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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
마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 25:14-30 / [달란트 비유;눅19:11-27] 하늘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돈을 맡긴 것에 비유할 수 있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그 돈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였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렇게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돈을 안전하게 묻어 두었다. 19) 얼마 뒤에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 돈을 셈하려고 그들을 불렀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열 달란트를 주인에게 가지고 왔다. 21) 주인은 그가 일을 썩 잘해 낸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이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더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어서 와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자.' 22) 다음에는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와서 보고하였다. `주인님이 주신 두 달란트를 제가 배로 남겼습니다. 23)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이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더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어서 와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자' 하고 말하였다. 24-25) 이번에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어들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모아 들이는 인색하고 매정한 분이신 줄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이익을 남기더라도 빼앗아 갈 것이므로 돈을 다만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26)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이 악하고 게으른 놈아! 네가 나를 그런 매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면 27) 너는 적어도 내 돈을 이자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 두어 내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28) 여봐라, 이자가 가진 돈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아서 풍족하게 될 것이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30) 이 쓸모없는 인간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앞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는 하나님의 약속된 종말의 천국을 깨어서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달란트의 비유는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4-18) 어떤 주인이 타국으로 갈 때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그들의 재능대로 맡기십니다. 자신의 소유를 맡기는 데는 주인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맡은 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윤을 남기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맡은 바 주어진 책임을 주인을 위하여 성실히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진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때 주인이 종들의 재능에 따라 책임의 양을 정해줍니다. 여기에서 책임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책임의 양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19-30) 주인이 자신의 소유를 맡긴 것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돌아와 결산을 합니다. 맡은 바 사명에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맡겨진바 책임을 잘 감당해 낸 종들에게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시고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라 하십니다. 반면에 맡은 바 사명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에게는 맡겨졌던 것도 빼앗기고 주인의 즐거움 저편에 있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책임을 감당하는 자와 감당하지 못한 자가 나눠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가올 종말에 천국을 준비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과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맡겨주신 책임과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칭찬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에 따라 나눠주신 사명과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잘 감당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어떤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은혜로 받은 선물인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에 대해 진심으로 성실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에 걸맞는 삶으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설 교 >
결산해 봅시다
마 25:14-21 / 문기태목사
오늘은 2001년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송년주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아무렇게나 아무 생각없이 보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 해를 잘 결산하고 넘어가야 새해를 더 아름답게 맞을 수 있습니다.
지난 16일에는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이 함께 거제도에서 밤 늦게까지 1년 사역을 평가하며 새 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지난 23일에는 목자들과 사역팀장들이 모여 한 해의 교회사역을 평가하며 잘 된 점, 개선할 점들에 대해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진지하게 교회의 예배, 교육, 봉사 그리고 전도와 선교등의 사역에 대해 사역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평가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참으로 유익했고 그런 평가가 앞으로 교회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교회적으로 평가를 하고 결산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평가를 하며 한 해를 결산해 본다면 많은 유익을 가져 올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로 들려 주신 말씀인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19절입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주인이 돌아 와 종들을 불러 놓고 회계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재산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셈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결산하는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슴입니다. 아마도 그날은 천국 문앞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는 "우리 결산해보자. 내가 너에게 맡긴 것을 너는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보고해 보아라."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보고에 이어 주님의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을 것이며 부정적인 평가도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 풍성한 결산보고를 할 수 있게 되기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는 중간 평가를 스스로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중간 중간에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사역을 감당했는지, 주님의 기대를 어느 정도나 부응하면서 살고 있는지 점검하고 잘 하고 있는 부분은 더욱 발전시키고 잘못하고 있는 부분은 속히 개선하고 보완해서 책망듣고 쫓겨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그런 중간 평가를 위한 지혜를 말슴을 통해서 공급받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한 해를 결산하고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이 한해동안 주님께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받은 기회가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경은 주인이 종들에게 무언가를 맡겨 주엇다고 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무엇을 맡겨 주었습니까? 14절에 보면 자기 소유를 맡겼다고 합니다. 15절에는 구체적으로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겼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유를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 한 해 동안 어떤 선물과 은혜를 받아 누리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왜 그런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부어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누리고 행복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장사하라고 주셨습니다. 무슨 장사를 합니까? 이문을 많이 남기는 장사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은 내가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여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내게 풍족한 재물을 주신 주님은 나만 누리기보다는 그것을 주께 풍성히 드려 복음의 사업이 효과적으로 진척되기를 원하시고 궁핍한 이들이 나로 말미암아 풍족케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내게 은사를 주신 주님은 그것을 감추고 살지 않고 그것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헌신의 삶을 살아 교회가 더 활기차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들을 많이 감당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활용하지 않고 사는 이유중 하나는 하나님이 잠시 맡겨준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증거합니다. 우리는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지위도 자신의 것인줄 알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장례식을 두번 집례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느꼈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죽으면 참으로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으면 한 줌의 재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 놓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집착을 하고 살았어도 소용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임시로 위임받았던 것을 죽을 때는 다 놓고 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유를 내가 임시로 맡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대로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멋지게 투자하며 장사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렇게나 맡기신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능력에 맞게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달란트는 재능 또는 은사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능이나 은사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능이나 은사가 큰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인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감당할만큼 능력에 맞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많이 맡겨준 사람에게서는 적게 맡겨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맞게 다 각각 은사와 재능을 한 가지 이상 주셨습니다.
어떤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학교성적은 항상 꼴찌였습니다. 그는 예술학교를 세 번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
했습니다. 이유는 `교육불능'.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통탄했습니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바보가 태어났을까” 이 소년이 바로 세계 최고의 조각가 로댕입니다.
다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멍청한 아이'로 불렸습니다. 산수는 항상 낙제점. 담임선생으로부터 `환상에 사로잡힌 저능아'라는 평가를 받고 퇴학당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세계적인 석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또 한 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왜 둘이 되느냐”며 따졌습니다. 어떤 날은 새끼를 낳겠다며 온종일 오리알을 품었습니다. 담임선생은 그를 `혼란스런 문제아'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열세 살 때 퇴학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맡겨 주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의 종류와 분량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를 향한 기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 서는 날 하나님과 결산할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날에 하나님은 주셨다고 하시는데 여러분은 받은 적이 없다고 우기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한 해를 잘 결산하고 풍성한 보고할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사를 하여 이문을 많이 남겨 돌려 드릴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종은 미련한 종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미련한 종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묻어 감추어 놓습니다. 왜 감추었을까요? 두려워하여...(25)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알았으므로 ... '내가 가서 장사하여 이를 남긴들 얼마나 되겠으며 그것이 주인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고가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가치도 없으며 주님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역팀에 지원하여 열심히 헌신한다고 교회부흥에 무슨 도움이 되고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택함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구원받겠는가? 내가 전하지 않아도 택한 사람은 다 구원받을 텐데 번거롭게 애쓸 필요가 무엇인가?' '나같은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입니다. 또 여러분중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공연히 사역을 자청하고 나섰다가 실패하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시도했다가 열매가 없으면 어떡하나?'
어떤 대 사업가가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맞으려고 했는데 가까운 친구가 한 청년을 소개하면서 훌륭한 양자감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업가는 우선 청년을 사원으로 채용하고 얼마 동안 관찰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는 청년을 불러 1만 달러를 내놓으며 "이걸 자네 마음대로 쓰게."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얼떨떨했지만 마음속으로 '아하! 이건 나를 테스트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동안 사업가는 청년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1년쯤 지난 뒤 사업가는 불쑥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자네에게 준 돈을 어떻게 썼나?" 청년은 이제야 때가 왔구나 하고 기뻐하며 곧 집으로 달려가 1만 달러뭉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장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자 사업가는 그 청년을 양자로 맞을 것을 포기하며 소개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돈은 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사업상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교제비로써도 좋을 것이고, 어떤 투자를 해서 사업 공부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돈을 손에 쥐고도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에게 나의 큰 사업을 맡길 수 없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달란트를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숨겨진 달란트를 찾아내어 개발하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도 기대를 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향해서도 기대를 접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귀찮다고 묻어둘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무 도움이 안된다고 감추어 두고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반면에 지혜로운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였습니다.(16) '천천히 기회 봐서 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가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주인이 나에게 이런 큰 돈을 맡길 때는 책임을 지고 잘 관리하여 재산을 증식시키라는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로 바로 가서 장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날부터 주님께 위탁받은 재물은 합당하게 투자하여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부지런히 충성되게 최선을 다해 장사를 시작했으므로 주인이 맡겨준 것보다 배나 재물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가서 장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말에 즉각 실천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게으른 종은 가서 장사는 하지 않고 두려워하며 땅을 파고 묻어 두고 놀며 시간을 낭비하고 기회를 낭비하였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슴이 무엇입니다. 왜 두려워만 하고 시도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만 하고 있습니다. 시도했다가 실패할 것을 염려하여 두려워합니다. 시도했다가 사람들이 곱게 보아주지 않고 오해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봐 그래서 사람들이 잘 대해주지 않고 공격을 하고 비난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이 두려움의 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심지 않은데서 거두려하고 뿌리지도 않고는 모으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멈칫거리지 마세요. 주저하지 마세요. 바로 시작하세요. 곧 바로 헌신을 하세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한해동안 살아오면서 주님이 맡겨 주신것으로 장사를 시도하신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한 해동안 얼마나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복음을 세일즈하였나요?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주님이 맡겨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재물을 가지고 건강을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를 하였나요? 그래서 우리를 신뢰하고 투자해주신 주님께 얼마나 이문을 돌려 드렸나요?
혹 여러분중에 주님이야 내가 애쓰지 않아도 손해 보시지 않을 분이니 나는 관심없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며 주님의 기대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한 해를 살아 온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 주님께 오늘 "주님, 금년은 꽝입니다. 다음 기회를 기대해 주세요. 금년에는 나와 내 가족을 챙기느라고 너무 바빴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반면에 여러분중에 "주님, 저는 힘이 별로 없지만 주님이 주신 것으로 힘껏 시도했습니다. 지혜를 짜내어 장사했습니다. 사람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재물을 멋지게 관리하여 몇 배로 늘리고 그중에 일부를 복음사업을 위해서 힘껏 헌금했습니다." "주님, 저는 잘 하는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나같은 사람도 필요한 일이 있을까? 하여 받은 은사를 가지고 부지런히 봉사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는데 작으나마 한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나만 만족하려고 살지 않았습니다. 묻어 두고 편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미루지 않고 즉각 순종했습니다." 하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년에는 내가 더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 하시는 음성이 들립니까? 여러분 모두 주님앞에서 정직하고 실제적인 결산을 하며 2001년을 의미있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결산 방식
마 25:14-30 / 문기태 목사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남편이 볼일을 본다고 나갔다가 들어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집 화장실은 편하기두 하지. 문만 열면 불이 켜지니 말야!" 그러자 아내가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당신 또 냉장고에다 쉬했지 !!!!"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 했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소위 탈란트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얘기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섯 달란트 남겼던 사람, 또 두 달란트를 가지고 두 달란트를 남겼던 사람에게 칭찬을 하였습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너희들에게 맡기마.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 계절, 우리는 일년 동안에 우리들의 섬김을, 우리들의 봉사를, 우리들의 사역을, 사명을 결산해 봐야 할 중요한 시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한해동안 우리의 삶의 자리,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우리의 수고와 봉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참되고 충성 되었다고 결산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각자에게는 주어진 할 일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맡은 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1. 타국으로 떠나는 주인(14-15)
예수님 당시 분봉왕들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를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을 자신으로 집에 남아있는 종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과 성도들로 비유하시며 자신의 부재중에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주님의 몸인 교회를 부탁하십니다. 복음 전도 사역을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맡기시고 부탁하십니다. 그 외에 여러 직분과 은사, 기회와 재물 등을 맡기시고 부탁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일거리를 맡기는 자요, 그의 종들은 주인의 소유를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인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개개인의 능력에 맞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달란트를 종에게 맡깁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달란트를 얼마나 받았느냐 하는 문제로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최선을 다해 더 많은 달란트를 남길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얼마를 맡았느냐를 묻지않고 얼마나 남겼느냐를 묻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이 맡았느냐 그것은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맡은 것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느냐 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자와는 다르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뭐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죠. 그러나 본문을 푸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본문에서 19절의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자 주인이 돌아오는데 성경은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한 달란트 맡았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주인이 떠나간 후에 오랫 동안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마도 주인은 영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마 기독교인들이라면 주님의 재림을 믿는 다고 쉽게 우리는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두뇌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정말 주님이 오실 것을, 다시 역사와 시간 속에 그 분이 돌아오신다, 이 사실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십니까? 그 분이 다시 돌아오실 것이고 따라서 내가 살아왔던 삶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반드시 결산하는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부지런히 준비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오셔서 결산하자고 하십니다. "네게 나의 시간을 맡겨 주었는데 어떻게 썼느냐?" "네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었는데 어떻게 섬겼느냐?" "네게 나의 사람을 맡겨 주었는데 그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 이렇게 예수님께서 물으시며 결산하자고 하실 때 보여 드릴 자료가 준비되었습니까? "여기에 이를 남긴 증거가 있습니다." 하고 뭔가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 그 날에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께 자랑스럽게 보여 드릴 것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 갑절의 이익을 남긴 종(16-23)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맡겨진 달란트에 대한 결산을 했습니다. 맡겨 준 것에 대한 셈을 하였습니다. 주인은 아주 큰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마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뭐 쫀쫀하게 "옛날에 내가 떠나면서 맡겨준 재물을 어떻게 했느냐? 모두 회계보고를 하여라!" 하는 것입니까? 주인은 종들의 충성도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의 기대를 만족시킬만한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었습니다.
