 미리 준비했고(4절),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렇지 못했다(3절). 나중에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듣고 난 후에야 허겁지겁 기름을 사러 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3-5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마 25:8)
3절 말씀만 언뜻보면 미련한 처녀들이 애초부터 기름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8절 말씀에 보면 그녀들의 등불에 꺼져갈 때, 다른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미련한 처녀들도 기름을 준비하기는데,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들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주님께 그 처녀들이 미련하다고 칭함받은 이유다.
그러면 왜 미련한 처녀들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타이밍(또는 기회)를 놓쳤고, 반대로 왜 슬기로운 처녀들은 처음부터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을까? 바로 이 부분은 오늘 본 비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만약 우리들이 미련한 처녀들이라고 생각해 보면, 의외로 그 이유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이 미련했던 이유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고, 그 분량만큼만 기름을 준비한 것이다(‘대략 이 정도면 충분할거야.....’). 마태복음 24장 48절에서는, “주인이 더디오리라”고 착각했던 사람들도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은 기름을 준비하는 시늉만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성경에서 주님이 자주 지적하는 것 부분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뭔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고만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아니올시다’ 였다. 5절 말씀을 보라. 신랑이 얼마나 더디 왔는지, 열 명의 처녀들이 다 같이 졸았을 정도로 늦게 왔다.
미련한 처녀들이 왜 이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었을까? 영안을 열고 미련한 처녀들의 행동을 보라. 그것은 배후에 영적으로 그녀들을 속인 미혹의 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 메시지처럼 아마 그녀들 주변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짓 선지자와 같은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자라도 삼킬려는 사단의 궤계에 속은 것이다(“오기는 뭘와?”, “적당히 준비해”, “더디올거야”, “00년 00월 00일 00시에 올거야”, “준비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해, 준비하는 시늉만 내라구”, “벌써 재림했어” 등).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미혹의 영에게 속아서 자기 생각대로 일하고, 자기 뜻대로 무엇인가를 하면서도 자기들이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심지어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마귀 사단은 거짓 선지자들을 앞세워서 엄청난 능력과 이적들(우상이 말을 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것 등)을 행하면서까지 미혹하는 것을 본다.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불법(不法)을 행하는 자들에 불과하다.
그러면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들은 왜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을까? 신랑이 늦게 올것이라고 예상해서 일까? 언뜻보면 그런 것같지만, 그것이 아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이유는, ‘언제 신랑이(주님이)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언제 오든지 즉시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 비유의 결론과도 같은 13절 말씀에서 주님은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주님이 지금이든, 오늘이든, 내일이든, 언제 오시든지 즉시 맞이 할 수 있도록 항상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면 신랑은 왜 늦게 왔을까? 열처녀 비유에는 왜 늦게 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 말씀 속에서 이 마지막 때에 우리들이 기름(성령의 권능)이 넉넉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할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기름을 준비한 이유는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넉넉한 기름은 곧 성령의 충만이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성령충만을 주시기 원하는 이유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나 혼자만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재림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또는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성령의 불이 다른 사람에게 번져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 바로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요, 등불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며, 땅끝까지 증인되는 것이다. 언제? 지금이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주님 오시기 전에 지금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전도자가 길거리에서 전도하고 있었는데, 전도지를 받은 사람이 믿으려 하지 않고 비웃기만 했다.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래서 전도자가 말했다.
“선생님이 지금은 이 전도지의 내용을 믿지 않는다해도, 선생님은 언젠가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겁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물었다.
“아니 내가 언제 믿게된다는거요?”
그러자 전도자 다시 말했다.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입니다. 그때 선생님뿐만 아니라 지옥에 간 수 많은 사람은 후회하면서, 불구덩이 속에서 ‘주님 이제는 믿습니다! 제발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외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믿기는 믿었는데 너무 늦게 믿은 겁니다. 기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두 번 기회가 없는 것은 불신자 뿐 아니라, 전도자도 역시 마찬가지다.믿지 않는 사람도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지만, 믿는 사람도 전도의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기차가 정거장 가까이에 오고있다는 기적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시기와 같다. 이런 때에 우리가 진정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재림의 주님을 사모한다면, 재림 전 바로 지금 이때를 놓치지 말고 영혼구원에 힘쓰자. 지금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때요, 깨어 기름을 준비할 때요, 지금은 추수할 일꾼이 많이 필요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전도의 날이다. 끊임없이 내일로 미루게 하는 사단의 전략에 속지 말자. 성령의 전신갑주를 힘입어서 이러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자.
전도는 성령님이 나를 통로삼아서 친히 이끌어가시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최소한 내가 결신은 못시켜도 통로역할은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주님 이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사명을 힘있게 감당하자. 주님이 그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이 시간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성령님이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위해서 간구하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자
마 25:1-13 / 노경모 목사
혹시 차를 운전하시는 분들 중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차의 계기판에 빨간불이 들어옵니다. 이제 기름이 얼마나 없으니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빨리 넣으라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차는 주유소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내 도로가 아니라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30km를 가야만 주유소가 있는 휴게소가 나온다는 표지판을 봅니다. 큰 일 났습니다. 내 차가 가다가 갑자기 서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해 보신 분이 계신가요?
택시를 탔는데 지갑에 돈이 충분히 있는 줄 알았는데, 달랑 만원 한 장이 있습니다. 지금 이 택시는 올림픽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택시가 달릴 때 마다 미터기 요금이 착칵착칵 올라갑니다. 올림픽도로이기 때문에 중간에 서서 내리지도 못하고 진땀이 납니다. 이런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거나, 택시비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을 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기름이 부족해서 엄청난 어려움, 아니 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일부다처제 결혼식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신랑을 맞을 처녀가 열 명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다처제 결혼식이 아닙니다. 분명히 시집가는 처녀는 한 명입니다. 여기서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를 가리킵니다.
당시의 결혼식은 보통 해가 진후에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루가 해질 무렵에 시작되어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로 계산되었던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하여튼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들러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손에는 신랑 행렬을 비출 등을 들고 신랑으로 맞으러 나가는데 신부의 들러리들이 보통 열 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 들러리들은 신랑은 신부의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그 이후로 문은 닫혀 출입이 금지됩니다. 그것은 당시 강도들이 결혼식장을 자주 침입하였던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랑이 종말의 때에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열 처녀는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고 기다리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열 명의 처녀들 중에 다섯 명은 슬기롭고 다섯 명은 미련하다고 평가합니다. 1-2절을 봅시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결국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미려한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11-12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미련하다’라는 말은 ‘태만하고 별 생각없이 생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슬기롭다‘라는 말은 생각이 깊고 준비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열 처녀' 가운데 슬기로운 자와 미려한 자를 각각 다섯 명씩 둘로 양분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사실은 숫자가 아니라 처녀들이 둘로 양분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교회 공동체 내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려한 자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하는교회에는 슬기로운 자들만 있지, 미련한 자들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미련한 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가 본문에서 찾아내어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는 결코 미련한 사람이 되지 않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준비했는데 기름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3-4절을 읽어 봅시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당시의 등은 횃불 모양이었고, 기름을 약 15분 간격으로 계속 공급해야 했습니다. 처음 횃불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 사용된 기름만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횃불의 불이 꺼지게 될 때 기름을 부어야 하는데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지요.
등은 무엇을 말할까요?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름은 무엇을 말할까요?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해 주는 성령의 기름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기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장 1절,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그렇다면 본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등은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겉으로는 신앙생활은 하는 것 같이 보이나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신앙은 처음에는 뜨거운 열심히 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기름이 부족한 등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같이 신앙의 불꽃이 꺼져 마침내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맙니다.
미련한 쳐녀들은 신랑이 더디 오는 것을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5절을 보면, ‘미려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온 것처럼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점점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자들이 점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듭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예수님의 유일한 큰 약속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등의 약속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도둑이 갑자기 침입하는 것처럼, 갑자기 돌연히 생각지도 못한 때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재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우리는 슬기로운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게 합니까? .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게 하는 것은 세속적인 생활입니다.
신자들이 세속적인 생활을 하면 그것이 신자들을 깊은 잠 속에 빠지게 합니다. ‘세상과 친구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된다.’고 야고보서 4장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생활이란 세상과 친구하는 생활이요, 이 세대를 본받는 생활입니다. 방탕한 생활입니다. 술 취하는 생활입니다. 세상의 염려로 가득찬 생활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성경은 ‘방탕’이라는 말을 거의 ‘술 취함’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3절에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방탕함이란 술을 좋아하고 술에 취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과 똑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술 마시고 취하는 사람은 실수를 하며 방탕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니 방탕한 사람이 아니니 걱정 없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50% 밖에 맞지 않는 답입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술을 마셔서 방탕해 지는 것 보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과 사상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 영적으로 타락 시키고자 하는 사탄의 계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과 사상을 하나님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 마치 술을 마신 것 같이 정신이 멍해지도록 만듭니다.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살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사는 신앙인들은 자기의 영성을 위해 걱정하고, 지적하며,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 주는 바른 영적 지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흐름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술 사업을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술 사업은,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의 술 소비량이, 성인 1인 당 일주일에 소주 4병 꼴로 마시고 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술을 마시지 않으니 다른 어떤 분이 8병을 마실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의 내로라 하는 양주 업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나라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양주 소비량이 국민 수에 비해 제일 높은 황금시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은 장로님을 생각하면서, 늘 안타까워서 기도하셨답니다. 저 장로님이 돈을 많이 벌어서 십일조를 많이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안타까워 했던 것입니다. 한 번은 목사님이 용기를 내어 그 장로님에게 말씀 드렸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충고를 들은 장로님은 몹시 불쾌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웃교회로 간 것입니다.
