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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안의 우리 문화
프랑스는 우리나라가 외국과 대외관계를 수립하기 훨씬 전인
19세기 초엽부터 가톨릭을 통하여
서구 열강 중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나라이다.
그때부터 한국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 프랑스는 명실공히 유럽 한국학의 중심지라고
부를 수 있게까지 되었다.
(1) 1910년 이전의 한국관계 문헌
프랑스의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표현의 시초는
≪하멜표류기≫의 번역출판이라 하겠다.
이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지 2년 후인
167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파리에서 작은 단행본으로 나왔다.
네덜란드어(플래밍어)보다
세력이 강한 프랑스어본이 나옴으로써
영어로 번역이 되는 등 당시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데
큰 구실을 하였고,
19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에 대한 유일한 참고자료로 이용되었다.
즉, 그 이후에 나온 백과사전류와 여행관계 서적들은
모두 ≪하멜표류기≫의 내용을 베껴 썼던 것이다.
1736년에 나온 샤를르보아(Charlevoix) 신부의 ≪일본사≫
제2권에는 ≪하멜표류기≫의 제2부에 해당하는
‘조선 왕국 서술’ 부분을 전재(全載)하였다.
듀 알드(Du Halde) 신부는 조금 다르게
1735년에 4권으로 출판된
그의 ≪중국 및 대달단국지≫의 제4권에 35면에 걸쳐
중국자료에 의거하여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지리에 대하여 썼다.
한반도가 어느 정도 실제지형과 비슷한 윤곽을 가지고 프랑스의 지리학자들이 만든 지도에 등장하는 것은
모르티에(Mortier,P.)의 <청제국도 淸帝國圖>(1650년경),
장 블로(Jan Bleau,J.)의 <일본도 日本圖>(1655),
벨랭(Bellin,J.)의 <일본 및 캄차카도>(1735) 등이고,
프랑스 신부들이 과학적으로 측량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당빌(d’Anville)이 제작한 대형 <중국신지도첩 中國新地圖帖>
(1737) 중의 달단도에는 한반도가 비교적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 지도들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과 해군성 고문서관에 있다.
루이 16세가 세계탐험을 위하여 파견한
항해가 라 페루즈(La Pérouse) 대령이 1787년 5월
동해안을 지나다가 울릉도를 발견하고
다쥬레(Dagelet)도로 명명하였으며,
1849년에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이를 리앙쿠르도(바위섬)라 하였다.
이 명칭들은 20세기 중엽까지도 서양지도에 사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해군함정들이
서해안과 남해안에 출현하였는데,
이때 프랑스의 해군함정들이 작성한 해도(海圖)들이
해군성 고문서관에 있다.
이들 지도에는 동해가 오늘날의 ‘일본해’와는 달리
동해의 번역인 ‘Mer de l’Est’로 나타나 있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또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중국에 있던 프랑스 신부의 밀입국 때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1846년에 작성하여 보낸 조선전도가 보존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 바로 옆에 따로 우산도라 하여 조그만 섬이 있는데, 이는 독도를 나타내고자 하였으나 이름과 위치를 혼동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
프랑스가 한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83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파리외방전교회에 한국에의 가톨릭 전파 임무를 맡김으로써이다.
따라서, 중국을 통하여 1836년에 모방(Maubant,P.) 신부가 최초로 숨어들어와 우리나라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그 몇 달 뒤인 1837년에는 앵베르·샤스탕(Chastan,J.) 신부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때부터 조선의 내부사정이 가톨릭 잡지인
≪신앙전파≫를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조선의 왕정과 관리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적대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당시의 조선의 내부사정을 부분적이나마 알리고 있었다.
1837년에 천주교박해로 세 프랑스신부가 순교하고, 1845년에 마카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Ferréol,J.J.)·다블뤼(Daveluy,M.A.N.) 두 신부가 밀입국하여 당시에 순교하고, 리델·페롱(Féron,S.)·칼레(Calais,A.) 세 신부는 숨어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하였다. 리델 신부는 이 사실을 주북경 프랑스공사 드 벨로네에게 알렸다.
리델은 1878년에 다시 조선에 들어와 전교하다가 잡혀
감옥살이를 한 뒤 중국으로 추방되었는데,
프랑스에 돌아와 1879년에 ≪옥중기≫를 썼다.
이는 당시의 감옥생활을 소상히 알리는 귀중한 자료이다.
