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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깨달음의 여정>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아갈수록 자유로워지니 깨달음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내적 자유와 기쁨도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아 가면서 마음도 새로워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깨달음이 없는 삶이라면 내적 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무가치한, 무의미한 삶입니다.
구원과 직결된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그대로 은총이요 구원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마지막 구절입니다.
제3자가 편지체로 시골신부의 죽음을 전하는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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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 손을 제 손 위에 얹으며 제 귀를 자기 입에 가까이 갖다 대라고 분명한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몹시 느리기는 하지마는 분명한 말소리로 "아무려면 어떤가? 모두가 은총인 걸"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아주 정확히 여기에 옮겨 적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숨을 거둔 것 같이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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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임종어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깨달음의 전 삶을 요약하는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묘비명으로 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크나큰 깨달음과 더불어 선종한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의 시골신부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은 자를 각자라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예수님도, 바오로도 위대한 각자입니다.
바오로의 깨달음은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깨달음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불가의 깨달음과 다른 분기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은 바로 주님과 사랑의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만나 깨달음이 깊어갈 때 세상 모두가 덧없어 지니, 비로소 세상 모두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보다 자유로운 사람, 부요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인간이 물음이라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처럼 깨달음의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하느님의 마음을 즉시 이해합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깨달음에 도달했다면,
예수님은 곧바로 아버지를 만나 깨달은 분입니다.
바로 복음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자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기쁨 가득한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못박듯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기쁨을 확신에 넘쳐 고백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바오로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깨달음에 이를 때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바로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매일미사보다 깨달음의 여정에 좋은 길잡이는, 이정표는 없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시편 35,10)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직구보다 변화구에서 왜 더 많이 홈런이 나오는 줄 아세요?
변화구는 치기는 더 어렵지만 치기만 한다면 더 큰 힘을 받고, 더 많이 회전하면서, 더 멀리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남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변화구가 날아오고 있습니까?
축하드립니다.
당신에게 홈런을 칠 수 있는 멋진 기회가 주어졌군요.”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메이저리그 류현진 선수의 트위터에 있는 글이라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 그러나 홈런 칠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던지기보다는
더욱 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서 이 좋은 기회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다고 그냥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삼진 당해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돌아갈 뿐인 것이지요.
우리가 죄로 물들어 있는 상태는 어쩌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냥 죄로 물들어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주님께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더 나은 ‘나’, 행복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부족하고 나약한 마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너무나 쉽게 흔들리며 이로 인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다는 것도 아시지요.
하지만 단 한 명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계속해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은 저희들에게 전해줍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나가는 목동, 잃어버린 한 닢을 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다른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서 나를 찾으러 올까?’라는 생각으로 포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양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찾으시고 편안하고 안전한 양 우리인 당신 품으로 우리 죄인들을 데려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내게 다가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여유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말한다면,
자신의 나약하고 부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분명 우리를 찾아 나선 주님을 쉽게 만나게 될 것이며,
주님을 맞아들여 주님과 함께 큰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탁한 물속에 깨끗한 물을 계속 넣으면 탁한 물이 점점 맑아집니다.
죄로 물든 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통해 분명히 깨끗해집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11월 6일의 복음 말씀은 '되찾은 양의 비유'(루카 15,1-7)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 15,8-10)입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바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간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하나도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이 두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을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나를 찾으러 오시는 분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목자가 양을 잃어버린 상황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떠나서 방황하는 상황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잃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내가 하느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서 모두가 다 '잃은 양'이거나 '되찾은 양'입니다.
(성모님만 제외하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따라서 '잃은 양'은 한 마리가 아니라 '백 마리' 전부이고,
비유에 나오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은 '되찾은 양'입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간 성인 성녀들은 '되찾은 양들'이고,
그분들을 아흔아홉 마리 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루카 15,4)' 라는 말은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포기하거나 버려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으로 생각하면,
그 아흔아홉 마리 양은 목자와 함께 잃은 양을 찾아 나서거나 그 양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양들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나는 목자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고, 결국 "나는 목자가 필요 없다." 라는 주장이 되어버립니다.
목자가 필요 없다는 그 태도가 바로 목자를 떠나는 양의 모습이고, 잃은 양의 모습이 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그런 사람입니다.
몸이 목자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떠나 있다면 '잃은 양'입니다.
