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이여, 전설이 되어라. 한국야구위원회 공식 기록업체인 스포츠투아이의 프로모션 ‘Be The Legend’의 슬로건을 만든다면 이렇지 않을까. 한국야구위원회 공식 어플리케이션의 메뉴 중 하나로 진행되는 이 프로모션은 9개 구단의 선수 중 안타를 칠 것 같은 선수 한 명을 골라 40경기 연속으로 맞추면 상금 4억 원이 지급되는 시스템이다. 참여 방법도 쉽고 상금도 유혹적이지만 무엇보다 여기엔 야구팬들이 좋아할 만한 승부의 모든 요소가 담겨 있다. 타율이나 투수와의 상대전적 등 스탯을 고려해 전략을 짤 수 있고, 연속으로 맞추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한 번이라도 틀려 기록이 리셋될 긴장감은 더더욱 커진다. 무엇보다 가뜩이나 집중해서 보던 야구를 더더욱 열띠게 보게 된다. 심지어 딱히 우리 팀 경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과연 이것은 야구 보는 즐거움과 야구 보는 스트레스, 둘 중 무엇을 더 자극할까. 만년 기아 타이거즈(이하 KIA) 팬으로서 어느 정도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자부하는 W 기자가 직접 체험해보았다.]
5월 24일 (토)요일 - 첫 경험
정말 이놈의 KIA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 오늘 안타를 칠 선수를 고르며 ‘Be The Legend’가 ‘Top Picks’로 추천해준 롯데 자이언츠(이하 롯데) 손아섭을 고른 건 단순히 그의 이름이 메뉴 맨 위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상대가 KIA 아닌가, 기아. 꼴찌인 LG 트윈스(이하 LG)에 2연패 해 위닝시리즈를 내주고 롯데에도 이미 한 번 져 3연패를 달리던 KIA라면 손아섭의 방망이에 떡갈비 다지듯 다져지지 않겠는가. 심지어 투수는 양현종도 아닌 평균자책점 5.89를 기록 중인 임준섭. 그래, KIA야. 너희가 이렇게라도 나를 도와줘야지. 생각하면 할수록 상금 4억을 위해서라면 좋아하는 팀에 연연하지 않는 나의 승부사 기질에 스스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질 KIA 경기를 보며 화날 확률은 줄어들고, 혹여 손아섭의 안타에도 불구하고 기아가 어찌어찌 이기면 그건 그것대로 일석이조 아닌가.
그리고 이날, 임준섭은 거짓말처럼 인생 최고의 호투를 펼쳤다. 5.2이닝 동안 피안타는 단 두 개, 1실점 했지만 그것도 비자책점. 믿었던 손아섭은 4타수 무안타. 왜 그래, 너희. 왜 이럴 때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그리고 왜 난 우리 팀이 이겼는데 웃질 못하니.
5월 25일 (일)요일 - 재도전
당연히 성공하리라 믿었던 첫 도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금은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심을 지우고 계산을 하더라도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구나. 하지만 그럴수록 흔들리지 않을 원칙을 세우는 게 필요했다. ① ‘Top Picks’에서 추천하는 선수를 덜컥 고르진 않는다. ② 최근 페이스를 고려하되 평균타율 3할 이상의 선수만을 고른다. ③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하는 팀에서는 고르지 않는다. ④ 이것저것 계산할 시간이 없을 땐 4할대를 치고 있는 SK 와이번스(이하 SK) 이재원을 고르자. ⑤ 어쨌든 KIA 선수를 고를 일은 없을 것이다. 굳건한 원칙을 세우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쉽게 좌절하지 않고 실패를 디딤판 삼아 성장하는 나의 승부사 기질에 스스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의 승부수는? 이재원, 그냥 볼 것 없이 무조건 이재원.
그리고 나는 ‘Be The Legend’ 첫 성공을 기록했다. 같은 날 KIA의 김진우는 9개월 20일 만에 선발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됐지만 이날 내 마음속 MVP는 이재원이다.