층성된 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충성된 종은 그것으로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많이 잇으니까, 좀 놀다가 천천히 하지 하고 미루었다면 그는 충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그에게 큰 돈을 맡겨 줄 때는 가만히 가지고만 있으라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부지런히 장사를 하여 재산을 불려 놓으라는 뜻임을 알고 즉각 시행했던 것입니다. 사단은 속삭입니다. '그래, 기도생활에 힘써라. 성경도 많이 읽어라. 전도도 열심히 해야지, 교회 봉사도 잘 하고 성경공부도 해라. 헌금도 많이 드리고 새벽기도도 시작해라. 그러나 바쁠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바쁜 일이 많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해라.' 여러분 금년 연초에 계획을 세우고는 미루다가 못한 것은 없습니까? 은혜받고 감동이 와서 그 좋은 계획을 세우고 왜 못하였습니까? 바로 가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바로 가서 실행을 해야 합니다. 사명을 깨달았으면 곧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뭔가를 맡겨 주셨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면 바로 가서 시작해야 합니다.
2. 충성된 종은 주인을 위하여 갑절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사를 하여 이를 남기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인을 위하여 이를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 해를 살면서 주님께 어떤 이익을 남기셨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한 것 말고 주님의 유익을 위해 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맡겨 주신 직분을 이용하여, 재물을 이용하여, 기회를 이용하여, 재능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유익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먼저 자기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고 합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우리가 연초에 다섯 사람을 맡았는데 다섯 사람이 더 늘었으면 아주 잘 한 것입니다. 우리가 두 사람을 맡았는데 두 사람이 새로 늘었으면 참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그대로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고하고 봉사함으로 교회에 뭔가 이를 끼쳤으면 참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해를 끼쳤든지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면 칭찬 들을 수 없습니다.
3. 충성된 종은 작은 일에 층성했습니다. 주어진 일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큰 일이면 충성을 다 합니다. 그러나 작게 여기고 시시하게 여기고 소홀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맡은 사람이 사장이나 유명인 같이 큰 사람이면 정성을 다해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작은 사람이면 대충 대하는 이가 많습니다.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과학자,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cancel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죠. 그래서 그 겨울동안, 시카고의 겨울은 유난히 춥습니다. 눈보라, 차가운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일주일에 이틀동안 한번도 빠짐이 없이 그는 계속적으로 이 겨울동안 강의를, 두 학생을 상대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갑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그리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동양계 두 사람을 앞에 놓고 열정을 다한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가 노벨상으로 열매가 맺혀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주신 단 한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쏟아 붓는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충성된 종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❶ 주인되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옆 사람에게 한 번 이렇게 말해 보세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여러분이 모두 주님께 그런 칭찬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에서 가서는 물론 이 한해를 마치고 결산하며 주님께 최고의 칭찬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충성된 사람을 주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크게 칭찬하십니다. 주님께 칭찬듣는 것보다 더 신나고 행복한 일이 또 있습니까?
❷ 더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가 충성하여 남긴 이를 빼앗지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는 가서 편히 쉬어라 특별 휴가를 주마.' 하시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절대 신뢰한다는 말슴입니다. 다섯 달란트가 작은 것처럼 느껴질 크고 많은 것을 안심하고 맡겨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안에서 직분이 크거나 많으면 일이 더 많습니다. 책임도 크고, 더 바쁘고 힘듭니다. 그러나 이는 큰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뢰의 증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신임을 받고 어려운 일, 중요한 일을 많이 맡게 되기를 바랍니다.
❸ 주님의 즐거움에 초대된다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들이 주인의 칭찬 뿐 아니라 즐거운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인은 황제에게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몹시 기뻣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런 즐겁고 영광스런 자리에 시중드는 종으로가 아닌 당당한 내빈으로 참석하게 되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주인은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들이 앞으로 정치를 펼칠 때 나를 도울 왼 팔과 오른 팔 같은 사람이오."하고 소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가 되면 하나님의 칭찬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받으며 주님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3. 게으르고 무익한 종(24-30)
갑절의 열매를 남긴 종들처럼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열매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땅을 파고 묻어 감추어 놓았습니다. 이 어리석은 행동은 주인의 참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한 것으로 결국에는 있는 것까지 다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는 후회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백금률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황금률이라는 것은 들어봤지만 백금률은 못들어 보았지요? 황금률은 무엇입니까? 대접을 받고저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것입니다. 내가 칭찬 받기를 원하면 남을 칭찬하라, 또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지 않기를 바라거든 너도 남을 비난하지 말아, 이것이 황금률입니다.
그러나 이 백금률이란 조금 다릅니다. 상대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요? 기본적으로 사람의 욕구와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다 다르고 취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도 이상도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우리는 내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를 대하라는 것이 백금률입니다. 자기 수준에서, 자기 성향에서 남을 대하지 말고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 수준과 그 입장, 그 욕구를 따라서 그 방법대로 내가 그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기대하는 것과 상관없이 내 방식으로 주인을 이해하고 일처리를 해 놓고는 잘 했다고 떠들면 안됩니다. 주인이 그 큰 금을 맡길 때는 이거 도둑맞지 않게 잘 지켜라 한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 장사해서 이를 많이 남겨라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달란트 가진 이는 공연히 관리하기도 복잡하게 이런 걸 왜 맡겨 하고 땅을 파고 묻어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제 생각대로 믿고는 잘 믿었다고 떠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사는 삶만이 칭찬들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과 제 기준으로 멋대로 판단하고 엉뚱하게 살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 한 달란트를 도로 가지고 왔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데 왜 주인은 그를 악하다고 했을까요? 주인의 의도대로 하지 않고 제 맘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한 달란트를 가져왔던 사람이 왜 땅에 묻어 놓았을까요?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주면서 내게는 왜 한 달란트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안들었던 것입니다. 시기, 질투 때문에 자기 판단까지 흐려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성공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는가? 다른 사람이 공장을 세우는데 내가 못 세울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출세하는데 나라고 출세 못하란 법 있는가? 그래서 무리수를 씁니다. 알고보면 모든 망조가 시기 질투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지방 시골 도시에 목사님 한 분이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부임하고 보니까 그 교회 안에 아주 깡패같은 형제가 있어요.. 교회는 나와요. 동네에선 아주 불량하고 사람들 못 살게 굴고 빼앗고 행패도 부리고 그러면서도 교회에 나오는 그런 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이 죽었어요. 동생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 장례식을 잘 치뤄 주셔야죠. 목사님 앞으로 여기 새 교회도 지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수표를 하나 주면서 "여기에 목사님 필요한 만큼 제가 다 도와 드릴께요. 그 대신 저의 형님 장례식을 잘 지내주시기 바랍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장례식 주례사를 할 때 저의 형님에 대한 얘기를 잘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꼭 이 말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형이 좀 성자 같은 사람이었다고." 목사님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해 보죠." 자, 드디어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동네 유명한 깡패가 죽었으니까 동네 사람 다 왔어요. 그래서 목사님의 그 장례 주례사가 시작됩니다. 한참 크라이맥스에서 형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이 고인은 우리 동네에서 유명했던 분입니다. 불행히도 그 분은 동네 많은 사람 가슴 속에 상처를 주었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커다란 고통과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던 사람입니다. 참 많이 인생을 잘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고인은 살아있는 형제에게 비교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성자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집니다.
오늘 이 사람이 한 달란트를 받았으면 한 달란트는 소중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약 3억원이상의 금액입니다. 얼마를 받았든지 얼마를 가졌든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적당히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게 주신 바 물질과 건강과 지혜와 형편과 현실이 하나님이 내게 적당하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하나님은 내게 평등하게 역사하셨다, 그렇게 느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참 마음에 안들어. 왜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나에게는 한 달란트인가 그래서 불만이 솟아납니까?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소중한 한 달란트의 가치를 땅에 묻어두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는 주인의 평가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왜 나를 작게 평가했느냐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주신 재주를 내게는 안주셨는가? 다른 사람에게 주신 건강을 내게는 왜 안주시는가?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맙시다. 얼마를 받았든지 그 받은 바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일을 안하게 된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곳에거 거두고 헤치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줄 알았으므로 내가 땅에 묻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책임을 주인에게 돌립니다. '내가 일 안한 것은 주인 때문이요, 내가 하고싶지 않은 것도 주인때문이요, 주인이 인색한 사람이라 영 마음에 안들어.' 그래서 도로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을 폭군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주인을 아주 나쁜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탕자를 보십시오. 탕자는 밖에 나가서 허랑방탕하면서 다 날려버리고 얼마든지 돌아오고 싶었겠지만 못돌아 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엄하게 나를 책망하실까? 그래서 돈을 좀 벌어가지고야 가지 그냥 갈 수 없다. 아마도 오랫동안 고생한 것 같습니다. 정 죽을 지경이 되니 손을 들고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이렇게 좋은 아버지일 수가 없습니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아들을 위해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 마음속에 생각이 많아 복잡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자비로우신 아버지입니다. 이 좋은 아버지의 품을 왜 내가 떠났던고?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확 바꾸어버리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였습니다.
