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묘지에서
전철호
6월 6일 현충일, 아침부터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는 아파트 관리 사무소
여직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저렇게 순국
영령들을 잊지 말자는 구호가 요즈음은 듣기 힘든 소리가 되었으니 그것마저
고마울 뿐이다. 지난해까지는 사직동 충혼탑으로 갔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진혼곡 나팔소리에 다소곳이 고개
숙였다. 그들이 지켜온 이 나라를 지키는데 나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올해는 군복을 입는 마지막 현충일이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참배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대전 현충원에 묻힌 동료와 선배 그리고 후배와
부하들은 몇 번 찾아보았지만 현충일 날 동작동은 가보지 못해 그곳에 묻힌
지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소나마 덜어보려는 심사였다.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국립묘지 가는 길은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룬다. 곳곳이 경찰과 헌병이 나와서 통제를 하고,
해병전우회와 같은 단체들과 한몫을 거든다. 들어가는 초입부터 적십자
봉사단을 비롯한 각종 봉사단체에서 나와서 안내를 맡기도 하고, 무료로
음료를 제공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묘소마다 다니면서
꽃이나 태극기가 빠지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동기생들이 모이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이미 서울 동기생들이 하루 전에
천막도 쳐놓고 플래카드도 내걸고, 간단한 음식도 준비를 해놓았다.
이곳저곳에서 추도를 위해 찾아온 동기생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만남의
반가움에 악수를 나누면서 오랜만의 해후를 풀어놓는다. 부부동반해서 찾아온
동기생, 아들과 딸을 데리고 참배 온 동기생, 그리고 혼자이지만 멀리서나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온다는 동기생, 그렇게들 젊은 시절 같이
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다는 인연으로 모여든다.
지난해보다 사람이
늘었다고 하니 앞으로는 더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 질 듯 하다. 아마 우리도
나이가 들면서 철도 들고 먼저 간 동기생들을 그리워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나 보다. 한 무리 검정색 양복의 사내들이 앞을 지난다. 머리가
희끗희끗 한 것이 아마 우리들보다 10여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저렇게
모여서 먼저 간 동기생들을 추모하는 모습이 살아남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고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아닐까?
10시 정각에 사이렌이 울려 퍼지면서 묵념을 하고 50여명의 동기생들이
묘소 참배를 출발한다. 총 부지 43만여 평에 안장된 유공자들이 5만 4천여
명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동기생들은 15명이다. 사연도 다양하지만
모두가 군복을 입고서 국가를 위한다는 숭고한 사명으로 근무를 하다가 순직한
동기생들이다. 결혼을 하고서 유명을 달리해 아들이 묘소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눈이 아파온다. 그리고 아들의 묘소를 찾아서 매년 전남
영광에서 올라오시는 아버님은 항상 집에서 술을 담아 오신다고 했다. 죽은
아들이지만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라는 깊은 뜻이시겠지. 또
누나들과 여동생이 맞이해 주는 동기생의 묘소 앞에는 누님들이 정갈하게
준비해온 여러 가지 음식들이 우리를 반긴다. 먼저 간 동생이 친구들과 이렇게
푸짐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매년 준비 해 오시는 누님의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회한이 있을까?
나와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하다가 빠른 결혼을 한지 4개월 만에 훈련 중
불발탄 사고로 먼저 간 동기생 묘소, 신혼인 동기 부인에게 비보를 직접 알리지
못해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속였던 옛일이 떠올라 가슴이 떨렸다. 그의
장례를 치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화장터에서 목이 메이기도
하고 술잔도 많이 기울였었다. 25년이 흐른 지금 그 어머니를 만나니 가슴이
저려온다. 어머님은 많이 늙기도 하셨다. 병중에 있던 아버님은 자기 생전에
손주 보려고 일찍 결혼시켰는데 아들이 먼저 가니 투병을 거부해 곧바로 아들
뒤를 따라 가셨다. 그때 어머님은 줄초상을 치르시느라 몇 달 사이에 10년은
더 늙으신 모습이 되셔서 무척 안타까웠었다. 동기부인은 친정으로 들어갔다가
임신초기의 아이를 지우고 몇 년 후에 재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어머님께 절을 올리고 같이 온 동생들의 손을 말없이 꼭 잡으면서 속마음을
전해보았다.
오래된 묘역에는 찾는 이들도 없는지 관리사무소에서 가져다놓은 꽃들과
태극기만 쓸쓸하게 펄럭이는 곳도 있다. 저들의 죽음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저들의 피와 죽음으로 지켜온 것인데 요즈음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문제에 대해 사회의 논란이 있어 안타깝다.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한번이라도 다녀갔는지 묻고 싶다. 종교적 자유가 국가적
의무보다 더 중요하다는 논리인가? 누가 이 나라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죽은 저들의 영령 앞에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대체복무제를 도입한다면 국립묘지
관리하는 일들을 시키고 싶은 심정이다. 가볍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으랴.
국가를 위해 죽어도 좋은 목숨과 죽어서는 안 되는 목숨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도 권리를 주장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
수는 없다. 남의 희생을 담보로 자기를 지키면서 자기는 희생하지 않으려는
양심이 진정한 양심일 수 있을까?
종교적 이유에서 집총을 거부한다는 논리이다 불교는 호국불교 기치를
내걸고 평상시 작은 미물까지 살생을 금기했던 스님들까지도 국가 위기 시에는
승병을 조직해서 나라를 구하고자 싸우지 않았는가? 특정 종교를 믿는 그들은
일반신도까지 총을 잡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어느 나라 국민이란 말인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 그 자유를 얻고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자유가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닌데………….
옛 어른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와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고 하지 않았는가?
2004. 18집
첫댓글 누가 이 나라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죽은 저들의 영령 앞에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대체복무제를 도입한다면 국립묘지
관리하는 일들을 시키고 싶은 심정이다. 가볍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