그 장로님이 이웃 교회로 갔더니 부자 장로님 오셨다고 다들 반가워 하드라는 것입니다. 다들 그 분을 받들어 주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의 마음에는 기쁨도 없고 평강도 없는 것입니다.
그때야 그 장로님은 먼저 교회의 목사님의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을 보니, 자신의 영적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부와 그것이 어떻게 교회를 위하여 쓰여질 것인지에 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그것을 깨닫고 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목사님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용서를 빌고, 그 사업을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다른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술 사업 보다 더 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 재림을 준비하며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나에게 화려하게 만들어 준다고 속삭여도 거절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흐름에 빠지면, 세속화되면 방탕해 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기 흉한 모습이 되며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방탕해 지지 맙시다. 깨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살고자 열심을 다합시다.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게 하는 것은 나태하고 게으른 신앙생활입니다.
기도생활도 게으르고 말씀을 듣고 보는 생활도 게을러지고, 예배드리는 생활도 게을러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예수님 앞에서 서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미려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가 빌려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성령의 기름은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받으면 나에게도 어느 정도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믿음으로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천국가는 것입니다. 성령도 내가 받아야 합니다. 남이 성령 받은 것은 내가 절반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에베소서 5장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어느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만나 하루종일 함께 놀았습니다. 어느새 해가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을 했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저녁이 다가오니 이제 그만 우리 헤어지고 내일 다시 만나 놀자.” 그러자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내일이라니? 내일이 뭔데?” 메뚜기가 대답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어두운 밤이 다 지나고 또 다시 해가 떠올라 오늘과 같이 환한 날이 시작되면 그것을 내일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러나 하루살이는 전혀 메뚜기가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밤이란 것을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그 메뚜기는 개구리와 성격이 잘 맞기에 여러 날을 함께 지내며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젠 겨울이 다가 오는가 봐.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어. 그러니 이제 우리 서로 헤어졌다 내년에 만나자.” “내년이라니?” 메뚜기는 처음 들어 본 내년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얼마 후면 겨울이 오잖아. 그리고 지루한 겨울이 지나고 나면 다시 꽃이 피는 봄이 오거든. 그것을 바로 내년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러나 겨울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메뚜기에게는 개구리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살이는 밤을 결코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밤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메뚜기는 겨울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으로 종말과 심판을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또한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예수님의 재림은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즐거워 하겠지만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통과 수치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슬기 있는 자들
마 25:1~13 / 김광일 목사
어느 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솔로몬의 지혜’란 무엇을 말하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좋아, 그럼 한 가지 예를 들어 가르쳐 주지. 어느 커다란 굴뚝에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중 한 사람만 새까만 그을음을 묻혔다면 대체 둘 중 누가 세수를 했을 것 같으냐?” “물론 얼굴에 새까만 그을음을 묻힌 사람이겠죠?” “그게 아니다. 얼굴이 새까맣게 된 사람은 깨끗한 사람을 보고, ‘나도 깨끗하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깨끗한 사람이 씻게 되겠지. 내가 다시 한 번 질문할 테니 맞추어 보아라. 이 두 사람이 다시 굴뚝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번에는 어느 쪽이 씻었을 것 같으냐?” “그야 물론, 깨끗한 쪽이겠죠.” “허허, 그대는 아직도 지혜를 얻지 못하였구나. 깨끗한 사람은 씻다보니 별로 더럽혀지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것이고 더러운 사람은 상대방이 왜 씻었는지를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더러운 사람이 씻었다는 것이 맞는 답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질문하겠다. 두 사람이 세 번째로 굴뚝에 들어갔다 왔다면 누가 씻겠느냐?” “이번에는 확실히 답할 수 있습니다. 바로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정말 지혜가 없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두 사람이 똑같이 굴뚝에 들어갔다 왔는데 어떻게 한 사람의 얼굴은 깨끗하고 한 사람은 더러울 수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지혜니라.” 살아가면서 진정한 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에서는 결혼식을 해가 진 저녁별이 나타날 때에 거행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또한 결혼식에는 신랑이 신부측 사람들에게 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정하지 않고 갑자기 밤중에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등을 준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등불을 켜들지 않고서는 신랑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혼인잔치 비유를 들어 재림하실 때 등과 기름을 예비한 성도들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행복한 자이나, 예비하지 못한 자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는 불행한 자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들이 등장합니다. 열 처녀들은 모두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신랑이 왔을 때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러 갈 수 있었지만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등은 가지고 있는데 기름이 없거나 충분치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등과 기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등은 외형적인 신앙을 의미하고 기름은 힘이 되는 신앙의 내면적 생활을 가리킵니다.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형식은 있으나 그 내용이 없는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 성도들의 신앙이 어떠합니까? 신앙의 형식은 찾아 볼 수 있지만, 내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용이 없음을 교훈하고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기 있는 자들은 과연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로 기다리는 자이어야
인디언 추장이 손자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얘야! 우리 마음속에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한 마리의 늑대는 아주 악한 늑대야. 미워하게 만들고, 살인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드는 나쁜 늑대지. 그러나 또 한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그 늑대는 아주 착한 늑대야.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고, 평화하게 만들고, 용서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만들고, 인내하게 만드는 그런 착한 늑대가 있지.” 그러자 손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 마음속에도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겠네요?” “그럼! 내 마음에도 두 마리의 늑대가 있지.” 손자가 또 묻습니다. “그럼 그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대답합니다. “할아버지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착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착한 늑대가 이기고, 악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악한 늑대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 마리의 늑대가 있습니다. 조바심의 늑대가 있고, 기다림의 늑대가 있습니다.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다는 약속을 믿고 늦을지라도 응답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슬기 있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열 처녀 모두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모두 신랑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더디올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고 결국 기다림에 실패한 것입니다. 반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더디올 것을 대비해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고 결국 기다림에 승리하였습니다. 비유의 중심 메시지는 바로 “기다림”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본질은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를 나름대로 판단했습니다. 몇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다림으로 승리하는 슬기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준비하는 자이어야
어느 마을에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머슴을 불러 지팡이를 주면서 “여보게, 내가 보기에 자네보다 미련한 사람은 없을 것 같네. 그러니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가 자네보다 더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거든 주게나” 하며 놀렸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부자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머슴이 찾아왔습니다. 부자가 말합니다. “여보게, 나는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먼 길을 떠나게 되었네.” 머슴은 “어디로 가시며, 갈 준비는 다 되었는지요?” 물었습니다. 주인은 머슴이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미련을 떤다고 생각하고 “아니, 이 미련한 녀석아. 죽음의 길에 무슨 준비가 필요하며, 어디로 가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슴은 “주인어른, 하루 여행을 떠나도 목적지를 정하고 준비를 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생각하니 주인어른이야말로 참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그러니 이 지팡이를 도로 받으시지요” 하며 전에 주인에게 받았던 지팡이를 다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미래에 대해 준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미리 죽음을 생각하고 마지막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슬기가 있는 사람은 열심히 자기인생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열 처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정작 불을 밝혀야 할 때 밝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등은 준비가 됐지만 기름이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졸고 잔 것에 대한 책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늦는 것에 대비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입니다. 기름은 주님을 만나는데 필요한 요소입니다.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내용입니다. 신앙의 모양인 등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름입니다. 근본적인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 옵니다. 우리는 기름을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준비하지 못한 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연료 부족 경고등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달린다면 차는 갑자기 멈추게 됩니다. 우리의 경고등은 무엇입니까? 신앙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까?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지 않습니까?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는 참석하지만 하나님 만나는 감격은 있습니까? 말씀을 듣지만 순종이 있습니까? 이러한 증상들이 보인다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의 모습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깨어있는 자이어야
물고기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죽을 때도 눈을 뜨고 죽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물고기 특유의 현상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초대교회 시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로마 외곽의 지하 동굴 카타콤으로 도피했습니다. 이곳은 원래 시체를 매장하는 장소였습니다. 로마는 장례지를 신성불가침한 곳으로 여겼기 에 접근을 꺼렸습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카타콤 벽면에 물고기 그림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곳에 물고기를 그려놓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물고기는 ‘익투스(IΧΘΥΣ)’라는 헬라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의미하는 ‘Ιησουσ Χριστοσ Θεου Υιοσ Σωτηρ (Iesous Christos Theou Huios Solter)’의 첫 글자를 모아 합성한 단어입니다. 어쩌면 물고기처럼 ‘자나 깨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가 담긴 뜻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13절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의 ‘깨어있으라’는 영적으로 긴장하라는 뜻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왔는지 생각하지 않았기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긴장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신랑이 늦는다고 하더라도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하다는 것은 신랑을 기다려야 할 존재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면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들이 모두 졸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때는 영혼들이 조는 자들과 자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조는 것은 일시적으로 조는 것이고, 자는 것은 아무 준비 없이 태연히 자는 것입니다. 신앙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졸며 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졸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랑이신 예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긴박감을 가지고 기름을 더하고 더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서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보다 강한 믿음을 위해 기도하고, 더 큰 봉사를 위해 기도하고, 더 어려운 고통을 참기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날 깨어 있는 자만이 들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솝 우화(Aesop’s Fables)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하고 얻은 것들을 늘어놓고 사자가 나귀에게 분배를 맡겼습니다. “네가 공평하게 나누어 보거라. 나귀는 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세 등분했습니다. 덜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똑같이 나눴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화를 버럭 내면서 “사냥할 때 내가 제일 많이 애썼는데 이게 뭐냐?”고 하면서 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이제 사자하고 여우만 남았습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말합니다. “여우야 이번엔 네가 좀 공평하게 분배해보아라.” 여우는 어떻게 분배를 하였을까요? 여우는 지혜로웠습니다. 사냥해서 얻은 것 중에 90%는 사자에게 다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중에 10%만 차지했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만족스러워 하면서 “너는 어디서 이렇게 지혜로운 생각이 떠올랐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대답했습니다.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생각해냈지요.” 보기에는 불공평한 분배처럼 보이지만 여우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값진 지혜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에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모습을 버리고 슬기 있는 다섯 처녀의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슬기 있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확실한 재림 신앙으로 기다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깨어있는 자가 되어 슬기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
마 25:1-13 / 우선동목사
1. 유대인들의 결혼식
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대나라의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소재이지만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오늘날 우리의 결혼식과는 너무 달라서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결혼 풍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대개 한 주 이상 계속되었는데 신랑은 자기 집에서 들러리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와 신부 들러리들을 데리고 다시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신랑과 들러리들은 대개는 밤에 왔고 신부는 들러리 친구들과 함께 신랑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이나 카톡으로 언제 간다든지 혹은 출발했다고 알릴 수 있겠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보통 신랑 일행이 밤에 등불을 들고 신부의 집에 오게 되면 기다리던 신부와 들러리들 역시 등불을 준비하고 있다가 밤거리를 밝히면서 신랑의 집으로 가서 혼인 잔치를 하게 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 라는 성경학자는 갈릴리 지방을 여행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그 사람은 차로 근처를 지나던 중 신부 들러리들이 거리에서 춤을 추는 광경을 보았답니다. 그들은 신부 집 앞의 거리에서 신랑 일행을 기다리는 신부 들러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통역자에게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신랑이 오늘 밤에 올지 내일 밤에 올지 아니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결혼식을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이고 오늘 이 비유의 배경입니다.