여러분 혹 남편을 무서워합니까? 그러면 남편을 나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내를 무서워하십니까? 그러면 아내를 아주 나쁜 사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라도 설사 내가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하며 용서해 주리라고 믿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어떻습니까? 부모님 앞에서 벌벌 떨다보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없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이요 자비로우신 분이라서 얼마든지 내 실수가 있더라도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들어야지 '우리 부모님께 맞아 죽는다.' 세상에 자식 때려죽이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런고로 너는 악한 종이라고 그랬습니다. 어째서 나를 이렇게 나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네게 그렇게 나쁘게 했더냐? 내가 언제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더냐? "너는 악하다" 그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실패가 두렵고 징벌이 두렵고 책망이 두려워서 벌벌떨다가 아무 것도 못하고 마침내 가지고 있던 것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종이 나아가서 한 달란트 가지고 나갔다가 그만 홀랑 날리고 빈 손으로 와서 꿇어 엎드리고 "주인이여, 용서하소서. 제가 이렇게 실수했습니다" 했다면 주인은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믿는 주인은 다시 두 달란트를 주면서 다시 하라고 다시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한해가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인생이 그렇게 빠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인생을 결산할 때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을까요?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너는 작은 일에 충성구나 큰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하려무나!" 여러분 모두 지금부터라도 충성을 다하여 이 한 해가 다갈 때 하나님께 칭찬듣고 더 많은 것을 위탁받으며 큰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남긴 것을 계산하십니다.
마 25:14-30 / 성홍모목사(영주교회)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비전의 원동력”이라는 영상을 보신 후에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프로페자이-설교모임 동영상 비전의 원동력(강영우박사)를 보시겠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이신 김난도박사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몇 달 동안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어떤 독자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눠줄 썩 괜찮은 선생님을 둔 서울대생들이 처음으로 부러웠다”고 하였습니다. 김교수는 “좋은 선생이란 학생들을 꿈꾸게 만들고,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 믿는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 이 문제의식이 결국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김교수는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합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명언입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처럼 절절한 표현도 부족하다고 생각될 만큼 젊음이란 정말 소중하고 또 소중합니다.
청년시절, 참으로 좋은 때입니다. 왜 좋으냐고 묻는다면 무한한 가능성 때문입니다. 청년의 시절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그리스의 명언입니다. “기하학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가야 합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잘 되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이 알차게 지나가야 내공이 쌓이는 법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분야에서 정상에 서려고 하면 1만 시간의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저는 보석을 가공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돌에 영롱한 보랏빛의 루비가 박혀 있는 돌인데, 원석이라고 합니다. 저의 눈에는 그 돌이 보석의 원석인지, 단순한 돌인지 모르겠습니다. 원석이라고 하는데, 차돌 같습니다. 그러나 보석 전문가는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원석에서 보석이 될 부분을 잘라내고, 도려내더니, 보석을 갈고 닦는데, 처음에는 별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보석이 되겠습니까? 차돌로 남겠습니까?
김난도 박사는 이 책 1부에서 “그대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1장의 제목이 “인생시계”라는 글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탁상에는 탁상시계가 놓여 있는데, 교수님의 시계는 일부러 건전지를 빼놓아서 멈춰 선 시계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항상 한 자리에 서 있는 시계는 아니고, 매년 생일이 되면 18분씩 앞으로 시계 바늘을 옮겨놓는다고 합니다. 책을 계속 읽어보면 그가 왜 이런 시계를 놓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가 인생을 80세라고 계산하고 24시간을 분으로 환산하면 1,440분, 이것을 인생 나이 80으로 나누면 1년은 18분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20세는 오전6시, 40이 되면 12 정오가 됩니다. 50세는 오후 3시, 60세를 살았으면 오후 6시에 이릅니다. 70을 살았으면 오후 9시, 80을 산다고 하면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김난도 교수는 498세로, 인생시계는 오후 2:24을 가리키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50세로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의 목사님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포기하는 순간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하는 선수가 “그만, 이제는 못가. 한 발자국도 더 못가” 하는 것은, 육체적 포기의 순간입니다.
마감 시간에 회사사장이 들어와 또 업무를 맡깁니다. 열이 받쳐 오릅니다. “됐어. 이젠 더 이상 못 참아. 당장 사표 써서 책상에 던져버릴 거야!” 이것은 직장 포기의 순간입니다.
인격을 지키려 분투노력하는데 세상은 까딱하지 않고 사람들은 놀려댑니다. “나만 애쓸 까닭이 어디 있어? 남들처럼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지 뭐” 이것은 도덕적인 포기의 순간입니다.
신앙인도 포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옳은 데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알지만, 실패를 겪고 모멸을 받으면 “하나님, 더는 못갑니다. 제 분수에 넘는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은 영적 포기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순간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을 겪으실 때에, 사탄의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포기해, 그만 둬. 인간들, 하찮은 죄인이잖아, 심판받게 버려두라, 이런 고통당할 필요가 없잖아!” 못이 주님의 손을 뚫고 지나가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에, 그래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내와 비전은 주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만나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 주님 생각하며 인내와 비전을 품으십시오.
우리는 찬송가 323장의 제목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감동적으로 많이 불렀고, 결단하면서 외친 찬송은 바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라는 찬송가였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두 손을 불끈 쥐고 소리 높여 부르던 찬송이었습니다. 이 찬송을 지은 이호운목사님은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바치기를 원합니다. 평안과 영광과 칭찬을 원하지 않사오며, 주님이 지고가신 십자가를 원합니다. 옛 성도들이 졌던 십자가를 저도 지고 가려고 합니다. 오로지 저도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주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고백하였던 신실한 목회자였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사명자들이 다시 불러야 하는 찬송이요, 오로지 주님 앞에 헌신만을 다짐하는 고백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사명자들입니다. 목사와 신학생만이 사명자라고 하는 말은 정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사명자들입니다.
■ 김동길 교수의 에세이, “내가 부르다가 죽을 노래여”라는 책을 보면 “죽음 직전에”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여대생이 겪은 죽음”라고 시작합니다. 그 글의 요지와 사건을 요약해보면, 서울의 어느 유명한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며 자기 성취욕에 만족하며 사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대학 3학년 때에 배에 만져지는 종양을 검사하게 되었다. 의사들은 환자가 알아들 수 없는 말로 소견을 나누는데, 독일어로 암일 것이라고 주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자기들이 나누는 말을 환자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알아듣고, 여학생은 부모님에게 유서와 비슷한 글을 남기고 수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대생은 수술을 받기 전에 병원을 나와 명동거리를 활보하는데, 입원하기 전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은 아름다웠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년만 더 살게 하시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웃을 섬기며 받들고 사랑한다는 말만을 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암이 아닌 일반 종양이었고, 건강을 되찾으면서 후에 새로운 각오로 인생을 보람 있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경험해보아야 인생을 신실하게 살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스럽게 살게 됩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남긴 것을 계산하십니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의 말씀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기고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 종들이 있었으니, 그동안 그들의 열심과 능력을 고려하면서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나갔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잘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로 들려주셨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19절입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라는 말씀입니다. “오랜 후”라고 하니, 몇 년은 족히 지나갔을 것입니다. 종들을 불러놓고 회계합니다. 결산하고 헤아려봅니다. 재산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그대로 있는지 셈을 해보야 하고, 감사를 합니다.
우리에게는 결산하는 날, 주인 앞에서 셈해야 하는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결코 비유가 아니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요, 불원간에 우리 앞에 펼쳐질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결산하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살아온 일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 그리고 건강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보고하고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 날, 마지막 날에 풍성한 결산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중간 평가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평가해보고, 다시 도전해야 하고, 이윤을 남겨야 하고, 주어진 남은 시간과 물질 건강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잘 부응하면서 살았는지, 아니면 나 중심으로, 내 욕심만 이루기 위하여 나를 낭비하면서 살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이 아시고, 내가 나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책망 받는다는 심정으로 나를 바로 세우고, 나 중심에서 중심이 이동이 되어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위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보완하고 개선하는 것은 기업에서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나를 점검하고, 나를 보완하고 개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간평가라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그동안 잘 살았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당신의 소유를 맡기셨습니다. 14절 말씀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인의 소유를 맡은 사람이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의 소유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맡은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요, 주인이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가야 하고, 주인이 내 것이라고 하시면 예, 모든 것은 주인의 것입니다. 주인이 쓰겠다고 하면 언제라도 내어놓아야 하고, 주인이 그만 하라고 하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각각 종들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재능이 주어졌습니다. 재능이 있습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누구에게나 재능을 주셨습니다.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유를 내가 임시로 맡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대로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멋지게 투자하며 장사를 잘 할 수 있습니다.
■ 한 소년의 학교성적은 항상 꼴찌였습니다. 그는 예술학교를 세 번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했습니다. 이유는 ‘교육 불능’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통탄했습니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바보가 태어났을까” 이 소년이 바로 세계 최고의 조각가 로댕입니다.
다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멍청한 아이’로 불렸습니다. 산수는 항상 낙제점. 담임선생으로부터 ‘환상에 사로잡힌 저능아’라는 평가를 받고 퇴학당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세계적인 석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또 한 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왜 둘이 되느냐”며 따졌습니다. 어떤 날은 새끼를 낳겠다며 온종일 오리 알을 품었습니다. 담임선생은 그를 ‘혼란스런 문제아’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열세 살 때 퇴학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맡겨 주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의 종류와 분량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를 향한 기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종은 미련한 종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미련한 종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묻어 감추어 놓습니다. 왜 감추었을까요? “두려워하여..”(25)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알았으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서 장사하여 이를 남긴들 얼마나 되겠으며, 그것이 주인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라는 생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고가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가치도 없으며 주님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칭찬받은 종들,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았고, 또 남긴 종들을 보면 모험심이 강하였습니다. 얼마를 남겼느냐 하는 것보다 충성심이 있었고, 충성심에 대한 열매가 이윤으로 모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된 종은 어떤 종입니까? 그러한 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충성된 종은 그것으로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많이 있으니까, 좀 놀다가 천천히 하자고 미루었다면 그는 충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충성된 종은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주어진 일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성된 종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주인 되신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신나고 행복한 일이 또 있습니까?