미사 때에 몸은 성당에 있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면 미사 참례를 안 하는 것과 같고,
그것도 역시 '잃은 양' 상태가 되어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만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복음 말씀에서는 세리들을 가리켜서 잃은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잃은 양이고,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린 일은
'잃은 양'이 '다른 잃은 양'을 죄인이라고 비난한 일이 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되찾은 일은 목자에게도 기쁜 일이고,
잃은 양 자신에게도 기쁜 일이고, 다른 양들에게도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두 비유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자는 초대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나라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큰아들만 기뻐하지 않습니다.
큰아들 혼자서만 하늘나라 밖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비' 라는 것은 '의무' 수행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거저 베풀어 주는 은혜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의무 수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비를 받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고마워하면서 받을 뿐입니다.
'잃은 양'에게는 자기를 찾으러 오라고 목자에게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목자가 자기를 찾으러 온 것을 고마워할 뿐입니다.
만일에 양 자신이 목자에게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를 찾으러 오라고 요구만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태도가 되고, 그런 태도 자체도 죄가 됩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설 때 양 자신도 겸손한 태도로 목자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말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이신 분으로 오셨지만,
나중에 재림 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계속 잃은 양으로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즉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잃은 양'은 '되찾은 양'이 되기는커녕 '쫓겨나서 멸망하는 양'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되찾은 양'이 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참된 할례 >
청년 때 2박 3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여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등산복, 등산화, 배낭은 물론 아이젠과 부식 등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물론 3일 동안 마실 소주도 엄청 배낭에 넣었습니다.
화엄사 쪽으로 올라 능선을 따라 걸은 후 중산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였습니다.
도착해보니 눈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거의 뛰어오르다시피 하였습니다.
배낭엔 소주 피티병들이 많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매우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뱀사골 대피소쯤 가서 무릎에 신호가 왔습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하루 자고 나면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다음 날은 더 아파서 배낭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 절뚝거리며 여자 청년들보다 훨씬 쳐져서 3일 내내 창피하게 다녀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산에 오를 때 하나 버리고 와야 하는 게 있는데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교만하면 산은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해 줍니다.
무엇을 하기 위한 준비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며 그 증거로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할례는 불필요하고 어쩌면 더러운 부분을 잘라내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옛날에 하고 있던 무언가를 칼로 잘라내듯이 끊어버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첫 계약을 맺는 ‘세례’ 때,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유혹을 끊어버립니까?” 등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는 것입니다.
산과 친해지기 위해서 교만을 끊어버려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불붙은 떨기나무로 다가오던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그 곳은 깨끗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명하시는 장면에서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도 깨끗해야 하고 하느님 계신 곳에 가기 위해서도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그 더러움으로는 그분을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그때 겉옷을 벗어놓으셨습니다.
겉옷은 당신의 전부, 즉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희생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신 것입니다.
당신 피로 우리 교만을 씻으셔서 우리가 당신 앞에 무릎 꿇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이루어진 이후엔 육체적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다 전통에 묶인 이들은 육체적인 할례를 주장하였습니다.
바오로도 육체적인 할례를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구약의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을 반대하였습니다.
할례가 더 이상 육체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필리피인들에게 영적인 완전한 할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할례는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 모든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잘라내는 결단입니다.
이 결단이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아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이들이야말로 참 할례를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직 내 자신이나 육체적 욕망,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에 칼을 대지 않았다면
아직은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맺을 준비가 된 것이 아닙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가장 소중한 존재>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죄의 얼룩은 내가 씻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만이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그 얼룩을 빼려고 세탁소로 갈 게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면서 나 자신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죄의 용서를 통해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텐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가 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가 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은 반기십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베드 3,9)
이사야는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 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이사 55,7)
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요엘 2,12-13)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
고해성사의 은총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루카 복음 15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세 가지 비유로 짜여 있습니다.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되찾은 아들’이라는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 기뻐한다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얼마나 간절히 찾고 기다리시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비유인 되찾은 양과 은전의 비유와 함께 15장 전체의 도입 부분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 도입 부분에 머물러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진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지 성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갈망하는 이들의 자세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오만함은 철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여깁니다.
그들의 교만은 죄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주님과 ‘식탁 공동체’에 함께하지 못할뿐더러
그분과의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스스로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자신들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야 할 나약한 사람임을 깨닫지 못하는 더 큰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모르는 완고한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하시는 모습에 분노를 느낀 이유는,
‘잃은 양’을 도로 찾거나 영혼의 ‘환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시며 느끼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주님의 자비를 느끼고, 또한 이웃이 그분의 자비를 입은 것을 보며 참된 기쁨을 느끼는 이만이 진정 주님과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인자하신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그려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시작하시며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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