2. 두 부류의 처녀들
1) 큰 차이가 없는 상황
이 비유에서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들입니다. 주님은 그들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묘사되고 있는 그들의 행동만으로는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을 거의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결혼식에 초청받았고, 거절하지 않고 와서 들러리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신랑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더뎌지자 그들은 다 같이 졸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자는 동안에 슬기 있는 처녀들은 깨어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5절은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기록합니다. 그때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하는 소리를 듣고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기다리다가 피곤에 지쳐 졸기도 하고 자기도 했던 것입니다. “신랑이 더디 온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늦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벧후3:9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과 나태함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들은 여기까지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2) 분명한 차이가 있는 한 가지
그러나 그들의 차이가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신랑의 일행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졸던 처녀들이 다 일어나서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늦을 것을 대비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하지만 슬기 있는 처녀들은 9절에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말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 밤에 기름을 구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름을 사러 나간 사이에 신랑 행렬은 도착했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두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습니다. 그 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며 신랑을 부릅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이것은 마치 마7:21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12절에서 신랑이 말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 대답은 마7:23에서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들이 원했고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3. 결정적인 시간
우리는 이 비유가 ‘결정적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시간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비유 앞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24장42절과 4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 때에’라는 말은 이 비유가 바로 이때와 연관이 있는 말씀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어떻게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까?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도 주님은 ‘그 날’ 그리고 ‘그 때’를 말씀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은 신랑이 오는 때이고,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혹은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마감되고 주님 앞에 서는 바로 그 때입니다. 만일 이 결정적인 시간이 이미 알고 있는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처럼 온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시계로 측정되거나 계산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건의 시간, 즉 카이로스입니다. 이런 결정적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옵니다. 죽음으로 혹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그 결정적 시간은 우리의 인생과 역사 속에 찾아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교훈하시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 결정적인 때가 언제 오더라도 늘 준비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의 결론인 13절과 일치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언제 주님께서 오셔도 준비된 상태로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4. 본문이 주는 교훈
1) 다가올 혼인잔치
주님은 마22장과 눅14장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또 계19:7은 혼인잔치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주님의 재림의 때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교회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혼인잔치를 하나님 나라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혼인 잔치에서 신부의 들러리들이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지 등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는 식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신부가 아니고 모두 신부의 들러리에 불과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2) 신앙고백자들에게 주신 말씀
오늘 이 비유는 특별히 신앙고백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는 모두가 다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여 등을 가지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다 신앙고백자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다 교회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고,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했던 사람 모두가 혼인잔치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 참으로 우리가 자신을 살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3) 결정적 시간의 명백한 차이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 있는 처녀들 사이에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지만 결정적인 시간이 오자 분명한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식사하며 교제를 나눕니다. 열 처녀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다 졸고 잔 것에서도 그들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갈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에서도 경험하는 부분입니다. 사람을 잘 안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성품이나 신앙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위기가 왔을 때입니다. 사람은 위기의 때에 평상시 갖고 있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성품도, 신앙도 그렇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드러내는 나의 성품과 신앙이 우리의 실상과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소홀히 여기면 자신을 속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약1:22). 결정적인 시간이 오면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미련한 자인지 슬기 있는 자인지 드러납니다.
4) 나눠 줄 수 없는 기름
결정적인 차이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 했는가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흔히 ‘기름은 성령님’이라고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미련한 처녀들에게 기름이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적당한 양의 기름을 가지고 등을 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게 오자 기름이 다하여 그들의 등불이 꺼져가게 되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닳아서 없어질 수 없는 분입니다. 또한 성령은 신자 속에 계시다가 신자를 완전히 떠나시지도 않으십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린 처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그리고 그 문제를 무시한 채 주님을 기다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당에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태가 이 미련한 처녀들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자신이 죄사함을 받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며,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해 화목하게 된 것도 모릅니다. 심지어 그런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교회활동에는 열심을 내고 직분을 받아 섬긴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신앙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구원신앙은 개개인의 것이지 누가 전해주고 빌려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내가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5) 깨어서 준비하라
우리가 주님의 재림이라는 결정적인 시간을 준비하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물론 그 결정적인 시간은 우리 개인에게는 죽음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죽음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도 기회는 없습니다. 혼인잔치의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어보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하는 대답만 들릴 뿐 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를 모른다는 것, 그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는 것을 오늘 비유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기름을 준비한 등불을 가지고 말입니다. 구원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이 '말세'라고들 하는데
마 25:1-13 / 조상호목사
여러분들 가운데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2003년 이란 남부에 있는 ‘밤’이라는 도시에 지진이 발생하여 26,000여 명이 사망한 적이 있습니다. 또 작년 12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생겨난 ‘쓰나미’로 말미암아 무려 176,000여 명이 사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가 발생한지 8개월 만에, 다시 엄습한 자연의 위력 앞에 전 세계인이 잔뜩 긴장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7월과 8월, 세계 곳곳은 찜통더위와 집중호우, 태풍으로 얼룩졌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지역과 인도, 파키스탄 등은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로 인해 사망자가 속출했고, 노동력 저하로 경제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또 지난 8월말(29일)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강타하여 뉴올리언스시의 80%가 물에 잠기면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피해액도 400억~600억 달러나 될 만큼 미국 역사상 최대의 자연재해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채지나지 않아 ‘허리케인 리타’가 몰려와서, 이미 카트리나로 큰 재앙을 입었던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시가 또 다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재해는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기름 값이 상승했고, 미국 중서부의 가뭄으로 말미암아 곡물 가격이 급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일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파키스탄의 동북부에서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지난 21일자 신문을 보니까, 이번 지진으로 파키스탄에서만 51,300명 이상이 사망을 했고, 74,000여명이 부상을 당했고,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겨울이 오기 전에 찬바람을 피할 겨울용 텐트가 시급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키스탄 접경지역인 인도에서도 이번 지진으로 1,300여명이 사망하고, 5천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을 정도로, 이번 파키스탄에 발생된 지진은 많은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에 지진사태가 일어난 당일, 폭우를 동반한 허리케인 ‘스탠’이 파키스탄과 정반대에 있는 중남미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그래서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의 나라에 홍수와 산사태가 일어나서 2,000 여명이 숨지고, 119만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허리케인, 지진, 해일(쓰나미), 집중폭우, 찜통더위와 같은 자연재해가 요즘 들어 빈번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빈번해지는 자연재해를 보면서, 계속되는 지진과 홍수와 기근, 등을 보면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말세’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나 동일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리켜 "말세"라고 합니다. 영어로 이 ‘말세’라는 말은 ‘the time of the end’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세상의 종말’이라는 의미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끝나가는 세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이 ‘말세’에 대한 많은 기록과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말세’란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올수록 큰 환난이 몰려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부분 마태복음 24장 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5~7) 그러니까 가짜 재림예수가 등장하고,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자연재해들이 빈번해지는 이 시대가 바로 말세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주님이 공중에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큰 환난이 임하고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를 준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말세인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말세를 살아가는 방법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설교의 대가이셨고, 예화설교의 박사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이나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예화나 비유를 곧잘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결혼식을 비유로 해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신부는 요즘과 달리 10명의 들러리를 세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들러리들은 대개 신부의 가까운 친구들이 맡았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에 오면, 이 10명의 들러리 처녀들은 결혼식이 거행되는 신랑의 집이나 신랑 부모의 집까지 신부와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예식은 주로 밤에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들러리 처녀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렸는데, 등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이 오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오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초저녁에 올지 한 밤중에 올지 모르기 때문에, 10명의 처녀들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깊은 밤중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신랑 일행들의 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일어나 각자의 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결혼예식 행렬이 시작되기도 전에 등불이 꺼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련한 다섯 처녀는 결국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비유 설교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항상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라