둘째는 더 얻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가 충성하여 남긴 이를 빼앗지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라고 하십니다.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시는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절대 신뢰한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다섯 달란트가 작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고 많은 것을 안심하고 맡겨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주님의 즐거움에 초대하십니다. 충성된 종들이 주인의 칭찬 뿐 아니라 즐거운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셨는데, 그런 즐겁고 영광스런 자리에 당당한 내빈으로 참석하게 되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처럼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가 되면 하나님의 칭찬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받으며 주님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이윤과 열매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땅을 파고 묻어 감추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주신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종을 책망하는 단어를 잘 살펴보십시오.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30절 ‘이 무익한 종’ 이라고 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데 왜 주인은 그를 악하다고 했을까요? 주인의 의도대로 하지 않고 제 맘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인을 폭군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박사 곁에서 자고 일어난 제자가 잠자리를 정돈하고 세배를 올렸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금년엔 날 좀 닮아라.” 스승의 큰 사랑에 어리광을 부리던 제자가 재롱삼아 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라고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껄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이 토를 달았다고 합니다.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 혹여 세상 사람들은 늘 불쌍한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해주던 장기려 박사를 “저 사람 바보가 아냐?”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보로 살기”로 작정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 바보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청년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하시는 칭찬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마지막 연말결산
마 25:14-30 / 박용래 목사
오늘 지구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해 첫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위해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기차를 타고 강원도 정동진으로 몰려가기도 하고 자동차를 타고 남해 바다 해돋이 언덕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내일 아침 산봉우리마다 새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구경하기 위한 발걸음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일 년 365일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과 새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달라진 것도 없는데 날마다 똑같은 태양이지만 사람들은 새해 첫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해를 위한 소원을 기도하기도 하고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가지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끝에 와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캘린더 한 장을 뜯어내고 새해로 나아가려는 한 해의 종착역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 한 해를 보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한 해의 결산을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12월이 돌아오면 성도들은 교회에서 연말정산서를 받아갑니다. 연말정산서를 보면 일 년 동안 얼마나 하나님 앞에 헌금생활을 했는가? 통계를 자신들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년말정산은 한 해를 마지막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결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생의 총 결산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기전에 생각지 아니한 날에 우리 신생을 총결산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인생의 총결산하는 날이 돌아오면 그때는 회개하고 변화되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인생은 재수할 수 없습니다. 한번 흘러간 인생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인생이 한번 왔다가 한번 가야될 그날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것 가지고 결산하는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인생의 총결산을 하기 전에 한해한해 마지막 결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잘못은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고 새해라는 선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해를 마감하기전 조용히 하나님 앞에 마지막 년말정산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용서함 받고 능력을 받고, 새해를 출발할 때 복 있는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본문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비유 속에는 타국으로 떠나는 주인이 종들을 불러 그들의 능력대로 달란트를 맡겨주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달란트를 맡겼던 종들과 결산을 할 때 두 종류의 종들로 분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칭찬받는 종과 책망 받는 종입니다. 축복받는 종과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불쌍한 종입니다.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은 잘했다 칭찬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책망 받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날에도 기회는 없습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부르짖어도 주님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한해를 결산하는 것을 기회로 주시니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한 해를 마감하는 년말정산을 가지고저 합니다. 인생의 총결산의 날이 오기 전에 한해한해 결산하고 우리 인생에 새해라는 기회를 주신 것은 축복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주시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1. 주인이 자기의 소유를 맡김과 같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맡긴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여기서 맡긴다는 말은 주인의 소유를 종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권이 종에게 이전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원 소유자인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종에게 맡겨서 관리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종이란 단어의 뜻은 고용인 주인의 노예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권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다라 관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종을 청지기라는 단어로도 사용합니다. 청지기 사역자 모든 직분 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긴 자들입니다. 내가 주인노릇하며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라 주인 되신 주님의 뜻을 알고 잘 관리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맡은 자로 청지기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일을 했는가. 주인 되신 주님 앞에 결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시간을 맡겨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일 년 365일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 앞에 결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365일이란 시간을 너무 낭비하고 허비하며 살지는 아니했는지? 너무 지난 일 년이란 시간을 태만하고 게으르고 악하게 사용하지는 아니했는지? 일마다 지난 일 년이란 시간 속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선한 일을 위해 시간을 사용했는지? 동물처럼 먹고 자는 것에 대한 탐욕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지는 아니했는지? 지난 일 년 365일을 하나님께 결산해봐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재능도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며 살아왔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위해 얼마나 사용했는지? 칼 한 자루가 의사의 손에 붙잡히면 수술하는 집도로 사용되어 죽을 사람도 살리는데 사용되지만 칼 한 자루가 살인강도의 손에 들려지면 수많은 생명을 해치고 괴롭히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능으로 얼마나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았는가? 혹시 한 달란트 받았던 게으르고 악한 종처럼 땅속에 묻어두어 쓸모없이 살아오지는 아니했는지? 우리 한번 결산해 보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은 물질도 맡겨주셨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과 재산도 영원히 내 것인 양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재산도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모든 소유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가지고 육체의 쾌락과 소유의 만족만 채우면서 사용해온 어리석은 종은 아닌지?
어리석은 부자처럼 날마다 세상의 창고만 늘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빈손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불쌍한 부자로 살아오지는 아니했는지? 하나님이 주신 소유를 가지고서도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며 쓰임 받으면서 살아왔는지?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러분의 흔적을 찾으라면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줄 알면 하나님은 점점 더 좋은 것 값진 것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지난 일 년간 하나님이 맡겨주신 물질가지고 얼마나 주님 뜻대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사용되었습니까? 행여나 썩어질 것에만 욕심 부리면서 살아온 부끄러운 자는 아닌가?
4) 건강도 자녀도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입니다.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이면 칭찬받는 청지기로 살아온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녀들은 사랑으로 신앙으로 잘 양육하여 하나님과 역사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으로 키워야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 가지고 얼마나 칭찬받는 삶을 살아왔습니까?
5) 하나님은 모든 직분도 맡겨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맡은 모든 직분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입니다. 지난 일 년간 직분자로 얼마나 칭찬받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과 주신 직분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아주 쓸모없는 자로 쫓겨날 게으른 직분 자들로 살아오지는 아니했는지? 우리 모두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하나님 앞에 결산해 보셔야 합니다.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능력대로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2. 두 종류의 종들로 구별되고 있습니다.
1) 칭찬받는 종
두 달란트 5달란트 받은 종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인이 맡겨주신 것 가지고 열심히 충성되게 이익을 남겼습니다. 주인에게 결산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았습니다. 주인이 줘도 더 주고 싶은 종들이었습니다. 이에 주인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삶이 되었으며 더 많은 것으로 맡겨주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충성된 종들로 결산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 여러분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얼마나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오늘 결산의 날에 주님께로부터 칭찬받고 상급 받는 종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에는 새 출발로 더욱더 하나님께 칭찬과 상급 받는 귀한 청지기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 책망 받는 종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아무런 열매가 없었습니다. 땅속에 묻어두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종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았습니다. 있는 것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어두운 데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사랑이 많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심판하시는 날 계산하는 날 결산하시는 때에는 명철하신 하나님이시나 기회를 놓쳐버린 악한 종이 기회를 놓쳐버린 미련한 5처녀도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르고 악한 종도 아무리 통곡하고 애원하고 부르짖어도 응답하거나 돌아봄이 없습니다. 작은 것 받았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능력대로 하나님은 결산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결산의 날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심판의 날이 옵니다. 히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한 해의 마지막 정산을 하나님께 해야 할 종착역에 서 있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주님 앞에 정산해 봅시다. 어떻게 살아오셨는가? 하나님이 맡겨주신것 가지고 얼마나 주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사셨습니까? 어떤 열매를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부끄러운 것, 잘못된 것. 아직도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옛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새해에는 새 마음으로 새로운 청지기로 칭찬받는 종들이 되시기 위해 준비하고 다짐하심으로 칭찬받는 성도, 상급과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
마 25:14-30 / 성홍모목사
미국 하버드대학의 경영학교수이며,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신 ‘로버트 K. 머튼 박사’는 마25:29절의 말씀인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본문 말씀을 가지고 ‘마태복음 효과’(Matthew effect)라는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마태복음 효과’는 ‘누적 이득의 효과’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게 되고, 적게 가진 자는 점점 더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효과는 경제뿐만 아니라, 국민소득의 양극화 현상과 빈곤의 악순환, 지식과 교육의 격차, 정보의 격차, 학과목의 실력 격차, 선점기업의 시장 독점, 마케팅의 선점 위치, 선진국과 후진국의 소득 격차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스웨덴의 대중가수로 혼성 그룹인 유명한 아바(Abba)가 불러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으며,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불려진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제목을 번역하면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라는 말입니다. 노래 중에 “The winner takes it all/ The loser standing small /Beside the victory That's her destiny”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가사를 직역하면 “승자가 다 갖는 겁니다. 패자는 초라하게 승리 옆에 서 있을 뿐이지요, 그게 운명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효과를 설명해주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효과라는 말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지역에서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고 앞서 나가면 그의 장점과 강점이 점점 더 쌓여지면서 더 크게 성공하고 발전할 수 있고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더 큰 성공을 낳는다는 주장입니다.
말콤 글래드웰이란 사람은 베스트셀러 작가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사상가 10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우리 시대의 최고의 언론인-저널리스트라고 합니다. 그의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사봐야 할 정도로 최고의 언론인입니다. 그가 지은 유명한 책으로 “아웃라이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웃라이어라는 말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말인데, 보통 사람의 수준을 뛰어넘는 특출한 사람을 ‘아웃라이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여러 분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 한 분야의 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출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를 말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 제1장의 제목이 ‘마태복음 효과’입니다. 로버트 K. 머튼 이 주장한 마태복음 효과를 설명하면서 캐나다의 하키 선수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1-3월에 태어난 선수가 40%, 4-6월에 태어난 선수가 30%, 7-9월에 태어난 선수가 20%, 10-12월 태어난 선수가 10%가 된다고 합니다. 같은 연령의 선수를 뽑는데, 1-3월 태어난 선수가 운동도 잘하고 늦게 태어난 사람들보다 능력이 많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정설입니다.
우리 속담에 “오뉴월 하루 볕도 무섭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라도 일찍 나선 사람이 더 잘 한다는 말입니다. 한 해에 태어났지만 1-3월에 태어난 아이는 10-12월에 태어난 아이보다는 능력 면에서 우수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수한 프로 선수들은 일찍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나온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효과라고 합니다. ‘아웃라이어’를 쓴 ‘말콤 글래드웰’은 그 책에서 마태복음 효과란 ‘누적적 이득의 치명적 효과’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사회의 성공한 상위 1%에 속하는 아웃라이어는 마태복음 효과의 수혜자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성경의 어떤 본문을 연구할 때는 전후 문맥을 가지고 비교하면서 이런 본문의 사건을 기록할 때에 배경이 될 수 있는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24장에서는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4-36)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회의 초대교회는 다시 오시는 주님, 재림하시는 주님에 대한 생생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라나타”를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고전16:22 하반절에 나오는데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계 22:20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을 완료형으로 번역하면 “우리 주께서 오셨다”라고 하여, 이미 이루어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며, 명령문이나 기원문으로 번역하면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으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고백 속에 주님은 이미 오셨다는 확신과 함께 다시 오시는 소망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다시 오시는 주님, 재림하시는 주님, 영광 중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는 큰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긴박한 재림만 강조하는 이들이 되지 말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맡기신 사명에 충실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무위도식하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고,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충성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종말, 지구의 종말, 우리 주님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역사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인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매일 매 순간이 종말의 가능성에 속하는 시간입니다. 하루가 지나갑니다. 한 달이 지나갑니다. 일 년이 지나갑니다. 청소년기가 지나갔습니다. 청년기가 지나갑니다. 이제는 장년이 되고,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노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성목사가 노인입니까?” 저는 당연히 노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니, 환갑이 넘었으면 노인이지요, 아니라고 한다고 무엇이 젊어집니까?”라고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세요. “성목사님은 할아버지예요”라고 합니다. “아니, 이렇게 건강한데 왜 나보고 노인이라고 합니까? 그냥 중년으로 봐주세요.” 그러나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이 숨 한번 쉬는 사이에 다 지나갔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지나갑니다. 아, 이렇게 빨리 오는 줄 몰랐다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 내일 사이에 우리의 삶을 마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서실 때에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은 사람들입니다. 21절의 말씀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5달란트 받은 자와 2달란트 받은 사람은 똑같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심판과 책망을 받았습니다.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한 부자는 오늘의 재벌가입니다.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타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라고 하니,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이것은 각자의 달란트에 차이가 있다는 것 보다는 재능이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달란트는 재능을 말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재능을 주셨습니다. 은사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벧전4:10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을 혹 있을지 모르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른 재능,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5달란트 , 2달란트, 1달란트라고 하니 차별한 것 같고, 차이가 나 보이고 상대적으로 적어보이지만 1달란트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당시에 거부의 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1달란트가 로마의 화폐로 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장정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한 사람이 6000일을 일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하면, 일 년에 안식일을 제외하고 300일 정도 일한다고 하면 한 사람이 무려 20년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하루에 품삯을 10만원이라고 하면 1달란트라고 하여도 6억 원이라는 거금을 받은 사람입니다. 말이 6억이지만 평생 만져볼 수 없는 거금이었습니다.