5월 26일 (월)요일 - 야구 쉬는 날
내 마음의 평화. 진정한 안식일.
5월 27일 (화)요일 - 2 Combo 도전
실패도 경험해봤고 원칙도 세웠고 원칙을 지켜 성공도 해봤다. 이제 거칠 게 없다. 40회에 4억이니 1회 성공에 이미 천만 원이 입금된 기분이다. 앞으로 39회만 더 성공하면 4억이다, 4억. 기자 일을 하면서 30대 중반에 억대 자산가가 될 수 있다니, 이제 결혼정보업체 순위도 올라가겠구나. 하지만 꿈에 부풀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도 잠시, 이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냉정한 승부사로 돌아와야 했다. 어쨌든 한 번 성공을 하고 나니 좀 더 여유 있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KIA를 상대하는 두산 베이스(이하 두산)의 불꽃 타선에 눈길이 갔겠지만 오늘의 투수는 양현종이다. 상승세가 좋은 타자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너지기 쉬운 투수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다. 자연스레 눈길이 레이예스가 출전하는 SK로 옮겨갔다. 상대는 ‘Top Picks’ 서건창을 보유한 넥센 히어로즈(이하 넥센). 그래, 서건창, 오늘은 너다.
예상은 적중했다. 레이예스가 5이닝 동안 7자책점을 기록하고 마무리 고효준까지 얻어터지는 동안 서건창은 무려 5타수 3안타로 팀 승리를 이끌었다. 3회에 서건창이 3루타를 치는 순간, 고백하건대 최근 야구를 보며 이토록 크게 환호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와, 얘들은 이렇게 호쾌한 야구도 하는구나. 만날 KIA 야구만 보니 이런 게 있는 줄 알았나.
5월 28일 (수)요일 - 바쁨
뭐야. 벌써 7시? 바쁜 외근 일정을 마치고 그럼에도 일을 마무리 하려 회사에 들어와서야 시계를 볼 수 있었다. 아니 대체 나는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일하느라 경기 시작 전에 오늘의 선수 뽑는 걸 잊고 있었던 걸까. 경기 분석할 시간까진 없어도 잠깐 접속해서 하다못해 이재원이라도 찍을 시간은 있었을 텐데 대체 뭐하느라 이런 실수를 저질렀나. 아니, 내 탓이 아니지. 왜 이 게임은 굳이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만 선수를 고를 수 있게 하나. 그 시간이 직장인에게 얼마나 바쁜 시간인지 몰라? 그냥 자정부터 등록할 수 있으면 집에서 맥주 마시면서 자기 전에 시도할 수 있는 거잖아. 순간의 방심으로 2 Combo를, 2천만 원을 날려 보낸 것에 분노하며 생각했다. 기분도 더러운데, KIA 너희라도 오늘은 좀 이겨주라.
그리고 이날 기아는 두산과의 경기에서 6대3으로 이기다가 9회초에 거짓말처럼 10대6으로 역전당해 지고 말았다. ‘참을 인’ 천 번이면 KIA 팬이 된다.
(중략)
6월 2일 (월)요일 - 이거 계속 해야 하나?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KIA를 상대로 한 두산의 민병현에게 걸어 다시 성공했지만, 그다음 날 방어율 6.00의 넥센 하영민에게 LG의 이진영은 안타를 뽑아내지 못했다. KIA를 실컷 두들기고 돌아온 두산을 역시 실컷 두들겨준 롯데에 기대 손아섭으로 다시 한 번 성공하며 천만 원 적립은 개뿔, 그렇다고 손아섭과 기아 마운드를 믿었다가 실패한 첫 경험이 잊히진 않는다. 그 날 그 날의 선발 라인업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타자들의 상대 전적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건 야구를 즐기기 위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게임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세이버매트릭스고 뭐고 다 관두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니, 이젠 그만하자. 나 KIA 팬이라고. 이미 충분히 힘들다고.
그런데 (화)요일 경기 선발은 언제 나오지?