황사영의 백서는 작성 당해인 1801년의 박해 때 압수당하여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에 발견되어
조선교회 주교인 뮈텔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어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순교복자 79명의 사복식이 거행될 때에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에는
우리 나라에 가 있던 프랑스 신부들이 써 보낸 많은 서한과
순교한 프랑스신부 및 한국인 교인들의 유품들이 있다.
프랑스는 영국(1842)에 이어 1844년 중국과,
1858년에는 일본과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극동에 진출하고 있던 유일한 가톨릭국가였으므로
극동의 가톨릭보호국으로 자처하였고,
영국과 함께 중국에 극동함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박해소식을 전해 들은
드 벨로네 공사는 조선정부를 응징하기 위하여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전함 3척을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프랑스함대는 리델 신부의 안내를 받아 1866년 9월 18일
중국을 떠나 강화도에 도착, 11월 22일 철수할 때까지
약 2개월간 강화도에 머물렀다.
프랑스해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강화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책 342권을 가져갔다.
그 중 297권은 필사본이고 45권은 인쇄본이다.
의궤(儀軌)가 그 주를 이루는데,
이 책들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주어졌다.
오랫동안 베르사유의 도서관 별관에 방치되었다가,
1970년대에 그 가치가 인정, 보수되어
파리의 본관 동양서적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1993년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의 김영상 대통령에게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시사했고,
이후 여러 차례의 협의를 거치다가 2010년 11월 12일
이명박 대통령과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합의하면서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5월 26일 3차분의 의궤가 들어옴으로써
총 297책 전부가 국내에 들어왔다.
병인양요 때 약탈된 뒤 정확히 145년만의 일이다.
현재는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해군의 강화도 파병을 보여주는 펜화(筆畵) 8장이 주간 시사 ≪화보≫에 1867년 1월과 2월 3회에 걸쳐 실렸다.
아직 사진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19세기 말까지 화보의 그림들은 필화였다.
이 그림들은 강화도 파병에 참가한 주베르(Zuber,H.)의 크로키를 바탕으로 그린 것들이다.
주베르는 그 뒤 풍경화가로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지게 되는데,
현지에서 직접 보고 그린 그의 그림은
묘사가 생생하고 사진으로 보는 것만큼 현실적이다.
그림은 정장을 한 사회 각 계층의 남자를 그린 것(평민, 군복을 입은 弓手, 양반, 병졸), 프랑스해군함정의 강화도 도착장면,
강화도 전경, 강화아문의 프랑스해군 열병, 강화도 전투장면,
강화산성, 화포와 조총 등 9점의 무기와 갑옷을 보여준다.
이것은 조선풍물의 실상을 깊이 있고 생동감 있게 그린 그림으로 서구에 소개한 최초의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주베르는 그 뒤 자신이 그린 펜화를 곁들여
강화도 파병 당시의 자신의 체험기를,
세계 풍물을 화보로 소개하는 정기간행물
≪세계일주≫(1873)에 실었다.
인물, 강화도 풍경과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펜화 9점과
당시 조선지도를 바탕으로 그린 조선전도 1점도 들어 있다.
전투에 참가한 해군대위 주앙(Jouan)도
전투 상황과 한국에 관한 글을 두 편 발표하였다.
그 다음해인 1874년에는 ≪하멜표류기≫ 이래
한국을 가장 상세하고 정확히 서구에 소개하는 데 이바지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달레(Dallet,C.) 신부의 ≪조선교회사≫가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A5판 2권으로 된 이 책은 총 982쪽인데,
제1권의 192쪽에 달하는 서문에서 한국의 지리 및 토질에서부터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한글로 훈과 음을 단 천자문,
한글발음표,
한글 천주경,
한글 성모경의 복사전재 및 조선전도(24×40㎝)가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도 울릉도 바로 옆에 우산도(독도)가 나와 있는데,
위치와 명칭이 잘못 잡혀 있다. 본문에서는 가톨릭 전래 이래
병인양요까지의 조선천주교회사를 다루었으며,
당시의 조선사정도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 밖에 프랑스선교사들의 수난과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당한 박해에 관한 소책자 및 순교한 프랑스선교사들의 전기 몇 권이 나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로네(Launay,L.) 신부가 <조선과 프랑스선교사들>(1901)을 썼는데,
달레의 ≪조선교회사≫ 내용의 요약이고,
끝 부분에 1866년 이후의 조선실정을 소개하였다.
그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풍물을 그린 펜화 21장과
김대건을 포함한 프랑스순교자들의 초상화들이다.