주인은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자기의 전 재산을 맡겼습니다. 물론 맡긴 것이지 완전히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돈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맡겼다는 말은 관리하다, 위탁하다는 뜻입니다. 맡은 자는 소유권은 없지만, 관리권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사에 대한 관리권, 청지기직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딤전1:12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직분을 맡기실 때에 충성을 보셨습니다. 충성되이 보시고, 또 알아주시고 충성된 사람으로 여기시고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충성해줄 것으로 믿으시면서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주인은 종들을 신뢰하였습니다. 거금을 맡겨놓고 여행을 다녀와도 그들이라면 충분히 잘 해낼 것이라고 신뢰하고 믿어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시는 것은 우리를 믿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어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신하지 않고 믿어주셨습니다.
고전4:2에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을 첫째도 충성이요, 마지막도 충성입니다. 오직 충성뿐입니다. 충성되이 보시고 직분을 맡겨주셨고, 맡은 자의 구할 것은 또 충성입니다.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맡은 종은 즉시 나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남겼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주인에게 받은 즉시 바로 가서 장사하여 배를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가서 일하기만 하면 배를 남기고 절대 밑지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의 일은 원금까지 까먹고 밑질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은 충성하기만 하면 배나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얼마나 남겼느냐 밑졌느냐 하는 것을 보시지 않고 충성하였느냐 불충하였느냐 하는 것만 보십니다. 이익을 남겼느냐 하는 것은 다음 문제이고, 마음을 기울이고 열정적으로 그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느냐 하는 것을 보십니다.
한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름을 악하게 보셨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 악과 게으름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시고 있습니다. 1달란트 받은 종이 책망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람의 잘못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 달란트를 떼어먹은 것도 아닙니다. 원금을 다 까먹은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맡기신 이의 뜻을 왜곡하고 불신하고 있습니다. 왜 나에게는 한 달란트냐고 언짢게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보니 그런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고 달래다보니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의 일인데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시작할 때에는 우선 앞뒤를 재지 말고 시작해야 하는데, 주인이 한 달란트를 준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하여 마음이 상하여 있다 보니 주인이 인색하고 철저한 면만 보게 되었습니다. 1달란트라는 돈도 평생에 만져볼 수 없는 거금이요, 충분히 거창한 회사를 차려볼 수 있는 거액인데 능력이 고갈 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능력을 사장시키고 있습니다. 모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일은 나가서 열정적으로 장사하기만 하면 이익을 남긴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 주인이 돌아오니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긴박한 재림만 고대하고 무위도식하는 이들에게 경계하려고 이 말씀을 주셨다는 신학적인 견해도 가지게 합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다시 다섯 달란트를 남겨 가지고 열 달란트를 주인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도합 네 달란트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온갖 변명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4-25) 이 사람은 주인을 악평합니다. 자기에게 한 달란트를 맡겨주신 인심 후한 주인을 가리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고 평가절하 합니다. 왜 주인을 몰인정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입니까?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하드필드(J.A. Hardfield) 박사는 ‘힘의 심리’라는 책에서 “난 할 수 있어! 난 뭐든지 해 낼 거야!”라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자기 능력의 500%를 발휘하지만 “난 할 수 없어, 난 별 볼일 없는 불량품이야!”라고 생각하며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자기 능력의 30%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500%를 발취하겠느냐, 30%도 발휘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과 꿈과 말과 믿음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 나라의 사업은 손해 보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해도 기대 이상으로 됩니다. 그런데 소극적인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두려워하고 손해 볼 것만 생각하니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땅에 묻어두지 말고 은행이나 취리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놓았다고 하면 이자라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악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매 맞을 일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에게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효과라는 이론을 찾아내었습니다.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30)고 하셨습니다. 이를 가는 것은 탄식하는 것이요, 후회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좀 더 열심을 낼 것인데, 내가 스스로 자승자박하였다, 자업자득하였다고 후회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같이 앉아서 예배드리고 기뻐하지만 갈라지는 날이 반드시 다가오고 있습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일꾼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슬피 울어야 하고, 바깥 어두운 데서 이를 갈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과연 잘했다고 하시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실까 하는 것을 진솔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부지런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잠22:13에 보면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잠26:15에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어떻게 내가 떠먹어야 하는가? 손을 올리기도 피곤하구나.. 그런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충성은 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충성된 사람들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맡으셨습니다. 이것이 성목사 개인의 일이라고 하면 제가 손을 빌고 다니면서 제발 서 주세요라고 하면서 다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입니다. 그러니 자진하여 들어가서 서야 합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하실 것입니까?
우리는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았습니다. 나의 생명도 잠시 맡은 것뿐입니다. 맡은 자들은 충성해야 합니다. 내가 기분 좋아서만 하나요, 억지지만 하다보면 하나님이 힘도 주시고 보람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감싸주십니다. 충성된 사람에게 더 채워주시고 심지어 빼앗아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사랑하시는 여러분, 착하고 충성된 종, 적은 일에 충성하시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최종 평가가 중요합니다
마 25:14-30 / 박덕기 목사
우리는 최근에 이동흡 헌법 재판소장 지명자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보고서도 채택하지 못한 체 끝나는가 하면, 김용준 총리 지명자는 청문회도 하기 전에, 갖가지 의혹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인 평판 때문에, 스스로 자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평판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문재인 씨와 같은 정치 지도자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 반대로 이동흡 씨와 김용준 씨처럼 잘 나가던 사람들을 몰락하게도 합니다. 국가나 회사, 교회나 개인도 평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평판의 사전적 정의는 “세상 사람들의 비평, 비평하여 시비를 판정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평판은 내가 아닌 남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보는 평가입니다. 주희진 저 “남이 써주는 나의 이력서-평판의 힘”이란 책에서, 저자는 평판은 거울이고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거울이 모든 면을 비출 수 없고, 좌우가 바뀌어 왜곡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것은 틀림이 없듯이, 평판은 한 사람의 정확한 모습은 아니지만, 엄연히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주인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듯, 평판 역시 평판의 주인공보다, 그 옆에 있는 지인들에게 더 잘 보인다고 합니다. 그림자가 과장, 축소, 굴절 등의 방식으로 왜곡되듯이, 평판도 오해, 갈등, 고정관념을 통해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판은 수레바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탈길을 탄 수레바퀴가 점점 가속도가 붙듯이, 평판은 부정적인 방향이든 긍정적인 방향이든,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판은 능력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아서의 평판도 중요하지만, 죽은 다음의 평판은 더욱 중요합니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가 사천성(四川省)의 한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입니다. 마침 그곳에는 자신의 친구 아들인 소계(蘇係)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두보는 소계에게 한 편의 시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음은 두보의 군불견 간소계(君不見 簡蘇係)라는 시입니다.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길가에 버려진 못을/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백 년 되어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만들어지며/조그만 물웅덩이 속에도 큰 용이 숨어 있을 수 있네./장부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되는 법이네(蓋棺事定). 그대는 다행히도 아직 늙지 않았거늘 … 이 시를 읽은 소계는 후에 그곳을 떠나 호남 땅에서 유명한 세객(說客)이 되었다고 합니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전유엔 사무 총창 고 다그 함마슐드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 태어날 때 모든 사람이 웃어주는 사람이 되고, 너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슬피 울어주는 사람이 되라!” 다그 함마슐드는 세계 평화의 사도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아프리카 콩고 내전을 해결하려고 현지로 날아가는 중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그만 안타깝게 서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함마슐드 총장의 서거 소식을 듣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모든 사람들은, 슬퍼하며 애도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너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슬피 울어주는 사람이 되라.”던 그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애도의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 잘 죽었다는 식의 평가를 받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호람 왕은 팔년 동안이나 유다를 다스렸지만,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빠져 나오며 죽게 되었는데, 그가 죽을 때에 아무도 아끼는 자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8년 동안이나 유다를 다스린 왕이었지만, 정작 그의 관 뚜껑을 덮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한 사람도 아끼는 자가 없을 정도로, 실패한 인생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 사람의 판단과 평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판단과 평가가 있으니, 곧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이고 주님의 최종 평가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충성된 종과 무익한 종의 결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본문을 많이 다루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달란트 비유를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0 센티짜리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자는 “난 길이와 넓이 등 뭐든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걸” 하며 재고 다녔습니다. “넌 길이가 5.4 센티야!” “넌 키가 9.8 센 티밖에 안 돼!” “넌 넓이가 6.2 센티야” “10 센티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어” 라며 무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이 10 센티짜리 자가, 항상 수치로만 남을 평가하는 점이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10 센트짜리 자는, 저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울은 무조건 자를 저울 위에 얹어놓고는 “넌 겨우 5 그램짜리구나, 짜식! 아주 가벼운 놈이 잘난 척하고 있군, 저리 비켜, 잽도 안되는 게..” 하고 비웃더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우화에 나오는 자처럼, 사람들은 항상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평가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평가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스탈린과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실로 엄청나게 큰 차이가 납니다. 악랄하기 그지없었었던 폭정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죽자 많은 구 소련인들이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스탈린이 소련을 세계가 주목하는 강한 나라로 끌어올린 지도자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가 강요한 희생보다 그들에게 심어준 자부심을, 더 높은 평가 기준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방 세계 사람들의 평가 기준에 의하면, 스탈린보다 고르바초프가 훨씬 더 좋은 지도자입니다. 고르바초프는 억압의 족쇄를 풀고, 자유를 준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를 존경하기는커녕, 그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은 냉전을 끝냈지만, 자유와 함께 혼란과 궁핍을 가져다주었고, 대국의 모습을 잃고 여러 나라로 쪼개져, 러시아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잃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평가는 보편타당성이 없고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우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인 세실이 물었습니다. “이봐, 모리스,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모리스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랍비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세실이 먼저 랍비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랍비는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기도 중에 담배를 피우다니, 그럴 수는 절대로 없다네.” 세실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리스가 말했습니다. “네가 질문을 잘못해서 그런 거야. 내가 다시 물어볼게.” 이번에는 모리스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담배를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랍비는 환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얼마든지 기도는 드릴 수 있다네.” 동일한 현상도 관점에 따라 이렇듯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판단이나 평가는 이렇듯 오류가 많습니다.
‘나’는 세 개의 ‘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보는 ‘나’가 있고, 둘째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있고, 셋째는 하나님께서 보는 ‘나’가 있습니다. 자기가 보는 ‘나’는 대개 관대합니다. “어쩌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라고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잘 시킵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정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위선에 의해서 얼마든지 남들에게 잘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는 ‘나’는 가장 정확합니다. 절대로 오류가 없고, 틀림이 없습니다. 언젠가 인생은 이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명확한 세 가지 평가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게으른 종이냐 부지런한 종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종 세람에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돌아와 평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장사하여 각각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을 책망할 때, 그에게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게을렀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한 바디로 말해서 죄악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사회신학자 Harvey Cox는 “인간의 원죄 출발은 게으름(나태함)에서부터 왔다.”고 지적합니다. 게으름은 자신도 망치고,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도 망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일곱 가지 대표적인 큰 죄악을 말할 때, 게으름을 포함 시켰습니다. 심지어 “게으른 사람의 머리는 마귀의 생산 공장이다.”는 말도 있습니다. 게으름의 본래 의미는 ‘돌보지 않음’입니다. 무책임하고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동물을 많이 먹여 기르는 농촌 부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주인 영감의 생일을 앞에 놓고, 가축들이 누가 죽게 될 것인가 간담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소-지금은 이른 봄날이라 조금만 있으면 거름을 실어 밭에 내야 하겠고, 밭도 갈아야 하겠으니, 주인이 나는 안 잡을 게야.
말-날이 점점 따스해 오면 주인이 나를 타고 여행도 가실 것이요, 또 농사가 시작되면 내가 할 일이 많이 있으니, 나는 잡지 않을 게야.