첫째로 오늘 본문은 ‘항상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똑같이 결혼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그 초대에 응했고, 똑같이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똑같이 신랑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자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 달리,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은 깨어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여기에서 ‘다’라는 단어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기다리던 신랑이 오지 않자, 미련한 다섯 처녀 뿐 아니라 지혜로운 다섯 처녀, 모두가 졸음을 참지 못하여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밤이 깊어가고 피곤하니까 함께 졸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름 준비였습니다.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따로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도 처음에는 불을 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신랑이 온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미련한 다섯 처녀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련한 다섯 처녀들의 등에 남아있던 기름이 다 소비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별도로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불이 꺼질 염려도 하지 않고 신랑을 마중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구분은 얼굴이 예쁜지 미운지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잠을 자고 있었느냐 잠을 자지 않고 있었느냐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등을 가지고 있었느냐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느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련함과 지혜로움은 단 한 가지 기름을 따로 준비했느냐,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으냐로 구분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기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며 고민하는데,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름을 따로 준비했느냐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신랑 대신 예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주님이 오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 우리들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그 날을 비밀로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저녁에도 오실 수 있고, 내일 저녁에도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주님께서 다시 오실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님께서 한 유명한 문학가이신 어느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폐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입원실 밖에서 가족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6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6개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지. 내가 제대로 인생을 마쳐야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 때까지 갚지 못한 빚을 갚았습니다. 그 동안 서먹서먹했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오해를 풀고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 동안 소홀히 했던 자녀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지면서 한 가지씩 서서히 자기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폐암은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결국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암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에 진단했던 병원에서 오진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를 정리하느라 많은 돈을 썼고, 무엇보다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손해가 막심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생 동안 지난 6개월처럼 진지하게 삶을 살았던 때가 없었습니다. 나머지 인생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저는 그 분의 이 고백이 말세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준비하셨습니까?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습니까? 말세를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은 믿음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분들은 하루하루를 결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
둘째로 오늘 본문은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미련한 다섯 처녀나 똑같이 신랑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똑같이 등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기름 준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기 전에 이미 여분의 기름을 충분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랑 왔을 때, 등불을 밝힐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따로 기름을 준비하지 않을 뿐더러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도착했을 때, 등불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준비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사실 신랑을 맞이할 들러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일은 기름 준비였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들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마태복음 24장 40절 이하를 보아도, 현재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을 맞이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도 본문 1절처럼 ‘그 때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본문과 앞에 나오는 내용이 별개의 내용이 아니라 서로 관계가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0절과 41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여기 마태복음 24장 40절 이하를 보면 ‘그 때에‘로 시작하는데, 그 때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를 가리킵니다. 40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었습니다. 또 41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에 두 사람이 맷돌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주로 낮에 밭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서 빵을 만들어 먹기 위해 손으로 맷돌을 돌려 곡식을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낮에는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가정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주어진 일에 우리는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는데, 공부해서 뭐하느냐 공부 때려 치고 기도원으로 올라오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곧 재림하시면 이 땅에 모든 재산 다 놓아두고 떠나는데 뭘 그렇게 쌓아놓고 있느냐고 하면서 모든 재산 팔아 바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직장도 사업도 다 그만 두고 전도만 하라고 가르칩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합니다. 말세 때에 깨어 기도해야 하고, 이 땅에 재물을 쌓지 말고 썩지 않는 하늘에 재물을 쌓아야 하고, 한 명이라고 더 구원하기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종말 신앙과 다릅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목사님이 청년들과 종말론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청년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여러분은 당장 무엇을 하겠습까?” 청년들의 대답은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청년은 “교회로 달려가 기도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또 어떤 청년은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종말에 대하여 설명하고 회개하도록 하여 함께 천국에 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또 어떤 청년은 “아직까지 화해하지 못한 애인과 먼저 화해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또 어떤 청년은 “그리고 내게 있는 모든 재산을 가지고 단 하루만이라도 선한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은 전혀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지금 이대로 놀겠습니다.” 그 때 그곳에 있던 다른 청년들이 “와!”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웃었지만 사실은 지금 이 형제가 한 말이 옳은 말입니다. 건강한 신앙이란 지금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자기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성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대답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학생이면 학교에 가서는 학업에 최선을 다하고, 여러분들이 직장인이면 직장에 가서 직장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여러분들이 가정주부이면 가정주부의 일로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들이 서리집사면 서리집사로서, 안수집사면 안수집사로서, 찬양팀원이면 찬양팀원으로, 주일학교 교사이면 교사로서, 샘지기이면 샘지기로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를 기다리며,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신랑을 맞이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리며 현재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한번 뿐인 기회를 놓치지 마라
셋째로 오늘 본문은 ‘한번 뿐인 기회를 놓치지 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10명의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 오자 다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신랑 일행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10명의 처녀들은 재빨리 일어나 각자의 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5명의 처녀들은 결혼예식 행렬이 시작되기도 전에 등불이 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5명의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그들은 기름을 파는 상인에게 뒤늦게 달려가 필요한 기름을 사서 다시 돌아왔지만, 신랑 집 문이 이미 닫혀 있었습니다. 미련한 5명의 처녀들은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바람에, 그들은 결국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문이 닫히고 나서 뒤늦게 찾아온 여인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고 닫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뒤늦게 기름을 사왔지만, 문이 닫히는 바람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던 것처럼,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기회의 문이 닫혀 버릴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아무리 고함을 지르며 문을 두드린다 할지라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하며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구원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의 문이 한 번 닫히면 더 이상 열리지 않습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지나가 버리면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것이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기회,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전도할 수 있는 기회, 섬길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 침대에 누웠다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주님께서 오실 수도 있고, 내일 저녁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처처에 난리와 전쟁과 기근과 지진, 등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 오실 날이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고, 봉사하고 싶어도 봉사할 수 없고, 전도하고 싶어도 전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뒤늦게 억울해 하지 말고, 주어진 기회를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오늘 서두에서 파키스탄 지진 등의 자연재해를 소개하며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니까 강력한 지진이 파키스탄 북동부를 강타하기 전, 까마귀를 비롯한 새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파키스탄 카슈미르에서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까마귀들이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고 나서 둥지를 떠났는데, 곧 이어 강도 7.6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물의 재해에 대한 예지능력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형 재해 직전에 동물들이 이상행동을 보였다는 수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 아체주 등, 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과 해일로 17만 명이 숨졌지만, 야생동물의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얄라 국립공원에 있던 코끼리와 사슴 떼는 지진 발생 직전에 고지대로 이동해 별 피해가 없었고,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에서도 해변가에 있던 영양 떼는 해일이 밀어닥치기 몇 분 전에 언덕으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1990년, 로스앤젤레스 지진 직전에는 USC(남캘리포니아대학) 연구소에 있던 토끼들이 괴성을 지르며, 우리 안에서 날뛰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1975년, 중국 하이청(海城)에 7.3이나 되는 강진이 발생했을 때, 겨울잠을 자던 뱀이 도로로 나와 얼어 죽은 것을 주민들이 보고 신속히 대피함으로 희생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지진이나 태풍이나 해일이 닥칠 때에도 동물이 이상행동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개미나 뱀이나 까마귀나 코끼리와 같은 동물들도 여러 가지 자연재해의 징조들을 보고 미리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처처에 기근과 전쟁과 지진과 재난이 닥치는 것을 보면 말세인 것이 분명한데, 여러분들은 말세를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13절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사람들이 아닌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실 그 날이 언제일지 그 시간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여 신랑을 맞이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리며 현재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뒤늦게 억울해 하지 말고, 주어진 기회를 꼭 붙잡았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리더쉽으로 준비 된 삶
마 25: 1-13 / 장경준 목사
본문은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 두 종류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준비’ 또는 ‘예비’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슬기로운 사람은 등과 기름을 준비 했는데, 미련한 사람은 등만 준비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갖춘 준비를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며 모든 분야에 갖추어진 준비를 잘 하면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 인생을 살아가되 갖추어진 준비를 못하면 미련한 사람이 됩니다. 갖춘 준비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갖추어진 준비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즈음 사회에도 여러 종류의 교육이 활발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이 리더쉽 교육입니다. 리더쉽은 어떤 곳에서 나올까요? 리더자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첫째; ‘나란 무엇인가?’ 즉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갖는 사람입니다. 둘째; ‘분명한 신년과 가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소유한 신념과 가치를 이행 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넷째; 능력을 잠재우는 것이 하니라 ‘적합한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이 모든 것을 뒷받침 할 ‘환경’이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슬기로운 성공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아 정체성’, ‘신념과 가치’, ‘능력’, ‘행동’ 그리고 ‘환경’을 두루 갖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리더쉽은 ‘자아 정체성’, ‘신념과 가치’, ‘능력’, ‘행동’ 그리고 ‘환경’을 두루 두루 갖춘 사람에게 나오는 영향력입니다. 이러한 리더쉽은 상급 요소의 영향을 받습니다. 즉 ‘자아 정체성’이 ‘신념과 가치’를 결정하고, ‘신념과 가치’가 ‘능력’을 일으키고, ‘’능력‘에 따라 ’행동‘하며, ’행동‘이 ’환경‘ 마져 변화 시킵니다.