1880년에는 한국어-외국어 사전의 효시인
≪한불사전≫이 빛을 보았다.
원고는 프랑스선교사들이 집필한 것이며,
당시 우리 나라에 프랑스어 활자가 없어서 그러하였는지는 모르나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서 인쇄되었다.
이듬해에는 역시 선교단에 의하여 ≪한국어문법≫이 요코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외무성의 영사이며 중국어 통역관인 앵보 위아르(Imbault Huart,C.)는 ≪프랑스인을 위한 한국어 구어(口語) 독본≫
(1889)을 저술하였다.
1894년에는 샤이에 롱 베(Chaillé Long Bey) 대령의
≪조선≫(1894)이 출판되었다.
그는 1890년대 초에 주한미국대사관의 서기관·총영사·공사대리를 지냈다. 그의 책에는 한국의 민속화가가 그린 소박한
민속판화 20점, 풍경 펜화 5점 및 제주도 지도 1점이 들어 있다.
그는 하멜 이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1894∼1895년에는 청일전쟁이, 1904∼1905년에는 러일전쟁이 각각 발발하였다. 이 두 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두고 열강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서양의 기자들이 종군하여 한국을 접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시사 ≪화보≫와 여행관계의 ≪세계일주≫는 여러 편의 기사와 함께 한국의 인물 및 풍경 펜화 또는 사진을 실었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책으로는 부르다레(Bourdaret,E.)의
≪한국에서≫(1904)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중판에 재판을 거듭하여 인쇄되었다.
A5판 357쪽에 25장의 사진이 들어 있고, 한국의 정치·사회 등
전반적인 분야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민간신앙과 무속·미신에 관하여 상세히 언급하였다.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 1903년과 1904년에 한국의 고인돌, 강화도의 선사유적, 한국인의 인종학적 고찰 등에 관하여 강연을 한 다음, 리옹의 인류학회지에 글로 발표하였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프랑스에 발을 디딘 사람은 홍종우이다.
그는 1890년 12월 파리에 도착하여 1893년 7월까지 체류하였는데, 파리의 동양관계 기메박물관(Musée Guimet)에서 일하면서
지냈다.
그는 인종학자 및 지리학자들뿐만 아니라 동양에 관심이 있는
프랑스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대단한 반일감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많은 프랑스의 지식인·예술가·학자 등과 교분을 맺을 수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소설가 로니(Rosny,J.H.)는 ≪춘향전≫(1892)을 번안하여 당튀(Dentu)출판사의 문학문고 중의 하나로 출판하였다. 왜소한 책(7.5×13.5㎝, 140쪽)으로 조그만 글씨에 섬세하고 예쁜 펜화를 곁들였고, 역자는 작품에 관하여 간단한 서문도 썼다. 물론, 인물과 풍경은 서양 것에 가깝다.
홍종우가 프랑스를 떠난 뒤인 1895년에는 홍종우 번안의 판소리계 고전소설 <고목생화 古木生花>(1895)가 기메박물관의 도움으로 에르네스트 르루출판사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기메박물관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떠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문학의 표본으로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책으로 낸다고 밝혔다. 이 두 번역작품은 우리 나라 문학이 처음으로 서구어로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1897년에는 홍종우와 슈발리에(Chevalier,H.)가 한국어로부터 번역한 <각 사람을 보호하는 별을 길조(吉兆)로 만들며 한 해의 운수를 알 수 있는 안내서>라는 제목의 글을 기메박물관의 연보에 게재하였다. 우리 나라 점성술을 프랑스에 소개한 것이다. 홍종우는 바라(Varat,C.)가 한국을 여행하면서 수집해 온 민속자료를 분류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또 1880년대 기메와 함께 일본을 여행하고 온 극작가 겸 화가인 레가메(Régamey,F.)와도 교분이 있었는데, 레가메는 홍종우가 김옥균(金玉均)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홍종우에 관한 글을 동양학 학술지 ≪퉁바오≫(1895.5.)에 썼다.
회화 분야에서는 프랑스 사람으로 여기지는 드 메지애르(De Méziéres)가 1890년대 말 또는 1904년 이전에 고종의 공식초상화를 그린 바 있다.