양-나는 얼마 안 되어서 새끼를 낳게 되면, 주인이 젖을 짜서 마실 것이요, 또 가을에 가서는 털을 깎아 모직을 짜서 입으실 터이니, 주인이 나는 잡지 않을 거야.
암탉-나는 지금 알을 낳기 시작했으니, 주인이 그것을 모아 두었다가 한 20여알이 되면, 내 품에 안겨 병아리를 깔 것이니, 주인이 나는 잡지 않을 거야.
수탉-주인이 내 소리를 듣기 좋아하고, 또 다른 닭들과 함께 닭싸움을 붙여 놓고 구경하시기를 좋아하시는 주인이, 정녕코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개-나는 주인의 집을 잘 지켜서 밤마다 도둑을 막으며, 또 주인이 어디를 가시든지 나와 동행하기를 좋아하시고, 또 주인의 심부름도 하느니 만큼, 나는 주인이 절대로 안 잡을 거야.
당나귀-나는 주인이 타고 다니기도 좋아하시고, 또 창고에 아직 벼가 많이 쌓여 있으니 만큼, 그것을 연자 맷돌에 찧어서 정미를 만들어 잡수시기도 하고 팔기도 할 터인즉, 주인이 나를 잡지 않을 거야.
거위-나는 개와 같이 도적놈이 오지 못하게 하고, 손님이 와도 즉시 주인에게 알리는 직분이 있고, 또 알을 낳아서 주인의 식찬이 되게 하는 중인즉, 주인이 정녕 나는 잡지 않을 거야.
고양이-요즈음은 쥐들이 새끼를 치고, 이 집 곳간과 방에 구멍을 뚫고 양식을 먹으며 의복을 쏠 염려가 있느니 만큼, 주인이 나를 잡지 않을 거야.
돼지-가만히 엎디어 여러 가축들의 얘기를 듣더니,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그러면 죽을 놈은 나밖에 없구나!” 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한 사명감이 전혀 없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이 게으르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2. 충성된 종이냐 불충성한 종이냐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와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 주인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하게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라고 했습니다.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얼마나 충성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이란 양으로 그 성공 여부를 따지지 않습니다. 신발이 크다고 다 좋은 것 아닙니다. 책이 두껍다고 다 좋은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것에 관심보다는, 충성도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면 충성이 아닙니다. 충성하기는 충성하되, 작은 일에도 충성하여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는, 큰일에도 충성하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3. 악한 종이냐 착한 종이냐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말은 올바름을 말합니다. 아무리 부지런하고 아무리 충성되게 한다하여도, 그것이 악에 대한 부지런함이고, 악에 대한 충성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악하고 선하다는 기준은 상식, 윤리 도덕, 규범, 법, 믿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의도입니다. 주님의 의도를 알아서, 주님이 원하는 대로 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고, 주님의 의도를 모르고, 그래서 주님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위대하고 큰일을 했더라도, 그것은 선한 일이 아니고,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을 명심하고 살 때, 우리의 삶과 믿음은 더욱 아름다워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 타임지의 창간자인 헨리 루스의 부인으로서, 미 하원의원과 이태리 대사를 역임한 바 있는 클레어 부츠 루스 여사는, 모든 인물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죠지 워싱턴 하면 ‘미국 독립의 아버지’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의 아버지’ 역시 한 문장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또한 ‘민권 운동의 기수’란, 한 문장으로 그의 생애가 요약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무개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그때 우리는 책 한 권의 분량으로 대답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 사기꾼이야!” 단 한 문장으로 대답합니다. “그 사람, 웃기는 사람이야!” 역시 한 문장입니다. “그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마” 한 문장입니다. “그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야” 한 문장입니다. “그 사람, 믿어도 좋은 사람이야!” 한 문장입니다. “그분,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야!” 한 문장입니다. 각 문장의 내용은 다 상이할지라도, 그러나 분명한 공통점은 모두 한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온통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들을 똑 같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타인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서도, 자신 역시 타인에 의해 한 문장으로 압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절대로 한 권의 책으로 서술해주지 않습니다. 10페이지 혹은 1페이지로도 표현해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 역시 우리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주위 사람들에 의해, 지금 도대체 어떤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노벨상을 만든 사람은 알프레드 노벨입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서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받아보니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 라고 톱기사로 쓰여 있었습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기가 죽었다고 나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설명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죽음의 발명가, 파괴의 발명가,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 죽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이것은 프랑스의 어느 기자가 동명이인(同名異人)을 오해하고, 실수로 낸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이 신문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지, 내가 죽으면 바로 이렇게 신문에 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 끝에 그는 재산을 다 바쳐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벨상’입니다. 우리가 죽고 난 후 남아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아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심판이 내려질까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극장엘 갔습니다./불이 꺼지고/영화가 시작되어/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대단원의 막이 내렸을 때/주인공에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불이 켜지고/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돌아가 버려/텅 빈 객석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내 인생이 끝나고 막이 내리면/누가 나의 인생을 위해 박수를 쳐 줄 것인가?/주님,/당신이십니까?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고, 그리고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두 종류로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로부터 “이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아!”라는 평가 대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최종 평가를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착하고 신실한 주님의 종으로 살기(To Live As The Lord’s Good And Faithful Servant)
마 25:14-21 / 김태환목사
어느 듯 올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청년 시절에는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해 보지 않았는데, 지금 저에게는 세월이 참 빠르게 느껴집니다. 똑 같은 세월이고, 똑 같은 시간인데, 왜 이렇게 세월을 맞는 느낌이 다를까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청년 시절에는 강물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진다고 하네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 강물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가 보시기에는 천 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긴 세월도 밤중의 한 시간과 같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마르는 풀입니다. 우리의 수명은 칠십 년, 힘이 있으면 팔십 년이지만, 날아가듯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깨닫게 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시편 90:4, 10-12) 이 말씀이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morning it blooms and flourishes, but by evening it is dry and withered. Seventy years are given to us! Some even live to eighty. Soon they disappear, and we fly away. Teach us to realize the brevity of life, so that we may grow in wisdom.”
우리의 인생이 짧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인생을 지혜롭게 삽니다. 반대로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 those who realize the brevity of life,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아는 사람은 성경에 있는 말씀처럼 세월을 아끼면서 삽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보람 있는 일에 투자합니다. 예전에 말씀 들렸던 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말이 생각납니다. 무엇이든 내가 살아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진 흔적을 남기는 인생을 살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은 한 해의 마지막 예배에서 함께 읽고 그 뜻을 새겨 보기에 알맞은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비유, parable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Parallel parking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자동차 면허 주행 시험 볼 때 꼭 나오는 문제지요? 시험관이 parallel parking을 해 보라고 합니다. 도로의 curb (턱)와 나란히 차를 주차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네요. 그리고 체조 경기 중에 우리 말로 평행봉이라는 경기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Parallel Bars라고 합니다. Bar가 서로 나란히 있다는 말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비유, parable이라는 말도 parallel이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는 것입니다. 어떤 영적인 진리나 교훈을 이해 시키기 위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란히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이 “아하, 그렇구나!” 하고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을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을 기록한 사복음서에는 수많은 비유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끝까지 읽으면 14절부터 30절까지 긴 말씀입니다. 이 속에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잘 사용해서 이익을 남긴 착하고 신실한 종과 그렇지 않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 속에 나오는 달란트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 보면 어떤 종에게 금 다섯 달란트를 줬다고 하는데, 마치 금화(金貨) 다섯 개를 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달란트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을 보면, 쉬운 성경에는 다섯 달란트를 줬다고만 나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이렇게 나와 있고 footnote에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에 해당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He gave five bags of silver to one”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A talent is equal to 75 pounds or 34 kilograms”이라고 친절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NLT 성경에 의하면 다섯 달란트 받는 사람은 은으로 170 kilogram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은 다섯 백 (five bags of silver)을 받았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달란트의 비유를 읽으면서 오해하거나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 주인이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두 달란트를 주고, 한 달란트를 줬느냐?” 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둔 것은 주인이 처음부터 그 종을 차별한 것이 아니냐?” 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그렇게 차별해서 나누어 준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15절에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따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적용한 기준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divides it in proportion to their abilities” “according to his own ability”라고 나와 있습니다. proportion이라는 것은 우리 말로 비율(比率)입니다. 전체를 놓고 각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나누어 줄 비율을 정한 것입니다. 총 주인이 나누어 줄 달란트는 여덟 달란트였습니다. 이것을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로 나눈 것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공평하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는 종은 가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 더 이익을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좋은 가서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 더 이익을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는 종은 장사를 하지 않고 가서 땅 속에 묻어 뒀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착하고 신실한 종 (21, 23절)”이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 (25절)” “쓸모 없는 종 (30절)”이라고 주인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우리에게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능력 (abilities)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똑 같은 과제를 주면 해 내는 사람과 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서로에게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이 사실을 쉽게 간과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이고, 불행의 원인입니다.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 드리면, 만일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줬다면 이것은 결코 공평하게 준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에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한국민의 52% 정도가 박근혜가 우리나라를 5년 간 이끌어갈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표를 줬습니다. 앞으로 대통령 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면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실망하겠지요. 그것은 문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재인은 대통령 직을 수행할 능력이 박근혜보다 떨어진다고 보고 표를 덜 준 것입니다. 앞으로 5년 후에는 국민들의 판단이 옳았는지 잘못 됐는지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달란트가 다섯 달란트인가, 두 달란트인가, 한 달란트인가 이것이 올바로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합니다. 로마서 12:3에 있는 말씀 잘 아시지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think you are better than you really are. Be honest in your evaluation of yourselves, measuring yourselves by the faith God has given us.” New King James Version에는 이 말씀이 “Not to think of himself more highly than he ought to think, but to think soberly, as God has dealt to each one a measure of faith.”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입에서 “야, 멋지다!” 하는 탄성이 나왔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지고 놀라운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이사야 9:6에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실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 (Wonderful)”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실 일들은 너무나 놀랍고 신기한 일들이기 때문에 그 아기의 이름을 “Wonderful”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름입니다. 정말 그 이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인생도 wonderful life가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가나에서 행하신 첫 번째 sign (이적)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이 맛 있는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인생도 맛 있는 포도주처럼 wonderful life로 변화됩니다.
저는 달란트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시니까 자기가 몇 달란트를 받았는지 자신을 잘 성철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운명론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운명론, 아시지요? 그렇게,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한 달란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내 운명입니다. 나는 끝까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으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운명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말씀을 읽어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운명론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도 주시고, 한 달란트도 주시지만, 로마서 12장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이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As God has dealt to each one a measure of faith (NKJV).”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a measure of faith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I have a measure of faith!”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a measure of faith”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a measure of faith”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지키고 실천할 때 우리에게 주신 “a measure of faith”가 성장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에게 “a measure of muscles”가 주어진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a measure of faith”가 있기 때문에 이 muscles를 사용하고 운동을 하면 muscles이 불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자라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gift, talent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이 자기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불어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달란트도 두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로 불어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를 읽으면서도 이 사실을 놓치면 헛 읽은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우리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달란트의 성장과 비례합니다. 이렇게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한 달란트를 그대로 땅 속에 묻어 뒀다는 말씀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a measure of faith”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처음에 가지고 있던 믿음이 전혀 성장하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참 잘했구나. 너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다. 네가 적은 것에 최선을 다했으니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21절).” “Well done, my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in handling this small amount, so now I will give you many more responsibilities.” 우리 생각하고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수고 많이 했다. 이리 와서 편히 쉬어라!” 이런 말씀을 기대하고 있는데,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책임을 벗으려고 하는데, 주님은 더 큰 책임을 맡겨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성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책임을 맡기시는 것은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인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을 맡겨 주십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착하고 신실한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는지, 오늘 주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한 해 동안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했습니까? 더 큰 책임을 맡을 수 있습니까?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를 맞는 시점이 눈 앞에 왔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길지 않아요. 세월을 아껴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다 할 때 다른 것은 하나도 남지 않고 그것만이 남습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는 주님의 칭찬을 듣는 인생을 사십시오.