우리는 본문에 대해 이렇게 일반적인 해석을 합니다. ‘신랑’은 ‘예수님’을, ‘신랑의 도래’는 ‘예수님의 재림’을 ‘신부’는 ‘기독교인’을, 신부가 준비한 ‘등’은 예수 ‘구원의 말씀의 영접’을, ‘기름’은 ‘성령’을 말한다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 재림을 준비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을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아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아 준비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리더쉽과 연결 되어 말씀드린다면.... 성령을 받아 ‘자아 정체성’, ‘신념과 가치’, ‘능력’, ‘행동’ 그리고 ‘환경’을 두루 두루 갖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체성을 갖게 하고, 성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중심 삼아 신념의 길을 걷게 하며,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영적 능력을 힘입어 혼적 육적 능력을 살게 하며, 성령은 매 순간 마다 닥치는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동하게 하며, 성령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주장 조성해 주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삶의 모든 분야가 향상 되어 예수 재림 때에 들림 받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에 의해 갖추어진 자아를 구현 하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나의 정체성을 말할 때 여러 가지 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한 성인 남자는 한 가정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남편’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시민’이기도 하고 ‘국민’이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더 나아가 ‘목사’이기도 합니다. 나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를 갖춘 나입니다.
가장 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가장으로서 감당 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부부 관계에 성공적이어야 합니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가정 경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녀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 가치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에 대한 확실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인 남자들이 확실한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미고 삽니다. 이곳에서부터 오늘날의 많은 가정 문제가 야기 됩니다. 이런 것은 성인인 여자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 입니다. 기독교인은 남자나 여자가 가정적으로 갖춘 준비가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시민 사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발전적인 미래 사회 구현을 위해서 사회적 자아 구현도 실현해야 합니다. 21세기 국가 발전은 시민의식을 가진 국민들의 적극적인 사회 정치 참여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이런 사회가 NGO사회입니다. 국가가 재정적 지원을 해 가면서까지 시민 단체들을 육성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은 이기주의적 개인의 생활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사회인으로 국민 된 정체성을 분명히 갖고 사회적 국가적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자아 영역에는 영적 신앙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창 1:26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대로 만들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아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먼저 확립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자아에 대한 정체성 즉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아,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 가정 구성원으로서의 자아는 각기 그에 적합한 가치와 신념을 동반합니다. 능력을 필요로 하고 행동을 하게 합니다. 환경을 수반하며 만들어 갑니다. 이런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삶이 되면 복된 삶이 됩니다. 21세기는 다양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각 부분 마다 전문화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부분 한 가지도 제대로 감당하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부분적 삶에 더욱 우리가 치우치게 되고 그 결국은 항상 모든 것에 불안과 불만이 따르게 됩니다. 이런 사회이기에 갖추어진 삶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령이 이것을 도와주십니다. 성령 안에 갖추어진 삶이 되는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신랑이 더디 옴으로
마 25:1-13 / 이삼규 목사
한 경비원이 화학 공장의 입구를 지키면서 13년 동안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13년 동안 아무도 화학공장에 침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비원은 텔레비전도 보고, 책이나 잡지도 읽고, 음료수도 마시면서 마당을 거닐기도 했습니다. 졸며 시간을 보내는 때도 자주 있었으며, 오랜 시간 잠을 자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고용되었을 때는 방심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으며, 신속하게 순시를 끝마쳤습니다. 그는 공장의 보안을 더욱 철저히 할 수 있도록, 여러 시간 동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판에 박힌 듯한 지루한 일과와 오랜 근무시간이 힘겨웠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비원의 열심도 식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경비원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세 남자가 공장에 침입하여 수천 달러에 이르는 귀중한 화학 약품을 가지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경비원은 가장 중요한 때에 부주의했던 탓으로 일순간에 불명예스럽게 일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주님의 재림이 더디다고 나태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아시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열 명의 처녀가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신랑이 빨리 도착을 하지 않는 겁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 졸며 잘새" 다 졸다가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위험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졸다가 잘 수 있습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에서 이러한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고전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열 처녀의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졸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자고 있습니까?
(욘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배 밑층에 내려가 잠자고 있던 요나에게 준 책망의 말씀은 단순히 선장의 책망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우리들, 영적으로 졸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준엄한 책망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누구에게 말씀 하셨습니까?
죄로 타락한 생활을 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비유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영적으로 각성된 삶을 살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언제 어느 때 주님이 재림하신다 할지라도 주님을 맞을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꼭 12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언제나 영적으로 각성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흔히 '종말장'이라고 부릅니다. 종말장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바로 이 결론이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왜 주님은 열 명의 처녀를 등장시킬까요? 유대인들은 본래 사람을 셀 때 열 명의 단위로 셉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열 명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유대인의 회당을 세우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은 신랑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사람이었고 다른 다섯 명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혼인잔치는 하루뿐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계속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예식은 낮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나 밤에 거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신랑 되는 사람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러 시간을 즐기다가 한밤중에 신부의 집을 향해 행진합니다. 한편 신부는 신부의 친구들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는 자기의 친구들인 들러리들과 함께 나아가 신랑을 영접하여 등불을 켜고 신랑의 집을 향해 떠나는 연등 행렬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말씀의 경우처럼 신랑의 행차가 의외로 늦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하늘의 별빛은 하나둘 더 빛나기 시작합니다. 입 빠른 신부의 들러리 가운데 한 사람이 "혹시 이거 우리 바람맞은 거 아냐?" "중간에 샛는 지도 모르지"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들러리 처녀는 한 술 더 떠서 신부에게 "야, 오늘밤은 아무래도 신랑이 안 올 것 같으니까 그냥 자자구" 이렇게 부추깁니다. 이렇든 저렇든 밤이 점점 깊어가니까 신부의 들러리 처녀들은 긴장이 풀리고 졸리기도 해서 하나 둘 잠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얼마나 애처로운 모습입니까? 신랑이 지체하는 그때 그들은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과 같이 지속하지 못했으며 처음의 매력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깨어 있어야 할 때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어떤 질문을 합니까? "너도 졸며 자고 있는 성도는 아니냐?"
잠자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잠들었을 때의 우리 몸의 상태는 잠자는 영혼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잠자는 육체는 활동을 그칩니다. 실로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험이 다가와도 그 위험을 쉽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잠을 자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잠을 자게 되면 영혼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거룩한 것에 관심이 떠나게 되고, 받은 바 은혜를 보존하지 못하며, 나태하고 게으름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으로 잠자게 되는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1. 경계하는 마음을 계속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계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로 볼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다시 망령된 자리로 돌아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깨닫고 자기 자신을 항상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게 녹녹한 세상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중직을 맡은 주의 종들은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주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 라고 말씀합니다.
지난번 미국이 9.11 테러 사건을 맞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들이 철저하게 경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건은 전무후무한 사건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방공망이 구멍이 뚫리고 미국의 심장부가 강타 당했다는 사실은 최첨단무기를 자랑하는 미국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구겨놓은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설마 비행기가 빌딩에 부딪힐까 라는 방심한 생각을 갖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비록 여객기라고 할지라도 건물에 부딪히기 전에 격추를 시켰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 게으르고,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는데 소홀하며 기도하기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졸음이 우리를 엿보기 시작할 것이고 마침내는 깊은 잠의 수렁에 빠뜨릴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눅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눅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2.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처녀들이 기다리는 시간에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눈꺼풀입니다. 아마도 천근 만근 그녀들을 누르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열 명의 처녀들은 참지 못하고 그만 졸다가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제가 저희 집사람과 서울에서 데이트를 할 때의 일입니다. 서울 남영동에 있는 모 제과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 사람이 나타나지를 않는 겁니다. 약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건물인데 하나는 다방에서 기다리고, 하나는 제과점에서 기다린 겁니다. 둘다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린 것입니다. 만약 하나가 기다림에 지쳐서 돌아가 버렸다면 그날 데이트는 이루어지지 않았겠지요. 기다리다가 만나니까 더 반가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눅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눅 12: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산 아래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한 달 정도는 참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한 달을 기다려도 모세가 안 내려오니까 그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아론에게 찾아가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금송아지입니다. 조금만 기다렸더라면 광채 나는 모습으로 손에 십계명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를 기쁨으로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인내하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무섭게 나타났습니까!
야고보 선생님은 인내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교훈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들로서 세 가지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1)농부의 인내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2)선지자의 인내
약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3)욥의 인내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인 우리들은 이 세 가지 인내(농부의 인내, 선지자들의 인내, 욥의 인내)를 꼭 배워야 합니다.
3. 은혜 받지 못한 친구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 너무나 친밀하게 교제하였기 때문에 그들마저 실패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졸음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품하면 다른 사람도 하품합니다. 한 사람이 졸게 되면 다른 사람도 자극을 받아서 역시 졸게 됩니다. 조는 치는 만나면 졸게 되고, 깨어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 깨어 있게 됩니다.
시 119:115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게으르고 나태한 성도들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한 번 진단하여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 믿음의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그 열정이 여러분들에게 더욱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시글시글 불꽃이 꺼져 가는 자들과 교제하십니까? 역시 여러분의 믿음의 불꽃도 금새 꺼져 버릴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고 방식이 부정적입니다. 항상 불평과 원망을 일삼습니다. 모든 일에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복 돋우어 주기보다는 낙심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합니까?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4. 초기 단계의 위험에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잠들기 전에 졸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졸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잠들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타락의 초기 단계에 주의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그리고 엄숙히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무기력한 상태에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결국에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녁에 무엇을 하는지는 몰라도 항상 눈이 충혈 되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졸기 일수입니다. 찬양대 지휘하고 앞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전도사는 교회에서 오래 시무하지 못하고 제가 알기로 벌써 몇 군데 옮겨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잠에 빠집니까?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한다고 잠언은 말씀합니다.