(2) 한국유물의 수집
프랑스인에 의한 본격적인 우리나라의 민예품과 도서의 수집은 바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888년 가을에 한국에 도착하여 다음해 초까지 머물렀다. 프랑스 문교성의 지원으로 한국을 탐험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프랑스 공사관의 도움을 얻어 자료수집과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 작업이 끝난 다음 우리나라 조정으로부터 내지통행증을 발급받아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한반도 남반부를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종단하였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는 여행담을 ≪세계일주≫(1892)에 <한국여행>이라는 66쪽의 글로 실었다. 그가 여행중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풍경과 인물 펜화 103점, 서민생활을 그린 민속판화 39점, 한양지도 1점, 조선전도 1점이 글의 중간중간에 들어 있다.
글의 서두에서 그는 그 글이 여행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자세한 내용을 책으로 집필하여 낼 것이라고 예고하였으나 다음해(1893)에 죽고 말았다.
그의 수집품은 파리의 트로카데로인류박물관에 전시된 뒤 민예품의 일부와 서적 50권이 기메박물관에 들어갔고, 상당 부분은 분산되었는데, 그 중의 일부가 보르도대학교 의과대학 및 파리의 인류박물관에 있다.
프랑스 사람으로서 가장 체계적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한국의 고서·골동·서화를 수집한 사람은 플랑시이다. 그는 서울주재 초대 프랑스공사로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간, 그 뒤 다시 1896년부터 1906년까지 10년간, 모두 13년간 한국에 근무하였다. 국립동양어학교 출신인 그는 이 학교 도서관에 고서 600권을 기증하였다.
특기할 것은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에 서울의 서점에 나와 있던 고전소설이 빠짐 없이 들어 있어 흥미 있는 컬렉션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뒤 1911년 3월 27∼30일 나흘 동안 플랑시의 한국·중국·일본 관계 소장품 883점이 드루오경매장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이 컬렉션의 주를 이루는 것은 700여 점에 달하는 한국 것이었다.
그 중 책으로는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直指心體要節≫(약칭 直指心經)을 비롯하여 ≪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경국대전≫·≪대전속록≫·≪속대전≫·≪소학집성≫ 등 77권이었고, 그림 중에는 풍릉부원군 조문명(趙文命)의 초상화, 공조판서 정향복(鄭享復)의 초상화, 그리고 향로·식기 등의 동제품과 금속제품, 목제품, 칠기, 자개, 대리석 및 보석제품, 부채, 병풍, 비단, 가구, 2,500개의 동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77권의 고서 가운데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이 58권을 구입하였다. 고서 중에서 가장 귀중한 ≪직지심경≫과 ≪삼강행실도≫는 당시의 유명한 동양 골동품수집가 베베르(Vever)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43년 그가 죽은 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직지심경≫의 내용은 송나라 때 나온 <전등록 傳燈錄>에서
역대 불조(佛祖)들의 법화(法話)를 요약한 것이다.
이 책은 소실되어 없어진 청주 교외의 흥덕사에서
1377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어낸 상하 두 권의 책 중
현존하는 유일한 하권이다.
이 책은 1234년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찍었다는
≪고금상정예문 古今詳定禮文≫이 현존하지 않으므로,
서양 최초로 구텐베르크(Gutenberg,J.)가 1450년에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를 한 데에 비하더라도 8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유일한 물적 증거가 되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 사용한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인 것이 틀림 없으나, 인쇄기술 자체는 아직도 목판인쇄나 다를 바 없는 것이므로,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서양학자들은 보고 있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에 세종이 설순(偰循) 등에게 명하여 목판인쇄한 책이다. 효행의 본이 될 만한 중국과 한국의 인물 35명의 이야기를 그림을 붙여 한문제목을 달고 한글로 설명한 것인데, 이 책의 그림은 프랑스의 미술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친 바 있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또 귀중한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이 있다.
학자들은 두루마리로 된 이 자료를 9세기경
당나라 사람의 필사본으로 보고 있다. 앞뒤가 잘려나가고 제명도 저자명도 없으며, 한 줄에 30자씩 230줄, 총 6,000여 자의 짤막한 글이다.
당나라 승려 혜림(慧林)이 지은 <일체경음의 一體經音議> 제100권 속에 들어 있는 <혜초왕오천축국전>에 보이는 낱말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간파, 곧 이것이 오랫동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혜초의 여행기의 축약본임이 틀림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원래 3권으로 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16세에 중국에 건너가 수학한 다음 뱃길로 인도에 도착하여 10년에 걸쳐 인도의 오국(五國)과 인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한 다음 육로로 중국의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와서 그 행적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혜초는 이 글을 727년에 지었는데, 이 책의 제2·3권에 해당하는
이 두루마리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elliot,P.)가
1908년 중국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熀) 명사산(鳴沙山) 천불동(千佛洞)의 석실(石室)에서 다른 중국자료와 같이 발견하여 파리로 가져와, 현재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중국과 인도와의 여로(旅路) 실크로드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사료적 가치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귀중한 문헌을 포함하여 프랑스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450여 권(고지도 35매를 빼고), 국립동양어학교에 630권, 기메박물관에 50권 등 전부 1,100여 권의 한국고서가 있다.
