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선비정신과 이상정치 -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선비’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천자 · 제후 · 대부 · 사 · 서인의 신분적 계층개념으로서, 여기서 ‘사(士)’는 대부와 묶어서 ‘사대부(士大夫)’라 일컬어지며, 관직을 담당한 유학자로서 지배계층을 이루고 있으며, ‘사’는 지위가 높아지면 ‘대부’로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대부’의 신분계급적 성격과 달리 도학이념의 인격적 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군자(士君子)’라 일컫는 것이다. 조선시대 도학의 ‘선비’ 개념은 ‘사대부’라는 신분계층 개념보다는 ‘사군자’라는 인격개념을 기본으로 확립하여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선비’ 개념이 전통적으로 중국 역사에서부터 조선시대에까지 유교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신성인(殺身成仁)’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뜻 있는 선비는 생명을 걸고 추구할 만한 도덕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며, 살아가기 위해 도덕을 저버린다면 선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맹자는 선비를 궁색할 때에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출세한 뒤에도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곧 선비는 의(義)와 도(道)를 가치기준으로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조광조는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학문을 본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포부를 펴서 백성이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고 밝힘으로써 학문을 통해 내면의 인격적 덕을 축적하여 이를 백성을 위해 발휘하는 사회적 실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퇴계의 경우를 보면 선비를 가리켜 예법과 의리의 근본이라 하고 국가의 원기(元氣)가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여기서 예법(예)과 의리(의)는 도학에 기초한 조선시대 가치관의 핵심 개념이요 우리 문화의 전통에서 보면 유교적 가치규범인 예법과 의리가 가장 중요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원기(元氣)’라는 것은 마치 개인의 생명력과 같이 국가의 생명력이며, 국가는 원기가 있을 때라야 강건하게 유지되고 번영할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선비’를 국가의 원기가 나오는 원천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선비의 인격이 사회체제를 지탱하는 원동력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글씨, 「답안순지서(答安順之書)」의 일부 (一部) 퇴계는 선비란 “재물로 유혹하더라도 인(仁)으로 대응하고, 직위로 억눌러도 의(義)로 대처한다.”고 언급하여 선비의 굽힐 수 없는 당당한 지조와 신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인과 의의 덕을 잃지 않는 것이 선비의 참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필부로서 천자와 벗하더라도 참람하지 않고, 제후가 선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굴욕될 것이 없다.”고 언급하였으니, 이것은 선비의 고귀하고 소중함을 극도로 높여 천자와 제후도 받들어야 할 대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선비를 과거시험을 통해 출세를 하는 재사(才士), 문장이 뛰어난 문사(文士), 경전에 밝은 경사(經士), 진정한 선비인 진사(眞士)로 구분한다. 여기서 참된 선비(진사)의 개념은 벼슬에 높이 오르면 그 혜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물러나 도를 닦으면 그 도를 천 년토록 밝히는 인격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율곡도 참된 선비(진유, 眞儒)란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道)를 행하여 백성들에게 화락한 즐거움이 있게 하고, 물러나면 만세에 교(敎)를 베풀어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고 하여 선비의 역할이 그 당시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대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박지원(朴趾源)은 선비의 개념을 지위가 아니라 인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임금이나 재상 등도 벼슬이 임금이고 재상일 뿐이지 그 몸 자체는 선비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박지원은 유교문화의 전통에서 선비가 발현하는 사회적 양상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집단(제일류)을 ‘사류(士流)’라 하고, 학문을 논의하고 도를 토론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하며, 천하의 바른 언론을 세우는 것을 ‘사론(士論)’이라 하고, 천하의 올바른 기상을 세우는 것을 ‘사기(士氣)’라 하며, 선비가 도를 논하고 의를 지키다가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을 ‘사화(士禍)’라 한다고 제시하였다. 조선 초기의 도학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조선왕조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도학이념을 통치원리로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던 인물로서 정도전 · 권근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에게는 통용되는 명칭이 없는데 우선 ‘훈공파(勳功派)’라 불러 두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정몽주 · 길재의 이른바 절의파(節義派)를 이어 의리의 정당성을 중시하고 도학이념의 일상적 실천을 강조하는 인물들로서 이색(李穡) ·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을 ‘사림파(士林派)’라 일컫는다. 훈공파를 이어간 인물들은 정치권력에 깊이 관여하면서 세속화되어 도학이념을 거의 상실하고 권력에 집착하여 ‘훈구파(勳舊派)’를 이루게 되었다. 그 반면에 사림파는 초야에서 학문적 연마와 실천에 힘쓰면서 의리의 신념을 엄격하게 내세워 도학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정도전 · 권근도 이 시대의 사림파들 사이에서는 도학의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 ‘사림파’가 추구하고 있는 중심 개념의 하나로 등장한 것은 도학이념의 실천주체를 이루는 인격체로서 ‘선비’(사, 士)였고, 이 선비들의 집단 내지 공동체를 ‘사림(士林)’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비’는 도학이 지향하고 있는 유교적 인격주체로서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과 독특한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사림파의 형성은 도학적 신념으로서 도통론과 연결되어 있다. 도학은 도통론에 의해 정통의 연속성을 확립하고 있는데, 사림파의 형성에는 사림이 도통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그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조선 초기 사림파에서 도통의 기준은 ‘절의(節義)’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요 ‘의리(義理)’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절의파’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은 의리정신에 따라 역사적 위기 속에서 권력과 힘에 의해 압박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바치며 대의(大義)를 지키거나 초야에 묻혀 의리정신에 따라 지조를 지켰던 경우를 말한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정몽주와 길재는 ‘절의파’의 인물들로서 조선 초기 사림파에 의해 도학의 도통을 일으킨 선구로 높여졌다. 그 이후로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과 생육신을 들 수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의 경우는 일단 도통에 넣지는 않고 있으나 절의파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또 하나 조선 초기 도학의 도통을 확인하는 사건으로서 ‘사화’를 들 수 있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에서는 김종직과 김일손이 희생되고, 갑자사화에서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과 정여창 등이 희생되었는데, 이 인물들이 바로 도통에 연결되는 인물들이다. 기묘사화에서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새로 등장한 선비들이 희생되고,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에서는 유관 · 이언적 등이 희생되었다. 사화 때마다 선비들이 희생되고 있는데, 이렇게 희생된 선비들은 도통의 계보 속에 속하는 사람들로 인정되고 있다. 이 시대 도통의 기준으로 확인되고 있는 인물로는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훈구파에는 주로 혁명기나 왕권 교체 과정에서 공을 세웠던 공신들과 권력을 장악한 인물들과 임금의 척족 등이 속했는데, 높은 관직을 이어 감으로써 대대로 권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림파들은 의리정신을 계승하면서 훈구파의 탐욕적인 권력추구에 대해 저항하여 충돌하면서 ‘사화’가 일어나 희생을 당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