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대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도 이 지점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7장 9-13절
예수님은 당시 시대에 유행이었던,
괴상한 신앙의 사조를 비판합니다.
그것은 고르반Corban입니다.
이는 “헌물, 제물”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과
행위 자체를 중시합니다.
이 계명과 행위가 어떤 뜻을 내포하는지,
왜 만들어졌는지를 깊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표면적 문자를 삶의
모양으로 박음질합니다.
그래서 고르반이란 말로 맹세한 경우,
그것이 부모 부양에 필요한 것일지라도
취소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맹세는 쉽게 악용되어 부모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하게 되는 좋은 핑계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미쉬나’3를 보면 후기 유대교에서
고르반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연로한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회피하였습니다.
교묘하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킨 것입니다.
어설픈 마음으로 고르반의 맹세를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철저한 신앙의 행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마저 낮추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혹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행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중요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계명의 첫 번째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도
동일합니다. 아니 그 의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가장 먼저 깊게 고려되어야 할
존재론적 의미는, ‘나와 나의 관계’입니다.
나와 나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거나,
함몰되어 있거나, 타락해 있거나,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그대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할 정도로, ‘나와 나’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은, 구슬픈 노래 가사에
심취하듯, 애절한 소설에 감정이 몰입되듯 하는
영역인 아닌 것입니다.
가장 생생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하고 아름답고 힘이 있는,
‘나와 나’의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아주 위대한 적용을 해봅니다.
결국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그러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와 나’의 관계에 진실되지 못하다면,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고
착각인 것입니다. 다 뻥입니다.
단지 혼을 담은 구라일 뿐입니다.
김일환, <관계>
☆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제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기억하여
제가 선택했든 선택하지 않았든
더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겠습니다. ♡
<옮긴글>
[출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는 것들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