고서 이외에도 플랑시는 몇 점의 신라토기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도자기를 파리 근교의 세라믹박물관에, 책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민속유물은 인류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동양박물관인 기메박물관과 파리시립 체르누스키박물관에는
김홍도(金弘道)의 산수도·신라토기·고려자·그림·병풍·가구 한국유물들이 있으나 빈약한 편이다
(3) 광복 이전의 한국연구
1864년 파리의 동양어학교(대학)에서 일본어 강의가 시작되었다. 일본어 강사인 로니(Rosny,L.d.)는 그 해에 <한국어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동양학보≫에 썼는데, 이것이 프랑스 학자가 발표한 한국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다.
로니는 1868년 학교에 일본어과가 설치되면서 교수가 되어 1905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1868년에 <한국의 지리에 대하여>를 역시 ≪동양학잡지≫에 썼고, 그 뒤에도 우리나라에 관하여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학문적으로 깊이 한국을 연구한 사람은 쿠랑이다. 그는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뒤, 1888년에서 1890년까지는 주북경 프랑스공사관에, 1890∼1892년 사이에는 주서울 프랑스공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는 서울에 체류하는 2년 동안 규장각과 시내의 서점을 두루 찾아다니며, 한국의 도서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파리에 돌아와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중국·일본·한국 책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서울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전3권에 달하는 ≪조선서지≫를 1894년에서 1896년 사이에, 증보판인 제4권은 1901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1899년까지 한국에서 나온 서적을 총망라한 것이다. 인용된 책의 수는 3,821권이며, 고전소설도 포함되어 있다.
도서의 내용 가운데 중요하거나 흥미 있는 부분, 특히 그림이나 도형은 그대로 복사하여 전재(轉載)하였다. 이 책은 한국서지학의 금자탑이라 할 정도로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의 100여 쪽에 달하는 서문에서는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한국에 관하여 외국인이 쓴 글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프랑스국립학술연구원의 부셰(Bouchez,D.)는 평가한다.
쿠랑은 ≪조선서지≫ 이외에도 한국에 관한 글과 논문을 여러 편 남겼다. 특히, 한국의 음악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서구에 소개하였으며, 1898년에는 광개토왕비에 대한 30쪽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한국이 참가하여 한국관에 한국의 전통물품을 전시하였다.
이때 쿠랑은 한국관을 소개하는 <1900년 서울의 추억>이라는 글을 써서 팜플렛을 만들었다. 이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한국의 공식적 홍보자료인 만큼 고종·왕세자(뒤의 순종)·플랑시, 한국관 관장 민영찬, 만국박람회 한국위원회위원, 조선 정부의 만국박람회 대표 알레백(Alévêque,C.), 고종의 막내아들, 내각총리 조병식(趙秉式), 외무대신의 인물사진 외에도 덕수궁·서울시가·왕좌 및 풍경사진 30점이 실려 있다.
한국관에는 고서를 비롯하여 서화·병풍·가구·동제품·자개제품·칠기 등 많은 전통물품이 전시되었는데, 그 물건들은 팔려 흩어졌는지 그 흔적을 알 길이 없다.
쿠랑은 또 1904년에 관광안내서 ≪한국≫을 저술하였다. 이는 권위 있는 아새트출판사의 마드롤 관광가이드 컬렉션 중의 하나인 <중국 북부 및 한국>편에 들어 있으며, 한국 부분은 45쪽에 달한다.
이는 서구에서 나온 최초의 전문적 관광안내서인 것으로 보이며,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10여 종의 프랑스어 한국관광안내서가 나올 때까지 이 분야의 유일한 프랑스어 책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는 한국과 주변정세·외교관계 등에 관해서도 글을 썼다. 동양어대학교의 교수 자리를 기다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0년에 리옹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가르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그는 말년을 쓸쓸하게 지내다가 1935년에 죽었다. 리옹3대학교 본관 계단의 벽에는 쿠랑의 대리석 흉상이 있다.
