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색
폭력은 밝은 곳에서 벌이지기도 한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 살았던 적도 있다
보이는 것도 흰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도 흰 것일 때
겹겹의 백지처럼
어두운 곳엔 없는 기도를 했다
받고 싶지 않은 편지 뭉치를 받아들고서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매일 그게 궁금했다
편지를 읽은 후엔
그다음엔
따뜻한 우유를 두 손에 감싸쥐고
울지 않아도 될까
잎이 다 타버린 나무처럼
앉아서
편지를 열고
첫 문장을 읽는다
가라앉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침대의 밑, 겨울의 끝에 대해 생각했다
깨지기 직전의 시간을 모자처럼 눌러쓰고
얼굴 끝까지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그릇들
더 깊은 얼굴이 되면
따뜻한 손을 갖게 될까
지우고 싶지 않은 것들 사이엔 반드시
지우고 싶은 색이 있다
가족의 색
가족의 문
가족의 반성과 가족의 울음 가족의 일상 가족의 방식 가족의 손과 가족의 얼굴 가족의 정지
그리고 가족의 가족
알약은 깊은 곳에서 녹는다
녹는 곳에 바닥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말이다
얼굴에 그린 그림을 가면처럼 쓰고 있던 아이들이
다 지워질 때까지
빛의 역할
너는 가장 마지막에 온다. 차오르지 않는 빈 몸으로 온다. 싫다고 말하면 돌아서는 사람들과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입을 삐죽이며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저기 저 숲에서는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개를 접고 앉아 있다. 누가 먼저 울음을 멈추는지 보려고 했다. 멈춘 창문. 멈춘 식탁. 손을 잡고 있는 손.
우리에겐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여름을 건너려는 사람들과 있었다. 무너지고 있는 집 안에 들어가 깨진 물건들을 함부로 만졌다. 아무것이나 붙잡고 매달리고 싶어 하는 두 팔 습기와 슬픔이 구별되지 않은 팔월. 매일 같은 자리 공간에 있었다. 튀어오르지 못하는 공은 구르다가도 멈춘다.
까마귀와 나
우리는 잘 잘린 얼음처럼 미끄러진다.
검정과 바꿀 수 있는 빛깔을 찾아보자고 약속했었지. 너는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이 물에 빠진 자기 발을 꺼내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옆을 지나쳤다. 그의 검은 신발. 너의 검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씨앗이 전부 썩어버린 빈 밭에 서 있는 것이 네가 아니듯, 겹겹의 그림자를 찢고 있는 것이 네가 아니듯.
너는 나를 믿는다고 했다.
귀가 밝아 슬퍼지는 마음처럼, 나는 찾은 적 없던 것을 찾게 될 것 같다. 머뭇거리면서, 계단을 뒤적이는 손끝.
연못엔 금붕어가 부케처럼 모여 있고, 정원엔 감춰진 것이 많다.
너의 검정은 절반의 통로. 바깥도 아닌 자물쇠 틈에 있다. 누군가 불길한 팔을 뻗을 때, 간결하고 간소한 마음이 되는 것.
우리는 부서지고 열리는 어린잎을 만져본다.
시인의 말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다른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나는 결코 좋은 사람이 못 되었다.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것이 뼈아팠다. 내가 싫어지는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계속 쓰는 사람이었던 것은, 내가 매 순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선택의 순간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준 문장과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결국엔 함께 하는 일. 나는 함께 살고 싶다.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조금의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모든 곳으로 오는 시를 생각한다. 모든 곳에, 백가지의 모습으로.
시집 『온』, 창비, 2017,4, 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