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작전"이라고도 하고 "대륙타통작전"이라고도 하는 중일전쟁에 있어서 일본의 최대 최후의 대공세에서 호남성의 중국군은 무기력하게 무너졌으나 형양공방전에서만은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본군이 만주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연결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데, 이는 남방의 자원을 만주를 거쳐 일본 본토까지 육로로 가져오겠다는 목적과 중국내의 센놀트휘하의 미 공군 비행장들을 공격해 파괴함으로서 미 폭격기들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군의 공세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제공권이 없었기 때문에 점과 선으로 연결된 중국내 점령지의 상황에서 남방의 자원을 육로로 운송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마리아나해전에서 일본군이 참패하고 오키나와가 함락되어 여기서 발진한 B29 폭격기들이 동경까지 폭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1호작전"중 이른바 "상계작전"은 상은 호남성, 계는 광서성의 별칭으로, 호남-광서성에 대한 대규모 공세에 대한 작전계획입니다. 일본쪽 참가병력은 36만 2천명, 군마 6만 7천두, 차량 9450량에 달했으며 여기에 만주의 관동군에서 특별히 빼낸 전차 약 100여량도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44년 5월 말부터 일본군은 한구와 광서를 연결하는 오한철도를 남하하여 공세를 개시합니다. 호남성에는 명장 탕은백장군이 이끄는 30만의 중국군이 있었으나 일전도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붕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탕은백장군은 중국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중 하나였으나 그의 군대는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했으며 말라리아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측은 일본군의 공세에 대해 공격시기, 공세방향, 목적까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이 점령지내 민중을 이용하여 조밀한 첩보망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공군이 폭격할때도 이들을 이용해 정확하게 일본군을 강타해 막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따라서 중국군은 충분히 대비할 수도 있었겠지만 중국군 자체의 무기력함(제 1선 병력 대부분이 병과 기아에 허덕임)과 장개석의 소극성(어차피 똑같이 상황이 좋지 못한 일본군이 제풀에 쓰러질 것이므로)으로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사실 연안방면의 공산군 포위에 쓰이고 있던 50만의 최정예부대는 미군식으로 무장해 있었고 식량 및 무기 보급상태도 좋았기 때문에 이들을 활용할 수 만 있었다면 중국전선의 상황도 틀림없이 바뀌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틸웰이나 후임의 위드마이어는 장개석의 고집때문에 끝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했죠.
한편, "장사의 호랑이" 설악장군 휘하 제 10군이 장사와 형양을 방위하고 있었습니다. 광복군에게도 많은 지원을 해 주어 나중에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무공훈장도 받게 되는 설악은 처음에는 장사 사수를 천명했으나 곧 장사를 포기하고 형양쪽으로 철수합니다. 이 바람에 6월 18일 장사는 쉽게 함락되고 맙니다. 6월 23일부터 형양성에 대해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는데 공격군은 제 11군 휘하의 제 11 및 16사단(교토사단), 제 58사단(구마모토사단), 제 68사단(오사카사단)등 총 4개 사단이었습니다.
형양성 안에는 방선각장군예하 중국군 4개 사단이 포진하여 사수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병력까지는 저로는 모르겠으나 같은 4개 사단이라 해도 고단위(1만~2만)의 일본군에 대해 중국군은 저단위(1만미만, 실제로는 2000~6000명)였기 때문에 병력면에서도 상당히 열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형양성주변에는 다수의 토치카와 대전차호가 설치되어 있었고 계림에서 출격해 오는 미공군의 엄호사격과 보급품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서는 처음부터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이탈리아군처럼 대공화력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에 공중공격에는 대단히 취약했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에는 미 제 14공군휘하 750기에 대해 일본육군 제 5항공군 160기로, 제공권은 압도적으로 미국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량도 부족하여 주변 논에서 익지 않은 벼이삭을 훝어 밥을 지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형양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 4개 사단에 대해 중국군 3개 사단이 역포위를 하여 보급까지 끊기게 됩니다. 중국군은 밤마다 역습을 가하나 탄약이 부족한 일본군으로서는 제대로 응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오면 일제 사격을 가해 격퇴했기 때문에 중국군도 지레 겁을 먹고 전면적으로 야습을 해 오지는 못합니다.
일본군은 형양성 교외에 포병을 배치한후 지속적으로 돌격전을 벌리고 철조망으로 결사대를 보내나 중국군의 기관총 사격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계속 실패합니다. 이 때문에 그때까지 약한 중국군을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두던 일본군들은 "형양성안에는 미군 지상군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라고까지 여기게 됩니다.
8월 4일 제 58사단이 장사로부터 도착하자 오후 4시 포병의 집중포격을 시작으로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99식 폭격기도 동참하여 형양성을 폭격합니다. 중국군의 응사도 심했으나 야습으로 중국군 제 1선 고지들이 함락되면서 8월 7일 시가지에 일본군이 돌입하는데 성공하고 시가전에서 일진일퇴가 거듭됩니다. 8월 8일 오전 7시 형양 방위사령관 방선각이 정식으로 항복함으로서 형양은 함락되고 맙니다.
1개월이상의 지루한 공방전만에 형양전투는 끝나는데 중국군 전사자 4000명이상, 포로는 1만 3300명에 달하였습니다. 일본군쪽 피해도 엄청난 것으로 전사 3860명, 전상 8327명, 병상 1만 9288명에 달했습니다.(이 중 약 1할이 미군기의 폭격, 기총사격으로 인함)
사실 중국군의 항복은 일본군의 공격보다 식량부족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미군의 공수는 탄약뿐이었습니다. 일본군도 중국군만큼이나 심각한 보급난에 말라리아까지 겹쳐 전투로 인한 피해보다 병으로 인한 피해가 훨씬 더 컸습니다. 병사들은 다 헤어진 군복을 입고 식량을 얻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물물교환에 나서야 했습니다.
어쨌든 형양전투로 일본군은 지금의 중국군은 이전의 중국군이 아니다, 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 11군 사령부도 "계림, 유주공략은 우리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체를 밟고 넘어서는 후속부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곧장 계림, 유주공략에 나서는데 패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해 엄청난 강행군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1월 10일 계림과 유주는 예상외로 하루만에 함락되고 마는데 이는 전차부대의 지원덕분이었습니다. 중국군은 제대로 된 대전차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전차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가전에서는 강한 저항을 보여 일본군으로서도 힘든 전투가 되었고 계림은 폐허가 되고 맙니다.
장개석은 설악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말로는 "격려"를 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지원은 하지 않았습니다. 장개석이 좀 더 전의가 있었더라면,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제 그런 의미에서 "하츠 오브 아이언2"에서 44년 중국전선을 플레이 해 봤는데 결과는 참담이었습니다. 숫적으로는 우세했으나 중국군 대부분이 민병대라 일본군 1개사단에 대해 10개사단이상으로 삼면포위해 공격해야 간신히 이길 정도이고 2개사단이상만 되어도 상대가 되지 않더군요. 결국 양자강부터 호남성방면까지 26개 사단이 포위되어 전멸하는 참상을 보고 끝내버렸습니다.
참고서적은 대동아전쟁비사 "중국편", 라이프 이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일중전쟁(태평양전쟁연구회)등입니다만 자료가 넘 적어서 잘 못 된 부분이나 미비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좋은 자료를 가지신 분이 계신다면 부연설명도 부탁합니다.
첫댓글 오오!!!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결국은 지원을 하거나 말거나 결론은 못 당한다는 것인가....
블로그에 비공개로 카피해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로 변변치도 못한 자료를 카피까지....^^ 책임은 못 집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