일제강점하에서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상해임시정부 대표 김규식이 파리에 파견되어 김탕·여운홍(呂運弘)·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하여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반면, 1921년까지 ≪회람≫과 ≪자유대한≫이라는 정기간행물 발간을 통한 홍보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자유대한≫ 10책은 총 350쪽의 귀중한 자료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국권상실 이후부터 1921년까지의 한국사정, 외교사, 일본 및 한반도 주변정세뿐만 아니라, 한국에 관한 프랑스어서적 목록, 한국의 문화·언어 등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 있다.
당시 뜻있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재프랑스 한인친우회(1921)가 결성되었다. 친우회의 조직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소르본대학 교수 샬래(Challaye,F.)는 1919년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와 한국에서의 일본의 탄압상과 인권유린을 폭로, 규탄하였다. 그는 1915년 ≪일본≫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 끝의 17쪽은 한국에 관한 것이다.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강화조약 이후 황기환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는 중단되었고, 한인친우회의 활동도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는 주프랑스 외무행서 외무위원에 서영해를 임명하였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서영해는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역사소설(1929) 한 권과 한국민담집 한 권을 펴냈다.
역사소설은 자료로서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지만, 민담집 ≪거울, 불행의 씨 외 한국민담≫(1934)은 우리 고유의 대표적인 민담을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파리교외 센-생드니 도립 알베르 칸박물관의 영화컬렉션 가운데 2편의 한국관계 기록영화가 있다. 하나는 1926년 4월 26일 승하한 순종의 장례식을 찍은 것(Gaumont영화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황실 귀족으로 유럽을 여행한 이은(李垠)이 남프랑스의 칸(Khan,A.) 저택에서 칸을 만나는 장면(13초)을 찍은 것이다.
프랑스의 대문호로서 한국을 방문하고 글을 쓴 사람은 로티(Loti,P.)뿐이다. 그는 해군장교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슬란드의 어부≫를 썼고,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 ≪국화부인 菊花婦人≫은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250여 회나 재판되었다. 그는 프랑스한림원 회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해군장교 시절, 승선하고 있던 함정을 따라 1901년 6월 17일 중국으로부터 제물포에 도착, 26일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약 10일간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고종을 알현하는 포티에(Pottier) 제독을 수행하여 배석하였다.
이때 쓴 그의 기행 수필집 <매화부인(梅花婦人)의 제3의 젊음>(초판 1905) 가운데 ‘서울에서’라는 제목의 20쪽의 글은, 거리의 풍경과 왕궁묘사를 통하여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잔영을 잘 표현하였다.
피에르 라피트본(1923)에는 덕수궁의 옥좌를 구경하는 로티와 궁중무희를 그린 그림 2장이 들어 있고, 칼말-레비출판사본(1936)에는 담뱃대를 문 한 노인과 고종 및 황태자의 초상 천연색 삽화 2점이 곁들여 있다.
(4) 광복 후의 본격적인 한국학
프랑스의 교육·연구 기관에서의 한국학은 멀리는 로니(Rosny,L.d.)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그러나 본격적인 한국어·문화의 교육과 한국연구는 이 분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쿠랑에서 시작되어 제도적인 토대를 이룩한 아그노엘(Haguenauer,C.), 그 위에 골격을 세운 이옥(李玉)에서 현재의 교수진으로 연결된다.
프랑스에서 제도적인 바탕 위에 한국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56년부터이다. 1956년은 연세대학교의 전임강사로 있던 이옥이 아그노엘의 초빙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대학(파리대학교 문과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기 시작한 해이다. 소르본대학에는 그 전년에 일본학과가 설립되어 아그노엘 교수가 과장으로 있었다.
아그노엘은 동양어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다음, 1924년에 동경(東京)에 건립된 일불회관(日佛會館)의 최초의 장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1932년까지 일본의 고대사와 언어를 연구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공부하였다. 프랑스에 돌아와 동양어대학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가르치면서 한국 것도 가르쳤고, 1928∼1956년 사이에 한국어와 한국고대사에 관하여 14편의 논문을 썼다.