잠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조는 것도 습관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 시간에 아예 주무시려고 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말씀을 눈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귀로만 들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럴싸합니다. 고개도 끄덕입니다. 그러나 점차 깊은 명상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에는 주무시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잠들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은혜를 상실하게 됩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둔감해집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집니다. 성령의 역사가 중담됩니다. 세상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을 원수들에게 빼앗깁니다. 세상 것들로 만족하려 합니다. 영적으로 굶주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관심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요나가 배 밑층에 내려가 잠든 결과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그가 잠든 결과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배 안에 있는 자들에게 공포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물질에 손해를 끼쳤습니다. 결국에는 자신도 물고기의 밥이 되는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믿음의 주님을 변함없이 바라봅시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주님의 사랑을 항상 생각합시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3)항상 깨어 기도합시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주님의 재림을 기다립시다.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비록 신랑이 더디 올지라도 맞이할 수 있는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파수꾼과 기름 그릇
마 25:1-13 / 최복규 목사
마 13:3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이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비유로 기록했다는 말이다. 마 25장의 내용은 비유로만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중동지역의 결혼식을 비유로 말씀했다. 그들은 결혼식을 밤에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제일 캄캄한 밤, 죄악이 관영해서 땅 위에 빛을 찾기 어려워 흑암이 가득할 때 우리 주님이 천군 천사 들러리들과 함께 신부인 우리를 맞으러 오실 줄 믿는다.
그런데 캄캄한 밤중에 신랑이 들러리들과 함께 고개를 넘어갈 때 어느 곳이 신부 집인지 알 수가 없을 때 아는 방법이 2가지가 있다. 그 동네에 한번도 가본 일이 없어도 불 켜진 집만 찾아가면 된다. 또 한가지 떠들썩한 집만 찾아가면 된다. 기도하느냐고 찬송하느냐고 성경공부 하느냐고 불 켜놓고 떠들썩한 강변교회에는 우리 주님이 틀림없이 찾아오실 줄 믿는다. 본문에 보면 파수꾼은 사명을 다했다. 오늘의 신부 집이 어디인가? 교회다. 신부 집의 파수꾼은 누구인가? 목사님이시다. 목사님이 이 교회의 파수꾼이다. 신부 집은 파수꾼을 잘 써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파수꾼은 제 사명을 다했다. “보라 신랑이로다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
문제는 신부 집에 있었다. 본문의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 열 사람이 모두 똑같이 등을 들고 똑 같이 기름을 충분히 담고 똑같이 신랑오시는 그 시간까지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졸기도 열 사람이 똑같이 졸고 잠도 똑 같이 잤다. 파수꾼이 소리 지르는 소리에 똑 같이 깨어났다. 자다가 일어나서도 똑 같이 열 사람 모두 불을 켜고 있었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은 미련한 사람들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별도의 기름 그릇을 준비하지 않았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부족할 것이니까 별도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것이다.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지혜로운 사람은 믿는 자이고 미련한 사람은 불신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 지혜로운 사람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은혜 받은 자들이고 미련한 사람들은 성령 은혜 안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성령님을 기름으로 비유한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죽도록 충성하고 애를 써도 별도의 기름 그릇을 가진 사람만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미련한 사람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봉사하고 이만큼 기도하고 이만큼 충성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교만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똑같이 봉사 충성하면서도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항상 생각했다. 때문에 별도의 기름그릇을 준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기름 그릇을 택해야 한다. 왜? 본문에 있는 대로 주님이 더디 오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점점 죄악으로 깊어 가니까 불을 점점 더 밝혀야겠는데 아무리 은혜 많이 받았어도 우리 기름이 꺼져 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기름이 없어도 꺼지고 바람이 불어도 꺼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롯 유다 그런 사람들 다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다 망했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 은혜 충만히 받았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충만해도 엎어지면 다 쏟아진다. 그럴 때를 대비해 별도의 기름 그릇을 가져야 한다. 즉 신앙의 친구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라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 목사님은 항상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어주신다. 목사님도 한계가 있다. 기름을 부어 주다 보면 탈진할 때가 있다. 성도들이 기름 그릇이 되어야 한다. 구역장은 구역원들을 위해서, 구역원들은 구역장의 기름 그릇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 아무리 능력 받았다 하더라고 혼자 가면 반드시 패한다. 두 사람이면 패하지 않는다. 게다가 세 사람 삽 겹줄이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기름을 부어줄 수 있는 서로 서로가 되어야 한다. “주여 주님 오실 때까지 서로서로 기름 그릇이 되어서 기도로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리하여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다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다 졸며 잘쌔
마 25:1-13 / 박지온목사
오늘 본문말씀에서 5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말세의 현상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 재림 주로 오신다는 것은 벌써 언제부터 계속해서 오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아직도 안 오시고 있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디 오신다!' 이런 어떤 생각을 갖게 된다. 특별히 종말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나온 잔치에 대한 비유는. 이것은 사실적인 이야기보다도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결혼에 대한 것을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만은, 조금 설명을 하면 유대인들은 거의 1주일 정도 시간을 갖고 결혼 예식을 하고, 또 우리하고는 많은 그런 습관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신랑이 신부집을 찾을 때에, 대게 보면 밤중에 친구들하고 같이 찾아오는데, 그 동안에 이제 신부도 자기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부러 신랑이 신부를 좀 골탕먹이려고 늦게 온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배경이 그겁니다. 밤중이 지났는데도 늦게 오니까, 오늘 성경에 말씀한데로 기다리던 신부친구들과 신부가 '다 졸며 잘새' 그랬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배경을 이것으로 설명을 좀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세가 될수록 세상이 점점 불신앙으로 빠지고, 어제 핵심에 조금 말씀이 있었습니다 만은, 정말 복음을 가르치고 말하는 스승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심각하게 불신앙으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사람을 보겠느냐! 그렇게 말할 정도로...교회 다는 사람들도 그렇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고 다 불신앙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서 많은 성경학자들이, '미련한 처녀 다섯, 슬기로운 처녀 다섯!'으로 나누었는데, 미련한 처녀 다섯은 등은 있으나 뭐가 없어요? '기름이 없었다!'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해석에 동감을 하고 싶어요. 또 종교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거든요.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서 사실이 없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종교로 빠지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이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 외식으로 빠집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으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이 없으니까, 있는 척 하려고 하니까! 그건 외식이 되는 거죠.
그래서 지금 여러분이 너무 감사해야 될 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모든 문제 해결 자다!'라는 이 믿음의 사실을 갖고 누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큰 축복을 받아 놓고도 그것을 감사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것보다 더 미련한 것이 없다 싶어요. 그래서 말세가 되면 마지막 종말에는 어떤 문제가 오느냐? '다 졸며 잘새!' 이게 종말을 가지게 되는, 종말에 오는 '사회적인 현상이요, 교회 적인 현상이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 그랬는데도 안 오시니까!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약속했는데도 그 약속이 실현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무관심해지는 겁니다. 더디 오시니까, 관심이 없어지는 겁니다. 점점 믿음이 사라지고, 다른 것으로...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나 사건들을 보면, 주님이 오시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믿음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이 불신앙으로 점점 빠져들어 갑니다. 사회의 풍습이나 현상이나 모든 사실들이 점점 불신앙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 불신간에 어떤 면에서 교회까지도 다 뭐라 그래요? '졸며!' 조는 사람 뒤에 뭐가 옵니까? 자는 거죠. '졸며 잘새!' 참, 전 재미있는 표현인 것 같아요. 왜? 사람이 졸기 시작하면 잡니다.
그래서 뭔가 불신앙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약간 뭐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가도 그 다음에는 다 놓아버립니다. 조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절대로 안 졸았다 그러죠. 그리고 메시지 다 들었다 그럽니다. 그런데 사실은 뭔가 모르게 메시지를 들었다고 그러는 데도 메시지를 몰라요. 물어보면 앞도 뒤도 안나와요. 사단의 꼬임이요, 마지막시대에 아주 교묘한 그런 술수를 가지고 꼬여오는데 그게 뭐냐하면, 여러분과 저를, 모든 사람들을 다 어떻게? 졸게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메시지를 듣는 동안에도 '참, 이 말씀이 사실이구나! 정말 예수님께서 오시는 구나!' 메시지를 사실로 안 듣고 희미하게...