가진 것은 빚이다
마 25:14-30 / 이규현목사(수영로교회)
달란트 비유는 주님께서 직접 하신 비유로,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새겨듣고 삶에 잘 적용하면 우리 인생이 흑자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흑자인생의 비결을 알려주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며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차이를 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달란트는 굉장히 큰 액수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했는데 두 사람은 맡은 돈을 배로 남겼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꺼내놓았습니다. 판결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돈을 남긴 두 사람에게는 극찬과 상급이 주어졌고, 그대로 돌려준 사람에게는 있는 것까지 다 빼앗고 굉장한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주 귀중한 교훈들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종들이 각자 달란트를 받았다는 것은 인생의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받았다는 것은 기회이지만 책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결론이 다를 것입니다. 인생은 내가 받은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가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받은 것처럼 보여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마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책임으로 본다면 많다고 무조건 좋아할 수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으로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시지 않은 것으로 따지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고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두고서라도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사실 인생을 사는 것은 시간경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기회를 주신 것이고, 인생에는 끝이 있다는 말입니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한시적입니다. 그래서 한시적으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의 한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 시간 안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붙들고 살지 않으면 시간은 공중 분해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으로 살면 안 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나 재능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최고의 결산을 남겨야 합니다. 야구를 보다 보면 삼진아웃 당하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좋은 구단에 속해있고 그렇게 멋진 유니폼을 입고 수많은 관중들의 응원을 받으면서도 야구 방망이를 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서 있다가 벤치로 들어갑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최고의 실패란 무엇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한 주인의 평가는 “악하고 게으르다” 였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내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그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받은 것은 어떻게 보면 빚을 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냥 땅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책임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인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한 것입니다. 땅에 파묻어 둔 것은 소극적이고, 게으른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주인의 책망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주어진 모든 것이 빚이라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사회인으로, 신앙인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돌보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부모와 수많은 스승들, 공동체, 앞선 선배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돌봄으로 한 사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연동에 있는 유엔 묘지는 열강 속에서 존재 자체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자유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이름 모를 병사들이 생명을 바친 것을 기리는 곳입니다. 우리가 빚을 진 것입니다. 월드비전이라는 세계적인 구호단체는 찢어지게 가난한 한국을 돕기 위해 세워진 기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요?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한국이라는 불모지에 복음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진리를 사수하며 생명을 드렸던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책은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 눈물과 희생의 대가입니다. 우리 신앙과 한국교회가 여기에 서 있는 것도 우리의 잘남이 아니고 앞선 세대의 순교와 기도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받은 사랑이고 빚입니다. 자세히 보면 나 혼자 힘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앞선 세대가 우리에게 베푼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들인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부유와 풍요와 자유를 다음 세대에 영광스럽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주는 메시지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건강도, 물질도, 재능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리나 권한도 모두 일시적으로 위탁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생명도 내 것이라고 여기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소유주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전달된 부모의 DNA도 위로 거슬러 가보면 창조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면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이 날 수 있습니다.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우리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위탁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많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고, 우리의 책임과 빚입니다. 저는 대형교회의 목사로서 시대적, 민족적, 한국과 세계 교회적인 부담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 시대 속에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이 빚을 갚아야 할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으로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빚을 잔뜩 지고 있으면서 빚진 의식을 가지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면 문제가 심각한 사람입니다. 빚이란 것이 묘한 것이 남의 물건도 빌려서 오랫동안 쓰다가 보면 내 것인 줄 알고 돌려줄 마음이 없어집니다.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빚을 진 사람들은 부담감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자나 깨나 빚을 갚는 일에 몰두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나눌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나누고, 나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이제는 공동체와 역사 속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업그레이드는 개인을 위한 삶에서 섬김의 삶으로 옮겨질 때를 말합니다. 끌어 모으는 인생에서 나눔의 인생으로, 성공 추구에서 의미 추구로, 나만을 위해 살던 인생이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살아가는 의식으로 확장될 때입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면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과 같은 거부들이 기부와 자선에 눈을 뜨고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내어 놓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자선재단을 만들어 돈만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15시간 정도를 자선을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상하게 40세 이후부터는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으로는 만족이 없고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존재론적인 목마름입니다. 성공을 추구하는 삶에서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성공이 어느 지점에 가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의미가 있는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30대까지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준비마저도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을 위해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이나 개인적 성공만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사생활에서 공생애로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삶은 유통의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며 모든 사람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주실 때 그 복의 유통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나만 혼자 꿀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유통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유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에게 좋은 정보가 있고 남보다 공부를 많이 했다면 유통해야 합니다. 나만의 학문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에게 전수해주어 내가 받은 것이고 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때 진보가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좋은 공동체를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지런히 다음 세대와 교감을 하고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나누어주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부가 있다면 이 부는 마땅히 나누어져야 합니다. 나누지 못하는 부는 썩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은 경험을 한 분이 있다면 그것을 나누십시오. 내가 했던 독특한 경험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사춘기 아이를 유달리 힘들게 키우면서 얻은 지혜와 경험들이 있다면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 나눔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냥 일어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나누고 사역의 장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성공했다면 그것을 나누십시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 그것이 곧 사역이 됩니다. 현역에서 은퇴를 했어도 평생 경험한 것을 적용해서 공동체와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갈수록 가치 확대가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 2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있는 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없는 자는 더 빼앗긴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있는 자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남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기회에 대한 태도가 인생을 전혀 다르게 만듭니다. 갈수록 쪼그라드는 인생이 아니라 갈수록 더 풍성해지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문제는 너무 자기 생각이 많다는 점입니다. 자기 이론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주인에 대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행동했습니다.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모습을 이 사람에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다가 끝낼 위험이 높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바라볼 때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머뭇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손해를 많이 봅니다. 마귀는 늘 “다음에 해”라고 자꾸 멈칫하게 만듭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갑니다. 무엇을 하든지 쉽게 시작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감동이 온다면 단순히 생각하고 그냥 시작하십시오.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우리에게는 언젠가 결산의 날이 옵니다. 내가 아무리 기가 막힌 경험과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하지만,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좀 더 쉬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수명을 단축하는 일입니다. 400명을 대상으로 임상연구를 했는데 200명씩 나누어서 한 그룹은 계속적으로 건강검진을 하며 건강에 세심한 신경을 쓰도록 했고, 한 그룹은 전혀 건강에 대한 체크 없이 그냥 열심히 주어진 일을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결과를 보니, 정기적으로 건강 점검을 하고 건강에 신경을 쓴 그룹보다 그냥 열심히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살았던 그룹이 훨씬 더 오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에 대한 초점은 내 건강만 지키려고 애를 쓴다고 건강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부지런히 살다 보니 건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많은 질병들은 편안함을 추구한 산물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해 부지런히 섬기는 일을 할 때 건강이 저절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몸도 자꾸 써야 합니다. 힘도 쓸수록 생깁니다. 인간의 능력은 대단해서 쓰면 쓸수록 개발이 됩니다. 은사도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거두어가시지만, 나눌 때는 배가 됩니다.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 기계와 마찬가지로 감가상각이 이루어집니다. 육체적인 감가상각은 40세가 넘으면서 급속도로 진행되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십시오.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게 하옵소서.” 조지 휫필드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에 주어진 한시적인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직업적으로는 퇴직을 할 수 있지만, 소명에는 퇴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할 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전에는 생존 때문에 마지못해 살아왔다면 이제는 주도적으로 선택하며 새로운 일들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도 그냥 죽으면 안 됩니다. 손가락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마지막 날까지 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책임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아름답고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나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마음 놓고 기쁨으로 다니고 싶은 교회를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존중히 여김을 받고 세상에 감동을 주는 명예로운 공동체로 다음 세대에 남겨 주어야 합니다. 지금 좋은 교회가 아니라 갈수록 더 좋아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때 좋은 교회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더 좋은 교회로 자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거나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할 일이 있을 수 있고, 교회 바깥, 내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서, 자신의 재능과 직업, 혹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젊은 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고 연세가 드신 분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령화 시대로 70세도 젊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할 일이 없다면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찾으면 많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조직의 틀 안에서 누가 권한다고 억지로 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사역 박람회는 단순히 교회에서 일 좀 하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나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내가 직분이 있어서 마지못해 조직에 밀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사역에 참여하라는 독려도 아닙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통해 내 인생에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생존이 아니라, 정말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면서 후회 없이,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관심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팀을 이룰 때 이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인생의 전환을 하는 기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회들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 중에 의미 없이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숙자 사역을 오래 하셨는데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숙자를 끌어안고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냄새 맡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사역에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인생의 불행마저도 내 인생을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남다른 고난을 당했다면 그 고난은 이유가 있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우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어떤 부분에 매우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부르심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과 경험과 건강과 은사도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며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공공의 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해서, 가면 갈수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본문 29절 말씀처럼 가면 갈수록 더 부유하고 풍성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취미생활, 오락, 여행도 하지만 그것들은 한순간이지 계속적인 만족과 기쁨을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나의 소명을 붙잡지 않으면 어느 날 인생의 의미를 잃습니다. 고든 맥도날드의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에서 은퇴한 노인이 주일학교 아이들이 연극을 하는 뒤편에서 소품을 정리해주는 봉사를 했습니다. 그분은 미래에 그 아이들이 세상의 주역이 될 것을 꿈꾸며 그 봉사에 한없는 기쁨과 보람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매우 짧고 한시적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인생을 평가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그 일에 내 인생을 걸고 헌신하고, 죽는 날까지 열망을 가지기 바랍니다. 그럴 때 행복한 사람, 성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짧은 인생에 머뭇거리지 않고, 쏟아 부을 수 있는 일에 헌신하며 갈수록 풍족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꼭 들어야 하는 소리
마 25:14-30 / 고신일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주안에서 평안한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류소설가 소노 아야코가 쓴
「계로록(戒老錄)-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에서는
노년기의 마음가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 자신의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 말라.
- 젊은 세대는 나보다 바쁘다는 것을 명심하라.
- 새로운 기계 사용법을 적극 익혀라.
-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주면 내가 늙었다는 것을 자각하라.
- 여행지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행은 많이 할수록 좋다.
<송길원의 요즘생각 - Family Today, 2008년 2월호 참조.>
이 글을 일찍 읽었더라면 실수(?)하지 않았을 것을 …
저는 몇 년 전 할머니들을 크게 노엽게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효도관광을 간다고 하기에
연세 많으시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교회에서 식사 대접을 하고
조금 덜 불편하신 분들은 모시고 여행을 가게 했습니다.
그로부터 할머니들의 원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밥 못 먹는 사람이냐, 자기들끼리만 여행가고 …
교회에서 밥이나 먹으라니 …’하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때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한번 할머니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 뒤로는 효도관광을 갈 때 모든 노인들을 모시고 가며
만일을 대비하여 들것까지 준비하여 갑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자동차도 한 대 더 따라갑니다.
사실 어떤 일에 제외 되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인생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큰 적은‘포기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포기하고 ‘나는 제외되었다’라는
자기절망에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저는 그때 할머니들을 보면서‘절대로 제외시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세가 얼마나 되셨든지 오늘 같은 시대에 살면 동시대의 사람입니다.