일본학과는 1959년에 일본·한국학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어는 그 해부터 동양어학사학위 필수 3과목 중의 하나였고, 소르본대학에서 가르치는 17번째 외국어가 되었다. 1956년의 교수진은 아그노엘 외에 일본어 전임강사 모리(森有正)와 한국어 전임강사 이옥 등 셋으로 구성되었고, 1964년에 일본어 전임강사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1959년에는 동양어대학(프랑스혁명의 와중인 1795년에 설립)에도 42번째로 한국어강의가 개설되었다. 당시에는 같은 교수진이 양 대학에서 가르쳤다. 학생들은 3년과정을 마쳐야 동양어대학을 졸업하였으며, 3학년 때부터 소르본대학에도 등록하여 파리대학교의 동양학·한국어 학위과정을 이수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대학은 국립이며, 대학의 학위는 국가학위이다. 1968년 대대적인 대학학제개편이 있었다. 이와 때를 맞춰 1968년 5월에는 문화기술협력협정을 맺어 한·프랑스 문화관계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마련하였다.
이때 파리대학교의 단과대학들은 각기 독립하여 점차 종합대학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동시에 많은 수의 대학이 신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소르본대학의 일본·한국학과는 일본학과와 한국학과로 분리, 독립되어, 중국학과 및 베트남학과와 함께 1970년에 파리7대학교에, 동양어대학은 파리3대학교에 소속되었다.
파리7대학교 동양학부 한국학과는 1970년대 초에는 이옥 과장을 중심으로 강사 2, 3명이었으나, 차츰 인원이 늘어나 1980년 말 교수진은 정교수 이옥(한국고대사), 부교수 프로스트(Prost,M., 언어학), 부교수 최승언(崔勝彦, 언어학) 외에 전임강사 2명, 강사 5명이었다. 그리고 교과과정은 1970년부터 교양과정(1·2학년), 학사과정(3학년), 석사과정(4학년), 박사과정까지이다.
전과정의 학생 수는 해마다 다소의 변동이 있으나 100여 명 내외이다. 1980년대 말까지 20여 명이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과는 상당히 규모가 크고 독립된 도서실을 보유하고 있는데, 장서의 수는 2만여권에 달한다.
파리3대학교에 소속되었던 동양어대학은 1985년에 독립하였다. 이 대학에 있던 한국어과정은 학제개편시(1969)에 한국·일본학부 내의 한국학과로 되었다. 이때 파브르(Fabre,A., 언어학) 교수가 학과장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파브르는 프랑스 사람으로는 최초로 1962년에 소르본대학에서 한국어학위를 받았다. 그는 1989년까지 한국·일본학부장도 겸하였다.
교수진은 1970년대 초부터 1988년까지 파브르 외에 전임강사 2명(李炳珠·沈勝子, 언어학)이며, 이듬해 전임강사 1명이 추가되었다. 교과과정은 교양과정에서 박사과정까지이고, 학생 총수는 역시 100여 명이며, 1988년까지 1명이 한국관계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지방대학으로는 최초로 1988년에 리옹3대학교의 교양과정에 한국어 전공(1·2학년)이 설치되었다. 이 대학에는 그 밖에 1983년부터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어,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학생들과 일반인으로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같이 이수하도록 되어 있다. 이 과정을 주 2시간, 3년 이수한 일반인에게는 4대학학위인 한국어·문화 이수증이 수여된다.
1988년까지 교수진은 책임자인 부교수 이진명(李鎭明, 역사학)과 프랑스인 강사 1명, 한국인 강사 2명이고, 학생 수는 20여명이었다. 그밖에 한국어강좌가 설치되어 있는 학교는 지방의 보르도3대학교(1986)와 르 아브르대학교(1988)이다.
순수학문연구기관인 국립학술연구원에서 한국을 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원은 고전문학 전문가로서 쿠랑을 연구하였고, 1988∼1990년 2년간 파리7대학교 동양학부장을 지낸 바 있는 부셰, 한국무속전문가인 기예모즈(Guillemoz,A.), 근대사 전공의 오랑주(Orange,M.)가 있고, 다른 연구원들도 부분적으로 한국을 연구한다.
이 세 한국전문가들은 파리7대학교와 국립사회과학대학에서도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국립사회과학원에서는 인류학 전공 버트란드 정(Bertrand Chung) 후임에 1999년 현재 알렉산드 길렘즈(Alexander G.)가 임용, 재직하고 있다.
1959년에는 파리대학교 내에 한국연구소가 설립되어 아그노엘이 소장이 되었다. 설립목적은 한국의 고대 및 현대 언어·문학·문화에 관한 연구, 프랑스에서의 한국에 관한 연구논문의 발간, 한국학자들의 연구업적의 프랑스소개 등이다.