그래서 다락방에 오신 여러분들이 특별히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고, 이 말씀을 적고, 말씀으로 기도제목을 삼고, 이것은 그냥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축복과 은혜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말세에 어떤 문제가 와야 되느냐? 한번 받아합시다. "그러나 노아는" 뭘 입었어요? "은혜를 입었더라!"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말세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노아 때를 몇 번이나 들먹였습니다. 여러분 노아가 많은 사람들처럼 똑같은 그런 환경에서 똑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노아가 특별히 뭐 잘나고, 뭐 잘하고, 그런 게 아닙니다.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더라!'는 이 한가지 때문에 노아와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 오셨는데 분명히 여러분 붙잡아야될 것이 뭐냐하면? '아, 나는 은혜 받은 사람이구나! 내가 복음의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히 깨닫고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은혜구나!' 은혜가 아니면 이것은 상상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뭐라고, 재주가 더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눈이 세 개입니까? 똑같아요. 다 뭐라 구요? 졸며 잤습니다. 다른 사람과 별 다른 게 없어요. 다 예배시간 오래되면, '빨리 마치면 좋겠다!' 싶고, 설교시간 길어지게 되면, '얼른 안 마치나!' 똑같아요. 그리고 주일날 되면 어디 자꾸 놀러가고 싶고, 교회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꾸물거리다가 늦어지고, 이런 것이 어떤 면에서 다 똑같은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앉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래도 들어야 되겠다고 왔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느냐! 이겁니다. 이 시간에 그리고 똑같이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 말하면 눈이 번쩍 뜨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 말하는 정말 복음을 말하는 장소에 앉았다는 사실이 이게 얼마나 지금 축복인지 모릅니다. 지금 세상은 '점점 종교화 되간다!'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잖아요. 자꾸 말하려고 그러니까 다른 어떤 교단을, 다른 어떤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 같고, 그렇지만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제가 카톨릭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상당히 좋은 기회가 되었어요. 뭐냐하면, 참 그들이 정직하게, 진실하게 잘합니다. 그리고 간호사들이나, 그 다음에 의사들이나, 또 그 다음에 식당이나 참 잘해요. 봉사하는 사람들이나...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정말 삶에 대해서는 이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나!'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떠냐? 그리로 빠져 버려요.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너무 잘합니다. 그리고 시간, 시간 때만 되면 나는 동산병원에서도 그런 것을 못 봤어요. 때만 되면 전부 마이크로 해 가지고 그들을 카톨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계속 메시지를 줍니다. 하루에 몇 번씩 그럽니다.
동산병원에 있을 때는 전혀 그런 것을 못 느꼈어요. 동산병원이 기독병원인지, 기독병원이 아닌지... 하기야 기독병원까지 떼어내어 버렸으니까! 없어요. 그런데 카톨릭에는 사람들이 마음이 약할 때, 어려운 때에 뭔가 딱 메시지를 줘요. 메시지를 주면서 솔깃하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어 놓더라 구요. '아, 정말 이 사람들이 정말 잘 하는구나!' 그런데 속이 너무 상하는 것은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렇게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싹 빼어버립니다.
심지어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도할 때에 여러분 기도는 누구의 이름으로 합니까? 요한 복음서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몇 번씩 말했거든요. 말할 뿐 아니고,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루리라!' 말씀을 분명히 했는데도 그들을 그렇게 안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없어요.
그리고 늘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든지, 뭘 이렇게 만들어놓던지 보면, 꼭 예수님은 어린아이에요. 그 다음에 보호받는 이런 어떤 상황으로... 한번도 예수님이 그 성인으로 기록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이 예수뿐입니다. 전부 어린아이로 만들어놓습니다. 누가? 마리아의 보호입니다. 그들이 오히려 자기들의 말은 안 그렇다고 그러는데, 사실을 보면 아니거든요.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머니 말을 너무 잘 들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 직접 말하는 것보다도, 예수님 어머니한테 기도하면 듣는다는 이런 어떤 믿음인 것 같아요.
이것이 매스컴을 통해서, 평화방송 보세요. 너무 엄청나게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아니니까 귀신의 역사나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모르고 있거든요. 그러니 뭐 제사 지내는 것 다 허용하지, 꼭 뭐냐? 귀신 숭배하는 걸 똑같이 하는 겁니다. 이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빠지느냐? 점점 천주교로 빠져듭니다. 지금 우리 주변을 보세요. '예수 믿는 것 어렵다 싶고, 천주교 너무 쉽다!' 이렇게 인상이 가서 젊은 사람들이든지, 늙은 사람이든지, 얼마나 빠져 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런 어두운 시대가 왔습니다 만은, 교회도 잠잠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흑암의 세력과 흑암의 역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게 안 나가고 있습니다. 이 말이 안 나갑니다. 그러니까 뉴에이지를 비롯해서 전 세계가 완전히 흑암으로 덮여가고 있습니다. 이사야 60장을 비롯해서 61장, 62장에 이 모든 사실이 사실로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이것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오늘 5절 말씀에 '다 졸며 잘새'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되는데, 노아 시대를 말하면서 말세에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은혜를 입었구나!' 왜? 나는 은혜를 입는 동시에 신분이 바꾸어졌습니다. 누구입니까? 자신이 없는가 봐요. 나는 못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상한 짓을 하고 와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부간에 싸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뭐 다투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이 너무 귀중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지옥의 사람이다! 지옥 간다!' 다른 게 아니거든요. 너희아비 마귀!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소속이 바로 벌써 다르다! 이겁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다! 이건 뭡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영접하면'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사실자체가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간다는 사실자체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이런 시대에 얼마나 이 축복과 은혜가 귀하고 놀라운 역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저는 오늘 아침에 조금 말씀을 묵상하면서, 옥상에 가서 제 나름대로 조금 메시지를 마음으로 준비를 하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여러분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하는 사실이, 이게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거든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교회 건축에 마음만 먹었더니 뭐라 그랬습니까? '네 후손만대를 복 주마!'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재정적으로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 같은데, 교회 건축을 하고 난 후에, 나는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건축하면서 교회 건축했던 주동자들이 한번도, 한 사람도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없더라 구요.
하나님께서 그때는 어려웠었고 그랬는지는 몰라요. 다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엄청난 축복과 부를 주시더라 구요. 그런데 여기에 참여한 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 하면 야 정말 감사하구나 정말 하나님 앞에 이 자리에 세운 것 감사하구나! 받아합시다. 억지로 복 받게 되었다. 그게 어느 자리입니까? 교회 건축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헌금도 하나님 앞에 뭔가 힘에 겹도록 하는 시간이 건축하는 자리에 있을 때입니다. 안 그러면 그렇게 못해요.
저는 그 신학교에 다닐 때에, 지금은 동부교회에서 은퇴하신 목사님이십니다 만은, 김덕신 목사님이 그때 우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영감을 받고 그랬습니다 만은, 그분이 '자녀 손들에게 축복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신 것이 부모의 축복에 이어서 부모에게 주신 축복을 우리들이 받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부모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축복을 받았느냐? 교회를 건축하는데 부모님들이 좀 무리하게 한 것 같아요. 집을 다 팔아 가지고 교회에 그만 드려버렸습니다. 그 후로 그 가정이 너무 어려웠더라 그랬습니다. 가정이 셋방을 전전하면서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오늘 이런 축복을 받고, 이런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은 부모님들이 하나님 앞에 전 재산을 교회건축에 드렸던 그런 축복과 은혜가 오늘 후손들에게, 이 후손들에게 이 축복을 주신 것으로 믿는다!' 그러더라 구요.
여러분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적인 축복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 건축한다!' 그럴 때에, 힘에 겹도록 헌금할 수 있는 기회는 이 기회밖에 다른 기회가 없더라 구요. 보통 십일조 드린다! 선교 헌금 드린다! 또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안잖아요. 그러나 교회 건축 때는 그게 아니잖아요. 힘에 겹도록 드리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처남이 오늘 1부 예배에 왔다갔는지... 한번도 제가 힘에 겹도록 뭘 이렇게 드린다! 그럴 수 있는 것도 없었지 만은, 오천 만원을 작정해 놓고 매번 배 사례비가 나오면 떼어 드리고 떼어드리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내가 다 못 드렸나 싶어서 우리 집사님한테 '얼마나 드렸느냐? 알고 나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가 또 조절해야 되지 않겠냐?' '얼마나 드렸느냐?' 물으니까! '목사님, 벌써 다 드렸고 180만원이 오바했습니다!' 그러더라 구요. 나는 180만원 오바한지도 모르는 동안에 더 드렸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그런데 그걸 드리게 될 때에 저희 집사람 이름으로 땅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땅이냐? 우리 그 장모님이 가시면서 지금 저 진주 쪽에 묘를 쓴다고, 밭을 한 200평인가 사 가지고 묘를 쓴 곳이 있어요. 그런데 그 묘를 이제 천안으로 옮기고 팔았는데, 그게 우리 집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팔아 가지고는 장모님이 '한번도 뭐 이렇게 남겨준 것이 없다!' 그래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처남들이 의논해 가지고, '우리 장모님이 남겨줬으니까 아무래도 줘야 되겠다!'
그래서 누구의 이름으로 주느냐? '박세광이한테 주자! 공부하니까 주자!' 박세광이한테 준다고 결정을 하고는 우리 집에 돈을 보냈어요. 우리 집에서는 또 두 사람이 의논하기를 '어차피 박세광이는 내가 돈을 줘야 될 거니까!' 700만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는 이건 몽땅 건축헌금이다!' 아마 이 건축헌금을 몽땅 드렸던 것이 상당히 많이 단축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드렸더니 성이 나가지고, '어머니가 남긴 것인데, 외손자한테 하나 남겼는데, 그랬다고...' 그래도 이게 복이다! 내 입장에서 한꺼번에 몽땅 돈을 700만원 드려본 적은 처음입니다. 그게 뭐 가지고 있는 게 있어야 한꺼번에 드리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교회 건축이라는 이 사실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안 생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역사를 믿습니까! 그냥 두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믿음과 어떤 신앙으로 살아가느냐? 그냥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역사 하셨던 것처럼, 솔로몬에게 역사 하셨던 것처럼, 지금까지 기성 세대 속에서 교회건축과 함께 몸과 마음을 드렸을 때에 역사 하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과 제게 계속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막 릴레이 기도한다! 이게 엄청난 축복입니다. 기도할 때에 정말 믿음가지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특별히 송현 교회 이건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보다도, 우리 후손들을 통해서 '세계를 살릴 세계 복음화의 교회다!'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을 겁니다. 축복과 은혜를 엄청나게 누릴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건축하면서 얼마나 사단이 장난을 했습니까! 그래서 심지어는 막 밖에서 들리는 것까지 '송현 교회! 교회를 짓겠나? 아마 못 지을 것이다! 교회 건축 때문에 싸움도 하고 그랬다나!' 요만한 것을 얼마나 부풀려 가지고요 계속 비난하고... 여러분 분명히 아실 것은 하나님이 하셨지, 여러분과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100억! 말이 100억이지! 이런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왜 이 말씀을 하느냐 하면, 너무 축복된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게 복인 줄을 몰라요. 이게 뭔가 안타까운 일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그러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세들이 너무 불신앙입니다. 조금만 믿음으로 바라보세요. 자손만대에 축복의 자리에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습니다. '다 졸며 잘새,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 송현 교회 교인들은 은혜를 입었더라!' 이 사실이 확인되어야 됩니다. 한 주간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던지, 내가 미련하고 연약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내가 불신앙하고 있는 중에도 성령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안 그러면 완전히 떨어지니까! 그래서 안 믿는 것처럼 생각했다가도, 또 보면 그래도 믿고 있어요. 낙심했다가도 또 보면 주일날 여기와 앉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러분에게 뭘 주었어요? '은혜를 주었더라!'