연세가 드신 분도, 어린 사람도 … 늙는 것도, 신앙생활도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과 “우리는 동시대의 사람입니다. 잘 살아봅시다.”라고 인사하십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충성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믿어 구원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 백성 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따라
우리를 살게 하시고, 우리 각자의 재능에 따라
세상에서 감당하며 살아야 할 일/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고, 일 맡김을 받은 우리들은‘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보면,
“ …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은 헬라어로 ‘피스티스’입니다.
이 단어는 ‘믿음’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뜻은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결같음’입니다.
영어에서 “Faith”가 믿음이라면,
충성은 “Faithfulness”로 충실/성실/정확함/틀림이 없음
‘믿음직한 것’과 뜻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 같이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이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업을 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직원으로 두고 싶습니까?
“한결 같은 사람, 믿음직한 사람”을 두고 싶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 부지런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부지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두 번 깔끔하게 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깔끔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두 번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계속 예의바른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결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나 좋아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뜻을 위해 사람을 찾아 일을 맡기신다면 …
어떤 사람을 찾겠습니까?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변함없는 신실한 사람, 믿음의 사람을 찾아 일 맡기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스스로 ‘나는 그런 사람인가?’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달란트 비유입니다.
한 주인이 타국으로 가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자의 재능대로, 실력대로, 능력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
어떤 사람에게 금 다섯, 어떤 사람에게는 금 둘,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과 둘을 받은 종들은 바로 가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감추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이 그 앞에서 회계(계산)를 합니다.
다섯을 받은 사람은 다섯을, 둘을 받은 자는 둘을 남겨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받은 종은 주인에게 받았던 한 달란트만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주인은 열심히 일하여 남긴 종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며 칭찬하며
맡겼던 것과 남긴 것 모두를 그들에게 주어 소유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받은 것을 땅에 묻어 두었던 종은
‘무익한 종,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하고
가진 것을 빼앗아 충성된 종에게 주고 내쫓았습니다.
충성은 주인의 뜻/마음/원하심을 잘 헤아리는 것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갈 때 큰돈을 맡긴 것은
그 재산을 손해나지 않게 잘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관리하여 열매를 맺게 하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을 장사하여 …”라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와 같이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제대로 아는 종은
지체할 것 없이(바로 가서) 주인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돌아와 회계할 때,
“ …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25:24) 했습니다.
여기서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a hard man’- NIV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냉혹한 사람/인색한 사람/구두쇠’라는 뜻입니다.
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인색한 구두쇠’라고 생각했을까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는데
자신은 한 달란트를 받은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주인이 각자의 재능에 맞게 구별하여
달란트를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다보니
자신의 한 달란트가 초라하고 하찮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주인을 인색한 사람으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34.27kg입니다.
금 한 돈이 3.75g이니까 한 달란트는 대략 9,138돈 정도 됩니다.
요즘 금값이 많이 올라서 한 돈에 11만 원 정도 된다는데 …
금 한 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10억이 넘는 큰돈입니다.
10억을 받고도 ‘뭐 이만큼만 주나?’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다 초라해 보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은사는 각양각색입니다.
어떤 이는 노래를 잘하고/악기를 잘 다루고/
음식을 잘 만들고 어떤 이는 상담을 잘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마음에 상처 받아 눈물 흘리고 삐죽거리다가도
어떤 권사님만 만나면 다 해결되는 분이 있습니다.
특별한 은사를 가진 분입니다. 어떤 분은 사람들이 꼬입니다.
그분이 가는 곳에 사람이 모입니다. 그런 분은 흡인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잘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런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살아가면 될텐데 …
다른 사람이 가진 재능만 바라보고
자기를 초라하게 여긴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어느 것은 좋은 것이고, 어느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 보면, (344면 펴세요)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천하게 쓰인다, 귀하게 쓰인다’는 말은 값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그릇에는 고기를 담고, 어떤 그릇에는 나물을, 된장, 콩장을 담듯이
각기 다르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금으로 만들었어도 깨끗하지 못하면 쓰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깨끗하면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요즘 건강식을 주는 곳, 좀 값이 비싸고 영양가 있는 식당에 가면
나무 밥그릇에 밥이 담겨 나옵니다.
꽤 괜찮은 식당에 가면 놋그릇에 밥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릇이 얼마나 깨끗하냐에 따라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쓰임 받는 귀한 그릇과 같은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나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나
동일하게 “충성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어떤 일에 “적은 일에”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적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다른 것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충성은 ‘다 짜내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여러 번 설교하신 피어스 박사는,
은퇴하여 농촌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젖소를 사서 기르는
한 도시인의 실패담을 즐겨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도시인은 소를 산지 얼마 안되었을 때
젖소의 젖이 마르자 이웃 농부에게 그간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젖소의 젖이 마른 이유를 알고 도시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자기에게 그날 필요한 만큼의 젖만을 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병이 필요하면 한 병만 짜 마셨고
별로 우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짜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만 짜는 것이 젖을 마르게 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젖소는 젖을 짤 수 있는 만큼
최대한도로 짜내야 계속 더 많은 신선한 젖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마치 그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다 짜내는 것, 다 쓰는 것이 충성입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 옛날 젊을 때, 기운 좋았을 때
‘이다음에 늙어서 힘드니까’하면서 아꼈던 힘 지금 쓰십니까?
지금 건강한 것, 지금 돈 있는 것, 지금 능력 있는 것 …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금 안 쓰면 나중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지금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모든 것을 짜내는 것’ 그것이 충성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가진 건강, 가진 돈, 가진 능력, 가진 실력 가지고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나의 것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이라는 것은 지금 맡겨진 일에 대해
‘남의 일처럼 하는가’, ‘자신의 일처럼 하는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충성된 종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일처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관심과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심지 않는 데서 거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는
지키고 있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골치 아프게 왜 나한테 맡겨, 갖고 있기 귀찮은데 …’하면서 땅에 묻은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아니 왜 나한테 여선교회를 맡겨 …
안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속회 잘 모이지도 않는데 … 왜 내게 맡겨 … ”하는 사람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받았던 것을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5)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여러분이 해야 되는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십니까?
다른 교회에서 우리교회 방문을 많이 합니다.
기둥교회 주차안내/예배안내/병원심방/
장로님들 새벽부터 나오셔서 일하시는 것 … 등을 보시기 위해 많이 방문하십니다.
여기 저기 돌아보다가 각 부서마다 조끼 색을 다르게 하여 입고 봉사하는 것을 보고
견본으로 조끼를 빌려 달라고 해서 가져가시면서
참고하고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한 번도 돌려받은 적이 없습니다. 가져가면 끝입니다.
아무튼 많은 분들이 오셔서 이런 저런 칭찬을 많이 합니다.
주차안내, 예배안내, 장로님들 병원 심방하는 것에 대해 감동하고,
기둥교회 장로님들이 주일 새벽부터 나와
하루 종일 봉사하는 것에 대해 감동하고 칭찬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교회 부흥회에 가면 목사님들이
“기둥교회 장로님들이
새벽부터 나와 일하는 것에 대해 많이 얘기 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 많이 하니까 장로님들끼리 모여서
“기둥교회 고신일목사님 부르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교회 칭찬 받는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식당음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식사해보신 분들은 한결같이 맛있다고 합니다. 진짜 맛있습니다.
비싼 음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반찬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맛있습니다. 왜일까요? 여러분, 토요일에 나와 보세요.
여선교회 회원들이 토요일에 나와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합니다.
주일이면 1,000명 가까이 먹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자기가 먹고, 자기의 가족이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 때문에 맛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구석구석에서 섬기는 분들 보세요.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둥교회가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느냐,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천지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록펠러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최고 부자는 ‘빌 게이츠’라고 하는데
빌 게이츠가 번 돈을 다 합쳐도 록펠러가 번 돈의 반도 안된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록펠러가 가장 신임했던 사람 중에 하나인 아치볼드(Archibald) 는
본래 Standard Oil의 말단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일에 대한 성실과 열정으로 자기가 일하는 회사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며 일했습니다.
아치볼드는 출장 가서 호텔에 묵을 때면 숙박부에 자기 이름을 적고
그 옆에 ‘한 통에 4달러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문구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의 이런 행동을 조롱했지만
그는 자신의 작은 이 일이 반드시 회사에 큰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로 출장을 간 아치볼드는
밤이 늦어서야 방에 들어왔는데 숙박부에 이름만 쓰고 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려가 종업원에게 숙박부를 달라고 해서
‘한 통에 4 달러 스탠더드 오일’이라고 적었습니다.
그 때 한 신사가 유심히 그의 행동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왜 그런 문구를 넣지요?”
“저희 회사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한 달쯤 지나
아치볼드는 자신의 회사 회장에게 특별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회장이 바로 호텔에서 만났던 록펠러였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록펠러는 그의 열정을 칭찬하며 본사로 불러들였고,
아치볼드는 스탠더드 오일을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강준민,『성품 속에 담긴 축복의 법칙』에서 인용>
하나님께서도 맡겨진 일을 자기의 일처럼
열정과 기쁨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시면 감동하십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삶이/섬김이 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부터 충성해야 합니다.
본문의 주인은 일꾼들에게 많이 남겼다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칭찬했습니다.
하나님은 큰일을 해내는 것보다
작은 일에 어떤 자세로 충성하느냐를 관심 있게 보십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 하는 것을 보면
큰일도 어떻게 할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처음부터 큰일을 맡겨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충성심은 갑자기 화려하고 큰 일이 맡겨졌을 때,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 꼭 대단한 일을 이뤄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삶의 가장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충성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6:29)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
예수 믿는 사람으로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
시간과 몸과 정성을 드려 봉사하는 것,
하나님의 것을 정직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이고
우리가 갑절을 남겨야 할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소속되어 있는 자리에서부터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으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아내로,
부모로 자식으로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향기 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그만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돈은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의 이름으로 베풀고, 예수 향내 풍겨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신실하게 사십니까? 저를 보세요.
제가 운전할 때 교통신호를 잘 지킬 것 같습니까? 아닙니까?
잘 지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볼 때만 잘 지킵니다.
지난 주중에 밤 11시까지 교회에 있다가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집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고 그 앞에 신호등이 있습니다.
밤 11시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없습니다.
골목길이라 보는 사람도 없고 해서 …
빨간 신호등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냥 지나갔습니다.
평상시에는 … 빨간 신호가 나오면 제가 늘 서 있었습니다.
믿어 주세요. 그러나 그날은 피곤하여 … 아무도 없어서 … 신호를 위반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제 아들이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민망하던지 …
아들이 뒤에 따라오면서 ‘아버지 … 위반 하는구나!’했겠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신실하게, 정직하게 바르게 사는 것 … 힘들고 어렵습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 저녁 허경제 목사님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 것처럼 항상 그 끝이 떨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 지남철의 바늘 끝이 떨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 고민이요 갈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남철이 떨고 있는 한 그 나침반을 믿어도 되지만
반대로 바늘 끝 움직이지 않고 어느 한쪽에 고정되어 있으면
그 나침반은 고장 난 것이랍니다.
떨지 않는 바늘은 이미 자석의 힘을 잃어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북극을 가리키려는 그 버팀, 갈등, 떨림 … 이 우리들의 삶에도 있는지요?
성경말씀 기준으로 살려고 할 때 세상적인 방법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럴 때 갈등합니다. 고민합니다. 떨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하는데,
성경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야 하는데 세상이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마다 떨림이 있는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부르신 성도들에게
사명을 허락하시고 감당할만한 달란트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끊임없이 곁길로 가도록 유혹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때 떨림을 가지고 갈등하고, 긴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우리가 꼭 들어야 하는 소리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칭찬의 주인공이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