처음에는 이름뿐이었지 인원이 없었음은 물론이요 변변한 연구실도 없었다. 그 뒤 1967년에 파리대학교 소속 동양관계연구소들이 윌슨가 22번지 ‘동양의 집’으로 이사하면서 한국연구소도 사무실과 도서실을 갖게 되었다.
1968년의 대학학제 개편에 따라, 이듬해부터 동양연구소들은 프랑스의 가장 권위있는 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Collége de France)에 예속하게 되었다. 1970년 아그노엘이 은퇴하고 이옥이 소장에 임명되어 1980년대 말까지 맡아왔다. 한국연구소는 다른 동양연구소들과 함께 1989년에 카르디날 드 르모안느가(街) 32번지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이사한 한국연구소는 전보다 넓은 면적에 사무실과 5,000권의 한국관계 책을 보유한 도서실도 갖추었다. 이옥 소장 외에 연구소의 일반 업무는 국립학술연구소 연구원 오랑주가 맡았다.
이 연구소는 논문집인 ≪카이에 Cahiers≫와 단행본 규모의 연구업적을 싣는 ≪메모아르 Mémoires≫ 두 시리즈에 전부 12권의 한국학 관계 서적을 출판하였고, 한국전문가의 프랑스 초청, 한국문학에 대한 학술대회도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한국관계 현대서적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5,000제명(題名), 동양어대학 도서관에 1,700제명(4,000권)이 있다. 이 두 도서관은 한국서적 담당 사서를 두고 있으며, 루브르박물관의 동양관인 기메박물관에는 한국유물전문가가 있으며, 2000년에는 한국실을 개관할 예정이다. 기메박물관은 재단지원으로 오는 2001년 10월 한국실 “Arts de Coree”를 개장할 예정이다. 프랑스의 한국학 학자들은 유럽한국학회(AKSE)에서도 중추적 구실을 하고 있다.
이 학회는 프랑스의 이옥, 네덜란드의 포스(Vos), 영국의 스킬렌드(Skillend)가 창립위원이 되어 1976년에 설립되었다. 이듬해에 제1회 유럽한국학대회가 개최된 이래 1991년 파리대회가 15회째가 되었다. 프랑스학자로 이옥·부셰가 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현회장 역시 프랑스의 파브르이다.
이 대회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가며 부활절 방학 때 열리는데, 서부유럽은 물론 소련을 포함한 동부유럽 학자들 및 다수의 한국학자와 3년 전부터는 북한의 학자들도 참가하여 자기의 연구결과를 발표, 토론하고, 학자 상호간의 교류와 친목을 도모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성황을 이루고 있다.
1969년에는 권위 있는 ≪크새주 Que sais je?≫ 문고에서 이옥의 ≪한국사≫가 나온 것을 비롯하여, 프랑스에서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앞의 한국연구소 간행 서적을 포함하여 한국에 관한 100여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는 한국의 언어·역사·정치·경제를 비롯하여 문학작품의 번역, 관광가이드에 이르기까지 전체 분야에 걸쳐 있으며, 저자들은 학자·전직 외교관·언론인·문인 등이다.
(5) 문화활동
1980년에 설치된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는 개원 당시부터
무료 한국어강좌(수강생은 일반인·학생 등 40여 명)를 개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강연회, 미술전시회, 영화상영, 음악회, 필름·슬라이드·도서의 열람과 대출, 지방순회전시 등 문화활동도 하고 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광복 후부터 김환기(金煥基)·김흥수(金興洙)·남관(南寬) 등 다수의 화가들이 수학하였다.
오늘날도 많은 신진화가들이 수학하며, 개인전도 열고 국제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 중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한 대표적인 화가로 이응로(李應魯)를 들 수 있겠고,
미국에서 활약하는 백남준(白南準)이 퐁피두문화센터에서
여러 번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음악인으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健宇),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鄭京和)·강동석(姜東錫) 등이
파리와 유럽무대에서 활약중이며,
미테랑 대통령의 야심적인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세계 최대·최신 규모의 바스티유오페라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1989년 5월 정명훈(鄭明勳)이 임명되었으며,
1991년 백건우가 황금디아파종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민주화와 국력신장을 배경으로
프랑스에서의 한국어교육·한국연구·한국문화전파 활동은 앞으로 더욱 활발하고, 깊고, 알차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파리의 한인을 위한 대변지로 한인들이 운영하는 한위클리(Han-Weekly)지가 2000년 4월 20일 현재 156호를 맞고 있다.
1993년에 창간된 교포신문으로
오니바(Oniva)지가 1999년 현재까지 계속 발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