그런데 뭔가 이상하게 다른데서 들어보지 못했던 말, '예수님은 그리스도 시다!' 어떤 사람은 이게 듣기 싫다고 나간 사람도 있어요. 완전히 마귀하고 친구가 된 거죠.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나와 여러분에게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는 사실이 왜 듣기 싫습니까! 그 아무래도 이상하잖아요. 여러분 듣기 싫다가도 또 주일날 와서 들으면 또 힘이 나! 그러나 노아는 뭘 입었어요? '은혜를 입었더라!' 이 축복과 역사가 오늘 여러분 한 주간 살면서, 아마 어떤 장소와 사건 속에서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데, 또 보면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축복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은혜의 역사를 이제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깨닫고 확신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한 주간도 하나님의 역사가 넘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처녀 비유
마 25:1-13 / 박덕기 목사
오늘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 중 너무도 잘 알려진 ‘열 처녀의 비유’를 상고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유대 나라의 결혼 풍습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유대 나라에서의 결혼이란 대단한 경사였습니다. 온 마을이 총 출동하여 결혼을 축복하는데,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기 위해서, 신랑의 결혼 행렬은 가장 먼 길을 통해 갔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혼례식은 보통 초저녁별이 나타날 무렵에 베풀어지는데,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를 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신부의 친구인 열 명의 둘러리 처녀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데, 때로는 어떤 사고로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랑의 행렬이 늦게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쌍의 남여가 결혼을 하면 그들은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일주일가량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혼인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왕자와 왕후의 칭호를 받고 예우를 받았는데, 그 때가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때였다고 합니다.
1. 열 처녀 비유의 상징적인 의미
열 처녀의 비유는 이 같은 유대의 결혼 풍속을 배경으로 하고 주신 것인데,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들러리인 ‘열 처녀’는 성도들을 의미하며,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그리고 ‘기름’은 이를 유지시켜 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를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눈 것은, 성도라 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자와 버림받을 자가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열’ 또는 ‘다섯’이란 숫자가 아니라,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그 준비 상태에 따라 둘로 양분되었다는 것이며, 신랑이 더디 올 때에 신랑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예식에 들어갈 수 있었던 반면, 신랑이 더디 올 것을 대비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시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므로 항상 깨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되, 예수께서 언제 오시든지 간에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교훈인 것입니다.
2. 더디 오는 신랑
5-6절에 보면 신랑이 오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5절을 보면 신랑이 매우 더디게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졸며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절은 신랑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졸며 잠든 한밤중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은 자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깨어 환영할 때에 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기다리다 모두 지쳐 잠들었을 바로 그 때에 돌연히 찾아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옛말에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길이 멀고 험해야 타고 가는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 온갖 풍상을 겪어 보아야 사람의 우정이나 사랑이 진실한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시험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더디게 이루어진다고 결코 불평하거나 나태해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영적으로 더욱 깨어 경성하고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하산이 늦어지자 그만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만 것처럼, 오늘날에도 역시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불법과 타락에 빠져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가장 많이 침입할 때는 사람들이 경계를 늦추는 한낮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밤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 역시 사람들이 가장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작스럽게 오셔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영적 어두움이 깊어갈수록 더욱 믿음과 성령의 불을 밝히고 준비함으로써, 언제든지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이들의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차이는 그녀들의 지력 혹은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준비성에 있었습니다.
1)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다.
여기에서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으나, 많은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대로 성령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참 신자와 형식적인 신자, 성령을 받은 신자와 받지 못한 신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한 자와 예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를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 준비를 잘하여 신랑이 왔을 때 혼인 잔치에 참예하여 한껏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자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말씀으로 준비하는 삶,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듣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다만 말씀대로의 순종이 뒤따를 때만 가치가 있고 생명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말씀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명을 얻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이 요구하는 바에 순종하여 준비된 삶을 살고 있는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2)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등에 가장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낮 동안에 기름을 준비할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시덕거리고 놀기만 했는지, 혹은 설마 그토록 밤늦게 올까 하는 생각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부주의 하고 방심했던 다섯 처녀들은 결국 신랑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혼인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내어 쫓김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까지 기다렸던 그들의 소망은 물거품처럼 헛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도 사람들이 주님 맞을 준비, 즉 회개와 믿음, 성령의 열매 맺는 삶 등을 소홀히 하다가 결국 구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처럼 구원과 관련된 준비를 미루다 결국 구원의 기회를 영원히 놓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믿음은 나누어 줄 수 없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도 준비해 놓지 않고 졸다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아오라” 할 때에야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면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름이 부족하여 쩔쩔매는 친구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인 다섯 처녀는,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을 듣는 대신 오히려 지혜롭다는 칭찬과 함께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가진 재산은 나누어 줄 수 있지만, 나에게 속한 남편이나 아내는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나누어 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출생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영생을 좌우할 믿음과 구원 역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백이 나를 구원 하고, 나의 회개가 나를 죄에서 건지고, 나의 충성과 봉사와 희생으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구원에 대해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주거나 도와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는 오로지 1:1의 관계입니다. 믿음이나 행함은 남에게 빌릴 수도 없으며, 어디 가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부모님이나 가족의 신앙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오직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발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며,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기회가 있는 지금 그들을 깨우쳐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5.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10절을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밤에 결혼이 이루어지던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일단 신랑의 입장과 함께 혼인 잔치가 시작되면 강도와 도둑을 막기 위해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 문을 닫으면 다시는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뒤늦게 가름을 사러 갔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 밖 어두운 곳에서 울며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가 되면 구원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리고 그 때가 지나면 아무리 구원의 문을 열어 달라고 애걸복걸해도 더 이상 구원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120년의 기회를 주셨지만,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후에는 그 방주 문을 친히 닫으시고 열어 주시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그 문은 한 번 닫히면 그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문이 항상 열려 있을 것으로 착각하여, 조금 쉬었다 믿겠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함부로 중단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 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생명 길로 갑시다.♬
6. 항상 깨어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13절에서 주님은 열 처녀 비유의 최종 결론의 말씀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이 구절 외에도 종말에 관한 교훈이 있을 때마다 일종의 결론으로써 거듭 반복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까?
1)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주님, 공의로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 주님, 그 분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의 재림 후에 있을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없을 구원의 때를 놓치지 않으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2)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이다.
신랑이 나아올 때 잠들어 있음으로 해서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신부는 불행한 신부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있을 때 신앙의 잠을 자다가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신자는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주님의 재림이 임하는 불행을 막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자지 말고 눈을 뜬 상태로 있으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면 이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외견상으로는 모두 믿음이 있고 깨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중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실상 깨어 있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들이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교회 생활에 열심이 있고 많은 활동을 한다고 해서 영적으로 깨어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 생활과 외적 활동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깨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등과 함께 무엇보다도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곧 말씀과 성령으로 속사람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과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눔으로써 생명력 있는 신앙과 경건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는 과연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 기회가 있는 지금 최선을 다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한 후회를 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께는 긍휼이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엄정한 선언은 신랑이 그 처녀들을 혼인 잔치 집에 들일 마음이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실로 종말의 날에 신랑 되신 예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게 되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인 것입니다. 주님의 초림은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은 죄인을 위한 것이었고, 죄인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는 긍휼과 사랑만이 충만했으며, 모든 죄인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초림이 구원과 회개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다면, 주님의 재림은 심판과 멸망의 선언을 위한 것입니다. 마 3:12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재림하시는 주님께는 긍휼이 없고, 오로지 공의로운 심판과 엄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때에 죄인들은 주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죄인을 더 이상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 때에는 한 편의 즐거움과 환희의 찬송,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의 회한의 눈물과 통곡으로 갈리는 두 종류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열 처녀의 비유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말세의 교회에는 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믿음이요 또 하나는 거짓믿음 입니다. 오늘의 비유대로라면 많게는 50%까지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 알곡이 있지만 분명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고 성도를 신부로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성도를 더 사랑하는 분이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주님께 성도가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하며,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동거하기 때문입니다.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체되는 주님의 재림을 회개와 구원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종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가? 이 시간 각자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열 처녀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재림 직전에만 깨어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영적으로 깨어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때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찾아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적으로 잠든 상태에서 맞이하는 부끄러운 신부가 되지 말고, 항상 깨어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신랑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여,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예하는 슬기로운 신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